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강(晝講)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임금이 동지사(同知事) 임원준(任元濬)에게 이르기를, "경(卿)이 공주(公主)의 집터를 보았는가?" 하니, 임원준이 대답하기를, "세종조(世宗朝)에 상지관(相地官) 최양선(崔揚善)이...이 땅이 일찍이 벼락을 맞았으며, 또 시속에 말하기를, ‘독녀혈(獨女穴)이기 때문에 이 땅에 사는 자가 일찍 과부 되는 사람이 많다.’ 합니다." 하였다.
<御晝講。 講訖, 上謂同知事任元濬曰: "卿見公主家地乎" 元濬對曰: "世宗朝相地崔揚善言: ‘此地可作離宮。’ 世宗親幸觀之, 以爲不可而棄之。 此地曾經雷震, 又俗言獨女穴, 故居此地者多早寡。" >
성종실록 79권, 성종 8년 4월 10일 정미 4번째기사 '동지사 임원준과 공주의 집터를 이야기하다'이다.
왕이 공주의 집터를 놓고 신하들과 심각하게 논의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기사에서 공주는 예종의 큰딸 현숙공주를 말한다. 동지사 임원준은 현숙공주의 남편 임광재의 할아버지이다.
임광재의 아버지는 그 유명한 임사홍이다. 현숙공주와 임광재는 결혼을 한다.
성종은 현숙공주 부부에게 옛 숭문원 터인 이곳 명당길지를 하사한다.
“제왕의 기운이 서린 곳으로 궁궐을 지을 수 있는 명당자리에 집을 짓는 것은 불가하옵니다.”
신하들이 궁궐터 명당을 공주의 집터로 하사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들고 일어선 것이다.
“그 땅은 이미 세종이 둘러보고 궁궐을 짓기에 마땅치 않다 하며 버린 곳이었고,
벼락을 맞은 땅이며 독녀혈(獨女穴)로 그 땅에 사는 사람 중 과부되는 사람이 많은 곳으로
감히 다른 마음이 있을 리 없다."
성종이 묻는 말에 임광재의 할아버지 임원준이 말한다.
실제로 조사 결과 이전에 이곳에 살았던 세종의 여섯째 아들 수춘군(壽春君 李玹)이 일찍 죽어 젊은 과부가 나왔다.
세종 후궁 중에는 혜빈양씨라는 인물이 있다. 내명부 궁녀 출신인 그녀는 병약한 문종을 보살펴주던 중 세종의 눈에
들어 네번째 후궁이 됐다. 그녀는 세종과 사이에 한남군 수춘군 영풍군 등을 얻었다.
이 독녀혈에 살던 수춘군이 일찍 죽어 그의 부인이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것이다.
성종은 현주공주 부부에게 이 땅을 하사해 그곳에 집을 짓고 살게 한다.
이 터가 독녀혈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현숙공주의 결혼 생활은 불행으로 끝난다.
부부 사이가 나빠 공주는 집을 나와 대궐로 돌아가고 남편은 죄를 지어 귀양을 가서 죽는다.
결국 현숙공주도 과부로 외로운 삶을 살아야 했던 것이다.
곧잘 땅을 사람에 비유한다. 풍수에 있어서 터는 사람과 연결하여 설명한다.
그 삶의 굴곡이 심한 사람들을 보고 팔자가 드세다고 한다.
터에는 기(氣)가 흐른다. 땅의 기 곧 지기(地氣)가 꿈틀거리며 움직인다.
그 기가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을 편하게 만들어 주는 곳을 명당(明堂)이라고 한다.
그 기가 지나치게 강하게 흐르는 곳이 있다.
기가 너무 강한 나머지 사람들을 다치게 할 수 있는 곳이다.
사람으로 치면 팔자가 센 땅이다. 그 곳을 무덤이나 집터로 삼으면 여러사람들이 다친다.
"주택은 땅의 연장이다. 주택에는 땅의 기운이 그대로 전달된다.땅이 살아 있듯 주택도 살아 있다.
산과 대지에 각각의 소리와 색깔이 있듯 주택도 공간의 형태와 재료에 의해 고유한 울림을 갖게 된다.
이러한 울림이나 진동은 비록 사람의 귀에는 들리지 않지만 사람에게 일정한 영향을 준다.
그 집에 사는 사람의 인격과 성격을 만든다. 곧 좋은 주택에서는 사람의 마음이나 건강이 모두
편안하지만 좋지 못한 주택에서는 마음이나 몸이 불편하게 되는 것이다."-풍수학자 박시익-
"독녀혈은 3대에 한 번씩 큰 요동을 치는 자리로서 보이지 않는 큰 구멍이 있다.
그 구멍이란 다름아닌 여인의 자궁을 상징한다. 3대에 한 번씩 요동칠 때마다 불운이 있다.
