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詠嶺南大學校十景
(영남대학교의 열 가지 경치를 노래함)
홍우흠 명예교수
[01] 公山翠屛(푸른 병풍과 같은 팔공산)
嶪岌公山翠靄中, 아지랑이 속에 우뚝 솟은 팔공산,
愛看屛嶂立蒼空. 창공에 세워진 한 폭의 병풍이로다.
精靈凝聚化人傑, 공산의 정령 어리어 인걸로 화했는가,
護國聲華冠海東. 호국 의사 명성이 해동에 으뜸일세.
푸른 병풍 앞에서
늦은 오후였다. 햇살은 말없이 베란다 끝까지 밀려와 마룻바닥에 가느다란 금 하나를 그어 놓고 있었다. 나는 식어 가는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싼 채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늘 그 자리에 있는 팔공산이 있었다. 멀리서 바라본 산은 하늘과 땅 사이에 오래전 누군가 세워 둔 한 폭의 병풍 같았다. 바람이 불어도 물러서지 않고, 구름이 걸쳐도 제 모습을 잃지 않는 푸르고 깊은 침묵의 병풍이었다.
산은 언제나 말이 없다. 그러나 오래 마음을 붙드는 것은 대개 말이 없는 것들이다. 능선은 아무 말 없이 하늘을 떠받치고, 숲은 아무 말 없이 계절을 품는다.
문득 생각했다. 저 산이 단지 흙과 바위와 나무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면, 저 푸른빛 속에는 오래전 이 땅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내어준 사람들의 숨결도 함께 스며 있는 것은 아닐까. 이름을 남긴 이도 있었겠지만 이름조차 없이 사라진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누군가의 내일이 무너지지 않기를 바라며 자신의 하루를 조용히 내어준 사람들. 그들의 땀과 기도와 눈물이 저 산의 청록빛 속에 스며 오늘도 저토록 깊은 색으로 살아 있는 것은 아닐까.
그 생각이 미치자 내가 누리고 있는 이 평범한 오후가 더 이상 평범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산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간, 창문을 열면 두려움보다 바람이 먼저 들어오는 저녁, 사랑하는 사람의 안부를 걱정 없이 기다릴 수 있는 하루. 한때 나는 그것이 내 힘으로 얻은 삶의 결과라고 믿고 싶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내가 모르는 사이 나보다 먼저 살아간 누군가가 긴 시간을 견디어 주었고, 무너질 자리를 대신 버텨 주었으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를 위한 병풍이 되어 주었기에 가능한 평화였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사람은 조금 작아진다. 아니, 작아진다기보다 비로소 자신의 크기를 알게 된다. 나는 혼자 여기까지 온 사람이 아니었다. 내 삶은 수많은 침묵 위에 세워져 있었다. 부모의 기도, 이웃의 선의, 선조들의 희생, 시대를 건너며 끝내 무너지지 않으려 했던 이름 없는 인내. 팔공산은 그 모든 시간을 품은 거대한 상징처럼 서 있었다. 그래서 나는 산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나를 가능하게 한 보이지 않는 어깨들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마음에 잠기곤 했다.
바람이 화분 잎을 스치고 지나갔다. 작은 잎들이 흔들리는 모습을 바라보니 산이 내게 조용히 가르치는 것만 같았다. 크게 드러나지 않아도 된다고. 높이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다만 오래 제 자리를 지키며 누군가의 삶에 바람을 막아 주는 한 겹의 병풍이 되어 주는 것, 그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를. 세상은 늘 눈부신 것들을 칭찬하지만, 정작 한 사람을 끝내 살려 내는 것은 눈에 띄지 않는 보호와 오래 견디는 사랑이라는 사실을 산은 묵묵히 제 몸으로 증명하고 있었다.
해가 기울 무렵 팔공산은 점점 보랏빛으로 잠겨 갔다. 낮 동안의 푸름은 먹빛 속으로 스며들고, 능선은 한 폭의 수묵화처럼 깊어졌다. 나는 창가에 앉아 저녁이 산 위에 내려앉는 모습을 오래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조용히 허리를 숙였다. 저 산에게가 아니라 저 산처럼 살아간 모든 존재들에게, 내 삶을 여기까지 밀어 올린 보이지 않는 손들에게, 내가 모르는 사이 나를 위해 바람을 막고 어둠을 견디어 낸 모든 푸른 병풍들에게.
그날 저녁 나는 하나의 다짐을 품었다. 감사는 아름다운 감정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진정한 감사는 내일의 삶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을. 누군가의 희생 위에 놓인 평화를 누리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제는 나 또한 누군가에게 작은 병풍이 되어 주어야 한다는 것을. 크지 않아도 좋다. 거창하지 않아도 좋다. 한 사람의 바람을 막아 주고, 한 사람의 하루를 지켜 주며, 한 사람의 마음이 무너지지 않도록 곁에 서 있는 존재. 어쩌면 인간의 성숙은 바로 거기에서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밤이 오기 전 산은 마지막 빛을 받아 잠시 더 푸르게 빛났다. 나는 그 빛을 바라보며 알 것 같았다. 우리 삶을 끝내 지탱하는 것은 거대한 승리가 아니라 말없이 제 자리를 지켜 온 사랑이라는 것을. 세월이 흘러도 무너지지 않는 것은 강한 목소리가 아니라 오래 견딘 마음이라는 것을.
창밖의 팔공산은 오늘도 변함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 푸른 병풍 앞에서, 나는 어제보다 조금 더 사람다운 사람이 되어 가고 있었다.
[02] 琴湖春水(금호강의 봄 물)
琴湖春色滿江城, 금호의 봄빛이 강성에 가득한데,
一曲峨洋動客情. 한 곡조 아양 노래 나그네 마음 뒤흔드네.
世路誰知幽美景, 속세의 그 누가 이 정경을 알겠는가.
鷺閒魚躍水自淸. 자연의 조화 속에 호수는 맑아오네.
스스로 맑아지는 호숫가에서
문득 발걸음이 멈추는 곳이 있다. 세상의 속도가 마음보다 먼저 달려갈 때면 나는 말없이 물가를 찾는다. 오래전부터 한자리를 지키며 흘러오는 모든 것을 잠잠히 품어 온 호수가 있기 때문이다.
봄 아침의 금호는 옅은 안개를 두른 채 끝내 말을 아꼈다. 수면은 한 점 흔들림 없이 하늘을 받아 안고 있었고, 아직 잠에서 덜 깨어난 버드나무의 그림자는 물 위에 길고 가늘게 누워 있었다. 한참 바라보고 있노라면 세상의 소음은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물속으로 천천히 가라앉는 듯하였다.
그제야 마음속에 오래 가라앉지 못하던 것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바쁜 날들 속에서 끝내 이름 붙이지 못한 생각들, 지나온 시간의 미세한 아쉬움, 이유조차 설명하기 어려운 그리움이 흙탕물처럼 천천히 떠올랐다. 그러나 나는 그것들을 밀어내지 않았다. 작은 바위 하나에 몸을 맡긴 채 흐르는 시간의 얼굴을 오래 바라보았다.
그때 어디선가 거문고 한 줄이 울리는 듯했다. 귀에 들리는 소리가 아니라 오래 잊고 지내던 기억이 스스로 깨어나는 울림이었다. 높은 산과 흐르는 물을 알아듣던 아양(峨洋)의 한 곡조처럼, 그 미세한 떨림은 오래 닫혀 있던 마음의 문을 조용히 두드렸다. 세상의 길 위를 오래 걸으며 굳어졌던 마음도 그 앞에서는 잠시 길 잃은 나그네처럼 본래의 연약함을 떠올렸다. 어쩌면 사람은 평생 자신을 가장 깊이 알아주는 한 울림을 찾아 헤매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안개 사이로 해오라기 한 마리가 물가에 내려앉았다. 서두르는 기색도 없이 몇 걸음을 옮기자 은빛 물고기 한 마리가 수면을 가르며 뛰어올랐다. 둥근 파문이 잔잔히 번져 나가고, 호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제 고요를 거두어 안았다.
그 장면 앞에서 문득 깨달았다. 호수는 한 번도 스스로를 맑게 하려 애쓴 적이 없었다. 바람을 막지도 않았고, 흙탕물을 밀어내지도 않았으며, 새의 발걸음도 물고기의 도약도 스쳐 가는 바람 한 점까지도 거절하지 않았다. 그저 오는 것을 오게 하고, 머무는 것을 머물게 하며, 지나가는 것을 지나가게 하였을 뿐이다. 그러는 동안 무거운 것은 저절로 바닥으로 내려앉고, 물은 마침내 제 본래의 투명함을 되찾았다. 그것은 정화라기보다 회복에 가까웠다. 만들어지는 맑음이 아니라 본래 맑았던 것이 다시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나 또한 그 호수 앞에서 애써 맑아지려 하던 마음을 내려놓았다. 삶이란 흔들림을 없애는 일이 아니라 흔들림이 제 길을 모두 지나가도록 기다려 주는 일인지도 모른다. 기다림 속에서 가라앉을 것은 가라앉고, 끝내 남아야 할 것은 남는다. 억지로 붙들지 않아도 마음은 때가 되면 스스로 제 깊이를 회복하는 법이다.
