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피니스트 비망록
대한민국의 흔한 바위꾼 김용기씨
본능과 열정, 내 DNA에 흐르는 수직의 유전자
글 곽정혜 기자 사진 신희수 기자·김용기 제공
산력으로 치면 30년 이상, 평균연령 60세 전후인 국내 클라이머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레퍼토리가 겹칠 때가 많다. 젊은 시절 ‘우연히’ 접하게 된 산에 영혼을 빼앗겨 청춘을 바쳤고, 간혹 이것저것 여러 취미에 손 대봤으나 산처럼 깊이 빠져들지 못했으며, 이제 와 뒤돌아보니 남은 건 산 뿐이더라는. 국내 프리 클라이밍의 일인자로 손꼽히는 김용기(61세)씨 또한 레퍼토리를 놓고 보자면 그 범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흔한’ 산꾼 중 한 명이다. 하지만 감히 흔하다고 치부해버리기에는 그가 산악계에 남긴 발자국이 너무나도 뚜렷하다. 시작은 비록 미약하였으나, 그가 걸어온 길은 이미 심히 창대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중’이라고 말하지 않는 이유는, 그가 “아직까지는 바위에서 추락하는 것보다 후등이 더 두렵다”고 말하는 현역 클라이머이기 때문이다.
![0001(김용기씨는 아직도 한번 줄을 묶으면 적어도 세 코스 이상은 해야 직성이 풀리고, 오버행이든 트래버스든 어느 코스에서도 옛날 하던 가락 그대로 펄펄 나는 모습이다.) 0001(김용기씨는 아직도 한번 줄을 묶으면 적어도 세 코스 이상은 해야 직성이 풀리고, 오버행이든 트래버스든 어느 코스에서도 옛날 하던 가락 그대로 펄펄 나는 모습이다.)](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n121.ndsoftnews.com%2Fnews%2Fphoto%2F201401%2F5474_1.jpg)
나를 키운 팔 할은 인수봉과 선인봉
세계에서 유일하게 대도시에 위치한 독립 암봉이라는 인수봉이 국내 산악계에서 갖는 의미는 대단히 크다. 높은 산이 없고 암벽 등반 자체가 뒤늦게 시작된 우리나라에서 인수봉은 단연 돋보이고 기록될 만한 암벽대상지였고, 이른바 근대 산악운동이 이곳에서부터 태동했기 때문.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인수봉은 ‘자유등반의 요람’으로 불리며 클라이머들의 놀이터이자 마음의 고향이 되어왔다. 수도권 출신의 산꾼 거개가 “인수봉을 본 후 운명처럼 산에 빠져들었다”고 입을 모으듯, 김용기씨 또한 젊은 시절 고고한 인수봉의 모습을 본 후 홀린 듯 산을 탐닉하기 시작했다.
“농부의 아들딸들이 다 그렇듯이 나에게 산은 그저 땔감을 구하거나 친구들과 뛰어놀던 생활의 터전이었는데, 서울에 와서 보니 사람들이 배낭을 메고 산에 놀러 가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생계가 아닌 유희로 산을 타기 시작했죠.”
전북 정읍 출신인 그는 고등학교 졸업 후 돈을 벌기 위해 상경했고, 서울생활에 익숙해지자 1974년 무렵부터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등산을 나서게 되었다. 처음 1~2년간은 서울 근교의 산을 워킹 위주로 다녔는데, 어느 날 북한산 백운대에 올랐다가 건너편의 인수봉에서 하강하는 클라이머를 보고 눈이 번쩍 뜨였다. 순간, 그는 예감하게 된다. 막연히 찾아 헤매던 무언가, 끓어오르는 젊음을 발산할 수 있는 해방구가 그곳에 있다는 것을.
그는 다음날 당장 바위를 가르쳐 줄 사람을 수소문해 박계상·오선영씨를 만났다. 무당골 곰바위에서 그들에게 1시간을 교육받은 후 바로 펜듈럼(로프에 시계추처럼 매달려 옆 방향으로 이동하는 기술)을 성공해버렸다. 그 다음 주말, 매듭법은 커녕 장비의 이름조차 제대로 모르던 그는 오전에 인수봉 ‘취나드B’ 코스를 후등으로 등반한 뒤 오후에 바로 선등으로 ‘의대길’에 붙었다. 고도와 추락에 대한 공포가 엄습했지만, 그것을 이겨낼 수 있을 정도의 열정과 스스로 ‘해낼 수 있다’는 자심감이 더 컸다. 이날 이후 그는 지금까지 30년이 넘도록 선등만을 고집해오고 있다.
