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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
2015년 12월 8일 / 사 43:14-21
14 ○너희의 구속자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위하여 내가 바벨론에 사람을 보내어 모든 갈대아 사람에게 자기들이 연락하던 배를 타고 도망하여 내려가게 하리라(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너희의 해방주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를 위하여 내가 바벨론으로 정복자를 보내겠다. 그러면 그 도성의 주민들이 잔치를 벌이며 즐기던 유람선들을 타고서 강물을 따라 모조리 도망할 것이다.)
15 ○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이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의 왕이니라(나는 너희의 거룩한 하나님 여호와요, 일찍이 너희를 창조하고 언제나 너희를 보호하고 인도하는 왕이다.”)
16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다 가운데에 길을, 큰 물 가운데에 지름길을 내고(이스라엘의 해방주이신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애굽에서 내 백성을 해방시킬 때에 바닷속에서도 큰길을 내었고 거센 물결 속에서도 곧은 길을 내었다.)
17 ○병거와 말과 군대의 용사를 이끌어 내어 그들이 일시에 엎드러져 일어나지 못하고 소멸하기를 꺼져가는 등불 같게 하였느니라(이스라엘을 뒤쫓는 그 엄청난 애굽 군대를 전차와 말들과 함께 내가 모조리 깊은 물속에 집어넣었다. 그들이 깊은 바닷속에 잠겨서 다시는 기어 나오지 못하였다. 마치 꺼져 가는 심지처럼 그들이 모두 사그라졌다.)
18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너희는 그 옛날 일만을 생각하며 오늘을 탄식하지 마라. 항상 그 옛일만을 되돌아보며 과거에 매여 있지 마라.)
19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너희는 그 옛날 일만을 생각하며 오늘을 탄식하지 마라. 항상 그 옛일만을 되돌아보며 과거에 매여 있지 마라.)
20 ○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너희는 그 옛날 일만을 생각하며 오늘을 탄식하지 마라. 항상 그 옛일만을 되돌아보며 과거에 매여 있지 마라.)
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그러면 내가 만든 새 백성 이스라엘이 이 일을 계속 이야기하면서 나를 찬양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새 일을 행하실 것을 예언하십니다. 이는 장차 바벨론의 포로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돌아오게 하시는 놀라운 사건입니다.
왕이신 하나님(14-15)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바벨론에 사람을 보내어 자기들이 연락하던 배를 타고 도망하여 내려가게 하리라는 말씀처럼 바사와 메대를 통해 바벨론을 치셨고 이 전쟁으로 인해 위기를 피하기 위하여 귀족들이 배를 타고 먼저 도망하려 했습니다. 이런 역사적 사건의 주역이 바로 고레스 왕이었으며 이와 같은 구원의 역사는 이스라엘의 창조자이시며 그들의 왕이신 여호와께서 그들의 구원자가 되셨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끝까지 책임지시는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새 일을 행하리라(16-20) 출애굽 이후 홍해의 역사적 사건을 기술하며 애굽의 바로의 군대를 멸망시키셨던 과거의 일을 언급하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이셨음을 역사적 사건을 통해 재차 확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고 하시며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이 과거의 그 어떤 일보다 더 의미가 클 것임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은 인간의 상상을 뛰어 넘는 일이라는 사실을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라는 표현을 통해 인간적으로 볼 때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바로 그런 일 곧 새 일을 행하시겠다고 선포하십니다.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하나님께서 이루실 놀라운 일을 은유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지으신 목적(21)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새 일을 행하시므로 이 백성이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은 창조의 목적인 동시에 구원하신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사는 것이 진정한 신앙적 자세입니다.
적용: 하나님께서 나의 왕이라고 고백하며 그 분의 다스림을 받으며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나의 왕이시기에 오직 그 분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절망의 나라에 행복한 젊은이들”이란 책의 내용입니다. 일본의 젊은이들은 희망이 없어도 행복하다고 합니다. 현재를 즐기는 ‘사토리’ 시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일본의 기성세대가 일을 하지 않고 일할 의지도 없는 니트족, 평생 아르바이트로 살아가는 프리터, 내향적이고 도전 정신이 없는 초식남들 젊은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불만투성입니다. 이들이 미래가 낙관적이어서가 아닙니다. 어차피 나아지지 않을 미래 포기하고 그날그날 채워지는 것으로 즐기며 사는 이들입니다. 현상을 타개할 도전도 미래를 위한 분투도 없습니다.
