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시인의 징후독법 | 이설야 | 신작 시 |
이상한 열매* 외 2편
마지막 술집 천장에서 이상한 열매가 흘러나왔다
벽에 적힌 HEAVEN AND HELL 글자 아래에서
천사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연기는 바람 속에서 툭툭 끊겼고
누군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뒤를 돌아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검은 벽 안쪽 천사들의 담배 연기는
구름인지 안개인지 잘 구분되지 않았다
이상한 열매는 천장에 매달려 흔들리고
흑인 가수는 검은 노래를 계속 부르는데
누군가 다시 내 어깨를 두드렸다
뒤를 돌아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검은 안개가 밤의 전차를 타고 가는 좁은 길이었다
죽음의 열매가 매달린 나무들을 지나 집에 갔다
티브이를 켜자
검은 여자들이 검은 아이를 업고 사막을 헤매는 뒤로
흰 구름을 삼키며 붉은 화염들이 국경을 넘어가고 있었다
`*미국 흑인 재즈 가수인 빌리 홀리데이(Billie Holiday, 1915~1959)의 대표곡이다. 이 노래는 백인들에게 살해당한 후, 나무에 매달린 흑인 노예들의 사진을 본 시인 아벨 미어로폴이 시 「이상한 열매 (Strange Fruit)」를 쓰고 음악가 얼 로빈슨이 곡을 붙였다고 전해진다. 후에 빌리 홀리데이가 이 곡을 불렀고 흑인에 대한 차별과 린치가 사라지는 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휴일이 된 사람
당신은 휴일이 된 사람
동전 여덟 개* 때문에
다섯 식구들 쪽방에서 죽은 성냥처럼 지냈지
그래도 불을 피울 수 있을 거야
하루하루 날품 팔며 쓰레기를 주우면
심장이 곧 따뜻해질지도 몰라
방바닥이 활활 타오를지도 몰라
심장은 하나
슬픔은 여럿
당신은 식어가던 태양 아래 걷다가도
햇빛을 훔친 것처럼 움츠러들곤 했지
부르튼 입술로 유전무죄 무전유죄
없는 죄가 늘어났지
고통은 나눌수록 커졌지
그들이 기억하기 싫어서
기억에서 사라진 사람들
심장은 하나
슬픔은 여럿
당신은 동전 여덟 개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거절당한 블랙리스트
휴일이 된 사람
*2022년 8월 29일 대법관 후보자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논란이 된 ‘800원 버스 기사 해고 판결’ 내용을 참고하였다.
눈
1.
칸타벨리아에 눈은 내리고
아직 오지 않는 여름이 지나간다
먼 데서 불어오는 눈보라
개미 눈 속에서 흩어진다
웃음을 잠깐 접어둔 수첩 속에서 눈이 오다가 그쳤다
2.
그 눈을 피해 가지 못하지
눈
쌓이는 눈
자꾸 자꾸만 쌓여 얼어가는 눈
빌딩이 되어 다시 올라가는 눈
눈과 눈
올려다보는 눈
내려다보는 눈
마주치는 눈
아직 살아있는 눈
문 닫은 상점의 우울 외 4편
나는 집 나간 고양이
문 닫은 상점의 우울을 즐기는
나는 뚱뚱한 개새끼
아무거나 처먹고 검게 탄 인형을 토하는
내가 낳은 그림자를 뭉개며 막차를 쫓는
나는 깜깜한 아버지의 온도
가질 수 없는 사랑만 골라 하지
나는 네 발로 뒤로 걷는 수수께끼
두 발로 거짓말을 즐기는
맑은 날은 깨금발로 금을 밟아
두꺼운 질서를 비웃곤 하지
나는 아무것도 포개고 싶지 않은 낮달
오래된 시계가 버린 그늘
잠자리 눈으로 뒤통수만 바라보는
새끼고양이들을 자꾸만 죽이는
─ 시집 『우리는 좀 더 어두워지기로 했네』(창비, 2016)에서
굴 소년들
한낮의 어둠
하늘 끝자락을 말아 올리던 매캐한 연기
어둠과 어둠이 역사 앞에 내렸지
검은 기차에 실려 강제로 끌려온 어린 소년들
깊은 산속 붉은 물이 흘러내리는 동굴
그들은 동굴 벽에 구멍을 내고 다이너마이트를 설치했지
굴을 파던 소년들 우르르 밖으로 뛰쳐나왔지
폭발음이 들리고 구름 연기가 피어올랐지
동굴 입구까지 돌 먼지가 뿌옇게 밀려 나오면
소년들 다시 들어가 가슴에 돌덩이들을 안고 나왔지
새벽부터 저녁까지 소년들 굴을 팠어
손톱이 빠지면 피가 멈추지 않았지
동굴은 너무 어두워
돌덩이들이 떨어지면 팔다리가 부러지곤 했지
해와 달을 데리고 굴속으로 들어갈 수만 있다면
무거운 돌들이 사라질까
매일매일 정 두드리는 소리에 뼈가 으스러지는 것 같았지
종유석이 눈물처럼 흘러내리는 부평 지하호*
함께 끌려온 다른 소년들은 조병창**과
미쓰비시 제강***으로 흩어졌어
그들은 무기들을 실어와 지하호마다 숨기곤 했지
죽은 소년들 구름처럼 떠돌다
동굴을 발견한 사람들이 말하는 걸 듣고는 했어
붉은 물발자국이 고이고 고인
녹슨 열쇠가 녹아내리는
깊고 깊은 구덩이들
어두운 굴속에 갇힌 오래된 시간의 뼈마디들
소년들 죽어도 죽은 줄도 모르고 계속 굴을 팠어
굳은 제 심장을 팠어
죽어도 죽지 않는 소년들
죽어서도 계속 굴만 파는
굴 소년들
─ 시집 『굴 소년들』(도서출판 아시아, 2021)에서
*태평양전쟁 시기에 일제가 조선의 어린 학생들을 강제 동원하여 만든 부평 함봉산 지하호(토굴)는 현재까지 총 24개가 발견되었다.
