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량진((鷺梁津, 노들나루)동 : 백로가 노닐던 나루터라는 뜻으로, 조선시대에 지금의 용산에서 수원 방면으로 가려면 노들나루를 이용하였는데 이곳에 도성을 지키기 위하여 '노량진'이 설치되어 마을 이름을 노량진이라 부르게 되었다.
독막(점말) : 노량진 2동 45∼46번지 일대, 지금의 동작구청 자리의 마을이름으로 일면 동이점이라고도 하였다. 옛날 옹기를 굽던 가마가 2군에 있어 떡시루, 독 등을 제작하여 노들나루를 이용해서 시내로 반입되었고, 지금의 강남 일대 주민들과 과천사람들이 많이 이용하였다고 한다. 1950년 대 말까지 있었으나 그 후 대림산업 중장비 정비공장이 들어섰다가 지금의 동작구청이 지어졌다.
송학대 : 송학대현재 삼거리시장 못미쳐 장승배기 좌우편, 노량진 2동 311∼315번지 일대의 마을이름으로 수백년 묵은 소나무 가 많았으며 이 소나무에는 학이 서식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도 몇 그루의 소나무가 남아 있으며, 일제 때는 일본인 고관들이 이 지역의 경관에 반해 많이 살았으며 한국인의 출입을 철저히 통제하였다고 한다. 현재 이 지명을 딴 송학대교회가 부근에 있다.
아차고개 : 아차고개 도로 사진사육신묘 마루터기에 있는 고개이름이다. 이 고개는 조선 세조 때 영등포 이남에 살던 어떤 선비가 사육신을 처형함이 부당함을 간(諫)하기 위하여 도성을 향하여 말을 달려 오다가 이 고개에 이르렀을 때 육신이 이미 새남터에서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아차! 늦었구나'하고 한탄하던 고개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장승배기 : 장승백이 사진동작구 상도2동 영도시장 맞은편 삼거리의 노량진 파출소와 한빛은행 상도지점 앞을 장승배기라고 부른다. 행정구역상 현재 장승이 서있는 위치는 노량진2동에 속한다. 지금은 사라져가는 민속신앙 중의 하나이지만 예전에는 동네 어귀나 사찰 입구에서 어김없이 찾아볼 수 있었던 것이 장승이다. 장승은 경계의 표시이기도 했지만 이(里)수를 적어 10리나 15리마다 세워둠으로써 이정표역할을 했으며, 특히 악귀를 막는 수호신이기도 했다.
상도동(上道洞) : 이곳에 상여꾼이 집단으로 거주하여 '상투굴'이라고 칭하던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성도화리(成道化里)로 불리다가 상도리·상도정이란 이름을 거쳐 1955년 서울특별시 동설치조례에 의하여 상도동으로 개칭되었다.
살피재 : 상도1동 숭실대학교 아래 교차로에서 봉천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옛날 이곳은 수목이 울창하여 도둑이 많이 출몰하였던 터라 이 재를 넘기 전에 사람들이 '살펴서 가라'고 하여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성대굴 : 상도3동 성대시장 입구에서 국사봉 골짜기까지의 마을 이름으로, 옛날 이곳에 신씨(申氏) 성을 가진 부자가 살았는데 그가 죽어 묘자리를 구하여 땅을 파헤쳐 보니 복숭아꽃이 한아름 나왔다고 한다. 그때부터 성도화리 (成桃花里)라고 부르다가 차츰 성도아리, 성도리, 성대리로 변천되었다고 한다.
만양고개 : 상도3동 성대시장 입구에서 국사봉 골짜기까지의 마을 이름으로, 옛날 이곳에 신씨(申氏) 성을 가진 부자가 살았는데 그가 죽어 묘자리를 구하여 땅을 파헤쳐 보니 복숭아꽃이 한아름 나왔다고 한다. 그때부터 성도화리 (成桃花里)라고 부르다가 차츰 성도아리, 성도리, 성대리로 변천되었다고 한다. 빙수골로 불려지던 이름이 빈수골로 바뀌었다고 한다.
