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정조) - 즉위년 4월11일
어이무사10 ・ 2020. 5. 6. 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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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실록1권, 정조 즉위년 4월 11일 임자
◆ 대행 대왕의 산릉을 정하고 능 이름을 원릉으로 정하다
대행 대왕의 산릉(山陵)을 정하고, 능 이름을 원릉(元陵)으로 의논하여 올렸다. 산릉을 처음에는 홍릉(弘陵)으로 정했다가 다시 소령원(昭寧園)의 국내(局內)를 살펴보았는데 의논이 일치되지 않으므로, 여러 차례 대신과 예조 당상을 보내어 두루 여러 곳에서 찾아 보게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옛 영릉(寧陵)이 완전한 길지(吉地)인 것으로 말하는 사람이 있으므로, 영의정 김양택(金陽澤)·좌의정 정존겸(鄭存謙)·판중추부사 김치인(金致仁)과 이은(李溵)·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과 상지관(相地官) 김기량(金基良)·김전(金田)·유동형(柳東亨)·김상현(金尙鉉) 등을 여차(廬次)에서 소견하고 두루 각자의 의견을 물으니,
김양택과 이은이 말하기를,
"이미 증험해 본 땅이 마치 기다리고 있은 듯합니다."하고,
정존겸이 말하기를,
"영릉을 옮겨 모실 때에 한 대오의 사람들이 종실(宗室)을 종용하여 상소에서 ‘더없이 중요해야 할 자리에 틈이 있다.’고 했었고,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의 상소에서도 ‘석회가 굳게 엉키어 있어 크고 작은 도끼가 서로 부딪치므로, 신의 마음이 애통스러우며 마치 도끼가 가슴에 떨어지는 것 같았다.’는 말이 있었습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도 또한 문충공(文忠公) 민진원(閔鎭遠)의 주의(奏議)를 보고 대략 마음속에 헤아려지는 바가 있었다."하였다.
김기량이 말하기를,
"옛 영릉 자리의 체세(體勢)는 건원릉(健元陵)과 차이가 없습니다. 또한 국세(局勢)가 비록 건원릉이 주가 되기는 하지만 정간(正榦)의 정신은 모두 여기에 있습니다."하였고,
유동형이 말하기를,
"불암산(佛岩山)의 정간의 면목이 모두 이곳을 향하고 있으니, 진실로 완전한 대지(大地)입니다."하였으며,
김상현이 말하기를,
"온 국(局) 안의 원기가 모두 이 곳에 모여 있습니다. 산을 보아 온 지 50년이지만 이와 같은 길지는 보지 못했습니다. 옛 광(壙)이라도 또한 꺼릴 것이 없습니다."하니,
대신 이하가 봉심하도록 명했었는데,
복명(復命)에 당하여 똑같은 말로 칭찬하여 아뢰었다.
이 날에 이어서 대신과 비국 당상들을 소견하여 두루 물었는데
여러 신하들이 이의가 없으므로, 이어 능을 결정하고 명칭을 의정한 것이었다.
◆ 김상철을 의정부 좌의정, 정존겸을 우상, 황경원을 의정부 좌참찬으로 삼다
다시 김상철(金尙喆)을 제배하여 의정부 좌의정으로 삼았으니,
정승의 자리가 갖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거듭 복상(卜相)하여 정존겸(鄭存謙)의 서열을 낮추어 우상으로 삼고,
황경원(黃景源)을 의정부 좌참찬으로 삼았다.
◆ 김귀주의 상소에 비답하고, 김치인의 차자에 비답하다
초토신(草土臣) 김귀주(金龜柱)가 상소하기를,
"근일의 여러 상소 중에 병술년100) 인삼의 일은
곧 선신(先臣)의 지사(志事)에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이어서 김치인(金致仁)의 차자(箚子)를 살펴보건대
그의 말은 모호하게 말이 많고 사실을 희미하게 하여
진실로 생각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었습니다.
대개 선신이 순전히 나삼(羅蔘)만 사용하자는 말을
2월 25일 성후(聖候)가 더 심하여져 약원에 이직(移直)하던 때에 처음으로 하였고,
바로 3월 19일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얻어서 쓰게 되었으니,
그 사이가 수십여 날입니다.
선신이 의관으로 하여금 도제거(都提擧)에게 의논하여 한 것도
한두 차례일 뿐만이 아니고,
그때 주고받은 말은 단지 선신이 대신으로 하여금
그런 의논을 극력 주장하게 한 것만이 아니라
대신도 또한 선신이 저들에게 말을 하도록 권유했던 것입니다.
비록 지금 시일이 조금 오래 되었다고는 하지만
이것이 어찌 잊어버릴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시급히 자세하게 사정을 사핵하도록 명하시어,
선신의 영혼이 지하에서 유감이 없게 해주소서."하니,
비답하기를,
"경의 상소에 인용한 바는 대신의 차자와는 동떨어진 것이다.
내가 의아하게 여기는 것은 대신이 어찌 혹시라도 사실과 틀리게 차자를 진달하고,
경 역시 어찌 혹시라도 선신의 말을 잘못 인용했겠는가 하는 점이다.
내가 둘 다 옳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사핵하기 어려운데 어찌할 것인가?"하였다.
판중추부사 김치인이 차자를 올리기를,
"김귀주의 소본(疎本)에 장황하게 나열하여
바로 신(臣)을 모호하게 말이 많고 사실을 희미하게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아! 어찌하여 말을 쉽사리 하는 것입니까?
