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신 장군은 삼국통일을 이룩한 신라의 장군으로 태대각간에 올랐다. 역사상 왕이 아니면서 왕의 칭호를 가진 유일한 인물이다.
아래 내용은 내려 받은 것으로 후손들에게 유익한 자료이므로 소개한다.
도독공(휘서현)이 만로군 태수로 있을 때인 갑인(594)년 경진일 밤에 꿈을 꾸니 염혹성과 진성 두 별이 내려왔다. 모친도 역시 꿈에서 어린아이가 쇠로 만든 갑옷을 입고 구름을 타고 방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임신한지 20개월만에 아이를 낳으니 진평왕 17년 을묘(595)년이었다. 등에는 7개의 별 그림이 있었다. 군(만로군)에 태령산이 있으니 즉 태를 묻은 곳으로서 후에 길상산이라 이름 붙였다.
도독공(휘서현)이 말하기를 ‘내가 경진일에 길한 꿈을 꾸어서 이 아이를 얻었으니 마땅히 이를 이름으로 해야 하나, 예기에 따르면 날짜를 이름으로 할 수 없으니, 경(庚)은 유(庾)자와 비슷하고 신(辰)은 신(信)과 음이 거의 같다’ 고 하니 결국 이름이 유신(庾信)이 되었다.
공은 어려서부터 큰 뜻이 있어서 15세에 화랑이 되어 용화향도라 불리었으며, 커서는 신라 태종무열왕을 보좌하여 7년 경신(660)년에 백제를 멸망시키고, 대각간에 올랐다. 문무왕 5년 을축(665)년에 당나라의 고종이 봉상정경/삼십육도장/대사마/대원수/금은자광록대부/병부상서/평양군개국공의 호를 내렸다.
8년 무진(668)년에 고구려를 멸망시킬 때, 공은 명령을 받들어 도성의 진중에 남아 <적을 쳐부수는> 방책을 공의 동생인 흠순과 김인문 등에게 알려주어, 고구려를 멸망시켜 삼한의 통합을 이루어내어 태각간으로 승진하였다. 문무왕 13년 계유(673)년 7월1일에 돌아가시니 나이는 79세였다. 장례는 경주 서쪽의 송화산 금산원의 해좌에 지냈다.
왕이 부고를 듣고 애통해 하며 비단(采帛) 1천필과 식량 2천석을 내리고, 군악대의 취주대를 보내어 장례에 따르게 하였다. 또 국자감의 박사 설인선에게 명하여 비문을 찬술하게 하고 공덕을 기리게 하였다. 흥덕왕 10년 을묘(835)년 2월 순충장렬흥무대왕이란 시호를 추증하였다.
신도비문은 대제학 황경원이 찬하였으나 지금은 없고 부윤 남지훈이 묘지를 찬하였다. 정조 임자(1792)년 납릉에 치제하고 제사에 쓸 향축을 내려 주었다. 융희 기유(1909)년 관원에게 명하여 축문을 내리라고 명하고 숭선전에서 함께 치제하였다. 공의 위대한 공훈과 높은 치적은 역사책(竹帛)에 실려 있으니 <여기에> 전부 다 기록할 수 없다. 경주 문천의 근방에 옛 집인 유허지가 있는데 재매정택이라 하며 비석을 세워 부윤 이만운이 찬술하였다.
경주에 있는 능에는 한식일과 한로일에 제사를 드리고 있고, 서악서원과 진천의 길상사/진주의 남악사/수원의 금산사/광주의 창열사에서는 8월 15일에, 군위의 효령사는 5월5일에, 강릉의 화부사에서는 5월5일과 10월15일에, 부안의 개암사에서는 3.9월15일에, 고창의 백양사에서는 동짓날에 제사를 드린다. 풍기의 죽령위에 위패가 있고, 영변의 묘향산에는 영정각이 있으며, 부여에는 평제비(백제를 평정한 비)가 있고, 중국의 낙양의 큰 길에는 공덕을 칭송하는 비가 있다.
