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늘 안타까워하고, 스스로 조심스러워하는 것은 우리 한국교회 성도들의 신앙생활이 너무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에 빠져있다는 것입니다. 즉, 이원론적인 사고방식입니다. 이원론적인 사고방식이란 신앙생활과 일상생활을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는 태도입니다. 예를 들면, 직장생활이나 사람들을 만나는 일을 신앙생활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와서 봉사를 한다든지, 믿지 않는 사람들을 만나서 복음을 전한다든지 혹은 예배나 성경공부, 그리고 기도 시간처럼 신앙이 직접적으로 표현될 때에는 “이것은 하나님의 일이다.”라고 강하게 실감합니다. 그렇지만 거리의 한 모퉁이에서 친구들과 만나서 그냥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바로 신앙생활이며 신령하고 영적인 신앙생활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성도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교회일 뿐이고, 사회생활은 또 다른 생활이라는 생각들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의 모습은 나름대로 영적인 신앙생활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교회를 벗어나는 순간부터 신앙인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국 교인들의 의식 구조 속에서 가장 오해되고 있는 단어 가운데 하나가 “신령하다”라는 말입니다. “저 사람은 참 신령하다”는 말을 들을 때 얼른 떠오르는 이미지는 아마 이런 것일 것입니다. “저 사람은 식사도 안하고, 아주 열심히 기도한다”, 혹은 “그는 40일간 금식 기도한다”, “전도하는 일에 아주 광적으로 열심이다”, “종교적으로 지나치다.” 설령 의식적으로는 그런 식으로 정의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보통 신령하다는 말을 그런 방향에서 사용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가만히 살펴보면 “신령하다”는 말은 삶과 완전히 유리된 종교적인 행위 속에 우리 자신을 몰두시키는 정도를 가리키는 말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신령하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영적인 원리를 얼마나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내 삶의 현장에 적용하고 있는가에 달린 문제입니다. 성경에 따르자면 기도할 때 목소리 톤이 유달리 괴상하다든지, 뱀을 쫓는 소리를 잘 낸다든지, 혹은 기도를 오래한다고 해서 영적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런 이원론적인 사고방식을 가졌기 때문에 우리는 신앙생활과 직접적으로 관계된 일에 대해서는 열정적으로 마음을 다해 임하지만 그렇지 않은 자질구레한 사건들, 즉 친구와 만나서 이야기를 한다든지, 시장에서 계산을 잘못한 사람과 시비를 가린다든지, 혹은 고용주로서 고용인들과 관계를 맺고 그들과 더불어 삶을 나누는 것 등은 영적이지 못한 일로 취급하여 소홀히 여기기가 쉽습니다.
자꾸만 삶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어서 생각하다 보니 특별히 우리 나라 교인들은 각자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주권”이라고 하는 중요한 문제를 놓쳐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인이 되셔야 한다는 말은 내 삶의 모든 영역 속에서이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무슨 일을 하든지,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는 동기가 영적이고, 또 그 목표가 영적이라면 우리가 하고 있는 모든 일이 다 영적인 일이 될 수가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영적인 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밥 먹는 일도 영적인 일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사도 바울의 권면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내가 이것을 먹고 건강을 얻어서 정말로 주님을 증거하는 일에 내 삶을 드리고 싶다. 내 삶의 전체를 가지고 그리스도의 모습을 드러내고 싶다. 내 삶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나타내는 화육이 되었으면” 하는 의도와 동기를 가지고 먹고 마시면 그것은 신령한 일이 됩니다. 부흥회 못지 않게 먹는 일도 중요합니다.
동기나 목적이 정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일 때 삶의 모든 영역이 다 주님의 일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내 삶의 전 영역을 다스리는 주인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주권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주권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종종 듣게 되는 비난 가운데 하나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많아지는데 왜 세상은 자꾸만 어두워지느냐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저는 교회가 사회를 변화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주권이 적용되지 못한 까닭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주권이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 속에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나와서 갖게 되는 그런 열망과 확신을 가지고 가정과 직장과 사회에서 신앙의 원리에 바탕을 둔 삶을 살고 있다면, 저는 정말 문자 그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또 우리의 교회가 세상의 빛이 될 수가 있다고 믿습니다.
