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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에트시대의 이민
(1) 대륙으로의 이민과 정책
1917년의 러시아혁명은 한인들의 러시아이민과 러시아의 정책에 있어서 큰 변화를 가져온 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러시아혁명 이후 1917년부터 1922년까지는 연해주를 비롯한 극동지방은 적군과 백군이 내전을 치르고있었고 또한 일본군이 1922년 10월말까지 시베리아에 진줄하고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러시아의 이민정책 특히 대한인정책이 본격적으로 관철될 수 있는 시기는 아니었다. 따라서 소비에트 시대의 대한인정책은 본격적으로는 러시아 극동지방이 일본의 지배로부터 벗어난 1922년 10월 25일부터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1917년-1922년 사이에서도 소비에트당국은 극동지방에서 적지않은 비중을 차지하고있는 한인등을 상대로 하여 이민과 민족정책과 관련된 여러가지 정책을 나름대로 제시하고 또한 한인들의 지원을 받고자 하였다. 예컨대 비록 선언적인 차원이기는 하지만 적군은 당면한 백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한인들의 협력을 구하였으며 한인들에게 토지를 분배해주겠다는 약속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소비에트의 이러한 약속은 일본군이 극동에서 철수하고 소비에트가 권력을 장악하자마자 곧 식언이 되어버렸다. 이미 1922년 말부터 러시아공산당은 극동지방으로부터 한인들을 타지방으로 이주시키려는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과연 이렇게 급하게 러시아가 한인들의 이주계획을 수립하게 된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러시아공산당은 소비에트의 승리가 분명해지자 다른 무엇보다도 토지문제등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는 한인들이 극동지방에 거주하는 것을 좋지않게 생각하였던 것이다. 극동지방의 한인들의 존제를 탐탁하지 않게 생각했던 것은 이미 제정시대부터의 일군의 러시아관리들이 가지고있던 생각이며 공산당의 일부책임자들도 이러한 생각을 공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도 보안이라는 문제를 놓고 생각할때 한인들의 존재는- 비록 한인들이 적백간의 내전에서 소비에트에 혁혁한 기여를 하기는 하였지만- 미덥지 못한 존재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1922년에 진행되었던 이 계획은 한인들의 강력한 반발로 말미암아 그리고 대규모 이주계획을 실현시키기에는 아직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그 여건이 마련되지 못한 단계라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실행이 되지는 못하였다. 그대신 마련된 것이 한인들의 소비에트화였다고 말할 수 있다. 러시아공산당은 한인들이 민족주의적인 경향을 강하게 가지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으며 다수가 러시아국적이 아닌 이들 한인들을 러시아의 안보에 있어서 바람직한 존재로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비록 한인들의 이주계획이 실패로 돌아가기는 하였지만 러시아공산당은 이 문제를 포기하지 않았다.
러시아공산당이 극동의 한인이주문제를 다시 들고 나오는 것은 1926년의 일이다. 한인들 이주와 관련하여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은 이번에는 토지문제였다. 그리고 이 토지문제는 정치적인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되는 것이었다. 러시아의 기본적인 정책은 분명한 것이었는데 그것은 한인들을 국경지대에 둘 수가 없다는 생각이며 따라서 경제적인 문제를 기회로 하여 한인들을 내륙 깊숙히 이주시키고 국경지대에는 그들이 보다 신뢰할 수 있는 러시아인을 포함한 유럽지역으로부터 이민을 받아들여 한인들의 자리를 차지하게 한다는 계획이었다. 즉 변방을 러시아인들로 채운다는 것은 이미 제정러시아로부터의 연속적이고도 확고한 러시아의 이민정책이었으며 이러한 정책이 1926년에 토지문제를 둘러싸고 보다 구체화되었던 것이다.
1926년 12월 6일 전연방소비에트집행위원회(VTsIK)간부회는 한인들의 토지정착문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결정을 하였다. (1)한인들을 더이상은 우수리에서 하바로프스크 이남의 구역에 정착시키지 않겠다는 것 (2) 이 지역에 살고있는 한인들중 토지를 확보하지 못한 사람은 모두 북위 48도 5의 이북 하바로프스크 구역과 블라고베셴스크 구역으로 이주시킨다는 것 (3) 한인들에 의해 경작되는 토지를 정리하기 위해 3년의 기한을 둔다는 것 (4) 한인 이민들로부터 자유로와진 땅은 중앙 러시아의 이민들로 채운다는 것이다. 이러한 결정은 1927년 1월 28일 러시아연방(RSFSR)의 인민위원회(Sovnarkom)에서의 결정으로 확인되었다. 그와 함께 이러한 결정을 효과적으로 실행하기 위해 이주대상으로 되어있는 한인들에게는 한인-러시아인 혼합콜호즈를 편성하는 것과 한인에게 토지를 임대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토지가 없는 한인들은 그대신 하바로프스구역의 쿠르다리아(Kur-Daria), 비자노비르(Bidzhano-bir) 구역 그리고 아무르 지역의 우르미이스크(Urmiisk) 구역으로 보내기로 하였다. 이 구역으로 보내는 수에 대하여 러시아 관헌은 다음과 같은 계산을 하였다. 블라디보스톡 구역의 농가를 19536가구 106835명으로 파악하였다. 이중 외국인(주로 한인)은 54%이다. 관헌은 토지를 가지지 못한 한인들을 모두 구역 밖으로 이주시켜야 한다고 보았다. 대략 이러한 계산 아래 5개년계획에서는 블라디보스톡구역의 한인 15만 1200명중에서 약 10만명을 구역 밖으로 이주시키려고 하였다. 계획에 의하여 이미 1929년에 1229명의 이주가 집행되었고 1930년에 5천명, 1931년 19297명, 1932년 28619명, 1933년 33614명을 이주시키기로 되어있었다.
사실 이러한 이주계획에 대하여 한인들이 찬성할 수가 없었다. 1927년 7월 25일 블라디보스톡에서 개최되었던 한인열성자들의 집회 참가자들 사이에서는 차라리 1데샤치나당 80푸드의 밀을 임대료로 바치는 것이 처녀지에서 데샤치나당 30-40푸드의 밀을 수확하는 것보다 낫다고 하는 말까지 나왔다. 그러나 소비에트정부는 이러한 한인들의 여론을 조금도 의식하지 않았다.
