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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호 & 이유비 - 취향저격
“책 안 가져온 것들 다 일어나.”
“…….”
“변백현 넌 또 안 가지고 왔니?”
“…….”
“몇 번이야.”
“13번이요.”
“다음에도 안 가지고 오면 그땐 태도 점수 2점 깎일 줄 알아.”
“네.”
듣기 거북한 의자 끄는 소리를 내며 다시 자리에 앉는 변백현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여간 고통스러운 게 아니었다. 꽤 주눅이 든 표정으로 옆 짝궁과 함께 나란히 책을 보고 있는 모습은 충분히 날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에 내 시선은 자연스럽게 변백현에게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고맙다고 말이라도 할 텐데, 죽었다 깨도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릴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는 듯싶었다. 이럴 때에 더 미안하라고 하는 건지, 평소보다 더 열정적으로 책에 눈을 파묻고 있는 모습 또한 나를 답답하게 했다. 한참을 미안한 마음으로 놈의 표정을 살피다 이내 누군가 내 어깨를 툭툭 치는 느낌이 들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니……. 젠장, 곤란한 상황의 연속이다.
“○○이 너는 뭘 그렇게 보니?”
“네? 아니요…….”
“뭐가 아니야? 백현이 훔쳐보는 거?”
“우오오오…….”
“…….”
“아니면 백현이 몰래 쳐다보는 거?”
“오오오오…….”
“아니면 수업시간인 것도 잊고 백현이 눈치 보는 거?”
“우와아아아!”
“…….”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내가 대답하기 어려울 말들만 골라서 질문하시는 선생님 덕분에 창피함은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치솟기 시작했다. 굳이 거울을 안 봐도 내 얼굴 색깔은 잘 익은 홍시가 되었음에 확신했고, 추운 겨울 날씨에 두껍게 껴입은 옷은 나를 더 후끈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애써 아니라고 미소 지으며 연신 손부채질을 했다. 그러나 이미 수업을 1분이라도 피할 건수를 잡은 아이들은 나와 변백현을 번갈아 쳐다보며 놀리기에 바빴다. 도저히 고개를 돌릴 수 없을 것 같았다. 제 입장에서 자기를 쳐다보다 걸렸다 하면 얼마나 난감하고 어이없을까. 속에서 누군가 가슴을 망치로 쾅쾅 내리치는 느낌이었다. 이 과정에서 최대한 오버하지 않고,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은 멈추지 않고 손 사레를 치는 일이었다. 그래봤자 내 말을 믿어줄 리가 없었다. 억울한 감정에 눈물이라도 나올 것 같았다. 변백현에게는 뭐라고 설명하느냐, 이것도 중요했다. 안타까운 상황의 연속이었다. 여러 가지 일들은 늘 한 번에 겹치곤 했었다. 특히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순간에는 늘 그랬다. 꽉 막힌 터널은 빛을 보여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지금 나도 마찬가지였다. 출구는 보이지 않았다. 수업이 끝났다고 해서 오해는 풀리는 게 아니었다. 주로 여자아이들의 오해는 이런 식으로 시간이 지나면 비밀이 부풀려지고 하는데 오늘의 희생양은 나였다. 지독하게도 젠장 맞은 날이었다.
“야, ○○○ 뭐야? 너 진짜 변백현이랑 사귀어?”
“무슨 소리야, 아니라니깐!”
“진짜 변백현이랑 그런 거면 대박! 어떻게 그래? 난 아직 말 한 마디도 못 해봤는데.”
“야, 그럼 변백현 친구 소개 좀 해주면 안 돼?”
“나도, 나도!”
“그런 거 아니라니까? 설레발치지 마.”