<설 교>
하나님께서 행하실 신선한 일
사 43:14-21 / ♬ 1. 보라 내가 새 일을 다 이루어 놓았다 이제 나타났으니 너희가 보고 앎이라 정녕히 내가 사막에 샘물을 내리니 장차 들짐승들과 시랑과 타조도 2. 나를 존경할 것은 광야에 샘물을 사막에 강물을 내 백성에게 주리라 3. 나의 택한 백성으로 마시게 할 것이라 나의 택한 자들로 마시게 할 것이라
■ 미국 테네시 주의 한 작은 마을에, 벤 후퍼라는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는 체구가 몹시 작고,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생아였습니다. 마을의 어른들은 자기 자녀가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벤 후퍼와 함께 노는 것을 원치 않았고, 친구들도 그를 놀리며 멸시하였습니다. 벤 후퍼가 12살이 되었을 때 마을의 교회에 젊은 목사님이 부임해 오셨습니다. 벤 후퍼는 그때까지 교회에 가 본 적이 없었지만, 그 젊은 목사님이 가는 곳마다 분위기가 밝아지고 사람들이 격려를 받는다는 소문을 듣고 교회에 가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배 시간에 좀 늦게 예배당에 들어가 맨 뒷자리에 앉아 있다가 축도 시간이 되면 아무도 모르게 살짝 빠져 나오곤 했습니다. 몇 주가 지난 어느 주일, 벤 후퍼는 목사님의 설교에 너무나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잠시 감동에 젖어 있는 사이에 예배가 끝나 사람들이 밖으로 나가고 있었습니다. 벤 후퍼도 사람들 틈에 끼어 나오면서 목사님과 악수를 하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은 벤 후퍼를 보고, “네가 누구 아들이더라?”하고 말했습니다. 갑자기 주변이 조용해졌습니다. 그때 목사님은 환한 얼굴로 벤 후퍼에게 말했습니다. “그래, 네가 누구 아들인지 알겠다. 너는 네 아버지를 닮았기 때문에 금방 알 수 있어!” 목사님은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야! 네 모습을 보면 알 수 있거든!” 당황하여 빠져나가는 벤 후퍼의 등을 향해서 목사님은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답게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세월이 흘러 벤 후퍼는 주지사가 되었습니다. 주지사 벤 후퍼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때 그 목사님을 만나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을 듣던 그 날이 바로 테네시 주의 주지사가 태어난 날입니다.” 목사님의 말 한마디가 그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본문 19절에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하나님께서 새 일을 행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말씀하는 새 일은 히브리어에 “하다쉬”라는 말인데 그 뜻은 '새로운( new), 신선한( fresh)'을 의미합니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50회 이상 사용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새로운 일 또는 신선한 일을 행하시겠다는 의미입니다.
1. 신선한 일을 행하실 하나님은?(14-15절)
1. 이스라엘의 구속자요, 거룩한 자이십니다(14-15절).
바벨론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믿음과 소망이 매우 침체되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포로 상태에서 해방되리라는 징조들을 직접 목격해 줄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강한 위로를 믿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것에 대한 확언이 자주 반복되고 있으며, 여기에서는 매우 자세히 그리고 격려하면서 되풀이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매우 격려가 되었던 그 존귀한 칭호를 여기에서 친히 취하시고 계십니다. 그는 ‘여호와 그들의 구속자’이시라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그들을 구속하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을 그의 직분으로 여기시고 그의 과업으로 삼으신다는 말씀입니다. 만일 그가 그들의 하나님이시라면, 그는 그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속박당할 때, 그들의 구속자가 되어주실 것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이시며(14절), ‘그들의 거룩한 자’이시다(15절). 그러므로 그는 그들에게 말씀하신 것을 모두 지키실 것입니다.
2.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왕이십니다(15절).
그는 ‘이스라엘의 창조자’로서 그들로 하여금 무(無)에서 백성으로 되게 하셨습니다(그것이 곧 창조이다). 아니, 무보다도 못한 것에서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원래 이스라엘을 나라로 만드실 때부터 그러하셨습니다.