러시아정부는 한인들을 블라디보스톡으로 부터 추방하려는 계획에는 적극적이었지만 새로이 이주할 구역에 한인들이 정착할 수 있도록 하는 준비에는 소흘하였다. 쿠르다르기아(Kurdargia), 신디아(Sindia) 구역에 대한 토지의 정비는 1927년 여름에 가서야 시작이 되었으며 가을이 되자 곧 중단되었고 1929년에 가서야 작업이 재개되었다. 결국 제대로 준비도 되지 않은 땅을 새로운 한인들을 맞을 땅으로 준비하여야만 하였다. 결국 1927-8년에 1000명을 이주시키려는 계획은 실패하였다. 1928-9년에 1297명이 이주하였는데 이는 계획된 수치의 3분의 1 에 불과한 것이었다. 1930년에는 1625명을 이주시켰는데 그중 1455명은 하바로프스크구역으로 170명은 카자흐스탄으로 보내어졌다. 이중 431명은 강제적인 조치를 취한 것이다. 1931년에는 계획은 실제로 이루어지 못하였다. 이에 대하여 전러공산당 극동위원회는 계획의 부진을 사보타지로 그리고 철의 당기를 위반하는 것으로 실제에 있어서의 우익반대주의라고 평가하였다. 그리고 한인들을 강제로 이주시키는것에 대해 주저하였던 사람들을 당에서 추방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이 시기에 강제이주당한 사람들의 처지는 대단히 곤혹스러운 것이었다. 하바로프스크 구역의 쿠르다르기아와 신디아에 이주한 한인들에 대하여 1930년 6월에서 7월에 걸쳐 경찰(OGPU)이 한 보고에 의하면 한인들의 상황은 극도로 열악한 것이었다. 60가구로 조직된 농업아르첼 "수찬"은 토지가 준비되지 않아서 2와 2분의 1 헥타아르밖에는 파종을 하지 못하였다. 그중 11 가구는 다른 곳으로 도망을 쳤다. 이 곳에는 농민들만 이주된 것이 아니라 어부, 제재공등 강제로 와서 농업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이 많았다. 600명으로 조직된 아르첼 "젬례델리에(Zemledelie)"(말리노프카 근처)는 우물 하나도 가지지 못하고 늪지의 물을 이용해야만 하였다. 이리하여 3월부터 6월까지 16명의 아이가 숨졌다. 의료지원은 거의 없었으며 이 기간중 오직 하루만 의사가 잠시왔다가 가버렸다. 예브게녜프카 근처에 있는 아르첼 "라스셀렌치(Rasselentsy)"는 255명으로 구성되어있는데 축력이 부족하여 오직 70 헥타아르에만 파종을 하였다.
토지만이 문제가 아니라 주거지조차도 마련되지 않았다. 겨울에 눈 위에 임시로 집을 지은 이들은 봄이 되어 그들이 거주하는 곳이 바위 위 그리고 늪지 위임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물을 팔 수가 없으므로 그들은 늪지의 물을 마실 수 밖에 없었고 이는 아이들에게 큰 타격을 주어 3월부터 5월까지 한 달간에 아이 46명이 사망하였다. 상황은 신디아 구역도 마찬가지라서 초기 두 달 사이에 46명이 사망하였다고 보고하고 있다.
상황이 이렇게 악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소비에트정부는 심지어 하바로프스크구역에 살고있는 한인들까지도 강제이주시키려는 계획을 수립하여 집행하였다. 1926-27년에 걸쳐 한인들이 거주하는 레닌스키 라이온으로부터 우수리강 연안의 코즐로프스크마을 근처 코레네프스키(Korenevskii) 땅으로 이주시키며 비입적한인은 쿠르다르기아와 신디아로 이주시키려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한인들에게 토지를 임대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이러한 계획은 1928년 6월 1일까지 확정되었다.
많은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산당은 계속하여 한인 강제이주정책을 강행하고 독려하였으며 이를 반이민적 쿨락선동과의 투쟁으로 파악하였다. 그러다가 1931년 2월 20일에 가서야 이 계획은 중지되기에 이른다.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소련정부는 전혀 한인들을 이주시킬 준비를 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이러한 상태에서 계획을 계속 집행하는 것이 어려웠으며 또한 현지의 러시아인들도 경제적인 관점에서 한인들의 노동력을 이용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1928-30년의 강제이주는 소규모의 이주로 끝내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그후에 이루어질 강제이주의 전조로서 소련공산당과 정부의 의지를 보여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러시아당국은 한인들을 부분적으로 강제이주 시킨 후 다음에는 한인들의 집단화에 총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러나 한인들의 집단화를 통하여 토지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못하였고 오히려 생산만 저하시켰다. 예컨대 연해주에서 1929년 1만 9천 헥타아르의 벼 파종면적은 1935년이 되면 11615 헥타아르로 줄어들었다. 1934년에 한인 콜호즈는 모두 200여개인데 그들에게 토지는 현저히 부족하였다. 이 문제를 둘러싸고 한인과 러시아인들 사이에 대립도 일어났다. 한인콜호즈 "노ꞁ 푸츠(Novyi put')"와 중국인들의 "크라스늬이 보스톡(Krasnyi Vostok)", 한인콜호즈 "스탈린"과 인근 러시아인 콜호즈 사이의 대립이 그것이다. 이러다가 한인들은 1937년 강제이주를 맞게 된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이미 1920년대에는 계획으로만 가지고 있었던 한인강제이주가 1928년에 들어서면서 부터는 실제정책으로 추진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 시기의 강제이주의 특징은 그 시행자가 소련중앙정부가 아니고 러시아 극동정부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강제력이 동원되었던 것은 의심할 수 없지만 한인들의 강력한 저항을 맞이하였으며 이주계획의 실시가 계획보다는 미진한 것으로 보아 아직 충분한 규모의 강제력을 행사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의 이주의 대상지역은 주로 한인과 러시아인들 사이의 갈등 지역으로 콜호즈를 결성하는 과정에서 러시아인들의 이익을 수호하기 위하여 한인들을 북방의 변경으로 강제이주하는 방법을 택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 있다.
이제는 한인들의 1937년 강제이주에 대하여 언급할 때이다. 한인들의 강제이주는 1937년 봄에 불어닥친 새로운 숙청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1937년 숙청은 3월 3일 스탈린이 볼셰비키당 중앙위원회에 한 보고 '당사업의 부진과 트로츠키 및 다른 양면주의자들을 청산할 방법에 대하여'로부터 시작되었다. 여기에서는 소련이 자본주의 적들로부터 포위되어있고 소련 내에는 외국의 스파이들이 가득하다고 하였다. 이제부터는 그 적들을 쁹아내야 할 판이었다. 스탈린의 보고에 맞추어서 3월 16일 "프라브다"지에는 "일본의 간첩망"이라는 기사가 게재되었고 4월 23일에는 I.볼로딘(Volodin)의 '소비에트극동에서의 외국 스파이행위'가 "프라브다"에 게재되었다. 여기에서는 일본의 스파이가 한국, 만주, 북중국및 소련에 퍼져있으며 이 지역에 일본이 한국이나 중국 스파이들을 파견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벌어지면서 소련공산당의 강박증세는 더욱 심해졌다. 극도에서의 이러한 정세변화로 중국의 국민당과 소련은 1937년 8월 21일 소중 불가침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이 조약이 체결되던 날에 소련인민위원회와 볼셰비키당 중앙위원회는 극동변경지역에서 한인들을 이주시키는 결정을 채택하였다. 그 공식적인 이유는 "극동지방에 일본 정보원들이 침투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목적"이다. 그러나 이 문서에서 이주의 진정한 목적이 그대로 드러났으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한인강제이주의 동기는 그보다는 훨씬 더 복잡한 문제를 안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인 첩자침투 방지란 것이 정책입안자의 편집적 증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면 단지 한인들을 추방하려는 구실에 불과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한인 강제이주의 실질적인 동기는 한인들을 극동에서부터 제거하려는 오래된 러시아 쇼비니즘의 발로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여하튼 강제이주가 공식적으로 결정된 것은 1937년 8월 21일이다. 이날 소련인민위원회와 소연방공산당은 "극동지방 국경부근 구역에서 조선인거주민을 이주시키는 문제에 관하여"라는 결의문 No.1428-326cc 를 채택하였고 이는 스탈린과 몰로토프에 의하여 서명되었다. 이 결의안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소비에트 사회주의연방공화국 인민위원회와 소연방공산당(볼셰비키)중앙위원회는 다음과 같이 결의한다.