벌게진 얼굴로 냅다 소리를 지르고 교실 밖으로 몸을 피신했다. 이대로 화장실이라도 가서 억울함이 풀릴 때까지 손이라도 씻고 오자는 심산이었다. 오해를 풀 수는 없으니 그렇게라도 하자는 거였다. 원칙대로라면 변백현에게 가서 미안하다고 하는 게 답이었지만, 내 용기는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정말 기분이라도 나빠하면 어쩌느냐 이 말이었다. 그러자 또다시 아까의 상황이 겹쳐 혼돈됐다. 일단 몸을 숨기는 게 답이었다. 안 그랬다간 너무 뜨거워 익어버릴지도 모르겠다. 과장은 아니었다. 걸음을 재촉하는 내 앞으로 누군가 멈춰 서는 느낌이 들었다. 자연스럽게 몸이 저릿해졌다. 굳어버린 고개는 움직일 생각을 못했다.
“야, 변백현 어디 있는지 아냐.”
“어? 김종인?”
안도의 탄식이 새어나왔다. 날 부르는 음성이 변백현이 아니라 김종이라는 걸 확인했음에 그랬다.
“변백현 봤냐고.”
“아, 변백현 반에 있을……걸.”
“없으니까 내가 지금 너한테 물어보는 거잖아.”
“아, 어디 갔지? 도경수랑 있는 거 아니야? 그때 보니까 도경수랑 변백현이랑 아는 사이던데…….”
“……야.”
“응?”
“너 모르냐?”
“뭐를?”
“도경수랑…….”
“나 뭐? 왜 내 얘기해.”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귀신같이 달려와 내 앞에 서는 경수였다. 양반은 못 될 상이였다. 실없는 생각을 하니 작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오만상을 찌푸리며 그런 나를 마치 괴상망측한 괴물 보듯 취급하는 김종인도 눈에 들어왔다. 김종인이 날 그렇게 생각하는 건 상관없었다. 도경수가 아니라면 그만이었다. 속물 같아도 뭐 어쩌겠느냐. 사실인걸.
“왜 혼자 웃고 난리야, 소름끼치게.”
“아, 그냥 웃긴 생각이 나서…….”
“네가 변백현이랑 친한 이유를 알겠다, 앞에 여자가 있는데 여자랑 있다는 생각이 안 드네.”
“뭐? 말이라고 하냐?”
“그럼 뭐 거짓말이라도 해? 너 솔직히 말해 봐. 그 새끼랑 어떻게 친해졌어? 변백현 원래 여자친구는 존나 바꿔도 여사친은 안 만드는 앤데 이상하잖아. 너 설마 변백현이랑 사겨?”
“뭐? 아, 무슨 개소리야!”
“…….”
“…….”
“……존나 단호하네. 와, 백현이 ○○○한테 차였네.”
“아, 뭘 차여. 오버 좀 하지 마…….”
“뭐 화내는 거 보니까 숨기는 게 있네, 있어.”
“아니라니까?”
숨기는 건 있었다. 예를 들면 내가 도경수를 좋아한다거나, 좋아해서 연애코치를 받고 있다는 거나, 그래서 내 지갑이 점점 가벼워지고 있다는 거나. 김종인은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일이었다. 쌉쌀한 맛의 긴장감을 마른 침과 함께 삼켜버렸다. 괜한 쓸데없는 시간낭비였다. 김종인 뒤에 숨어 조용히 침묵을 지키는 경수를 보고 있자니 멀쩡했던 가슴께가 또 멋대로 뒤틀리기 시작했다.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반응했다. 심각한 질병이었다. 웃는 모습을 보고 싶은데 경수는 그럴 생각 따위는 없는 듯싶었다. 분명 처음 왔을 때와 표정이 확연히 다르게 느껴졌다. 당장이라도 험한 말이 나올 것 같은 입이었다. 그에 이번엔 다른 느낌으로 심장이 반응했다. 좋아하는 사람 앞에선 이렇게 한없이 힘없는 약자로 변하는 게 일종의 순리였다. 혹시 내가 놈을 기분 나쁘게 한 말을 했나 싶었다. 그래봤자 꽉 막힌 것을 뚫어버릴 답을 찾을 리가 없었다. 놈의 감정을 쉽게 눈치 챘다면 바보 같이 조마조마할 이유도 없었을 테니까. 의미 없는 대화는 계속되었다. 사실 정확히 말하면 김종인과 나만의 대화, 그 옆에서 경직된 얼굴로 침묵을 지키고 있는 도경수였다. 어떻게든 분위기를 바꿔보려 시답잖은 이야기로 분위기를 환기시켜보려 했지만, 변백현이 없으니 막상 아무것도 못 하는 병신이 돼버리고 마는 나였다. 나도 모르게 놈의 빈자리는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 점점 목울대에 떨림이 느껴졌다. 피멍이 든 것 같은 기분은 울먹임으로 번져왔다. 추한 모습을 보여줘서는 안 된다. 변백현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했다.
