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회 노재현과 장태완
노재현- 사태수습 팽개진채 도피, 장태완- 쿠데타저지 고군분투
보안사의 감청테이프 기록에서 드러나듯 12.12 당일밤 남한의 군수뇌부는 일대 아수라장이 되어있었다. 치밀한 집권계획에 따라 최소의 병력으로 최 대의 성과를 거둬가는 신군부 쿠데타세력과, 보안사령관이 직속상관인 육군참모총장을 무력으로 강제 연행하는 하극상을 빤히 보고도 신속한 대응을 하지 못해 우왕좌왕하는 육본측은 서로 극명한 대조를 보이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삼군의 지휘권을 손에 쥔채 진압군 출동명령 한번 내려 보지 못하고 운명의 12일 밤을 겁에 질린채 보내버린 盧載鉉국방장관과, 소수 정치 군인들의 쿠데타를 몸으로 막으며 필사의 노력을 벌인 張泰玩수 경사령관 두사람을 보게 된다.
역사가 사회경제적 구조와 시대사상의 운행에 따라 전개되는 것이긴 하 지만 역사의 주체는 인간이다. 그래서 역사에는 특히 시대를 가르고 국운이 좌우되는 사건의 현장에는 그곳에 서있는 인간의 행동양식이 역사를 결정하 게 된다.
국방장관 盧載鉉의 소심하고 우유부단한 대처에 다만 12.12진압실태의 책 임을 물을 수 없다. 그러나 그가 사태발생직후 정위치에서 정상적인 사태수 습에 나섰던들 全斗煥등의 국가 집어삼키기는 이처럼 쉽게 성공하지 않았 을 가능성이 크다.
먼저 12월12일 오후 한남동 국방부장관공관에서 인근 육군참모총장공관 의 요란한 총성을 들으면서 취한 盧장관의 행동부터가 사태를 꼬이게 한 다.(이하 94년 3월 11일 盧씨 검찰 진술기록 참조)
盧장관은 12일 밤 9시 공관에서 쉬고있다가 인근 육군참모총장공관쪽에 서 나는 총소리를 듣고 베란다에 나가 정황을 살핀다. 이어 그는 당직부 관이 몸을 피하시는게 좋겠다고 하자 처와 아들 그리고 가정부를 데리고 장관공관을 나와 단국대 철조망을 헤치고 단국대 체육관에 피신한다. 그는 그때의 판단을 이렇게 전한다.
(검찰조서)
<문> 그당시 총장공관에서는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고 생각하였 나요
<답> 金載圭지지세력이나 북한등의 보수세력이 총장공관을 습격한 것 으로 생각하였으며 그렇다면 장관인 나도 위험하다고 생각하여 우선 피했던 것입니다.
盧장관은 이후 국방부 합참상황실에서 사태를 묻는 전화를 했으나 당시 까지 아무런 사태파악이 안돼 있는걸 알고 합참 작전국장 李炅律소장(당시 당직)에게 차를 가지고 나를 데리러 오라고 지시했다. 국방부장관으로서 국방부에 나가봐야겠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그는 약 1시간후 호위헌병과 함께 도착한 李소장의 차에 가족과 함께 탄후 국방부로 가려다가 우선 가족들을 안전한 곳에 대피시켜야겠다고 생 각하고 여의도 李소장의 집으로 가 가족을 맡긴다. 30여분을 또 소모한다. 盧장관은 차안에서 金容烋국방차관과 통화를 해 지금 곧 국방부로 가겠 다고 한뒤 생각을 바꿔 육본 B2벙커로 향한다. 필요한 조치를 취하기엔 육본이 더 좋다는 판단에서다. 육본에 도착한 盧장관은 金鍾煥합참의장. 柳 炳賢연합사부사령관.文洪球합참본부장등이 대기중이었다. 여기서 그는 비로 소 全장군등이 鄭총장을 서빙고분실로 강제 연행했다는 보고를 받는다. 밤 10시에 가까운 시각이다.
제대로라면 이단계에서 국무총리와 대통령에게 보고를 하고 한미연합사 와 공조, 全장군측의 불법연행을 원상복귀할 [진압작전]에 착수해야 한다.
그러나 盧장군은 겁을 집어먹은듯한 행동을 보인다. 즉 그때 1공수여단 이 육본을 점령하가위해 출동중이라는 보고를 받은 盧장관은 육본에 실병 력이 없다는데 불안을 느낀 나머지 수경사로 옮겨가자는 건의를 수용하 고 육본을 빠져 나간다.
