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마젤란선교사
페르디난드 마젤란. [F erdinand Magellan 페르디난드 마젤란(영)]
포르투갈 왕국 출신의 항해사로, 스페인에 귀화하여 국왕 카를로스 1세(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의 후원으로 최초의 세계 일주 항해에 도전한 모험가이다.
마젤란 본인은 중도에 필리핀 막탄 섬에서 사망하여 세계 일주 항해에 실패하였으나, 마젤란이 인솔하였던 함대가 세계 일주에 성공하였고 또한 마젤란이 그로부터 10여년 전에 동쪽으로 항해하여 필리핀에 도달했었다는 점 등을 감안하여 두 번에 나누어 하기는 했지만 처음으로 지구를 한 바퀴 돈 인물이므로 최초 세계 일주자로 간주되는 경우가 많다.
포르투갈의 하급 귀족 출신으로, 마누엘왕에게 출사하여 포르투갈령 인도 독부하로서 동남아시아에서 일하였으며, 아프리카· 인도 항로에 근무하였다(1504~1511). 이어서 11년 말라카에서 몰루카제도 무역의 정보도 입수하였다.
선배인 바르톨로뮤 디아스, 바스쿠 다 가마,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조반니 카보토(존 캐벗) 등과 더불어 대항해시대를 대표하는 모험가이자 항해자로, 사실상 대항해시대의 정점을 장식한 인물이다. 마젤란 이후 바다에는 모험가보다는 군인/해적, 선교사, 학자들이 득세하는 새로운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마젤란은 1480년 포르투갈 사브로자(Sabrosa)에서 태어나 아홉 살 때 부모님을 여의었다. 마젤란의 집안은 대대로 왕실과 연결되어 있어 마젤란은 12살 때 왕궁의 시종으로 발탁되었다.
포르투갈 무장상선대의 일원으로 향료제도 탐험에 종사하고, 아폰소 데 알부케르케의 부하로써 1511년에는 동남아시아의 요충지인 말라카 정복에 참가하기도 한 베테랑 항해자 겸 모험가 겸 군인이었다.
그러나 마젤란은 뛰어난 능력에도 모나고 차가운 성격으로 인해 적이 많아서 상관과 동료들과는 관계가 좋지못했고 늘 불화상태에 있었다. 그래서 항상 그들에게 심심찮게 모함당하는 신세였다. 거기에 1513년 모로코에서의 아자모르 전투 중, 무어 족의 진지를 공격하다가 무릎에 부상을 입어 상이군인으로 퇴역, 결국 포르투갈로 반강제적으로 귀환하여, 한동안 실업자 상태로 지내는 안습한 처지에 놓이기도 하였다.
포르투갈에 귀환한 후로는 아시아에서 자신이 구상한대로 대서양과 태평양(물론 이 때에는 아직 태평양이란 이름을 얻기 전이지만)을 가로질러 아시아의 향료 제도로 가는 모험 항해를 후원받기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결국은 실패. 그 모난 성격 탓에 국왕인 돈 마누엘 1세를 들이받는 기행을 벌인 끝에 1517년, 스페인으로 도주 이주하여 스페인 국적을 얻고 스페인 여자와 결혼하여 정착하게 되었다.
어렵사리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1세(훗날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를 알현한 마젤란은 현란한 프레젠테이션으로 카를로스 1세의 흥미를 끌 수 있었고, 결국 5척의 선박을 포함한 항해자금 전액 지원, 발견한 영토에 대한 총독 직위(마젤란이 '발견'한 영토의 크기를 생각해보자!) 약속, 항해 수익의 20% 분배 등 엄청난 조건으로 항해에 대한 승인을 얻어낼 수 있었다.
뒤늦게 정신차린 포르투갈 정부는 함대와 스페인 주재 영사까지 동원한 방해 공작을 펼쳐서 마젤란에게 포르투갈로의 귀환과 원정포기를 강요했다. 하지만 마젤란은 단호히 거절하고 1519년 9월, 스페인 함대를 지휘하여 세계 일주 항해를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아메리카와 자기가 경험한 동남아시아를 연결하는 계획을 세우고, 여기에 앙베르의 상인인 전주를 얻어, 국왕 카를로스 1세(뒤에 신성로마황제 카를 5세)의 특별한 허락을 얻어서, 1519년 8월 10일 서 항로로 몰루카제도에 갈 계획 하에 선박 5천과 승무원 270명으로 세비야를 출발하였다. 그는 목적지를 감춘 채 항해하여 12월 중순에 리우데자네이루에 닿고, 이듬
해 1월 라플라타강에 도착하여 이것이 해협이 아니라 강인 것을 확인하였다.
