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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학사전(三學士傳)》
장령(掌令) 홍익한(洪翼漢)
홍익한은 남양인(南陽人)으로 자는 백승(伯升)이다. 젊어서부터 총명하고 풍채가 빼어나며 효우(孝友)하고 충신(忠信)하였다. 매양 사서(史書)를 읽을 때마다 절의(節義)에 죽은 사람을 보면 반드시 낯빛을 고치고 마음으로 사모하였다. 광해군(光海君) 신유년(1621)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였으나, 이때는 권세(權勢) 있는 집 자제(子弟)가 아니면 선임(選任)되지 못하던 터라, 시험을 주관한 자가 끝내 공을 빼 버렸지만 공은 태연하였다.
인조(仁祖) 갑자년(1624)에 상이 공주(公州)로 파천해 있으면서 정시문과(庭試文科)를 설시하였는데, 공이 여기에서 장원(狀元)하여 전례대로 전적(典籍)에 제수되었다. 감찰(監察)로 주청사(奏請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明) 나라에 가서는 당저(當宁 현재 임금, 즉 인조를 말함)에게 고명(誥命)과 면복(冕服)을 내려 줄 것을 주청하였는데, 일을 주관하는 자가 이를 저지시켜 일이 거의 성취되지 못할 뻔하였으나 끝내 소청(所請)을 달성하고 돌아오게 되었으니 실로 공이 주선(周旋)한 힘이었다. 대간(臺諫)이 하찮은 일로 사신(使臣) 일행들의 관직(官職)을 삭제할 것을 논의하였으나, 상이 멀리 항해(航海)해서 사명을 완수했다 하여 모두 서용(敍用)할 것을 명하였다. 공은 이로부터 시종(侍從)을 거쳐 고령 현감(高靈縣監)으로 나갔다. 정묘년(1627, 인조5)에 강홍립(姜弘立)이 노(虜 후금(後金) 즉 청(淸)을 낮추어 일컫는 말)의 선도(先導)가 되어 우리 국경(國境)을 침범하자, 공이 현병(縣兵)을 거느리고 적을 토벌하기 위해 불철주야 달려갔으나, 조정이 벌써 노(虜)와 강화(講和)하여 노는 철수해서 돌아갔고 강홍립은 그대로 우리 조정에 유치되었다. 공은 이때 정언(正言)이 되어, 노에게 항복해서 고국(故國)을 배반하여 해친 강홍립의 죄를 엄히 다스릴 것을 청하였다.
병자년(1636, 인조14) 봄, 장령(掌令)에 제수되었는데, 이때 노(虜)가 사신을 보내와서 참호(僭號)의 일을 논의하자 공이 소(疏)를 올렸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신이 일전에 의주 부윤(義州府尹) 이준(李浚)의 장계(狀啓)를 보니, 바로 금한(金汗 후금(後金) 곧 청(淸)의 태조(太祖) 누르하치를 말함)이 황제(皇帝)라 자칭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준이 하늘에는 두 개의 태양이 없다는 등의 말로 그들을 물리쳤으므로, 신은 자신도 모르게 기뻐서 한없이 펄펄 뛰면서 우리 조정의 예의(禮義)와 명분(名分)이 너무도 빛남을 더욱 알게 되었습니다. 활[弓]을 가진 하찮은 무부(武夫)도 오히려 스스로 지킬 줄을 알아 이처럼 늠름하게 굴하지 않고 항거하였는데, 하물며 성상(聖上)의 묘당(廟堂)에 있는 제신(諸臣)들이야 어찌 한 무부(武夫)만 못하겠습니까.
신은 세상에 막 태어났을 때부터 대명 천자(大明天子)가 있다고만 들었을 뿐입니다. 지금 이 노(虜)의 말은 어찌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이전에 적신(賊臣 강홍립을 말함)이 오랑캐를 이끌고 갑자기 들이닥치므로, 대가(大駕)가 파천하여 그들과 강화(講和)하였으니, 이것이 비록 부득이한 사정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나, 만일 그때에 강홍립의 머리를 먼저 효시(梟示)하여 우리의 당당한 대의(大義)를 일성(日星)처럼 밝게 내세웠더라면 융적(戎狄)이 아무리 이리 같은 악독한 무리들이라 할지라도 어찌 우리 조정의 아름다운 예의에 감동하여 흠모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계책은 내지 못하고 오직 강홍립을 얻은 것만을 다행으로 여겨 그를 의지하여 안위(安危)의 기틀로 삼았으니, 저들이 우리를 오랑캐로 만들고 신첩(臣妾)으로 만들려는 것이 실로 이 때문입니다.
신은 참제(僭帝)의 설(說)을 듣고부터 담(膽)이 찢어질 듯하고 기(氣)가 꺾인 듯하여, 차라리 노중련(魯仲連)처럼 죽어서 차마 그 말이 내 귀를 더럽히도록 하지 않고 싶었습니다. 우리나라는 비록 궁벽한 바닷가에 있지만, 본디부터 예의의 나라로 천하에 알려져서 천하가 소중화(小中華)라 일컬었고, 열성(列聖)들이 서로 이어서 대대로 번직(藩職)을 닦아, 사대(事大)하는 일편단심이 정성스럽고도 근실하였습니다. 지금에 와서 노(虜)를 받들어 구차하게 눈앞의 안일(安逸)만 도모한다면 비록 시간은 조금 연장된다 할지라도, 조종(祖宗)에게는 어찌하며 천하 후세에는 어찌하겠습니까.
또 듣건대, 호차(胡差 청(淸) 나라의 사신(使臣))가 대동한 무리는 절반이나 새로 귀부(歸附)한 서달(西韃)이었다고 하니, 대저 서달은 우리에게 진작 교빙(交聘)의 예(禮)도 없었는데 어찌 빈접(儐接)할 도리가 있겠습니까.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았어야 옳은데도, 그들이 경내(境內)에 들어온 지 여러 날이 되었지만 묘당(廟堂)에서 전혀 한마디 말도 없었으니, 신은 그 묘당에 처해 있는 자가 어떤 사람인지를 모르겠습니다. 평상시부터 이미 직무를 게을리 해오다가 재앙이 눈앞에 닥친 오늘날에도 태연하게 움직이지 않으니, 이는 군부(君父)가 모욕당하는 것을 보는 감정이 오인(吳人)과 월인(越人)이 서로 적대시한 것보다 심합니다. 그렇다면 노인(虜人)이 우리를 모욕하는 것은 실로 우리 묘당에서 초래한 것입니다. 아, 사태가 이미 급박하게 되어 무릇 혈기(血氣)가 있는 자는 모두 분격하여 팔을 걷어붙이고 간이 떨리는 지경인데도, 원수(元帥)는 산릉(山陵)에 한가로이 앉아 있고, 성명(聖明)께서는 묵묵히 구중궁궐에 거처하시어 한 가지 일도 규획(規劃)하신 것이 없으니 신은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신은 그윽이 살펴보건대, 노인(虜人)의 뜻은 지나치게 떠벌리고 과시하여 우리를 협박해서 억지로 몰아붙이는 데 불과합니다. 저들이 참으로 천자(天子)를 자칭하여 대위(大位 황제의 자리)에 임하려 한다면, 의당 스스로 제 나라에서 황제 노릇을 하고 제 나라 풍속을 호령(號令)할 것이지, 왜 꼭 우리에게 품문(稟問)하겠습니까. 그들이 맹약(盟約)을 어기고 생트집을 잡아서 으르렁대어 우리의 입을 이용한 것은 장차 온 천하에 ‘조선(朝鮮)이 우리를 천자로 높였다.’고 칭하려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무슨 면목으로 이 하늘 아래 서시겠습니까. 신은 청컨대, 빨리 그들 사신(使臣)을 잡아, 맹약을 위배하고 참호(僭號)한 죄를 책망하여 죽여서 예의(禮義)의 거대함과 인국(隣國)의 도리(道理)를 밝게 보여 준 후에 그의 머리[首]를 함봉하고 그들 서자(書字)까지 함께 봉하여 황조(皇朝 명 나라)에 주문(奏聞)하면 의기(義氣)가 더욱 신장(伸張)될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고 신의 말을 망녕되게 여기신다면 먼저 신의 머리를 베어 노인에게 사과하소서. 신이 어찌 차마 군부로 하여금 모욕을 받게 하고서 구차히 살겠습니까. 아, 신이 아무리 잔약(孱弱)하다 해도 오히려 한 장벽(障壁)을 타고 넘어서 오랑캐의 칼날에 몸을 바칠 것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 동토(東土) 수천 리 안에 어찌 의사(義士) 한 사람도 없겠습니까.
현재 양서(兩西 황해도와 평안도)의 백성들은 지난날을 징계하고, 통분하여 이를 갈고 속을 썩이면서 맹세코 이 적(賊)들과는 한 세상에 같이 살지 않으려고 하니, 이는 진실로 바람을 타서 불을 붙이듯이 의용(義勇)을 격고(激鼓)시킬 기회입니다. 강해질 수도 약해질 수도 있는 것이 이 기회에 있고, 보존되느냐 망하느냐 하는 것도 이 기회에 있습니다. 오직 전하께서는 애통(哀痛)해 하는 교지(敎旨)를 빨리 내리시어, 팔방(八方)의 선비들을 격소(檄召 징소(徵召)하는 글을 보내어 부름)하여 몸소 육비(六轡)를 어거하고서 직접 대의(大義)를 면유(面諭)하신다면, 전하의 신자(臣子)가 되는 사람으로서 그 누군들 분발하여 앞서고 뒤서서 서로 다투어 죽기로써 충성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상이 비답(批答)하기를,
“나라를 위하는 그대의 정성은 매우 가상히 여기나 노의 사신을 참수(斬首)하는 일은 너무 이른 듯하니, 천천히 그들의 행위를 살펴서 처리하여도 늦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이때 태학생(太學生)도 소를 올려 노사(虜使)를 베죽일 것을 청하자, 노사가 두려워하여 도망가 버렸다. 그래서 중외(中外)가 흉흉(洶洶)하므로 완성군(完城君) 최명길(崔鳴吉)이 극력 화의(和議)를 주장, 의논하여 역관(譯官)을 보내서 노정(虜情)을 탐지하였으니, 실상은 다시 통화(通和)하려는 뜻이었다. 그러자 공은 또 대의(大義)를 내세워 최명길을 면척(面斥)하니, 최명길이 깊이 원망을 품었다. 다른 본(本)에는 ‘최명길이 깊이 원망을 품었다.[鳴吉深銜之]’는 다섯 글자가 없다.
12월 13일에 노(虜)에 대한 경보(警報)가 갑자기 이르렀는데, 이때 평양부 서윤(平壤府庶尹)이 결원(缺員)되었으므로 최명길이 체찰사(體察使) 김류(金瑬)에게 말하기를,
“화의를 배척하여 노의 침범을 초래한 사람을 바로 홍익한(洪翼漢)이다. 지금 홍익한을 두고 누구에게 서로(西路)의 직임(職任)을 맡길 것인가.”
하고는, 드디어 평양부 서윤을 제수하여 빨리 부임하기를 재촉하였다. 많은 사람이 와서 공을 위문(慰問)하였으나 공은 조금도 언짢은 기색이 없이,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는 것이 내 평소의 마음이다.”