어느 글에 종업원을 함부로 다루고 4개월에 한 번씩 종업원을 갈아치우면서도 스스로는 신앙이 아주 돈독한 사람으로 자처하는 어떤 교인을 고발하는 내용을 본 적이 있습니다. 한 번 쯤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디도서 2장에는 교회생활과 가정생활에 대한 바른 교훈이 언급되어져 있습니다. 이를테면, “가정에서 남편과 자녀들을 어떤 태도로 섬길 것인가?”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인과 종의 관계에서의 윤리도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의 상황으로는 주인과 종의 관계를 가정생활에 포함시키는 것이 합당할는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가정에서 종을 부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정에서 내가 고용하는 종을 어떤 태도로 대하는 것인가 하는 것도 영성을 테스트하는 진정한 시금석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이렇게 성도들의 바른 생활에 대해서 권면하고 있는 중요한 이유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백성이 되어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기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이 사실을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그것에 감사하고 감격해 할 때 우리의 신앙은 자라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이미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가운데,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려야 합니다.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주님께로 가든지, 아니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더 분명한 사실은 그 날에는 구원받은 사람들에게는 영광의 날이요, 축제의 날이요, 기쁨의 날이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저주의 날이요, 심판의 날이요, 멸망의 날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사람들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3장에서는 주의 나타나심을 기다리는 그리스도인들이 사회생활에서 어떻게 그리스도의 주권을 드러낼 것인가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러한 삶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구원받기 전에는 우리가 사회생활을 어떻게 했었는가를 지적하면서 마지막으로 그러한 사회생활을 추구해야 할 진정한 이유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회생활에 대한 바울의 권고는 여러 가지이지만 결론적으로 이 두 가지로 요약할 수가 있습니다. “복종과 평화.” 본문 1절과 2절에는 대단히 중요한 동사 하나가 나옵니다. 그것은 “기억하게 하라”는 단어입니다. 본문 1절과 2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너는 그들로 하여금 통치자들과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하며 모든 선한 일 행하기를 준비하게 하며, 아무도 비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
어떤 영어성경에서는 “기억하게 하라”는 말이 “끊임없이 기억시키라”는 말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우리의 삶의 방식을 지속적으로 기억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끊임없이 기억해야 하고, 또 기억시켜야 할 삶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통치자들과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해야 할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통치자들과 권세 잡은 자들”은 법 질서를 행사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너는 그들로 하여금 통치자들과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하며.”
복종이 거듭해서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통치자들과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선한 일 행하기를 준비하게 하며”입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선한 일을 할 준비를 갖추게 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증거는 사회생활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나야 하겠습니까? 그것은 소위 법을 다루고 사회질서를 유지하고자 하는 사람들에 대한 진정한 복종이어야 합니다. 이것은 사람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결국 우리가 살고 있는 공동체나 사회질서 속에서 하나님이 기대하신 법에 대한 복종의 자세를 강조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옳습니다.