한참 뒤에야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호수는 처음과 다르지 않았다. 안개는 여전히 옅었고, 물빛은 여전히 고요했으며, 해오라기는 아직도 제자리에 서 있었다. 작은 물고기 하나가 다시 은빛 파문을 남겼고, 봄빛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수면 위에 머물러 있었다. 달라진 것은 물빛이 아니었다. 그 물을 바라보는 내 마음이었다.
그제야 비로소 알았다. 호수는 처음부터 맑았다. 맑아진 것은 호수가 아니라, 마침내 그 고요를 바라볼 수 있게 된 나였다.
[03] 莊重本館(장중한 본관)
士林憂國振儒風, 영남사림 나라 위해 유가풍을 진작시켜,
繼往開來建學宮. 계왕개래 정신으로 대학을 창건함에.
莊重規模義遠大, 장중한 규모에 뜻 더욱 원대하니,
弘揚正氣培英雄. 민족정기 널리 떨쳐 영웅을 기르리라.
시간을 건네는 길
늦은 오후의 햇살이 영남대학교의 오래된 기둥 위에 조용히 내려앉는다. 빛은 서두르지 않는다. 이곳에 쌓인 시간을 알기라도 하듯 돌계단의 모서리와 나무 그림자의 결을 오래 더듬으며 천천히 교정을 건넌다. 언덕길을 따라 학생들이 지나가고, 바람은 계절의 향기를 옷깃에 묻힌 채 캠퍼스를 가로지른다.
그 풍경 앞에 서면 늘 같은 생각에 잠긴다. 이곳은 단지 젊음이 머무는 공간이 아니다. 영남대학교는 시간 위에 세워진 대학이다. 수많은 스승의 가르침과 선배들의 발자취, 시대를 건너온 교육의 염원과 지역의 정신이 겹겹이 쌓여 오늘의 교정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이 길을 걷는다는 것은 한 대학의 캠퍼스를 지나는 일이 아니라, 오래된 뜻과 아직 오지 않은 미래 사이를 조용히 건너는 일처럼 느껴진다.
영남이라는 이름은 단순한 지명이 아니다. 오랜 세월 학문과 예의, 공동체의 가치를 품어 온 정신의 이름이다. 낙동강과 금호강이 흐르는 이 땅에서는 배움을 출세의 수단이 아니라 사람을 바로 세우는 일로 여겨 왔다. 선비들은 자연 속에서 글을 읽고 세상을 논했으며, 배움은 끝내 인간과 공동체를 밝히는 일이어야 한다고 믿었다. 영남대학교는 그 정신의 연장선 위에 서 있는 듯하다.
교정을 걷다 보면 이 대학이 품은 상징들이 하나둘 마음속에 떠오른다. 하늘을 향해 힘차게 내달리는 천마는 단지 역동성과 기백만을 뜻하지 않는다. 더 높이 오르려는 젊음의 열망인 동시에, 땅을 딛고 전통을 잃지 않으려는 의지의 형상이다. 앞으로 나아가되 뿌리를 잃지 않는 것. 그것이 영남대학교가 오랫동안 학생들에게 조용히 가르쳐 온 자세일 것이다.
오래된 건물의 벽에도, 언덕을 오르는 길의 침묵 속에도, 계절마다 빛깔을 바꾸는 나무들 사이에도 그 정신은 스며 있다. 어떤 대학은 새로움으로 자신을 증명하지만, 어떤 대학은 시간을 견딘 깊이로 자신을 말한다. 영남대학교는 후자에 더 가까운 곳이다. 변화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으며, 교육에는 유행을 넘어서는 뿌리가 있음을 이 교정은 말없이 증언한다.
캠퍼스 한편의 서원과 민속촌 앞에 서면 시간은 걸음을 늦춘다. 오래된 기둥과 마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오히려 더 깊은 질문을 남긴다.
무엇을 배우고 있는가.
무엇을 지키고 있는가.
무엇을 다음 세대에게 남기고 싶은가.
이 질문은 학생들에게만 향하지 않는다. 대학을 이루는 모든 사람,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건네지는 질문이다. 배움이 단순히 더 많은 지식을 소유하는 일이라면 대학은 이토록 깊은 울림을 갖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배움이 사람을 더욱 사람답게 세우고 공동체를 따뜻하게 밝히는 일이라면, 대학은 하나의 거대한 건물이 아니라 한 시대의 양심이 된다.
그래서 영남대학교의 교육이념인 계왕개래(繼往開來)는 더욱 깊게 다가온다. 지나온 시간을 이어받아 새로운 미래를 연다는 이 말은 단순한 구호가 아니다. 과거를 잇는다는 것은 낡은 것을 붙드는 일이 아니라 선현들의 지혜를 오늘의 삶으로 다시 살아나게 하는 일이며, 미래를 연다는 것은 더 높은 건물을 세우는 일이 아니라 더 깊은 사유와 따뜻한 품성을 지닌 사람을 길러 내는 일이다.
'계(繼)'에는 전통의 무게가 있고, '개(開)'에는 미래의 용기가 있다. 지나온 시간을 존중하되 머물지 않고, 새로운 시대를 향해 나아가되 뿌리를 잃지 않는 것. 영남대학교의 교정과 사람들은 그 뜻을 저마다의 자리에서 말없이 실천하고 있는 듯하다.
해가 기울 무렵 교정을 오가는 학생들의 모습은 더욱 눈부시다. 젊은 얼굴들은 아직 쓰이지 않은 페이지처럼 맑고, 걸음마다 희망과 불안이 함께 담겨 있다. 그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대학은 결국 사람을 통해 완성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건물은 대학의 몸이지만 사람은 대학의 마음이다. 강의실에서 얻은 지식, 도서관에서 익힌 사유, 스승의 격려와 친구와의 토론, 실패와 회복의 시간이 한 사람 안에서 천천히 인격이 되어 갈 때 비로소 대학은 존재의 이유를 증명한다.
그래서 가장 위대한 유산은 건물이 아니라 사람이다. 영남대학교가 오랜 세월 지켜 온 것도 결국 이것일 것이다. 지식을 넘어 사람을 세우고, 경쟁을 넘어 품격을 가르치며, 성취를 넘어 공동체를 생각하게 하는 일. 한 사람의 진심 어린 가르침이 또 다른 사람의 삶을 바꾸고, 그 삶이 다시 다음 세대에게 빛을 건네는 일. 교육은 그렇게 제도보다 깊고 문장보다 오래 사람 안에 남는다.
늦은 오후의 햇살이 다시 기둥 위에 머문다. 수많은 계절이 지나도 이 교정에 변하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을 길러 내고자 하는 교육의 마음일 것이다. 영남대학교의 역사성은 오래되었다는 사실에 있지 않다. 그 오래됨이 오늘의 젊음과 만나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데 있다. 상징은 박제된 문양이 아니라 삶 속에서 다시 해석되고 이어질 때 비로소 빛난다.
계왕개래. 지나온 시간을 이어받아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을 여는 일. 그 시작은 거창한 선언이 아니라 한 스승의 따뜻한 눈빛에서, 한 학생의 성실한 걸음에서, 한 대학이 오랜 세월 지켜 온 품위와 책임에서 조용히 시작된다.
그리고 영남대학교가 우리에게 남기는 가장 큰 가르침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대학은 시간을 소비하는 곳이 아니라 시간을 건네는 곳이다. 한 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정신을 전하고, 한 사람의 배움이 또 다른 사람의 삶을 밝히는 곳. 그래서 이 길을 걷고 돌아서는 순간에도 우리는 이미 무언가를 건네받고 있다. 이름 없는 빛 하나, 그러나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을 마음의 유산을.
[04] 天馬大路(천마대로)
天馬雄飛大路平, 천마는 웅비하고 대로는 평탄한데,
北文南理自縱橫. 북쪽 인문 남쪽 이공 자연스레 어울렸네.
人倫天造皆吾學, 인륜과 천지조화 모두가 학문이라,
大道無門君莫爭. 큰 길은 문이 없으니 다투지를 말게나.
큰 길에는 처음부터 문이 없었다
봄날의 캠퍼스에는 때로 사람보다 먼저 말을 거는 것이 있다. 나무도 아니고 꽃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다. 그것은 길이다.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지만 누구에게도 자기 뜻을 강요하지 않고 묵묵히 걸음을 받아 주던 길. 나는 그 길 앞에 설 때마다 하나의 사상보다 먼저 한 줄의 침묵을 배운다.