극동지방에 일본 정보원들이 침투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목적으로 다음과 같은 방안을 실시한다.
1.전소연방공산당(볼셰비키) 극동지방위원회, 극동지방 집행위원회, 내무인민위원국이 국경부근 구역들인 포시에트, 몰로토프, 그로데코보, 한카, 하롤, 체르니고프, 스파스크, 슈마코보, 포스틔셰프, 비킨, 뱌젬스키, 하바로프스크, 수이푼, 키로프스크, 카리린, 라조, 스보보드니이, 블고베시첸스크, 탐보브카, 미하일로프, 아르하라, 스탈리노, 블류헤르에서 모든 한인주민들을 내보낸후 남카자흐스탄주의 아랄해 구역, 발하쉬구역 및 우즈벡 소비에트 사회주의공화국으로 이주시킬 것을 지시한다.
이주는 포시에트및 그로데코보와 인접해있는 구역들로부터 실시한다.
2.이주는 지체없이 실시하여 1938년 1월 1일까지 완료한다.
...
결의문은 또한 한인들이 소유물, 농기구, 동물을 소지할수 있으며 동산, 부동산, 파종종자는 가격을 계산하여 보상받을 수 있도록 하였고 이주대상 한인이 원하는 경우 국경을 떠날 수 있도록 하였다.
한인 강제이주의 집행 책임자는 예조프였다. 그는 1936년 9월 26일 야고다의 뒤를 이어 내무인민위원회의 책임자가 되어 예조프쉬나로 불리울 공포테러정치를 1938년 12월 8일까지 집행하였다. 예조프는 한인이주에 대한 구체적인 지시를 8월 24일자로 하바로프스크 내무인민위원국 책임자 龁슈코프에게 각서 No.516호로 시달하였다. 각서의 요지는 이주대상이 되는 한인들을 이동의 가능성을 배제하고 남김없이 조사하며 저항의 기미나 혐의가 있는 자는 체포하여 트로이카(당 제1서기, 내무인민위원회 대표, 소비에트 대표)에 넘기며 국경수비를 강화하라는 것이었다.
이어서 예조프는 한인들의 이주를 신속히 달성시키려는 목표하에 8월 27일 龁슈코프에게 전문을 발송하여 이주작전을 10월 하순까지 완수하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것을 질의하고 포시에트구역과 그로데코보 구역에서는 한달 안으로 이주를 시켜야 한다는 것을 지시하였다. 이에 대하여 龁슈코프는 한인이주는 11월 까지 2달의 기간이 필요하며 이 기간내에 작전을 완수하고 포시에트와 그로데코보 구역에서는 한달 안으로 이주를 실시하겠다고 보고하였다. 龁슈코프의 보고에 따라 예조프는 포시에트구역과 그로데코보 구역은 10월 1일 까지 나머지 구역은 10월 15일까지로 하는 이주계획을 승인하였다.
예조프는 龁슈코프와의 연락을 근거로 스탈린에게 한인이주를 보고하였다. 예조프는 보고하기를 9월 21일자로 1차 이주가 완료되었는데 카자흐로 21296명 우즈벡으로 30003명이 이주되었고 총 10369가구 51299명이라고 하였다. 교통인민위원부는 9월 3일자로 수송열차 계획을 작성하였는 바 열차의 편성은 39대이며 1대당 특실 1량, 구급차량 1량, 취사차량 1량이며 객차량은 25-60량으로 편성되고 거기에 3-6량의 유개화차및 1-2량의 무개화차가 편성되었다. 열차 1대당 운행할 차량 수는 31-71량이었고 이리하여 총객차량은 2052대, 무개화차 77량 유개화차 222량였다.
1차 이주를 통하여 한인들을 이주시킨 후 예조프는 다시 2차 이주를 실시하였다. 2차 이주는 9월 24일부터 실시될 것이었다. 1차 이주시 동원된 열차가 39대인데 대해 2차 이주시에는 85대의 열차가 동원되었다. 1차 이주가 주로 국경지대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조속히 이주시키는데 목적이 있었다면 2차이주는 극동지방 전역의 한인들을 모두 이주시키는 것이었다.
예조프는 기본적으로 1937년 10월 25일에 한인 이주사업이 완결되었다고 보고하였다. 총 124대의 수송열차가 배치되어 36442가구 171781명이 이송되었으며 극동지방(캄차트가, 오호츠크, 특수이주민)에 700명 정도가 잔존해 있는바 이들은 11월 1일경 수송열차로 이주될 것이라고 하였다. 이들 이주된 한인중 우즈벡으로는 16272가구 76525명, 카자흐로는 20170가구 95256명이 이주되었다. 내무인민위원회 부위원장 체르늬셰프가 11월 16일자로 예조프에게 보낸 보고에 의하면 한인 이주민을 실은 마지막 열차가 11월 15일 노보시비르스크에 도착했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일단 극동지역으로부터의 한인은 이로써 모두 제거되었다.
강제이주는 한인들 사이에서 있을 수 있는 반발을 철저히 탄압하기 위하여 한인들을 자의적으로 체포하고 처형하는 계획을 동시에 진행하였다. 강제이주 결정이 서명된지 4일만에 예조프는 龁슈코프에게 "한인반혁명 분자의 신속한 체포를 위하여 총 작전의 제2단계 돌입을 허락한다"는 각서를 발송하였고 이것은 곧 강제이주에 대한 논의 자체가 봉쇄된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龁슈코프는 1937년 9월 4일 예조프에게 다음과 같은 각서를 송부하였다.
내무인민위원회 연해주국의 보고에 의하면 9월 2일 레이네크섬에서 한인공산주의자들과 어업 콜호즈 "노도"의 조합원들이 당회의를 개최하여 이주문제를 논의하였다고 한다.
이 회의에서 이번 작전은 스탈린헌법과 당의 민족정책에 위배된다고 하는 이주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 선동적인 발언이 있었다고 한다. 내무인민위원회의 주국에서 책임자가 조사를 실시하여 불가피한 경우 체포하기 위하여 그 지역으로 떠났다.
그러나 아무리 강압적인 정책을 실시하고 한인들의 행동과 언어를 통제했다고 하더라도 강제이주에 대하여 불평들이 없을 수는 없었다. 이에 대하여 내무인민위원회 극동국의 현장 책임자가 龁슈코프에게 한 보고서 "우수리주 한인 이주대상 구역에 퍼져있는 주민들의 정치적 분위기및 이주작업의 경과에 대하여"는 한인들의 상황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보고서는 한인들이 강제이주를 당하면서 "당이 우리 한인공산주의자를 믿지 않는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거나 "내 얼굴색이 다르기 때문에 나를 추방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한편 러시아인들 사이에서는 한인들에 대하여 쇼비니스틱한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다고 하였다.