신 7:6-9 / 여러분은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 소속된 거룩한 백성입니다.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여러분만을 선택하여 주님의 소중한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7) 그러나 여호와께서 여러분을 좋아하시고 여러분을 선택하신 것은 여러분이 모든 민족들보다 수가 더 많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여러분은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가장 수가 적은 민족입니다. 8) 오직 주께서는 여러분을 사랑하시고 여러분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약속을 지키려고 여러분을 선택하셨습니다. 오직 이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주께서 여러분이 종살이하던 땅에서 여러분을 데리고 나오시고 강한 팔을 뻗어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여러분을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9) 그러므로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만이 유일한 하나님이시요. 언제까지나 계약을 지키시는 참된 하나님이십니다.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모두 지키는 사람에게는 천대에 이르도록 변함없이 사랑을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갈대아 우르에 살던 아브라함을 불러내셔서 그로 하여금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게 하시고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들이셨습니다. 그리고 그와 그의 후손들에게 그 땅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유업을 이을 만한 아들이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처음에는 조카 롯을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조카 롯이 욕심을 부리며 그를 떠나갔습니다. 그래서 참다못하여 첩을 두어 이스마엘이라는 서자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그도 약속의 자녀는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나이 많았고 소망이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자기 집에서 기르던 종 다메섹 엘리에셀에게 유업을 물려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도 유업을 얻을 자는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죽은 것 같았을 때 하나님은 새 일, 즉 신선한 일을 계획하셨습니다. 그것은 창조와 방불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100세가 되고 사라가 90세가 되었을 때 약속의 아들 이삭을 낳게 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이보다 더 신선한 일이 있었을 까요?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창조주이십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친히 이스라엘의 왕이 되셔서 출애굽을 진두 지휘하셨고, 광야 생활을 하게 하셨으며, 가나안을 정복하도록 하셨습니다. 이방 나라에는 왕들이 있었으나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왕으로 계셨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왕이신 하나님을 떠나 이방인들처럼 인간 왕을 세워달라고 졸라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세운 왕이 누구입니까? 키가 준수하고 그야말로 잘 생긴 사람 사울을 왕으로 세우게 하신 것입니다.
삼상 8:6-7 / 그러나 사무엘은 장로들의 요청을 악한 일로 보고서 이 문제를 여호와께 아뢰었다. 7) 여호와께서는 사무엘에게 이와같이 대답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백성의 소원대로 해주어라. 그들은 지금 너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나를 버리고 있다. 그들은 나를 더 이상 그들의 왕으로 모시려 하지 않고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왕이셨습니다. 왕이신 하나님의 인도를 잘 받기만 하였다면 그들은 항상 안전하고 평안하였을 것입니다. 왕이신 하나님이 책임지시기 때문입니다.
2. 신선한 일을 행하실 하나님께서 하신 과거의 역사(16-17)
16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다 가운데에 길을, 큰 물 가운데에 지름길을 내고(이스라엘의 해방주이신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애굽에서 내 백성을 해방시킬 때에 바닷속에서도 큰길을 내었고 거센 물결 속에서도<거센 물길을 뚫고> 곧은 길을 내었다./ )
17 ○병거와 말과 군대의 용사를 이끌어 내어 그들이 일시에 엎드러져 일어나지 못하고 소멸하기를 꺼져가는 등불 같게 하였느니라(이스라엘을 뒤쫓는 그 엄청난 애굽 군대를 전차와 말들과 함께 내가 모조리 깊은 물속에 집어넣었다. 그들이 깊은 바닷속에 잠겨서 다시는 기어 나오지 못하였다<일어나지 못하게 거꾸러뜨리시고>. 마치 꺼져 가는 심지처럼 그들이 모두 사그라졌다.)
이사야가 설명하는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십니까? 그가 하나님의 어떠한 모습을 강조하고 있습니까?
그는 하나님의 홍해 구원 사역에 대해서 언급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이루실 새로운 구원이 이전의 출애굽 사건과 같은 방식을 취할 것임을 암시합니다. 이 점은 출애굽 사건을 이스라엘이 창조된 사건으로 보는 이사야 43:1-3절에 이미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이사야 43:16-17절에서 출애굽 사건 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홍해 바다 구원에 대해서만 언급합니다. 이사야가 먼 과거에 있었던 홍해 바다 구원에 대해서 언급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장차 이루실 구원이 과거의 홍해 구원과도 같이 확실한 것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하나님이 과거에 그들의 조상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신 것과 같이, 이제는 그들을 바벨론에서 구원해주실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다 가운데 길을 내시고, 큰 물 또는 거센 물결(mighty waters) 가운데 사람들이 지나갈 수 있는 통로를 만드셨다는 이사야 43:16의 설명은 출애굽기 14:21-22의 홍해가 갈라진 사건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어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이스라엘이 홍해바다를 건넌 사건을 부정하려고 합니다. 혹 인정한다면 진도 앞바다가 저절로 갈라지는 것과 같은 정도로 인정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 하나님은 바다 가운데 길을 내셨고, 큰 물 가운데 첩경을 내신 하나님이십니다.
