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오산(金烏山).
금오산(金烏山)은 대한민국 경상북도 구미시, 칠곡군, 김천시에 걸쳐 있는 높이 976m의 산이다.
전체 면적은 37.65제곱킬로미터이며 동쪽에 최고봉인 현월봉을 비롯해 약사봉(958m), 보봉(933m) 등이 솟았고
남쪽에는 만봉(873m), 서쪽에는 서봉(851m)이 자리한다. [1]시생대와 원생대에 속하는 화강편마암과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암석이 노출된 화강암 부분이 많고 화강편마암이 일부 산재해 있다.[2]
1970년 6월 1일에 도립공원 제1호로 지정되었다.
영남팔경의 하나로 불리며, 자연보호운동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2001년 5월 10일에 대한민국 최초로 ISO로부터 환경관리분야 국제표준인증 ISO 14001을 획득하였다.
금오산(金烏山)은 경상북도 구미시, 칠곡군 북삼면, 김천시 남면 경계에 있는 산.
금오산 /금오산, 경북 구미시와 칠곡군 ...
높이 977m. 소백산맥의 지맥에 솟아 있으며, 산정부는 비교적 평탄하나 기암괴석이 조화를 이룬 급경사의 바위산이다.
본래는 대본산(大本山)이라 불렀으나, 당나라 사신들이 중국의 오악(五岳) 가운데 하나인 숭산(崇山)에 비해 손색이 없다 하여 남숭산(南崇山)이라 불렀다가 고려 왕자 의천 대각국사에 의해 주봉은 금오산으로 불리고 지봉은 수양산이라 부르며 남쪽 골짝 선봉사가 있는 마을을 숭산(崇山)라 부르고 있다. 산 능선은 임금'왕'(王)자 같이 생겨 나라를 새울 3명의 의인이 이곳 숭산에서 난다는 전설이 있기도 하다. 또한 산의 형상이 가슴에 손을 얹고 편안히 누워 있는 사람의 모습과도 비슷하여 이곳이 병란을 피할 수 있는 길지로 알려저 옛부터 산성을 축조했다고 한다. 고려시대 속장경을 지어신 대각국사 의천은 이곳 숭상에 선봉사를 창건하여 수도한 명당으로서 지금도 고려때 세운 선봉사대각국사비가 보물 제251호로 지정되어 있다.
산정에는 천연의 암벽을 이용해 고려시대에 축성한 길이 3.5㎞의 금오산성이 있으며, 임진왜란 때는 왜적을 막기 위한 내외성(內外城)으로도 이용되었다. 산 전체가 급경사를 이루며, 좁고 긴 계곡이 굽이굽이 형성되어 예로부터 명산으로 알려졌다. 또한 유서깊은 문화유적이 많아 1970년 6월에 우리나라 최초의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면적은 37.9㎢이다.
구미시가 성장함에 따라 관광개발이 촉진되어 등산, 휴양관광지로 발전했다. 계곡 입구에는 금오산 저수지가 있고 명금폭포가 있으며, 북쪽 계곡에는 높이 27m의 명금폭포, 의상대사, 도선국사가 수도했다는 도선굴, 고려말의 충신 길재의 충절과 덕을 추모하기 위해 지은 채미정(採薇亭) 등이 있고, 해운사, 대각사(옛 선봉사), 진봉사 등의 고찰과 금오산마애보살입상(보물 제490호)을 비롯해, 남쪽 계곡 숭산마을에는 선봉사대각국사비(보물 제251호)가 있다. 산 중턱의 전망대까지 케이블카가 운행되며 금오산 관광호텔을 비롯한 숙박시설과 수영장 등 관광위락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다. 구미시에서 금오산까지 버스가 운행된다.
명금폭포(鳴錦瀑泡)
선봉사대각국사비(보물 제251호)
선봉사대각국사비는 서기1132년 건립된 고려 석비로서 보물 제251호로 지정되어 있다.
