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은 태어났다가 죽으니 무엇인들 운명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천명을 아는 성인조차도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는구나.”라는
비통함이 있었으니, 이는 사랑을 쏟는 대상에는 몹시 비통한 심정을 느낀다는 점을 진실로 알겠다. 그런데 운명이 이처럼 참혹한 지경인데 하늘은
조금도 싫증 내지 않았으니, 더욱 천명을 아는 사람은 깊이 비통하게 여기는 바이다.
우리 부부가 5남 3녀를 길렀는데 자네의 아내는 바로
우리 부부의 막내딸이네. 늘그막에 막내 자식에게 애정을 쏟는 것이야 예로부터 인지상정이고, 더구나 다른 자식들이 시집 장가간 뒤에 막내딸만
데리고 4년 동안 살았으니, 도타운 애정이 더욱 깊은 것은 사정상 본디 그러하였지.
병술년(1766, 영조42) 5월에 자네가 와서 내
사위가 되어 나의 예쁘고 사랑하는 딸로 인해 사위인 자네까지 사랑하게 되었으니, 이 또한 사리와 형세상 당연한 일이네. 사모관을 쓰고 검은
적삼을 입고서 읍(揖)을 하고 섬돌에 올라와 내게
전안(奠雁)하였지. 얼굴 모습이 똑바르고 걸음걸이가 의젓하여 아주 군자다운 사람이었지. 우리 늙은
부부의 경사스러운 즐거움과 기쁨이 과연 어떠했겠는가. 삼 년이 지난 뒤에 사랑이 더욱 깊어졌고 살펴볼수록 더욱 친숙하였네. 의지가 도탑고
확고하여 좋았고 낭랑한 말씨와 웃음이 사랑스러웠으며 필법(筆法)은 힘이 있고 굳세어 보기 좋았지. 자네를 본 주변 사람과 일가친척도 모두 사랑해
마지않았네. 더구나 우리 부부에 있어서이겠는가.
무자년(1768, 영조44) 봄날 내 딸을 시집으로 보내 자네 집안에 며느리로 들이게
하였지. 나는 늙어서 동행하지 못하고 대신 큰아들을 보냈는데 큰아들이 사흘 머물다가 돌아와 자네 춘부존형(春府尊兄
사돈어른)이 자상하면서도 엄격하여 집안에 법도가 있다며 자세히 말해 주었네. 자네 큰형과 작은형 두 분도
준수하여 그 집안 자제에 손색없다고 하였지. 내 딸은 잘 가르치지도 못하였는데 다행히 좋은 데로 시집갔으니 그 복을 잘 누릴 것이라 여겼네.
그러니 내 마음에 흡족하고 위안됨을 상상해 보면 또다시 어떠했겠는가.
정해년(1767) 겨울에 자네가 왔는데 몸에 고질병이 있고
어혈(瘀血)에 담(痰)까지 있어 탈이 나서 먹어도 소화가 되지 않고 가슴에 통증이 심하다고 말했지.
자네 스스로 깊이 걱정하니, 내 어찌 근심이 적었겠는가. 단지 자네의 이근(耳根
귀뿌리)이 견고하고
비량(鼻梁
콧마루)이 튼실하다며 스스로 위로하고 자네를 위로했지. 그 후에 병증이 점점 변해서 병이
더욱 깊어졌네.
단방탕제(單方湯劑)를 번갈아 복용했지만 효험이 없어 우려와 근심이 더욱 깊어졌네. 자네의 정신으로는
필시 요절하지 않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근심하지 않았는데 또다시 병이 깊어졌지.
얼마나 다행이던가. 경인년(1770, 영조46) 정월
대보름을 앞둔 이틀 전, 해가 아직 기울기 전에 자네가 전날 바꾸어 타고 갔던 누런 수말을 타고 녹저포(綠苧袍
푸른 모시옷)와 흑조대(黑絛帶
검은 실 띠)를 펄럭이며 도착해서
대문에 들어서자 벌써 기쁨에 어쩔 줄 몰랐네. 인사를 나누고 나서 얼굴빛이 좋아지고 살찐 점을 의아스럽게 여겨 물어보니, 웃으면서 대답하기를
“지난가을 좋은 의원을 만나 환약 수백 첩을 복용하고 마침내 서증(暑症)을 치료하여 속히 효험을 보았습니다.”라고 하였지. 그 의원에 대해
물어보니, 바로 김종택(金宗澤)이라는 사람이었네. 그 의원은 내가 아직껏 본 적은 없지만, 문득 멀리서도 넘치도록 고마움을 느끼고 있음을
자네에게서 바로 알 수 있었네.