부인은 평양군 부인으로 월성김씨로서 또는 지소부인이라 하고 또는 재매부인이라고도 하는데, 흥무대왕비의 존호가 주어졌다. 이 분은 신라 태종무열왕의 세 번째 공주로서 성덕왕 11년 임자(712)년 왕이 부인에게 이르기를 ‘지금 나라 안과 바깥이 평안하고 임금과 신하가 베개를 높이베고 아무 일이 없는 것은 태각간의 덕택이다. 부인은 마땅히 그 집안이 공경을 받아야 하고 풍족해져야 할 것이다. 과인은 그 공덕에 보답하고자 하여 마음으로 잊어버리지 않고, 남쪽의 성(南城)과 곡식 1천석을 내린다.’라고 하였다. 묘소는 잃어버렸다.
삼국유사를 보면 김씨인 재매부인이 죽자 청연의 상곡에 장사지내고, 매년 봄에 종씨의 여자들이 그 고을의 남쪽에 모여 연회를 베풀었다. 보기 좋을 때에는 수많은 꽃을 흩뿌리고, 소나무 꽃가루가 동네에 가득 찼으며, 부림곡의 입구에는 다리를 놓아 그 암자의 이름을 송화방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경주 현곡면의 송현과 천북면의 청연 등과 비슷하나 확실한 증거가 없으니 넓게 살펴서 검토해 보아야 한다.
김유신 장군 영정
김유신 장군
김유신 장군 생가 (충북 진천군)
김유신 장군 생가에 있는 흥무대왕(興武大王) 김유신(金庾信) 유허비(遺墟碑)
연호정, 김유신 장군의 아버지 김서현 장군이 신라시대 만노군 태수로 있을 때 치소(治所)에서 사용되었던 우물, 직경 0.8m, 높이 2.6m. 이 우물은 태령산(김유신 장군의 태실이 있는 산) 중턱에서 나오는 지하수로 아무리 가뭄이 심하여도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김유신 장군의 태실, 태령산 정상에 자연석으로 둥글게 기단을 쌓고 봉토를 마련하였으며, 삼국사기와 지리지에 김유신 장군의 태를 묻은 곳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지금까지 남아있는 태실 가운데 가장 오래된 태실 축조 형식이다.
진천 사곡리 단석, 김유신 장군은 15세에 화랑에 입문하여 최고의 자리인 국선에 올랐으며 삼국사기에 의하면 화랑에 입문하여 수련하던중 난승이라는 도인을 만나 삼국통일의 비책을 받았다고 한다. 이 단석은 크다란 바위를 칼로 쳐서 잘라 놓은 듯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김유신 장군이 화랑에 입문한 이후 수련하였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는 장수굴과 인접하여 있어 수련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여 진다. 또 한 경주 인근에 있는 단석산에서 수련했다는 설이 있다. 실제로 단석산 정상에 칼로 자른 듯한 바위가 있다.
중악석굴, 이정표가 없어서 마을 주민들에게 물어서 갔었는데 지도에는 중악석굴로 되어 있지만 마을 주민들은 장수굴로 알고 있다.
석굴 옆에는 진천 사곡리 마애여래 입상이 있다.
진천 길상사, 절이 아니고 김유신 장군의 사당이다.
경주 김유신 장군 동상
興武門, 김유신 장군 墓 입구
김유신 장군 墓
소재지 : 경주시 충효동 송화산(松花山)에서 남쪽으로 뻗어 내린 구릉의 끝에 위치한다. 둘레 50m, 지름 18m, 높이 5.3m
아래쪽에는 높이 1.2m의 十二支神像을 새긴 보호석이 둘러져 있다. 십이지신상은 평복을 입고 무기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몸은 사람의 형체이고 머리는 동물 모양이다.
墓 앞에 있는 碑石, 開國公 純忠壯烈 興武王陵
이 비석의 마지막자는 비가 오면 墓자로 보인다고 한다.