천마지문 앞에 이르면 먼저 문이 보인다. 웅장한 돌기둥 사이로 아침 햇살이 길게 스며들고, 갓 깨어난 벚나무들이 가지 끝마다 엷은 불빛 같은 꽃을 매달고 있다. 문은 서 있으나 막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열어 두기 위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람은 늘 문을 경계로 세상을 나눈다. 안과 밖, 시작과 끝, 허락된 사람과 허락되지 않은 사람. 그러나 봄빛 속의 저 문은 이상하리만치 따뜻해서 "들어오라."는 말보다 먼저 "애초에 길은 누구의 것도 아니었다."고 속삭이는 듯하다.
문을 지나 천마대로에 들어서면 길은 놀랍도록 곧다. 곧다는 것은 단순하다는 뜻이 아니다. 수많은 생각이 지나간 뒤에야 얻어지는 마음의 자세에 가깝다. 벚꽃이 길 양옆에서 하늘을 이루고, 이른 안개와 햇살은 서로를 놓지 못한 채 길 위에 머문다. 나는 그 길을 바라보며 깨닫는다. 먼 데로 가는 길일수록 쉽게 휘지 않는다는 것을. 자기 확신에 들뜬 길은 사람을 재촉하지만, 깊은 길은 오히려 천천히 걸으라고 말한다는 것을.
조금 더 들어서면 길은 두 세계 사이를 흐른다. 한쪽에는 인간의 마음과 역사와 언어를 오래 들여다본 건물들이 서 있고, 다른 한쪽에는 물질과 법칙, 우주의 비밀을 탐구하는 건물들이 햇빛을 받아 반짝인다. 인문과 이공, 사유와 계산, 기억과 실험. 우리는 너무 오래 그것들을 서로 다른 방에 가두어 두었다. 그러나 길은 어느 편으로도 기울지 않는다. 다름이 대립이 아니라는 사실을 자신의 몸으로 증언할 뿐이다. 생각해 보면 진리는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데 있지 않았다. 서로 다른 것들이 같은 빛을 받고 있음을 알아보는 데 있었다.
숲길로 접어들면 빛은 더욱 낮아지고, 나무들은 긴 그림자를 길 위에 드리운다. 돌비석들은 누군가의 이름과 시간을 말없이 품은 채 오후의 햇살을 받아들인다. 나는 이런 길을 좋아한다. 말은 적지만 침묵의 두께가 깊은 길. 살아간다는 것은 앞으로만 가는 일이 아니라 지나온 사람들의 숨결 위를 조심스레 밟고 가는 일임을 이런 길은 가르치지 않아도 가르쳐 준다. 새로움보다 오래된 것들이 남긴 온기가 사람을 사람답게 만든다. 기억은 무거운 짐이 아니라 빛이 스며드는 틈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마침내 문이 없는 문 앞에 이른다. 텅 빈 듯한 공간, 빛으로만 이루어진 입구, 아무것도 막고 있지 않으면서도 누구나 잠시 걸음을 멈추게 하는 침묵의 경계. 그 앞에서 오래전 들었던 한마디가 떠오른다.
대도무문(大道無門).
큰 길에는 문이 없다는 말. 이것은 단지 선의 경지가 아니라 삶이 건네는 가장 깊은 위로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늘 자격을 묻고 허락을 기다리며 살아간다. "이 문을 지나도 되는가." "나는 아직 부족하지 않은가." "누군가 나를 받아 줄 것인가." 그러나 정말 큰 길은 애초에 누구에게도 문을 세우지 않는다. 햇빛이 특정한 사람만 비추지 않듯, 봄이 어느 학과 앞에만 오지 않듯, 길은 처음부터 열려 있었다. 문이 없다는 것은 방황이 아니라 자유이며, 가로막힘이 없다는 것은 허무가 아니라 포용이다. 그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인생은 허락된 입구를 찾아 헤매는 일이 아니라, 이미 열려 있는 길 위에 자신이 서 있음을 뒤늦게 알아보는 일이라는 것을.
노을이 깊어질 무렵, 벚꽃길 위를 한 사람이 천천히 걸어간다. 두 손을 등 뒤로 모은 채 오래된 책 한 권을 들고, 하루 전체를 다 읽은 사람이 마지막 장을 덮듯 걸어간다. 꽃잎은 그의 어깨와 길 위에 조용히 내려앉고, 저녁빛은 말보다 긴 여운으로 등을 감싼다. 나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비로소 알게 된다. 길의 끝에서 남는 것은 정답이 아니라 향기라는 것을. 누군가를 이긴 기억이 아니라, 누군가를 따뜻하게 지나쳐 간 시간이라는 것을.
문과 문 사이를 헤매며 살아온 날들이 있었지만 결국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더 높은 문이 아니라 함께 걸었던 길의 온기였다. 학문의 통섭도, 사람과 사람의 화해도, 거창한 논리의 승리가 아니라 본래 하나였던 생명의 숨결을 다시 알아보는 일일지 모른다. 큰 길에는 처음부터 문이 없었다. 우리는 서로 다른 이름의 길을 걸어온 듯했지만, 오래전부터 같은 하늘 아래 같은 바람 속에서 같은 길을 걸어오고 있었다.
해가 저물고 꽃잎이 마지막 빛 속에서 천천히 흔들린다. 그 순간 마음속에는 한 문장만이 조용히 남는다.
오늘 나는 누구에게 따뜻한 향기가 되어 주었는가.
[05] 矗立高樓(우뚝한 도서관)
原頭矗立硏書樓, 압량 원두에 우뚝 솟은 중앙도서관,
二十二層雲上浮. 이십이층 높은 건물 구름 위에 솟아 있네.
磨琢之中時一望, 책 읽다가 때때로 먼 곳을 바라보면,
靑山斷處洛江流. 푸른 산 다한 곳에 낙동강이 흘러가네.
더 멀리 바라보는 마음
늦은 오후, 압량의 들 위로 빛이 기울고 있었다. 구름은 오래 머물 생각이 없다는 듯 천천히 하늘을 건너갔고, 들의 초록은 빛을 받아 잠시 더 깊어졌다. 그 한가운데 도서관은 높고 희게 서 있었다. 유리창마다 흐린 하늘이 조금씩 들어가 있었고, 층층의 창은 멀리 있는 산들을 향해 조용히 열려 있었다.
사람들은 그 건물을 보면 먼저 높이를 말한다. 이십이 층, 하늘 가까이 올라간 창들, 한 번 올려다보면 목이 조금 아파지는 건물. 그러나 내게 그 도서관은 높이로 기억되지 않는다. 나는 오히려 그 안의 창가를 먼저 떠올린다. 책 한 권을 펴 둔 채 오래도록 다음 장을 넘기지 못하는 사람의 옆모습을. 책 위에 머물던 눈길이 어느 순간 창밖으로 빠져나가고, 그 눈길을 따라 산과 들과 도시가 한꺼번에 들어오던 순간을.
창밖에는 산이 있었다. 가까운 산 하나가 능선을 내어주면 그 뒤로 더 먼 산이 나타났다. 산은 겹겹이 쌓여 있다기보다 서로의 등을 오래 바라보며 서 있는 듯했다. 그 사이 어딘가로 강이 흘렀을 것이다. 눈에 다 들어오지 않아도 낮은 곳을 향해 제 길을 버리지 않는 물의 기척은 풍경 속에 늘 머물러 있었다.
책을 읽는 일은 대개 고개를 숙이는 일이다. 문장을 따라가려면 눈은 아래를 향하고 손은 페이지의 모서리를 짚는다. 그러나 어떤 문장은 사람을 고개 들게 한다. 더 읽기 위해서가 아니라 잠시 읽은 것을 자기 안에 가라앉히기 위해서다. 그때 창이 가까이 있다면 책 속의 문장과 바깥의 풍경은 더 이상 낯선 것이 아니게 된다.
나는 한때 높은 곳에 오르는 일이 삶의 중요한 목표인 줄 알았다. 조금 더 나은 성적, 조금 더 넓은 자리, 조금 더 많은 이름. 계단은 위로만 나 있었고 멈추는 일은 뒤처지는 일처럼 여겨졌다. 누군가 앞서가면 마음이 급해졌고, 내가 선 자리를 돌아볼 겨를도 없이 다음 층을 생각했다.
그러나 높이 올라가 본 날들에는 위로 갈수록 오히려 멀리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낮게 이어진 지붕들, 나무 사이의 길, 운동장을 가로질러 가는 작은 사람들, 저녁이 오면 하나씩 켜지는 창문들. 가까이 있을 때는 서로 부딪치기만 하던 풍경이 멀어지자 비로소 한 폭의 삶처럼 보였다. 높다는 것은 누군가보다 위에 있다는 뜻이 아니라,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을 볼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인지도 몰랐다.