능고개 : 상도4동 국사봉중학교에서 봉천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이름이다. 이 지역에 얽힌 이야기를 보면, 지금의 지덕사가 처음에는 중구 도동에 세워져 문중도 같이 살고 있었으나 워낙 살림이 빈궁하여 끼니를 제대로 잇지 못하였다. 근근히 지내던 어느 추운 겨울날, 한 노승이 이 집 앞을 지나다가 밤이 깊어 하룻밤 묵고 가기를 청하는지라 불러들여 불을 지피고 밥 대신 죽을 끓여 집주인은 먹지 않고 중에게만 주었다. 이튿날 이 사실을 안노승은너무 고마워서 은혜에 보답하겠다며 그 주인을 데리고 능고개 자리에 와서 '장차 죽거든 이곳에 묘를쓰라'고 일러 주었다. 그로부터 몇 년 후에 그 주인이 죽자 중이 가르쳐준 고개에다 묘를 썼더니 그때부터 자손이 번창하고 가세가 일어났다고 하여 능고개라 한다.
만양고개 : 상도2동 대림아파트 옆에서 노량진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옛날 이 고개가 워낙 길어 '마냥 넘어간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빈수골(빙수골) : 성대시장 뒤쪽 사자암이 위치한 아래 지역을 가리킨다. 이 곳에는 항상 찬물이 나는 우물이 있었다고 하여 빙수골로 불려지던 이름이 빈수골로 바뀌었다고 한다.
흑석동(黑石洞) : 흑석 제1동사무소 남쪽 일대에서 나오는 돌의 빛이 검은색을 띠므로 '검은돌(黑石)' 마을이라 한데서 유래한다.
흑석나루 (흑석진, 黑石津) : 현재의 흑석동 강변(원불교 서울회관 부근)에 있던 나루였다. 조선 초기에 민간인들이 많이 이용하였으며, 태종 4년(1385)에는 세곡의 운송을 위해 용산에서 충주 간 7개소의 수참(水站)을 설치할 때 흑석나루에 수참이 설치되어 참선(站船)의 정박소로 이용되었다.조선 후기에 참이 폐지되고 동작진이 개설되면서 기능을 잃어갔으며, 광복 이후 조정경기훈련장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범바위 : 흑석2동 시민아파트가 있었던 아래쪽 한강변에 있었던 바위이다. 옛날 이곳에는 많은 낚시꾼들이 모여들어 고기잡이를 하였다 한다. 어느날 한 낚시꾼이 커다란 잉어 한 마리를 낚자 갑자기 눈보라와 모래가 휘날려 눈 앞이 보이지 않았다. 이상히 여긴 나머지 뒤를 돌아다보니 커다란 호랑이가 나타나 어슬렁거리며 앞발을 내미는 것이었다. 낚시꾼이 질겁을 하고 도망을 치자 호랑이도 그 뒤를 쫓아왔다. 낚시꾼이 더 이상 도망을 가지 못하고 마침 그곳에 구멍이 뚫린 큰 바위 속으로 들어갔더니 호랑이가 들어오지 못하고 밖에서 두리번거리고만 있었다. 그러자 그는 그 바위 속에 갇혀서 나오지도 못하고 결국 죽었다고 한다. 이 호랑이가 앞발짓을 한 것은 잉어를 달라는 뜻이었는데 낚시꾼은 자기를 잡아 먹으려고 하는 줄 알고 결국 죽음을 당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다.
명수대 : 서달산 꼭대기에 있었던 건축물로, 1920년 일본인 부호 목하영(木下榮)이란 사람이 이곳에 별장을 짓고 놀이터를 만든 다음, 맑은 한강물이 유유히 흐르는 경치 좋은 곳이라 하여 명수대란 이름을 붙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광복 후 이 건물은 철거되었다.