남하를 계속하여 20년 11월 28일 해협을 빠져나가 새로운 해면에 나갔다.
이것들을 ''파타고니아(마젤란) 해협'', ''태평양''이라고 명명하였다.
마젤란 해협의 혹독한 기후와 정 반대되는 고요한 태평양의 광경을 본 마젤란은 평화로운 바다라는 뜻의 'Mare Pacificum'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하지만 이후의 항해는 그야말로 '굶주림'과 '괴혈병'과의 사투... 세계지도의 태평양 부분을 보면 그래도 수백개의 섬들이 존재하고, 마오리족같은 비교적 발달한 원주민들이 거주하는 섬도 상당했지만 이들이 지나간 항로에 섬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 마젤란, 라푸 라푸 부족과의 전투장면
1521년 마젤란은 필리핀의 막탄 섬에 상륙해 현지 원주민과 교류해 식량과 물을 공급받고 가톨릭을 전파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이게 무척 어려웠는데 일단 이미 필리핀에는 이슬람교를 선교하러 온 인도인 및 아랍인 이슬람 선교사들의 영향으로 몇 백년전부터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마젤란을 전사하게 만든 라푸 라푸 부족왕도 무슬림이었고, 이 지역에는 오늘날의 민다나오에서 말레이시아 사바 주의 북부에 이르는 술루 술탄국이라는 이슬람교를 국교로 하는 나라도 있었다. 비단 필리핀 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의 도서 지역에서 이슬람교는 상당히 널리 전파되어서 앞서 마젤란이 고문관으로 재직했던 트르나테도 이슬람교를 국교로 하는 나라였다.
그 과정에서 포르투갈의 방식을 따라, 지역 통치자와 친밀관계를 형성하고 그의 정적을 제거함으로써 지역의 호응을 얻고자 하였다. 그래서 우선 세부 섬에서 부족 통합국을 다스리던 국왕 라자 후마본과 의형제 관계를 형성하고, 막탄 섬 지배를 두고 경쟁하던 막탄 섬 부족연합국 왕인 라푸라푸(Lapu-Lapu)를 죽이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마젤란은 그들이 별거 아닌 야만족이니 쉽게 이길 것이라고 오판하였고, 제대로 된 정보도 없이 스페인인 49명과 세부인 200~300명이라는 소수 병력만 이끌고 막탄 섬으로 쳐들어가 막탄 섬에서 부족들을 다스리던 부족왕 라푸 라푸를 죽이려 했고 라푸 라푸가 쫄아서 100명 남짓한 수 밖에 안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런 점도 있지만 부하들이 아무래도 불안하니 더 많은 병력을 데려가려고 충고했는데 산호초나 여러가지 환경 때문에 도저히 스페인 원정대 배가 막탄 섬에 다가갈 수 없었던 점이 큰 원인 중 하나였다. 때문에 병력을 조금 데려갔다. 게다가 대포를 챙기지 않았고 약간의 화승총만 챙겼으며 그나마 총알과 화약과 화살조차도 조금만 챙겨간 것도 화근이었다.
소수 병력을 이끌고 막탄 섬으로 쳐들어오니 바닷가에서부터 마젤란의 예상과 달리 준비되어 있는 1,500여명의 부족 전사들과 맞닥뜨리고 만다.
결국 병력 수와 무장, 지리적에서도 불리한 이들은 압도적인 수의 라푸라푸 군대에게 참패했고 마젤란은 스페인인 부하 14명, 세부인 지원군 150명과 함께 살해당했다.
그러나 마젤란이 이끌던 선박들은 항해를 계속해 결국 세계 일주에 성공했다. 물론 그들이 수월하게 나머지 일정을 마친 것은 절대 아니다.
마젤란 여정.
* 1519 - 마젤란은 5척의 배와 270명의 선원을 대동하고 세계일주 여행을 시작.
* 1521 - 마젤란은 필리핀 원주민에 의해 5월 27일 살해당함.
* 1522 - 9월 6일 마젤란의 선원 중 18명과 배 1척만이 귀환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