하자, 듣는 자가 감탄하였다. 14일에 사은숙배(謝恩肅拜)하고 출발을 재촉하던 차에 노의 기병(騎兵)이 벌써 서교(西郊)에 닥쳐왔다. 드디어 모부인(母夫人)을 모시고 강화(江華)의 마니산(摩尼山)에 머물렀다가 교동(喬桐)을 거쳐 서쪽으로 임소(任所)를 향해 달려, 적(賊)의 둔영(屯營)을 뚫고 20여 일 만에 비로소 평양의 보산성(寶山城)에 득달하였다. 이때 성중(城中)에서는 원수(元帥) 김자점(金自點)의 패배 소식을 듣고 인심이 흉흉하여 일시에 군대가 흩어졌으므로 공이 드디어 격문(檄文)을 내어 군병(軍兵)을 초집(招集)하였는데, 그 격문에,
“일전 오랑캐가 깊이 쳐들어오던 처음에 본부(本府 평양부)에 관장(官長)이 없어서 민중이 통솔되지 못하여 병화(兵火)를 유독 많이 입었는데, 장관(將官)이나 아병(衙兵)까지도 동시에 이산(離散)되었으니, 이는 실로 공무(公務)를 위배한 것이 아니요 형세가 그렇게 되었던 것이다. 혈혈단신으로 흩어진 백성들은 과연 어느 곳에서 곤욕을 당하는지, 생각이 여기에 이르면 측은한 마음을 어이 다하랴. 지금은 본관(本官)이 본부에 부임하였으니, 각기 부모와 처자를 거느리고 즉시 내부(來赴)하여 힘써 성곽을 고치고 모이라. 또 원수부(元帥府)의 군병(軍兵)이 도망하여 흩어져서 집으로 돌아갔다고 하는데, 이미 군률(軍律)을 범했으면 결코 용서를 받기는 어렵다. 그러나 오직 마음을 고쳐서 스스로 일신(一新)할 것을 도모하여, 적(賊)의 형세를 정탐하거나 적의 뒤를 추격하거나, 밤을 이용해서 적의 진영을 공격하거나 적의 머리를 베고 포로로 붙잡아 온다면 장래의 전적(戰績)을 수립할 것을 기약하여 지난날의 죄를 영원히 용서할 것이다. 나의 말이 거짓말이 아니니 각기 힘써 하라.”
하였다. 그러자 인심이 조금 진작되고, 사기(士氣)가 분발하여 다투어 서로 돌아와 모였다. 공은 밤낮으로 마음을 다해 주책(籌策)하여 수비(守備)할 무구(武具)가 대략 갖추어 져서 마침내 그 성(城)을 보전하게 되었다.
적이 침구해온 처음에 상이 강도(江都)로 행행(幸行)하려다가 남문(南門)에서 대가(大駕)를 돌려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갔는데, 포위가 급박해졌다. 적이 척화신(斥和臣)을 요구하여 분풀이를 하려 하자, 최명길이 드디어 묘당(廟堂)과 의논하여, 다른 본(本)에는 ‘최명길이 드디어 묘당과[鳴吉遂與]’라는 네 글자가 없다. 공(公) 및 윤공 집(尹公集)ㆍ오공 달제(吳公達濟)를 보내기로 하였는데, 이에 대한 사실은 윤집ㆍ오달제 두 분의 전(傳)에 나타나 있다.
정축년(1637, 인조15) 2월 12일 밤에 평안도 도사(平安道都事) 전벽(田闢)이 지휘(指揮)하라는 칙지(勅旨)를 받고 증산 현령(甑山縣令) 변대중(邊大中)을 시켜 평양 두리도(豆里島)에서 공을 체포, 적추(賊酋)의 진영(陣營)으로 박송(縛送)하였는데, 이때 공이 미처 밥을 먹지 못하였으므로 결박을 풀어 밥을 먹게 해 달라고 요청하였으나 변대중이 허락해 주지 않았다. 은산 현감(殷山縣監) 이순민(李舜民)이 와서 보고 위로하자, 공이,
“국사(國事)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개미 같은 잔약한 이 목숨이야 논할 것도 없지만 내가 어찌 죽음을 두려워한 사람인가. 더구나 임금의 명을 어찌 감히 도피하리라고 이렇게까지 속박하는가.”
하였다. 이순민이 이 말을 듣고 변대중을 애써 타일러, 잠시 그 결박을 풀어서 밥을 먹였다. 밤 2경(二更)에 강(江)을 건너서 서쪽을 향해 밤낮으로 달려, 5일 만에 의주(義州)에 도착하니, 부윤(府尹) 임경업(林慶業)이 공을 맞아들여 앉혀 놓고, ‘공을 맞아들여 앉혀 놓고[迎公入坐]’가 ‘한 사관 밖에 나가 공을 맞았다.[出逆公於一舍外]’로 된 데도 있다.
“명공(明公)의 이 행차는 참으로 대장부의 일입니다. 살아서는 이미 대의(大義)를 붙들었고, 죽어서는 사책(史册)에 빛날 것이니 다시 무엇이 한이 되겠습니까.”
하자, 공이,
“나의 소(疏) 한 장 때문에 화패(禍敗)가 이토록 극심하니 죽어도 속죄를 다하지 못할 것인데, 하물며 기타의 일을 논하겠습니까. 다만 빨리 가서 군명(君命)이 지체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하였다. 임경업은 공의 행자(行資)의 유무(有無)를 물어보고 잘 갖추어 주선해 주고는 ‘잘 갖추어 주선해 주다[辦治甚具]’가 ‘또 자기의 갖옷을 벗어서 입혀주었다.[且解其裘以衣之]’로 된 데도 있다. 드디어 미관 첨사(彌串僉使) 장초(張超)를 시켜 압송(押送)하였다. 그리하여 통원보(通遠堡)에 이르자, 호인(胡人) 네 사람이 와서 결박해 가는 이유를 물으므로, 그 이유를 갖추어 알려 주니, 호인이,
“나는 바로 칸[汗]의 가인(家人)이오.”
하고는 이어 전대를 풀어 음식물을 꺼내어 주면서 말하였다.
“먼 길을 오느라고 아마도 배가 몹시 고플 것이오. 공(公)이야 무슨 죄가 있겠소. 심양(瀋陽)에 이르면 칸[汗]이 반드시 방환(放還)할 것입니다.”
25일에 비로소 심양에 도착하였는데, 공이 가는 길에 우리나라 사람이 줄을 이어 포로로 잡혀가는 모습을 보고 비분(悲憤)을 금치 못하였고, 또 낙타 위에 우리나라 어보(御寶)가 실려 있음을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통곡하였다. 이미 그곳에 당도하자, 호복(胡服)을 입을 화인(華人)들이 다투어 와 둘러서서 모두 감탄하면서 번갈아 가며 위로하였다.
“참으로 충신(忠臣)이다. 만일 대명황제(大明皇帝)께서 이 일을 아신다면 어찌 용동(聳動)하지 않으시랴. 남아(男兒)가 이 정도면 죽어도 빛이 있으리라.”
28일에 칸[汗]이 공을 별관(別館)에 가두도록 하고, 박사관(博士官)을 시켜 잔치를 베풀도록 하였는데, 주인(廚人)이 또한 아침저녁으로 음식을 훌륭하게 차려와서,
“이는 황제(皇帝)가 하사한 것이니 먹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자, 공이,
“나는 다만 한번 죽는 일이 있을 뿐이다. 이것을 어찌 먹겠느냐.”
하고, 모두 끝내 받아먹지 않았다. 호장(胡將) 용골타(龍骨打)가 관소(館所)에 와서 역인(譯人)을 시켜 전하기를,
“네가 무슨 일로 여기에 왔느냐?”
하자, 공이,
“나는 척화(斥和)를 으뜸으로 제창한 것 때문에 잡혀왔다.”
하니, 용골타가,
“너희 나라 조관(朝官) 가운데 척화를 제창한 자가 매우 많을 것인데 어찌 너 한 사람 뿐이냐?”
하므로, 공이 웃으면서,
“내가 어찌 죽기를 두려워하여 다른 사람을 괴롭히겠느냐.”
하였다. 용골타는 재차 삼차 힐문하기를,
“너 외에 반드시 다른 사람이 있을 것이니 숨기지 말고 바른대로 고(告)하라.”
하자, 공이,
“지난봄에 네가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왔을 때, 네 머리를 베라고 청했던 사람은 바로 나 한 사람 뿐이었다.”
하니, 용골타도 웃으면서 가 버렸다.
3월 5일에 칸[汗]이 병위(兵威)를 성대하게 진열하고 장차 불러들일 것이라는 말을 듣고는 공이 막 밥을 먹는 중이었으나 태연한 낯빛으로 평상시처럼 다 먹고서는 공을 수행했던 하인[蒼頭]를 돌아보고 말하기를,
“칸[汗]이 반드시 나를 굴욕(屈辱)시키려고 하지만 나는 결코 굴하지 않을 것이니, 오늘 나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하였다. 이윽고 졸개들이 매우 급하게 부르므로, 문밖에 이르자마자 공의 두 손을 묶어가지고 독촉하였다. 그러나 공은 걸음걸이가 더욱 편안하였다. 하인은 공이 혹 격노(激怒)할까 염려하여 곁에서 재촉하자, 공이 웃으면서,
“남아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면 의당 조용히 죽음에 임해야 할 것인데, 어찌 허둥지둥하여 거조(擧措)를 잃어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정하(庭下)에 이르러서는 우뚝 외따로 서자, 여러 호인(胡人)들이 모두 일어서서 공을 관찰하였다. 칸이 공의 결박을 풀게 하고는 공에게,
“네가 왜 무릎을 꿇지 않고 이같이 거만하게 서 있느냐?”
하자, 공이,
“이 무릎을 어찌 너에게 꿇을 수 있겠느냐.”
하였다. 칸이,
“너는 왜 먼저 맹약(盟約)을 위배하고 화의(和議)를 배척하여, 우리 두 나라가 틈이 벌어지게 하였느냐?”
하자, 공이,
“너는 우리나라와 형제(兄弟)가 되기로 약속을 해 놓고 도리어 황제를 자칭하여 우리를 신하로 삼으려고 하였으니 맹약을 위배한 실수가 과연 너에게 있는 것이냐, 우리에게 있는 것이냐?”
하니, 칸이 말이 막혀 한참 동안 있다가,
“네가 이미 으뜸으로 화약(和約)을 배척하였으니, 그 뜻은 반드시 우리 무리를 섬멸하는 데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 대군(大軍)이 나갔을 때에 어째서 맞아 싸우지 않고 도리어 우리에게 사로잡혀 왔느냐?”
하므로, 공이,
“내가 잡고 있는 것은 다만 대의(大義) 뿐이다. 성패(成敗)와 존망(存亡)은 논할 필요가 없다. 만일 우리나라 신민(臣民)들이 한결같이 나의 뜻과 같았다면 너의 나라는 벌써 망했을 것이다.”
하고는 곧 옷을 벗어 땅에 던지고 벌거벗은 채로 말하기를,
“듣건대, 너의 나라는 형살(刑殺)할 때에 반드시 마디마디 저며서 죽인다고 하던데 왜 빨리 이 형벌을 시행하지 않느냐?”
