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가에서 문 닫고 살며 왕래를 끊다 보니
합하(閤下)께서 이 고을에 부임하신 지 이미 한 계절이 지났는데도 감히 하집사(下執事)에게 안부를 여쭙지 못했습니다. 비록 본분에 그리해야겠지만
그래도 죄송한 마음이 심했는데, 어찌 먼저 편지를 보내시어 간곡하게 기억하며 안부를 물어 주시리라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저의 태만을 용서해
주시고 진중한 가르침을 주시니 감격과 송구함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보잘것없는 제가 일찍이 과거 시험을 업으로 삼아 20년을 분주하게
지냈습니다. 본디 천성이 비루하고 재주가 없어 사대부 집안에 명함을 내민 적이 없고, 고을 수령에 대해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면 일찍이 제
스스로 영하(鈴下
수하 관원)에게 성명을 알려준 적이 없으니, 이 역시 의리상 감히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번에 하신 말씀에
언(偃)의 집에 오지 않았다고 했으니, 부끄러워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당장 가서 인사드리고
저의 진정을 말씀드려야 하지만, 여든 되신 늙은 아버지가 마침 서리(暑痢
더위를 먹어 생긴
설사병)를 앓고 있어서 약제를 준비하기가 한창 바빠 집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의 병환이 낫기를 기다리자면 날씨가 서늘해져야
할 것이니, 두 달이나 늑장을 부리게 될 터라 미리부터 너무 황송하고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또한 제가 명을 듣고 감격하여 서둘러
관아로 달려간다면 그 역시 합하께서 취하셨던 초심이겠습니까. 이에 감히 스스로 말씀드리며 우러러 죄주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천만번 엎드려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