“둘이 뭐하냐?”
“…….”
“왜 나빼고 ○○○이랑 이야기…….”
언제 나보다 더 빨리 나온 건지 한쪽 손에 핫바가 들려있는 것으로 보아 매점에 다녀온 것이 확실해진 순간이었다. 변백현의 타이밍은 실로 기가 막혔다. 놈의 도움이 필요했을 때였다. 그건 마치 내가 변백현에게 처음으로 느꼈던 기분이었다. 정의감, 의리감……. 단순하게는 정의내릴 수 없는 그런 기분.
“변백현, 김종인이 자꾸 너랑 나 엮잖아.”
“…….”
“빨리 도경수랑 김종인 오해하기 전에 네가 해명해줘.”
능청맞게 내 옆으로 다가와 김종인에게 말을 걸어오던 변백현의 휘어진 눈 꼬리가 일순간 제 자리로 돌아온 건 몇 초가량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 시선을 따라가면 짐작컨대, 도경수앞에 멈춘 게 분명했다.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양쪽을 번갈아 바라보며 무어라 말이라도 해주기를 바랐지만 그런 내 소박한 기대는 이내 자잘하게 조각나버리고 말았다. 그 침묵을 깬 건 다름 아닌 경수였다. 이건 내 예상 밖의 일이었다.
“……나 먼저 들어갈게.”
“아, 도경수 잘…….”
“추워 죽겠는데 너도 들어와라, 나도 먼저 갈게.”
“……야, 변백현.”
사면초가의 상태인 내 앞에 변백현이라는 흑기사가 나타났다며 뼛속 깊이 진한 안도의 한숨을 내셨던 건, 채 1분도 지나지 않았다. 흑기사가 왔으니 이제 어떤 거지같은 말이라도 세상에서 가장 예쁜 말로 만들어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허나 변백현이 내 앞으로 다가오자마자 도망치듯 걸음을 떼는 경수였고, 그에 이어 이어달리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등을 보이는 변백현이었다. 한바탕 쓰나미가 지나간 후, 벙찐 얼굴로 유일하게 남아있는 김종인만 뚫어져라 응시했다. 내가 잘못한 게 있으면 속 시원하게 집어 달라 이 뜻이었다. 허나 그런 내 속을 눈치 못 챈 건지 김종인은 그저 낯선 한숨을 내뱉을 뿐이었다. 내 심장을 조여 오는 상황과 의미 없는 싸움을 치렀다. 이미 승패는 정해져있다. 이번에도 힘없는 약자는 먼저 입을 열고 만다.
“내가 뭐 실수했어?”
“실수? 그걸 지금 실수라고 생각한 거냐?”
“나 실수한 거 맞아?”
“실수가 아니라 잘못이지. 너 변백현이랑 친하다면서 그것도 몰라? 아, 변백현 그 새끼가 말 안 해줬을 수도 있네.”
“……왜?”
아름다운 음색의 종소리가 놈과 내 사이에 울려 퍼졌다. 이어 아이들은 분주하게 이야기를 나누던 친구들과 아쉬운 작별인사를 건네며 제 반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고, 선생님들 또한 한 손에는 두꺼운 책을 끼고 각자의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를 확인하기에 바빴다. 그리고 김종인의 이야기를 들은 난 두 손을 들어 놀란 제 입가에 가져다댈 수밖에 없었다.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떠보고, 또 그 행동을 반복할 뿐이었다. 금방이라도 다리에 중심을 잃어버릴 것 같았다. 이건 모두 김종인의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라고 정의했다. 하나둘씩 우리 반 아이들도 음악책을 들고 교실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음악실로 가기 위함이었다. 머지않아 변백현 또한 그랬다. 가늠할 수 없이 작아진 양심은 놈에게 향해있던 내 두 눈을 거두게 만들었다. 이것 또한 김종인의 말 때문이었다.
