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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1045. [역경의 열매] 심영기 (1-15) 중년 넘어 만난 하나님 “돈·명예보단 仁術을”
“선생님, 제 다리에 튀어나온 혈관을 없애주세요. 독일에서는 주사로도 쉽게 할 수 있다고 하던데요.”
1994년 어느 날이었다. 내 진료실로 찾아온 한 아주머니가 바지를 걷어 올려 종아리를 내보이고는 뜬금없는 말을 했다. 내가 봐도 툭 불거진 혈관이 보기에 흉했다. 하지만 미용성형을 주로 해온 나로선 시술해보지 않은 하지정맥류였다.
그날 이후 그 아주머니가 했던 말이 계속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러다 하나님의 기도 응답인가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나는 그때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매달리고 있던 중이었다. 하나님께서 각자 개성에 맞게 만들어주신 얼굴을 인위적으로 고치는 미용성형에 회의를 느껴 새로운 길을 열어달라고 기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평소 알고 지내던 독일의 지인에게 연락을 해서 주사로 정맥류를 치료하는 곳이 있는지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아니나 다를까, 금세 답신이 왔다. 쾰른의 에두아르두스 클랑켄하우스의 릴 교수가 그 방면의 최고 권위자인데, 자신이 그를 소개해줄 수 있다고 했다.
‘그래,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다.’ 나는 독일로 날아가 정맥류의 진단과 시술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초음파 유도 혈관경화요법의 최고 권위자인 프랑스의 샤덱 교수와 프레드릭 빈 교수를 소개받아 또 다른 선진 기술을 습득했다. 한국에서 독일과 프랑스를 오가며 1년 넘게 정맥류에 대해 공부를 하면서 나는 서서히 정맥류의 전문가로 변신했다.
이를 바탕으로 이듬해부터 나는 본격적으로 정맥류 환자들을 치료하기 시작해 2년 후에는 국내 최초로 정맥류 전문 클리닉을 열었다. 그때부터 정맥류 분야는 나에게 꿈의 영역이었다. 초음파 기기를 통해서 혈관의 모양, 판막의 손상 정도, 역류의 세기 등을 측정해 진단을 내리고 치료법을 선택하는 과정이 너무나 흥미진진했다. 그간 해오던 미용성형에서 느낄 수 없는 색다른 재미에 빠졌다. 그러자 주위에서는 돈이 되는 미용성형을 외면하고 혈관 치료에 매달리는 좀 이상한 의사라는 말들이 돌았다.
하지만 정맥류는 나에게 진정한 블루오션이었다. 나는 정맥류를 통해 돈과 명예를 얻었다. 정맥류에 관한 한 최고의 권위를 인정받으며 이를 바탕으로 서울 논현동에 연세에스병원을 설립해 운영하고 있다. 정맥류는 하나님이 내게 주신 귀한 선물이다. 작은 끈 하나도 놓치지 않으시고 연결해 고리를 엮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나는 무한한 감사를 드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나름대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전 세계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노력하고 있는 것도 그 일환이다. 그렇다면 나는 본래 하나님의 사람이었는가 하면 그건 아니다.
나는 중년에 접어들 때까지 기독교와 교회를 극도로 싫어했다. 그러던 중 뒤늦게 하나님을 만나 새롭게 태어났다. 신앙을 가진 뒤에도 한때는 기복을 겪으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기도 했다.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나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끔 ‘과연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에 대해서 깊이 묵상해본다. 그러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다양한 속성들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러다가 결국엔 ‘참 좋으신 하나님’이라는 생각으로 마무리된다. 하나님은 정맥류를 통해 미용성형외과 의사를 혈관성형외과 의사로 변신시켜 많은 축복과 함께 깨우침을 주셨다. 내가 좋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기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정오리=정수익 선임기자 sagu@kmib.co.kr
* [역경의 열매] 심영기 (1) 중년 넘어 만난 하나님 "돈·명예보단 仁術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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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영기 원장=경기도 안성 출신, 연세대 의과대 졸, 성형외과 전문의, 연세에스병원 및 중국 다롄과 베이징 병원 운영, 대한미용성형외과학회 및 대한정맥학회 고문, ‘사랑을실천하는사람들’ 고문, 아프리카 스와질랜드 의대 부속병원 설립추진위원장, 평촌 이레교회 안수집사
***[역경의 열매] 심영기 (2) 하나님의 구원작전 “믿음 깊은 아내와 결혼하라”
내 고향은 경기도 안성이다. 하지만 초등학교 1학년 때 서울로 전학해 성장하고 살았으니 거의 서울 사람이다. 어릴 때 나는 공부도 곧잘 하면서 가끔 엉뚱한 짓을 저지르곤 했다. 경동고등학교 1학년 1학기를 마칠 때 낙제 수준까지 갔다가 방학 동안 오기를 품고 공부해 단숨에 전교 1등까지 차지한 기억이 있다.
내가 부모님께 처음으로 한 효도는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한 일이 아닌가 싶다. 나는 일찌감치 목표를 정해놓고 입시 준비를 했던 터라 이것저것 눈치 볼 필요 없이 무난히 합격했다. 하지만 의예과와 본과를 마치고 졸업할 즈음 전문의 과를 선택하면서는 고민을 좀 했다. 그러다 예술과 의학이 접목된 성형외과가 내 적성에 맞을 것 같아 택했다.
대학을 마치고는 공채로 국립의료원 성형외과에 들어가 인턴 생활을 했다. 1명의 자리에 13명의 지원자가 몰려 어려울 것으로 생각했으나 운 좋게 합격했다. 대부분 의사들이 그렇겠지만 국립의료원에서 인턴을 거쳐 레지던트를 하면서 무척 힘들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각종 재건수술에 매달렸다. 특히 8시간 이상 걸리는 대수술을 많이 해야 했다. 본격적으로 꿈에 그리던 미용성형을 열심히 하겠다고 여겼던 건 순전한 오산이었다. 그때는 그게 불만이었는데 훗날 그게 소중한 자산이 됐으니 이 또한 하나님의 배려였다.
어쨌든 당시 과중한 업무에 쌓이는 건 스트레스였다. 밤늦게 수술을 마치면 스트레스를 푼답시고 병원 앞 선술집으로 달려가 술을 퍼마셨다. 그리곤 당직실로 들어와 자고 다음 날 수술 일정을 소화하는 생활을 반복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땐 자부심이 대단했다. 앞으로 다가올 찬란한 미래를 생각하며 항상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 다녔다.
그런 상황에서 전혀 생각지 않은 결혼을 하게 됐다. 친척의 소개로 만난 같은 대학교 1년 후배인 아내 최세희 권사를 만나 급속도로 가까워진 것이었다. 당시엔 무엇에 홀린 것처럼 진행됐다 싶었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교회를 다니기 시작한 아내는 나와 결혼할 때 이미 깊은 신앙의 경지를 이루고 있었다. 결혼 후 내가 일과 세상적인 재미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을 때 아내는 밤마다 나의 변화를 위해 무릎을 꿇었다. 그런 것도 모르고 나는 걸핏하면 “하나님은 무슨 얼어 죽을 하나님이야” “교회는 선량한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사기집단이야” 등의 악의에 찬 폭언까지 퍼부었다. 그래서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나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 작전이라고 확신한다.
국립의료원에서 5년 동안 수련 생활을 거친 1984년 나는 전문의 시험을 통과했다. 그리고서 4년 동안 군의관 생활을 했다. 전방에서 1년 정도 근무하면서 각 초소를 돌며 나름대로 열심히 봉사한 덕분에 지휘관과 병사들로부터 호평과 인기를 얻었다. 만약 그때 내가 예수를 믿었다면 의료봉사와 함께 복음도 전할 수 있었을 거라는 아쉬움을 갖고 있다.
전방 근무 뒤 서울로 전출돼 함께 근무했던 한 선배 군의관은 내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일반외과 전문의인 그는 독실한 크리스천으로서 온유하고 겸손한 성품과 절제된 생활로 주위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의 진료실에 ‘의사가 될 것인가, 선교사가 될 것인가’라고 큼지막하게 써 붙여 놓은 글귀는 훗날 내 인생관과 신앙관에 큰 영향을 미쳤다.