그런데 이런 말을 할 때마다 언제나 제기되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법 질서를 집행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불의한 것을 요구할 때에도 복종해야 옳은가 하는 것입니다. 저는 거기에 대해서는 불변의 원칙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에 대한 복종이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불복종이 될 때는 더 높은 권위, 즉 그리스도인들의 궁극적인 권위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복종하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아니오”라고 말할 때 언제나 기억해야 할 것은, 그것이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사람들에 대한 불복종의 자세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 복종하기 위해서 어떤 특정한 요구에 대해서는 “아니오”를 말할 수 있지만,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에 대한 순복의 자세는 잃지 말아야 합니다. 이러한 태도는 아주 중요합니다. 사도행전 5장은 그와 같은 예를 아주 잘 보여주는 고전적인 예라고 생각합니다. 사도행전 5장 29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사도행전 5장의 배경은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다가 체포당하고 전도를 못하도록 명령을 받습니다. 사도들에게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 지상명령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의 명령과도 타협할 수 없는 소중한 명령이었습니다. 그래서 “왜 전도를 하지 말라는 명령을 어겼느냐?”는 대제사장의 물음 앞에 베드로와 사도들은 이렇게 대답을 했던 것입니다.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그러나 사도행전 5장부터 시작해서 죽 읽어보면 관리들이 투옥하는 과정에서 사도들이 저항했다는 내용은 전혀 없습니다. 불의를 행하는 대제사장들에 반항해서 군중들을 선동하여 폭동을 일으켰다는 내용도 없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서 사람들의 특정한 요구에 관해 그리스도인의 양심을 가지고 말했지만, 그러한 순간에도 그들은 복종의 자세를 전혀 잃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 사람이 얼마나 영적으로 훌륭한 그리스도인인가 하는 것은 그 사람이 얼마나 성경을 많이 알고 암송할 수 있는가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그가 사회생활을 할 때 정말 법을 지키고 하나님의 명령 앞에 순종하는 자세로 사느냐에 달린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가끔 교회와 교인들이 적당하게 사회법을 어겨도 된다고 생각하며 행동하는 모습을 볼 때 조금 마음에 부담이 됩니다. 물론 거기에는 저도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작은 부분에서까지도 법질서를 지키는 것이야말로 주님의 나타나심을 기다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사회생활에서 기억해야 할 삶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둘째는, 인관 관계에서의 평화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대인 관계에서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 하지 말아야 할 것 두 가지와 해야 할 것 두 가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대인 관계에서 하지 말아야 할 것 첫째는, 아무도 비방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비방’이라는 말은 본래 “다른 사람에게 대한 험담”입니다. 즉, 본인이 없는데서 그 사람에 대한 부정적인 말을 하는 것입니다. 당사자가 없는데서 부정적인 이야기는 하지 마십시오. 꼭 그 이야기를 해야 한다면 당사자가 있는데서 하십시오. 그럴 용기가 없다면 시도조차 하지 마십시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우리의 소중한 공동체의 평화가 깨어지고 말 것입니다.
둘째는, 다투지 말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다툼이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한 사람과 구체적으로 논쟁을 일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싸우는 것입니다. 논쟁하지 마십시오. 다투지 마십시오. 주님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사람들은 결코 그런 모습으로 주님의 영광된 모습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대인 관계에서 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첫째는, 관용함을 나타내야 합니다. 여기에서 관용이란 본래 어떤 사람의 죄과나 약점에 대해서도 그 사람을 용납할 수 있는 자세를 말합니다. 쉬운번역에서는 “모든 사람과 사이좋게 지내며”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의 잘못에 대해서 용납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그 사람과 사이좋게 지낼 수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 우리의 공동체는 평화를 유지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둘째는, 범사에 온유함을 나타내야 합니다. 온유는 상대방의 구체적인 잘못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처리하는 방법과 태도에서 자기 자신을 절제할 수 있는 힘을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사실은 우리가 평화를 끼쳐야 할 대상은 어느 특정한 사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나와 가까이 있는 사람이건 멀리 있는 사람이건, 나를 축복하는 사람이건 나에게 손해를 입히는 사람이건, 사랑하는 여러분! “아무도 비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내야” 합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부딪치는 모든 인관 관계 속에서의 이러한 원만한 대인관계를 가리켜서 ‘샬롬’(평화)이라고 불렀습니다.
사도 바울은 구원받은 후의 삶이 그 전과는 달라야 한다는 맥락에서 구원받기 이전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본문 3절에서 구체적으로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본문 3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하지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여러 가지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 한 자요 악독과 투기를 일삼은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였으나.”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의 생활방식은 본능적으로 불복종이며, 반항적입니다. 저들에게는 반항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고, 오히려 순종하는 것이 부자연스럽습니다. 우리가 이렇듯 자연스럽지 않고 본능에 거스르는 자기 자신을 쳐서 하나님과 그 분의 법을 사랑하고, 그 분의 뜻을 따라 살고, 그 분이 세우신 권위를 존중하는 삶을 살게 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바로 구원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신실하신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순종하고자 하는 삶의 모습을 갖게 되는 것은 그가 거듭났다는 구체적인 증거 가운데 하나인 것입니다. “전에는 순종하지 아니한 자요.”