그 다음 주에는 선인봉으로 가 정통 코스인 ‘물개’ ‘박쥐’ ‘표범’을 하루에 해치웠다. 정확한 길을 몰라 보이는 대로 올랐으니, 요즘으로 치면 변형 루트를 개척한 셈.
“눈앞에 보이는 볼트만 보고 갔으니 길 이름도, 몇 피치인지도 몰랐어요. 마구잡이로 오른 탓에 다른 팀에게 욕을 얻어먹기도 하고, 인심 좋은 사람들에게 즉석에서 루트에 대해 코치를 받기도 했죠. 당시 악우회에서 펴낸 <한국의 암벽>이라는 암벽 가이드북이 있었는데, 실전에서는 조금 부족하게 느껴졌어요. 그래서 내가 정확한 암벽 가이드북을 만들겠다는 생각을 막연하게 했던 것 같아요.”
인수봉과 선인봉의 모든 루트를 섭렵한 이후 김씨는 약 6년여 동안 전국의 암벽을 순례했다. 당시 산악회의 분위기는 매우 엄격해, 회원 가입을 해도 몇 년 동안 치다꺼리(일명 딱갈이) 생활을 해야 겨우 암벽을 배울 수 있었다. 그런 산악회의 분위기가 성미에도 맞지 않을뿐더러 빨리 암벽을 배우고 싶은 열정 때문에 그는 독학을 하며 몸으로 암벽을 익혀 나갔다. 주말 뿐 아니라 주중에도 꾸준히 등반을 했고, 야영장에서 눈을 뜨자마자 바위에 붙어 적어도 하루에 대여섯 개 이상의 코스를 등반해야 직성이 풀렸다.
전국 암장 순례를 거의 마친 후 1982년에 박계상, 오선영씨 등과 함께 MC산악회(Mountain Climbing Alpine Club)를 창립했다. 그가 뒤늦게나마 산악회를 만든 건 후배가 생기면 리드를 해주어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 여러 개의 산악회를 전전하면 협동심과 신뢰가 떨어진다는 생각에 그는 지금까지 MC산악회에만 몸담고 있으며, 현재 명예회장직을 맡고 있다.
![0002(설악산 대승폭을 오르고 있는 모습. 그는 1994년에 설악의 4대 빙폭이라고 부르는 토왕폭, 대승폭, 소승폭, 국사대폭을 하루 만에 오른 바 있다.) 0002(설악산 대승폭을 오르고 있는 모습. 그는 1994년에 설악의 4대 빙폭이라고 부르는 토왕폭, 대승폭, 소승폭, 국사대폭을 하루 만에 오른 바 있다.)](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n121.ndsoftnews.com%2Fnews%2Fphoto%2F201401%2F5474_2.jpg)
오로지 몸으로 배우고 익힌 암벽·빙벽 등반 기술
본능과 열정. 그의 암벽 인생을 지탱해준 가장 큰 무기는 이 두 가지였다. 아무것도 모르고 오로지 본능에 의지해 몸으로 부딪쳐가며 바위를 독학으로 배운 그에게 빙벽이라고 다를 바가 없었다. 1985년의 겨울, 그는 동대문시장에서 아이젠과 피켈을 사서 무작정 운악산 무지개폭포로 향했다. 1년간에 걸쳐 대둔산에 ‘MC로드’ A와 B 두 개의 암벽루트를 개척한 직후였다.
“원래 후배를 등산학교에 보내 빙벽을 배워오라고 했는데,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후 산악회에 안 나오더라고요. 그렇다고 내가 늦은 나이에 등산학교에 갈 순 없고 해서 그냥 무작정 장비를 사서 빙폭으로 간 거죠. 그때 산 아이젠이 샤를레모제 제품이었는데, 끈 묶는 법도 몰라서 한 시간이나 걸렸어요. 하지만 빙벽은 너무 쉽게 올라서 허무할 정도였죠.”
빙벽에 자신감이 생긴 그는 다음 주에 바로 강촌 구곡폭포로 향했다. 한 손에는 허밍버드 튜브형 피켈을, 다른 한 손에는 모래내금강의 우드 피켈을 들고서. 하지만 구곡폭이 워낙 청빙인 탓에 중단쯤에서 우드 피켈의 피크가 부러져 버렸고, ‘고’도 ‘백’도 할 수 없었던 그는 스텝커팅으로 오르느라 진땀깨나 흘려야 했다.