경인년 여름에 이 고장에 보리 작황이 좋지 않아 7월 보름 가까울 즈음에 네다섯 집안이 이틀에 하루 꼴로
불을 지펴 밥을 지었네. 우리 늙은 부부는 보릿가루도 배불리 먹지 못할 형편이었으니, 더구나 쌀밥을 먹었겠는가. 늦더위가 아직도 기승을 부리고
있으니, 더구나 멀리 있는 사람이 올 것이라고 바랄 수 있었겠는가. 갑자기 말 울음소리가 들리고 버드나무 길에 옥처럼 잘생긴 자네가 문에
들어서니 허둥지둥 너무나도 반가워 기쁜 마음에 다른 것은 아랑곳하지도 않았네. 그런데 구슬과 같은 둥근 낱알의 고운 보리 10말과 눈보다도 더
하얀 멥쌀 5말을 꺼내 주어 며느리들이 보리를 나누어 일제히 방아를 찧고, 손녀들은 솥을 씻어 밥 짓기를 재촉하였지. 기쁨이 집안 가득하여
이웃집이 일제히 축하하고 일가친척과 벗들이 또다시 “이 집 사위가 참으로 사랑스럽구먼.”이라는 말들을 했지. 내 사랑도 정말 이 일을 통해 더욱
더해졌다네. 이제와서 생각해 보니, 자네는 이 일을 기억하고 있는가.
그해 10월 내가 자네 집에 갈 적에 큰아들이 도보로 따라왔지.
겨울철 저물녘에 대나무 울타리 밖에서 말에서 내려 천천히 걸어 자네가 거처하는 방으로 들어가는데, 그때 바깥 행랑채에서 딸아이와 자네의 말소리와
웃음소리가 들려왔고, 또 여러 사람의 말소리가 들려왔네. 안뜰에 이르러 기침소리를 내니, 자네와 딸아이가 신발을 허겁지겁 신고 함께 나왔지.
자네 두 형님도 이어서 나와 읍을 하고 맞이하여 방 안으로 들어가니, 춘부형(春府兄)께서는 먼저 방에 계셨지. 이 일을 통해 손에 잡힐 것 같은
단란하고 화목한 온 집안의 기운을 생각하며 불현듯 자네 집안의 가풍이 참으로 좋음을 느꼈네.
자네의 어린 딸은 내 딸이 우리 집에 있을 때
해산해서 금혜(錦惠)라고 이름을 지었던 아이였지. 2년 동안 보지 못해 병이 날 정도로 애를 태웠는데 내 집에 있을 때의 웃는 아이 모습을
그래도 알아볼 수 있었네. 얼굴과 눈이 사랑스러워 품에 안고 있으니, 내 딸이 웃으면서 “아범은 사내아이가 아니라고 해서 사랑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길래 내가 말하기를 “딸 낳은 사람이 또한 어찌 아들을 낳지 못하겠느냐. 사내아이를 낳으면 이 딸도 사랑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였지. 자네의 부친과 형님도 모두 웃으면서 그렇다고 하였네. 아, 지금에 와서 홀연 앞서 한 말을 믿을 수 없는 비통함이 있을
줄 생각이나 했단 말인가.
당시 자네 방을 보니, 오래된 집은 기울고 방 크기는 달팽이 같으며 옷농, 면보자기, 쌀독, 벼 섬으로 상인방을
버티고 문설주를 눌러, 앉거나 누울 적에 비좁아 이를 본 다른 사람들은 모두 감당하기 어렵겠다고 말했지만, 내가 보기에는 더욱 사랑스러움을
느꼈네. 딸아이가 내게만 말하기를, 시부모와 동서, 작은아가씨가 사랑해 주어 집안 안에 딴말이 없다고 매번 말하였네. 내가 이 말을 넌지시
물어보고 참으로 그렇다는 것을 알았네. 내 마음이 딸아이가 받는 사랑으로 자네 집안에 미루어 가는데 어찌 그 끝이
있겠는가.
신묘년(1771, 영조47) 1월 10일 후에 자네가 나를 보러 왔고, 지난해 7월 20일 뒤에 자네가 또 나를 찾아와서 여태
병의 빌미가 아직 남아 있고 때때로 음식이 소화가 되지 않는다고 말하였지. 나는 거기에 대해 젊은이에게 늘 있을 수 있는 증세라고 여겨 깊이
우려하지 않았네. 자네가 당초 위독했다가 나았으니 하늘의 뜻이 분명하다며 이후에는 단지 간호만 잘하라고 말했지.
