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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마5:4-12)
마5:4절은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슬퍼하는 사람들”은 필히 통분을 수반하므로 “애통하는 사람들”로 번역함이 보다 좋겠다(원문 참조). “애통”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세상을 향하여 소극적으로 반응하는 비관적인 사람이 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세상은 더 이상 나아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눅16:26-29).
사탄은 세상과 죄와 자아와 어둠과 땅에 있는 모든 사람을 지배하려 한다. 하나님의 영광은 모욕을 당하고, 그리스도는 배척되고, 성령은 방해를 받으며, 교회는 황폐해지고, 자아는 부패 되고, 세상은 악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가 이러한 상황에 대해 애통하기를 원하신다.
하늘의 왕과 그의 왕국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내주하시는 왕에 의하여 정복되고 통제되고 다스림 받는다. 만일 우리가 이 다스림 아래 있으면서 오늘날의 세상의 체계를 바라본다면 우리는 한숨짓고 슬퍼하며 애통해할 것이다. 그러나 실망하지 말라. 우리는 애통해 하지만, 소망으로 충만하기 때문이다. 왕은 오고 계시며, 원수는 패배할 것이며, 땅은 그리스도에 의해 통치될 것이다.
5절은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온유(meek)하다는 것은 어떠한 저항도 하지 않으며 그보다는 모든 것을 견디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오늘날 세상에서 소유를 잃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장래에 땅을 상속받을 것이다. 영 안에서 가난한 자들과 애통하는 자들은 5절에서 온유한 자들이다!
많은 그리스도인은 온유하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것은 단지 점잖고 겸손하며 복종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온유함이란 세상의 반대에 대항하지 않고 그것을 달게 받는 것이다. 온유하다는 것은 세상과 마주 보며 싸우거나 대항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빌2:4-11절은 “각 사람이 자기 일들만 돌아보지 말고 각 사람이 남의 일들도 돌아보라. 너희 안에 이 생각을 품을지니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도 있던 생각이라. 그분은 하나님의 형체로 계시므로 하나님과 동등함을 강탈로 여기지 아니하셨으나 스스로 무명한 자가 되사 자기 위에 종의 형체를 취하시고 사람들의 모습이 되셨으며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음이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도 그분을 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있는 이름을 그분에게 주사,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과 땅 아래 있는 것들의 모든 무릎이 예수라는 이름에 굴복하게 하시고, 또 모든 혀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시라고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고 말한다.
히2:5-8절은 “그분께서는 다가오는 세상 곧 우리가 말하는 그 세상을 천사들에게 복종시키지 아니하셨느니라. 그러나 한 사람이 어떤 곳에서 증언하여 이르되,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깊이 생각하시나이까? 사람의 아들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찾아오시나이까? 주께서 그를 천사들보다 조금 낮게 만드시고 그에게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시며 그를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들 위에 세우시고, 모든 것을 그의 발아래 두어 복종하게 하셨나이다, 하였으니 그분께서 모든 것을 그의 아래 두어 복종하게 하셨은즉 그의 아래 두지 아니하신 것이 하나도 없도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아직 모든 것이 그의 아래 놓인 것을 보지 못하고다만 예수님을 보노라. 그분께서 죽음의 고난을 당하시려고 천사들보다 조금 낮게 되셨다가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시며 또 자신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시는 그분께서 많은 아들들을 영광으로 데려가시는 일에서 그들의 구원의 대장을 고난들을 통해 완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라고 말한다.
눅19:17-19절은 “이에 첫째가 와서 이르되, 주여, 주의 일 므나로 십 므나를 벌었나이다, 하매 그가 그에게 이르되, 잘하였도다, 선한 종아, 네가 매우 작은 일에 신실하였은즉 열 도시를 다스릴 권세를 차지하라, 하니라. 18 또 둘째가 와서 이르되, 주여, 주의 일 므나로 오 므나를 벌었나이다, 하매 19 그가 그에게도 마찬가지로 이르되, 너도 다섯 도시를 다스리라, 하니라”고 말한다.
만일 우리가 온유하여 이 시대에 세상의 반대를 달게 받는다면, 우리는 빌2:8-11절과 히2:5-8절과 눅19:17-19절에 계시된 대로 장래 오는 시대에서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다.
오늘날의 세상은 싸우는 사람들이 땅을 획득한다. 만일 당신이 세상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하여 싸우지 않는다면, 당신은 이 세상에서 어떤 영토도 받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그처럼 전쟁이 계속되는 이유일 것이다.
각 나라들은 서로 더 많은 영토를 얻기 위해 싸운다. 인간적인 방법은 싸움에 의해서 땅을 얻는 것이지만, 하늘나라의 방법은 온유함으로 땅을 얻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과 하늘나라의 원칙이다. “땅을 차지하기 위하여 싸우자”라고 말하지 말라. 그것은 잘못된 사상이다. 당신은 오히려 “온유함으로 땅을 차지하자”라고 말해야 한다.
당신은 온유함이 물질적인 것에 관계된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만일 이 문제를 주의 깊게 생각한다면, 온유함이란 우리 밖의 물질적인 것에 관계되지 않음을 보게 될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내적인 어떤 것들, 곧 우리의 존재 안에서의 어떠함에 관계된 것이다.
5:6절은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라고 말한다.