보고서는 이주에 대한 통지가 비교적 조용하게 이루어지고 있지만 그로데코보의 구역당 지도원인 박이라는 사람은 이주에 대하여 불만스러워하면서 2-3명의 첩자때문에 전 한인들을 이주시킨다고 하였다. 보로쉴로프시에서는 콜호즈원들 살이에서 "내내 굶주리다가 이제 조금 풍족해지고 살만 하니까 어디론가 우리를 내어쫓으려한다. 우리는 이제 다시 굶주리게 될것이다"고 하였다. 몰로토프 구역의 후보당원 이왕주는 내무인민위원회의 기관이 한인들을 탄압하는 것은 한인들 모두를 첩자로 보고있기 때문인데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을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아마 내무인민위원회의 기관은 곧 모든 사람들을 체포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스파스크 구역에서 김 표트르는 "마음대로 하라고 해, 마음대로 이주시키라고 해, 나는 자살해 버릴테니까"라고 하였다. 한카 구역의 가제주는 이주결정이 내려졌다는 것을 믿지 않으려 하면서 "우리로 하여금 어디로 금방 가라고 하는 이주결정을 스탈린동지가 내렸을리가 없어. 스탈린동지에게 전보를 쳐야하는데 무언가 방해되는 일이 일어나고 있어"라고 하였다.
한인들의 이러한 반응을 간단히 소개하였지만 러시아에 이주하면서부터 그때까지의 모든 역사와 경험을 바탕으로 나온 것이었다고 본다. 이들은 가난한 상태에서 러시아로 넘어와서 같은 고생을 하면서 생업을 일구었고 근면하게 일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첩자로 의심을 받고있으며 그들이 하늘같이 알던 스탈린으로부터 강제이주의 명을 받고 떠나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러한 이주결정은 한인들이 이해할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이들은 이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주는 이루어졌고 체포는 진행되었다.
또한 강제이주는 한인들에게 충분한 시간적 여유를 주지않고 행해졌다. 사람들은 이주에 대하여 막연하게 소문으로만 알고 있다가 실제 이주 통보를 받은 것은 이주 며칠 전에 불과하였다.
한편 이미 차량의 편성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중앙아시아로의 강제이주 여행은 결코 편안한 여행이 될 수 없었다. "먹을 것을 전혀 공급하지않아" 기차가 석탄이나 물을 보충하기 위해 역에 서면 간이상점에 뛰어가 빵등 "사람먹는 아무것이나 닥치는대로 사다먹으면서" 여행을 했다. 그런데 열차에 화장실이 없었기 때문에 역 구내에 열차를 세우면 모두가 내려 대소변을 본다고 "역도 아닌 허허벌판"에 차를 세웠다. 마른 음식을 계속 먹다가 고통을 겪어서 "렬차가 서면 돌멩이를 주어다 불을 지피고 장물이라도 끓이려고하면 렬차가 떠나고하여 제대로 끓여먹지도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자연히 어린아이들에게는 큰 타격을 주게되어 여행중에 아이들 사이에 홍역이 발생하여 아이들의 사망률이 60%를 상회하였다고 한다.
여행중에 가족이 여러 열차로 흩어져서 부모 자식이 서로를 잃어서 이산 가족도 다수 발생하였고 여행중 사고도 발생하였다. 대표적인 사고는 하바로프스크 근처의 베리노(Verino)역에서 발생한 사고이다. 이 곳에서 열차 505호가 충돌하여 앞의 7개의 차량이 완전히 전복되었다. 이 사고로 21명의 한인이 죽음을 다하였고 50명이 다쳤으며 58명은 자신의 재산을 손실했다. 이 사고는 1937년 11월 초(4일 이전)에 발생하였다. 이 사고의 사망자들은 다음과 같다.
표II-4. 강제이주중 열차사고로 사망한 한인명부
번호 이름 성 나이 소속 콜호즈
1 김정신 여 21 푸츠일리차
2 헤니나 여 4 (이하동일)
3 남동히 남 4
4 김 바실리이 남 17
5 김 예카테리나 여 16
6 김 바르바라 여 6
7 신황수 여 13
8 최성칠 남 50
9 최 표도르 남 1
10 최범준 남 19
11 최분아 여 11
12 마인숙 여 42
13 장옥한 여 54
14 최유라 여 22
15 김 표트르 남 4
16 김 세르게이 남 8
17 박 유라 여 16
18 박 다룡 남 12
19 최 타치야나 여 50
20 김은숙 여 47 데뱌티에 얀바랴
21 김 안나 여 60 "
여행중의 이러한 불편과 사고는 한인들이 당했고 또 당해야 할 고통의 지극히 작은 부분에 속하였다. 한인들이 새로운 정착지에 도착한 후의 상황은 더욱 더 막막한 것이었다. 모스크바 한인협회 부회장 유 게라심의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하자.
카자흐공화국의 크질오르다주의 무연벌판에 우리를 내려놓았다. 그곳에는 내버려둔 토벽집들과 무덤밖에 없었다. 9월말이여서 낮은 덥고 밤이면 선선하였다. 토피벽돌로 구들을 놓은 토굴을 급히 만들어야했다. 그러저럭 동삼을 보냈는데 봄이 오니 전염병-장질환이 심해졌다. 위생조건이 없는 차에 앉아 먼 길을 가는 도중에 벌써 많은 사람들이 그 병에 걸렸다. 거기에다 학질, 적리가 사람들을 쓸어눕혔다. 나자신이 어떻게 살아났는지 모르지만 나의 동년배들이 죽는 것을 직접 보았다. 의료원조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의사와 준의는 커녕 약도 없었다. 우리는 원동에서도 의사를 보지 못하였다. 혹시 조선인들중에서 의사들이 있었겠지만 인텔리대표라고 해서 당 및국가일군들과 함께 탄압을 당했을 수도 있다.
결국 소련당국은 철저한 준비도 없이 단지 한인들을 추방시켜야 한다는 목적만을 가지고 강제이주를 추진한 것을 알게 된다. 이러한 당국의 정책으로 인하여 한인들은 불가피하게 그 피해를 당할 수 밖에 없었다. 때문에 거기에 따른 희생은 자연히 클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과연 이 참담한 시기에 한인들의 희생은 얼마나 발생하였는가? 이에 대하여는 정확한 수자를 파악하기가 힘들 정도이다. 아직까지는 강제이주로 인한 한인들의 희생에 대하여 정확한 정보가 제공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지 카자흐스탄에서 김과 명(Kim G.D., Men D.V.) 에 의해최근에 발간된 책 {카자흐스탄 한인의 역사와 문화}에서 다음과 같은 인구변동률이 소개되어 있으므로 이를 근거로 하여 추정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표II-5. 카자흐스탄에서의 한인들의 인구변동비율(1938-39, 천분률)
비율 1938 1939
출생율 50.3 53.9
사망률 41.5 27
유아사망률 203.8 118
결혼율 5.3 5.3
이혼률 0.7 1.1
이 표에 의하면 1938년도의 사망자비율이 특히 유아사망률이 엄청나게 높다는 것을 알게된다. 아이들의 경우는 5명중 1명이 사망하였고 이 경향이 여전히 높기는 하여도 1939년도에 가면 반으로 줄어든다. 강제이주가 집행된 해인 1937년의 경우가 위의 표에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피해가 가장 심했을 것으로 예상되는 해가 통계에서 잡히지 않았다고 짐작이 되지만 여하튼 강제이주의 피해가 직접적으로 1938년도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이 해에 이주된 인구를 18만이라고 잡을 경우 이 한해에만 무려 7000여명이 사망하게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강제이주의 영향력이 아직도 나타나는 1939년에는 약 4800여명이 사망하였다. 그런데 이 당시에 카자흐의 평균사망률이 1938년에 인구 1000명당 18.3명, 1939년에 16.3명이라고 하므로 한인들은 결국 강제이주로 인하여 카자흐의 평균보다도 2배이상의 높은 인구사망율을 가지게 된 것이라고 말할수 있다.