이어 겨울이 깊어지자
왕래가 서로 끊어졌으므로 그리워하는 마음을 지닌 채 2백 리나 떨어진 산과 바다에서 두 계절이 또 지나갔네. 늙은 아내는 항상 북쪽 구름 낀
산을 멀리 바라보며 눈물을 줄줄 흘렸지. 나는 부인네의 무르고 약한 태도라고 꾸짖었지만, 내 마음도 어찌 편안하기만 했겠는가. 더구나 자네가
우리 노인네를 위하여 침구로 사온 흰 돗자리 2장은 매우 곱고 좋았네. 하나는 포장하여 시렁에 보관하고, 하나는 깔았는데 부드럽고 또
보송보송해서 무척이나 나이든 몸에 편안하였네. 저녁마다 우리 부부가 어루만지고 편안히 여겼으니 어느 날인들 자네 이야기를 하지
않았겠는가.
자네는 매년 정월 대보름 전에 왔었기에 올해 이때 즈음에 올 것이라고 기대했는데 마침내 아무런 소식이 없었지. 올봄에 자네가
필시 집을 지을 것이니, 분명 이 때문에 오지 못한다고 생각해 특별히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네. 그러나 자네 부인의 산달이 중춘(仲春)이었는데,
아들을 낳았는가, 딸을 낳았는가. 전에 이미 두 딸을 낳았으니, 이번에는 필시 아들을 낳을 것도 같았네. 자네가 매번 말하기를 “점쟁이가 딸
넷을 낳은 뒤에 아들을 낳는다고 합니다.”라고 했는데, 점쟁이의 말이 과연 들어맞아 혹 다시 딸을 낳았는가. 자네는 나이가 젊어도 아들을 바라는
마음이 급했지. 그렇다고 아들을 낳았으면 하는 소망이야 내가 어찌 자네만 못하겠는가. 농사짓는 노복(奴僕)이 짬이 없어 서로 안부를 묻지
못했고, 마침 과거 시험이 있어서 자식들 역시 시험을 보러 가서 찾아보지 못했네. 봄이 가고 여름을 지나면서 어느 날인들 잊고
있었겠는가.
6월 28일 저녁 무렵 자네가 예전에 데리고 왔던 사내종이 혼자 앞에 와서 절하고 우리 사위 덕칠(德七)이 세상을 떠났다는
흉한 부음을 전하리라고 누군들 생각이나 했겠는가. 처음 듣고는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가슴이 미어져 곡하려고 해도 할 수 없고, 말하려고 해도 할
수 없었네. 황당해서 사실이 아닌 것 같았고, 멍하니 내 자신을 상실한 듯 슬펐네.
아, 자네가 마침내 이 독한 병의 빌미가 재발하여 이
지경에 이르게 될 줄 누군들 생각이나 했겠는가. 부고를 알린 종이에는 병을 앓기 시작한 날짜가 4월 13일이라고 적혀 있었지. 이어서 사내종에게
물으니, 그 사이 병세가 차츰 위독해져 지극히 참혹한 상태가 되었다가 끝내는 죽음에까지 이르렀다고 하였네. 그간 3개월 동안 우리 부부는 인간
세상에서 잘 살면서 허망하게도 이런 상황이 벌어지리라고 어찌 생각이나 했겠는가.
사내종이 아뢰기를 “2월에 해산하여 딸 쌍둥이를 낳았는데
바로 죽었습니다.”라고 하였네. 아, 과연 아들을 낳지 못했구나. 이 일로 자네가 마음이 놀라고 목숨이 손상된 것인가. 사내종이 말하기를 “봄에
새집을 짓고 들어가 산 지 얼마 되지 않아 병을 앓았습니다.”라고 하였네. 아, 이 가옥은 정말로 작년에 내가 갔을 때 자네가 손으로 가리킨 뜰
주변에 쌓아 놓는 목재로 지은 것이란 말인가. 당시 내가 목재를 어루만지며 이 나무는 앞으로 우리 사위의 집이 될 것이라 여겼네. 나무조차도
이처럼 사랑했는데, 어찌하여 이 집을 완성하고서 내 사랑하는 사위가 오랫동안 편안히 살지 못한단 말인가.
당시 자네가 나를 배웅하면서
내년에 새집이 완성된 후에 반드시 다시 오라고 말하였지. 나 역시 새로 집을 짓고 애를 낳으면 마음이 하나씩 정돈되어 기쁠 것이라고 여겨 웃으며
그리하겠노라고 답하였네. 간곡한 그 목소리가 여전히 낭랑하게 귓가에 있는데, 지금 드디어 영영 이별이 될 줄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8월에 아들 백규가 자네의 영령에 가서 곡하고 돌아와서야 자네의 병상(病狀)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었네. 참혹하구나, 이
질병이여. 또한 죽은 다음에야 끝날 뿐이구나. 들으니, 자네는 딸 쌍둥이가 태어나자마자 죽어 그 슬픔으로 3일 동안 밥을 먹지 못했다고 하니,
이 때문에 상심한 것이 맞구나. 끝이로구나. 애통하도다. 하늘은 어찌하여 한 사내아이를 아끼느라 자네를 이 지경에 이르게 한단 말인가. 이미
사내아이를 주지 않았는데 어찌하여 다시 자네 목숨을 빼앗아 마침내 구천(九泉) 아래에서 하늘이 다하도록 원한을 품게 한단 말인가. 이런 지경이니
자네 아내는 뼈에 사무치는 지극한 애통이 또 어찌 다른 사람이 남편을 잃은 애통함뿐이겠는가.
