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교보문고에서 ‘英’을 만났다
내가 교보문고에 가게 된 것은 채권자 출현 등등의 불안감으로 사무실이나 집에 당당히 드나들기 어려운 시간들에서 비롯되었다. 어렵고 힘든 시간이 무조건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느낀 게 그 때다. 어쨌든 지난 세월 시장조사 등등 외에는 별로 들리지 않던 서점을 서성거리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거기다 내 이동 코스인 부천역 역사 7층에 교보문고 부천점이 있다는 점이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바로 그 무렵 그동안 애지중지 갖고 다니던 DUO 3.0 책을 잃어 버렸다. 며칠이 지난 후에야 다시 교보에 가게 된 나는 너무도 당연히 잃어버린 DUO 3.0 책을 찾았지만 ‘어’ 책이 없는 것이었다. 영어 학습서 코너를 아무리 뒤져도 책은 없었고 검색시스템으로 검색해 보아도 검색되지 않는 것 이었다. 절판된 모양이었다. 아쉬웠지만 DUO 3.0과의 가슴 설레이는 뜨거운 재회는 포기하기로 하였다.
그렇게 DUO 3.0과 정을 떼고 관계를 정리한 나는 시골 처녀 처음 서울행 기차 타는 심정으로 교보문고 영어 코너를 어슬렁거리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나는 55세 늦깍이 영어학습자로써 두 번째 책을 선택하게 된다
‘넥서스’ 출판사, ‘Paul C. McVay / Hiroto Oonishi’ 공저, ‘영어를 지배하는 동사의 힘 이미지로 기른다’ 이다
이 책을 보면서 중학교 1학년때 ‘英’을 처음 만나고 42년이나 지나도록 거의 모르고 지냈거나 알고 있었어도 장님들 코끼리 만지고 제각각 떠드는 거와 다를 바 없었던 내 현실을 직시하게 되었지만 부끄러운 마음보다는 새롭게 알게 된 너무도 맘에 쏙 드는 정보들 앞에서 기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아마도 그 순간 만은 그 어려운 현실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을 만큼 행복하였었다 아마 내 짐작에는 그 때 누군가 미소를 띄우고 연신 고개를 끄떡여 대는 내 옆 모습을 보았다면 저 사람 무지 좋은 일이 있는 가 보다 하였으리라
그리고는 앉은 자리에서 ‘영어를 지배하는 동사의 힘 이미지로 기른다’를 단번에 읽어 버리게 된다. 래프트 타임 3시간, 장소는 교보문고 부천점 IT도서 코너 앞 책 읽는 공간 - 이 공간은 20여명 정도의 고객들이 앉아서 책을 편안히 읽을 수 있도록 긴 의자를 마련해 놓은 곳으로 교보 광화문 점에는 없는 시설로써 나에겐 더할 나위 없는 장소였다. [장소 P]
그리고 한숨에 읽고 나서 알게 된 것은 이러한 경우 한 번에 완전히 소화하려 하지 말고 일단 넘어가서 끝까지 한번 가고 나서 다시 두 번, 세 번 보면서 이해의 깊이를 도모하는 전략 - 다 알고 있는 이야기이지만 - 을 나도 모르게 구사하고 있었던 것 이었다. 마치 미리 작정했던 것처럼. 사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언제 공부하는 책을 끝까지 본 적이 있어야지. 이삿짐 속에서 학창시절 바이블이었던 ‘영어삼위일체’를 우연히 집어 들어 들춰보고는 한심했던 기억이 난다. 책 옆면을 보면 앞에서 1/4 정도만 손 때가 묻어 있고 뒷 부분은 마치 새 책처럼 새하얀 걸 보고는 실소를 금할 수 없었던 기억이 난다. 그 1/4 조차 그래디에이션 효과가 되어 있었다. 작심3일의 증표이다. 삼십년 가까이 된 옛날 이야기이다
어쨌든 그 뒤로 나는 마치 꿀이라도 발라 놓은 것 처럼 틈틈이 짬짬이 ‘장소 P’를 드나들게 되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영어를 지배하는 동사의 힘 이미지로 기른다’ 를 여러번 정독하고는 자연스럽게 나의 뒤늦은 영어공부의 외연 확장을 위한 세 번째 목표물 탐색에 나서게 되었다
이쯤에서 나의 늦깍이 영어공부에 혁혁한 도움을 준 문명의 이기를 소개하지 않을 수 없다
핸드폰에 내장되어 있는 ‘전자사전’이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단어 설명을 책임져 주었는데 이는 실로 대단한 힘이 되어 주었다 아무리 좋은 휴대용 전자사전이 있었더라도 따로 지니고 다녀야 했을진데 항상 갖고 다니는 핸드폰 내장 전자사전은 아주 훌륭한 습관까지 붙여 주었다. 길을 지나다니거나 전철에서 만나게 되었던 모든 모르는 어휘들 - 티셔츠 문구라든지 옆자리 영자신문 헤드라인라든지 쇼핑백 문구, 광고매체, TV영어자막 등등 - 을 즉석에서 바로바로 찾아보는 아주 바람직한 습관이다. 거기에다 120개 분량의 ‘최근 찾은 단어’와 200개 분량의 ‘마이노트’는 아주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었으며 특히 어휘설명에 나오는 다른 단어에 대한 ‘점프 (하이퍼링크 연결)’기능은 압권이었다. 요즘은 화장실에서 ‘최근 찾은 단어’와 ‘마이노트’를 되새김질해 보는 새로운 재미를 즐기고 있다
‘영어를 지배하는 동사의 힘 이미지로 기른다’를 읽으면서 기본 동사들의 여러 가지 뜻들의 근본을 꿰뚫는 ‘이미지’를 알게 된 나의 세 번째 책은 같은 ‘넥서스’ 출판사의 ‘심재경/Ray Mills’ 공저 ‘비밀은 전차사에 있다’ 였다. 동사의 이미지처럼 전치사의 본디 의미들을 조금이나마 익히고 나자 자연스럽게 영문법 책들에 눈길이 가는 것이었다. 동사든 전치사든 제대로 깨우쳤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이전의 허접하기만 했던 형편에서 조금은 나아진 순간 나에게 이제는 문법을 좀 들여다 보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드는 건 순리였으리라.