‘절차탁마(切磋琢磨)’라는 말은 오래된 돌의 감촉을 지니고 있다. 자르고, 갈고, 쪼고, 닦는다. 거친 것을 견디며 제 모양을 찾아가는 시간이다. 배움도 그와 같아서 무엇을 더 많이 아는 사람이 되는 것보다 자신 안의 거친 모서리를 오래 들여다보는 일에 가까운지도 모른다. 어떤 지식은 우리를 말 잘하는 사람으로 만들지만, 어떤 배움은 오래 침묵할 줄 아는 사람으로 만든다. 도서관의 창가에는 그런 침묵이 있다.
책을 덮는다고 해서 무엇 하나 끝나는 것은 아니다. 읽은 문장은 그때부터 마음속에서 다른 모양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한다. 산은 말이 없고 강은 자기 흐름을 설명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산은 오래 견디는 법을, 강은 낮아지며 멀어지는 법을 가르친다. 강은 높은 곳을 탐하지 않는다. 가장 낮은 곳을 찾아 흐르지만 마침내 가장 먼 곳에 닿는다. 물은 자신이 지나온 굽이를 자랑하지 않고, 돌을 만날 때마다 조금 돌아갈 뿐이다. 돌아간 길도 흐름 안에서는 길을 잃은 것이 아니다.
창가에 앉아 있으면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삶에는 빨리 답해야 하는 물음도 있지만, 오래 바라보아야만 대답할 수 있는 물음도 있다고. 내가 어디까지 왔는지보다 이제 무엇을 바라보게 되었는지가 더 중요한 때가 있다고.
해가 낮아질수록 도서관의 창은 조금씩 어두워진다. 들녘의 빛은 사라지기 전에 나무 꼭대기와 건물의 가장자리를 한 번 더 쓰다듬는다. 그러면 창가의 책과 안경과 빈 의자에도 저녁의 색이 얹힌다. 누군가는 아직 책장을 넘기고, 누군가는 창밖을 바라본다. 그 둘은 어쩌면 같은 일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읽는다는 것은 먼 곳을 향해 마음의 창을 여는 일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우리가 지나온 날들을 돌아보게 될 때, 기억에 남는 것은 얼마나 높은 층까지 올라갔는가가 아닐 것이다. 어느 날 한 권의 책을 덮고 잠시 창밖을 바라보았던 일, 산 너머의 산을 보았던 일, 낮은 곳으로 흐르면서도 끝내 멀어지던 강을 마음속에 품었던 일. 그때 우리는 조금 알게 될 것이다. 삶은 높아지는 데 있지 않고, 더 멀리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을 잃지 않는 데 있다는 것을.
[06] 民俗古家(민속촌의 옛집)
移建民家築一園, 민가를 옮겨와 정원을 조성하여,
使人爲藉顧根源. 사람들로 하여금 근원을 알게 하니.
松亭鵲屋龜溪院, 쌍송정과 까치집 구계서원은,
默默遺存倍達魂. 말없이 배달혼을 전해주고 있네.
집은 고향을 잃지 않는다
집에도 고향이 있을까. 늦은 오후, 영남대학교 민속촌의 숲길을 걷다가 한 채의 집 앞에 오래 서 있었다. 기둥은 검게 익어 있었고, 처마 끝에는 오래 묵은 빗물이 지나간 자국이 엷게 남아 있었다. 사람의 손길은 사라진 지 오래였으나, 집은 어쩐지 누군가를 기다리는 얼굴이었다.
우리는 집을 사람이 사는 곳이라 말한다. 비바람을 막고 밥을 지으며 잠을 이루는 자리. 그러나 오래된 집 앞에 서면 그 말의 순서가 조금 달라진다. 사람이 집에 사는 것이 아니라 집이 사람의 한 생을 품고 견디는 듯하다. 집은 많은 것을 말하지 않는다. 다만 마루에 비스듬히 내려앉던 햇살과 처마를 스치던 바람의 결을 기억한다. 아이가 마당을 가로지르던 발소리, 저녁 짓는 연기, 대문 밖에서 오래 머뭇거리던 누군가의 그림자도 기억할 것이다. 사람이 떠난 뒤에도 집은 쉽게 비지 않는다. 떠난 이들의 시간이 벽과 기둥 사이에 얇은 먼지처럼 내려앉아 있기 때문이다.
이곳의 집들은 먼 곳에서 왔다. 안동의 산자락과 봉화의 깊은 솔숲, 경주의 오래된 마을에서 낯선 길을 건너왔다. 물이 차오르고 마을이 지도에서 사라지기 전, 집들은 하나씩 해체되었을 것이다. 기와는 내려지고 기둥은 뽑혔으며, 익숙한 마당의 흙은 뒤에 남겨졌다. 그러나 집이 옮겨졌다고 해서 그 안에 깃든 시간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나는 ‘이건(移建)’이라는 말을 생각해 본다. 사람들은 집을 옮겼다고 말하지만, 어쩌면 집들은 스스로 긴 여행을 떠난 것인지도 모른다. 제 몸을 이루던 나무와 돌을 나누어 실은 채 오래 머문 땅을 뒤로하고, 물에 잠길 마을을 마지막으로 바라보면서. 그 여행 끝에 다시 세워진 집들은 이제 대학의 숲속에서 다른 계절을 맞고 있다.
소나무 사이로 난 길 끝에서 쌍송정(雙松亭)을 만났다. 정자는 낮고 고요했다. 바람이 먼저 들어와 앉고 햇살이 한동안 마루를 더듬다가 떠나는 곳. 봉화의 산자락에 있을 때에도 이 정자는 그러했을 것이다. 한 사람이 책장을 넘기고 먼 산을 바라보며 말을 아끼던 시간도 함께 품고 있었을 것이다.
정자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누구를 붙들지도 않고 무엇을 이루라고 재촉하지도 않는다. 다만 비워 둔 자리로 사람을 맞는다. 그 마루에 앉아 있으면 바쁘게 흐르던 마음도 잠시 속도를 잃는다. 우리는 늘 무언가로 자신을 채우며 살아가지만, 때로 삶을 견디게 하는 것은 채움이 아니라 비어 있음인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한때, 말하지 않아도 되는 곁, 오래 웅크린 생각을 조용히 내려놓을 수 있는 자리. 정자는 그런 여백을 가르치는 듯했다.
조금 더 걸어가면 까치구멍집이 나타난다. 초가지붕 용마루 끝에 난 작은 구멍. 처음에는 낡은 집의 한 부분처럼 보이지만, 그 틈으로 집은 숨을 쉬었다. 부엌의 연기가 빠져나가고 갇힌 습기가 흩어지며 어둠 속으로 가느다란 빛이 스며들었다. 집은 완전히 닫혀 있을 때 가장 먼저 병이 든다. 옛사람들은 그 사실을 알고 지붕 한편에 바람이 드나들 길과 연기가 빠져나갈 길, 너무 답답해지지 않도록 작은 여백 하나를 남겨 두었을 것이다.
그 앞에서 사람의 마음을 생각했다. 우리는 자신을 단단히 여미는 일에 익숙하다. 슬픔은 들키지 않게 접어 넣고 약함은 아무도 보지 못할 곳에 감춘다. 괜찮다는 말을 먼저 배우고 무너지지 않는 얼굴로 하루를 건넌다. 그러다 어느 날 마음속에 갇힌 것들이 숨 쉴 곳을 잃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사람에게도 까치구멍이 필요하다. 울어도 되는 밤 하나, 기댈 수 있는 어깨 하나, 아무 말 없이 곁에 앉아 주는 사람 하나. 거대한 위로가 아니라 작은 틈으로 들어오는 바람 같은 것. 따뜻한 말 한마디가 어떤 이의 긴 겨울을 건너게 하고, 잠시 멈추어 주는 마음이 한 사람의 하루를 살리기도 한다.
민속촌 깊숙한 곳에서 구계서원(龜溪書院)을 만났을 때 마당에는 고요가 먼저 와 있었다. 오래전 이곳에서도 사람들은 글을 읽고 묻고 답을 찾았을 것이다. 그러나 서원의 기둥과 문턱은 오늘의 우리에게 다른 질문을 건네는 듯했다. 무엇을 얼마나 많이 아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끝내 잃지 않고 살아가느냐고.
사람은 살아가며 수많은 것을 배운다. 이름을 외우고 길을 익히며 세상을 살아가는 기술을 몸에 넣는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배움이란 머리에 쌓이는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누군가의 아픔 앞에서 조금 더 천천히 말하는 법, 떠나는 이를 오래 바라보아 주는 법, 자신의 삶을 함부로 미워하지 않는 법. 그런 것들은 책의 문장보다 늦게 오고, 때로는 상처를 지나서야 마음에 새겨진다. 오래된 서원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만 침묵 속에서 오래 살아남은 것들이 지닌 느린 품위를 보여 주고 있었다.