그의 상소에 신을 겸지(拑持)하려고 한 것이 하나가 아닙니다마는,
의관이 왕복한 일에 있어서 그런 일이 없었던 것으로 말하지 않았으니,
다행히도 신이 기억하고 있는 바가 틀리게 되지는 않았거니와,
다만 그 왕복한 날짜나 참작하여 사용한 분량에 있어서는
신의 아주 어두운 정신과 생각을 가지고
어찌 능히 이런 것까지 자세하게 기억할 수 있겠습니까?
‘면언(面言)하였다…….’라고 한 것에 있어서는
신의 차자에 이른바 ’차이(差異)’는
특히 그 기억하고 있는 바가 의관이 왕복한 것에만 있었기 때문이다.
돌이켜 그때의 사세를 생각해 보건대
지척 사이에 함께 입직하여 만나 본 것이 이미 빈번하였으니
응당 주고받은 말이 있었을 것입니다마는,
기억하지 못하는데 어찌하겠습니까?"하니,
비답하기를,
"경이 잊어버리고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연석(筵席)에서 아뢸 적에 이미 다 말을 했었는데,
다시 이렇게 진달하는 것인가?
경이 어찌 지나치게 사직하는가?"하였다.
◆ 홍봉한을 돈화하고 온화한 하유를 내린데 대한 정이환의 상소에 비답하다
공조 참판 정이환(鄭履煥)이 상소하기를,
"어제 삼가 홍봉한(洪鳳漢)을 돈소(敦召)하시어
온화한 하유를 부지런하고 진지하게 하여 재촉해서
도성(都城)으로 들어오도록 하신 것을 보건대,
신이 더욱 놀랍고 의구심이 간절해졌습니다.
전하께서 분명하게 그가 공론에 용납되지 못할 것을 알고 계시면서도
다만 그가 척속(戚屬) 이라는 이유로 차마 죄를 가하지 않으셨고,
다만 죄를 가하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또한 하유하고 돈소하기를
마치 죄가 없는 사람에게 하는 것처럼 하셨습니다.
아! 은혜로 법을 굽히는 것은 《춘추(春秋)》 정명(正名)의 의리가 아니고,
사(私) 때문에 공(公)을 덮는 것은
성인들이 천도(天道)를 본받아 행하는 법도에 흠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오늘날 뭇 신하들이
요(堯)·순(舜)같은 성상께 앙망(仰望)하는 바이겠습니까?"하니,
비답하기를,
사(私)’라는 한 글자는 진실로 대성인이 아니고서는
어찌 자유롭게 벗어날 수 있는 것이겠는가?
내가 스스로 힘쓰고 있는 것도 하나의 ‘사’ 자를 극복하여
기어코 말끔히 정화된 경지에 이르게 되기를 바라서인데,
지금 경이 ‘흠이 있게 된다.’라고 하니,
경이 혹시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힘쓸 것이 없는 도리에 있어서도
또한 바야흐로 반성하여 허물이 없게 한다.’라고 한 것은
유독 성인의 말씀이 아니겠는가?
경이 이렇게 가버리는 것은 진실로 써 주지 않으면 떠나간다 는
("‘써 주지 않으면 떠나간다 : 《맹자(孟子)》 공손추(公損丑) 하(下)에 지와(蚳䵷)가 임금에게 간하였으나
그 말을 써 주지 않자, 벼슬을 버리고 떠나간 일을 말함.)
의리에서 나온 것임을 알겠거니와,
나의 뜻이 이러한데도 경이 어찌 그리 돌아보지 않는가?"하였다.
이때에 홍봉한을 돈소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정이환이 상소하고서 고향을 찾았다.
●김상철(金尙喆)
김상철(金尙喆, 1712년 ~ 1791년)은
조선 충청도 관찰사 등을 거쳐 조선 영의정 겸 대리집정공 직책을 지낸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자(字)는 사보(士保), 호(號)는 화서(華西)이며 본관은 강릉이다.
지평, 교리, 충청도관찰사, 장령, 헌납, 감찰, 정언, 집의,
이조참판, 병조참판, 형조참판, 예조참판,
한성부우윤, 한성부좌윤, 한성부판윤,
대사간, 대사헌, 도승지,
이조판서, 예조판서, 병조판서, 형조판서, 공조판서,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 등을 지냈다.
우의정을 세 번 지냈고, 좌의정을 다섯 번 지냈으며, 영의정을 세 번 지냈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가족 관계
고조부: 김선여(金善餘)
증조부: 김득원(金得元)
할아버지: 김홍주(金弘柱)
아버지: 김시혁(金始爀)
어머니: 이기정의 딸
부인: 이요흠(李堯欽)
아들: 김우진(金宇鎭)
자부: 윤득양의 딸
경기도 연천 김상철의 묘
觀察使 金 相國 尙喆 永世不忘碑(관찰사 김 상국 상철 영세불망비):경상도 관찰사 김상철을 긴 세대동안 잊지 않는 비.
觀察使 李 相公 秉模 永世不忘碑(관찰사 이 상공 병모 영세불망비):경상도 관찰사 이병모를 긴 세대동안 잊지 않는 비.
上之 十年 丙午 五月 日 安奇驛民(상지 십년 병오 오월 일 안기역민):1786년 음력 5월에 안기역민이 새김.
안동시 성곡동 "관찰사 김상철,이병모 영세불망비(觀察使 金尙喆,李秉模 永世不忘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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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조선왕조실록 (정조) - 즉위년 4월11일|작성자어이무사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