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편소설>
침묵의 소리
이유
“털털털…….”
요란한 소리를 뱉어내며 세탁기가 돌아간다.
통돌이 세탁기 소리를 차단하려고, 뒷배란다 문을 닫고 고리까지 잠근다. 조금은 약해진 소리지만
‘쯪쯪쯪…….’
하는 것 같은 통돌이 세탁기 소리는, 예민한 현희의 신경을 극도로 자극한다.
현희는 점점 시끄러워지는 소리를 참다 못해 A/S를 신청했으나 서비스센터 직원은
“세탁기 수명은 매일 사용한 것으로 간주해 보통 5년인데 오래 쓰셨네요.”
하면서 명함을 놓고 간다.
그 명함을 볼 때마다
‘5년이 뭐람. 최하 10년은 써야지…….’
투덜대지만, 신형 드럼세탁기 광고를 볼 때마다 눈이 돌아간다.
현희는 소리를 피해 앞배란다로 나간다.
유리문을 열자 아래층에서 이불 터는 소리가 들린다.
현희는 인상을 찌푸리며 다시 문을 닫고 돌아선다.
위층 아이들이 계단으로 뛰어 내려가는 소리가 들린다.
현관문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고장 난 것처럼 좀처럼 벨이 울리지 않는 문이다.
주리는 한 달째 오지 않는다. 전화도 없다. 불쑥 자기 편리한 시간에 드나들던 주리였는데, 오늘도 나타나지 않는다.
현희는 주리에게 전화를 걸어 이유를 따질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다. 그것이 현희와 주리와의 관계이다.
‘집에 무슨 일 있나? 어디 아픈가?’
궁금할 때마다 주차장을 내려다보는 것만이 현희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이다.
“털털털…….”
세탁기가 마지막 물기를 짜내며 요동친다. 통에 쇠줄이 감긴 듯 한 소리가 현희의 목을 조여 온다.
소리가 멈추자 현희는 팔과 다리가 꼬일대로 꼬인 세탁물들을 팔이 아프도록 털어서 건조대에 건다. 빨아야할 것들이 몇 가지 안 되지만 일주일에 두 번 세탁기를 돌린다. 그럴 때마다 세탁기는
‘돈돈돈…….’
한다.
맞은편 아파트 주차장에는 일주일에 한 번 오는 에쿠스가 항상 같은 요일 같은 시간에 있다. 차가 있는 동안만 불이 켜지는 그 집은 남자가 나가면 조금 후에 젊은 여자가 나온다.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없는 현희는 그들이 왜 이 아파트에 가끔 오는지 궁금해 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이 현희가 사는 집 위층에 살았으면 하는 생각을 한다.
문을 열면 도로에서 나는 자동차 소리는 더 맹렬해진다. 깊은 산속에 틀어박히지 않는 한 그 모든 소리와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안다. 소리에 예민한 현희가 살아있는 동안 견뎌내야하는 고통이라는 것을 알기에 더 참아내기가 힘들다.
위층에서 뚱뚱한 여자가 분주하게 돌아다니는지 발소리가 쿵쿵 울린다. 가끔 바닥에 물건이 내동댕이쳐지는 소리, 아이들에게 악을 쓰는 여자의 소리가 무척 크게 들린다. 여자의 날카롭고 신경질 적인 소리는 가끔 현희를 위로하기도 한다. 혼자 사는 현희는 같이 사는 사람에게 악을 쓸 일이 없다. 위층에서 악다구니를 쓰는 여자의 소리를 들으며 혼자 살길 잘했다고 단정을 짓기도 한다. 그러나 모든 소리가 잠든 새벽에는 무서울 정도의 적막이 몰려온다. 주리와 함께 있어도 가시지 않는 깊은 외로움, 마흔을 넘기고도 결혼을 하지 않은, 엄밀히 따지면 하지 못한 현희는 세상에 혼자 버려진 느낌으로 잠을 이루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럴 때마다 주리가 더 생각난다.
주리는 현희의 아파트에 올 때마다 습관적으로 이사하라는 말을 한다.
“이 아파트는 도로변에 있어서 너무 시끄러워. 조용한 오피스텔로 이사하면 어때?”