하였다. 그러고는 공이 붓을 찾아 종이에다 쓰기를,
“대명 조선국(大明朝鮮國) 유신(縲臣, 옥(獄)에 갇힌 신하) 홍익한(洪翼漢)은 척화(斥和)한 사실의 내용을 분명하게 진술할 수 있으나, 언어가 서로 익숙하지 못하니 문자(文字)로 써서 고(告)하겠다. 대저 사해(四海)의 안이 모두 형제가 될 수는 있으나, 천하에 두 아비를 가진 자식은 없는 것이다. 조선(朝鮮)은 본디 예의(禮義)를 숭상하였고, 간신(諫臣)은 오직 직절(直截)을 풍도(風度)로 삼기 때문에 지난해 봄에 마침 언책(言責)의 직임을 받고 나서, 너의 나라가 장차 맹약(盟約)을 어기고 칭제(稱帝)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하였다. 만일 맹약을 어긴다면 이는 형제의 의(義)를 어그러뜨리는 것이요, 만일 칭제를 한다면 이는 천자가 둘이 되는 셈이다. 한집안에 어찌 형제의 의를 어그러뜨릴 수 있으며, 천지 사이에 어찌 두 천자가 있을 수 있겠느냐. 더구나 너의 나라는 조선에 대해 새로 교린(交隣)의 맹약이 있었으나 너의 나라가 먼저 배신하였고, 대명(大明)은 조선에 대해 옛날부터 자소(字小 사랑하여 돌보아 줌)해 준 은택이 있어 더욱 깊이 결탁되었는데, 깊이 결탁된 큰 은택을 잊어버리고 먼저 배신한 공약(空約)을 지킨다면 이치에 매우 어긋나고 사리에 매우 부당하다. 그러므로 이 의논을 으뜸으로 건의하여 예의를 지키려 한 것은 바로 신하의 직책이다. 어찌 다른 의도가 있겠느냐. 다만 신자(臣子)의 분의(分義)는 의당 충효(忠孝)를 극진히 할 뿐인데, 위로 군친(君親)이 있지만 모두 부호(扶護)하여 안전(安全)하게 해 드리지 못하여, 지금 왕세자(王世子)와 대군(大君)이 모두 포로가 되어 있고 노모(老母)의 존몰(存沒)마저도 모르는 실정이다. 진실로 함부로 진술한 소(疏) 한 장으로 말미암아 가정과 나라가 이처럼 화패(禍敗)를 당하였으니, 충효의 도(道)가 전혀 없어진 셈이 되었다. 스스로 나의 죄를 생각하면 죽어야지 용서받을 수 없는 몸이니, 비록 만번 주륙(誅戮)을 당할지라도 실로 달게 생각하는 바이다. 나는 여기서 죽더라도 넋은 하늘을 날아 고국(故國)으로 돌아가 노닌다면 이보다 상쾌할 일이 또 있겠느냐. 이 밖에는 다시 할 말이 없으니 오직 어서 빨리 죽기만을 바랄 뿐이다.”
하니, 칸[汗]이 한인(漢人)을 시켜 통역(通譯)하여 들어 보고는 좌우(左右)를 돌아보고,
“이 사람은 어렵겠군.”
하고는, 인하여 공(公)의 척화소(斥和疏)를 내보이면서,
“내가 어찌 황제가 될 수 없단 말이냐?”
하므로, 공이,
“너는 바로 천조(天朝)의 반적(叛賊)인데 어찌 황제가 될 수 있단 말이냐.”
하자, 한이 크게 노하여, 마침내 두 호인(胡人)을 시켜 공의 양쪽에서 두 겨드랑이를 끼어 붙들고 나가게 하였으니, 이 두 호인은 바로 그 나라에서 사람을 형살하는 자들이었다. 공의 하인은 잡아서 별소(別所)에 가두었는데, 그후에 공의 안마(鞍馬)와 의금(衣衾) 등의 물품만 역인(譯人) 김여량(金汝亮)에 의해 부쳐왔고 공의 하인까지도 돌아왔다. 대체로 공의 항로서(抗虜書)는 곧 장초(張超)가 전해 온 것인데, 공의 하인이 구류되기 전에는 시종 공을 따라다니면서 목격했다가 돌아와서 말하였고 또한 공의 일기(日記)를 가지고 왔다. 공의 의(義)를 사모한 화인(華人)은 다들, 우리를 위해 그 일을 이와 같이 말했다고 하였다.
처음 강도(江都)가 함락되었을 때 공의 장자(長子) 수원(晬元)이 공의 대부인(大夫人)과 공의 계실(繼室 후처(後妻)를 말함) 허씨(許氏)를 모시고 마니산(摩尼山)에서 다시 교동(喬桐)으로 향하여 가다가 겨우 포구(浦口)에 이르렀을 적에 노기(虜騎)가 갑자기 접근하여 허씨가 적에게 잡혔다. 허씨가 욕(辱)을 당하지 않으려고 적에게 항거하자 칼날이 빗발치듯 하므로 수원이 문득 자기 몸으로 가리어서 칼날을 모면하게 하였다. 수원이 죽자 허씨는 스스로 물에 빠져 자결하였고, 수원의 아내 이씨(李氏)도 수원의 곁에서 스스로 목 찔러 죽었으니, 정축년(1637, 인조15) 정월 25일이었다. 하루 앞서 공의 차자(次子) 수인(晬寅)은 벌써 적을 만나 마니산에서 죽었던 것이다. 오직 대부인과 공의 두 딸만이 늙고 어린 까닭으로 죽음을 면하였다. 그러나 공은 이 사실을 미처 몰랐다. 공이 심양(瀋陽)으로 잡혀가는 길에 선천(宣川)에 당도하여 두 아들에게 편지를 보내 가속(家屬)의 존몰(存沒)을 매우 염려하였고 또 경계하였다.
“너희들은 나를 생각지 말고 오직 너의 할머니와 어머니를 잘 시봉(侍奉)하고, 끝까지 몸을 잘 보호하여 조상의 제사(祭祀)가 끊기지 않도록 하라.”
조정에서는 공의 대부인에게 종신토록 매월 늠료(廩料)를 지급하였고, 아울러 공의 두 딸에게도 늠료를 지급하였다. 효고(孝考) 초기에 특명(特命)으로 그 자손(子孫)을 녹용(錄用)하였고, 다시 공에게 승지(承旨)를 증직(贈職)하였다. 공이 막 죽었을 때 소현세자(昭顯世子)가 명을 내려 척백(尺帛)에다 초혼(招魂)해서 본국으로 보내었다. 공은 끝내 아들이 없었으므로, 양자(養子)인 응원(應元)이 공의 옷과 신을 평택현(平澤縣) 서쪽 경정리(鯨井里)의 선영(先塋)에 매장(埋葬)하고 부인 허씨를 합장하였다. 그 부근의 유생(儒生)들은 그 묘(墓) 밑에 사당을 짓고 향사(享祀)를 하고 있다.
공은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아버지의 상(喪)을 당해서는 3년 동안을 몹시 애통해 하였고, 어머니를 섬기는 데는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기를 힘써, 술을 많이 마실 수는 있으면서도 어머니가 싫어한 때문에 어머니 곁에서는 한 번도 얼굴이 발개지도록 마셔 본 적이 없었다. 공의 문장(文章)은 청건(淸健)하고 경민(警敏)하며 기격(氣格)이 기일(奇逸)하여, 그 한마디 한 구절도 모두가 충의(忠義)에서 나온 것이었다. 평생 저술(著述)한 것이 매우 많았으나, 모조리 강도(江都)의 변란으로 유실되었다. 심양(瀋陽)에 계류되어 있을 때 마침 3월 삼짇날을 당하여 지은 시(詩)에,
양지바른 언덕에 새싹이 돋아나니 / 陽坡細草拆新胎
세장 속의 외로운 새 마음 더욱 슬프구나 / 孤鳥樊籠意轉哀
형의 풍속 답청 놀일 생각이나 할쏘냐 / 荊俗踏靑心外事
금성에서 들던 술잔 꿈속에 떠오르네 / 錦城浮白夢中來
밤 바람 돌을 날려 음산이 진동하고 / 風飜夜石陰山動
봄 물엔 눈이 섞여 월굴이 열리누나 / 雪入春澌月窟開
기갈 속에 실낱 같은 명 겨우 이어 가노니 / 飢渴僅能聊縷命
인생 백년 오늘에 눈물이 뺨 적시네 / 百年今日淚盈腮
하였는데, 사림(士林)들이 모두 전송(傳誦)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공은 만력(萬曆) 병술년(1586, 선조19)에 태어났는데 죽을 때는 나이 52세였다.
교리(校理) 윤집(尹集)과 수찬(修撰) 오달제(吳達濟)
윤집은 남원인(南原人)으로 자(字)는 성백(成伯)인데 만력 병오년(1606, 선조39)에 태어났다. 13세 되던 해에 아버지 형갑(衡甲)이 별세하자, 백형(伯兄)인 계(棨)가 문행(文行)을 가르쳐서 독실하고 지극하여 게으르지 않았다. 천계(天啓 명 희종(明熹宗)의 연호) 정묘년(1627, 인조5)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신미년(1631, 인조9)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괴원(槐院)에 예속되고 이어 시강원(侍講院)에 옮겨져서 설서(說書)가 되었다. 또 사국(史局)의 천거가 있었으나 들어가지 못하고 사서(司書)에 승진되었다. 상(喪)을 마치고는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이 되었는데, 윤계는 이때 이조(吏曹)의 낭관(郞官)이 되어 형제가 서로 경계하기를,
“우리들이 남보다 뛰어난 것이 없는데도 함께 청반(淸班)에 들었으니, 이것이 매우 두려운 것이다.”
하였다. 이윽고 홍문관(弘文館)의 수찬(修撰)ㆍ교리(校理)가 되고, 헌납(獻納)ㆍ이조(吏曹)의 낭관(郞官)을 거쳐 성균관 직강(成均館直講)이 되어 영남(嶺南)에서 시사(試士)하였으니, 이때가 병자년 9월이었다. 미처 복명(復命)하기도 전에 도중(道中)에서 헌납에 제수되었고, 겨울에 다시 교리(校理)가 되었다. 이때 화의(和議)가 다시 행해졌는데, 최명길(崔鳴吉)이 실상 그 일을 주관하면서 정인(正人)들이 그 사이에 반론(反論)을 제기하는 것을 싫어했다. 그래서 모의(謀議)가 누설되지 않게 하기 위해 일을 주달(奏達)할 때에는 승지(承旨)와 사관(史官)을 물리칠 것을 청하였다. 공은 이 말을 듣고 분개하게 여겨 소(疏)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요즘 일종의 사특하고 해괴망측한 말이 있어 위로 천총(天聰)을 가리고 아래로 인망(人望)을 끊어 버리니, 장차 천지가 캄캄해 지고 의리(義理)가 단절되어 나라가 나라 꼴이 되지 못하고 사람이 사람 꼴이 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대저 화의가 국가(國家)를 망치고 종사(宗祀)를 단절시킨 것이 오늘날에만 있는 일은 아니나, 이제처럼 심한 적은 없었습니다. 천조(天祖)는 우리나라에 대해 바로 부모(父母)이고, 노적(奴賊)은 우리나라에 대해 바로 부모의 원수입니다. 신자(臣子)가 된 사람으로서 부모의 원수와 형제가 되기를 약속하고 부모는 돌아본 체도 하지 않고 태연하여 부끄럽게 여기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더구나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의 일로 말하면, 아무리 미세한 일까지도 모두 황제의 힘이었으니 우리나라로서는 잠시도 그 은혜를 잊기 어렵습니다. 지난번 노(虜)가 경사(京師)를 침범하여 황릉(皇陵)을 더럽혀, 놀란 마음 뼈에 사무치고 비참한 소식 차마 들을 수 없었습니다. 차라리 나라와 함께 쓰러질지언정 의리를 구차하게 보전할 수는 없습니다. 돌아보건대 군대가 약하고 힘이 미약하여 비록 다 종정(從征)하지는 못하지만, 어찌 차마 이런 때에 화의를 제창할 수 있겠습니까. 지난날에 성명(聖明)께서 혁연히 분발하시어 의(義)를 들어, 그들을 척절(斥絶)하여 중외(中外)에 포고(布告)하고 천조에 상주하시니, 우리 동토(東土) 수천 리가 거의 오랑캐를 면하게 되었습니다. 뜻밖에 요즈음 권면하는 칙서(勅書)가 내리자마자 사의(邪議)가 곧이어 일어나니, 인심(人心)의 분개함을 다시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더구나 승지(承旨)와 시신(侍臣)을 물리쳐야 한다는 말은 아, 너무 심합니다. 나랏일을 꾀하는 말은 귀엣말이 아니고, 군신간에는 밀어(密語)를 할 의리가 없는 것이니, 묻는 말이나 대답하는 말이 진정 의(義)에 입각한 것이라면 비록 천만 명이 듣는다 할지라도 무엇이 해롭겠습니까. 그러나 만일 의가 아니라면 깊은 방구석이라 할지라도 부끄러울 것이니 하늘이야 속일 수 있겠습니까.