구곡폭까지 섭렵한 그가 눈을 돌린 곳은 당연히 토왕폭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의 토왕폭은 클라이머라면 누구나 꿈꾸는 거대하고 어려운 빙벽이었다. 하지만 그는 첫 등반에서 4시간 반 만에 토왕폭을 올랐고, 1990년에는 파트너인 이상록씨와 함께 1일 3회 연속 등반과 1시간 45분이라는 최단시간 기록을 경신했다. 1994년에는 설악산의 4대 빙폭이라고 부르는 토왕폭, 대승폭, 소승폭, 국사대폭을 하루 만에 올랐다. 정확히는 장비를 모두 짊어지고 이동하는 데까지 19시간 57분이 걸렸다. 신들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의 빙벽 실력은 나날이 정점으로 치달았다.
“바위보다는 정신과 동작이 더 과감한 빙벽이 제 스타일에 맞는 것 같아요. 바위에서는 몇 번 추락한 적이 있는데, 얼음에서는 지금까지 한 번도 추락한 적이 없어요.”
한편, 1980년대에 유럽 일대에서부터 시작된 프리 클라이밍(free climbing·인공확보물에 의지하지 않고 손과 발만을 사용해 오르는 등반방식)이 80년대 말에 국내에도 소개되며 몇몇 클라이머들에 의해 시도되었다. 김씨는 이에 대해 처음에는 매우 회의적이었으나, 곧 그 매력을 알게 되어 프리 클라이머로 전향하게 된다. 등반대회 또한 마찬가지. 1980년부터 대한산악연맹 주관으로 암벽경기대회가 열렸으나, 등반으로 등수를 매긴다는 걸 ‘웃기는 짓’으로 치부해버리던 그였다. 하지만 프리 클라이밍으로 전향한 뒤 자연스레 스포츠클라이밍대회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러다보니 클라이밍 대회에도 출전하게 되었다.
그의 첫 출전은 1988년 월출산에서 열렸던 제8회 암벽경기대회였다. 선수로는 다소 늦은 나이인 37세였지만, 그는 쟁쟁한 실력자들 사이에서 당당히 3위에 입상했다.
“당시에도 인수봉 일대에서는 조금 유명세를 타고 있었지만, 그 대회로 전국적으로 이름을 알리게 되었어요. 특히 전국 중장년층에 클라이밍 붐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죠.”
등반기량이 절정에 치달았던 1997년에는 설악산 토왕폭에서 열린 전국빙벽대회에 출전에 우승했고, 이후 1999년까지 3년 연속 챔피언 자리를 내놓지 않았다. 그러자 주최측에서 “제발 그만 나와 달라”는 요청이 들어오기도 했다. 국내에서는 더 이상 적수가 없자 그는 무대를 세계로 넓히기로 했다.
![0003(미국 라스베이거스 레드락 등반. 그도 한때는 고산등반을 꿈꿨지만, 고소증 때문에 기량을 다 발휘할 수 없어 흥미를 잃고 이후 하드프리 등반에 더 집중했다고 한다.) 0003(미국 라스베이거스 레드락 등반. 그도 한때는 고산등반을 꿈꿨지만, 고소증 때문에 기량을 다 발휘할 수 없어 흥미를 잃고 이후 하드프리 등반에 더 집중했다고 한다.)](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n121.ndsoftnews.com%2Fnews%2Fphoto%2F201401%2F5474_3.jpg)
월드컵 대회 출전, 국내 아이스클라이밍 대회 개최
2000년, 그는 국제산악연맹(UIAA) 아이스클라이밍 월드컵 시리즈에 출전했다. 유럽 6개국을 돌며 열린 대회 중 첫 3개 대회인 오스트리아, 프랑스, 이탈리아 대회에 나간 것. 당시 유럽의 선수들은 대회용으로 특별 제작한 커브형 샤프트의 아이스툴을 사용했지만, 이를 알 리 없는 그는 일자형 바일을 들고 출전해 오스트리아 대회에서 난이도 20위, 속도 10위라는 성적을 거두었다.