게다가 소비에트당국은 극동의 한인들을 모두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시키는데 만족하지 않고 한인 사회에서 지도적인 위치에 있던 인사들을 모두 숙청하고 처형하는데 혈안이 되었다. 죄목은 얼마든지 가져다 붙이면 되었고 정식재판은 필요없었다. 이렇게 하여 강제이주전 체포된 인사들은 하바로프스크등에서 약식으로 재판을 받고 즉결처형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 규모는 약 18만이라는 한인 사회의 규모를 감안할 때 엄청난 수자인 2500명에 달하였다고 이 체포의 현지 지휘자였던 龁슈코프는 술회하고 있다.
한인들은 또한 각종의 사회적 정치적 지도적 위치에서 완전히 배제되었다. 이 기간중 한인이 차지하던 가장 높은 지위는 구역당 위원회 지도원이었다고 한다. 그것도 아주 드문 일이었다. 전쟁시기에는 한인들을 믿지 못하여 군대에 보내지 않았다. 한인들중 이전의 사령관은 모두 탄압을 당하였다. 민족을 감추고 전선에 나간 몇몇 한인들이 존재하기는 하였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한인들은 전선에 나서는 대신 강제노동및 중과에 시달렸다. 한인들은 세금으로서는 1940년까지는 전시세로서 남녀공히 년간 100루블을 납부하였고 그외의 조세는 없었으나 1941년부터는 일반농민과 같이 세금을 부담하고 그외에 국방강화의 명목으로 다액의 공채구입강요, 1년에 3차 전선위문품의 공출이 있었다. 그리하여 "호구가 불가능할 정도로 소위 최저생활을 감수했다"는 것이다.
한인들이 이같이 당한 피해는 심리적으로도 큰 상처를 주어 재소한인의 외상(trauma)으로 남아 재소한인의 성격형성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주게되었다.
1937년 재소한인의 강제이주는 한인 민족운동과 소련의 대한인정책의 관계를 총체적으로 그리고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고 말할수 있다. 한인들의 역사적인 근거지인 연해주로부터의 강제이주는 그러나 돌발적인 사건이 아니었다. 이는 멀리는 한인들이 연해주에 정주하기 시작하면서 러시아의 식민정책이 한인들의 연해주 거주를 위험스럽게 여기기 시작한데서 나온 것이었으며 러시아가 유럽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변방인 극동지방을 군사적으로 방어하는데 있어서 한인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러시아의 협소한 인종주의의 산물이었다.
한인 강제이주는 소련에서 처음으로 이루어진 민족의 총체적 강제이주였다. 한인 강제이주는 그 이후 소련내 다른 민족들(볼가 독일인, 체첸인등)의 총체적 강제이주의 효시가 되었다. 소련의 이러한 민족들의 강제이주는 소비에트 정권이 인종주의적 기초 위에서 국가정책을 집행하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인 것이다.
한인들을 국경지방에서 추방하여 소비에트의 내부에 포로로 가두어두려는 생각은 짜르시대부터 안보를 위주로 생각하는 자들의 일관된 생각이었고 이는 소비에트 시대에 와서 강력한 권력을 배경으로 하여 실제로 집행될 수 있었다. 한인들을 강제이주시키면서 소련은 한인들을 신 주거지에 강제로 묶어두어 이주의 자유를 제한하려는 방책을 취하였다. 극동의 강제이주책임자 龁슈코프는 예조프에게 한인의 거주제한을 제안하였다. 1937년 8월 26일 예조프에게 보낸 각서에서 그는 "이주되는 한인들은 신분증을 소유하고 있는데 그것만 있으면 소연방의 어느 구역이나 관구에서도 거주할 수 있습니다. 이 거주증에 특수조건을 부여하는 직인을 찍어 이서할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청원하였다. 이에 대해 예조프는 "수송열차 승차시 신분증을 압수할 것. 수송열차의 지휘자만 신분증을 소지할수 있음. 도착장소에서 인민위원회의 결의안 861호의 11항에 입각하여 새 신분증이 교부될 예정임"이라고 전문을 보냈다. 이러한 조치에 따라서 한인들은 일정한 거주구역이 명시된 그러한 신분증을 소지하게 되었던 것이다.한인들은 이제 내륙에 갇힌 포로가 되었고 거주이전의 자유를 박탈당함으로써 적어도 1953년까지 그러니까 강제이주후에도 16년간 집단적으로 죄수생활을 하였다.
이 사이 소련의 행정적인 '착오'로 말미암아 잠시 한인들이 거주지 제한이 없는 신분증을 가지게 된 일이 있음을 부기해 둘 필요가 있다. 한인들은 강제이주 된후에 이주된 장소에서 5년간 거주지가 제한된다는 규정을 적용받아서 신분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1946년 8월 2일 소련 내무성 지시 No.196에 의하여 5년 거주지제한 신분증이 만기가 된 사람들에게 거주지의 제한이 없는 새로운 신분증을 발급하라는 지시가 있게 되었다. 이리하여 이 기간에 신분증을 갱신한 한인들은 거주지의 제한을 받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불과 7개월만에 소련 내무서은 1947년 3월 3일 두번째의 지시 No.36으로 앞의 No.196지시를 해석하였다. 이 지시에 의하여 한인들은 중앙아시아의 국가들 내에 국경근처가 아닌 지역에서만 거주하도록 규정되었다. 따라서 한인들의 극동지방으로의 이주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단지 7개월 동안에 운좋게 새로운 신분증을 받은 사람들만이 중앙아시아를 넘어설 수 있는 '자유'를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소비에트의 대한인 이민정책이었다. 이러한 한인억압정책에 대한 소련정부의 공식적 인정과 복권은 1989년에 가서야 이루어졌다.
(2) 사할린으로의 이민과 정책
한인들을 이같이 죄수와 같이 감금하여두는 식의 정책은 경우가 다르기는 하지만 사할린 한인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사할린 한인들의 경우도 정치적으로는 한인들을 불신하고 단지 경제적으로 한인들의 노동력을 이용하기위하여 소련정부는 한인들을 사할린에 억류하여 두었으며 나아가서 일본정부의 무성의한 태도로 말미암아 종전 50주년이 된 지금까지도 사할린 한인들의 한국으로의 영주귀국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제 소련의 사할린 한인에 대한 이민정책을 간략히 살펴보기로 하자.