▶ 미국의 할리우드에 가면 유니버샬 스튜디오라는 곳이 있습니다. 거기에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거느리고 홍해 바다를 건넌 사건을 촬영한 세트장이 있습니다. 조그마한 냇가에 불과합니다. 어떤 기술로 그런 엄청난 장면을 촬영하였는지 모르지만 우리가 보기에는 너무나 시시합니다. 이스라엘이 건넌 홍해 바다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분명히 애굽의 모든 군대를 궤멸시킬 수 있는 그런 무서운 바다였습니다.
애굽 군대의 궤멸에 대해서 언급하는 17절은 출애굽기 14:23-28의 몰살 사건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그런데 17절은 흥미롭게도 하나님께서 애굽 군대를 ‘이끌어 내어서’ 꺼져가는 등불처럼 순식간에 몰살시키셨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본래 애굽 군대를 광야로 이끌어 내어 이스라엘 백성을 추격하게 한 자는 바로(Pharaoh)이지만(출 14:5-7), 이사야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을 ‘이끌어 내어’ 멸망시키셨다고 표현한 것입니다(출14:4, 8; 겔 38:3-6).
첫 번째 출애굽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이스라엘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 한 분에 의해서만 된 일입니다. 이 점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주신 다음의 말씀에 잘 반영되어 있습니다.
출 4:14 /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분통을 터뜨리면서 말씀하셨다. “그래, 그러면 너의 형인 레위 사람 아론이 있지 않느냐? 그가 얼마나 말주변이 좋은지 내가 다 알고 있다. 그가 너를 만나러 올 터인데 그가 네 얼굴을 볼 때 무척 기뻐할 것이다.”
그 까닭에 이사야는 16-17절에서 기적적인 구원의 구체적인 과정에 대해서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냥 결과에 대해서만 언급할 뿐입니다. 16-17절의 이러한 언급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권능이 어떠한 것인지를 강조하는 효과를 갖습니다. 기적적인 방식으로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다시금 구원하실 하나님의 권능이 어떠한지를 강조하려는 의도가 거기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아울러 이 두 절은 강대국의 어떠한 군사력도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맞서지 못함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시 33:16-17; 44:6-7; 46:9).
더 주목할 것은, 이 두 절이 한 번도 ‘애굽’이나, ‘바로’를 직접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이 두 절을 읽는 분들은 본문의 사건이 출애굽 사건과 관련되어 있으며, 애굽 군대나 바로를 지칭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16-17절이 ‘애굽’이나 ‘바로’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는 것에는 무엇인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것은 과거의 그 사건을 곧 이루어질 하나님의 구원과 결부시키되, 이제는 ‘애굽’이나 ‘바로’가 아니라 ‘바벨론’과 그 나라의 ‘왕’이 하나님의 간섭에 힘입어 궤멸될 것임을 암시하려는 의도에서였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므로 16-17절은 여호와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신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장차 그들을 바벨론으로부터 해방시킬 하나님이심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가 과거에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특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출애굽 사건이 중요했던 것처럼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게 되었는가를 기억한다면 우리는 더욱 새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언제나 프래쉬한 일 즉 신선한 일을 행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3. 하나님이 행하실 선선한 일은?(18-21절)
16-17절이 18절 이하의 말씀을 주실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설명하고 있다면, 18-21절은 그 하나님께서 직접 주시는 말씀을 담고 있습니다. 16-17절만을 볼 경우, 하나님의 새로운 구원은 조상들이 옛적에 경험했던 출애굽 사건과 같은 방식을 취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18절에서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 것이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고 훈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새롭게 하실 일이 옛적 일을 생각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획기적인 일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바벨론으로부터의 구원이 과거의 출애굽을 단순히 되풀이하는 것이 아님을 암시합니다(New Exodus).
