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29-34)
1. 고린도전서 15장, 부활장 다섯 번째 시간입니다.
경찰관과 소방관이 싸우면 누가 이기겠습니까? 소방관입니다.
소방관은 물불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에요. 그러면 소방관과
시각장애인이 싸우면 누가 이기겠습니까? 시각장애인입니다.
눈에 뵈는 게 없으니 말이죠! 그 시각장애인과 사형수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요?
사형수입니다. 그는 곧 죽을 것이므로 목숨을 아끼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죽음을 각오한 사람보다 무서운 사람은 없다는 말이에요.
오늘 본문에도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사형수와는 다르죠.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람들이 죽음을 각오하거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부활신앙 때문이에요.
한 여인이 암 판정을 받고 석 달밖에 살지 못할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녀는 목사님을 만나 장례를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묻고 자신이 좋아하는
성경책과 함께 묻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목사님이 떠나기 전에, 그녀는 그를 다시
불렀습니다. “한 가지 더 있어요. 이건 참 중요한데요, 제 오른손에 포크를 쥔 채
묻어 주세요.” “제 평생에 교회 행사에 참석하면서 가장 좋았던 순간이 언제인지
아세요? 접시를 치우는 사람이 슬며시 다가와 이렇게 말하는 순간이었어요.
‘쓰시던 포크를 계속 들고 계세요.’ 더 놀라운 음식이 준비돼 있다는 말이었기
때문이죠. 사람들에게 장례식에서 손에 포크를 쥔 채 잠든 내 모습을 보여 주고
싶어요. 그때 그들에게 이렇게 말해 주세요. ‘이제 더 좋은 순서가 남았습니다.
그러니 포크를 들고 계세요.’” 얼마 후에 이 여인은 천국에 갔습니다. 사람들이
장례식에서 “이게 무슨 포크입니까?” 물었습니다. 목사님은, “자매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이 죽은 이날이 패배의 날이 아님을 모든 사람에게 알려 주고 싶어
했습니다. 이날은 축제의 날이며, 진짜 파티는 지금부터 시작이라고 말입니다.
이제 더 굉장한 시간이 오고 있습니다.” 참 멋진 부활신앙이죠!
2. 부활 이야기를 계속하는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 시작에 매우 난해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29절,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아나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그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느냐.“ 이것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도무지 풀리지 않아요!
바울이 이 말씀을 전하는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 좋아요.
이 말씀은 바울이 죽은 자를 위해서 세례를 받는 것을 인정하는 말씀도
아닙니다. 이 말씀은 당시 고린도교회에 행해졌던 관습을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죽은 자를 위해서 대신 세례를 받는다고 죽은 자가 구원받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이런 관행이 있어왔다면, 그들도 결국 부활이 얼마나
중요하고 반드시 부활해야 한다는 인식이 있는 것이 아니냐는 긍정적 메시지이죠!
이 난해한 말씀을 이렇게 해석하는 이도 있어서 소개합니다.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 받는 자”할 때, ‘위하여’로 번역한 휘페르는
‘위에’ 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결국 이 말씀은 죽은 자들을 위하여가 아니라
죽은 자들 위에 세례 받는 자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는 주장입니다.
죽은 자들 위에 세례를 받는다는 무슨 말일까요?
남태평양의 솔로몬 제도의 세례식은 매우 특이한데, 장소가 그렇습니다.
그들이 세례식을 행하는 곳이 사형수들을 처형하는 바위 위에요.
과거 그들이 사형수를 처형할 때 바위 위에 머리를 짓이겨서 죽였습니다.
피가 흐르는 그대로 바위 위에 남겨놓았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죽은 사형수들의 피가 남아있는 그 바위 위에서 세례를 행했어요.
그들이 그곳에서 세례 받을 때 마음가짐이 남달랐겠죠!
그들이 죽은 자들 위에서 세례를 받았으니 말입니다.
죽은 자들을 위한 세례의 다른 해석은 이렇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기독교 핍박 지역에서는 세례를 받기 어렵습니다.
세례를 받으면 공동체-사는 동네-에서 쫓겨나요.
쫓겨날 뿐만 아니라 생명조차 보장받지 못합니다.
그렇게 해서 죽어간 순교자들이 역사에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렇게 죽어간 사람의 용기를 보고 세례를 꺼려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세례를 받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부활신앙 없이는 결단할 수 없는 장엄한 순간이에요.
문맥상 첫 번째 해석이 가장 합리적이지만,
나머지 두 개의 해석도 은혜가 되죠!
3. 사도 바울은 더욱 담대하게 이렇게 선언합니다.
30-31절, “또 어찌하여 우리가 언제나 위험을 무릅쓰리요,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바울은 누구보다 복음을 전하며 위협을 경고 받았습니다.
아주 오랫동안 집요하게 유대교인들이 그를 죽이려고 위협했어요.