나는 집들을 돌아보며 내 삶에 흩어진 집들을 떠올렸다. 어린 날의 낮은 대문, 어머니의 목소리가 머물던 부엌, 어느 겨울 저녁 창문에 성에가 피어오르던 방. 그 집들은 대부분 떠나왔고 어떤 집은 이제 세상에 없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여전히 문이 열리고 마당에 빛이 든다. 사라진 것은 집의 주소였을 뿐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지나온 시간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사랑했던 사람의 말투와 견뎌 낸 계절의 냄새, 너무 아파 잊고 싶었던 순간들조차 마음 깊은 곳에서 저마다의 방을 이루고 있다. 우리는 낯선 도시로 옮겨 가고 다른 이름으로 살아가며 수많은 이별을 지난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떠나지 않는다. 집이 고향을 잃지 않듯이.
안동의 산자락을 떠난 집은 그 산의 바람을 잊지 않았을 것이다. 봉화의 숲을 떠난 정자는 아직도 솔향을 품고 있을 것이다. 새로운 땅 위에 다시 세워졌지만 집은 이전의 시간을 버리지 않았다. 그것을 제 안에 품은 채 다른 계절을 맞고 있을 뿐이다. 고향은 반드시 돌아가야 하는 장소가 아니라 끝내 우리 안에서 사라지지 않는 시간인지도 모른다.
늦은 오후의 빛이 다시 처마 끝에 내려앉는다. 나무 기둥의 그늘은 조금씩 길어지고 숲은 저녁 쪽으로 천천히 기울어 간다. 집들은 말없이 서 있다. 오래된 침묵으로, 떠나온 것을 잊지 않는 방식으로. 그리고 그 침묵 속에서 나는 듣는다. 집은 고향을 잃지 않는다고. 우리 또한 어쩌면 그러하다고.
[07]春日櫻花(봄날의 벚꽃)
草綠江南三月來, 풀이 푸른 강남에 삼월이 오면,
櫻花布白滿庭開. 벚꽃이 활짝 피어 온 교정을 뒤덮었네.
醉香蜂蝶紛紛下, 향기에 취한 벌과 나비 웅웅대는 밑에서,
與友盤桓復一盃. 벗과 함께 노닐다가 다시 잔을 잡노메라.
꽃잎이 지지 않는 봄
봄은 늘 꽃보다 먼저 바람으로 온다. 아직 겨울의 냄새를 다 버리지 못한 바람이 창가를 스치고 지나가면, 나는 그 안에서 풀잎의 기척을 듣는다. 마른 가지 끝마다 연둣빛 숨이 차오르고, 오래 닫혀 있던 땅의 문이 소리 없이 열리는 듯한 때가 있다. 그러면 마음 한구석에서도 잊고 있던 이름 하나가 조용히 몸을 일으킨다.
나는 해마다 이 무렵이면 오래전에 지었던 한시 한 수를 꺼내 본다. 젊은 날에는 그 시가 벚꽃을 노래한 것이라 여겼다. 교정을 하얗게 덮은 꽃과 꽃 사이를 오가던 벌과 나비, 봄날의 흥취를 적어 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세월이 한 겹씩 쌓인 지금 그 시를 다시 읽으면, 꽃보다 먼저 한 사람의 뒷모습이 떠오른다.
우리는 그날 오래된 교정의 길을 걸었다. 대단한 이야기를 나눈 것은 아니었다. 꽃이 참 곱다는 말, 올해 봄이 유난히 빠르다는 말, 졸업하면 무엇이 달라질까 하는 철없는 농담 몇 마디를 주고받았을 뿐이다. 그러다 벤치에 앉아 잔을 기울였고, 잔 위에 꽃잎 하나 내려앉는 모습을 오래 바라보았다. 그때의 우리는 그 시간이 훗날 이토록 오래 남을 줄 알지 못했다.
젊음은 언제나 제 곁에 시간이 끝없이 놓여 있다고 믿는다. 다음 봄도 있을 것이고, 다음 만남도 있을 것이며, 오늘 못다 한 이야기는 언젠가 다시 이어 갈 수 있으리라 여긴다. 그래서 작별 인사에도 마음을 충분히 싣지 못하고, 함께 있는 순간이 얼마나 귀한지도 미처 알아보지 못한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알게 된다. 사람의 삶에서 오래 남는 것은 성취의 목록이 아니라는 것을. 어느 자리까지 올랐는지, 무엇을 손에 넣었는지, 얼마나 많은 박수를 받았는지는 시간이 흐를수록 희미해진다. 대신 어떤 날의 햇살과 잔을 건네던 손, 아무 말 없이 나란히 걷던 발걸음이 이상할 만큼 또렷해진다.
기억은 사진처럼 정확하지 않다. 그날 벚꽃이 흰빛이었는지 엷은 분홍빛이었는지, 우리가 어느 벤치에 앉았는지, 잔에 담긴 것이 무엇이었는지 이제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벗이 내 걸음에 맞추어 조금 천천히 걸어 주었다는 것만은 기억한다. 내가 말을 멈추었을 때 굳이 이유를 묻지 않았다는 것도 기억한다.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했던 침묵의 온기도 아직 남아 있다.
젊은 날에는 침묵이 어색했다. 누군가와 마주 앉으면 빈틈없이 말을 채워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오래된 우정에는 말보다 깊은 자리가 있다. 서로의 마음을 낱낱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고, 오래 보지 못한 세월을 굳이 변명하지 않아도 되는 자리다. 같은 풍경을 바라보고, 같은 바람을 맞으며, 한 잔을 서로에게 건네는 것만으로 마음이 전해지는 시간. 아마 사람은 그런 시간을 만나기 위해 오래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벚꽃은 해마다 피고 진다. 사람들은 꽃이 질 것을 알기에 더욱 서둘러 그 아래에 선다. 휴대전화로 꽃을 찍고 웃는 얼굴을 남기며 지나가는 봄을 붙잡으려 한다. 그러나 사진 속에 남는 것은 꽃의 모양뿐이다. 꽃 사이로 불던 바람의 결도, 곁의 사람이 웃음을 참다가 고개를 숙이던 순간도, 꽃잎 하나가 어깨에 내려앉았을 때 함께 바라보던 마음도 사진은 끝내 품지 못한다. 그런 것들은 시간이 지나야 비로소 기억이 된다.
봄은 자연의 계절이지만 기억 속의 봄은 사람의 계절이다. 젊은 날에는 꽃을 보았고, 조금 나이가 들어서는 꽃 아래 선 사람들을 보았다. 그리고 이제는 꽃과 사람 사이로 흘러간 긴 시간을 바라본다. 같은 벚꽃도 바라보는 나이에 따라 전혀 다른 빛을 띤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잃는 일만은 아니다. 보이는 것의 순서가 달라지는 일이다. 예전에는 만개한 꽃이 먼저 눈에 들어왔지만, 이제는 꽃이 피기까지 견딘 겨울나무의 시간이 먼저 보인다. 꽃이 진 뒤에도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줄기와, 보이지 않는 땅속에서 서로에게 물을 건네는 뿌리의 수고가 먼저 생각난다. 한때는 화려함을 부러워했으나, 이제는 오래 견디는 것들의 고요한 힘에 마음이 머문다.
가끔 모교를 찾으면 벚나무는 여전히 길 양편에 서 있고, 햇빛은 예전처럼 낮은 담장 위에 걸린다. 다만 그 길을 걷는 얼굴들은 모두 낯설다. 젊은 학생들이 웃으며 지나가고, 누군가는 친구의 팔을 붙잡고 사진을 찍는다. 그 모습을 바라보면 마음은 잠시 먼 곳으로 간다. 우리도 저렇게 걸었을 것이다. 잃을 것이 없다고 믿었고, 헤어짐은 늘 다른 사람의 이야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세월은 누구에게나 지나간다. 어떤 벗은 멀리 있어 만나기 어렵고, 어떤 벗은 서로의 안부를 잊을 만큼 긴 시간 속으로 들어갔다. 또 어떤 이름은 이제 전화번호부에서 찾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럴 때면 봄이 조금 서늘해진다. 꽃이 피는 계절인데도 마음 한편에는 비어 있는 의자 하나가 놓인 듯하다.