나는 가끔 율법의 틀에 갇혀 입술로만 경건을 말하고 모양으로만 거룩함을 보이는 기독교인이 아닌지 되돌아본다. 그리고 누가복음 18장 13절에 나오는 세리의 마음을 묵상한다. 감히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한 채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외친 그 마음 말이다.
***[역경의 열매] 심영기 (3) 아내의 전도, 그리고 미래를 예비하시는 하나님
군에서 제대한 1987년 나는 다시 국립의료원으로 들어갔다. 예전과 달리 이제는 후배들을 가르치고 그들을 전문의로 양성하는 입장이 된 나는 오히려 더 바빠졌다. 그런 가운데서 “술 마시고 놀 줄 모르는 의사는 일도 잘 못한다”는 말도 안 되는 구호를 외쳐가며 향락을 즐겼다.
그때 서울 신촌에서 소아과의원을 개원한 아내는 나의 이런 행태에 불평을 표하면서 교회에 나가자고 했다. 하지만 나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소신 있게’ 나갔다. 아내는 꾸준히 새벽기도를 나가면서 한 성경공부모임에도 참여했다. 아내가 나의 변화를 위해 열심히 기도하고 노력한다는 걸 알고 있는 나로선 가끔 양심에 찔릴 때도 있었다.
그런 만큼 나는 더 교활해져야 했다. 주일에 아내가 교회에 가자고 할까봐 토요일이면 일부러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집에서 널브러지거나 주일에 스케줄을 만들었다. 그리고 가족이 모두 교회에 간 뒤 텅 빈 집에서 여유를 즐기는 법까지도 터득했다.
물론 아내와 아이들의 압력에 못 이겨 두어 차례 교회에 나가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교회는 내 체질에 맞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실제로 교회에 가면 바늘방석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교회에 갔다 오는 날이면 괜히 투덜대다가 아내와 다투기 일쑤였다.
그런 중에 굳게 닫혀 있던 내 마음의 문을 조금이나마 움직일 수 있는 일이 생겼다. 아내가 운영하는 소아과의원 간호사들의 변화였다. 개원 초만 하더라도 늘 유행가를 틀어놓고 산만하게 근무하던 그들이 아내의 전도로 교회를 다니면서부터는 눈에 띄게 성실해지고 밝아진 것이다. 그러면서 나만 보면 “선생님도 예수님 믿어보세요. 너무 기쁘고 행복해요”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나는 속으로 참 희한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차에 나는 스웨덴 웁살라대학으로 연수를 떠나게 됐다. 어느 누구든 외국에 나가 생활하면서 집과 가족이 그립지 않겠는가. 한데 가끔씩 보내오는 아내의 편지에는 온통 교회와 관련한 내용들이었다. 아내의 성가대 활동에서부터 아이들의 교회학교 소식, 목사님과 성도들의 동정 등을 적어 보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나를 위해 열심히 기도하고 있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아내의 지극한 정성에 내 마음이 조금씩 움직이는 듯했다. ‘그래, 이제 웬만하면 가족들과 함께 교회를 나가고 신앙생활을 시작해야지.’
그런데 스웨덴에서 연수 스케줄을 소화하면서 이상한 일이 있었다. 현지 의사들이 성형외과에서는 취급하지 않는 하지정맥류 주사 치료법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땐 무심코 넘겼지만 하나님께서는 훗날 내게 정맥류를 다루게 하실 암시를 주신 것이었다. 참으로 절묘하신 하나님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대목이다.
나는 스웨덴에 이어 일본 도쿄의 기타사토 대학병원 연수까지 마친 뒤 1990년 귀국했다. 그런데 스웨덴에서 조금씩 움직이던 내 마음은 다시 본래대로 되돌아갔다. 한국에 돌아오면 가족과 함께 교회에 나가리라 했던 마음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이다. 아내가 교회에 나가기를 권하면 온갖 핑계를 대거나 때로는 ‘하나님은 없다’며 오히려 아내를 설득하려고 하기까지 했다.
지금 생각하면 나는 참으로 구제불능이었던 것 같다. 급기야 아내에 대한 반감으로 이상한 짓까지 했다. 서울시내 한 유명한 철학관에서 명리학 사주팔자 관상학 궁합 택일 등을 배우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하나님을 부정하고픈 악한 내 모습이었다. 한데 그 또한 하나님의 인도였을까. 그런 걸 배우면서 오히려 그 허구성을 깨달았으니 말이다. 무슨 날을 피해라, 어느 쪽은 좋지 않다는 식으로 매사를 운명론으로 규정짓는가 하면 막연히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조성하는 잘못된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면서 우리 집에서는 생각지도 않은 일이 일어났다.
***[역경의 열매] 심영기 (4) 도망다니다 딱 걸린 ‘김성일 부부성경공부’ 모임
“여보, 당신도 착실히 교회에 나가 빨리 집사 직분을 받으면 좋겠어요.”
“집사를 하면 누가 집을 사준대? 하나님이 집이라도 사준대?”
아내가 교회에 대한 말만 꺼내면 어떻게든 그에 대해 반박하고 부정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우리가 집을 사게 됐다. 아내 명의로 돼 있던 땅이 갑자기 수용되면서 논현동에 자그마한 집을 마련하게 된 것이다. 속으로 이상하다는 생각이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마치 하나님께서 ‘봐라 이 놈아! 네 말처럼 내가 진짜 집을 사주지?’ 하시는 것 같았다.
“이 책 한 번 읽어봐요. 너무 재미있어요.”
어느 날, 퇴근하고 집에 들어온 아내가 불쑥 책 한 권을 내밀었다. ‘땅끝으로 가다, 땅끝에서 오다’라는 제목의 소설이었다. 책을 받아 든 나는 안 하던 행동을 하는 아내의 속내가 궁금하고 의심스러웠다. 무슨 공작을 꾸미는 것 같았다. ‘그래, 공작이면 어떻고 아니면 어때. 책 읽는 건데 뭐…’
그날 저녁 심심풀이 삼아 펼쳐든 소설에 나는 빠져들었다. 박진감 넘치는 스토리와 멋진 문체에 매혹돼 중간에 책을 덮을 수 없어 밤을 새우다시피 했다.
“어제 당신이 준 책 밤에 다 읽었어. 오랜만에 소설을 읽어서인지 참 재미있더라고. 혹시 그 작가가 쓴 다른 책은 없을까?”
다음 날 아침 나는 아침 식사를 하면서 아내에게 책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자 아연 아내의 얼굴색이 활짝 펴지는 듯했다. 그러면서 이러쿵저러쿵 책 이야기를 늘어놨다. 역시 아내의 공작일지도 모른다는 심증이 확신으로 변하는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날 저녁 퇴근하면서 아내는 선물이라며 묵직한 쇼핑백을 내게 건넸다. 김성일 작가가 쓴 책들이었다. ‘제국과 천국’ ‘홍수 이후’ ‘성경과의 만남’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등 그의 소설과 간증집이었다.
역시 기대에 어긋나지 않았다. 그의 책은 하나같이 나를 재미와 감동의 세계로 이끌었다. 그때부터 나는 가끔 서점에 들르는 습관이 생겼다. 혹시 그 작가의 신간이 없나 해서였다. 그러던 차에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생겼다. 평소 알고 지내던 아내의 친구가 우리 집에 놀러 와서는 나와 아내에게 희한한 제안을 하는 것이었다.
“두 사람 같이 김성일 작가가 인도하는 부부성경공부모임에 나가시죠. 너무 재미있고 은혜스러워요.”
이게 무슨 말인가. 내가 한참 재미있게 읽고 있던 책을 쓴 사람이 이끄는 모임에 나가자는 게 아닌가. 처음엔 우연인가 하다가 이내 필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와 친구가 사전에 담합을 하고서 나를 그렇게 이끌었던 것이다. 그래도 구미가 당겼다. 내가 좋아하는 그 작가를 매주 만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랬다. 게다가 아내 친구의 남편이 모 방송국 PD라고 해서 더욱 좋았다. 성형외과 의사가 PD와 알고 지내면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라는 나의 얄팍한 계산이었다.