이제 안으로는 조정과 밖으로는 백성들이 모두 최명길을 씹어먹으려고 하는 판인데, 전하께서는 구중궁궐에 깊숙이 계시어 혼자만 모르십니다. 오달제(吳達濟)의 소는 실로 공론(公論)에서 나온 것인데 곧바로 엄한 꾸지람을 받았으니, 뇌정(雷霆) 같은 전하의 노여움 아래 꺾이지 않을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심지어 이민구(李敏求)는 간장(諫長 대사간(大司諫)을 가리킴)의 높은 관직에 있으면서도 공론을 구제하지 않고 흐리멍텅하게 인피(引避)하여 전계(前啓)를 갑자기 정지하였으니, 기타 신진 후배들이 더러운 습속에 붙좇은 것은 괴이할 것도 없습니다. 명길(鳴吉)의 차자(箚子)는 매우 장황하여 천청(天聽)을 현혹시키되 드디어 주호(朱胡) 두 현인(賢人) 및 우리나라 다소의 명현(名賢)을 들어 그들과 화의를 주장했다고 지적하여 구실을 삼았습니다. 또 지난날 오랑캐를 척절(斥絶)했던 것은 성상(聖上)의 허물이라고 지적하고, 심지어는 ‘허물을 고치기를 꺼리지 말아야 한다’고까지 말하였으며, 또 이어서 ‘생령(生靈)이 도탄(塗炭)에 빠지면 종사(宗社)에도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됩니다.’ 하여, 그 변환(變幻)하는 언사(言辭)가 성상의 마음을 요동시켰습니다. 대저 밖으로 강한 구적(寇賊)의 형세를 끼고서 안으로 자기 임금을 협박하는 일을 차마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대론(臺論)이 비록 일어났다 하더라도 한쪽으로 청 나라에 글을 보내는 것도 불가한 것이 아니라고 하였으니, 조정을 조정으로 보지 않고 대각(臺閣)을 대각으로 보지 않은 것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입니까. 이 말은 전하의 나라를 망치고도 남음이 있는 말인데도, 전하께서는 그의 죄(罪)를 바로잡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그의 말을 들어 줌으로써 합계(合啓)가 한창 치성하였지만 국서(國書)가 이미 강(江)을 건너가 버렸습니다. 아, 국가에서 대간(臺諫)을 설치하였으나 또한 어디에 쓰겠습니까.”
하였다. 윤계(尹棨)가 이 소를 보고,
“이런 말은 실로 너무 지나치니, 산삭(删削)해야겠네.”
하였으나, 공은 수긍하지 않고,
“나라가 곧 망해 가는 지경인데, 어찌 말이 겸손해질 수 있겠습니까. 직분(職分)이 있는 곳에 몸과 마음을 바칠 뿐입니다.”
하였다. 그 소가 올라가자, 상이 마침내 궁중(宮中)에 머물러 두고 내려 보내지 않았다.
12월에 대가(大駕)를 호종(扈從)하여 남한산성(南漢山城)에 들어갔는데, 상이 성수(城守 성안에 들어박혀 지킴)의 계책을 급히 정하자, 공이 행궐(行闕) 아래에서 강개(慷慨)하여 창언(倡言)하기를,
“천의(天意)가 분발하시니, 나랏일이 거의 가망이 있게 되었습니다.”
하고는, 드디어 물러 나와 동지(同志)들과 함께 급무(急務)를 조목조목 써서 올렸는데, 맨 첫머리에,
“예로부터 전수(戰守)의 계책을 저지시켜 실패하게 한 것은 화의(和議)가 바로 그 빌미입니다. 지금은 다행히도 성지(聖志)가 굳게 정해지셨으니, 혹 다시 화의를 거론하는 자가 있으면 군중(軍中)에 효시(梟示)하여 중지(衆志)를 단합시키시기 바랍니다.”
하였고, 그 나머지는 모두, 사율(師律)을 거듭 엄중히 다스려서 군정(軍情)을 격려 권장하고, 양향(糧餉)을 수습하고 기계(器械)를 정돈하는 등의 일이었다.
20일에 공이 면대(面對)하여,
“신(臣)이 북성(北城)을 독전(督戰)하매 북성의 사졸(士卒)이 모두 출전(出戰)을 원하고 있었으나, 논의(論議)가 모순이 많으므로 신이 체찰부(體察府)에 말하였지만 또한 들어주지 않았으니, 이는 다만 성상의 결단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엊그제의 싸움에서 사기(士氣)가 백배나 분발되어 만에 하나라도 이기지 못할 리가 없음을 신은 자세히 알았습니다. 적기(賊騎)가 아무리 나는 듯이 돌출(突出)하였다가도 포성(砲聲)을 한번 듣기만 하면 되돌아서 도망치기 바빴습니다.”
하였다. 공은 군의(群議)가 세자(世子)를 노진(虜陣)에 보내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성상(城上)으로부터 궐하(闕下)에 내려와서 정공 온(鄭公蘊)을 요청하여 함께 입대(入對)해서 극언(極言)하려 하였는데, 사기(辭氣)가 강개하여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때에 여정(輿情)이 모두 분개하게 여김으로써 그 의논이 좌절되었기 때문에 마침내 입대(入對)를 요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공의 뜻은 오히려 끝없이 분개하여,
“무슨 일이든지 뿌리를 단절시키지 않으면 반드시 무성하게 퍼져서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지금 명길(鳴吉)이 아직도 묘당(廟堂)에 있으니, 끝내 반드시 사의(邪意)를 다시 일으켜 나라를 망치고야 말 것이다.”
하고는, 드디어 삼사(三司)의 관원들을 맞아 일제히 궐하에 모이게 해 놓고, 공이 말하기를,
“오늘날의 의(義)는 반드시 화의를 주장한 사람을 먼저 물리쳐야 합니다.”
하였으나, 여러 사람이 모두 서로 돌아보며 말 한마디 없자, 대사간 박황(朴潢)이,
“저들은 바로 고추부서(孤雛腐鼠 외로운 병아리와 썩은 쥐로, 사람을 천히 여겨 멸시하는 말)와 같으니 탄론(彈論)하기는 어렵지 않으나, 이는 오늘날의 급무(急務)가 아니므로 추후에 논하여도 늦지 않다.”
하니, 여러 사람이 바람에 쓸리듯이 그를 따르므로, 공이 역쟁(力爭)하였으나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러자 공은 매우 통절하게 삼사(三司)를 지척(指斥)하니, 공을 좋아하지 않는 유배(流輩)가 많았다. 공은 또 소를 올렸다.
“외로운 성(城)이 위박(危迫)해진 오늘날을 당하여 강화(講和)로 적(敵)을 퇴각시키는 것을 옳지 않다고 여기는 것은 아닙니다마는, 대체로 우리가 먼저 강화하기를 청하면 노(虜)가 더욱 우리를 가벼이 봄으로써 화의가 끝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오직 한 마음으로 전수(戰守)하여, 저들에게 우리의 능력이 있음을 보인 다음이라야 강화를 논의할 수 있습니다.”
정축년(1637, 인조15) 정월 초하룻날에 또 쇠고기와 술을 노에게 보낼 것을 논의하자 공이 또 소를 올려,
“묘당의 의논이, 한 사신(使臣)을 보내어 세궤사(歲饋使 세궤는 중국에 바치는 연말의 선사를 말함)라고 명칭해서 속으로는 정탐(偵探)을 하려 한다고 하여, 위로는 성총(聖聰)을 속이고 아래로는 군정(群情)을 기만하여 성하(城下)의 맹세와 북원(北轅)의 치욕(恥辱)이 눈앞에 닥쳐왔으니, 말이 여기에 이르매 통곡을 금치 못합니다. 지금 듣건대, 근왕(勤王)하는 군대가 일제히 가까운 지역에 도달했다 하니, 중외(中外)가 합세하여 한번 죽기로써 싸우기를 결단한다면 삼군(三軍)의 사기가 반드시 배나 분발할 것입니다. 바라건대 한 마음으로 전수(戰守)하소서.”
하였다. 묘당에서는 끝내 쇠고기와 술을 보냈으나 노(虜)가 받지 않고, 또 ‘칸[汗]이 대군(大軍)을 거느리고 나온다.’ 하였다. 그러자 조정의 의논이, 사신을 보내어 그들이 어느 곳으로 가는가를 묻고 이어서 기거(起居)의 안부를 물어 오도록 하려 하므로, 공이 또 소를 올려 그 옳지 못함을 극력 말하였으나 답이 없었다. 이때에 성(城)의 포위가 급해지자, 국서(國書)에다 모자(某字 항복에 관한 글)를 쓰려 하므로 공이 드디어 독대(獨對)하여 화의를 주장한 신하들을 극력 공척하여 중률(重律)로 다스리기를 청하고, 또 임금을 잊고 나라를 저버린 채 결단성 없이 묵묵하게 대세(大勢)에 따른 삼사(三司)의 죄를 말하였다. 이로부터 사람들이 모두 공을 곁눈질하면서 경박(輕薄)하여 명예나 좋아하는 사람으로 지적하여, 반드시 공을 위태롭게 하려 하였다. 이윽고 노(虜)의 서자(書字)가 왔는데, 말이 매우 패만(悖慢)스러우므로, 공이 또 입대(入對)하여,
“이제 흉서(凶書)가 오게 된 것은 모두 명길(鳴吉)의 죄입니다. 어제 그 답서(答書)를 보니 이는 강화가 아니고 항복(降伏)이었습니다. 신자의 입장으로 차마 이런 글을 지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인하여 그 간악한 정상을 모두 폭로하였다.
7일에 남양부(南陽府)가 함락되었다는 보고를 들었는데, 남양 부사(南陽府使)는 바로 공의 형(兄)인 계(棨)였다. 공이 체직(遞職)할 것을 청하자 상이 윤허하였다.