자네가 병중에 둘째 형님의 새로 낳은 둘째
아이로 후사를 세우라고 명하였다고 들었으니, 어찌 스스로 필시 이처럼 죽게 될 줄을 분명히 알았는가. 죽은 후의 일을 스스로 세웠으니, 정말로
잘했다고 할 수 있네. 하지만 그 심정은 참으로 목이 메고 상심했을 것이니, 아, 차마 말할 수 없구나.
생각해 보니 자네가 몇 년 전
병을 앓았을 적에 춘부형(春府兄)이 늙고 병드신 연세에도 밤낮으로 근심하고 걱정하며 직접 부엌에서 약 달이는 불을 지폈으니, 자식을 사랑하는
심정이야 참으로 보통 사람에 비교할 정도가 아니었네. 지금 자식을 먼저 보낸 비통함이야말로 다른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니, 내가 비통한
심정을 말하는 정도로는 또한 헤아릴 수 없을 듯하네. 하지만 느끼는 심정의 지극한 지경에는 또 어찌 크고 작은 차이가 있겠는가.
자네의
큰형님은 호남의 명망 있는 선비로, 매번 과거 시험장에서 형이 문장을 짓고 동생이 글씨를 써서 온 도내가 칭송하며 부러워하였지. 그런데 지금
이미 끝나 버렸으니, 또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 아, 애통하도다. 자네는 어찌 차마 이처럼 저세상으로 떠나 인간 세상에 남겨진 양가의 늙은
부모에게 끝없는 지극한 애통을 가득 준단 말인가. 자네는 어찌 차마 이처럼 저세상으로 가서 자네의 큰형과 작은형에게 끝없는 지극한 원통을 안겨
준단 말인가. 자네는 어찌하여 차마 이처럼 저세상으로 떠나가 자네의 처자식에게 천지가 끝나는 애통을 당하게 한단 말인가.
비록 그렇기는
하나, 춘부형께서는 그래도 두 어진 자식이 앞에 있고, 내게는 다섯 자식이 옆에 있네.
자네의 큰형과 작은형이 아직도 혼자 이불을 덮지 않을 것이네. 내 딸아이는 또 남편을 따라 함께 죽을
수 없고 어린 두 손녀는 제사에 올리고 남은 배와 밤을 달라고 장난치고 있으며, 또 자네가 마련해 둔 논밭과 농막이 앞에 있고 시장(柴塲)이
뒤에 있네. 결국 세월이 지나 상제(喪制)가 끝나면 죽은 이는 차츰 멀어지고 살아 있는 이는 차츰 잊게 되네. 그렇다면 산 사람이 애통하다고
말하지만, 그 애통이란 당시에 그치고, 죽은 이의 애통함은 진실로 끝날 기약이 없을 것이네. 아, 이 비통한 심정 어느 때에야 다하겠는가.
그런데 산 사람이 자네의 끝없는 비통을 생각하여 또 끝날 때가 없다면, 산 사람의 비통함도 어느 때나 끝나겠는가.
아, 운명이로다. 어찌할
수 없구나. 지금 나는 지난해에 비해 더욱 늙고 기력이 없어 결코 지난해처럼 갈 수가 없네. 더욱 애통한 것은 딸아이가 시집간 후에 아직
근행(覲行)을 하지 않았네. 자네가 금년 가을에 행장을 꾸려 보내겠다고 약속했는데, 자네가 지금 이미 세상을 떠났으니, 청상과부와 어린 자식이
영영 올 기약이 없구나. 이는 살아있는 사람과도 더불어 영원히 이별하는 것이다. 나의 비통한 마음이 과연 끝날 때가 있겠는가. 아, 자애로운
하늘이 도리어 사람을 혹독히 비통하게 만들어 이처럼 지극한 상심에 이르게 한단 말인가.
영결하는 날짜가 정해져 내게 계빈(啓殯)할 날짜를
알려 주었네. 멀리서 바라보며 길이 비통한 심정에 오장육부가 타는 듯하네. 참으로 모르겠지만, 내 근력이 아직 쇠하지 않아 무덤에 가서 곡하고
영결했다면, 거의 슬픔의 만분에 일이나마 쏟을 수 있을까. 차라리 갈 수 없어서 보지 않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 아, 덕칠 자네는 언제
오는가. 어포(魚脯)와 귤, 술잔이 앞에 있으니, 자네가 이 사실을 안다면 이를 먹을 것일세.
아, 애통하도다.
흠향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