1992년 3월부터 우리 부부는 김성일 작가의 ‘헤브론 부부성경공부모임’에 나갔다. 장소도 마침 내가 근무하던 국립의료원 인근 단독주택이었다. 하지만 거긴 나와 어울리지 않는 곳이었다. 상당한 성경 지식과 신앙 관록을 가진 이들 속에서 아예 신앙이 없었던 나는 열등감에다 소외감 같은 감정만 안고 돌아왔다. 김 작가가 “어느 교회에 나가세요?” 하고 물을 땐 참으로 당황스러웠다. 그렇다고 한 번 나가보고 그만두기에는 좀 그랬다. PD라는 아내 친구의 남편도 못 만났기에 몇 번만이라도 나가보고 결정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러자 조금씩 적응이 되면서 모임에 나가는 토요일이 기다려졌다.
지금 생각하면 그 성경공부모임은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예비해두신 곳이었다.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해오면서 그때 배우고 깨우쳤던 것들이 큰 도움을 주고 있으니 말이다.
***[역경의 열매] 심영기 (5) 친구 좇아 교회 첫발, 인생 대반전 사건 될줄이야!
“영기야, 우리 집서 저녁이나 먹자. 한동안 못 만났더니 보고싶다야. 우리 집사람도 널 보고 싶어 하고….”
고등학교 때부터 절친했던 친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한동안 소원했던 터라 그러마고 했다. 그때 나는 만 10년 넘게 근무한 국립의료원을 나와 집에서 쉬고 있었다. 너도 나도 성형외과를 개원해 돈을 잘 번다고들 하는데, 나라고 못할 리 없을 것 같아 사직서를 낸 상태였다.
“영기야, 잘 왔다. 너에게 인사시켜 줄 사람들이 있다. 내가 다니는 교회 목사님과 교우들이야.”
엥? 이게 무슨 말이야? 처음엔 내가 잘못 들었나 싶었다. 평소 나 못지않게 술 담배와 놀기를 즐기고, 기독교를 싫어했던 그 친구의 말이 믿기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그 친구의 표정이 예전과 달라진 것 같았다. 밝고 온화한 가운데 한결 안정되고 여유로워진 듯했다. 그리고 그들과 스스럼없이 대화하는 그에게서 생기가 펄펄 넘쳤다. 실제로 그는 나에게 하나님을 만나 변화된 자신에 대해 설명을 해줬다. 나는 그 친구의 변화에 적지 않게 놀라면서 자연스럽게 그들과 이야기를 하게 됐다. 그들은 나의 정제되지 않은 말을 웃으면서 잘 받아주었다.
그들을 대하면서 최근 시작한 헤브론 부부성경공부모임에 나오는 사람들이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그러면서 이상하게 서로 유사한 점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온화하면서 넉넉한 모습, 밝으면서 활기찬 모습, 상대를 배려하면서도 진중한 모습 등 어떻게 표현할 순 없지만 뭔가 비슷한 것 같았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모습인가?’ 그리곤 잠깐 동안 내 자신을 돌아봤다. 겉으로는 겸손하고 선량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교만과 욕심이 가득한 나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술과 향락을 그만두는 게 두려워서 일부러 교회와 기독교 신앙에 대해 거부감을 보여온 모습도 보였다. 그리고 기억 속에 묻혀있던 추악했던 옛날의 일이 갑자기 떠올랐다. 술에 잔뜩 취한 상태에서 교회로 아내를 찾아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데려왔던 일이다. 참으로 부끄러웠다.
“야, 영기야, 이번 주일에 우리 교회에 한 번 와보지 않을래? 그냥 오랜만에 양쪽 부부가 만나 회포나 풀자.”
마치 정해진 계획표에 따라 진행되는 것 같았다. 내가 한 단계를 거치면 그 친구는 나를 다음 단계로 이동시키는 것처럼 했다. 거부할 상황이 아닌 것 같아 일단 그러마고 했다. 하지만 실제로 교회가 있다는 불광동까지 갈 생각은 없었다. 그날 집에 와서 아내에게 친구 집에서의 일을 무덤덤하게 설명했다. 그러자 아내는 보물찾기에서 대단한 걸 찾은 양 갑자기 얼굴에 화색을 띠고는 다음 주일에 꼭 그 교회에 가보자고 했다. 그 친구의 부인을 보고 싶다는 마음에도 없는 말까지 해가면서 꼭 가자고 채근하다시피 했다. 다음 주일 아침, 우리 부부는 불광동의 성서침례교회를 찾아갔다. 나는 마지못해 끌려가는 심정인데 아내는 소풍 가는 아이처럼 들떠 있는 것 같았다. 교회당에 들어서자 며칠 전 친구 집에서 만난 교우들이 반갑게 맞아주면서 가슴에 꽃을 꽂아줬다. 하지만 예배를 드리는 내내 이 생각, 저 생각 잡념에 빠져있다가 예배자들의 다양한 모습을 구경거리 삼아 즐기면서 시간을 보냈다. ‘역시 교회는 내 체질에 맞지 않아’ 하면서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기도 했다. 실제로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듯 어색한 기분을 어쩌지 못했다.
드디어 목사님의 축도와 함께 예배가 끝났다. 빨리 교회당 밖으로 나가야겠다는 일념으로 남보다 빨리 몸을 움직이는데, 친구가 내 팔을 붙들고 다른 곳으로 이끌었다. 오늘 새로 나온 이들에게 목사님이 직접 환영해주는 행사가 있다는 것이다. 뭐가 이리 복잡한가 싶어 짜증이 났다. 한데 그 의식이 내 인생의 대반전을 이루는 계기일 줄이야….
***[역경의 열매] 심영기 (6) 1992.8.30 변화의 날… 뜨거운 기운 시원한 바람이
1992년 8월 30일은 내 인생에서 영원히 잊을 수 없는 날이다. 나는 그날 마음 깊이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새롭게 태어났다. 친구의 인도로 찾아간 서울 불광동 성서침례교회에서 김우생 목사님의 영접기도를 받으면서 이전에 상상도 하지 못했던 색다른 세계를 체험했다.
그날 주일예배를 마친 뒤 교회의 구석방으로 안내될 때만 해도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내 기분을 아셨는지 목사님은 환한 얼굴로 대해주셨다. 그리고는 왜 예수를 믿어야 하는지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셨다. “진실로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는 요한복음 3장 3절에 대해 주로 말씀하시는 듯했다. 그리고는 기도를 시작하셨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목사님의 기도가 이어지면서 절절한 기도 소리는 사방 벽면을 울리다가 이내 내 가슴속으로 파고드는 듯했다. 특히 기도 중에 들어 있는 성경 구절이 내 심령에 콕콕 박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면서 가슴속에서 표현할 수 없는 뜨거운 기운이 솟아오르면서 내 온 몸이 달아올랐다. 날씨가 더워서 그러나 했더니 그게 아니었다. 뜨거운 기운은 내 몸 아래쪽에서 머리로 치고 올라왔다. 마치 사슬에 꽁꽁 묶였던 내 몸이 풀리는 것처럼 해방감이 느껴졌다. 시원한 바람이 머리에서부터 가슴을 쓸어내리는 듯했다. 너무 좋았다. 너무 행복했다. 기쁨과 행복에 겨워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옆에 있던 사람들이 축하한다면서 껴안아줬다. 나 혼자만 느끼고 간직하기에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나를 위해 온갖 어려움을 겪으며 기도해준 아내가 또렷하게 보였다. 너무 예쁘고 아름다웠다. 그러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와서도 그 기쁨과 행복감은 여전했다. 집안 가득 기쁨과 행복으로 차 있는 것 같았다. 밤늦게 들어와서 잠을 자고 아침 일찍 나가는 여관 기능밖에 못했던 집이 처음으로 포근하고 안락한 보금자리로 느껴졌다. 계속 싱글벙글하자 아내는 “당신 혹시 쇼하는 건 아니지?”라는 말까지 할 정도였다.