높이 200㎝. 복련(伏蓮)과 앙련(仰蓮)이 새겨진 4각형의 대석(臺石) 위에 비신(碑身)을 세우고,
그 위에 개석(蓋石)을 얹었다.
'천태시조대각국사비명'(天台始祖大覺國師碑銘)이라고 제액(題額)되어 있고,
본문의 내용은 37행에 각 행마다 71자씩 해서체로 씌어 있다.
비문은 임존(林存)이 짓고,
글씨는 승려 인(麟)이 썼다.
이 비문은 대각국사 의천이 천태종의 시조임을 밝히기 위해 세운 것이며,
개석의 모양이 3각형을 이룬 점 등
조각수법이 개성 영통사지(靈通寺址) 대각국사비와 유사하다.
금오산 남쪽 골짝 숭산(崇山) 마을 뒤 선봉사의 절터에는
현재 대각사란 절과 선봉사대각국사비(보물 제251호)가 남아 있으며,
고려속장경을 펴내신 대각국사의 역사가 흙속에 숨어 아직도 남아 있다.
금오산마애보살입상(金烏山磨崖菩薩立像)
경북 구미시 남통동 산24-1 절벽의 바위면을 깎아 만든 높이 5.5m의 고려시대 보살상으로,
보살상이 암벽의 모서리 부분을 중심으로 양쪽에 조각된 특이한 구도를 보여준다.
얼굴은 비교적 풍만하고 부피감도 있지만, 가는 눈과 작은 입에서 신라시대의 보살상과는 다른 특징을 찾을 수 있다. 어깨나 팔의 부드러운 굴곡은 얼굴에 어울리는 형태미를 묘사하고 있어서 상당한 수준의 조각가에 의해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옷자락을 잡고 있는 오른손이나 지나치게 큰 왼손, 둔중하게 묘사된 두 발, 경직된 U자형의 옷주름 등에서 신라시대보다 둔화되고 위축된 고려시대 조각의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특징은 불상이 딛고 서 있는 반원형의 연꽃 대좌(臺座)와 부처의 몸 전체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光背)에서도 나타난다.
이 보살상은 얼굴·신체·옷주름·광배 등에서 신라시대 보살상보다 형식화가 진전된 고려시대의 마애보살상으로 볼 수 있다.
이 불상은 절벽의 쑥 내민 바위면을 깎아 부조(浮彫)로 새긴 것으로 광배(光背)와 대좌(臺座)를 모두 갖춘 고려시대(高麗時代)의 거대한 보살상(菩薩像)이다. 얼굴은 비교적 풍만하면서도 부피감이 있지만 가는 눈, 작은 입 등에서 신라보살상(新羅菩薩像)보다는 다소 진전된 특징을 찾을 수 있다. 신체는 허리를 약간 비튼 유연한 자세라든가 어깨나 팔의 부드러운 굴곡 등 얼굴에 어울리는 형태미를 묘사하고 있어서 이 상(像)이 상당한 수준의 조각가에 의하여 조성된 작품임을 알려주고 있다. 그러나 천의(天衣) 자락을 잡은 오른손이나, 손바닥을 펼쳐 보이는 지나치게 큼직한 왼손의 형태, 둔중한 두 발,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옷의 경직된 U형 옷주름 등에서 역시 고려조각의 특징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특징은 반원형(半圓形)의 연꽃대좌나 배모양(舟形)의 전신광배(全身光背)에서도 찾아 볼 수 있어서 어쨌든 이 상(像)이 고려시대(高麗時代)의 우수한 마애보살상(磨崖菩薩像)임을 잘 알려주고 있다. 흔히 이 보살상은 『일선지(一善志)』에 보이는 금오산 최상봉 밑에 있었다는 보봉사(普峰寺)와 관련있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금오산성(金烏山城)
금오산성은 고려시대 이전 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남은 자료에 의하면 고려시대 축조된 석축 산성으로 알려져 잇다.