“대회가 끝난 뒤 나의 경기모습을 눈여겨 본 프랑스 장비 업체 시몽(Simond)사에서 후원을 하고 싶다며 찾아왔어요. 시몽사에서 장비 협찬을 받아 그 다음 프랑스 대회에서는 공동우승을 하고 속도 부문에서도 9위를 차지했죠. 하지만 볼더링 형식으로 치러진 이탈리아 대회에서는 적응을 못해 예선 탈락을 하고 말았어요. 그래도 최선을 다해 할 만큼 했고, 후회하지 않을 만큼 값진 결과도 얻었어요.”
그는 6개 대회 중 3개만 출전했을 뿐이지만 종합순위에서 90여 명 중 22위에 올랐고, 그해 월드컵에서 VIP 선수로 선정되기도 했다. 처음 출전한 국제대회에서, 그것도 비유럽권 선수로서 일궈낸 괄목할 만한 결과였다. 이처럼 그가 국내외의 각종 등반경기에 참가할 때마다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숱한 시행착오를 겪으며 기술 하나하나를 몸에 익히기 위해 흘린 피땀에 대한 보상이었다.
유럽에서 많은 것을 보고 듣고 경험하고 돌아온 그는 이듬해인 2001년에 강촌 구곡폭포에서 제1회 에델바이스배 빙벽대회를 개최했다. 기존의 빙벽대회 방식과 달리, 손목 고리를 사용하지 않고 식용 페인트가 칠해진 루트로만 등반을 해야 하는 프리 클라이밍 방식이 처음으로 선보였다. 1천만 원 상당의 상금이 걸리기도 했던 이 파격적인 대회는 당시 전국의 클라이머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고, 그는 2003년까지 3년간 대회를 맡아 진행했다.
“현재 국내에서 행해지고 있는 빙벽기술 중에는 내가 개발한 것들이 많아요. 일명 ‘개구리자세’라고 부르는 프리 바디(free-body)에서부터 대각선 타격, 두 발 떼기 등이 그것들이죠. 어찌 보면 국내 경기 등반의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고도 말할 수 있죠.”
이처럼 등반에 관해서라면 거의 경지에 오른 수준이었지만, 그의 프로필에는 산악인이라면 으레 몇 줄씩 가지고 있는 고산등반 경력이 단 한 줄도 없다. 해외 등반은 요세미티 세 번과 알프스 최고봉 몽블랑 한 번이 전부다.
“저도 한때는 고산등반을 꿈꾼 적이 있어요. 그래서 90년대 중반에 알프스를 갔는데, 고소증 때문에 내 기량을 다 발휘할 수가 없으니 재미가 없더라고요. 그때 고산은 내 스타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하드프리 등반에 더 집중하게 된 거였죠.”
이후 그는 더 열성적으로 바위와 빙벽에 매달렸고, 지금까지 국내 최고수의 자리를 지켜오고 있다. 뿐만 아니라 등산교육과 함께 등반기술서 및 가이드북 집필까지 하며 자신이 힘들게 체득한 기술들을 후배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0004(미국 요세미티 노즈 제24피치에서 좌로부터 김홍례 김용기 이지민. 아내 이지민씨는 그의 수제자이자 가장 믿음직스러운 등반파트너다.) 0004(미국 요세미티 노즈 제24피치에서 좌로부터 김홍례 김용기 이지민. 아내 이지민씨는 그의 수제자이자 가장 믿음직스러운 등반파트너다.)](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n121.ndsoftnews.com%2Fnews%2Fphoto%2F201401%2F5474_4.jpg)
책임감과 사명감으로 등반기술서 및 암장 가이드북 출간하기도
처음으로 출전했던 88년 클라이밍대회는 김씨에게 두 가지의 기회를 가져다주었다. 첫째는 당시 그를 인터뷰했던 모 산악잡지로부터 클라이밍 기사 연재를 제의받은 것, 두 번째는 코오롱등산학교 강사가 된 것이었다. 첫 기회인 잡지 연재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1996년에 <실전 암벽빙벽 등반>을 출간했다.
“내가 원래 책 읽고 공부하는 건 질색인 사람이에요. 하지만 후배들은 나처럼 힘들게 산에 다니게 하면 안 된다는 책임감 때문에 책을 내게 된 거죠. 책에 소개된 기술들은 제가 몸소 체험한 내용을 그대로 담았고, 글보다는 사진을 통해 설명하는 게 낫겠다 싶어서 사진을 많이 넣었어요. 그것도 올컬러로. 책과 함께 영상물도 만들어 판매했어요. 당시로선 상당히 획기적인 발상이었죠.”