盧장관은 육본을 나와 정상보고체계를 밟는걸 빠뜨린채 다시 용산 美8군 사령부로 간다. 전방상황을 묻기위해서였다. 사령관 위컴과 대사 글라이스 틴은 그때 이미 8군사령관실에 대기중이며 사태를 예의 관찰하고 있었다.
북한의 동향에는 이상이 없다는 말을 듣자 盧장관은 비로소 대통령에게 전화를 한다. 밤 10시 전후다. 대통령은 빨리 총리 공관으로 와서 사태를 보고하라
(당시 崔대통령은 총리공관에 있었음)고 했으나 盧장관은 곧 가겠다고 답하고 또 엉뚱한 행동을 한다. 즉 1군사령관과 3군사령관에게 전화를 해 나의 육성 명령없이는 병력을 움직이지 말라고 지시, 진압군의 발을 묶어 버린 것이다.
군의 동요나 혼란을 막자고 한 행동이었으나 결국 이 전화는 신군부만이 탱크를 몰고 질주하는 무법천지의 밤을 보장하는 셈이 되고 만다.
盧장관은 이어 全斗煥과 통화하는데 빨리 이곳(美8군)으로 와서 사태를 보고하라고 지시했으나 全이 들을리 없다. 全은 그곳은 미군부대인데 어떻 게 가겠는냐며 억지를 부리다가 그렇다면 국방부로 오라는 盧장관의 지시를 받는다.
밤 11시의 일이다.
그러나 이때까지 全斗煥등은 이미 鄭昇和총장 연행 재가를 받기위한 서 류를 들고 밤 10시30분께 총리공관으로 가 崔圭夏대통령에게 결재를 강요 하고 있었다. 美8군에서 盧장관과 통화하던 崔대통령은 全斗煥 兪學聖 車 圭憲 黃永時 白雲澤 朴熙道등 6명의 장성들에 둘러싸인채 전화를 받고있는 터였다.
盧장관은 국방부에 도착해 총리공관에 있던 全斗煥과 전화연결이 되자 너 빨리 오라고 했는데 왜 오지 않는거야라고 꾸짖었으나 全은 수화기 를 兪學聖에게 건넸고 兪는 장관님, 저희들한테 좀 오십시오라며 되레 장 관을 불러 들이려했다.
다시 盧장관의 검찰진술. 이후 시간이 계속 흘러 장관의 도리로서 대통 령께 보고를 드려야 되겠다는 생각에 부관에게 차를 준비시키고 총리공관 으로 가려고 했습니다. 막 장관실을 나서는데 현관에서 총소리가 들렸습니 다
盧장관은 장관의 신병을 수중에 넣은 신군부측 병력이 국방부를 덮치자 지하 상황실로 몸을 숨겼다가 새벽 3시께 신군부측에 발각돼 보안사로 [모셔]진다.
盧장관은 여기서 거수경례를 붙이는 全斗煥에게 왜 오라는데 오지 않았 느냐고 묻자 全옆에 있는 黃永時는 모두 국가를 위한 일입니다라고 일축 한다. 盧장관은 여기서 全이 내미는 서류에 결재를 하고 이어 全과 함께 총리공관으로 가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내는데 들러리를 선다.
盧장관은 全의 서류에 결재를 한데 대해 검찰진술에서 지금 결재를 하더라도 그 동안 의 행동이 정당화될 수 없다고 생각하여 결재를 했다고 진술하고있다. 이것이 79년 남한의 국방부장관이 취한 행동과 판단이다.
12일 밤 또 한사람의 인물은 신군부 쿠데타의 사면초가 속에서 울먹이 는 목소리로 국가의 안녕을 위해 몸부림친다. 바로 張泰玩수경사령관이다. 육봅해김지휘관을 따로 따돌리기 위한 신군부의 각본(연재6회)에 속아 12일 오후 연희동의 한 요정에 나와있던 장은 술이 2-3순배 돌 무렵 좌석에 있 던 金晋基헌병감이 부관으로부터 鄭총장의 연행사실을 보고받자 이를 전해 듣고 혹시 쿠데타라도?라는 혼잣말과 함께 즉시 귀대한다.
차안에서 수경사 전병력에 비상을 발령한 그는 부대도착 즉시 이건영 3군 사령관과 연락 을 하며 사태를 파악한다. 이내용은 보안사의 감청기록에 생생히 나타나 그 의 고군분투를 입증해주고 있다.
그러나 그도 13일 새벽 3시40분 헌병 병력을 동원한 신군부측의 수경사 기습에서 체포되고 만다.
첫댓글 수고하셨습니다.
잘 보았습니다.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