그날 이후로 나는 변했다. 변해도 너무 많이 변했다. 무엇보다 그토록 싫었던 교회 가는 게 좋아졌다. 괜히 주일이 기다려질 정도였다. 그 전엔 거들떠보지도 않던 책장의 신앙서적들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읽으면 읽을수록 흥미로웠다. 가방에는 항상 성경책을 넣어 다니는 습관도 생겼다. 그뿐이 아니었다. 성경책을 여러 권 사서 집에 쟁여놓기까지 했다. 예수님을 모르는 친구들을 초대해 성경책을 선물하면서 내 체험담을 전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내가 생각해도 신기할 정도로 나의 변화는 급진적이었다. 어떨 땐 내가 잘못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루가 다르게 신앙적으로 쑥쑥 성장하는 것 같았다. 목사님의 설교를 듣다가 혹은 성경이나 신앙서적을 읽다가 깨달은 점이 있으면 곧바로 메모를 했다.
그런데 더 신기한 게 있었다. 내 상황을 고려한 타이밍이 너무나 절묘했다는 것이다. 당시 나는 국립의료원을 그만두고 나와 개원 준비를 하면서 난생 처음으로 오랜 시간 여유를 갖고 있었다. 만약 내가 국립의료원에 근무하거나 개원을 했더라면 그렇게 급격하게 신앙적으로 깊어질 수 있었을까 의문이다. 그리고 또 있다. 당시의 내 심적 상태가 굉장히 허허로운 상태였다는 것이다. 좀 있다가 설명하겠지만, 개원 준비에 차질이 생겨 적지 않은 돈을 날린 상태였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나를 변화시키고 구원해주시기 위해서 오랜 시간을 세상과 떼어놓으신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 축복을 주시기 전에 작지 않은 좌절과 아픔을 겪게 하신 것이다. 참으로 절묘하신 하나님이 아닌가. 인간이 어찌 그 하나님의 깊은 뜻을 헤아릴 수 있겠는가. 하물며 나처럼 악했던 인간이….
***[역경의 열매] 심영기 (7) 사기 사건, 백수 1년… 이 모두 선한 계획이시라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4∼15)
나는 국립의료원을 나와 개원 준비를 하면서 이 성경 구절을 너무나 생생하게 실감했다. 큰 돈을 벌겠다는 욕심만으로 이것저것 살피지 않고 마구 밀어붙이다 큰 좌절을 맛보게 된 것이다.
개원만 하면 누구보다 잘 할 것 같은 자신감으로 넘쳤던 나는 일단 환자들을 가장 많이 확보할 수 있는 곳으로 명동을 꼽았다. 그리곤 브로커를 끼워 소위 목 좋은 자리 확보에 나섰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뒤 괜찮은 건물이 있다는 정보를 얻은 다음 우여곡절 끝에 임대계약을 맺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이런 저런 명목으로 적지 않은 돈이 브로커에게 전달됐다. 하지만 계약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고 시간만 계속 흘렀다. 그렇게 몇 개월 동안 애를 태우다 결국 많은 돈을 떼인 채 계약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지경이 됐다. 내가 사람들한테 당한 것이다.
그런데 내가 예수님을 영접한 게 바로 그때였다. 뜻밖의 사기 사건을 당하고서 실의와 좌절에 빠져 있을 때 예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받아들이고 변화된 것이다. 상황이 이러니, 그때 나로선 만감이 교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나는 그 일련의 과정을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이라고 해석했다. 내가 개원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돈이 무엇인지 그리고 욕심이 무엇인지를 일깨워주신 것이다. 앞으로 신앙생활을 제대로 이어가도록 하기 위해서 한 차례 담금질을 해주신 것이다. 그래서 나는 개인 의원을 할 때는 물론이고 연세에스병원을 운영하는 지금도 돈을 많이 벌기보다는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사업장을 지향하고 있다.
어쨌든 내가 변화된 뒤 여기저기서 나에 대한 말들이 들렸다. 대개 내가 크리스천이 됐다는 사실을 믿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심영기만큼은 예수 믿을 사람이 아닌데, 뭔가 이상하다는 내용이었다. 하기야 누구보다 술을 즐기고 놀기를 좋아하는 나였으니 충분히 나올 법한 구설수였다.
하지만 다른 건 대충 듣고 넘기겠는데, 어머니의 말씀에는 무척 신경이 쓰였다. 안 그래도 어머니는 의사 아들이 번듯한 직장을 팽개치고 1년 가까이 백수로 지내는 데 대해 불만을 가지고 계셨다. 그런데 그 아들이 빨리 일할 생각은 하지 않고 예수 믿는 데에 열심이라고 하니 많이 언짢아하셨다. 어머니는 나에게 “너 교회에 미치면 절대로 돈 못 번다”면서 교회 출입을 끊으라고 번번이 말씀하셨다.
하지만 나는 흔들리지 않았다. 누가 뭐라고 하든지 나는 마음속에 기준을 세워놓았다. 웬만한 유혹이나 위협에도 버틸 든든한 기준이었다. 물론 나도 누구 못지않게 돈과 명예를 원했다. 그러나 그때 이미 그런 것 때문에 신앙을 희생하거나 포기하면 안 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걸 위해서 신앙을 가지면 안 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다만 하나님께서 부와 명예를 축복으로 주시면 감사함으로 받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일을 하지 않고 10개월 넘게 지내니 주위의 눈치도 보일뿐더러 슬슬 몸도 근질거렸다. 게다가 졸지에 거금을 까먹고는 아무 벌이도 없이 지내는 가장으로서 아내와 아이들에게 미안했다. 나의 그런 심사를 아는 아내는 가끔 “당신은 세상에서 어떤 것보다 귀한 선물인 하나님을 만났잖아요”라며 위로했다. 그럴 때면 천군만마를 얻은 듯 힘이 솟았다. 아내가 너무 고맙고 귀하게 보였다는 건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다 마침내 때가 된 듯했다. 해를 넘겨 93년 봄바람이 살랑이자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주셨다. 마치 “영기야, 이제 일을 시작해야지” 하시면서 내 등을 떠미시는 듯했다.
***[역경의 열매] 심영기 (8) “병원, 압구정 아닌 한적한 청담동에 세우라”
1993년 5월, 나는 서울 청담동에 ‘심영기 성형외과’를 열었다. 애초 개원 준비를 시작하면서는 명동이나 압구정동을 생각했으나 하나님께서는 뜻밖에도 나를 청담동으로 인도하셨다. 지금과 달리 당시의 청담동은 한적한 곳이라 성형외과 입지로서는 별로였다.
하지만 청담동은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예비하신 곳임이 분명했다. 일반적으로 유동인구가 많아야 환자를 모으기 쉽다고 여기지만 그건 사람들의 관점일 뿐이었다. 통념을 깨고 그 의원은 번성했고 그걸 발판으로 나는 건물을 마련해 종합병원까지 세웠으니까 말이다. 이 정도면 정녕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 아니신가!
내가 청담동에 성형외과를 열게 된 과정을 알면 누구든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여기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그분께 간구하면 좋은 길을 열어주신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한 번은 성형외과 자리를 찾아보기 위해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압구정동 일대를 돌다가 청담동까지 가게 됐다. 근데 이상하게 그곳에 개원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돌아와서 아내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아내도 선뜻 동의하면서 “하나님의 뜻일지도 모른다”는 이상야릇한 말을 했다. 나도 그럴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후부터 성경공부모임에 참여하는 몇몇 사람과 함께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을 돌듯이 청담동 일대를 수시로 오갔다. 일주일쯤 그랬을까, 한 깨끗한 건물 2층의 임대광고가 눈에 띄었다. 이것저것 재지 않고 곧바로 계약을 했다. 개원 준비를 하면서 나는 하나님을 위한 공간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게 ‘헤브론 기도실’이다. 그러자 성경공부를 같이 하는 형제들이 너무 좋아했다. 그리고 진심으로 축하해주었다. 그들과 함께 기도실에서 찬양하고 기도하는 게 마냥 즐겁고 행복했다.