소란스러움을 이유로 들지만 주리의 심사를 불편하게 한 것은 주리의 남편 사무실이 가까운 곳에 있기 때문이다. 주리가 이곳에 오는 오후 시간은 위층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와 놀 시간이다. 한창 뛰어놀아야 할 아이들을 좁은 집안에 가둬 놓으니 아이들 발을 묶어놓지 않는 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위층 여자는 혼자 사는 현희를 볼 때마다
“아이들이 없어서 아이들 소리가 더 시끄럽게 들리죠? 애들에게 못 뛰게는 하는데 애들이 말을 들어야죠.”
“아닙니다. 헤드폰으로 음악을 들어서 들리지 않습니다. 괜찮습니다.”
매번 신경을 긁는다. 현희는 나는 결혼도 했고 아이들도 있으니, 결혼도 못하고 애도 없는 네가 참아야지 별 수 있느냐는 투로 들려, 그 여자와 마주치는 것을 싫어한다. 밖으로 나가려다가도 여자의 목소리가 들리면 여자의 발소리가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나간다. 현희는 위층에서 떠드는 소리가 총소리처럼 들릴 때는 당장 올라 가 폭탄을 던져버리고 싶을 때도 있다. 그런 날은 헤드폰을 쓰고 음악을 들으며 술을 마신다.
현희는 주리가 오지 않는 날은 손발로 통하는 혈관이 막혀버린 듯 손과 발이 몹시 시리다. 몸속에서 거센 바람 소리가 들린다. 현희는 주리를 기다린 날은 항상 이런 소리를 들어야 했다. 주리는 손발이 차가운 현희에게
“냉혈인간이야“
라며 놀리곤 했다. 현희는
“손발이 차가운 사람이 마음은 더 따뜻해.”
대꾸 했지만 자신이 따뜻한 사람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현희는 주리가 오지 않는 날은 반신욕을 한다. 욕조에 차오르는 물소리로 모든 소리가 빨려 들어간다. 현희가 다리를 움직일 때마다 들리는 물의 소리, 물의 압력이 몸에 감지된다. 뜨거운 물에 하반신을 담갔지만 온몸에서 들리는 차가운 바람소리는 쉬 가시지 않는다.
화장실 유리가 아래에서부터 점점 희뿌연 해지기 시작한다. 거울에 비추인 화장실 벽이 서서히 눈앞에서 지워지는 것을 보고 있으면 현희의 몸에서 들리는 잡다한 소리도 점점 멀어진다.
현희는 엄마가 돌아가신 후 가족에 대해 생각해본 적 없다. 엄마의 빈자리는 현희의 가슴에 커다란 바람구멍으로 남았다. 아버지는 다른 여자를 데려왔지만 그 여자는 현희에게 엄마이지 못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현희는 집을 팔고 작은 아파트로 이사했다. 아버지는 현희와 아버지의 여자 사이의 다리였다. 아버지의 다리가 무너지자 아버지의 여자는 현희에게 오지 못했다. 현희가 몸 안에서 들리는 바람소리를 더 크게 듣기 시작한 것은 그 무렵부터이다.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 현희는 몸이 오들오들 떨리며 아버지의 다리가 보인다. 이불을 뒤집어써도 보일러 온도를 높여도 몸 안에서 들리는 바람소리는 가시지 않는다. 그 때 현희가 터득한 방법이 반신욕이다.
현희가 혼자 사는 생활에 익숙해질 즈음 아버지의 여자가 한 번 찾아왔다. 현희는 집에 있으면서도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현관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현희와 아버지의 여자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계속 울리던 벨소리에 지쳐 현희가 문을 열고 악을 쓰려고 하기 직전, 벨 소리가 멈추고 아버지의 여자는 돌아갔다. 그 때 몸속에서 거센 바람소리가 소용돌이 쳤다. 아버지의 여자는 현희가 일곱 살 때 아버지를 따라 현희 집으로 들어왔다. 현희는 그때부터 사내처럼 집 밖으로 떠돌았다. 아버지도 아버지의 여자도 집 밖으로 도는 현희에게 야단을 친다거나 걱정을 한 적은 없었다. 그것은 현희와 아버지의 여자, 아버지와 현희, 아버지와 아버지의 여자 사이의 충돌을 피하는 하나의 방법이었다. 현희가 무슨 짓을 하던 아버지와 아버지의 여자는 간섭하지 않았다. 현희는 아버지가 아버지이길, 아버지의 여자가 엄마이길 바랐다. 그러나 아버지의 여자는 아버지의 여자일 뿐, 현희의 엄마가 아니었다.
현희가 눈을 뜬다.
오소소한 한기 대신 이마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있다.
욕조에서 몸을 일으키고 커다란 수건으로 물기를 닦는다. 아래층 여자가 남편과 싸우는지 하수구에서 악 쓰는 소리가 들린다.
