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 2022 가을 <위기의 시대, 문학의 지혜>
1. 창비 2022 가을호 특집 <위기의 시대, 문학의 지혜>에서는 국내적 문제뿐 아니라 세계적 차원에서 벌어지는 위기 속에서 ‘문학’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황정아는 <미래를 도모하는 문학>에서 최근 ‘전체’를 사유하는 경향이 늘어나고 있다고 밝히며 그것은 우리가 직면한 위기가 결코 개별적인 방식으로 해결될 수 없는 지구적 문제임을 말해주는 것이며, 프레드릭 제이슨의 “자본주의의 종말을 상상하기보다 세상의 종말을 상상하기가 더 쉽다.”라는 경고 속에 담긴 함의를 찾는 작업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2. 최근 “아직 도래하지 않은 사회를 지금-여기로 끌어당겨 그려보는 미래적 상상력의 자리”를 채울 예시적 장치로서 문학이 등장하고 돌봄이나 노동을 둘러싼 위기를 진단하는 다양한 형태의 문학이 표현하는 현실은 자본주의에서 작동하는 부드러운 권력장치의 방식을 확인시켜 준다. “주체로서의 의지가 발휘되는 지점이 모호해지는 것, 각자도생의 심상과 동기화되며 자기보존하는 회로, 창작윤리에마저 스며든 불안정한 삶과 계급의 양태, 모두 오늘날 자본주의의 실질적 포섭이라고 일컬어지는 상황을 서사적으로 확인시키는 듯하다.”
3. 특집에 참여한 작가들이 주목한 것은 문학의 ‘상상력’이다. 예시의 문학의 한계를 “세상의 종말이 이미 실재한다고 관측하는 일이 곧 재건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야말로 우리 앞의 최대 난관”이라고 진단하며 좀 더 적극적으로 ‘이행’할 수 있는 문학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라뚜로의 “생태학이 지고의 정치적 행위자인 대지를 충분히 엄밀히 정의하지 못했다.”라는 주장처럼 진보적 견해들은 단순히 동의를 얻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으며 삶의 중심에서 강렬하고 지속적인 욕망이 되어야만 대안의 존재감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지구의 위기를 경고하는 수많은 목소리는 이행에 필요한 강력한 ‘정치적 정동’을 불러일으키는 데 실패했다고 볼 수 있다.
4. 변화를 위한 대안적 행동을 찾는 문학의 역할은 우선 현실에 강제하는 새로운 감각과 감성의 변화를 넘어서 사유의 상상력을 통해 현실의 변화를 꿈꾸는 것이며, 어떤 소설 속 난파된 배에서 탈출한 한 노인의 이야기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는 일이기도 하다. “탈출이 가능하다고 믿고 떠다니는 난파물 조각 모두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나이든 신원처럼 빈틈이 없어야 한다. 이렇게 주의를 기울이면 왜 어떤 잔해들은 바닥에 가라앉지만 어떤 것들은 그 형태 때문에 생명을 건질 도구가 되는지 문득 이해할 수 이게 된다.”
5. 자본주의가 형성하는 현실의 단단한 쇠우리는 ‘자본주의의 밖을 상상’하기 어렵게 하지만, 그 속에서 태어나고 살아 ‘자본주의’의 속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있는 젊은 세대들에서 변화의 희망을 발견할 수도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우리에게 행한 것을 묻는 대신에, 거꾸로 우리가 자본주의를 위해 무엇을 해왔고 어떻게 일하고 있는지 질문”하면서 취약하고 불안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모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자신의 상상력을 해방시켜 우리 내부에서 잠재성을 발견하고 그것을 구체적인 모습으로 현행화시킴으로써 변화의 단초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당장 필요한 것은, 우리 안의 견고한 믿음 자체를 질문하고 그것에 동의하지 않을 용기다. 결정되지 않은 것, 오지 않은 시간을 누가 어떻게 상상하고 선취하는냐 하는 문제에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 세계의 모두가 연루되어 있다.”
6. 문학적 상상력을 해방한다는 것은 “시인은 자본의 욕망에 따라 생명을 파괴하는 행위를 단호하게 거부하고, 자연과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진리투쟁을 하는 최후의 전사”라는 동학연구자의 말과 일맥상통할 것이다. 자유로운 상상력은 결국 구체적인 실천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특집에 참여한 작가들은 이렇게 이성을 넘어선 정동의 중요성을, 실천의 전제로서 상상력의 회복을 강조하고 있다. 동학연구자는 더 나아가 새로운 신성 그리고 영성을 강조한다. “우주의식이 오랜 진화를 통해 비로소 본래적 신성과 광명을 드러낼 수 있는 시대로 나아가고 있음이 문명전환의 진정한 의미일 수 있다.”
7. 작가들의 글에서 발견하는 정서는 ‘절망해서는 안 되지만 절망하게 되는, 그럼에도 절망하게 만드는 것과 힘겹게 싸우는 최후의 지구 수호대가 갖고 있는 모호함’이다. 라뚜르의 분류처럼 이 세상은 오로지 자신의 탐욕에만 집중한 채, 지구의 미래에는 관심없는 ‘외계 유인자’가 넘쳐난다. 반대편에 위치한 ‘대지 유인자’들은 사람들을 설득하는 힘을 상실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성’을 통한 설득이 아닌, 상상력을 통해 그들의 감정과 정동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것이 ‘문학의 지혜’라고.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일은 이행할 수 없다. ‘정서적 연대’가 갖는 힘의 확장성은 오랜 시간 속에서 증명되었다. 그럼에도 의심이 든다. ‘이성’의 힘이 약해지면, 정동의 힘만으로 세상의 대안을 만들고 유지할 수 있을까? ‘이성’은 폐기나 대체의 대상이 아니라, 여전히 토대에 남아야 한다. 이성의 기단 위에 상상력의 영역이 보완되어야 하는 것이다. 정동으로 움직이는 실천의 힘은 폭발적이지만, 이성으로 추동되는 실천은 지속적이고 단단하다.
첫댓글 - ??? 우주의식, 본래적 신성과 광명, 문명전환의 진정한 의미 ???
- 지금-여기 : 생각과 실천 = 이성 : 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