“내가 뭐 실수했어?”
“실수? 그걸 지금 실수라고 생각한 거냐?”
“나 실수한 거 맞아?”
“실수가 아니라 잘못이지. 너 변백현이랑 친하다면서 그것도 몰라? 아, 변백현 그 새끼가 말 안 해줬을 수도 있네.”
“……왜?”
“둘이 작년에 싸웠어. 그것도 존나 크게.”
“뭐?”
“미쳤다, 어쩐지 존나 해맑게 변백현 부른다 했어. 도경수 아까 내가 변백현 이야기 했을 때부터 기분 안 좋았잖아.”
“…….”
“근데 넌 지금 무슨 짓까지 한 줄 알아?”
“…….”
“서로 존나 싫어하는 애들끼리 강제로 얼굴 맞대게 한 거라고 지금.”
“…….”
“잘하는 짓이다.”
조였던 스프링을 탁하고 놓은 듯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이고 마구잡이로 머리칼을 흔들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애매한 기분 때문이었다. 사실 더 정확히 결론을 내리자면, 미안함과 죄책감이 제일 컸다. 놈이 이제야 내게 도경수와의 관계를 말 해줬다고 한들, 내가 좋아하는 건 도경수고, 그 전에 변백현과의 갑 과 을 관계는 이미 정해졌기 때문이었다. 이번엔 고개를 왼쪽 방향으로 틀어 놈이 바보같이 나를 도와줬던 이유가 뭐일까 생각해봤다. 아무리 그래도 싸운 애라면서, 싸웠던 애랑 잘 되라고 연애코치를 해줘? 그건 상식적으로 이해불가다. 적어도 내 입장에서는. 약간의 귀띔은 해줘야 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내가 미웠을 거였다. 내가 변백현이라면 그랬다. 그러고도 남았다. 자기가 싸웠던 애를 좋아한다며 이어달라고 구차하게 부탁까지 하다니, 저 딴에는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 그러고 보니 내게 심심한 밑밥도 적지 않게 투척했던 놈이었다. 예를 들면, 돈가스를 먹던 날 은근슬쩍 도경수와의 관계를 언급했던 것. 그걸 눈치 채지 못한 건 내 탓이었다. 소스라치는 민망함에 엎드린 상태에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음악실에선 잔잔한 클래식이 연속으로 흘러 나왔다. 잔잔한 분위기는 나를 더 조이고 있었다. 온몸이 뒤틀렸다. 당장이라도 책상을 밀고 음악실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었다. 연애코치고 뭐고 변백현 저 새끼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얼마나 두꺼운 철판을 깔고 보냐 이 말이었다. 한참을 고개를 숙인 채로 내가 지을 수 있는 온갖 괴상한 표정이란 표정은 다 짓기 시작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발끝에서부터 저려오는 무안함을 견딜 수 없을 거 같았으니까. 이해 못할 내 행동은 교복 마이 주머니에서 울리는 휴대폰 진동 소리에 의해 잠시 중단되었다. 하늘이 보다 못해 중지시킨 건가 하는 시시한 생각도 들었다.
[변백현]뭔 생각해
변백현이었다. 놈은 내 미친 짓을 잘도 구경하고 있었나보다. 그럴수록 내 입꼬리는 더 축 늘어졌다. 한참을 모니터만 응시하고 있었다.
[아무 생각 안 해]
[변백현]웃기고 있네 김종인이 자기가 말했다고 했어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어떻게 안 미안…….]
이 부분에서는 황급히 뒤로 가기 버튼을 눌렀다. 괜히 어색한 상황을 만들지는 말자는 뜻이었다. 한 번 헛기침을 하곤 다시 키패드를 꾹꾹 눌러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변백현의 얼굴을 보지는 못한 채.