그럼에도 나는 봄을 슬픔의 계절이라고만 부르고 싶지는 않다. 떠난 사람보다 함께했던 시간이 먼저 남기 때문이다. 다시 만날 수 없는 벗이라도 함께 걸었던 오후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세월은 사람을 데려가지만, 그 사람과 나누었던 한때의 빛까지 모두 거두어 가지는 못한다. 마음 깊은 곳에는 아직 꽃잎 하나 떨어지지 않는 봄날이 있다. 그곳에서는 벗이 여전히 내 곁에 있고, 우리는 목적 없이 길을 걸으며, 누군가가 다시 잔을 채우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움은 단지 붙드는 마음이 아니다. 내 삶에도 누군가와 나누었던 시간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감사다. 내가 힘들 때 말없이 곁을 지켜 준 사람이 있었고, 아무것도 아닌 봄날 오후를 귀하게 만들어 준 사람이 있었다는 감사. 꽃이 아름다웠던 것은 꽃이 많아서만이 아니라, 그 꽃을 함께 바라볼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벚꽃이 피면 나는 예전처럼 서둘러 카메라를 꺼내 들지 않는다. 대신 오래 연락하지 못한 사람의 이름을 천천히 떠올린다. 그리고 망설이다가 짧은 안부를 보낸다.
“봄이 왔습니다. 건강하시지요.”
그 한 문장이 오래전 교정의 길처럼 마음과 마음 사이에 놓이는 날이 있다. 답장이 오지 않아도 괜찮다. 안부를 물을 사람이 아직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봄은 충분히 깊어진다.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내 삶의 어느 계절에 진실로 머물렀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해마다 봄은 돌아온다. 그러나 우리를 다시 젊게 만드는 것은 벚꽃이 아니다. 한때 누군가와 같은 바람을 맞고, 같은 길을 걸으며, 같은 침묵 속에 머물렀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시간이 아직도 마음 한쪽에서 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봄은 눈으로 먼저 오지만 마음에는 늦게 도착한다. 꽃이 진 뒤에야 그 아래에서 함께 웃던 사람을 떠올리게 하고, 바람이 멎은 뒤에야 그날의 말없는 다정을 알아듣게 한다. 그래서 봄은 해마다 새로 오면서도 우리 안에서는 오래된 기억의 모습으로 피어난다. 아마 그것이 계절이 사람에게 남겨 주는 가장 오래된 선물일 것이다.
[08]南沼芙蓉(남쪽 연못의 연꽃)
湖畔紫薇幾盡紅, 호반의 자미화가 거의 질 무렵이면,
煙霞南沼出芙蓉. 노을 비친 남쪽 지당엔 연꽃이 피네.
慇懃含笑濃禪味. 은근한 웃음이 불심을 암시하니,
迦葉當年奧妙工. 바라보던 가섭이 진리를 깨달았네.
꽃이 지는 저녁의 미소
사람들은 꽃이 피는 계절을 기다린다. 봄에는 벚꽃 소식을 묻고, 여름에는 능소화가 담장을 타고 오르기를 기다리며, 가을이면 국화가 피어난 뜰을 꿈꾼다. 세상은 늘 가장 화려한 순간을 향해 눈길을 모으고, 꽃이 만개했을 때 그것을 아름답다고 부른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내 눈은 조금 다른 곳에 머문다. 활짝 피어 있는 꽃보다 꽃잎이 바람에 한 장씩 몸을 맡기는 순간을 오래 바라보게 된다. 피어남의 기쁨만큼이나 지는 일에도 저마다의 빛이 있다는 것을 조금씩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느 늦여름 저녁이었다. 호숫가를 따라 천천히 걷는데 배롱나무꽃이 거의 다 져 가고 있었다. 한때 뜨거운 햇빛 아래서 붉은 웃음을 터뜨리던 꽃들은 이제 마지막 빛을 품은 채 가지 끝에 조용히 매달려 있었다. 바람이 한 번 스쳐 지나가자 꽃잎 몇 장이 허공에서 잠시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물가로 내려앉았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그 모습을 오래 바라보았다. 예전 같았으면 아쉬움이 먼저 밀려왔을 것이다. 아름다운 것이 끝나 간다는 사실이 못내 서러워, 떠나는 꽃잎을 마음속에서라도 되돌려 세우려 했을지 모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날의 마음은 고요했다. 끝이라는 말보다 어딘가에서 또 다른 시작이 숨 쉬고 있다는 예감이 먼저 찾아왔다.
길 끝에는 남쪽 연못이 저녁빛 속에 누워 있었다. 노을은 물 위에 붉은 하늘을 조용히 풀어 놓았고, 잔잔한 수면은 그 빛을 흔들림 없이 받아 안았다. 그 물 위에 연꽃 한 송이가 막 피어나고 있었다. 배롱나무가 붉음을 거두어들이는 바로 그 시간, 연꽃은 가장 맑은 얼굴로 세상을 향해 열리고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한 꽃이 지는 동안 다른 꽃은 이미 피고 있었다. 세상은 하나를 보내면서도 다른 하나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 단순한 사실이 그날따라 깊이 마음에 내려앉았다.
우리는 대개 끝나는 것만 바라본다. 떠나가는 사람의 뒷모습을 오래 붙들고 닫힌 문 앞에서 너무 오래 서성인다. 사라진 기회와 지나간 계절, 되돌릴 수 없는 젊음과 잃어버린 시간을 헤아리며 살아간다. 그러는 사이 우리 곁에서 조용히 피어나는 것들을 자주 놓친다.
나 또한 그랬다. 젊은 날에는 얻지 못한 것을 세며 살았다. 남보다 늦어진 성공을 부러워했고, 지나간 기회를 아쉬워했으며,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시간을 붙잡으려 애썼다. 삶이 내게서 무엇을 가져갔는지만 오래 바라보았다. 그러나 세월은 내게 다른 눈 하나를 선물했다. 무엇이 사라졌는가를 묻기보다, 무엇이 지금 이 순간 조용히 피어나고 있는가를 바라보는 눈이었다.
연꽃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이 진흙에서 왔다는 사실을 변명하지도 않았고, 물 위에 핀 아름다움을 자랑하지도 않았다. 그저 깊은 진흙을 지나 맑은 얼굴로 물 위에 서 있을 뿐이었다. 말없이 피어 있는 한 송이 꽃이 그날의 노을보다 더 환하게 내 마음을 비추었다.
문득 오래전에 들었던 ‘염화미소(黏花微笑)’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부처가 말없이 꽃 한 송이를 들어 보였을 때, 수많은 사람 가운데 제자 가섭만이 미소를 지었다고 한다. 예전에는 그 이야기가 먼 옛날의 신비한 전설처럼 느껴졌다. 말 없는 꽃 하나가 어떻게 가르침이 되고, 침묵 속의 미소가 어떻게 깨달음이 되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연못가에 서 있던 그날 나는 아주 조금 알 것 같았다. 깨달음이란 언제나 거창한 기적으로 찾아오는 것이 아니었다. 준비된 마음이 평범한 풍경 하나를 만날 때, 말보다 먼저 가슴이 알아듣는 일. 설명할 수는 없지만 분명히 알게 되는 일. 어쩌면 그것이 깨달음의 가장 조용한 얼굴인지도 몰랐다.
돌이켜 보면 내 삶도 그러했다. 가장 힘들었던 시간의 뒤편에서 감사가 피어났고, 실패라고 믿었던 날들이 훗날 나를 지탱하는 단단한 뿌리가 되었다. 누군가와 헤어진 뒤에야 그 사람의 온기를 알았고, 잃은 뒤에야 곁에 있던 것의 소중함을 배웠다. 꽃이 질 때마다 다른 꽃은 이미 피어나고 있었는데, 나는 늘 떠나는 꽃만 바라보며 슬퍼하고 있었던 것이다.
연못은 그날 아무 설명도 하지 않았다. 노을도 바람도 물결도 침묵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침묵은 수많은 말보다 깊었다. 우리는 살아가며 너무 많은 대답을 찾는다. 삶이 왜 이러해야 하는지, 왜 떠나야 하는지, 왜 아파야 하는지를 묻고 또 묻는다. 하지만 인생의 가장 깊은 질문은 대답이 아니라 풍경으로 찾아오는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말 없는 뒷모습으로, 창가에 오래 머무는 햇살로, 오래된 친구의 작은 미소로, 그리고 이름 없는 연못 위에 피어난 연꽃 한 송이로.
돌아오는 길, 하늘은 어느새 어둠으로 물들고 있었다. 연못 위의 연꽃은 여전히 말없이 서 있었다. 나는 그 꽃에게 무엇을 배우려 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어느새 많은 것을 배우고 있었다.
그날 이후 나는 꽃이 피는 날만 기다리지 않게 되었다. 꽃이 지는 날에도 잠시 걸음을 멈추어 연못을 바라본다. 사라지는 것의 뒤편에서 아직 이름 붙지 않은 생명이 조용히 피어나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인생은 때때로 하나를 거두어 간다. 그러나 그것은 빈손으로 떠나는 일이 아니라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한 다른 계절을 준비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사라지는 것 앞에서 오래 슬퍼하기보다 그 뒤에 조용히 피어날 생명을 기다리기로 한다. 어쩌면 그것이 세월이 내게 가르쳐 준 가장 아름다운 염화미소인지도 모른다.