이와 함께 성형외과 문을 열면서 하나님의 뜻이라는 생각을 뒷받침하기 위해 또 하나 시도한 게 있다. 교회나 기도원 전화번호를 0191(영혼구원)이나 0691(영육구원) 9182(구원빨리) 등으로 하듯이 뭔가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담은 번호를 쓰고자 한 것이다. 마침 한국통신에 근무하는 후배가 있어 부탁을 해봤다. 그러자 그 후배는 515-1191을 추천하면서 ‘오 일어나 일일이 구원하자’는 뜻이라고 했다. 그때부터 쓰기 시작한 이 번호를 지금도 그대로 쓰고 있다.
청담동의 ‘심영기 성형외과’는 환자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하지만 애초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개원 후 처음에는 일반인들의 상식대로 환자들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나는 조금도 걱정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성경과 신앙서적을 읽고 사람들과 영적인 교제를 나눌 시간적 여유가 많아 더 좋았다.
심영기 성형외과에 본격적으로 환자가 몰려들기 시작한 데에는 특별한 계기가 있다. 목사들 가운데서도 몸에 새긴 문신 때문에 고민하는 이들이 있다는 말을 누군가로부터 듣고 이들을 돕기 시작하면서다. 어두웠던 과거를 청산하고 주님의 종으로 거듭난 이들을 돕는데 내 의술을 쓰는 것만큼 보람된 일이 없겠다 싶어서 30% 정도의 비용으로 레이저 시술을 시작한 것이다. 그때 그 내용이 국민일보에 보도되자 환자들이 급격하게 늘었다. 당시 레이저 시술은 매우 고가여서 아무나 엄두를 낼 수 없었다.
환자들이 크게 늘자 이 또한 하나님의 은혜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환자가 없어도 조금도 괘념치 않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도하니 하나님이 예쁘게 보신 것인가 싶었던 것이다. 거기다 심영기 성형외과를 위해 주위에서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고 있었으니 그들의 기도 응답일 수도 있었다. 어쨌든 그때의 나에겐 환자가 적어도 하나님의 은혜였고, 많아도 하나님의 은혜였다. 그런 차에 신앙생활을 체계적으로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역경의 열매] 심영기 (9) “선생님, 성형수술 했는데 남들이 몰라줘요!”
“여보, 우리 개척교회를 섬기면서 좀더 체계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면 어떨까요?”
‘심영기 성형외과’를 개원해 자리를 잡아갈 즈음 아내가 예상치 못한 제안을 했다. 헤브론 성경공부모임에 참여하면서 나름대로 착실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던 내게는 다소 엉뚱하게 들렸다. 하지만 뒤이은 아내의 설명을 듣고서야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우리 부부는 서울 서초동의 이레교회를 출석하기 시작했다. 한홍식 목사님을 중심으로 20여 명이 모여 함께 예배하고 교제하는 가족 같은 분위기의 교회였다. 아내는 이미 오래 전부터 전정희 사모님이 인도하는 성경공부모임의 일원이었다. 나는 교회에 나간다는 사실이 그렇게도 가슴 벅찬 줄 처음 알았다. 크리스천이라는 사실이 그토록 기쁘고 행복한 줄 처음 알았다.
나는 주일이면 온종일 교회에서 찬양과 예배에 빠져 지냈다. 지겹기는커녕 하루가 왜 그리 빨리 지나가는지 아쉬울 지경이었다. 재미있다는 경지를 넘어 황홀했다. 비로소 내 신앙에 불이 붙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그때가 내 생애 가장 행복한 시간이 아닌가 여겨진다.
여기서 내가 섬기는 교회를 자랑하는 게 좀 쑥스럽지만, 한 마디로 끝내준다. 1998년 경기도 안양으로 이전해 평촌이레교회가 된 우리 교회는 항상 진지한 영성과 밝은 분위기를 유지한다. 교회 이름처럼 하나님이 예비하신 곳이라는 느낌을 준다.
어쨌든 교회에 처음 등록한 뒤 나는 기쁨과 행복감에 한껏 젖어들었다. 그러자 병원에서 환자를 진료하고 수술하는 일도 마냥 신나고 즐거웠다. 최대한 환자의 입장에 서려고 노력하면서 정성을 다해 환자들을 대했다. 그러면서 역설적이게도 환자에게 수술을 절제하도록 하기 위해 노력했다. 미용성형의 경우 정신적인 문제까지 결부되는 일이 많아 의학적으로 가능한 성형과 불가능한 성형을 구분해서 설명해주기 위해 애썼다.
실제로 진료실에서 환자들을 만나보면 의외로 정신적인 문제를 가진 이들이 많다. 미용성형 환자의 30% 정도는 심리적인 문제로 불필요한 성형을 하는 것 같다. 대표적인 게 성형중독증 환자들이다. 이들은 성형을 아무리 해도 만족하지 못하고 계속 하고 싶어 한다. 이들에겐 외적인 성형보다 내적인 성형이 더 필요하다. 나는 이런 환자를 만나면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알리면서 가까운 교회로 나가 신앙생활을 해보도록 권유한다.
그럭저럭 심영기 성형외과를 2년여 동안 운영하면서 나는 미용성형에 관한 노하우를 차곡차곡 쌓아갔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과연 내가 이 일을 계속 해야 하나’ 하는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
나는 미용성형의 초점을 자연스러움에 맞추었다. 그런데 가끔 찾아오는 특이한 환자들은 나의 이 회의감을 더욱 부추겼다. “수술을 했는데 다른 사람들이 몰라주네요. 좀 표나게 해줄 수 없나요”하는 이들을 대하면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이다.
그러던 중 조금씩 불붙기 시작한 회의감에 기름을 끼얹는 일이 생겼다. 20대 초반의 한 여성이 진료실로 찾아와선 어떤 가수의 이름을 대면서 자기 얼굴도 그처럼 만들어달라는 것이었다. 내가 그 가수가 누군지 모른다고 하자 대뜸 “그 유명 가수도 모르면서 어떻게 성형외과 의사를 하세요”하며 면박을 주는 것이 아닌가. 나 자신이 비참하고, 성형외과 의사라는 직업이 싫었다. 자식보다 어린 환자를 대상으로 미용성형을 해야 하는 일이 부끄러웠다.
그때부터 나는 기도를 할 때마다 나의 이 심정을 주님께 고백했다. 그리고 하나님께 다른 길을 열어달라고 간구했다. 역시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었다. 한 번은 기도를 하는데 성경 구절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게 아닌가.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
***[역경의 열매] 심영기 (10) 하나님께서 인도해주신 ‘정맥류 치료 전문의’
혈관을 전문적으로 다루지 않는 성형외과 의사가 하지정맥류 치료를 한다는 건 상식적으로 맞지 않다. 하지만 나는 그처럼 상식에 맞지 않는 길을 17년째 계속 가고 있다. 그것도 보무당당히 힘차게 가고 있다. 하나님께서 열어주시고 인도해주시는 길이기에 기쁨과 행복으로 가고 있다.
연재를 시작하면서 밝혔듯이 나는 내 진료실을 찾아와 다리에 튀어나온 혈관을 주사로 없애달라는 한 아주머니로 인해 정맥류를 공부하고 다루기 시작했다. 미용성형에 회의감을 품고 다른 길을 열어달라는 나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신 일련의 과정이었던 것이다.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한국에서는 정맥류를 별로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특별한 증상이나 통증이 없기 때문에 궤양이 생기거나 아주 보기 흉하게 혈관이 튀어나와야 전신마취를 하고 수술을 했다. 수술을 해도 재발률이 높을뿐더러 흉터가 크게 남았다. 따라서 정맥류 환자를 상대로 미용적인 치료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런 점에서 성형외과 전문의인 내가 정맥류와 인연을 맺은 것은 어쩌면 멋진 조합이라고 할 수 있다.