이윽고 마침내 오공 달제(吳公達濟)와 함께 심양(瀋陽)으로 잡혀가 같이 죽었다.
공은 품질(稟質)이 청개(淸介)하고 성기(性氣)가 직절(直截)하며 총명이 뛰어나서 한번 눈에 스친 것은 모두 기억하였다. 젊어서 집에 있을 때부터 반드시 효우(孝友)를 우선으로 삼았는데, 어버이가 질병(疾病)이 있을 때는 항상 근심스러운 낯빛으로 지냈고, 삼년상을 치르면서는 성례(誠禮)가 갖추어져 극진하였다. 형제 3인(人)이 한 방에 거처하면서 학업에 힘쓰고 생업을 일삼지 않았으며, 해진 옷에 거친 밥을 먹고 살면서 조금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세 차례나 대각(臺閣)에 들어가 언책(言責)을 스스로 담임(擔任)하였고, 네 차례나 경악(經幄)에 들어가 지성으로 옳은 일은 순종하고 나쁜 일은 바로잡았다. 그는 수양한 바가 매우 바르고 지키는 바가 매우 확고하여 끝내 대절(大節)을 성취하였으니 불세출(不世出)의 군자(君子)라 이를 만하다. 그가 죽은 무렵에 노(虜)와 변석(辨析)한 것이 가장 명백하게 반항(反抗)한 것이었는데도, 질관(質館)의 재신(宰臣)이 평소부터 공과 서로 좋지 못한 사이였기 때문에 그가 전한 말은 진실하지 못한 것이 많았다. 그후에 재신이 돌아와서 친한 사람에게 말하였다.
“내가 노와 함께 서로 좋아한 것이 어찌 본심(本心)에서 나왔겠는가. 다만 왕실(王室)을 위하여 제반사(諸般事)를 미봉(彌縫)하려고 한 것인데, 윤모(尹某 윤집을 말함)는 내 마음을 알지 못하고서 나를 보고 꾸짖기를 ‘오늘날의 일은 비록 부득이한 형편에서 나왔지만 수치스럽기 그지없는 일이다. 그런데 또 어찌 차마 이토록 깊이 결탁할 수 있겠느냐.’ 하면서 나에게 차마 듣지 못할 말들을 하였으니, 이는 묵은 감정 때문에 그런 것일세. 그러나 저들(오랑캐를 말함)이 많이 모인 가운데에서 아무런 이익이 없는 말로 나를 모욕하여 스스로 노의 노여움을 범하였으니 너무도 생각하지 못한 처사라 하겠다.”
공에게 유서(遺書) 및 기행(記行) 1책(册)이 의대(衣帶) 속에 들어 있었으나, 죽을 무렵에 노인(虜人)에게 수거(搜去) 되었기 때문에 전하지 못하였다. 공의 배위(配位) 김씨(金氏)는 청음 선생(淸陰先生 김상헌(金尙憲))의 종녀(從女)이다. 이선(以宣)과 이징(以徵) 두 아들을 두었는데, 조정에서 그들을 녹용(錄用)으로 다달이 늠료(廩料)를 지급하였다. 뒤에 김씨의 초상 때는 특명(特命)으로 장사(葬事)를 도와주었으니 이는 특별한 은수(恩數)이다.
오달제(吳達濟)의 자는 계휘(季輝)이고 해주인(海州人)이다. 19세에 정묘년(1627, 인조5)의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26세 때 문과(文科)에 장원하여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으로부터 병조 좌랑(兵曹佐郞)ㆍ시강원 사서(侍講院司書)ㆍ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ㆍ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ㆍ홍문관(弘文館)의 수찬(修撰)ㆍ교리(校理)를 역임하고, 병자년(1636, 인조14) 5월에 부교리(副校理)가 되었다. 이때에 금로(金虜)가 제호(帝號)를 참칭(僭稱)하였으나, 조정에서는 척책(斥責)을 하고서 다시 통사(通使)를 하려 하였으니, 여기에 대한 말은 홍학사전(洪學士傳)에 있다. 공이 소를 올리기를,
“대각(臺閣)이란 공론(公論)이 있는 곳입니다. 공론이 한번 나오면 비록 임금의 지존(至尊)으로도 위협하지 못하며 대신(大臣)의 중한 위치로도 막을 수 없는 법인데, 하물며 집요하게 임금의 뜻을 영합(迎合)하는 일개 험신(憸臣 간사하여 아첨을 잘하는 신하)으로 감히 공론(公論)과 서로 맞설 수 있겠습니까. 지난번에 조정에서 이미 화의를 척절(斥絶)한 뒤에 최명길(崔鳴吉)이 사신을 노(虜)에 보내자는 뜻을 내었으니, 그의 간사하고 기만적인 의논은 진실로 가증스러운 것인데, 다만 재택(財擇 재단하여 채택함)하여 취사(取捨)하는 권한이 군상(君上)에게 있기 때문에 조정에서 차치하고 논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후에 대간이 묘당의 모책(謀策)을 그르다고 여겨 다투어 서로 인피(引避)하고 의논이 매우 격렬해 지자 옥당(玉堂)에서도 의(義)를 빙거하여 논변(論辨)하였으니, 이야말로 삼사(三司)의 공론이 이미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도 명길(鳴吉)은 상의(上意)의 소재(所在)만 믿고 국가의 사세(事勢)는 생각하지도 않은 채 등대(登對)하던 날에 감히 기만적이고 위협적인 말을 진술하여, 위로는 천청(天聽)을 혹란(惑亂)시키고 아래로는 공의(公議)를 위협으로 제재하였으며, 심지어 ‘대론(臺論)이 비록 나왔다 하더라도 한쪽으로는 사신(使臣)을 보내야 합니다.’고까지 하였으니, 예부터 대론을 돌아보지 않고 제 뜻대로 직행(直行)하는 술책으로 그 군상(君上)을 인도한 자가 어디에 있었습니까.
이윽고 옥당으로부터 면척(面斥)을 당하고 군의(群議)가 다투어 변론하기에 이르러서는, 의당 위축하여 두렵고 부끄러운 태도를 갖고서 물의(物議)가 정해지는 것을 기다려야 할 것인데도 오히려 또 거만하게 차자(箚子)를 올려 오직 화의가 이루어지지 못할까 걱정하였으니, 그 방자하여 꺼림이 없는 죄는 바로잡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이때에 노와 불화(不和)의 단서가 이미 열려 조정에서 인심(人心)을 위로할 수 없게 되자, 공이 다시 소를 올려 시무(時務) 8조(條)를 논했는데, 그 요점은 성학(聖學)을 권면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았다. 이해 겨울에 공이 벼슬을 그만두고 집에 있다가 노변(虜變)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는 도보(徒步)로 대가(大駕)를 호종(扈從)하여 남한산성에 들어갔다. 일이 급해지자, 주의(主議) 다른 본(本)에는 의(議) 자가 사(事) 자로 되어 있다. 한 자가 공과 윤집(尹集)을 결박하여 노영(虜營)으로 송치하였고, 홍익한(洪翼漢)은 서로(西路)의 임소(任所)로부터 노의 소굴에 곧바로 송치되었다.
대체로 행조(行朝)가 포위를 당한 후 밖으로는 제로(諸路)의 근왕(勤王)하는 군사들이 곳곳에서 패주(敗走)하고, 안으로는 군량(軍糧)과 기계(器械)가 이미 모두 다하였다. 조정에서는 다만 묘사(廟社)와 원손(元孫)이 있는 강도(江都)를 국가의 근본이 되는 지역으로 삼았는데, 하루는 갑자기 함락되었다는 보고를 듣고 조정에서는 다시 믿을 곳이 없게 되었다. 노가 매우 급히 상에게 출성(出城)할 것을 청하자 중의(衆議)가 또 따르려 하므로, 윤공(尹公)이 상의 앞에 나아가서 머리를 부수어[碎首] 간쟁(諫爭)하려 하니 공이,
“우리들이 환난을 잘 막지 못하여 이제 아주 위태하고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는데, 일을 주관하는 자는 ‘이렇게 해야만 상궁(上躬)을 보전할 수 있다.’ 하니, 비록 그 옳지 못한 줄은 분명히 알지만 다시 어찌 차마 저지할 수 있겠는가. 우리들은 의당 자정(自靖)하여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도록 할 뿐이오.”
하자, 윤공이 탄식하고 간쟁을 그만두었다. 조정에서 이미 노와 화약(和約)을 체결하자 노가,
“오늘날 양국(兩國)의 불화(不和)는 모두 초봄에 척화(斥和)하던 신하들에게서 말미암은 것이니, 반드시 먼저 그들을 군전(軍前)에 압송(押送)하라.”
하니, 이때에 최명길이 그 일을 주관하여 다른 본(本)에는 ‘최명길이 그 일을 주관하다.[崔鳴吉主其事]’는 여섯 글자가 없다. 제의(諸議)를 참작해서,
“만일 한두 사람만 보낸다면 죽음을 면치 못할 듯하다. 모름지기 수십 인을 함께 취하여, 일시에 나가서 사과한다고 명칭을 붙이면 저들이 반드시 노여움을 풀 것이다.”
하고, 이에 다시 상께 아뢰지도 않고 곧바로 양전(兩銓 이조(吏曹)ㆍ병조(兵曹))을 시켜 각사(各司)에 분부하여 명단을 적어서 보고하도록 하고 또 자수(自首)하도록 하였다. 대체로 맨 처음 포위를 당했을 때에 노인(虜人)이 화친의 조건으로 왕세자(王世子)를 보내 줄 것을 요구하자, 임사(任事)한 제신(諸臣)들이 상께 요청하여 상이 그를 윤허하려 하므로 척화(斥和)를 주장한 사람이 다투어 서로 임사자(任事者)를 욕하면서 베죽이기를 요청하였는데, 이 화약이 체결됨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의논이 중지되었다. 그러자 임사자가 일이 정해진 뒤에 자기에게 죄가 미칠까 두려워했기 때문에 이때를 틈타서 자기가 꺼리는 사람들을 모조리 물리치려 하였으나, 다만 상의 마음이 끝내 차마하지 못함을 염려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내외(內外)를 출입하면서 군중(群衆)의 마음을 고동시키고, 또 대장(大將) 신경진(申景禛) 등을 시켜 사졸(士卒)들을 종용하여 궐문(闕門)이 떠들썩하게 소란이 피우면서 칼날을 드러내어 위협하니, 조신(朝紳)들은 의기를 잃고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이공(二公 윤집과 오달제)이 드디어 청음(淸陰) 김공 상헌(金公尙憲)과 동계(桐溪) 정공 온(鄭公蘊)의 뒤를 이어 주사(籌司 비변사(備邊司)의 별칭)에 자수(自首)하자, 대사간 박황(朴潢)이,
“척화한 여러 사람을 반드시 많이 보낼 필요가 없다. 윤집ㆍ오달제 두 사람이 이미 자수하였는데, 자수한 사람이 앞으로 어찌 이 두 사람에 그치겠는가.”
하여, 의논이 드디어 결정되었다. 이공(二公)이 자수하려 할 적에 오공(吳公)의 형(兄)인 승지(承旨) 달승(達升)이 오공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노(虜)가 찾는 사람은 지난 초봄에 으뜸으로 척화를 논의한 사람이다. 너는 그 사람이 아닌데 어찌하여 이러느냐?”
