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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식어 그리고 ‘맑다’와 ‘흐리다’
명사와 동사만으로도 하나의 문장이 가능하지만, 모든 음식에 양념을 넣지 않으면 맛이 없듯이 사람이 사용하는 말도 맛깔나게 표현하려면 수식이 필요하다. 수식어는 수식하는 말의 앞에 놓이느냐 뒤에 놓이느냐에 따라 맥락에 차이가 있어서 전달하려는 의미가 다르게 표현되기도 한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언어 중에는 수식어의 위치가 같은 언어가 있고 다른 언어가 있다. 언어별로 수식어의 위치에 따른 맥락의 차이가 존재할까? 그런 차이가 언어 사용자의 감수성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닐까? 내게는 이런 것들이 관심의 대상이고 연구 주제이다.
한국어는 수식어의 대부분이 수식하는 말의 앞에 놓인다.
오늘 문득 고구마가 먹고 싶어 이미지 검색을 해보니 물고구마, 밤고구마, 자색고구마, 흰고구마, 군고구마, 찐고구마, 삶은 고구마 등 고구마라는 명사 앞에 다양한 수식어가 붙어 있었다. 이럴 때 수식어의 영향은 고구마의 성격이나 모양이나 맛의 차이를 규정한다. 고구마의 정체성이 여러가지 내용으로 달라지는 것이다. 크메르어는 모든 수식어가 수식하려고 하는 말의 뒤에 놓인다. 고구마물, 고구마밤, 고구마자색 등의 형식으로 고구마라는 정체성은 변함없이 그대로 두고 성격이나 형태를 설명하는 방식이다. 보기에 따라 그게 그것 아니냐고 할지 모르지만, 뭔가 달라보인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가끔 나는 누구이고 어떤 사람인가를 생각할 때가 있다.
나라는 정체성을 규명하기 위해 모든 수식어를 앞에 놓아본다. 나는 키가 큰 사람인가, 표정이 밝은 사람인가, 노력하는 사람인가, 게으른 사람인가, 명랑한 사람인가, 우울한 사람인가, 항상 생각이 많은 사람인가. 나를 수식하는 말을 앞에 놓으면 나는 케멜레온보다 더 다양한 색깔의 사람이 되고 만다. 무엇이 나를 여기까지 이끌고 왔을까, 어떤 것이 정말 나를 존재하게 하는 것일까. 불변의 나를 앞에 고정시켜 놓고 수식하는 말을 뒤에다 열거하고 싶다. 그렇게 하면 단순히 나를 수식하는 말은 언제든지 붙였다 띄었다 할 수 있지 않을까?
쯔바(맑다)와 뽀뽁(흐리다)
멀쩡하게 맑은 하늘이 보이다가도 갑자기 검은 구름이 드리우며 비가 쏟아지는 계절, 우기를 실감하고 있다. 하루에도 서너 번 쯔바와 뽀뽁을 경험한다. 예전에 비해 내리는 비의 양이 많지는 않다고 한다. 비가 내린 직후에는 대지의 열기가 잠시 식는 듯 하지만, 이내 다시 뜨거워지기를 반복한다. 에어컨이 가동되는 실내와 열기가 가득한 실외의 기온차가 크다. 맑은 하늘이었다가 갑자기 비가 내릴 때 천둥과 번개를 동반하는 것은 어디나 같다. 그럴 때 아주 잠깐씩 단전이 되기도 한다. 하늘이 마술을 부릴 때가 많다.
맑음과 흐림이 어찌 날씨뿐이겠는가?
오늘은 정신이 맑아서 생소한 단어들의 뜻과 발음이 귀에 쏙쏙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자꾸 이곳의 날씨를 닮아가는지 정신도 맑았다가 흐렸다가를 반복한다. 공부가 잘 되는 시간이 있고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뭐가 뭔지 헷갈리는 시간이 있다. 맑은 날은 단어와 문장이 토막토막 끊어지지 않고 줄기와 줄기가 이어져서 외우기가 쉽다. 이런 날은 크메르어가 한국어와 음운과 어순의 체계가 다르다는 점을 쉽게 간파한다. 유달리 웃음과 질문이 많은 날이다. 정신이 흐린 날의 공부는 힘들다. 눈에 가득 졸음이 쏟아질 때 밖에서는 빗소리가 후두둑 거린다.
매일매일 마음의 상태가 균형과 조화를 이루면 좋겠다.
맑은 날이 계속되는 자연의 날씨는 없듯이 사람도 마음의 상태가 늘 맑으면 좋겠지만,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에서 그건 존재하지 않는다. 아주 잠깐씩 흐리고 단전이 되더라도 곧바로 다시 전기가 들어오듯 사람의 마음도 금방 다시 맑음의 자리로 돌아올 수 있다면 좋겠다. 흐린 날이나 흐린 시간의 비중을 높지 않게 관리하는 것도 자신이 스스로 조절하는 능력이 있어야 함을 안다. 어디서 무엇을 하든 뭔가를 배워야겠다고 마음 먹으면 도처에 있는 것들이 다 생각과 행동의 스승이고 수양과 연마의 대상이다.
▲한복을 입고 신입생 환영식에 참석중인 캄보디아 민쩨이국립대학교 한국어과 신입생들
김삼환 시인
김삼환 시인
1958년 강진 출생. 세종대학교 영문학과.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예술경영학과, 한양대학교 대학원 문화콘텐츠학과 박사과정 수료. 외환은행 지점장 등 역임. 은퇴 후 한국어교원으로 우즈베키스탄과 캄보디아 대학에서 활동. 1991년 <한국시조> 신인상 등단 후 한국시조작품상, 중앙시조대상 등 수상. 시조집 『묵언의 힘』 등, 시집 『일몰은 사막 끝에서 물음표를 남긴다』 등 다수 출간. h3wan58@naver.com
[출처] [김삼환 시인의 '한국어와 함께 한 730일의 기록'](4) <수식어 그리고 ‘맑다’와 ‘흐리다’> ♣ 웹진 《문예마루》제2호(2025. 12)|작성자 문예마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