그 소재지는 경북 구미시 남통동 산33번지로서 지정면적은 지정면적 346,404㎡ 이다.
경북기념물 제67호로 지정되어 있고,
산성과 관련된 인물에는 일선(현 선산)부사 배설(裵楔)이 증축했으며,
도체찰사의 영(令)으로서 정기룡(鄭起龍), 이수일(李守一) 장군이 지켰다.
금오산성(金烏山城)은 해발 976m의 험준한 금오산의 정상부와 계곡을 감싸 안은 둘레 약 3.5㎞의 성으로 현재 남·서·중문 및 암문과 건물지 등이 남아 있다. 처음 축조 시기가 언제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고려 때부터 조선시대로 이어지면서 피란지로 이용되었던 대규모 산성이다. 이 성은 산의 정상부를 테뫼형으로 두른 내성과 정상부에서 북쪽을 향해 흐르는 큰 계곡을 끼고 포곡식으로 쌓은 외성의 이중구조로 되어 있다. 성벽은 높고 험한 천연의 암벽을 이용하여 인부들의 공력을 줄였다. 조선시대 초기까지는 둘레 2.7㎞ 정도의 테뫼식 내성이 있었을 뿐이었으나, 1639년(인조 17) 대대적인 확장공사를 실시하여 외성의 북쪽에 있는 계곡을 둘러싸는 포곡식 외성을 쌓아 이중의 산성이 되었다. 조선 초에는 대혜창과 내성창이라는 창고와 군기고가 설치되어 있었다 하며, 1410년(태종 10)부터 1413년까지에 걸쳐서 국가적인 사업으로 보수 계획을 세워 크게 고쳐 쌓았다. 이후 임진왜란 때에는 이 산성의 전략적 중요성이 새롭게 인식되어 1595년(선조 28) 이곳 일선부사로 부임한 배설(裵楔)이 체찰사 이원익(李元翼)에게 건의하여 승인을 받아 둘레 500m, 높이 2m의 성을 증축하여 왜적의 침입에 대비하였으며, 1597년에는 도체찰사의 영을 설치하고 정기룡(鄭起龍), 이수일(李守一) 등이 지켰다. 내성에는 남문·서문과 북쪽의 외성으로 통하는 중문이 있었는데, 남문은 너비가 1.8m, 서문은 1.7m, 중문은 2m로 비교적 규모가 작으나, 바깥으로 문의 좌우에 성돈처럼 보강된 모양을 보여주고 있다. 외성에는 북문에 해당되는 계곡쪽의 출입문과, 그 반대편에 암문이 있다. 본래 외성의 출입문에는 6칸의 문루가 있었으나 지금은 문구부만 확인될 뿐이다. 암문은 너비가 1.2m, 높이가 1.1m로서 특이한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성벽 위의 여장은 너비 1.3m 규모였고 여장에는 총과 활을 쏠 수 있는 사혈이 25×35㎝ 크기로 바깥쪽을 향해 경사지게 뚫려 있다. 이 성 안에는 1868년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는 금오산성중수송공비가 있는데, 이로 미루어 보아 현재 남아 있는 성의 모습은 이때 마지막으로 중수된 것으로 추측된다.
금오산성은 고려시대 이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옛 성터로, 고려 말에 선산·인동·개령·성주 백성들이 왜구를 피해 이곳에 들어와 성을 지켰으며, 이곳에 군량과 무기를 비축해 두었던 군창을 두었다. 조선 태종 10년(1410)에 국가적 계획으로 성을 크게 고쳐 쌓았으며, 임진왜란 때 이 산성의 전략적 중요성이 인식되어 선조 28년(1596)에 다시 고쳐 쌓았다. 인조 17년(1639)에 외성을 쌓는 확장공사가 실시되어 이중의 산성이 되었고, 고종 5년(1868)에 새로 고쳐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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