이후 그는 기술서도 필요하지만, 전국에 퍼져있는 암벽 대상지와 그곳에 개척된 수천 개의 루트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생각만 있을 뿐, 방대한 자료와 취재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때마침 잡지사에서 다시 연재 제의가 들어왔고, 그것을 계기로 전국 암장 순례를 시작해 2004년에 <한국암장순례 중부권·남부권>을 출간했다. 그 작업은 1997년 대구 학바위에서 시작해 2004년 2월 인수봉의 새 루트에 이르기까지 총 6년 5개월이 걸렸다. 등반과 사진 촬영, 개념도 작업에 글 쓰는 것까지 1인 4역을 해야 했지만, 그 긴 세월동안 단 한 달도 연재를 거른 적이 없었다.
“쉽지는 않았지만, 암벽등반을 하는 이들에게는 꼭 필요한 기본 자료이기 때문에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을 내가 한다는 사명감으로 버텼습니다. 다소 미흡하나마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정보가 될 테고, 훗날 누군가가 더 완벽한 책을 만든다면 디딤돌이 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때 그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훗날의 누군가가 다시 본인이 되리라는 것을. 2004년 이후 전국에 900여개에 가까운 루트가 다시 우후죽순 생겨났고, 때문에 개정증보판의 필요성이 커졌다. 그래서 2007년부터 다시 전국을 돌아다니기 시작했고, 4년간의 답사 끝에 2011년 말 원고를 완성, 이후 편집 및 개념도 작업에 1년 가까운 시간을 투자해 2012년 11월에 <한국의 암벽>을 펴냈다. 전 5권으로 구성된 책은 전국 72개 산, 290여 개의 암장에 개척된 3,400여 개의 루트를 총망라하고 있다. 그간의 노력을 인정받아 2005년과 지난해에 대한민국산악상 시상식 산악문화상을 두 차례 수상하기도 했다.
![0005(전 5권으로 구성된 한국의 암벽은 전국 72개 산 290여개 암장에 개척된 3400여 루트를 총망라하고 있다.) 0005(전 5권으로 구성된 한국의 암벽은 전국 72개 산 290여개 암장에 개척된 3400여 루트를 총망라하고 있다.)](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n121.ndsoftnews.com%2Fnews%2Fphoto%2F201401%2F5474_5.jpg)
이제부터는 진정한 내 등반 인생 찾을 것
등산교육 또한 후배 양성에 대한 책임감과 사명감으로 시작한 일이다. 1989년부터 시작한 코오롱등산학교 암벽반과 빙벽반 대표강사를 맡았던 그는, 등반교육은 이론보다 실전을 위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2001년에 자신의 이름을 딴 ‘김용기등산학교’를 열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평소 철학 때문에 등산학교를 시작하며 그가 가장 신경을 쓴 부분이 바로 홈페이지(www.kimcs.com)였다.
“등산학교 시작하기 1년 전인 2000년부터 홈페이지를 구축하기 시작했어요. 무조건 사진을 많이 보여주겠다는 생각으로 서버 용량을 최대로 잡고, 모든 사진을 컬러로 스캔 받아 올렸어요. 홈페이지 만드는 데 당시 제가 가진 돈 3천만 원을 쏟아 부었어요. 주변에서 ‘미친놈’ 소리도 들었죠.”
그렇게 등산학교 문을 열고 첫해에는 1년 과정으로 잡아 자신의 모든 등반 노하우를 전수했다. 그랬더니 처음 입교 때에는 하네스도 제대로 못 차던 이들이 늦가을에는 웬만한 곳에 톱을 섰고, 겨울에는 토왕폭까지 도전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건 너무 문제가 있다 싶어 이후로는 5주 과정으로 일 년에 4차례 운영했다. 처음 등산학교 강사를 시작한 1989년부터 올해까지 25년간 그가 배출한 교육생이 어림잡아 3천 명에 이른다.