**조병창(일본 육군 조병창)은 일제가 1939년에 만든 군수공장이다.
**미쓰비시 제강(三菱製鋼)은 일본 전범 기업으로 군수물자를 만들어 조병창에 공급했다.
찢어진 나비 어깨
단지 나는 나비의 날개를 찢어먹었을 뿐인데,
눈을 떠보니 젖은 매트 위에 누워 흘러가는 내가 있었다
시간을 되돌리자
차창 밖을 보고 있는 내가 있었다
구조대가 왔고
사내는 한사코 일어나지 않았다
다시 시간을 한참 더 되돌리자
계단에서 넘어지는 나를 천장 위에서 누군가 보고 있었다
얼굴 대신 어깨가 조각 났다
공기가 산산조각 났다
오늘 떨어진 목련 잎이 비를 맞고 있다
울음의 가지를 여럿 꺼내놓고
가늘게 떨고 있는 목련의 어깨
어깨뼈가 겨우 붙었지만
다시는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는 내가 있었다
더 이상 당신과 어깨를 걸 수 없는 내가
웃는 척 웃고 있었다
듣고 싶은 노래만 듣고
보고 싶은 꽃만 보다가
나비의 날개를 놓쳤다
방금 몇 초의 시간 속으로 사라진 나비
되돌아갈 수 없는 날개를 붙들고 있는 내가 있었다
접힌 날개를 다림질하는
기우뚱한 자세를 즐기는
잔디 위에 부러진 뼈들을 가지런히 모으는 내가 있었다
눈을 한번 감았다 천천히 뜨자
내 겨드랑이에서 다시 자라기 시작하는 나비의 날개
생의 비밀들이 깨어나는 아침
─ 시집 『굴 소년들』(도서출판 아시아, 2021)에서
난민들
흉몽
카자흐스탄
그곳에서 왔다고 했다.
그녀는 남편에게서 탈출하려고 답이 수십 개가 넘는 문제를 풀어야 했다.
그러고도 칼에 찔렸다.
피를 흘리며 뛰어내린 열차에서 간신히 살아남아 달리고 또 달렸다.
남편은 그녀의 뒤를 쫓아 달리고 또 달렸다.
속죄하지 마세요.
당신은 영원히 벌을 발아야 해요.
그녀는
바람이 수상하니 어서 해변을 다 받아 적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늘은 어제보다는 달이 찌그러졌네요.
당신들이 한 말이 흔들리다가 등을 돌리네요.
카자흐스탄에서 도망친 그녀의 발밑은 저수지
천막극장으로 들어가는 문 앞에 난민들
그 문을 열고 그녀와 그녀의 남편들이 사라졌어요.
문
앞문 옆문 뒷문
모두 닫아도 자꾸만 돌아오는 그녀와 그녀의 남편들
제발 용서하지 마세요.
여기 절망과 절벽을 더 가득 부어주세요.
죄만 남은 몸들이 검은 물이 되어 흐를 때
아직도 그녀는 물속에서 도망치고 있어요.
─ 시집 『내 얼굴이 도착하지 않았다』(창비, 2022)에서
벽 속의 또 다른 벽돌*
우리는 벽을 조금씩 밀었다
한 손에는 꽃을 들고
한 손에는 죽은 물고기를 들고
반대편에서 던진 벽돌로 벽은 높이 올라가고 있었다
각자 던진 벽돌을 세면서
어차피, 벽엔 또 다른 벽돌이 쌓이겠지
어차피, 넌 벽 속의 또 다른 벽돌일 뿐이야
한 발과 또 다른 한 발이, 벽 아래 그어진 금을 넘는다
그것은 벽 속에 낀 그림자를 꺼내는 일
우리가 우리를 넘는 일
조금씩 허물어지던 벽이 등을 돌려,
우리는 각자의 얼굴을 깨기 시작한다
─ 시집 『내 얼굴이 도착하지 않았다』(창비, 2022)에서
*핑크 플로이드 <Another Brick in the Wall> 중에서.
이설야 | 2011시2011년 『내일을 여는 작가』 로 등단. 시집 『우리는 좀 더 어두워지기로 했네』 『굴 소년들』 『내 얼굴이 도착하지 않았다』. 제1회 고산문학대상 신인상, 제8회 박영근 작품상 등 수상.
====================================================
<이설야 약력 외>
*약력 : 2011년 『내일을 여는 작가』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우리는 좀더 어두워지기로 했네』, 『굴 소년들』, 『내 얼굴이 도착하지 않았다』가 있다. 제1회 고산문학대상 신인상과 제8회 박영근 작품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