현희는 욕조 구멍을 막고 있던 고무마개를 들어올린다. 하수구로 나가는 물보다 욕조에서 나오는 물이 더 많은 탓에 화장실 바닥에 욕조의 물이 차오르다가 빠진다. 현희는 양 손바닥으로 거울을 닦아 거울에 눈을 만든다. 현희는 자신의 알몸을 거울의 눈으로 훔쳐본다.
반신욕을 했어도 현희에게 나른한 아늑함은 없다.
현희는 소리가 가장 적은 새벽에 잠자리에 들지만 몸의 모든 촉수는 소리를 향하고 있다. 소리는 단지 소리일 뿐이라고 무시하려 애쓰면 애쓸수록 소리는 현희의 몸을 할퀸다.
현희는 소리가 없는 세상으로 가는 방법을 궁리한 적도 있다. 소리가 없는 세상에서 사는 꿈을 꾸기도 했다. 그러나 소리가 소리를 잠재울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후 부터 싫은 소리를 차단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잠을 자도 사라지지 않는 소리는, 그보다 더한 소리와 부딪히는 것이다. 소리와 부딪히는 동안은 현희는 현희의 몸속에서 나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말 없는 현희를 주리가 좋아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주리가 말이 많았기 때문이다. 주리와 현희는 그렇게 서로가 원하는 꼭짓점에서 만났다. 주리는 현희 앞에서 항상 잡다한 얘기로 끊임없이 수다를 떨며 애교를 부렸다. 주리는 수다를 끝까지 들어주는 현희를 좋아했다. 그러던 주리가 어느 날부터인가 말수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현희는 이유를 묻지 않았지만 주리가 현희 곁에서 조금씩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현희는 집 전화 수화기를 들어서 귀에 대본다.
“뚜~~~”
살아있다.
휴대폰을 켜 본다.
정상이다.
현관문을 열고 밖에 나가서 벨을 눌러본다.
“띵동~”
살아있다.
맞은 편 아파트의 불이 거의 꺼지고 몇 집 남아 있지 않다. 현희는 창밖의 세상과는 무관한 척 커튼의 주름을 옮기고 불을 끈다. TV소리를 줄이고 YTN뉴스를 본다. 한 달째 집 밖을 나오지 않는 노인이 있다는 신고를 받고 찾아가 보니 노인은 죽어 있다는 보도가 나온다. 앵커의 목소리가 착잡하게 들린다.
날이 밝았다. 현희는 잠을 잔 기억이 없다. 협연 연습이 있는 날이라 드럼 스틱이 담긴 가방을 메고 집을 나선다. 사람들은 사는 것이 죽을 맛이어도 죽을 용기가 없으면 나름대로 자신에게 맞는 방법으로 세상에 적응하며 살아간다. 현희가 드럼을 연주하기 시작한 것은 아버지를 땅에 묻은 이후이다. 현희는 현희 몸속에서 나는 소리를 잠재우기 위해 더 큰 소리를 내야했다.
현희는 연습실 문을 열고 들어 선다. 지하의 퀴퀴한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빛이 들어오지 않는 지하 연습실이지만 이곳이 없었다면 현희는 아마 미쳐버렸을지도 모른다. 처음 연습실에 들어왔을 때
“남자? 여자?”
긴 퍼머머리를 뒤로 묵은 중년의 남자 단장이 물었다. 현희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무도 더 묻지 않았다.
현희는 드럼 앞에 앉아 의자의 높이를 조절한다. 스틱을 잡고 잠시 손목을 푼다. 단원들은 각자 연습 중이다. 현희가 베이스 드럼 페달 위에 발을 올려놓고 호흡 조절을 한다. 현희가 협연 시작을 알리는 스틱을 네 번 두드리는 것을 신호로 협연이 시작된다.