![0006(김용기씨는 아예 우이동으로 이사해 일주일에 2~3일은 인수봉에 오른다. 날씨가 추운 요즘은 일주일에 한 번 인공암장에서 운동한다.) 0006(김용기씨는 아예 우이동으로 이사해 일주일에 2~3일은 인수봉에 오른다. 날씨가 추운 요즘은 일주일에 한 번 인공암장에서 운동한다.)](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n121.ndsoftnews.com%2Fnews%2Fphoto%2F201401%2F5474_6.jpg)
그런 그의 수제자이자, 가장 믿음직한 등반파트너는 다른 누구도 아닌 아내 이지민씨. 그녀는 산에 미친 남편 뒷바라지만 하다가 두 아들이 고등학교를 마칠 즈음인 1997년부터 등반을 시작했다. 최고의 클라이머이자 강사인 남편을 따라 전국의 암벽을 섭렵한 이씨는 웬만한 곳은 선등으로 오를 수 있는 5.11급 클라이머로 성장했고, 90년대 말~2000년 초에는 남편과 함께 등반대회에 나가 상위입상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김용기등산학교 창립 때부터 지금껏 강사로 활발하게 활동해오고 있다.
2008년 우이동으로 이사를 한 부부는 일주일에 2~3일은 인수봉에 오른다. 날씨가 추워진 요즘은 주변 지인들과 함께 겨울에도 등반을 할 수 있는 선운산 등지로 등반을 가고, 일주일에 하루는 시내에 있는 인공암장에 나가 하루 종일 운동을 한다. 기자가 김용기씨를 만난 날이 마침 그날이었다.
“사실 집사람이 작년에 갑자기 아파 수술과 치료를 하느라 정신이 좀 없었어요. 최근에 항암치료를 끝내고 조금씩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집사람 몸이 회복되면 얼음이든 바위든 좋은 곳을 찾아 함께 외국으로 등반여행을 떠날 생각입니다. 이젠 나의 등반 인생을 찾고 싶어요.”
책을 출간하고 난 후 마음의 부담을 한 짐 덜었다는 그는 이제 단순하게 즐기면서 재미있게 등반을 하고 싶어 작년부터는 등산학교도 일 년에 한 번만 열고 있다. 또한 2003년부터 운영해온 종로5가의 아웃도어 매장 두 곳은 이미 두 아들에게 경영권을 넘겨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꿈꾸는 자는 늙지 않는다고 했던가. 인터뷰 도중에도 기자에게 양해를 구하고 인공암벽에 매달리는 그는 환갑이 넘은 사람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힘이 넘쳤다. 아직도 한번 줄을 묶으면 적어도 세 코스 이상은 해야 직성이 풀리고, 오버행이든 트래버스든 어느 코스에서도 옛날 하던 가락 그대로 펄펄 나는 모습이었다.
인터뷰 중 그는 본인이 다소 늦은 나이에 바위를 시작하고 대회에 나갔기에, “중장년 클라이머들이 나를 보고 희망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말했었다. 예전의 그가 중년 클라이머의 가슴에 불을 지폈었다면, 현재 그의 모습 또한 장년 클라이머들의 로망이 되기에 충분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작별인사를 나누고 나오다가 문득 뒤돌아보니, 그는 또다시 암벽 앞으로 가 홀드를 노려보고 있었다.
김용기
1952년 전북 정읍생
1976년 암벽등반 시작
1982년 MC산악회 창립
1985년 대둔산 암벽루트 ‘MC로드 A/B’ 개척
1990년 북한산 호랑이크랙(5.11a) 프리솔로 등반
토왕폭 당일 3회 등반(김용기, 이상록)
1991년 미국 요세미티 미들케시드럴록, 조슈아트리 등반
1994년 설악산 4대 빙벽 당일 등반 성공(20시간)
1996년 알프스 몽블랑 등반
1997~1999년 설악산 전국빙벽대회 일반부 3년 연속 우승
2000년 UIAA 아이스클라이밍 월드컵 3개 대회 참가(종합랭킹 22위)
2001년 제1회 에델바이스배 구곡폭 빙벽대회 주최
김용기등산학교 설립
2003년 인수봉 남면 ‘학교길A/B’ 개척
1989~2000년 코오롱등산학교 대표강사
1990~1994년 대한산악연맹 암벽등반경기 분과위원
2006년 대한산악연맹 2급 등산 강사 및 암벽/빙벽 기술 정교수
2005년/2013년 대한민국 산악상 산악문화상 수상
현 M.C산악회 명예회장
저서
1996년 <실전 암벽빙벽 등반> 출간 및 영상물 제작·보급
2004년 <한국암장순례 중부권·남부권> 출간
2012년 <한국의 암벽>(전 5권)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