[알겠어, 이따가 다시 얘기하자]
‘이따가 다시 얘기하자’
대체 무슨 심보로 저딴 말을 아무렇지 않게 지껄인 건가 싶었다. 난 변백현의 얼굴을 볼 용기도, 말할 자신도 없었다. 병신 코스프레 한번 제대로 했구나. 더 이상 죄책감에 휘말려 속까지 새까맣게 타기 전에 빠르게 인정을 하는 게 내게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창피해도 수업은 잘도 진행되는 구나. 모두들 수업이 끝나는 종소리와 함께, 엎드려 얼굴 한번 안 비추던 종족들도 오뚝이 인형마냥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곤 했다. 그와 같은 의미는 아니라도, 수업 종이 치자마자 발등에 불이라도 나랴 발걸음을 빠르게 옮기면.
“멍청아.”
“…….”
“왜 도망가.”
“아…….”
매번 까먹는 사실이 있는데 놈은 남자고 난 여자였다. 아무리 전속력을 다해 뛰어도 나 하나쯤을 잡으려고 뛰어오는 남자를 따돌린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하하’하고 듣기에도 어색한 웃음으로 상황을 무마하려 광대를 올렸다. 힘을 주어 그런지 살짝 떨리는 경련이 날 더 애처롭게 만들었다. 뭐라 할 말이 있을까. 둘이 싸웠냐는 거 왜 말 안 해서 나를 나쁜 년으로 만드냐고? 눈치 없는 년으로 만드냐고?
“왜 도망가. 나한테 화났어? 사이 안 좋은 거 미리 말 안 해줘서?”
“아, 아니? 그게 왜? 오히려 네가…….”
“나도 말하고 싶었어, 그래서 너랑 도경수랑 이어주기 싫다고 핑계라도 대보려고 했는데……뭐 싸운 이유를 알아야 핑계라도 대지.”
“이유를 모른다고?”
“몰라, 그런 거. 왜 싸운 건지.”
놈의 말꼬리가 애연한 느낌과 함께 보기 좋게 잘려나갔다. 더 이상 그 뒤를 잇고 싶지 않은 듯 윗니로 자신의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어버리는 변백현이었다. 그 모습에 자연스럽게 눈썹 사이가 좁혀진 건 나였다. 어떠한 말도 해줄 수 없었다. 내 입장에선 놈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짜릿하게 올라오는 한숨을 망설임 없이 토해낼 뿐이었다. 분명 왜 그 상황에서 그렇게 눈치 없이 행동했냐며, 하필이면 도경수를 좋아했냐며 나를 쏘아댈 거란 예상은 보기 좋게 반대 방향으로 어긋나버렸다. 핀트는 완전히 다른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욱신거리는 감정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그건 아마 날 신경 쓰이게 만드는 표정을 짓고 있는 변백현 때문일 거다. 놈은 도저히 시선을 내게로 돌릴 생각을 안 했다. 누가 보면 네가 잘못한 줄 알 거다. 사실 변백현의 키는 그렇게 큰 편도 작은 편도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내가 놈과 눈을 마주하려면 고개를 들어야함은 분명했다. 계속 아래로 떨어져있는 눈을 조금이라도 바꾸고 싶었다. 정작 그 싸움이 크거나 작더라고 한들, 누구의 잘못이 크다고 한들, 그건 나하고 상관없었다. 난 지금 그걸 보고 경수를 좋아하고, 백현이와 이야기하는 게 아니었으니까. 살짝 뒤꿈치를 들고 뒷목에 힘을 주었다. 이어 놈의 머리 위로 손을 뻗었다. 갑작스러운 내 행동에 쌍꺼풀 옅은 눈을 크게 뜨며 놀란 눈을 하는 놈이었다. 그 모습은 가히 캡쳐감이었다. 짤로 만들 수 있다면 유용한 카톡짤로 쓰고 싶었다. 그 우스꽝스러운 상황에서도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딱 하나였다. 사실 아까 전부터 억누르고 절제했던 말인데 지금은 다른 의미였다. 아까는 죄책감이었다면, 이번에는 부담감을 덜어주기 위한 수단이었다.