현희가 ‘바르샤’를 찾은 건 5년 전이었다. 중고생 때 교내 밴드부에서 드럼을 연주하긴 했지만 정식 밴드 구성원이 되는 길은 쉽지 않았다. 현희 집을 자유롭게 드나들던 주리는 ‘바르샤’ 보컬이었다. 주리는 현희보다 한 살 위였지만 깜찍한 외모 때문에 현희보다 어려 보였다. 현희는 주리에게 나이를 밝힌 적이 없다. 연습이 끝나면 주리는 현희를 따라다녔다. 현희의 집은 15평 아파트였지만 주리와 현희가 지내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같은 공간에 있는 시간이 많은 주리와 현희가 가까워진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던 주리가 현희에게 청첩장을 주었다. 주리가 결혼하면서부터 주리와 현희는 어색해지기 시작했다. 주리는 결혼한 이후에도 현희의 집을 자주 드나들었다. 전처럼 자연스럽지는 않았지만 현희는 주리의 결혼에 대해 한 번도 이의를 제기한 적이 없었다. 주리의 발길이 뜸해지기 시작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주리가 현희에게 오고 안 오고는 전적으로 주리의 마음이었다. 주리는 현희에게 물어본다거나 현희 눈치를 보지 않았다. 현희는 주리에게 오라 하거나 오는 시간을 정해주지 않았다. 가라고 한 적도 없다.
주리가 쓰던 작은 화장대와 침대가 그대로 있다. 현희는 화장품을 바르지 않는다. 현희 칫솔 통에 주리가 쓰던 분홍 칫솔도 그대로 있다. 현희는 주리가 속옷차림으로 화장 하는 모습을 보기 좋아했다. 현희는 주리의 귀여운 행동이 싫지 않았다.
스틱을 든 현희 손이 멈추어 있다.
협연은 끝났다.
현희는 조용히 스틱을 정리해 가방에 넣는다.
현희는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려다 마트로 발길을 돌린다. 가전제품 코너에서 드럼세탁기를 둘러본다. 가격이 저렴한 구형 드럼세탁기에서 발길을 멈춘다. 하지만 사지 않는다.
숙녀복 매장을 한 바퀴 빙 돌아본다. 여자 옷을 만져본다거나 하는 행동은 현희에게 낯설다. 현희는 주리가 입으면 예쁠 것 같은 하얀 실크 블라우스 앞에서 멈춘다. 매장 직원이 다가오며
“찾으시는 것 있으세요?”
묻는다.
현희는 됐다는 표시로 손을 들어 보이고 돌아선다.
늘 걷던 아파트 앞 도로를 무심히 걷던 현희는 여행사 간판을 발견한다. 잠시 망설이다가 문을 열고 들어가 제주행 비행기표와 숙소를 예약하고, 집에 들러 간단히 짐을 꾸려 김포공항으로 향한다.
제주 공항은 여전히 번잡하다. 현희는 관광안내소에서 올레길 안내도를 챙겨 버스에 오른다.
1시간 정도 달려 시흥리에 도착했다. 아직 겨울이지만 제주도의 바람에서는 봄 냄새가 난다.
현희는 여행사에서 예약해준 숙박 장소를 어렵지 않게 찾는다. 정년퇴직을 하고 온 남자, 정규직 채용에서 밀려난 젊은 청년, 취업 준비를 하고 있다는 휴학생, 재 창업을 위한 중년 남자. 이렇게 4명이 같은 팬션에서 머물게 되었다.
팬션 주인은 현희에게 운이 좋은 편이라고 너스레를 떤다. 혼자 온 사람들이 올레꾼을 만나지 못하면 3일 동안 혼자 걸어야한다고 했다.
현희 일행은 첫날 날이 밝기 전부터 걸었다.
말미오름을 걸을 때는 바람이 심하게 불었다.
현희는 바람에 떠밀리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걷는다. 바람은 현희를 쓰러뜨리지 못했다.
올레꾼들은 아무도 현희를 이상하게 보지 않았다. 질문을 하는 사람도 없었다. 묵묵히 자신들 앞에 펼쳐진 제주의 흙길을 한 발 한 발 걸을 뿐 현희가 사내인지, 계집인지 궁금해 하지 않았다. 말 없는 현희에게 왜 왔는지도 묻지 않았다.
멀리 성산 일출봉과 우도가 보인다. 제주도의 아름다운 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현희는 3년 전 우도에서 하얀 산호모래 속에서 보석처럼 아름다운 산호 조각을 골라 손바닥에 놓고 탄성을 지르던 주리의 모습이 떠오른다. 현희는 투명한 에메랄드빛 바다색과 잘 어울리던 어린 소녀 같았던 주리의 모습을 눈앞에서 지우려 애쓰지 않는다.
다음 날 일행은 종달리를 향해 걷는다. 올레길은 제주의 산길, 바닷길, 오름, 마을길을 돌아볼 수 있도록 코스가 정해져 있었다. 나뭇가지에 매어 놓은 파란색 리본과 길에 새겨진 푸른 화살표를 따라 걸어야 한다. 노란색 화살표는 역방향이다.