할딱거리 : 왼쪽에 있는 산으로 옛날 이곳 주민들이 이 산을 오르려면 숨이 가빠 헐떡거렸다 하여 그 이름이 붙여졌다. 이 산마루에서는 동네 사람들이 연날리기를 많이 하였다고 한다.
사당동(舍堂洞) : 큰 사당이 있었다는 데서 유래된 이름으로, 1914년 당시 능마을·동산마을·양짓말 등을 병합하여 사당리라고 부르다가 1963년 경기도에서 서울특별시로 편입되면서 사당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까치고개[작현(鵲峴), 가추개] : 옛날 이곳에 수목이 우거지고 까치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으로 사당동 281-291번지 일대이다. 현재 은행나무가 두어 그루 있다고 하여 은행나무골이라 불려지고 있다.
도당(都堂)터 : 지금의 사당동 사거리 사당지하철역 일대로, 1970년대 초까지도 느티나무를 동신(洞神)으로 받들고 해마다 고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였으나, 도로가 생기면서 느티나무는 뽑히고 도당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화상(畵像)은 남현동의 관음사(觀音寺)로 옮겨졌다. 최근까지도 이 화상을 모시고 치제(致祭)하였으며, 경비는 각 가구마다 쌀 한말씩을 갹출하였다고 하는데 양이 조금 모자라면 쌀을 이고 오다가 넘어져 꼭 부상을 당하여 감히 양을 속일 수 없었다고 한다.
대방동(大方洞) : 지금부터 약 350년 전인 조선시대 높은 절이와 번댕이(樊唐里)라는 두 마을로 이루어진 곳이었는데 일제때 번대방리(番大方里)라 일컫다가 광복 후 대방동(大方洞)으로 부르게 되었다.
높은절이(高寺里) : 현재 노량진동과 대방동, 상도동과의 경계가 되는 대방동 1번지 높은 곳에 청련암(淸漣菴)이란 절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고려 때 노씨정승에게 국왕이 하사한 사패지(賜牌地)라고 한다.
번댕이(樊唐里) : 옛부터 낙천군, 연령군의 묘를 모신 계동궁(桂洞宮) 연못이 있었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번당리‘라고도 한다
신대방(新大方洞)동 : 대방동과 접한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1970년 서울특별시 조례 제613호에 의거 대림동에서 분동(分洞)되었다.
모자원 : 신대방동 343번지 일대로 6.25동란 후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전쟁 미망인과 자녀를 위하여 64가구의 주택을 마련하여 이곳에 살게 하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일명 '과부촌'이라 불렸으며 현재는 모두 이전하고 남아 있지 않다.
거북고개 : 옛날 대방초등학교 자리에 연령군신도비(延齡君神道碑)가 세워져 있었는데 이 신도비의 받침돌인 귀부를 관악산에서 조각하여 운반할 때 수백필의 소가 넘었던 고개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현재 삼성아파트(보라매 삼성아파트)가 있는 신대방2동에서 신림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현재는 모자원고개라고 불려지고 있다.
동재기나루(동작진, 銅雀津) : 동작진은 문헌상 천현 북쪽 18리에 있다고 되어 있는데, 동작도(銅雀渡)라고 부르기도 하고 동재기 고개 이름을 따서 동재기나루터로 부르기도 했다. 지금 그곳에는 '동재기 나루터'라는 표석이 서 있다. 과거에는 고운 모래가 넓게 펼쳐져 있었을 그곳에서 옛날 흔적을 찾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동재기 나루터는 동재기 고개에서 반포아파트 단지 입구 사이, 오늘날 지하철 4호선 동작역 아래 이수천 입구로 추정된다. 이 나루는 조선시대 서울에서 과천, 수원, 평택을 거쳐 호남으로 내려가든가, 또 서울로 들어오던 사람들이 배를 타고 건넜던 교통의 요지였다.
동재기 : 흑석동에서 현재 국립서울현충원으로 넘어오는 강변 일대에 검붉은 구리빛[銅] 돌들이 많이 분포되어 있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자료출처 : 동작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