정맥류는 판막의 고장으로 피가 아래로 쏠려 다리 정맥이 튀어나오는 질병이다. 오래 되면 다리가 썩기도 하고, 피의 순환이 원활하지 않아 여러 합병증을 유발하기도 한다. 하지만 성형외과 의사인 나는 미용의 관점에서 접근했다. 다리의 보기흉한 혈관 때문에 평생 짧은 치마를 입지 못하는 여인, 가족들 앞에서조차 다리 내놓기를 꺼리는 사람들에게 본래의 깨끗한 다리를 돌려줘야겠다는 것이었다.
결국 나의 정맥류 치료에 대한 관심은 비수술 치료법에서 시작됐다. 그때 알게 된 게 독일과 프랑스 등에서 행해지던 혈관경화요법이었다. 내가 처음 독일로 날아가 지켜본 에두아르두스 클랑켄하우스의 릴 교수 팀의 시술 장면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주사로 튀어나온 혈관을 마술처럼 없애주는 장면을 보고 숨이 턱 막히는 듯했다. 입원해서 전신마취로 수술을 진행하는 국내의 시술과 비교할 때 그야말로 경이로웠다.
내가 당장 그 시술법을 배우고자 달려들자 릴 교수는 처음엔 ‘노 생큐’였다. 하지만 나는 물러서지 않고 계속 매달렸다. 결국 릴 교수는 조금씩 자신의 노하우를 전수해줬다. 혈관경화요법에서부터 정맥류 진단법, 혈관검사법, 일반 수술법 등을 차례로 배우면서 나는 마치 신대륙을 찾아나가는 기분이었다. 너무나 열정적으로 배움에 임하자 릴 교수도 자신의 비법을 있는 대로 다 보여줬다. 일주일에 사흘은 한국에서 진료하고 사흘은 독일에서 공부하는 강행군을 계속하면서도 조금도 힘들거나 피곤하지 않았다.
“하나님, 저를 이렇게 인도하시는군요. 저의 유치하고 저급한 기도에도 이렇게 응답해주시는군요. 하나님, 제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고 높여드리도록 이렇게 이끄시는군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솔직히 처음엔 긴가민가했다. 하지만 서서히 정맥류 전문가로 돼가면서 나는 하나님의 손길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틈만 나면 내 속에선 이런 기도가 나왔다. 심지어 잠을 자다가 잠깐 깨어도 그랬다.
미용성형과 정맥류 치료를 병행하다 1995년이 저물 무렵 비로소 나는 변신을 시도했다. 정맥류 전문 의사로서의 자신감을 갖고 국내 처음으로 정맥류 전문 개인의원으로 탈바꿈했다. 특수 혈류진단 설비인 도플러, PPG, 듀플렉스 흑백 초음파, 미국 어큐손 컬러 초음파 등을 구비했다. 독일의 큰 병원 설비에 조금도 뒤지지 않았다. 정확한 진단이 선행돼야 치료 후 재발률이 낮다는 것을 독일에서 배웠기에 조금도 아끼지 않고 투자했다. 하나님께서 열어주시는 길을 가는데 조금의 허점이나 차질이라도 있으면 안 된다는 생각도 했다.
***[역경의 열매] 심영기 (11) 1000일 작정기도의 응답 “이젠 중국으로 가라”
내가 정맥류 전문 진료를 선언하고 본격적으로 정맥류 환자들을 받기 시작하자 주위에선 우려의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수익성을 고려할 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물론 상식적으로 그들의 생각이 맞다. 하지만 나로선 따로 생각이 있었다. 미용성형 계통에선 나 말고도 내로라하는 의사들이 즐비하지만 정맥류 치료만큼은 내가 국내 최고 수준이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이 열어주신 길이라는 생각이었다.
역시 내 생각이 옳았다. 첨단 설비를 도입해 시작한 나의 정맥류 진료는 대단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무엇보다 정확한 진단과 최선의 시술법을 선택해 치료하기 때문에 재발이 거의 없었다. 거기다 20여 년간 해온 미용성형의 경험을 바탕으로 시술하기 때문에 흉터가 거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입원할 필요 없이 당일 상담과 치료를 끝낼 수 있고, 부분 마취로 통증 없이 치료할 수도 있었다. 그러자 국내 유수의 방송과 신문에서 나의 정맥류 치료법에 관한 기사를 쏟아냈다.
수익성에서도 괜찮았다. 미용성형을 할 때보다 조금도 덜하지 않았다. 전국에서 환자들이 몰려들어 아침부터 밤늦도록 진료를 했다. 몸은 힘들었지만 마음에는 늘 감사와 기쁨이 충만했다.
정맥류 진료를 하면서 나는 유럽의 선진 시술법에다 한국인에게 적합한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실제로 그 노력의 성과가 몇 년 뒤 나타났다. 1999년 9월 독일 브레멘에서 열린 세계정맥학회에서 내가 800여명의 석학들 앞에서 한국적 정맥학에 대해 발표하고 토론회의 좌장으로 뽑힌 것이다. 한국인 환자 1200명을 시술한 결과를 바탕으로 내놓은 나의 새로운 치료법에 그들은 찬사를 보냈다. 그리고 혈관 전공이 아닌 성형외과 의사로서 정맥류 치료의 최고 경지에 도달했다는 점을 높이 샀다. 세계적인 의사와 학자들 사이에서 인정을 받는다 싶으니 나 스스로도 너무나 영광스러웠다.
평소에도 늘 하나님께 감사했지만 그때는 참으로 가슴 저리게 감사했다. 나는 호텔에서 매일 밤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하나님, 참으로 감사합니다. 한없이 부족한 저를 이렇게 높여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영원히 잊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겠습니다.”
이듬해에는 중국 다롄에 분원을 세웠다. ‘심영기식 정맥류 치료법’의 중국 진출이 이뤄진 것이다. 그 후 베이징에까지 진출했다. 지금까지 나는 한국과 중국에서 3만5000명 이상의 환자에게 시술, 동양권에서는 단연 최다시술 기록을 갖고 있다. 그리고 내 경험을 토대로 개발한 수술 기구들이 특허청에 등록돼 있기도 하다.
중국 진출의 단초는 96년 가을에 마련됐다. 내가 교회에서 1000일 작정기도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다. 기도하는 중에 갑자기 혀가 꼬부라지면서 이상한 방언이 터졌다. 기도를 끝내고 나서 무슨 뜻인지 몰라 평소 기도를 많이 하시는 권사님께 물었다. 그러자 권사님은 “아마 중국에 사명이 있나 보죠?”라는 짤막한 말로 답을 대신했다.
그러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한데 그날의 일이 계속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그러면서 중국으로 진출해보라는 하나님의 뜻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해가 바뀐 97년 직원 한 명을 시켜 중국 어디에서 병원을 하는 게 좋을지 알아보도록 했다. 그렇게 해서 찾은 게 다롄이었다. 관광산업과 유흥업이 발달된 도시라 상대적으로 성공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었다. ‘됐다. 다롄에 병원을 설립해 중국 진출 가능성을 모색해보자.’ 중국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게 없는 상태에서 나는 중국 진출 결심을 굳혔다. 그리곤 실무적인 준비에 들어가면서 아내와 함께 집중적으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역경의 열매] 심영기 (12) 中서 정맥류 진료 선풍적 인기 “주님 감사합니다”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수 1:3).
우리 부부는 중국에 병원을 세울 계획을 세우고 난 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주신 말씀을 붙들고 기도에 매달렸다. 하지만 주위의 반대가 만만찮았다. 특히 중국에서 살다가 온 사람들의 반대가 더 심했다. 중국에서 병원을 세우기도 어려울뿐더러 세우더라도 성공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라는 것이다.
그래도 일단 시도는 해보기로 했다. 역시 시작 단계부터 쉽지 않았다. 다롄시 위생국의 비준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독립병원 설립은 난망했다. 한 가지 방법은 현지 병원의 영업허가서(한국의 의원 개설허가서)를 빌려 쓰는 방법이 있었다. 병원 안에 하나의 과를 만들어서 독립채산제로 운영하는 식이었다.