그래서 구원받기 이전의 가장 주된 실상은 불순종인 것입니다. 불순종은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게 된 주된 실상이기도 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써 타락했습니다. 그의 후손들인 우리들도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에 반항하며 불순종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구원받기 이전의 우리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열거된 수많은 단어는 대인 관계들에서 평화를 파괴하는 원인들입니다. 정욕, 욕심, 행락, 악독, 투기, 가증함, 미움 …. 이러한 우리의 욕구들은 결국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샬롬의 인간관계”, 즉 원만한 인간관계를 파괴하는 주범입니다. “우리도 전에는 이러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구원받았으므로 마땅히 달라진 삶을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기억시키라고 바울은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5절에서 7절까지를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사도 바울은 이 대목에서 그리스도인이 예수를 믿기 시작한 다음부터의 구원받은 삶의 모습을 전체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맨 처음 우리가 새로운 삶을 살게 된 출발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한 마디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자비하심 때문이었습니다. 본문 4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이 나타날 때에.”
우리는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이전의 반항하고 불순종하던 삶에 도전을 하며, 새로운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사람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잘나서가 아닙니다. 잘난 것이 하나도 없었던 나였습니다. 의로운 것이 하나도 없었던 나였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긍휼 때문에 구원받았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새로운 삶의 출발이었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삶은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는 순간부터 시작해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고 있는 삶 전체를 묘사하는 아주 놀라운 말씀이 그 다음 대목에 있습니다. 본문 5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여기에서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이 아주 중요합니다. 이 ‘씻음’이라는 단어는 일회적인 사건을 묘사하는 단어입니다. 한 번 씻음으로 완전히 씻어졌다는 것입니다. “중생의 씻음”은 이미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거듭났을 때 완전히 근본적으로 씻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더 씻을 필요가 없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십자가에서 나의 죄를 담당하신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에 근거해서 우리는 단 한 번의 일회적으로 씻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지 않고 “성령의 새롭게 하심”이 따르게 됩니다. 이 말은 “계속해서 새롭게 하심”이라는 뜻입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계속해서 새롭게 하십니다. 교리적으로 이것을 ‘성화’라고 합니다.
흔히 ‘회개’라는 단어를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예수 안 믿게 된 상태에서 예수 믿게 된 것, 그것이 근본적인 회개다, 또한 회개한 사람은 그 다음에는 자백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회개’란 단어는 구원받을 때의 사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쓰인 ‘회개’라는 단어는 굉장히 폭이 넓습니다. 즉, 구원받은 사람도 날마다 회개해야 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개념적으로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근본적인 회개는 예수를 믿지 않고 하나님 없이 살다가 하나님을 향하여 삶의 방향을 돌이켜 이제 그 분을 바라보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근본적인 회개는 이 순간부터 뒤따를 수많은 회개의 시작입니다.
‘회개’란 “돌아선다”, “방향을 바꾼다”는 뜻입니다. 근본적인 회개는 하나님을 향하여 돌아서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 삶을 가만히 들여다보니까 아직도 하나님을 향하여 돌아서지 못한 부분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내 개성, 가정생활, 직장생활, 내 삶의 방식 ….
그래서 우리는 계속해서 돌아서야 합니다. 그럴 때 계속 새로워질 수가 있도록 성령께서 역사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거듭남으로 씻음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을 성령님이 계속해서 새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가정과 사회, 교회, 모든 삶의 영역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이 정말 기뻐하시는 삶, 하나님을 향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주께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구원만 하신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그 삶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도록 성령님을 보내주셨습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사회생활을 추구할 수 있는 그 동력은 바로 성령이십니다.