사할린은 1850년대만 하더라도 니브히나 아이누같은 토착민들이 주로 거주하고 있었다. 그러다 1855년 1월 26일(2월 7일) 푸탸틴(E.V.Putiatin) 제독은 일본의 시모도에서 사할린에 러시아인과 일본인이 공동으로 주거하는 협약에 서명하였다. 이어서 1875년 사할린은 산크트페테르스부르그조약에 의하여 러시아의 영유지가 된다. 사할린은 1858년에 러시아로부터 죄수들을 받아들인 후 1869년 러시아의 공식적인 유형지가 된다. 1880-1900년 사이에 사할린에 도달한 죄수들은 그 가족을 포함하여 22640명에 도달할 정도였다. 사할린이 공식적인 유형지에서 벗어난 것은 1906년에 가서야 이루어진다.
사할린에 한인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러시아 연해주에 한인들이 이주하던 시기보다 약 10여년 뒤늦게 나타나다. 그것은 사할린의 석탄개발과 관련되어 있었다. 사할린에서는 1856년에 두에 탄광이 개발되기 시작하였는데 여기에 노동력이 부족하게 되어 외국인노동력을 사용하게 되었다. 1869년에는 홍콩에서 중국인 쿨리를 모집하였고 1870-80년에는 탄광노동에 한인들도 동원하였다. 이때부터 사할린에 한인들이 거주하기 시작했다고 본다. 또한 사할린의 어업에서도 한인들이 고용되기 시작하였다. 러시아의 첫 국세조사가 이루어진 1897년에 사할린에는 모두 28113명이 거주하였는데 그중 67명의 한인들이 살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은 모두 코르사코프 구역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그중 한국출신이 63명이며 그중 54명이 한국적을 가지고 있었다. 직업적으로는 9명이 농부이며 53명이 어부및 사냥꾼으로, 1명이 재봉사, 1명이 무직, 3명이 광부였다. 당시에 사할린은 유형지였기 때문에 연해주의 한인들로서 유형을 받은 사람도 사할린에 보내지는 경우가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한인들의 수는 사할린에 점차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1923년에 북사할린에는 러시아인이 모두 6571인인데 일본인은 3553인, 중국인은 1207인 그리고 한인은 1431인이 거주하였다. 이 시기만 하더라도 북부사할린은 일본군의 지배하에 있었고 사할린이 완전히 소비에트의 손에 넘어간 것은 1925년 5월 14일의 일이다.
이 북부사할린에는 한인들이 주로 니콜라예프스크에 거주하다가 넘어오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하여 알렉산드로프스크시에는 아르첼 "오고로드니크(Ogorodnik)"가 한인들만으로 조직되기도 하였다. 또 龁브노프스키이(Rybnovskii) 라이온에서는 나우모프카(Naumovka), 케프(Kef)의 두 한인 촌락이 214명으로 구성되기도 하였다. 러시아의 농촌이나 항구에서 한인들이 다수 거주하였음은 물론이거니와 이 당시 일본이 조차하고 있었던 오하같은 도시에도 한인들이 취업을 위하여 거주하고 있었다. 이 조차지에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한때 소비에트는 연해주의 한인들에게 국적을 주고 이곳에 이주시킬 생각을 가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같은 견해는 연해주의 공산당과 정부의 반대에 부딪혔다. 무엇보다도 정치적인 고려에서 조차구역에 러시아노동자를 거주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기고 한인들을 유입시키는 것에 대하여 반대의 입장을 취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한인들은 조직적으로는 아니지만 이 석유 조차구역에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925년 오하에 석유산업에 46명이 이듬해에는 89명이 그리고 1929년에는 모두 129명의 한인들이 고용되어 일하였다.
이같이 하여 사할린의 한인들은 점차 증가하였다. 북사할린의 한인들은 수는 1926년에 487명, 1929년경 900명이 되었고 그들은 주로 알렉산드로프스크구역(110 명), 龁브노프스크구역(330 명), 오하구역(440명)에 거주하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지방의 공산당은 한인들에 대하여 우려의 시선을 보내었다. 사할린 구역 공산당의 평가에 의하면 한인들은 친일적이라는 것이다. 1929년에는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오하에서 2-3월중 약 100명의 한인들을 강제로 추방하기도 하였다. 그 이유는 조차경계지 규정을 위반탖다는 이유였다. 소비에트당국이 한인들의 사할린 거주에 대하여 부정적인 평가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한인들의 수는 점차 증가하였다. 1931년의 통계에서는 한인들의 수는 1767명까지 달하였다. 1932년에는 그수는 3200명에까지 도달하였다. 이같이 한인들의 수가 증가하면서 북사할린에는 한인 촌소비에트가 두 군데 생겨나기도 하였다. 그중 하나는 나우모프스키(Naumovskii) 촌소비에트였다. 또한 한인들 어부들로 조직된 콜호즈 "붉은 사할린"도 235명으로 조직되었다.
1937년 한인들의 강제이주정책이 결정되었고 사할린의 한인들도 이 강제이주 대상에서 제외되지 못하였다. 강제이주 결정은 1937년 9월 27일 사할린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주의 트로이카는 신속하게 이 결정을 집행하였다. 그것은 이미 사할린의 정부와 당의 관료들이 가지고 있었던 생각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다음에 1937년 10월 14일 강제이주자대상이 확정되었다.
알렉산드로프스크-사할린스크 구역 106가구 299명
龁노프스크 구역 67가구 263명
서사할린스크 구역 31가족 191명
오하 구역 85 가구 390명
동사할린스크 및 키로프스크 구역 4가구 12명
북사할린 전체 1155명
한인들은 모스칼보항에서 스몰렌스크호를 타고 출항하였으며 나우모프카, 龁브노프스크구역의 우스페노프카, 알렉산들로프스크 구역의 폴로빈카, 쉬로코파드스키이 구역의 쉬로카야 파드와 나이나이를 거쳤다. 그리하여 한인들을 태운 배는 1937년 10월 18일 블라디보스톡에 도달하여 거기에서 카자흐스탄과 중앙아시아로 보내어졌다. 이리하여 사할린의 한인 역시 극동의 한인들과 마찬가지로 모두 강제이주 열차에 실리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사할린북부를 소련이 지배하고 있을 때에 일본은 사할린의 남부를 노일전쟁의 댓가로 획득하여 지배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사할린은 석탄산지로서 유망하였기 때문에 일본은 이 지역에 카라후도를 설치하고 개발을 시작하였다.
