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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이장호, 배창호(조감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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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 | 이우석 |
각본 | 이장호, 최일남(원작) |
원작 | 우리들의 넝쿨 (최일남) |
출연 | 김희라, 임예진, 김보연, 최불암, 김영애 |
촬영 | 서정민 |
편집 | 김희수 |
음악 | 김도향 |
개봉일 | 1980년 11월 27일 |
1980년 서울, 이곳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변화의 거대한 에너지가 분출되던 장소이자 대한민국의 현재를 상징하였다. 지방에서 상경한 농촌의 젊은이들은 서울의 하층계급을 형성하며 도시의 온갖 궂은일을 담당하고 있었다. 1980년 개봉한 영화, <바람 불어 좋은 날>은 3명의 젊은이를 중심으로 도시화, 산업화, 세속화되어가는 한국 사회의 치부를 다양한 시각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부와 물질적인 것이 삶의 최고 가치로 변화된 시대의 초상이라고 할 수 있다.
20대 초반 3인의 남성이 갖고 있는 직업은 중국음식점 배달부(덕배-안성기), 이발소 보조(준식-이영호), 여관 관리(길남-김성찬)이다. 학력도, 부도 갖지 못한 농촌의 청년들이 서울에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들은 서울의 변화에 대해 찌들어있고 어리둥절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조심스럽게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슴 한구석에 담고 살아간다. 하지만 이들이 대면한 현실은 비극적일 수밖에 없다. 가난한 청년들을 모독하고 멸시하는 같은 연령의 부유층 자녀들, 부동산 개발 덕에 졸부가 되어 강제로 토지를 빼앗고 부를 확장하는 사악한 사업가, 남편의 병을 핑계로 불륜에 빠진 중년 여성 등 당시 사회면을 장식했을 수많은 사례가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이 중에서도 특히 안타까운 사례는 미래를 준비하면서 조금씩 돈을 애인에게 맡긴 길남의 절망과 마음을 두고 있던 동료가 사업가의 유혹에 빠진 것을 무기력하게 바라보아야 했던 준식의 경우라 할 수 있다. 어느 날 맡긴 돈을 들고 사라진 것을 알게 된 길남의 절망은 단순한 돈에 대한 허망뿐이 아닌 인간에 대한 절망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가장 가까운 관계도 파괴하는 돈의 부정적 위력을 보여준다. 또한 사업가의 유혹에 빠진 동료는 아버지 병을 고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어떤 도움도 줄 수 없는 안타까움에서 허우적거리는 준식의 고통은 어쩌면 젊은 날의 나의 어떤 모습(누군가의 물질적 어려움을 듣고도 돌아서야 했던 무력감)을 떠올리게 한다. 결국 분노 속에서 이성을 잃은 그는 사업가를 칼로 찌르고 감옥에 갇히게 된다.
영화를 보다 든 생각인데, 최근의 페미니즘적 시각으로 보면 문제제기를 받을 수 있는 부분이 많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문제의 근원이 거의 여성에게 전가되어있기 때문이다. 비록 여성 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사회가 여성에게 가한 압력과 차별의 결과일지라도, 결국 여성의 선택에 의해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불륜에 빠진 중년 여성, 돈 때문에 사업가의 유혹에 무너져버린 젊은 여성, 남자의 돈을 들고 사라진 애인, 가난한 청년을 노리개로 삼는 부유층 여성, 영화의 구도는 표면적으로 청년들의 고통의 대상은 이들 여성으로 설정되어 있다. 하지만 어쩌면 그것이 현실이었을 수 있다. 오직 인간적 관계에서만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젊은 시절 이들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남성들의 관계가 우정과 의리로 표현된 반면, 여성들과의 관계는 비록 이들을 도와주는 구원의 여성상이 있다하더라도 부정적으로 묘사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것은 그만큼 여성들의 사회적 안전망이 부실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며 독립적으로 살아가기 힘들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영화 대부분을 도시에서 벌어졌던 추악함과 절망을 묘사하던 영화는 마지막 부분에서 그럼에도 희망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는 당위성으로 마무리된다. 음식점 배달부 안성기의 권투 입문을 통해 표현되는 도전의 의미는 비록 어떤 고난이 온다 해도 이겨나가야 한다는 오래된 희망을 표현하고 있다. 사실 이러한 결론은 생뚱맞다. 비록 그렇게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는 사정과 내면을 이해한다고 해도 이러한 긍정성이 결코 쉽게 현실의 변화를 가져올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선택할 수밖에 없는 긍정이다. 살아야한다면 긍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한 수용이기 때문이다. 거부할 수 없다면 이겨내야 하지 않는가? 라는 씁쓸한 결론인 것이다.
영화가 그리고 있는 사회의 어두움과 희망의 가능성은 지금 시점에서 보면 마냥 비극적이지는 않다. 그것은 이후 진행된 경제호황의 덕택으로 우리 사회의 전체적인 부가 성장했기 때문이다. 비록 그러한 부의 확장 속에서도 고통은 여전히 진행되었지만 수많은 배달부, 보조, 공돌이들의 실질적 삶은 향상되었고 약 10년 후 우리 사회는 양적으로 엄청난 성장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1980년 모두가 더벅머리를 한 청년들은 무슨 꿈을 꾸었을까? 같은 시대를 살았지만 이들의 실질적 고통을 이해하지 못한 채(비록 다른 고통을 체험하고 있었지만) 다른 세계에 살았던 나에게 자신의 공간 너머를 이해할 수 있는 힘이 있었을까? 우리 집 앞에 있었던 공장에 다니던 청년들의 폭력적이고 비도덕적이던 모습만을 기억하고 있는 것을 아닐까? 영화는 같은 공간에 있는 사람에게는 어떤 공감을?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에게는 어떤 이해를 전달했을까? 생각해본다.
영화를 보고 글을 쓰면서 느낀 생각은 희망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인간의 나약함과 시대의 흐름에 저항할 수 없는 체계에 대한 무력감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거대한 힘에 도전했던 또 다른 젊은이들의 위대함이었다. 고통 속에 파묻혀 있으면 오히려 고통에 익숙해지고 그것을 탈출하려 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고통을 합리화하고 고통 속에서도 차별을 통해 더 작은 고통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을 변화시킨 힘은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 오는 경우가 많았다. 비록 최종적 선택과 실천은 내부의 힘을 통하여 완성되지만 외부의 촉발은 분명 변화의 시작을 이끄는 도발점이었다. 1980년 이후 벌어진 민주화 투쟁은 결국 변화를 이끌어내었다. 하지만 변화의 완성은 내부의 진정한 의식과 행동의 일치 속에서 완성되어야 했다. 그런 점에서 변화는 아직도 너무나도 많은 미완성을 포함하고 있다. 2019년, 1980년을 생각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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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살아야한다면 긍정할 수밖에!!! '세상은 항상 무조건 옳다'는 생각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말을 떠올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