말로만 위협한 것이 아니고 실제로 그랬습니다.
그런 위협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복음전도-세계선교-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 고백이, “우리가 언제나 위험을 무릎쓰리요”하는 말씀이에요.
어떤 협박과 위협이 있어도, 실제 위험이 도사리고 있어도 무릅쓰고
나가는 멋진 인생입니다. 이런 바울의 용기를 누가 가질 수 있습니까?
바울과 같이 분명한 부활신앙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할 수 있어요.
사도 바울은 이어서,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합니다.
그는 이 고백을 할 때,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한다“고 했어요.
주님 안에서 바울의 자랑이 무엇입니까? 교회에요!
바울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 그의 인생은 오직 주님과 교회를 위한
삶이었습니다. 다른 것은 없었습니다.
이 말씀은 바울이 평생 경주해온 모든 것-교회를 두고 단언하는 고백은,
“나는 날마다 죽는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바울처럼 죽어보았습니까? 한 번 죽는 것이 아니고 매일 죽는 것이에요.
주님을 만나는 체험을 한 사람의 공통적인 삶이 이것입니다.
주님처럼 바울처럼 죽을 줄 아는 것이에요.
주님 만난 경험을 자랑하면서 죽을 줄 모른다면 그 경험 잘못한 것이죠!
마르틴 루터는 바울의 고백을 보고, 자신은 매일 세례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데일리 뱁티즘(daily baptism).‘ 루터의 고백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율법으로 행하던 삶은 죽고 은혜로 사는 것이에요. 나는 죽고 그리스도로 사는 것,
죄에 대해 죽고 의로 사는 것, 절망은 죽고 없어지고 소망으로 사는 것이에요.
우리에게도 중요한 과제가 있습니다. 죽어야 할 부분인데 죽지 못하였던 것,
이제는 죽어야 합니다. 끊어야 할 것이 있는데 끊지 못했던 끊는 것입니다.
토요일 회복 캠프는 이를 위한 기회가 됩니다.
올바른 신앙체험은 나로 죽게 하고, 끊을 것을 끊게 합니다.
금번 캠프를 통해서 이런 역사가 우리 모두에게 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4. 사도 바울은 부활신앙이 확실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차이를 32절에 밝합니다.
“내가 사람의 방법으로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여기서 맹수는 문자적 의미보다는 비유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
로마 시민권이 있는 사람은 이런 일을 당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대형 극장에서 맹수에게 죽임을 당하게 하는 극형법.
맹수는 바울을 대적하고 위협하는 사람들이에요.
그들과 싸움은 바울의 의지와 관계없이 계속 이어졌습니다.
이 싸움은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끝나지 않을 것이고,
사람의 방법으로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에요. 영적인 전쟁이기에.
사도 바울은 이 싸움을 마다하지 않고 계속하였습니다.
이 싸움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이 부활신앙임을 천명하죠!
부활신앙이 없는 자는 이런 싸움을 피하고, 내일 죽을 것이니
오늘 먹고 마시자-쾌락이나 즐기자고 체념합니다.
오늘 우리가 믿음 지키며 분투하는 것도 이 부활신앙의 힘-파워에요.
5. 사도 바울은 세상 사람의 말을 인요하면서 고린도교회를 격려합니다.
33-34절,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힌다는 말은 메난더가 희극 타이스에서
한 말을 바울이 그대로 인용한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가 악한 사람들과 어울리지 말고 자기의 선한 행실을
지켜가며 종말을 살 것을 권했습니다.
옛날, 로마사람들이나 헬라사람 가운데 지혜로운 사람, 소위 지성인들은 만나면
서로 이렇게 인사를 했습니다. '메멘토 모리.' '메멘토'는 remember라는 말이요
'모리'는 '죽음이라는 말입니다. 직역을 하면 remember to die,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말입니다. '메멘토 모리'이것이 인사였습니다.
아침인사요 저녁인사입니다. 이들이 예수 믿게 되자 이제 인사말이 바뀌었습니다.
'마라나타,‘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주님께서 곧 재림하실 것임을 기억하고
살자는 말입니다. 초대교회는 이 신앙으로 서로 유무상통했습니다. 또 서로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순교까지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어떠한 고난도 이길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 인근, 오렌지카운티에 척 스미드 목사님이 개척한
갈보리 교회(Calvary chapel)가 있습니다. 그 교회는 Maranatha community
라고 써놓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엄청난 부흥을 했고, 아주 생명력 있는 교회
입니다. '마라나타 커뮤니티'교회는 종말론적인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생명이 있고 거기에 중심이 있고, 거기에 목적이 있습니다.
오늘 예배드리는 우리 모두 이런 종말신앙 가운데 악한 영향을 미치는
것들을 이기며 오늘도 부활신앙으로 이기며 살 수 있기를 주님의
말씀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