나는 다롄의 육군병원 안에 분원을 만들기로 하고 계약했다. 한데 ‘만만디’라는 말은 들었지만 그렇게 늑장을 부릴 줄은 몰랐다. 2년이 지나도록 군부에서 허가를 내주지 않다가 결국 없었던 일로 해버렸다. 당시엔 마음이 상했지만 후에 생각하니 그 또한 하나님의 배려였다. 중국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범할 실수를 하나님께서 사전에 막아주신 것이다. 그때 맺은 계약조건으로는 투자금을 고스란히 날리기 십상이었다는 걸 한참 뒤에 알았다.
그때부터 나는 중국 공부에 들어갔다. 먼저 중국어학원을 다니면서 중국어와 중국 문화를 익혔다. 그리고 중국에서 사업할 때 챙기고 주의할 점을 다각도로 배웠다. 알면 알수록 중국에서 성공하기가 어렵다는 걸 깨달았다. 애초 계약이 무산된 것이 너무나 다행스러웠다. ‘하나님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나름대로 준비를 했다 싶어서 다시 중국행을 노크했다. 그리하여 2000년 10월 다롄의 해군병원 안에 분원을 열었다. 아마 한국인 의사로는 처음으로 중국에서 진료할 수 있는 허가서를 받았을 것이다. 미용성형, 레이저, 여성 치질, 정맥류 등 4가지를 중점 진료과목으로 정해 진료를 시작했다.
역시 만만치 않았다. 6개월이 지난 후 수지타산을 맞춰본 결과 정맥류만 빼고 모두 적자였다. 정맥류 외에는 중국 병원과 별로 차별화되지 않으면서 치료비가 비싼 등 여러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정맥류만큼은 거기서도 블루오션이었다. 현지의 ‘다롄TV’에서 나의 정맥류 치료법을 특집방송으로 내보냈다.
하나님께서 손수 주신 새 술인 정맥류를 새 부대인 중국에 담으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대를 걸었던 미용성형은 지지부진한 대신 정맥류가 선풍적인 인기를 얻는 걸 보면서 나에게서 정맥류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걸 다시금 확인했다.
그렇게 3년 정도 중국 진료를 했을 즈음, 국가시책으로 해군병원을 폐쇄한다는 발표가 나왔다. 중국 진출도 이걸로 끝인가 했는데 뜻밖에도 다롄 시내에 건물을 구해 독립법인으로 병원을 운영할 수 있는 길이 나왔다. 참으로 나를 향한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뼛속까지 느꼈다.
한국의 신고제와 달리 중국에선 병원을 허가제로 하고 있어 중국인 의사들도 개원하기가 무척 어렵다. 병원을 열려면 공무원들의 드센 입김을 비롯한 숱한 장애물을 넘어야 한다. 그런데도 나는 2006년 5월 중국 수도 베이징에 정맥류 전문 병원을 또 하나 열었다. 베이징의 경우 높은 부동산 비용에다 유명한 병원이 많아 운영하기가 정말로 어렵다. 하지만 다롄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베이징에서도 동일하게 역사하셔서 그런대로 잘 운영되고 있다.
나는 중국에 두 개의 병원을 세우고 운영하는 과정을 생각하면 누가복음 5장 4∼6절이 떠오른다. 밤새도록 수고하고도 물고기 한 마리 못 잡았던 시몬이 말씀에 의지해 그물을 내린 결과 그물이 찢어지도록 잡은 내용이다. 정말로 주님을 의지하고 그분의 뜻에 따르면 불가능이 없다는 진리를 새삼 확인한다.
***[역경의 열매] 심영기 (13) “예수 사랑 바탕으로 한 종합병원을 세우라”
사람들은 가끔 하나님의 뜻에 대해 오해를 하는 듯하다. 자기에게 도움이 되거나 자기 마음에 들면 하나님의 뜻이라 여기고, 그 반대이면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신다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꾸준히 나 스스로를 점검하려고 노력한다. 혹시 내 생각이나 감정에 치우쳐 하나님의 뜻을 곡해하지 않나 하고 말이다.
나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비전에 확신을 갖고 있다. 한국에 종합병원을 세우고 중국에 많은 프랜차이즈 병원을 설립하라는 것이다. 나는 살면서 새롭고 크고 놀라운 일들을 많이 예비해놓고 계신 하나님을 끊임없이 확인한다.
2005년쯤부터 나는 종합병원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내 욕심으로, 다시 말해 돈과 명예를 좇는 게 아닌가 싶어 계속 기도했다. 그러다 안되겠다 싶어서 주위에 내 생각을 전했다.
역시 예상대로였다. 주위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 대부분 무엇 때문에 또 일을 벌이느냐는 것이었다. 정맥류 전문의원으로 완전히 자리잡아 누구보다 안정된 길을 갈 수 있는데 왜 굳이 힘든 길을 자청하느냐는 것이었다. 사실 종합병원을 한다는 건 큰 모험임을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알았다.
하지만 내가 병원을 하려는 데에는 나름의 속내가 있는데, 아무도 그걸 몰라줬다. 사회봉사와 의료 선교를 지향하면서 궁극적으로 의료선교사를 배출하는 병원을 만들고 싶은 마음이었다. 실제로 나는 병원을 설립한 이래 지금까지 일관되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바탕으로 한 병원’을 비전으로 내걸었다. 그리고 나름대로 사회봉사와 선교를 위해 꾸준히 일정한 역할을 하고 있다.
좌우간 나는 나름의 주관을 가졌기에 주위의 반대에 별로 개의치 않았다. 일단 가족과 친하게 지내는 교우들에게 내 생각을 솔직하게 전하고 기도해주기를 당부했다. 대부분은 기꺼이 찬동하면서 도움과 함께 중보기도를 하겠다고 했다.
그렇게 1년여를 보내던 중, 한 교우가 서울 논현동 영동시장 입구에 적당한 건물이 매물로 나왔다는 소식을 전해줬다. 득달같이 달려가 살펴보니 입지가 괜찮고 건물 규모와 구조도 그런대로 쓸만했다. 급매물로 나온 터라 건물 가격도 시세보다 크게 낮았다. 주위에 기도를 부탁하고 나와 아내는 또 다시 집중기도를 시작했다. 나도 그랬지만 아내와 몇몇 가까운 사람들도 느낌이 좋다고 했다.
매매계약을 체결하고 본격적으로 병원 설립 준비를 시작했다. 의외로 준비 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됐다. 마침내 2008년 1월, 60병상의 입원실을 갖춘 ‘연세SK병원’을 세웠다. 내가 맡을 성형외과를 비롯해 내과, 정형외과, 신경외과, 흉부외과, 마취과 등 6개 과를 갖춘 병원은 어디 내놔도 손색없을 정도였다.
병원을 연 나는 무엇보다도 병원 안에 찬양과 기도소리가 울려야 한다고 생각해 직접 신우회 결성을 주도했다. 그리고 병원 곳곳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병원임을 알리는 표시를 내도록 했다. 아울러 목사님과 교우들에게 중보기도를 부탁했다.
하지만 그때부터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건 시련과 고난이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병원 운영이 시작부터 녹록치 않았다. 개인 의원을 운영할 때와는 판이하게 복잡한 문제들이 끊임없이 내 머리를 짓눌렀다.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다는 말이 실감됐다. 무엇보다도 적자가 계속 누적되면서 이러다간 금세 병원 문을 닫아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까지 생겼다. 내가 직접 맡은 정맥류 클리닉은 계속 호황이었지만 다른 과에선 좀처럼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여보, 기도 외엔 방법이 없어요. 죽을 각오로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기도합시다.” 아내의 조언과 격려가 그나마 힘이 됐다. 우리 부부는 일하는 시간을 빼고는 기도에 매달렸다
***[역경의 열매] 심영기 (14) ‘주님의 선물’ 종합병원은 해외의료선교 전진기지
“심영기 원장님이죠. 우리 TV에 건강과 의료를 다루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원장님이 좀 출연해주시면 안 될까요? 하지정맥류에 관해서는 국내에서 가장 전문가라고 알려져 있던데요.”
한 방송국 PD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뜻밖의 출연 요청에 처음엔 당황하다가 이내 하나님의 도우심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도 방송에 출연한 적이 있긴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제법 긴 시간에 걸쳐 한 가지 질병에 대해 심층적·전반적으로 다루는 프로그램이었다.