언제부터 이 남부사할린에 한인들이 살게되었는지는 아직은 불확실하다. 하지만 1905년 일본이 남부사할린을 차지하던 시점에 이미 11호 30명의 한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사할린에 거주하는 한인은 우선은 한반도에서 러시아 극동지역으로 이주하였다가 다시 사할린으로 이주하였던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사할린에는 1913년 부터 펄프와 제지공업이 들어오기 시작하였고 이에 따라 석탄도 개발되기 시작하였다. 남부사할린에 거주하는 한인들의 수가 증가하게 되는 것도 이같은 남부사할린의 개발을 뒤따르는 것이었다. 한인노동자를 일본기업이 고용하게 되는 것은 1917년 부터였다. 이해에 미쯔이광산 가와가미광업소는 한국에서 110명의 광부를 모집하였으며 1918-19년 사이에도 약 2백 수십명의 한인 광부를 모집하였다. 그 이래 남부사할린에서의 공업발달에 따라 연해주나 북사할린으로부터 이주하는 한인들의 수가 점차로 증가하게 되었다.
일본이 1920년 실시한 조사에 의하면 여기에는 이미 934명의 한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유즈노사할린스크 416명, 홀름스크 176명, 포로나이스크 153명, 코르사코프 92명, 토마리 97명). 1923년의 경우에는 소련이 외국인을 추방하는 정책을 사용하여서 오호츠크나 사마르카 등에서 수백명의 한인들이 이주하였으며 1925년에는 일본군이 1918년 이래 점령하고 있던 북사할린에서 완전히 철수하게 됨에 따라 일본군을 따라 730명의 한인들이 남사할린으로 이주하였으며 기타 연해주나 일본의 북해도에서 이주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1926년에는 이미 512호 4387명의 한인들이 남부사할린에 거주하게 되었다. 1934년 3월의 조사에서 한인들의 수는 5813명으로 늘어났다.
한인들의 수는 특히 1939년 이래로 급속히 늘어났다. 1939년부터 강제연행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다음의 표는 강제연행이 시작된 이래 사할린에 동원된 한인들의 수를 나타내는 통계이다.
표II-6.1939년 이후 강제연행된 사할린의 한인노무자
1939 1940 1941 1942 1943 1944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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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원계획수 8500 1200 6500 3300
석탄 2578 1311 800 3985 1835
금속 190
토건 533 1294 651 1960 976
공장및 기타
계 3301 2605 1451 5945 2811
자료: {在日本朝鮮人の槪況}(법무부특별심사국,1949;{전후보상문제자료집} 2집,1991)
그렇지만 이들을 포함하여 사할린에 거주하는 한인이 종전 직전에 얼마나 되었는가 하는 것은 아직 명백하지 않다. 한인들의 수를 많이 잡는 측은 대략 6만정도가 강제로 연행되었고 종전 직전에는 4만 7천명이 남았던 것으로 보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 숫자는 정확히 연구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쿠진은 그의 저서 {극동의 한인:삶과 운명적 비극}에서는 소련군 제 2 극동전선 사령부에서 한인들 수의 최대치를 5만으로 보았고 종전에는 2만 3천 500명이 있었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볼셰비키당 중앙위원회보고에서도 1945년 9월 29일의 보고에서 한인의 수를 23498인으로 보고하고 있다(남 15356인 여 8142인). 1946년 4-5월에 소련정부에 의한 조사에서도 한인의 수는 2만 3천으로 되어있다. 만일 한인들의 수가 종전에 4만 7천명 이었다면 이중에서 사할린 소개 정책에 의하여 약 3천의 노동자는 1944년 일본으로 종전 이전에 소개되었다. 이를 감안하더라도 약 2만의 한인들이 어찌되었는가? 이중 다수는 자유노동자였으니까 일본으로 다시 돌아갔을 가능성도 있다. 작지않은 수가 사망하였을 것으로도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을 감안하더라도 종전의 한인의 수가 4만 7천이라는 것은 설득력이 희박한 설이 아닌가 생각된다.
한인들의 수에 대하여는 미해결의 과제로 남겨두더라도 일제시대에 남사할린에 거주하여 살아온 한인들의 어려운 사람과 희생에 대하여는 언급할 필요가 있다. 일본은 남부사할린을 차지하고서는 이 지역에 석탄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음을 알고 개발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사할린의 기후조건은 그리 유리한 조건이 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안정적인 노동력을 확보하는 데에는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렇기에 일제도 사할린의 탄전을 본격적으로 개발하게 되는 것은 1928년의 일이었다. 그러나 사할린 자체에서 노동력을 확보하기 어려운 일본은 일본 본토나 혹은 한국에서 필요한 노동력을 확보하려 하였다. 그러나 워낙 기혹한 기후 그리고 일정한 기간 동안에 집중적인 노동력이 필요한 노동의 성격으로 인하여 이탈하는 노동자가 적지 않았고 이리하여 일본의 기업주들은 노동자들의 자유를 구속하는 감옥부옥 제도를 만들면서 작업을 시키기도 하였다.
여하튼 사할린에서의 노동조건이 아무리 어려웠다고 하더라도 생업을 위하여 한국에서 혹은 일본에서 노동자들이 건너와서 주로 탄광등에서 노동에 종사하였다. 그러다 1930년대 후반에 들어서서 일본이 대륙침략을 본격화하면서 노동력은 현저히 부족하게 되었다. 젊은 청장년들은 군대로 징집되었고 이들의 자리를 또 다시 다른 사람들이 메워야 하였다. 전선은 확대되고 노동력의 부족은 더욱 심각해졌다. 이리하여 일본은 1939년 부터는 한반도에서 부터도 강제로 노동자를 동원하기 시작하였다. 물론 강제적으로 동원하면서도 1939년 9월부터 1942년 2월 까지는 모집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1942년부터 1944년까지는 관주선이란 이름을 붙였고 1944년 9월부터 징용이라는 명칭을 붙이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사할린에서 노동하는 한인들의 수도 급속하게 증가하게 되었다. 1944년 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면서 미군의 잠수함이 일본해에까지 출현하게 되었다. 일본의 배는 일본해에서 조차도 안전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일본은 각의의 결정에 의하여 사할린의 탄광의 대부분을 폐쇄하고 광부들 중의 일부를 일본 본토의 탄광에 재동원하였다. 이 무렵에 약 3천 명 정도의 한인광부들도 가족을 사할린에 남겨놓은 채 일본의 탄광에 재배치되었던 것이다.
이 사할린에 1945년 8월 소련군이 진주하게 되었다. 섬에 고립되어 있고 일본으로부터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된 사할린의 군인과 경찰들은 말할 것도 없고 일본 민간인들 조차도 여지까지 한인들을 학대한 것에 대하여 혹시 한인들이 이제 자신들에 대하여 보복을 행하지 않을까 하는 의심을 가지게 되었다. 전쟁으로 인한 공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일인들은 한인들을 살해함으로써 이 공포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그들은 레오니도보(가미시스카)에서는 유치장에 있는 한인들을 한 사람씩 불러내어 살해하고는 석유로 불지르기도 하였고 포자르스코예 마을에서는 임신부를 포함하여 길을 지나가던 한인들을 무차별로 죽창으로 살해하기도 하였으며 ꞁ코프 탄광에서는 비록 미수에 그치기는 하였지만 한인들을 모아서 갱 속에 집어넣고 다이나마이트를 사용하여 폭사시키려 하였다. 소련군의 신속한 진군이 이 비극으로부터 한인들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소련군의 진주를 통하여서도 남사할린의 한인들은 진정한 해방을 얻지 못하였다. 소련군은 한인들의 자유로운 귀향을 가로 막았으며 한인들을 소비에트화 하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인사들을 반소비에트적이라고 감금하고 처형하였던 것이다. 이들 사할린의 한인들은 진정한 자유를 얻기까지 대륙의 한인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전체주의 체제의 붕괴를 기다려야만 하였다.