하자, 공이,
“비록 으뜸으로 논의한 사람은 아닐지라도 이미 주화(主和)한 사람을 공척(攻斥)하였고, 또 임금이 굴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어야 하는 것은 내가 달게 여기는 바인데, 오늘날 어찌 구차히 살기를 꾀하겠습니까.”
하므로, 달승이 저지하지 못하였다. 정축년(1637, 인조15) 1월 28일에 행궁(行宮)에 배사(拜辭)하자, 상이 인견(引見)하고,
“고금 천하에 이런 일이 어디 있단 말이냐. 당초에 그대들은 나로 하여금 정(正)을 지키도록 했을 뿐이었지만, 오늘날의 일을 내가 어찌 자유로 할 수 있겠느냐. 그대들이 나 같은 임금을 섬기다가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내가 이 심정을 어떻게 하랴.”
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목이 메었다. 그러자 이공(二公)이 아뢰기를,
“주상(主上)의 굴욕이 이 지경에 이르매 신들은 항상 죽지 못한 것을 한하였는데, 이제 죽을 곳을 얻었으니 무슨 유감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묻기를,
“그대들은 노친(老親)이 있는가? 또 자식들은 얼마나 되는가?”
하자, 달제가 아뢰기를,
“신은 70세 된 편모(偏母)가 계시고, 자식으로 말하면 아내가 이제 겨우 임신을 했을 뿐입니다.”
하였고, 집(集)은,
“신은 다만 조모(祖母)와 세 자식이 있어 모두 신의 형 계(棨)의 임소(任所)로 가 있는데, 이제 듣건대 그곳이 적에게 함락되었다 하니 생사(生死)를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참혹하구나.”
하였다. 집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출성(出城)하신 날에 성중(城中)의 군민(軍民)이 때를 타서 반란을 일으킬 염려가 없지 않았으니, 바라건대 왕세자를 유치시켜 진무(鎭撫)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그대는 이제 죽을 땅으로 가면서도 국사(國事)를 생각하고 있으니, 그대의 충성이 매우 가상하도다.”
하였다. 상이 술을 내려 주라고 명하고,
“우리 국가의 운명이 혹시라도 다시 연장된다면 그대들의 집은 내가 의당 돌보아 줄 것이니 가정을 염려하지 말라.”
하므로, 이공(二公)은 눈물을 흘리면서 배사(拜謝)하고 나왔다. 달승(達升)이 울면서 주사(籌司)에 말하기를,
“내 아우가 대가(大駕)를 호종하던 날에 도보로 왔으니, 말 한 필을 주어 부르튼 발로 다시 걷지 않도록 해 주시오.”
하니, 듣는 이가 매우 비참하게 여겼다. 이윽고 날이 저물어 미처 출성(出城)하지 못하여, 오공(吳公)이 밤에 관사(官舍)로 나아가서 두설(豆屑)을 끓인 물로 목욕을 하였다. 달승은 밤새도록 아우를 붙들고 울면서,
“형제의 영결(永訣)이 오늘 밤을 남겨 두고 있을 뿐이니, 내일은 어떻게 서로 이별을 한단 말이냐. 또 어떻게 집에 가서 노친과 새 제수(弟嫂)를 본단 말이냐. 너는 이 밤이 다 새기 전에 뒷일을 처리해야 한다.”
하자, 공이,
“남아가 한번 죽는 데 있어 꼭 죽어야 할 곳을 얻는 것이 귀중한 것입니다. 뒷일을 처리하는 것은 형님에게 있으니, 형님은 너무 슬피 여기지 마십시오.”
하고, 인하여 나무를 깎아 조그마한 패(牌)를 만들어 차면서,
“내가 노진(虜陣)에 이르면 기필코 즉시 죽임을 당할 것이니, 시체를 수습할 때에 이것으로 신표(信標)를 삼으십시오.”
하고는 잠자리에 들어갔다.
29일에 명길(鳴吉) 다른 본(本)에는 명길(鳴吉)이 이영달(李英達)로 되어 있다. 이 서문(西門)으로 압송해 나가니, 여러 친우(親友)들이 모두 문밖에서 전송하면서 통곡으로 작별하자 성(城)에 가득 모여 구경하는 자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으나 이공(二公)은 신색(神色)이 태연한 채 조금도 비척(悲慼)해 하는 표정이 없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슬피 여기며 감탄하였다. 초본(初本)에는 이 아래에 “한 양지바른 언덕에 이르러 잠깐 쉬는데, 명길(鳴吉)이 ‘공등(公等)이 스스로 죽기를 면하는 방도가 있소. 저들에게 가서 저들이 만일 힐문(詰問)하면 공들은 마땅히 이 척화를 공들만 한 것이 아니라고 대답하고 인하여 그때의 대각(臺閣)에 있던 사람들을 모조리 열거한다면, 형세상 다 죽이지는 못할 것이니 이것이 어찌 좋은 꾀가 아니겠소.’ 하였으나, 이공(二公)은 대답하지 않고 즉시 일어나 길을 가면서 서로 이르기를 ‘저 사람이 우리를 빙자해서 일시(一時)의 명류(名流)들을 모조리 죽이려 하니, 대간(大奸 크게 간교한 자)의 꾀는 더욱 간교하고 참혹하다 했다.’[行至一陽坡少憩 鳴吉謂曰 公等自有可免之道 到彼 彼若詰問 公等宜對以此 非獨吾等爲之 因悉擧其時臺閣之人 則勢不可盡殺 此豈非良謀乎 二公不答 卽起去 相謂曰 彼欲借我 盡殺一時名流 大奸之計 尤甚巧慘矣]”라는 87자가 있었다.
노가 있는 곳에 이르자, 적장(賊將) 용골타(龍骨打)가 나와서 맞이하므로 명길이 이공에게서 건대(巾帶)를 벗기고 몸소 영접한 다음, 용골타는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용골타가 다시 나와서 칸[汗]의 말로 힐문하기를,
“너희들이 만일 우리를 두려울 것이 없다고 여겼다면, 대군(大軍)이 나갔을 때 왜 나와서 싸우지 않고 도리어 이토록 궁박(窮迫)하게 되었느냐?”
하자, 이공이,
“우리나라는 대명(大明)을 섬겨온 지 벌써 3백 년이나 되었으므로 온 나라의 신민(臣民)이 모두 대명이 있는 줄만 알 뿐이다. 너희 나라가 이미 대호(大號 제호(帝號)를 말함)를 참칭(僭稱)하였으니, 의리상 끊어야 할 바이기 때문에 우리나라가 초봄에 이미 의리를 들어 너희 나라를 척절(斥絶)하였던 것인데, 얼마 안 되어 다시 신사(信使)를 통한 것은 매우 옳지 못한 일이었다. 이 때문에 우리들은 과감히 쟁론하였으니, 우리들이 쟁론한 것은 오직 대의(大義)일 뿐이요 승패(勝敗)와 존망(存亡)은 꼭 논하지 않는다.”
하니, 용골타가 묵묵히 있다가 결박(結縛)을 풀어서 진중(陣中)에 구치(拘置)하도록 하고는 명길에게 말하기를,
“이 무리들은 바로 나의 원수인데 이제 이렇게 결박해 왔으니, 모두가 공(公)께서 마음을 다하여 밝게 핵실(覈實)해 낸 소치입니다.”
하고, 인하여 주식(酒食)을 제공하고 초구(貂裘)를 상(賞)으로 주었다. 명길은 돌아와서 말하기를,
“오(吳)와 윤(尹)이 만일 내가 시킨 대로만 하였다면 거의 무사할 수 있었는데, 진전(陣前)에 이르러 대답한 말이 서로 어긋났으니 반드시 이는 두려워서 그렇게 된 것이다.”
하므로, 듣는 자가 침을 뱉고 비웃었다. 다른 본(本)에는 ‘명길이 돌아와서 말하기를[鳴吉歸言]’로부터 ‘듣는 자가 침을 뱉고 비웃었다.[聞者唾噱焉]’까지의 37자가 없다.
용골타가 다시 와서 힐문하기를,
“너희들의 이름은 지난날에 내가 들었던 이름이 아니니, 척화를 으뜸으로 제창한 사람이 아닌 듯하다. 또 으뜸으로 제창한 사람이 홍익한(洪翼漢) 한 사람뿐만은 아닐 것이니, 이제 만일 모조리 사실대로 고하면 너희들은 살아날 수 있을 것이다.”
하자, 대답하기를,
“우리나라에서 이미 우리들은 사핵(査核)하여 보냈으니, 어떤 사람이 또 있겠느냐. 우리들은 다만 한번 죽음이 있음을 알 뿐인데,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여 다른 사람을 무고(誣告)하여 끌어들이겠느냐.”
하니, 용골타가 두세 번 되풀이하여 유혹 협박하기를,
“지금 잘 생각하지 않으면 뒤에는 비록 뉘우치려 한들 되겠느냐.”
하므로, 이공이,
“죽는 것은 우리가 두려워하는 바가 아니다. 내가 내 머리를 이고 왔으니 잘라야 할 것이면 즉시 자를 일이요 더 이상 다른 말을 말라.”
하였다. 노(虜)가 철수하여 돌아갈 때에 그 두 장수(將帥)로 하여금 진후(陣後)에서 이공을 맡아 북녘으로 가게 하였는데, 이공을 맡은 자가 공등(公等)의 절의(節義)에 감복하여 항상 존경하였고, 그 침식(寢食)의 도구(道具)도 반드시 스스로 간검(看檢)하여 끝내 해이함이 없이 하였다. 그는 인하여 공등을 위로하기를,
“심양(瀋陽)에 이르면 반드시 살아서 돌아오게 될 것이오.”
하였다. 막 양화도(楊花渡)에 이르렀을 때 윤공(尹公)이 그의 아우 유강백(柔剛伯 윤유(尹柔))에게 보낸 편지에,
“2월 3일에야 백씨(伯氏 윤계(尹棨)를 말함)가 사절(死節)했다는 소식을 듣고 하늘에 부르짖어 통곡하매 기(氣)가 끊겼다가 겨우 소생하였다. 차라리 즉시 죽고 싶었지만 국가를 위하여 억지로 밥을 먹어 생명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이번 길이 어찌 다시 돌아올 기약이 있겠느냐. 위로는 노친을 잘 모시고 아래로는 여러 자식들을 잘 보살펴 굶어 죽지 않도록 할일은 모두 아우에게 있으니, 내가 무엇을 걱정하겠느냐. 형님을 장사 지낼 때는 절대로 망녕되이 장사를 후히 지낼 계책을 내지 말고 조금이나마 여유를 두어서 여러 식구의 목숨을 구하는 것이 옳다. 온 집안이 보전되면 뒤에 어찌 개장(改葬)할 길이 없겠느냐. 만일 장사 지내는 데에 재력(財力)을 다 쏟아 버리고 노친과 여러 식구가 얼고 굶주려 죽는다면, 죽은 형의 영혼도 반드시 지하에서 몹시 한탄할 것이다.
나의 이번 길을 대체로 청국(淸國)이 지난봄에 척화(斥和)를 으뜸으로 의논한 사람을 굳이 잡아 오라는 데에 인연한 것인데, 조정에서 홍익한이라고 알려 주었다. 또 성(城)안에 있는 사람을 찾았지만, 성중(城中)에는 마침 그럴 만한 사람이 없으므로 나와 오달제(吳達濟)가 소(疏)를 올려 자진하여 나선 것이다. 이는 곧 내가 스스로 한 일이니 조금도 남을 원망할 것은 없다. 남아가 세상에 태어났다가 몸을 바쳐 국가의 급한 때를 구한다면 이 또한 다행한 것인데,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느냐. 다만 노친께서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끝내 다시 뵐 수 없게 되어 하늘을 쳐다보고 피눈물을 흘릴 뿐이다.”