역시 반응이 나타났다. 나의 정맥류 치료에 관해서는 좀 알려져 있긴 했지만 방송이 나간 후 정맥류 환자가 급격히 늘었다. 다른 과에도 영향을 미쳐 병원 전체의 수익이 향상됐다. 적자를 완전히 면하진 못했지만 연세SK병원의 지명도가 크게 높아진 것만으로도 큰 선물이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그 일이 내게 준 큰 선물은 다른 데에 있었다. 방송 출연을 계기로 내가 살아온 과정을 돌이켜보면서 절대자의 섭리를 사람의 얕은 마음으로는 헤아릴 수 없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이전까지 불안하고 초조하던 마음이 한결 안정되고 넉넉해졌다.
나는 그동안 너무 잘 나갔다. 어릴 때부터 별 어려움 없이 자랐고 각종 시험이나 일에서 실패해본 적이 없었다. 신앙을 갖기 전에는 내가 잘 나서 그런 줄 알고 항상 큰소리를 치고 다녔다. 신앙을 가진 후에도 언제나 하나님은 내 편이기에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만 해주실 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종합병원을 시작한 뒤 나는 전에 겪어보지 못한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 나는 난생 처음 겪는 그 어려움에 많이 힘들어했다. 쌓여가는 스트레스에 성격은 예민해지고 거칠어졌다. 그리고 내가 뭘 잘못했는가를 찾기 위해 그리고 병원에서 근무하는 의사와 간호사, 행정직원들의 문제를 찾기 위해 골몰했다. 가끔 그들에게 채근도 하고 잦은 인사 조치도 했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인가 내 짐을 하나님께 내려놓기로 했다. 간간이 읽는 신앙서적과 아내의 조언 등이 그렇게 이끌었다.
그런 점에서 방송 출연 또한 하나님의 배려였다. 나의 고뇌와 번민을 하나님께 맡겨버리고 그분께 의지하면 그분은 적당한 때에 적당하게 조치한다는 걸 알려주신 것이다. 내가 하려고 발버둥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는 걸 알려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필요할 때 고난과 시련도 주신다는 걸 알려주신 것이다.
어쨌든 연세SK병원은 다소의 어려움 가운데서도 안팎으로 꾸준히 성장했다. 기존의 진료과목에 소아과, 영상의학과, 통증클리닉, 종합검진센터를 추가하고 림프부종클리닉과 다리부종클리닉을 개설한 데 이어 바로 옆 건물 일부를 임대해 피부클리닉과 에스테틱을 개설했다. 서울대병원, 강남성모병원, 순천향대병원, 연세대 강남세브란스병원과 협력체계를 만들었고 다양한 봉사활동으로 상도 제법 받았다.
지난해에는 병원 이름을 ‘연세에스병원’으로 바꾸고서 새롭게 출발하는 기회로 삼게 됐다. 물론 아직도 병원 경영에 다소의 어려움이 있지만 100여명의 직원들이 한 마음으로 노력하고 있다. 정형외과 신경외과 등에서 한층 신뢰도를 높여가고 있으며 검진센터도 자리를 잡았다. 최근 들어선 외국 환자들이 많이 찾아 병원 경영에 청신호를 켜는 듯하다.
의사인 내가 항상 경영의 사각지대로 여겼던 원무 행정에서도 좋은 일이 생겼다. 나와 아내가 오랫동안 신앙심 깊은 책임자를 보내달라고 기도해왔는데, 최근 하나님께서 권용택 장로님을 보내주셨다. 이 계통에서 오래 일하신 권 장로님은 몽골 선교에 특별한 비전을 가지신 분이라 나로선 더욱 고맙고 반갑다.
사실 나는 그 이전부터 해외 선교와 의료봉사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특히 검은 대륙 아프리카에 대한 관심을 갖고 수차례 다녀오기도 했다.
***[역경의 열매] 심영기 (15·끝) 넓고 할일 많은 지구촌… 내 소명은 땅끝 의료선교
“심 원장, 아프리카 선교에 관심 없니? 남아공과 인접한 스와질란드라는 조그마한 나라에 대학과 병원을 세우고 의료봉사를 하는 일에 같이 참여했으면 좋겠는데….”
2010년 초, 고등학교 때부터 친하게 지내던 마석기독병원 이응진 원장이 전화로 뜻밖의 제안을 해왔다. 나는 속으로 ‘이게 무슨 일인가’ 하며 놀랐다. 안 그래도 매스컴을 통해 아프리카의 어려움을 접하면서 그곳을 위해 의미 있는 일을 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던 중이었으니 말이다.
“야, 그렇게 중요한 걸 어떻게 전화로 말하니. 오늘 저녁에라도 만나서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해보자.”
알고 보니 이 원장은 오래 전부터 선교단체와 함께 해외 의료선교 사역을 하고 있었다. 그는 김종량 선교사가 이끄는 ‘아프리카 대륙비전’이라는 단체를 소개하면서 현재는 스와질란드에 스와지기독대학을 세우는 일을 중점적으로 하고 있다고 했다. 두말 할 것도 없이 나도 그 일에 동참하기로 했다.
이후 나는 나름대로 한다고 해왔지만 늘 미안한 마음을 금할 길 없다. 마음은 뻔한데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다. 현지에서 25년째 오직 복음만 바라보며 헌신하고 있는 김 선교사님을 생각하면 부끄럽기 그지없다. 현지에서 만난 김 선교사님의 선한 모습이 떠오를 때면 나는 저절로 마음을 다잡는다. 그러면서 선교사님과 가족, 그분의 사역을 위해 기도하게 된다.
현지 사역은 지금 성령의 도우심으로 잘 진행되고 있다. 스와질란드 정부의 지원 아래 의과대학, 간호대학, 공과대학, 신학대학, 예술대학 등을 갖춘 종합대학 설립 인가를 받아 공사를 하고 있다. 나는 현지에서 원하는 의과대학 부속병원 설립추진위원장을 맡고 있다. 그 외에 나는 몽골문화원 등과 손을 잡고 몽골 선교에도 힘을 쓰고 있다. 그리고 나섬공동체, 사단법인 나누리, 달리다굼선교회 등과의 협력을 통해 하나님의 선한 계획에 순종하면서 나의 사명을 찾아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아울러 내가 각별히 신경을 쓰는 일이 또 하나 있다. 해외 의료인들을 초청해 수련시키고 교육시켜서 의료선교사로 양성해 본국으로 돌려보내는 것이다. 이 일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내게 부여하신 진정한 사명으로 여기고 있다. 이를 위해 몽골과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등지의 의료인들과 접촉하고 있다.
나는 이번 연재를 이어가면서 평소 잊고 지냈던 주위의 많은 사람들을 생각했다. 의사로서 30년 넘게 일하면서 직·간접적으로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참으로 고마운 분들이다. 그리고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에 가장 중요한 사람은 역시 아내 최세희 권사임을 확인했다. 같은 의사이면서도 진실한 내조로 천둥벌거숭이 같은 나를 믿고 내 옆을 지켜준 동반자이다. 무엇보다도 아내는 인내와 사랑으로 나를 신앙인으로 거듭나게 해준 천사다. 그 고마움을 어떻게 말이나 글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부족한 아비를 믿고 따라주면서 잘 성장한 두 아들 현준이와 현욱이는 가장 귀중한 나의 보물들이다.
그러나 내 인생에서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이 중요한 분이 있다. 바로 나의 하나님이다. 그분은 탐욕적이면서 교만하고 이기적인 나를 이 모양 저 모양으로 깎고 다듬으며 지금까지 인도하셨다. 그리고 오랜 기간 인내하시면서 나로 하여금 세상 바라보는 눈을 바꿔주셨다. 아무 자격도 없는 나를 축복해주신 그분의 은혜에 무한한 감사와 영광을 드리고 싶다.
“하나님 아버지, 미천한 사람을 지금까지 이끌어주시고 감당키 어려운 복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저는 아버지께서 주신 선교 비전을 실천하기 위해 최선으로 노력하겠습니다. 연세에스병원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도록 인도해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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