[09] 晩秋丹楓(늦가을 단풍)
西風蕭瑟冷乾坤, 서쪽바람 쓸쓸하여 하늘 땅 차가우면,
霜葉紅黃欲斷魂. 울긋불긋 단풍색에 가슴이 설레이네.
靜寂杏壇寒雨過, 고요한 교정에 찬비가 내리면,
紛紛搖落亂山門. 야단스레 휘날리어 산문을 뒤덮네.
단풍은 바람을 원망하지 않는다
늦가을 아침이었다. 밤새 산자락을 타고 내려온 찬 기운이 교정의 낮은 담장과 오래된 건물 사이에 고여 있었다. 아직 해가 완전히 오르기 전의 하늘은 엷은 회색이었고, 서쪽에서 불어온 바람은 소리보다 먼저 계절의 깊이를 알려 주었다. 여름 내내 짙은 그늘을 내어 주던 잎들은 붉고 노란빛으로 물들어, 저마다 마지막 날을 위해 가장 좋은 옷을 꺼내 입은 듯했다.
나는 은행나무 아래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바람이 한 번 지나가자 잎 하나가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가벼운 것이었으나, 닿는 순간 오래된 안부처럼 느껴졌다. 손으로 떼어 내기 전에 잎은 스스로 미끄러져 발끝에 놓였다. 그것은 떨어지는 일이라기보다 제 자리를 찾아가는 일처럼 보였다.
교정은 고요했다. 멀리서 누군가 문을 여는 소리가 났고, 젖은 흙냄새 사이로 늦은 국화의 향기가 희미하게 섞여 왔다. 바람은 가지에 남은 잎들을 흔들었지만 나무는 붙들려 하지 않았다. 잎도 매달려 울지 않았다. 잠시 흔들리다가 때가 되면 허공을 한 바퀴 돌아 땅으로 내려왔다.
그 광경을 바라보며 문득 송옥(宋玉)의 시구가 떠올랐다.
“소슬하구나, 초목이 흔들려 떨어지고 시들어 변하는구나.”
옛사람은 가을을 슬픔의 계절이라 불렀다. 서풍이 불고 풀과 나무가 시들며, 한 해의 생명이 서서히 물러나는 때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날의 가을에는 슬픔만 있지 않았다. 차가운 하늘 아래 단풍은 오히려 더 붉었고, 비어 가는 가지는 이상할 만큼 맑고 환했다. 끝나 가는 것들이 때로는 시작하는 것보다 더 선명한 빛을 낸다는 사실을 나는 나무 아래에서 다시 배웠다.
젊은 날에는 꽃을 좋아했다. 막 피어나는 꽃 앞에는 언제나 약속이 있었다. 아직 열리지 않은 날들, 이루지 못한 꿈들, 가 보지 않은 길들이 꽃잎 속에 들어 있는 듯했다. 봄날의 꽃은 세상을 향해 열려 있었고, 나 또한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세월은 사람의 눈길을 바꾸어 놓는다. 이제 나는 꽃보다 단풍 앞에서 더 오래 머문다. 꽃의 아름다움이 피어남의 환희라면, 단풍의 아름다움은 견딤의 깊이에서 나온다. 단풍은 어느 날 갑자기 붉어지는 것이 아니다. 뜨거운 여름의 햇빛을 견디고 수많은 비바람을 지나며, 밤마다 내려앉는 찬 기운을 받아들인 끝에야 비로소 저 빛깔에 이른다. 그러므로 그 붉음은 단순한 색이 아니라 시간의 농도일 것이다.
두목(杜牧)은 서리 맞은 단풍잎이 이월의 꽃보다 붉다고 노래했다. 그 말은 차가움이 반드시 생명을 꺾기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처럼 들린다. 견디기 어려웠던 날들, 말없이 지나야 했던 상실, 누구에게도 쉽게 꺼내 보일 수 없었던 눈물의 시간이 한 사람의 마음을 조금 더 깊게 물들이는 것은 아닐까.
단풍은 화려하지만 요란하지 않았다. 나무는 자신이 붉어졌다고 말하지 않았고, 누구에게 보이기 위해 빛나는 듯하지도 않았다. 다만 제 안에 쌓인 시간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을 뿐이었다. 오래 산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고요한 품격도 그러한 것이 아닐까. 많은 말을 해서가 아니라 말하지 않은 시간까지 한 사람의 얼굴에 남아 있기에, 우리는 어떤 사람 앞에서 문득 숙연해진다.
교정 안쪽으로 들어가니 오래된 산문 하나가 보였다. 비에 젖은 돌계단 위로 낙엽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그 문을 지나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세상으로 나갔을까. 저마다 희망과 불안을 품고 아직 이름 붙지 않은 삶을 향해 걸어 나갔을 것이다.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배움을 찾아 그 문을 지나 들어왔을까. 산문은 아무 말 없이 그들의 시작과 떠남을 오래 지켜보았을 것이다.
문득 ‘행단(杏壇)’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살구나무 아래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는 공자의 고사에서 비롯된 말이다. 그러나 그날 나에게 행단은 책과 강의가 있는 장소만을 뜻하지 않았다. 나무가 잎을 보내는 법을 가르치고, 바람이 지나가는 법을 가르치며, 젖은 낙엽이 돌아가는 법을 가르치는 자리였다.
삶에는 교실 밖에서만 배울 수 있는 것이 있다. 붙잡을 수 없는 것을 붙들지 않는 법, 떠나는 이를 원망하지 않는 법, 멀어지는 계절 앞에서도 내 안의 빛을 잃지 않는 법. 젊은 날에는 잃지 않는 것이 강한 줄 알았고, 끝까지 손에 쥐고 있는 것이 사랑인 줄 알았다. 그러나 어떤 것은 놓아주어야 제 모습을 잃지 않는다. 낙엽이 나무를 떠나야 흙으로 돌아가고, 흙으로 돌아가야 다시 봄의 뿌리를 살찌울 수 있듯이.
바람이 다시 불었다. 이번에는 제법 큰 바람이었다. 가지들이 한꺼번에 흔들리고 붉은 잎과 누런 잎, 빛바랜 갈색 잎들이 서로 뒤섞여 산문 앞으로 쏟아졌다. 한동안은 오래 지켜 온 질서가 한순간에 무너지는 듯 어지러워 보였다.
그러나 그 어지러움 속에도 무질서는 없었다. 잎들은 저마다 다른 길로 날아갔지만 결국 모두 땅으로 돌아왔다. 바람은 낙엽을 흩뜨리는 힘이면서 동시에 땅으로 데려가는 손길이었다. 바람이 없었다면 어떤 잎은 너무 오래 가지에 매달린 채 빛을 잃고 겨울을 맞았을지도 모른다.
그제야 알 것 같았다. 단풍은 바람을 원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바람이 자신을 흔들고 떠나게 한다고 해서 원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바람은 빼앗아 가는 존재가 아니라, 이미 무르익은 시간을 다음 자리로 옮겨 주는 손길일 수 있었다.
우리 삶에도 그러한 바람이 있다. 예고 없이 찾아와 우리를 흔드는 이별과 병, 실패와 퇴직, 늙어 감과 사랑하는 이의 부재. 우리는 그 바람 앞에서 자주 억울해하며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묻는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뒤에야 깨닫는 때가 있다. 그 바람이 우리를 무너뜨리기만 한 것이 아니라 더는 머물 수 없는 자리에서 떠나게 했으며, 떠난 뒤에야 비로소 보이는 길도 있었다는 것을.
물론 모든 떠남이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어떤 이별은 오래 아프고, 어떤 상실은 말로 다독일 수 없다. 낙엽의 귀환이라는 말로 인간의 슬픔을 쉽게 덮을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슬픔 속에서도 삶이 완전히 꺼지지는 않는다는 것, 상실의 계절에도 마음 한구석에는 아직 붉게 남은 것이 있다는 것을 단풍은 조용히 보여 준다.
해가 높아지자 교정의 빛도 달라졌다. 젖은 낙엽마다 햇살이 스며들어 작은 불씨처럼 반짝였다. 나무는 많은 잎을 내려놓았지만 쓸쓸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긴 침묵 끝에 미소를 머금은 사람처럼 평안해 보였다. 비워진 가지 사이로 하늘이 더 많이 보였고, 그 하늘은 생각보다 푸르렀다.