“나랑 도경수 이어주는 거 싫으면 안 해도 괜찮아.”
“…….”
“지금까지도 엄청 친해졌고, 너 계속 불편하면 그만 해도 괜찮으니까…….”
“아니.”
“…….”
“내가 도경수랑 싸운 것도 맞고, 처음에는 걔 좋아한다는 너도 이해 안 가고 별로였는데, 지금은 아니거든.”
“…….”
“그것만 알아둬라, 나 요즘 엄청 재밌는 거.”
“…….”
“하나도 안 불편하고, 하나도 안 싫어. 지금이 좋아. 그건 확실해.”
그럴 줄 알았다. 배려 따위 집어치우라는 식으로 말할 줄 알았다. 그게 내가 느낀 변백현이었다. 사실 기대를 하고 말한 건 아니었다. 내 입장이 곤란해질 거라는 것쯤은 각오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놈이 싫지 않다고 말해주는 게 그렇게나 고마울지는 생각도 못했다. 드라마 속, 눈치 없는 답정너 캐릭터가 된 기분이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심장이 찌릿했다. 잔잔했던 파도가 바람에 의해 한번 들썩였다. 바위들은 특유의 시원한 소리를 내며 묵묵히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바다는 다시 고요해졌다. 내 앞에 있는 변백현도 이어 눈이 휘어지게 웃음을 지었다. 그에 난 조금 과장된 미소를 보였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내가 보기에는 도경수가 너 안 싫어하는 거 같거든? 우리 다음 단계 들어가자.”
“뭘 얼마나 봤다고 나를 안 싫어해…….”
“그래, 좋아하는 게 아니라 안 싫어한다고. 왜 혼자 착각이야?”
“……아, 말을 그렇게 하는데 그럼 착각을 안 해?”
“그러니까 네가 짝사랑을 한 달이나 하는 거지.”
“뭐? 야, 뒤질래 진짜?”
“이거 성공하면 나 진짜 스파게티.”
“안 해, 스파게티가 얼마나 비싼지 알……!”
“도경수 매일 야자 하는 거 알지? 너 존나 도경수 스토커니까 그건 당연히 알 테고……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상대를 만나면 그 사람을 생각하는 이미지가 좀 특별해질 수도 있거든?”
“…….”
“물론, 상대가 너를 안 싫어하고 장소가 보편적이라는 조건 하에서만. 들키고 싶지 않은 곳이라면 오히려 마이너스니까.”
“그래서 나 뭐 어떡해야해……?”
“너 오늘 나랑 야자 해.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다 할 테니까.”
반사적으로 허탈한 감정의 호흡이 새어 나왔다. 원래 성격 자체가 오랜 시간 앉아서 공부 따위를 하는 스타일이 아니라 별별 이유로 빠질 수 있는 야자는 다 빠지고 했던 나였다. 다소 협박적인 어투에 일단 바람 빠진 풍선처럼 기어가는 모기소리로 알겠다고 대답하기는 했지만 아무런 계획도 모르니 꽉 막힌 가슴은 풀릴 생각을 안 한다는 게 문제였다. 저녁 늦게까지 학교에 남아있어야 한다는 건 늘 최악이었다. 양 손으로 감싸고 있는 음악책에 더 힘을 주며 씁쓸한 맛의 신음만 연신 내뱉고 있는 내 모습이 뭐가 그렇게 웃긴지 뭔가 건수를 잡은 사람처럼 음흉한 미소를 띤 채로 나를 내려다보는 변백현이었다. 그 모습은 가히 변태가 따로 없었다.
“시키는 대로나 하세요, 내 말 들으면 뭐가 올지 알고.”
이어 오른 손을 들어 내 머리 위로 가볍게 올렸다. 5초도 안 되는 그 짧은 시간에 손길은 빠르게도 떨어졌다.
“가자, 밥통아.”
그건 놈에게 두 번째로 밥통이라 불리던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