사 48:6-7 / 너희가 그 말을 들었으니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라. 너희가 그것을 인정하고 선전해야 옳지 않겠느냐? 내가 이제부터 너희에게 아주 새로운 일, 너희가 전혀 모르던 비밀을 알려 주겠다. 7) 내가 이제 바벨론의 포로민들을 해방시켜서 예루살렘을 재건하겠다. 이 일은 내가 지금 창조해 내는 새 역사로서 옛날부터 예고한 것이 아니다. 전에는 너희가 들어본 적도 없었던 일이다. ‘우리가 이미 옛날부터 알고 있었다.’는 말을 너희가 하지 못하도록 내가 이제 아주 새로운 일을 창조하였다.
그렇다면 어떠한 점에서 그러합니까? 19절에 그 해답이 있습니다. 과거의 출애굽 해방이 바다 가운데 길을 내시고 그 바다를 마른 땅처럼 건넌 사건을 통해서 마무리되었다면, 바벨론 포로로부터의 해방을 뜻하는 새로운 출애굽은 반대로 하나님께서 광야, 곧 마른 땅에 길을 내시고 사막에 강을 만드시는 기적적인 방법을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 35:6-7 / 그때에는 절름발이가 사슴처럼 펄쩍펄쩍 뛰고 벙어리의 혀가 기뻐서 환호성을 칠 것이다. 사막에서 샘물이 터져 나오고 광야에서 물줄기가 흘러 나갈 것이다. 7) 불타는 모래밭이 호수로 바뀌고 목타던 대지에서 샘줄기들이 솟아오를 것이다. 승냥이가 우글거리던 곳에서 갈대와 왕골이 자랄 것이다.
주께서 광야에 길을 내시고 사막에 강이 흐르게 하신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그것은 광야에 길이 있을 수 없으며, 사막에 강이 흐를 수 없다는 통념을 송두리째 뒤엎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기적이 지상 세계에서 도무지 경험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그리고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초월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광야에 길만 있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물이 없으면 모두 목말라 죽는 것을! 그 까닭에 하나님께서는 광야에 길도 만드시고 사막에 강물도 흐르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마치 이스라엘의 광야 방황 시절에 주께서 그들을 인도하시고 때때로 마실 물을 그들에게 주신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 새로운 구원을 믿으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바벨론 포로 상황 속에서는 도무지 그런 일이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는 패배 의식이 그들을 지배하고 있는 까닭에, 그들 중의 누구도 하나님께서 행하실 새 일의 가능성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설령 하나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그것을 선포하신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이 때문에 주께서는 "옛날에나 그런 일이 가능했겠지!"하고서 옛날 일에만 매여 있는 자들에게, 더 이상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라고 훈계하신 것입니다. 또한 그는 19절에서 "이 일이 이미 드러나고 있는데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고 물으십니다. 이 질문은 이스라엘 백성이 도무지 주께서 하실 새 일의 가능성을 현실로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얼마나 안타까워하시는지를 한눈에 알게 해준다. 그러나 시각을 달리해서 생각한다면, 그것은 그만큼 하나님께서 이루실 새로운 구원이 놀라운 일이 될 것임을 암시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누구도 믿기 어려운, 그리고 누구도 감히 예측할 수 없는 기적적인 구원이 그들 앞에 전개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구원은 들짐승들조차도 하나님을 공경할 정도로 깜짝 놀라운 일이 될 것입니다. 주께서 광야에 물을 대고 사막에 강을 내어 그가 택하신 그의 백성으로 하여금 마음껏 마시게 하시는 것을 보고서, 시랑과 타조도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20절). 뒤집어서 얘기하자면,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새 일을 인정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들짐승으로 하여금 그의 놀라운 일로 인하여 그를 공경하고 찬양하게 하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하신 말씀, 곧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눅 19:40)는 말씀을 연상케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회개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며 경배하는 사람들로 만드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을 보내셨고, 예수님을 보내셨으며, 사도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마 3:1 [침례 요한의 설교 ; 막 1:1-8, 눅 3:1-9, 요 1:19-28] 그들이 나사렛에 살고 있을 때 유대 광야에 침례 요한이 나타나서 설교를 시작하였다. 2)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깝다.” … 5) 예루살렘과 요단 강변, 그리고 유대 전역에서 사람들이 요한의 설교를 들으러 빈들로 나와서, 6) 자기의 죄를 고백하고 요한에게서 침례를 받았다. 7) 그러나 요한은 많은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침례를 받으러 오는 것을 보고 소리쳤다. `독사의 자식들아, 닥쳐올 징벌을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주었느냐? 8) 침례를 받기 전에 회개하였다는 증거를 행동으로 나타내 보여라. 9) “우리한테 무슨 일이 있을라고,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은 아예 하지도 마라. 그것은 소용없는 일이다. 하나님은 여기 있는 돌들을 가지고도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게 하실 수 있다. 10) 하나님께서 내리치실 심판의 도끼가 이미 열매 없는 모든 나무뿌리에 놓여 있다. 그런 나무는 다 찍혀 불속에 던져질 것이다. 11) 나는 너희를 회개시키려고 물로 침례를 준다. 그러나 나보다 훨씬 위대하신 분이 오시면 그분은 성령과 불로 침례를 주실 것이다. 그분은 너무나도 위대하셔서 나는 그분의 신발을 벗겨 드릴 자격도 없다. 12) 그분은 손에 키를 들고 자기 타작마당의 곡식을 까불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다.”
