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님은 늘 송도에 가고 싶어 하셨다. 몇해전에 어머니를 모시고 송도 전쟁기념박물관에 모시고 간적이 있다.박물관 마당에는 외삼촌의 추모비와 동상이 있어 어머니로 하여금 오라비를 생각하게 하고 그분들의 단명함을 애통하시게 했다. <중앙백과사전 >에서 고 유섭 항을 찾아보니 고유섭(1905-44) 미술사학자 호는 우현 경성제국대학 철학과를 나와 독일에서 미학을 공부하였다. 33년 개성부립 박물관장 36년 연희전문,이화여전 강사를 역임하면서 명승,고적,사찰을 답사 연구하였다. 저서로 <송도고적>,<조선탑파> <조선미술사논총>등이 있다. 외삼촌은 응산이라는 아명이 있었다.외삼촌 우현은 1905년생 어머니는 일곱살 아래인 1912년 임자생이시다. 백과사전마다 외삼촌이 독일에 유학했다고 기록되 있는데 어머니는 그런 일이 없는 것 으로 안다고 하셨다. 어머니 아래로 이미 작고하신 이모가 계셨는데 외삼촌과 이모 어머니 세분이 외할머니 강씨의 손이다 .그리고 만주에서 사시는 원섭 진섭 두 외삼촌은 어머님의 배다른 동생들이다 외할아버지는 일본생활 10여년만에 귀국하시자 어머니의 서모와 생활을 하셨다.
서모와 그 친정어머니가 외할아버지와 같이 살면서 아이를 낳았다. 그아이가 죽었을 때 외삼촌 탓이라며 서모의 친정어머니가 엄청 화를 냈다고 들었다.
仁川昔今이라는 책에는 이런 글이 있다.
.외할아버지는 인천 공립보퉁학교 출신인데 그학교에서 인천의 수재와 중견인물을 많이 배출했다고 썼다.
<高珠澈씨같은 의사도 있고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평론가로 개성박물관장이던 고유섭군도 있고 육법전서를 암송한다는 일제시의 부장판사로 약관시절에 일본고문을 패스한 전 법상 조진만군도 있고 ,,,,,>
우현은 조진만씨와 동창으로 친했다.또 인천석금에는 意誠私熟항에 이렇게 기록해놓았다.
<인천 명사중에 글방에서 한학을 배우고 전문대학을 마친 수재로 조진만 고유섭 두 분이 가장 대표적인 것이다>
의사 고주철씨는 어머니의 작은 아버지인데 적십자사 부총재를 지내셨고 인천에서 병원을 운영하셨다. 병원할아버지네와 다른 형제분들은 나중에 의가 상한걸로 알고 있다. 고씨네 조상산소를 두고 병원할아버지와 다른 형제들간에 다툼이 있었나보다
맨위에 사진은 어머니와 배다른 동생이다 아마 만주 할빈에서 살 때의 사진인거 같다 어머니는 두아들을 데리고 만주 할빈에 가셨고 거기서 둘째 문호 오빠가 사망했다.어머니는 제주 고씨로 고미술사학자 又玄 고유섭의 바로 아래 동생이시다. 인천 동 인천역 앞에 가 보니 그 동네가 <큰 우물로 >라고 주소가 나온다.어머니 친정 동네가 큰 우물가였다 .큰 우물가에서 동네 사람들이 잘 모였던 것 같다. 우물가에선 동네 사람들이 모여 소식을 전하고 국내 정세를 나눈다 .어머니 회고에 의하면 외삼촌은 삼일 운동이 일어나던 해에 태극기를 많이 만들어서 동네 아이들에게 나눠주었다.그리고 동내 아이들과 쿤 우물가에 모여서 만세를 부르다가 일본 순경들에게 잡혔다.외삼촌은 집안 어른들이 경찰서에 찾아가 말을 해서 풀려났고 다른 아이들은 경찰에게 맞고 감옥에 갇혔었다고 한다.
외삼촌은 경성제국대학 입학시험에 처음에 떨어졌다. 그러자 외할아버지께서 집안 망신이라고 하시며 몽둥이를 들고 아들을 때려준다고 화를 내셨다.그러자 집안 어른들이 유섭이는 고씨 집안 종손인데 니 마음대로 그럴 수 없다 며 때리지 못하게 했다.외삼촌은 그 후 인천 앞바다에 가서 체육시험 대비를 할려고 수영을 했나보다 그런데 물에 빠져 허우적 대는 걸 하인들이 업고 왔다고 어머닌 회상하셨다 .
외할아버지는 5형제의 맏이셨다.
외삼촌 우현 아래로 어머니와 어머니의 동생 이모가 있고 ,서모가 낳은 아들 두 명이 있다.
어느 해 섣달 그믐날에 외삼촌방에 친구가 놀러왔다가 자고 갔다.
서모의 친정어머니가 밤에 외삼촌 방앞에 낯선 신발이 있는걸 보고 펄펄 뛰며 화를 냈다.섣달 그믐날이 인(범)날일 때 외부인을 집안에 들이면 집안 식구가 화를 입는다는 것이다.그런 옛날 노인들 말이 맞는 것인지 정말 그 해에 서모가 낳은 아들이 죽었다.외삼촌이 섣달 그믐날 호랑이 날에 친구를 데려와 재우더니 그게 미신인지 맞는 건지 하여튼 집안에 식구가 죽는 사고가 났다고 한다 .
큰 아들이 오세 쯤이고 작은 아들 문호가 세 살쯤일 때, 만주 할빈에 가있던 아버지가 귀국해서 가족을 데리고 갈려고 했다.그 때 장씨 집안 어른들이 반대했다.집안에 대를 잡는 할아버지가 계셨는데 대를 잡아보니 둘째 문호가 만주에 가면 좋지않다고 하셨다.그러자 아버지가
”할아버지께선 전에 대를 잡으셨을 때 틀리셨잔아요.“ 하시곤 고집대로 가족을 데리고 만주로 갔다.아버지는 만주에서 대서소를 하셨다고 들었다.중국어 일본어 러시아어 등 4개 국어를 잘하시므로 통역도 하셨다고 들었다.중국과 일본이 전쟁을 할 때 어느 병사가 등에 총을 맞어 피가 철철 흐르는데도 그걸 모르고 있었다. 너 등에 총맞었네 하니까 그 때부터 그 병사가 아프다고 하며 병사노릇을 못하더라고 했다.
아버지께서 만주에서 있었던 일들을 가끔 이야기해주셨는데 그 때는 그렇게 살벌한 세상이었나보다. 한국사람을 중국인이 살해한 살인 사건이 나서 아버지는 경찰과 함께 중국인 집을 조사하러 갔다. 집안을 샅샅이 뒤져도 증거품이 나오지 않았다.그 때 방구석에 밌던 이불을 들처보니 거기에 피묻은 살인도구가 있었다고 한다 중국 사람들은 자고나면 이불을 둘둘 말아서 방 한구석에 둔다고 한다 .
아버지는 또 만주에서 본 충격적인 사건을 말해주셨다. 할빈은 한강처럼 그런건지 도시 중간에 강이 있고 도적떼들이 넘어오지 못하도록 둑을 쌓고 막아놓았다고 한다 어느날엔가 그둑근처에 묶은 범죄자들을 다섯명 앉혀놓고 칼잡이가 그들의 목을 잘랐다고 한다 칼잡이가 다섯번째로 사람 목을 치더니 돌아버리더라고 그 충격적인 장면을 회고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