하였다. 윤공이 오공에게,
“우리가 갖은 군욕(窘辱)을 다 맛보고 노지(虜地)에서 죽는 것이 어찌 우리나라에서 죽어 버리는 것만 하겠는가.”
하자, 오공이,
“옳지 않소.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한 번은 죽기 마련인 것이니, 죽을 곳에서 죽어 자신의 절의(節義)를 밝히는 것이야말로 어찌 즐거운 일이 아니겠소. 왜 꼭 필부(匹夫)의 작은 절조를 본받으려 하오.”
하였다. 신천(信川)에 이르러 노가 10여 일을 머무르므로, 오공이 가서(家書 자기 집으로 보내는 편지)를 작성하여 품 안에 간직하였다. 대동강(大同江) 가에 이르러 한 촌집에 유숙하면서 몰래 집 주인 늙은이에게 가서(家書)를 전해 달라고 부치고, 또 벽(壁)에다 절구(絶句) 한 수를 써 놓았는데, 노인(虜人)이 한인(漢人)을 데리고 와서 보고는 별다른 말이 없다며 가 버렸다. 그 집 주인 늙은이는 노가 떠나기를 기다려서 그 서한(書翰)을 평안 감사(平安監司)에게 봉정(封呈)하자, 감사가 정원(政院)에 보냄으로써 오공의 집에까지 전해졌다. 거기에는 편지 한 장과 시(詩) 두 수가 있었으니 이는 바로 모부인(母夫人)에게 올린 것이고, 또 편지 두 장과 시 두 수가 있었으니 이는 형(兄)과 아내에게 부친 것이었다. 그 촌 집 벽에 써 놓은 시는 끝내 전하지 않는다. 그 모부인에게 올린 시에,
난리 속에 남북으로 부평처럼 흩어졌으니 / 風塵南北各浮萍
이렇게 아주 갈 줄이야 뉘 알았으리까 / 誰謂相分有此行
어머님 이별할 땐 두 아들이 절했는데 / 別日兩兒同拜母
올 때에는 한 아들이 홀로 뜰에 나아가리 / 來時一子獨趨庭
옷깃 끊고 나왔으니 삼천지교 저버렸고 / 絶裾已負三遷敎
읍선하며 공연히 촌초정만 슬퍼합니다 / 泣線空悲寸草情
관새에 길은 멀고 저녁 해 저무는데 / 關塞道脩西景暮
이승에서 어느 길로 다시 문안드리리까 / 此生何路更歸寧
외로운 신하 의리 발라 부끄런 마음 없고 / 孤臣義正心無怍
성주의 은혜 깊어 죽음 또한 가벼워라 / 聖主恩深死亦輕
가장 이 이승에서 한없이 슬픈 것은 / 最是此生無限痛
동구에서 기다리실 어머니 정 버림이오 / 北堂虛負倚門情
하였고, 그 형님과 아내에게 부친 시에는,
남한산성 무너진 날 죽었어야 할 몸인데 / 南漢當年就死身
초수 되어 아직도 못 돌아간 신하라오 / 楚囚猶作未歸臣
서(西)로 오며 형 생각에 몇 번이나 눈물 뿌렸던고 / 西來幾灑思兄淚
동녘을 바라보니 아우 그린 형이 가련하네 / 東望遙憐憶弟人
넋은 기럭 따르는데 외그림자 서러워라 / 魂逐塞鴻悲隻影
춘초몽(春草夢) 놀라 깨니 가는 봄이 애석하네 / 夢驚池草惜殘春
우리 형 색옷[綵服] 입고 어머니께 나아가 / 想當綵服趨庭日
늙으신 어머니를 무슨 말로 위로할까 / 忍作何辭慰老親
부부(夫婦) 은정 중하기도 한데 / 琴瑟恩情重
만난지 두 돌도 못 되었네그려 / 相逢未二朞
이제는 만 리 밖에 이별하여 / 今成萬里別
백년 가약이 헛되어졌소 / 虛負百年期
길이 멀어 편지도 못 부치고 / 地闊書難寄
산이 길어 꿈조차 더디 넘네 / 山長夢亦遲
나의 살 길 기필할 수 없으니 / 吾生未可卜
뱃속의 아이나 잘 보호하오 / 須護腹中兒
하여, 듣는 자가 모두 눈물을 흘렸다.
4월 15일 심양에 이르자, 노(虜)가 이른바 예부 아문(禮部衙門)이라는 한 소옥(小屋)에 이공(二公)을 넣어 두고 매우 엄격히 감금시켰다.
19일 이른 아침에 용골타가 이른바 호부(戶部)에 앉아서 이공을 불러갔다. 용골타가 칸[汗]의 말을 전하여,
“너희들이 비록 척화(斥和)를 하였다 할지라도 수창자(首倡子)는 아닌 듯하니 꼭 너희들을 죽이지는 않겠다. 너희들은 처자를 거느리고 이곳에 와서 살라.”
하자, 대답하기를,
“이는 결코 따를 수 없다. 빨리 우리를 죽여 달라.”
하니, 용골타가 반복하여 설명하고 또 위협하고 윽박질렀으나 끝내 굴하지 않자, 용골타가 일어나서 들어가 버렸다. 이공은 나와서 데리고 갔던 종에게 말하기를,
“오늘은 노가 반드시 나를 죽일 것이다.”
하자, 종이 놀라 울면서,
“왜 그의 말을 짐짓 따라 주지 않고 그의 노여움을 돋구어 스스로 큰 화(禍)를 재촉하십니까?”
하니, 이공이 웃으면서,
“몸을 굽히는 치욕이 도리어 죽음보다 심한 것이니 이는 너희들이 알 바가 아니다.”
하였다. 윤공은 또 그 종에게 말하기를,
“노가 우리의 가속(家屬)까지 물었으니, 이는 바로 우리 여러 식구들에게까지 화해(禍害)를 입히려는 것이 아니겠느냐. 내가 이미 난리 뒤에 생사를 모르게 되었다고 대답하였으니, 노가 만일 다시 그 일을 너희들에게 묻거든 너희들도 내가 대답한 대로 말하라.”
하였다. 이공은 드디어 태연하게 서로 웃고 말하였으며, 밥 먹을 때도 평소처럼 잘 먹었다. 이공은 또 서로 말하기를,
“우리들이 만일 저들의 말을 따른다면 끝내는 오랑캐가 되고 말 것이니, 차마 따를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윽고 용골타가 다시 나와 이공을 끌고 들어가고, 또 이공을 따라갔던 종 3인을 잡아다가 담장 모퉁이에 구치(拘置)하였다. 이때 우리나라 재신(宰臣)과 시강원관(侍講院官)은 용골타의 초청을 받아 용골타와 한 좌석에 참여하였다. 용골타는 다시 소리를 질러 협박하자 이공은 또한 5, 6차를 항언(抗言)으로 거절하였고, 재신 등도 두세 번이나 이공을 권유하였으나 끝내 듣지 않았다. 용골타는 그들이 끝내 굴복하지 않을 것을 알고 마침내 종호(從胡 오랑캐의 하인)를 시켜 이공을 매우 단단히 결박하여 끌어 내갔다. 그런데 이공은 오히려 되돌아 보고 욕설을 하였다. 이공을 마침내 성(城) 서문(西門) 밖으로 데리고 갔는데, 여기가 바로 노인(虜人)이 형살(刑殺)하는 곳이었다. 재신들은 나와서 서로 돌아보고 말하였다.
“참으로 만 마리의 소로도 끌어 돌릴 수 없는 사람들이다.”
5월 24일에 질관(質館)의 재신(宰臣) 남이웅(南以雄)ㆍ박로(朴𥶇)ㆍ박황(朴潢) 등이 서장(書狀)을 작성하였는데, 그 서장은 다음과 같다.
“지난 4월 19일에 용장(龍將 용골타를 말함)이 신등(臣等) 6인과 겸보덕(兼輔德) 신(臣) 이명웅(李命雄)을 초대하여 함께 좌정(坐定)한 자리에서 윤집ㆍ오달제를 그 앞에 끌어내놓고 말을 전하기를, ‘이 사람들의 죄는 의당 죽어야 하나, 특별히 인명(人命)의 귀중함을 생각하여 온전히 살려서 처자를 데리고 들어와 이곳에서 살도록 허락하려 하였지만, 윤집은 「난리 뒤에 처자들의 생사도 모르겠다.」 하고, 오달제는 「이제까지 죽음을 각오하고 여기에 온 내가 만일에 살아서 돌아가면 우리 임금과 늙은 어머니를 다시 뵙게 될 것이니, 만일 이렇게 된다면 사는 것이 도리어 죽는 것만 못하다.」 하여, 그들이 온전하게 살리려는 은혜를 생각지 않고 이렇게 반항하니 이제는 더 이상 용서할 수가 없소.’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등은 대답하기를 ‘이 사람들은 연소한 사람들로서 군친(君親)에 대한 생각만 간절하여 이처럼 망발(妄發)하였지만, 만일 끝내 온전히 살려 준다면 어찌 천재(千載)의 미사(美事)가 아니겠소.’ 하면서 두세 번이나 간청하였으나 끝내 윤집ㆍ오달제는 죽음을 면치 못했습니다.”
6월 6일에 그 서장이 이르자, 상이 정원(政院)에 전교하기를,
“두 신하의 일은 매우 참측(慘惻)하니, 그들의 집에 월름(月廩)을 주어야 한다.”
하였다. 이공이 죽을 때에 필선(弼善) 정뇌경(鄭雷卿)이 질관(質館)에 있으면서 역인(譯人)을 시켜 시체를 수습할 것을 간곡히 요청하였으나, 노가 끝내 들어주지 않았다.
오공(吳公)은 관후(寬厚)하고 충신(忠信)하며 단정(端正)하고 방직(方直)하였다. 평상시에는 온공(溫恭)하여 말을 잘 못하는 듯하지만, 국가(國家)의 이해(利害)와 정령(政令)의 득실(得失)을 논할 때에는 사기(辭氣)가 격앙(激昻)하여 회피(回避)하는 바가 없으므로 듣는 자가 위축되었다. 성품이 매우 효성스럽고 우애(友愛)가 더욱 돈독하였으며, 평소의 언행(言行)이 모두가 여기에서 근본하였기 때문에 그를 대하는 자는 자신도 모르게 효제(孝悌)의 마음이 왕성하게 일어나곤 하였다.
일찍이 남씨(南氏) 집에 더부살이할 때 날마다 대부인(大夫人)을 가서 보살펴 드렸는데, 남씨 집에서 혹 기솔(騎率 말과 시종)을 제공하지 못하면 도보로 시리(市里)를 지나다니곤 하였으되, 아무리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이라도 그 일을 그만두지 않았다. 일찍이 부형(婦兄 아내의 오빠)인 남일성(南一星)에게 말하였다.