왜 이렇게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까? 이는 21절에 나오듯이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그러면 내가 만든 새 백성 이스라엘이 이 일을 계속 이야기하면서 나를 찬양할 것이다.”)이라는 선하시며 사랑이 넘치시는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출애굽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궁극적으로 원하시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는 일입니다. 과거에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을 건넌 후에 온 백성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며 영광을 돌렸음(출 15:1-21)을 기억케 하시며 이제 그렇게 하도록 역사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들짐승들이 하나님을 공경하고 그를 찬양한들, 그것이 그의 백성 이스라엘의 찬양만큼이나 하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정말 기쁘시게 할 찬양은 들짐승들의 찬양이 아니라, 그가 자신을 위하여 만드신 이스라엘 백성의 찬양입니다. 들짐승의 찬양도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겠지만, 그가 사랑하시는 이스라엘 백성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으며, 그가 기뻐하시는 찬양을 할 수 있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주의 백성, 주께 영광을 돌리라고 창조한 이스라엘 백성만이 하나님을 온전히 찬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에 또는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았을 때에 기뻐하셨습니다.
마 3:16-17 / 예수께서 침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는 순간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영이 비둘기같이 자기 위에 내려오는 것을 보셨다. 17) 그때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왔다. “이 사람은 사랑하는 나의 아들이요,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참고 : 마 17:5 / 베드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더니 구름 속에서 음성이 들려왔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행 13:22 / 그리고 그를 물러나게 하신 뒤에는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찾아냈으니 그는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이다. 그가 내 뜻에 복종하기 때문이다.” 하고 칭찬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은 대체 무엇을 뜻합니까? 이에는 두 의미가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그들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새 일에 대하여 기쁨으로 응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실 놀라운 구원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세가 없이는 그를 온전히 찬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께서 이루신 새로운 출애굽의 기적과 그러한 기적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의 높으신 이름을 세상에 널리 알리고 선전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사 43:10-12 / 주께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이스라엘 백성이 나의 증인이다. 너희는 내가 선택한 백성이요 나를 섬기라고 종으로 세운 백성이다. 내가 한 모든 일의 증인이 바로 너희다. 너희가 나를 알고 나를 의지하고 따르며 이 세상에 나밖에는 다른 신이 없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도록 내가 너희를 선택하여 종으로 삼았다. 내 앞에 다른 신이 없었으며 내 뒤에도 다른 신이 없을 것이다. 11) 나만이 여호와, 세계의 주인이요 역사의 지배자이며 나밖에는 다른 구원자가 없다. 12) 내가 너희에게는 구원한다고 미리 알려 주고 선포했을 때 너희 가운데서 듣지 않은 사람이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참 신이라는 것을 알려 줄 증인들이다. 나는 이미 과거에 너희를 해방시켜 주었지만 13) 앞으로도 내가 너희를 해방시켜 주겠다. 나는 언제나 똑같은 해방주이다. 내가 해방시킨 백성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갈 자는 아무도 없다. 내가 하려고 작정한 일은 아무도 방해할 수가 없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은 아무도 없는 허허벌판에서 혼자 큰 소리로 외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도리어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공개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행동을 가리킵니다(시 22:22, 25; 26:12; 35:18; 40:9-10; 68:26; 89:5; 111:1; 149:1).
사랑하시는 여러분!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위하여 새 일 즉 신선한 일을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은 그 하나님을 찬양하십니까? 그분의 증인이 되십니까? 우리를 위하여 신선한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그분을 증거하는 증인의 사명을 감당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