新羅 太大角干 純忠壯烈 興武大王 金庾信 神道碑
이 비석은 삼국토일의 위업을 달성한 김유신 장군(595 ~ 673)의 일대기를 기록한 신도비이다. 김유신은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九衡王)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管山城 전투에서 백제의 聖王을 사로잡은 金武力 장군이다. 아버지는 萬努郡 현 진천 태수를 역임한 소판(蘇判) 金舒玄 이고, 어머니는 숙흘종(肅訖宗)의 딸인 萬明夫人이다. 신라 眞平王 17년(595)에 만노군에서 출생하였으며 젊어서는 화랑으로서 수많은 낭도들을 이끌며 中岳石窟 등 명산대천에서 수련하며 기상을 키웠다. 벼슬길에 나아가서는 탁월한 전략과 전술을 구사하여 밖으로는 백제와 고구려를 상대로 수많은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나라를 지켰으며 안으로는 비담(毗曇)과 염종(廉宗)의 반란을 진압하여 나라를 안정시켰다.
眞德女王이 후사없이 훙거(薨去)하자 金春秋를 太宗武烈王으로 옹립하였으며, 삼국통일 전쟁의 신라군 총수로서 백제와 고구려를 통합하고 당나라 군대를 몰아내어 삼한일통의 대업을 이룩하였다.
고구려를 통합한 이후 太大角干에 봉해졌으며, 文武王 13년(673)에 7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金山原에 묻혔다.
興德王 10년(835)에 공적을 기려 興武大王으로 추봉되었으며, 조선 명종 18년(1563)에 서악서원(西岳書院)에 제향되었다.
國子博士 설인선(薛因宣)에게 명하여 공명을 기록한 비석을 세웠다고 하나 전하지 않으며 현재의 비석과 비각은 1966년에 세워진 것이다. 비문은 1933년에 정인보가 지었으며, 이를 이세호가 1956년에 써서 후손인 김형배가 새겼다.
비석의 재질은 화강암이며, 높이는 262cm이다.
제동서원(濟東書院), 숭무사(崇武祠)
제동서원은 신라명장 개국공 태대각간 흥무대왕 김유신(新羅名將 開國公 太大角干 興武大王 金庾信)과 신구도대총관 소정방(新丘道大總管 蘇定方), 대사마 좌위중랑장 신라연안후 이무(大司馬 左衛中郞長 新羅延安侯 李武) 등 三公을 모신 祠堂이다. 660년 백제 정벌에 이어 667년 고구려를 통합함으로써 삼국통일을 완성하여 백성들을 평안하게 살게해준 고마움을 기리기 위하여 효령군 사공중상(孝靈君 司公仲常)의 상소로 공양왕 2년(1390)에 창건하였다. 철종3년(1862) 孝靈祠 화재로 소실된 후 1946년 제동서원 창건시 숭무전(崇武殿)을 신축하여 위패(位牌)를 봉안하고 산상(山上)에는 유적비(遺蹟碑)를 세워 매년 음력 5월 5일에 大祭를 奉行한다. 1933년 孝靈祠를 중수하였고, 2005년 崇武祠를 개축하여 位牌를 이봉안(移奉安)하였다.
사진에서 뒤쪽 건물이 崇武祠이다. 위치는 군위군 효령면 장군리 623-2번지(효령면 장군당1길 35),
마을 이름 장군리는 김유신 장군이 5만명의 정례병을 이끌고 영천, 신령을 거쳐 이 곳 효령에서 진을 치고 하루를 머물면서 작전을 세웠던 곳이라 해서 마을 뒷산에 효령사를 짓고 마을을 장군리라 했다고 한다.
효령사(孝靈祠),
효령사는 신라 5만대군의 긴군작전지요 나당 18만대군을 지휘한 三將軍이 개선 귀경시에 큰소리로 "이제 삼한통합이 되었으니 백성들이여 안심하고 살아라"고 한호한 유서깊은 사당이다. 효령사 외곽 우측에 효령사 유지비가 있다. 효령사의 위치는 제동서원 뒤쪽 산 약 200m 지점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