여기에서의 의는 특별히 우리의 행위에 있어서의 개인적인 의로움을 가리킨다. 이 구절은 “의로운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의롭게 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 대신에 이 구절은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마치 배고프고 목마른 사람이 음식과 물을 찾듯이 의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람은 만족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타고난 생명은 이 의(義)를 얻지 못한다. 이 내적인 주관적인 의는 그리스도이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새 율법의 요구를 이루실 수 있다. 우리는 결코 이것을 이룰 수가 없지만, 우리가 그것을 이룰 수 있는 것은, 우리 안에 그것을 이룰 수 있는 생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내 안에서 그분의 왕국과 함께 계신 왕은 그것을 능히 이룰 수 있다. 그러나 이 왕은 우리의 동역을 필요로 하신다. 우리는 굶주리고 목마름으로 동역한다. 우리는 ‘주님, 나는 당신으로 인하여 목마르고 굶주립니다. 주님, 나는 당신으로 충만 되기 원합니다.’ 라고 기도함으로써 동역할 수 있다.
당신은 이러한 방법으로 굶주리고 목마르다면 당신은 만족하게 될 것이다. 6절에 있는 의는 바로 그리스도이다. 그것은 능가하는 의, 곧 오직 그리스도에 의해 얻을 수 있는 가장 높은 수준의 의이다. 그분께서 이 가장 높은 수준의 의를 산출하시는 분이시므로 우리는 그분을 부단히 추구해야 한다.
5,7절은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앞 구절의 의롭게 되는 것은 그분을 영접하는 사람들에게만 마땅한 것을 주는 것이다.그러나 이 구절의 자비(긍휼)란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주는 것이다. 오늘날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적인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긍휼을 얻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일 것이다.
주님은 우리를 우리가 다른 이들을 대하는 방법대로 우리를 대하실 것이다(약2:13). 우리의 긍휼, 곧 불쌍히 여김을 구하는 기도는 심판대 앞에까지 미친다(딤후1:16, 18). 만일 당신이 오늘 긍휼이 없이 당신의 형제를 판단한다면, 당신은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어떤 긍휼도 받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왕국(하늘나라) 백성들은 자신들을 엄격하게 다루어야 하지만 다른 이들을 대함에 있어서는 많은 긍휼을 베풀어야 한다. 이것은 외적인 일이 아니고 우리의 내적 존재에 관계된 일이다.
5:8절은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나님을 볼 것이다.”고 말한다.
이 구절에서 언급된 아홉 가지 축복들은 물론 현 시대를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는 오는 시대를 위한 것이다. 마음이 깨끗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뜻을 목표로 삼는 데 있어서 단순하고 단일하며, 하나님의 유익만을 구하는 것이고(고전10:31), 오직 하나님만을 위하는 것이다.
사람이 그의 목표를 하나님께만 둘 때 결국 하나님을 얻게 된다. 만일 그가 그의 눈을 한 가지에만 고정시킨다면 그는 한 가지만을 보게 될 것이다. 그가 그의 눈을 하나님께만 둘 때 그의 하나님을 보게 된다.
요한계시록 20장 6절을 보라! 이기는 믿는 이들이 하나님 아버지의 제사장들과 왕들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제사장들을 하나님을 보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하나님을 보는 축복을 잃을 것이다. 또한 그의 은사를 사용하지 않는 것 또한 하나님을 볼 수 없게 되는 한 가지 이유이다.
5:9절은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자녀”는 원문에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이 시대의 일이다. 하나님은 오늘날 평화를 이루고 계시며 우리는 단지 이것을 전파한다. 마귀의 자녀들은 문제와 갈등과 분열을 일으키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은 화평케 한다. 하나님의 아들인 주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화평케 하셨다.
이제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는 화평케 하는 데 있어서 그분을 신실하게 따라야 한다.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우리의 아버지는 평화의 하나님이며(롬15:33; 16:20), 평화의 생명과 본성을 가지신 분이시다.
우리가 그분에게서 태어난 자로서 화평케 하는 자가 되려면 그분의 신성한 본성에 따라 그분의 신성한 생명 안에서 행동해야 한다. 곧 평화란 내가 그리스도를 사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그분의 생명과 본성을 나타낼 것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5,10절은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고 말한다.
“의로움 때문에”는 합법적임과 공정함을 위하는 것을 의미한다.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해 있고(요일5:19) 불의로 가득하다. 만일 우리가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면 우리는 의를 위하는 것 때문에 박해를 받을 것이다. 우리는 하늘나라를 위해 추구하는 의에 대하여 대가를 지불하여야 한다. 만일 우리가 의롭다면 우리는 정죄 받고 반대당하고 핍박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당할 것이다. 의롭게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살아가는 성도들이 그 결과로 박해를 받을 것이다. 그들의 세상적 환경과 사업과 직업에는 많은 의롭지 못한 것들이 도처에 무수히 숨어 있을 것이다. 그들이 그러한 상황 안에서 의롭게 되기를 갈망했기 때문에 다른 이들로부터 박해를 당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의를 추구한다면 하늘나라는 우리의 것이 될 것이다.
5:11-12절은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을 여러 가지 다른 방법으로 박해한다. 곧 사람의 얼굴 앞에서 욕하거나, 환경과 어떤 방법을 꾸며 박해하거나, 사람의 뒤에서 모든 악한 말을 퍼뜨린다.
아홉 번째 축복이 상(償)을 언급함으로써 앞선 여덟 가지 축복들이 역시 상들임을 알게 된다. 이것이 성경적인 대구법이다.
각 축복들이 처음 절반은 행위를 언급하고, 두 번째 절반은 상을 언급한다. 12절에서 주님께서 “상이 크다”고 말씀하셨으므로 이것은 절대로 작을 수 없다. 오! 이것은 우리에게 어떠한 위로인가! 마5:1-12절의 행복 선언은 바로 하늘나라의 헌법일 것이다!
할렐루야! 아멘!
첫댓글 하늘나라의 헌법이 있어 넘넘 행복하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