큰 구멍은 하나의 큰 기둥을 벗삼아 살아야 하기에 그 깊은 구멍에 큰 나무를 심어야 한다."
영탑산사 학암스님은 과부골의 큰 구멍을 메워 음기를 다스려야 한다고 비보책을 제시한다.
음기가 드센 땅 과부골에 천하의 대학자 율곡 이이가 들어와 산다.
이 과부골에 학암 스님의 비보책에 따라 회화나무를 심었다. 400년을 넘긴 노거수다.
이 회화나무는 음기를 다스리는 남근(男根)을 상징하고 그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독녀혈 큰 구멍에 큰 나무는 바로 그러한 까닭에 세워진 것이고 율곡과 같은 대학자는
요행히 3대에 한 번씩 요동치는 그 시기를 비켜섰기 때문에 아무 탈이 없었다는 설명이다.
이 과부골 주변에 안동 김씨의 대표적 세도가 김병학의 사동대감댁이 있었다.
순조의 장녀 명온공주도 이 근처에 궁가 죽동궁을 마련해 살았다.
이곳은 당시 김현근이 앓고 있던 병을 치료하기 위해 무당들이 대나무칼춤을 추며
병이 낫기를 기원했다고 해서 죽도궁(竹刀宮)으로 불리다가 후에 죽동궁이 되었다.
고종 때에는 명성황후의 조카 민영익이 살기도 하였다. 그는 갑신정변 때 칼에 찔려 죽을 지경에 이른다.
죽동궁 터 길 건너는 충정공 민영환이 자결한 곳이다.
황제 폐하! 부당한 조약을 폐하시고 저 역적들을 처단하시옵소서!”
“통촉하시옵소서!”
시종무관 민영환은 편전 앞에 엎드려 날마다 소리 높여 외쳤다. 국록을 먹으며 백성들 위에
군림하던 수많은 관리들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외로운 그와 조병세 등 몇 사람의 외침만이
적막한 궁궐 안에 울려 퍼지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죽어도 죽지 않고, 저승에서라도 여러분을 도우리라.”
국권을 상실한 조국에 대한 애통함을 못 이겨 자결한 충정공 민영환이 남긴 유서의 한 구절이다.
을사늑약으로 나라가 망하자 을사5적의 처단과 늑약의 무효를 주장하다가 감옥에 갇혀 있던 그가
집으로 돌아와 유서 한 장을 남기고 조용히 자결했다. 이미 대세는 기울었고 그의 상소는 메아리도 없었다.
1905년 11월 30일 아침이었다.
그가 자결한지 8개월 후 그의 피 묻은 옷이 보관되어 있던 방안에서는 푸른 대나무 한 그루가 돋아났다.
돋아난 대나무에는 자결할 당시 그의 나이와 같은 45개의 잎이 달려 있었다. 사람들은 이 대나무를 혈죽이라고 불렀다.
민심은 술렁였고 전국에서 독립운동의 거센 파도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충정공 민영환 어른께서 자결하신 옛터”라는 기념물이 자리 잡고 있다.
자그마한 대리석 기단 위에 우리 한옥의 격자문 문짝처럼 생긴 기념물이 서 있고 아래 부분에는 대나무 문양도 보인다.
이곳이 바로 충정공 민영환이 자결한 곳이다.
그는 구한말의 격변기에 역사의 소용돌이 한복판에서 온몸으로 그 물살을 헤쳐 나갔던 풍운아다.
그런가하면 명성황후의 친정조카라는 특별한 신분에 28세라는 젊은 나이로 요즘으로 치면 국방장관에
해당하는 병조판서를 역임했던 고종황제의 측근이자 화려한 관록의 행운아이기도 했다.
그 절골(寺洞)에는 고종의 다섯째 아들 의친왕이 살던 사동궁(寺洞宮)이 있었다.
그 의친왕의 삶 역시 순탄치 않았다. 그는 1919년 대동단과 모의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망명을 결정하여
김가진·전협(全協) 등과 함께 33인 명의로 최후의 1인까지 항전을 벌일 것을 강조한 선언서를 준비하고
11월 탈출을 감행하여 압록강을 건너 대한국령 간도의 안동에 도착했으나 일본제국주의 경찰에 붙잡혀
강제 송환되었으며 일제의 도일(渡日)을 거부했고 일제의 삼엄한 감시하에 배일정신(排日精神)을 고수했다.
1950년대에는 서울에서 비교적 유명한 예식장이 있었다.
"이 예식장에서 결혼한 사람들은 이혼하거나 과부가 된다."는 소문에 시달리기도 했다고 한다.
1990년까지는 장안에서 유명한 요정 도원이 자리하였다.
2천년 들어서 요정 도원은 헐리고 그 일대 주차장과 SK건설빌딩이 들어섰다.
과부골에서 만난 사람들은 대부분 그 어려운 시기만큼이나 힘겹게 살아간 인물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