한편 1945년 이후에는 북한과 소련과의 관계가 긴밀하였던 때이다. 이 무렵에 소련은 사할린을 포함한 극동지방에서의 노동력 부족을 절간하여 북한의 노무자들을 받아들였다. 이 무렵 북한에서 극동으로 파견된 노동자는 1946년부터 1949년까지 모두 26065명이다. 이들은 '파견노무자'로 불리웠는데 이들중의 약 반 수 이상이 龁브노프스카와 네벨스카의 어장에 파견되었다. 이들의 작업조건은 극히 열악하였다. 이들은 대부분 북한에서 선금을 받은 상태여서 막상 사할린에서는 아무런 임금도 받지 못하고 단지 배급에만 의존할 따름이었다. 거주지와 위생조건도 형편이 없었다. 이들 노무자와 가족들을 위한 거주지는 1인당 1평 정도에 불과하였다. 이러한 조건에서 많은 사망자와 병자가 발생한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북한의 노동자가 사할린에 장기간 체류하기가 곤란했던 것은 국경지대에 외국인이 다수 거주하는 것을 꺼려한 소련의 정책때문이었다. 소련은 쿠릴열도와 남부사할린을 국경지대로 설정하여 이 지역에 한인들이 다수 거주하게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리하여 러시아공산당 사할린위원회에서는 이 지역들로부터 한인들을 북사할린으로 1952년까지는 이주시킬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여하튼 46-49년의 기간중 14395명이 다시 북한으로 돌아갔다. 약 1만 2천이 극동및 사할린에 남은 셈이다. 그후에도 소련은 북한 노무자를 귀국시키는 정책을 사용하였으며 1956년에도 1037명의 파견노무자가 북한으로 귀국하였다. 1957년 1월 1일의 조사에 의하면 사할린에는 30183명의 한인이 있는데 그중 북한국적자는 6891인이었다. 이들은 그후에도 1959년 5월과 6월 두차례에 모두 1497명이 귀국하였다. 1959-61년 사이에는 모두 5096명이 귀국하였다. 1962년 4월에도 마지막으로 500명 이상의 북한국적자들이 배를 통해 북한으로 귀국하였다.
사할린에 거주하는 한인들은 또한 특별한 어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현실적으로 사할린에 사는 한인들은 대부분 남한의 사람들이었고 이들은 대부분 국적을 가지고있지 않은 무국적자로 분류되어있었다. 그것은 소련과 대한민국이 국교가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남한출신자들은 고국으로 돌아가기를 기대하며 소련국적을 가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무국적자로 사할린에서 살아가는 데에는 많은 어려운 조건이 있었다. 무국적자는 거주지에 명백한 제한규정이 있었으며 한정된 좁은 구역을 임의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3개월에 1차례씩 경찰서에 가서 신원을 등록해야만 하였다. 행정적으로만 곤란을 당한 것이 아니라 교육을 받는데에도 어려움이 있었다. 무국적자들에게는 사할린사범대학같은 고등교육기관이나 테크니쿰같은 기술학교 공장학교등에서 교육받을 기회를 가질 수가 없었다. 다른 지역의 고등교육기관에 갈 수가 없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경제적으로도 여러가지 불리한 여건에 의하여 제약을 받고 있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무국적자인 남한출신의 한인들에게 농업이나 어업을 하는 것이 허용된 것은 1951년 10월에 가서 이루어졌다. 이때에 소련내각 결정에 의하여 농업이나 어업 아르뵉에 한인이 과반수를 넘지않는 조건하에 가입할 수 있도록 허용되었다. 그와 동시에 농업을 하는 한인들에게는 0.2 헥타아르의 주거지와 1헥타아르의 농지가 분할되었다. 그러나 어느 기관이던지 한인이 100명을 넘으면 한인의 정치, 문화, 교육을 담당할 담당자가 배치되었다.
40년대말에서 50년대 초에는 중앙아시아의 한인들이 사할린으로 오기 시작하였다. 이들중 자발적으로 온 사람도 소수 있었지만 주로는 사할린 한인들 사이에서의 공산당및 정부의 사업을 강화하기 위하여 파견된 사람들이었다. 1948년 6-8월 사이에 카자흐스탄공산당과 우즈벡공산당으로부터 107명의 한인이 사할린으로 파견되었다. 그리고 그후 약 7년간 2천명의 한인들이 인텔리및 전문가로서 각 사업부분을 담당하기 위하여 사할린으로 파견되었던 것이다. 이들 한인들과 사할린 한인들 사이에서는 중앙아시아 한인들의 고압적 태도때문에 갈등도 있었다는 증언들이 많이 있다.
1951년 8월 18일에 이루어진 한 통계에 의하면 사할린주에는 모두 42916명의 한인이 거주하는데 그중 남자가 22427인, 여자가 10777인, 그리고 16세 이하의 아이가 9712인이었다. 이들의 직업을 보면 어업에 5410인, 임업에 1650인, 탄광에 1579인, 제지업에 1096인, 농업에 170가족, 철도운송업 343인, 상업 441인, 수공업 341인, 무직 700으로 나타나있었다.
한편 이 무렵부터 한인들 중에서 소련국적을 취득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이미 일본인은 46-48년까지 송환이 완료된 상황에서 귀국의 희망이 사라져버리고 난뒤 생활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그리하여 1952년에 72명, 53년에 1207명, 54년에 719명, 55년에 299명, 56년에 444명, 57년에 467명이 소련국적을 취득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대다수의 한인들은 무국적으로 남더라도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희망하였다. 1958년에 이루어진 조사에서 한인들중 1008명은 소련국적을 취득하기를 원하였고 7346명은 북한국적을 취득하기를 원했는데 15909명은 무국적으로 남기를 원하였던 것이다. 소련국적의 취극은 1969년까지도 총 6414명에 불과하였다.
북한국적자들이 북한으로 귀국하면서 1970년의 통계에서는 사할린의 한인은 모두 35400명의 한인들이 거주하게 되었다. 그후 이 숫자는 큰 변동이 없어서 1988년 1월의 통계에서는 모두 3만 5천이 사할린에 거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중 소련적이 3만2천, 북한적이 456인, 무국적이 2621인 이었다. 대부분이 소련적을 취득하기는 했지만 끝내 무국적을 고집한 사람도 상당수에 이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한인들은 민족어를 배울 기회도 상실하는등 고통을 당하고 있다가 소련에서의 페레스트로이카가 시작되면서 새로운 민족적 재생의 길에 접어들게 되었다. 1988년에는 유즈노사할린스크 사범대에 한국어과가 생겼고 1989년 9월에는 처음으로 사할린 한인들이 대한민국으로 전세기를 타고와 가족상봉을 하게 되었다. 사할린 한인들의 오랜 실질적 감금생활이 비로서 풀리게 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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