나는 산문 앞에 한동안 서 있었다. 발밑의 낙엽을 밟지 않으려 조심하다가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다. 낙엽은 밟히기 위해 떨어진 것이 아니라 다음 생명을 품을 흙이 되기 위해 내려온 것일 터였다. 발밑에서 나는 바스락거림조차 그들의 귀환을 방해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한 걸음, 또 한 걸음을 옮기며 마음속으로 오래된 문장을 되뇌었다.
사람은 오래 살아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오래 사랑하여 아름다운 것이라고.
그 사랑은 젊은 날의 뜨거움만을 뜻하지 않을 것이다. 오래 믿어 주는 일, 오래 기다려 주는 일, 상처받은 뒤에도 마음을 닫지 않는 일, 떠나는 것을 미워하지 않고 축복할 수 있는 일. 그러한 사랑이 한 사람의 삶을 단풍처럼 깊게 물들일 것이다.
늦가을의 바람은 오늘도 나무를 흔들고 나무는 잎을 보낸다. 이제 나는 안다. 단풍은 바람 때문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제 시간을 다했기에 바람을 따라 조용히 돌아가는 것임을. 그리고 그 귀환의 길에서 가장 붉은 빛을 남기는 것임을.
[10] 嚴冬白雪(한겨울의 흰 눈)
仙界梨花逢暮春, 신선세계의 배꽃이 늦봄을 맞았는가,
爛漫翬下掩埃塵. 어지러이 휘날리어 홍진세계 뒤덮었네.
孫康古事君須記, 손강의 고사를 그대들은 기억하라.
映雪看書作上民. 눈빛에 책을 읽어 上民이 되었던 일을.
(2002년 5월 5일 採山 洪瑀欽 대구 수성서실에서 지음)
눈이 빛이 되기까지
사람은 오래 걸어온 길을 뒤돌아볼 때에야 비로소 하나의 풍경을 만난다. 걸을 때에는 모든 것이 제각기였다. 봄은 봄대로 피어났고, 여름은 여름대로 무거웠으며, 가을의 나뭇잎과 겨울의 바람은 저마다 다른 얼굴로 곁을 스쳤다. 그때의 나는 풍경 속을 지나가는 사람이었다. 산은 늘 앞에 있었고, 강물은 아래로 흘렀으며, 꽃은 피었다가 지는 것으로 제 일을 다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뒤 돌아보면 흩어져 있던 계절들은 하나의 긴 문장이 되어 있다. 꽃과 바람과 비와 눈이 한 사람의 마음에 밑줄을 그으며 지나간 것이다. 자연이 사람을 닮아 가는 것이 아니라, 자연 곁을 오래 걸은 사람이 끝내 자연을 닮아 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봄은 피어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여름은 뜨거운 날들을 견디는 법을 알려 주었다. 가을은 비워진 자리에도 빛이 머문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고, 겨울은 모든 것이 멎은 듯한 시간에도 생명이 땅속에서 제 뿌리를 놓지 않는다는 것을 일러 주었다.
처음에는 산을 보러 길을 나섰다. 산마루에 걸린 구름을 보고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이름 모를 꽃 앞에서 카메라를 들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풍경보다 그 풍경을 바라보는 내 마음이 더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같은 길을 걸어도 어떤 날에는 희망을 만났고, 어떤 날에는 오래된 그리움과 마주했다. 해마다 같은 자리에 피는 꽃인데도 그 꽃 앞에 선 사람의 마음은 한 해도 같지 않았다.
구름은 아무 말 없이 흘러갔지만, 나는 그 속에서 지나온 세월을 보았다. 길가의 들꽃 한 송이는 오래 만나지 못한 벗처럼 다가왔다. 그때 알았다. 자연은 새로운 것을 보여 주기보다 우리 안에 오래 숨어 있던 것을 비추어 준다는 사실을.
그래서인지 나이가 들수록 화려한 절경보다 작은 장면들이 더 오래 남는다. 비가 그친 뒤 돌계단 위로 번지던 옅은 햇살, 바람이 지날 때마다 몸을 낮추던 갈대, 사람 없는 정자에 고여 있던 고요, 어느 날 발밑에서 조용히 바스러지던 낙엽 한 장. 그런 것들이 삶의 가장 깊은 문장을 만들어 주었다.
젊은 날에는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 중요했다. 더 멀리 가야 했고 더 높은 곳에 닿아야 했다. 그러나 이제는 잠시 멈추어 바라보는 일이 더 귀하게 느껴진다. 멈춤은 뒤처짐이 아니었다. 삶이 지나간 자리를 읽는 또 하나의 방식이었다.
자연은 그렇게 조금씩 스승이 되었고 계절은 글자 없는 책장이 되었다. 그 책에는 문장이 없었으나 빛과 바람, 기다림과 침묵이 있었다. 침묵은 아무것도 들려주지 않는 시간이 아니었다. 말이 많을 때에는 듣지 못하던 것들이 그 속에서 천천히 목소리를 냈다. 나뭇가지가 바람을 견디는 소리, 얼음 아래로 물이 흐르는 소리, 마음 깊은 곳에 묵어 있던 생각이 방향을 바꾸는 소리.
그 침묵의 끝에서 나는 겨울을 만났다. 눈이 내리던 날이었다. 산과 들과 지붕과 길이 밤새 누군가의 손길을 받은 듯 하얗게 변해 있었다. 세상은 소리를 잃은 것이 아니라 흰빛 속으로 제 소리를 감춘 듯했다. 가지마다 내려앉은 눈은 계절을 잘못 찾아온 배꽃 같았다. 한겨울인데도 늦봄의 뜰을 바라보는 듯했다.
옛사람은 이 풍경을 선계의 배꽃이 어지러이 흩날려 세속의 먼지를 덮는 모습이라 노래했다. 정말 그러했다. 눈이 세상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은 아니다. 눈 아래의 흙도, 사람의 마음속 번다함도 그대로일 것이다. 다만 눈은 잠시 모든 것 위에 순백의 천을 덮어 우리가 너무 오래 보지 못했던 것들을 새롭게 바라보게 한다.
창밖의 눈을 바라보다가 진(晉)나라 손강(孫康)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등잔기름을 마련할 수 없었던 젊은 선비는 눈 내린 밤, 창문 틈으로 스며드는 희미한 빛에 책을 펼쳤다고 한다. 그에게 눈은 추위였을 것이다. 가난을 더 깊게 만드는 겨울의 적막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그 차가운 흰빛 속에서 책을 읽을 수 있는 빛을 발견했다.
생각할수록 마음이 머문 것은 그가 훗날 높은 자리에 올랐다는 사실이 아니었다. 눈 내리는 밤, 차가운 창가에 앉아 책장을 펼쳤을 한 사람의 뒷모습이었다. 세상은 어두웠고 손은 시렸으며 글자는 눈빛처럼 희미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책을 덮지 않았다. 어쩌면 사람의 삶을 바꾸는 것은 크고 찬란한 빛이 아니라, 꺼지지 않으려 애쓰는 작은 빛인지도 모른다.
우리에게도 저마다의 겨울이 있었을 것이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고 느끼던 때, 앞날이 보이지 않던 날, 마음속의 등불마저 흔들리던 시간이 있었을 것이다. 그때 우리는 겨울이 다만 지나가기만을 바랐다. 그러나 지나온 세월을 돌아보면 우리를 더 깊게 만든 것은 따뜻한 봄날보다 그런 차가운 계절이었음을 알게 된다. 겨울은 꽃이 피지 않는 계절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뿌리가 힘을 기르는 계절이다.
눈은 오래 머물지 않는다. 햇살이 들면 녹고 길은 다시 본래의 빛깔을 드러낸다. 그러나 눈 내리던 날 마음에 비친 빛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한때는 추위로만 여겼던 시간이 훗날 나를 비추어 준 빛이었음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면 내가 만난 수많은 풍경은 모두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산을 오르던 발걸음도, 꽃 앞에 멈추던 눈길도, 강물을 따라 흐르던 사색도, 마지막에 만난 겨울의 흰 눈도 결국 내면을 향한 길이었다. 인생은 더 높은 곳에 오르는 일이 아니라 조금 더 깊은 사람이 되어 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제 나는 풍경만을 보러 길을 나서지 않는다. 풍경이 내 안에서 다시 피어나는 시간을 만나러 길을 나선다.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서 마음의 소리를 듣고, 눈이 내린 자리에서 아직 꺼지지 않은 빛을 찾는다.
언젠가 내게도 마지막 겨울이 찾아올 것이다. 그때에도 나는 너무 두려워하지 않으려 한다. 창밖에 내리는 눈이 더 이상 차가운 흰빛으로만 보이지 않을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 눈은 오래전 손강의 책장을 비추었던 것처럼, 아직 읽지 못한 삶의 마지막 페이지를 조용히 밝혀 줄 것이다.
https://youtu.be/A4Xskq4icb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