돌담 너머에 있는 감귤나무에 황금빛 귤이 주렁주렁 달려있다. 담장을 대신한 동백나무는 집주인의 아름다운 맘씨를 꽃처럼 보여주고 있다. 한쪽에서는 농부들이 겨우내 땅 속에서 얼지 않고 남아있는 당근과 무를 수확 중이다.
수확 하던 농부가 올레꾼들에게 당근을 하나씩 주었다. 거세게 들리던 제주도의 바람소리도 제주의 아름다운 경치에 묻혀 더는 심난하지 않다.
마지막 날은 시간적인 여유가 있어서 일행 모두 올레길 쉼터에서 커피와 쿠키를 나누어 먹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모두 처음 만난 사람들이지만 올레길을 걷기 위해 모였다는 하나의 이유만으로 금방 친구가 될 수 있었다.
정년퇴직을 하고 온 남자가 모두에게 들으라는 듯
“인생은 어렵게 생각하면 한없이 어렵지만, 쉽게 생각하면 또 어려울 것이 없는 것이 인생이에요. 이순의 나이를 넘기고 보니 인생 별거 아니었더라고요. 왜 그렇게 아등바등 살았는지 후회가 되더군요. 너무 고민하지 말고 마음 가는대로 하고 싶은 것 하면서 사세요. 어떻게 살든 후회는 남는 법이니까요.”
현희는 묵직한 그의 말이 귀에 남는다.
겨울이라 해가 짧아 일행은 아침 일찍부터 해질녘까지 걸어 3일 동안 코스를 완주하였다. 시간당 3Km의 속도로 걸었는데 제주의 경치를 구경하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제주공항에서 일행과 헤어진 현희는 수속을 마치고 바로 면세점으로 들어갔다. 면세점을 둘러보고 있는 현희에게 재 창업을 준비한다는 남자가 말을 걸었다. 그는 현희에게 전화번호를 건네주며 꼭 연락하라고 한다.
현희는 고개만 끄덕인다. 그는 3일 내내 현희 뒤에 바짝 붙어 걸으며 현희가 묻지 않아도 이런 저런 자신의 얘기를 했다. 현희는 그가 하는 말을 듣지 않고 걸었으나 사별하고 혼자라는 말이 귀에 남았다.
현희는 아파트 현관 앞에서 혹시 주리가 안에 있을까 생각한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빈집의 정체된 공기가 현희가 끌고 온 공기에 밀려 저만치 물러난다. 맞은 편 아파트의 그 집에 불이 켜져 있다. 그 집 앞 주차장에 에쿠스가 있다.
현희는 짐을 풀지 않고 욕조에 물을 받는다.
뜨거운 물속에 몸을 담그고 발을 주무른다.
수증기가 뿌옇게 차오르면서 거울이 눈앞에서 사라지기 시작한다.
사람들이 현희를 마구 흔들어 깨운다.
‘이봐 총각, 아니 처녀, 엄마가 돌아가실 것 같아요. 빨리 가 봐요.’
‘엄마요? 엄마는 돌아가셨는데요?’
‘이그, 그 엄마 말고, 지금 엄마.’
‘전 엄마가 없어요.’
‘뭔 소리여~ 엄마가 처녀 얼굴보고 간다고 아직 못 가고 있어. 황천 가는 사람 기다리게 하면 못 써. 빨리 가봐요.’
‘싫어요. 난 그 여자 몰라요. 제 엄마가 아니에요.’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어서 가요.’
사람들이 몰려들어 현희를 상여처럼 떠메고 간다.
‘싫어요. 싫다고요. 싫어! 싫어!’
욕조 물소리에 놀라 눈을 뜬 현희는 안도의 숨을 내쉰다. 이마에 굵은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있다.
욕조에서 나와 물기를 닦고 샤워가운을 걸친 채 아버지의 여자에게 전화를 건다.
아버지의 여자가 받는다.
“안 죽었네?”
여자는 퉁명스러운 현희의 전화를 받고 운다.
“현희야, 사내처럼 살지 말고, 나이 한 살이라도 더 먹기 전에 결혼해. 여자는 결혼을 해서 남자 사랑도 받아보고, 애도 낳아봐야 진짜 여자가 되는 거여.”
아버지의 여자는 여느 어머니들처럼 말한다.
현희는 아버지의 여자 목소리가 듣기 싫지 않다.
현희의 몸속에서 나던 바람소리가 희미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