그리하여 뽑아든 책이 ‘랜덤하우스’ 출판사의 ‘문단열’지음 ‘4시간 만에 끝나는 영문법 총정리’ 였는데 ‘4시간’이라는 책 제목에서 끌려 선택하였지만 Tape 강의의 교재여서 그런지 한번 보고 나서는 다른 책을 찾게 되었는데 영문법 책은 쉽게 마음에 드는 책이 없었다
한 동안 ‘장소 P’에 들르지 못하던 나는 시내에 나갔다가 들른 ‘교보 광화문점’에서 운명처럼 확 끌리는 영문법 책을 만나게 된다. ‘장수용’ 지음 ‘편입 GRAMMAR HUNTER’ 이다
‘장소 P’에 비하면 훨씬 불편한 교보 광화문점 서가 중간에 마련된 6인용 소파에 엉덩이를 붙이곤 마치 ‘신세계’를 발견하는 것처럼 ‘편입 GRAMMAR HUNTER’에 빠져 들기 시작하였다 내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발군의 편집과 정리표현으로 똘똘 뭉친 수작이었다.
다시 ‘장소 P’로 돌아온 나는 ‘편입 GRAMMAR HUNTER’를 읽고 또 읽었다. 교보 부천역의 영어학습서 코너에는 ‘편입 GRAMMAR HUNTER’가 3권 꽂혀 있었는데 판매용인 만큼 손때를 안 묻히려고 나름대로 아주 조심 조심 읽었다. 한 두달 동안에 책을 4번인가를 보고 나서 이렇게 한 열 번 정도만 더 보고 나면 머릿속에 정리가 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을 무렵 여러 가지 상황들이 더욱 어렵게 되면서 ‘장소 P’를 한참동안이나 가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하루 들른 어느날 영어학습서 베스트셀러 코너에 있는 ‘Cambridge’ 출판사의 ‘Murphy, Raymond. 지음’ ‘Grammar in Use Intermediate’를 만나게 되었는데 아주 흥미로운 책이었다. 모국어 사용자의 시각으로 정리한 문법체계도 새로웠지만 편집의 실용성이 아주 뛰어나다고 느꼈다. 특히 오른쪽 페이지에 있는 문제풀이의 내용이 아주 알 찼다. 그런데 한가지 불편한 것이 문제를 풀 종이와 받침 등등 ‘장소 P’에서는 아무래도 마음껏 보기가 좀 불편하였다
얼마 후 지금의 어려움에서 벗어나면 반드시 구입하여 공부하기로 마음을 고쳐 먹었다.
한참을 못 가다 다시 ‘장소 P’를 다시 찾은 나는 당연히 ‘편입 GRAMMAR HUNTER’가 꽂혀 있던 서가로 다가갔는데 어랍쇼 책이 없는 것이 아닌가 주변을 샅샅이 뒤져 보았지만 책은 없었다
할 수 없이 다른 영문법 책들을 이것 저것 들춰 보았는데 영 마음에 들지를 않았다 그러다 눈에 띈 책이 ‘도도한 영문법’이었는데 도표와 도해로 정리한다는 카피가 마음에 쏙 들어 펼쳐 보았지만 계속 읽을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그리고 드디어 나는 만났다. 또 하나의 운명처럼 ‘넥서스’ ‘임현도’ ‘풀코스 영문법’이었는데 펼치는 순간 느낌이 팍 왔다. 그동안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하곤 했던‘편입 GRAMMAR HUNTER’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믿음을 헌신짝처럼 버리고는 ‘풀코스영문법’으로 아주 간단히 너무도 쉽게 고무신을 거꾸로 신게 되어버린 것이었다
이제 분명한 것은 몇십년 만에 다시만난 ‘英’과 이제는 영원히 헤어지지 않을 자신감이 생긴 것인데 내가 그동안 제대로 공부한적은 없었지만 평생 잊지 않고 간직했던 꿈 ‘영어와 친해지기’에 한걸음 다가섰음은 물론이려니와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는 신념이 생기게 되었다
어려운 현실이 서점에서 시간을 때우게 만들고 구입할 여유가 없다 보니 짜투리 시간에 조금 빠르게 여러번 읽는 방법일 수 밖에 없었던 환경이 오히려 좋은 결과를 가져 오게 되었다
단언컨대 만약 책을 살 여유가 있었으면 아마도 며칠 보다가 서서히 뜸해지다가 책상 구석으로 슬슬 밀려나다가 책꽂이에 꽂혀 버리는 악습에서 헤어나오지 못하였을 것이고 지금의 이 충만한 ‘英’과의 달콤한 재회와 행복과 미래설계는 없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