그래서 사회생활의 영역까지 포함하여 성화의 추진력으로서의 하나님의 놀라우신 선물인 성령의 역할을 사도 바울이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본문 6절에 있습니다.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여기에서 “풍성히 부어 준다”는 말은 과거에 끝난 사건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해서 부어 주고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 성령님께서는 우리 속에 오십니다. 그런데 “우리 속에 오신다”는 말을, 즉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신다는 말을 그 분이 공간적으로 우리 안에 꼼짝도 않고 머물러 계신다는 뜻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내 안에 찾아오신 성령님은 계속해서 내게 오십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부어 주십니다. 그리하여 성령의 능력에 의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하고 기뻐하는 삶을 추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철저하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사회생활까지 포함해서 성령을 힘입지 않고서는 불가능합니다. 우리의 의도적인 결단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새로운 삶을 살겠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부어 주시는 성령에 의해서, 계속해서 성령의 능력에 사로잡힐 때에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추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받으십시오. 성령의 능력을 힘입으십시오. 성령께서 나를 주장해 주시기를 시간마다 때마다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성령께서 일하실 수 있도록 삶의 자리를 비워주십시오.
그렇다면 궁극적으로 우리는 왜 이런 삶을 추구해야 합니까?
그 대답이 본문 7절에 있습니다.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에서 ‘상속자’라는 단어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는 것은 신앙생활의 출발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의롭다 함을 얻었다”는 것은 성화의 출발이지 끝이 아닙니다. “의롭다 함을 얻었기 때문에” 의롭다 함을 얻은 사람답게 그때부터 새로운 삶을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생의 소망을 따라, 즉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삶을 이루고자 하는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너무나도 영광스러운 것이 저 영광 속에 감추어져 있는데, 우리가 그것을 누리기에 합당한 상속자가 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 그 분은 우리에게 경건한 삶을 살도록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마지막 날 주 앞에 서서 영원한 천국에서의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는 이 땅에서 먼저 경건한 삶을 실천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록펠러의 자서전에 보면, 그가 한 번은 신문 기자와 인터뷰를 하면서 이런 질문을 받았다고 합니다. “당신의 재산을 후손들에게 남기기 위해서 당신이 그들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때 록펠러는 세 가지 사실을 강조했다고 합니다. “첫째, 나는 감사할 줄 아는 후손들에게 내 재산을 남기겠다. 둘째, 내 재산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남기겠다. 마지막으로 나는 내 후손들이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지금까지 훈련시켜 왔다.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이다. ….”
그렇습니다. 자비하신 하나님께서도 저와 여러분을 위해 영원한 기업을 준비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귀한 것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종종 우리 나라 사람들 가운데 잘 사는 분들이 전혀 훈련되지 않은 자녀들에게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거대한 재산을 그냥 물려줍니다. 그래서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 마냥 흥청거리다가 있는 재산을 다 탕진하여 넘어지는 재벌 2세들의 추한 모습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훈련시키지 않습니다. 우리로 상속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할만한 인격을 갖추게 하려고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를 부단히 훈련시키십니다. 때때로 손해도 보게 하십니다. 엄청난 손실도 입게 하십니다. 그러면서 부단히 우리의 인격을 쳐서 주님 앞에 복종시키시며 주님을 바라보도록 계속 훈련시키십니다. 그래서 진실로 영광의 날에 주님 앞에서 받을 기업을 누릴 만한 상속자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사회생활에서 일어나는 아주 작고 사소한 대인 관계도 영원한 천국에서의 상속자가 되게 하기 위한 훈련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훈련을 알아차리지 못한 순간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장차 저 영원한 기업을 누리며 하나님과 더불어 왕 노릇할 그 영광의 때에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어 그것을 감당할 수 있도록 주님께서 오늘도 나를 훈련시키십니다. 사람과의 대인관계 속에서, 내 직장에서, 신경질 나는 작은 사건을 통해서도 나를 그 분이 기뻐하시는 상속자가 되도록 훈련시키십니다. 여기에 주의 구원받은 모든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기대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곧 바로 저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지 않고 이 땅에 남겨두신 이유를 아십시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이 땅에서 경건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서 이후에 하늘나라에서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상속자로 세우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며 기다리는 저와 여러분, 우리는 경건한 삶을 살아서 하나님의 기대하심을 만족시켜드리며 영원한 기업의 상속자로 세워져 갈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