“모든 사람이 사생(死生)의 즈음에서 흔히 평소 지킨 바를 상실하는 것은 이해관계가 그를 위협한 때문일세. 그러나 내가 고금(古今)을 통해 관찰해 보건대, 이(利)를 추구한 자라서 꼭 살지만은 않았고, 해로운 데 처한 자라서 꼭 죽지만은 않았네. 옛날 당(唐) 나라 무조(武曌)가 즉위(卽位)하였을 때, 저수량(褚遂良)은 무조가 선제(先帝)를 경사(經事)하였다고 직언(直言)하였으니 그 형세야말로 염하(簾下)의 박살(撲殺)을 면치 못했을 터인데도 오히려 애주 자사(愛州刺史)로 좌천해 있다가 좋게 죽었고, 장손무기(長孫無忌)는 자못 의위(依違 이럴까저럴까하여 마음이 확정되지 않는 것)한 뜻이 있었고 또 원구(元舅 천자의 외숙(外叔))의 친분(親分)과 정책(定策 천자를 옹립한 것을 말함)의 공훈이 있었지만 끝내 멸족(滅族)의 화(禍)를 면치 못하였으니, 이것으로 말한다면 사람은 마땅히 할 일을 할 뿐인데 또 이해(利害)를 따져서 진퇴(進退)하는 바가 있어서야 되겠는가. 성인(聖人 공자를 말함)이 이 때문에 ‘내가 좋아하는 것을 좇아서 하리라.’ 한 훈계가 있었던 것일세.”
그의 백부(伯父)인 추탄(楸灘) 상공(相公) 윤겸(允謙)은 율곡ㆍ우계 두 선생의 문하에서 수업하였고, 공은 또 추탄에게서 배웠다. 그 연원(淵源)의 심원(深遠)함이 이러한 것이 있었기 때문에 그가 수립한 절의(節義)가 이와 같았으니, 아무리 뛰어난 기질(氣質)을 타고났다 할지라도 학문의 힘을 또한 속일 수 없는 것이다.
처음 모씨(某氏)에게 장가들었으나 자녀가 없었고, 현령(縣令) 남식(南烒)의 딸에게 재취(再娶)한 지 겨우 1년을 넘었는데 난(亂)을 만나 북(北 청 나라를 말함)으로 잡혀가니, 사람들은 그 유복아(遺腹兒)가 있는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이윽고 열 달이 되어 여아(女兒)를 낳았으나 또 요절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천도(天道)도 무심하다고 애석해 했다.
효종(孝宗) 때에 연신(筵臣) 김시진(金始振)이 아뢰기를,
“홍익한ㆍ윤집ㆍ오달제 세 사람의 절의는 의당 포증(褒贈)하여 풍성(風聲)을 세워야 하는데, 당초에는 의구(疑懼)한 마음에서 어쩔 수 없었지만 이제는 오랜 세월이 지난 뒤이기에, 그들을 보호하는 데 있어 다른 염려가 없을 것입니다.”
하자, 상이 즉시 시행할 것을 명하여 이에 홍익한에게는 도승지(都承旨)를, 윤집에게는 부제학(副提學)을, 오달제에게는 좌승지(左承旨)를 각각 추증(追贈)하였다. 상은 또 일찍이,
“윤집은 그의 할아버지 및 형과 함께 양세(兩世)에 걸쳐 세 사람이 모두 순절(殉節)하였으니, 어찌 귀하지 않은가.”
하였다. 집(集)의 아우인 진사(進士) 유(柔)도 효행(孝行)으로 세상에 드러났다. 정축년(1637, 인조15) 이후에는 과거 공부를 폐지하고서 몸을 닦고 학문에 힘쓰다가 불행히도 일찍 죽으므로 사우(士友)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겼다. 어떤 이는,
“경진년(1640, 인조18)에 조가(朝家)에서 계책을 써 황조(皇朝)와 밀통(密通)하자, 노인(虜人)이 이를 알아차리고 최명길(崔鳴吉)을 잡아가니 명길이 시(詩)를 지어,
내 비록 삼학사를 죽이지는 않았지만 / 我雖不殺三學士
조용히 생각하면 마음 절로 놀라네 / 中夜思之心自驚
천도란 원래부터 순환하기 좋아하여 / 天道由來好回換
늘그막 오늘날에 또 서녘을 가는구나 / 白頭今日又西行
했다.”
하였다. 최명길이 만일 이때에 죽임을 당했더라면 조금이나마 속죄(贖罪)를 할 수 있었을 것인데 끝내 무사하였으니, 이 어찌 하늘의 뜻이 피차의 사이에 억양(抑揚)하는 바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삼가 《춘추(春秋)》의 의(義)를 상고하건대, 열국(列國)의 신하가 경사(京師)를 우러러 배신(陪臣)이라고 자칭하는 것은 대개 분한(分限)이 일정한 것이다. 천경지의(天經地義 정당(正當)하여 바꿀 수 없는 떳떳한 도리(道理))는 민이(民彝 사람이 지켜야할 떳떳한 도리)의 큰 것이니 이를 어기면 금수(禽獸)이다.
우리 태조가 나라를 창건하였을 때 고황제(高皇帝 명 태조(明太祖)를 말함)가 조선(朝鮮)이라 명명하여 동번(東藩)으로 삼자, 본조(本朝)에서는 대대로 제후(諸侯)의 법도(法度)를 지키어 정성을 다해서 근신하게 섬겨왔다. 태종(太宗) 때에 황제(皇帝)가 일찍이,
“조선 국왕(朝鮮國王)이 나를 흠애(欽愛)하는구려.”
하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에 이르러 종사(宗社)가 폐허(廢墟) 지경에 놓이자, 신종황제(神宗皇帝)가 천하의 병력을 일으켜 종사를 보존시켰으니, 무릇 이 동편(東偏 조선을 가리킴)에는 초목이나 곤충까지도 모두 황제의 덕이 미쳤던 것이다.
정축년(1637, 인조15)의 일은 어쩔 수 없는 사정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만번 꺾여도 반드시 동으로 향해 흐르는 물과 같은 마음은 일찍이 변함이 없었다. 우리 효종대왕(孝宗大王)의 경우는 성지(聖志)가 더욱 뛰어나서 마치 저 밝은 일월(日月)과 같았다. 저 세 신하[三臣 홍익한ㆍ윤집ㆍ오달제]는 죽음으로써 그 마음을 표명하였으니, 천경지의와 민이(民彝)가 이를 힘입어 땅에 떨어지지 않았고, 효고(孝考)의 숭보(崇報)한 은전(恩典)도 더 이상 유감이 없게 되었으니, 어찌 훌륭하지 않겠는가. 어떤 이는,
“오늘날에는 《춘추(春秋)》를 읽을 곳이 없다.”
하였으니, 대체로 삼학사(三學士)가 있는 줄을 몰라서 한 말이다.
금상(今上 현종(顯宗)을 말함)께서 무신년(1668)에 일찍이 희정당(煕政堂)에 납시어 삼신(三臣)에 관한 일을 연신(筵臣)에게 묻자, 이조 참판 민정중(閔鼎重)이 본말(本末)을 갖추어 대답하였는데, 좌의정 허적(許積)이 ‘일을 좋아하여 명예를 낚은 사람이다.’ 하므로 민정중이,
“그때에 노인(虜人)이 감히 천조(天朝)를 적수로 여겨 막 위호(僞號 제호(帝號))를 참칭하던 판이었으니, 저 삼신이 어찌 통척(痛斥)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하니, 상이,
“섬기는 것은 천조에 관계되어 있으므로 대의(大義)가 의당 그러해야 할 것인데, 더구나 끝내 몸을 죽여서 말을 실천하였으니 명예를 낚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였다. 훌륭하다, 이는 참으로 성인(聖人)의 말이다. 상은 또,
“그때에 홍태시(洪太始 청 태종(淸太宗))가 삼신을 어떻게 말하였는가. 사우(祠宇)를 세워서 향사(享祀)하면 어떻겠는가?”
하자, 영의정 정태화(鄭太和)는,
“청문(聽聞)이 번거로울까 염려됩니다.”
하였고, 민정중은,
“만일 사림(士林)들이 세운다면 금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그렇게 여겼다. 또 진사(進士) 이중명(李重明)이 소(疏)를 올려 신종황제(神宗皇帝)의 사당을 세울 것을 요청하였으므로 상이 그 일을 조정에 하의(下議)하였으나, 조정의 의논이 한결같지 않았기 때문에 끝내 시행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상의 뜻은 이를 옳게 여겼기 때문에 즉시 그 사람을 관직에 등용하였다. 나는 일찍이, 이 의논이 조만간에 이루어지면, 우리 효고(孝考)는 의당 배향(配享)될 것이고 저 삼신도 묘정(廟廷)에 종향(從享)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또 상고하건대 윤 학사(尹學士)는 조부(祖父)인 용양공(龍陽公) 섬(暹)과 형(兄)인 부사공(府使公) 계(棨)가 모두 순절하여 죽었고, 홍 학사(洪學士)는 부인(夫人)과 두 아들 및 자부(子婦)가 모두 노(虜)에게 굴욕을 당하지 않고 몸을 결백하게 하여 죽었다. 그래서 윤 학사의 절의는 받은 바가 있었고 홍 학사의 절의는 준 바가 있었으니, 이것이 어찌 우리 열성(列聖) 및 황상(皇上)에게 배양(培養)하신 소치가 아니겠는가. 그와 동시(同時)에 김청음(金淸陰 김상헌(金尙憲))ㆍ정동계(鄭桐溪 정온(鄭蘊)) 등 제공(諸公)도 함께 《춘추》의 대의(大義)가 있었다.
참지(參知) 황일호(黃一皓)도 노(虜)에게 살해되었는데, 그의 아들 진(璡)은 나이가 매우 어려 항상 하늘을 우러러 부르짖고 통곡하였다. 그가 일찍이 홍공(洪公 홍익한을 말함)의 유적(遺跡)을 나에게 보이고 서(序)를 요청하였는데, 대체로 그 아버지의 피화(被禍)가 홍공과 대략이 서로 같기 때문이었다. 그후 얼마 안 되어 황생(黃生 황진을 말함)이 갑자기 세상을 떴으므로 슬픈 마음이 세월이 가도 잊혀지지 않는다. 지금의 청주 목사(淸州牧使) 남공 구만(南公九萬)이 와서 나에게,
“오 학사(吳學士)는 바로 우리 고부(姑夫 고모부)입니다. 우리 선군(先君)께서 일찍이 그분의 사실(事實)을 모아 1통(通)을 작성하여 작자(作者)에게 부탁해서 전(傳)을 만들려고 하였습니다. 이제 우리 고모(姑母)가 외로운 신세로 원통하고 서러움을 품은 채 이 일이 이루어지기만 바라고 있기 때문에 삼공(三公 삼학사)의 일을 아울러서 부탁드립니다.”
하였다. 이윽고 들으니, 남공(南公)의 고모가 또 별세하였다 한다. 내가 전후에 걸쳐 남의 뜻을 저버림이 매우 많았으니, 이는 곧 종신토록 한이 될 것이다. 그래서 빨리 붓을 가져다가 글을 지어 ‘삼학사전(三學士傳)’이라 명명하였으니, 죽은 이가 앎이 있다면 조만(早晩)의 간격을 가지고 한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 이 글을 읽고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참으로 이른바 인심(人心)이 없는 자이다. 그러나 《춘추》의 대의가 이제 기휘(忌諱)된 지가 오래고 보면, 남공의 양세(兩世 부자지간)는 지금 세상의 선비가 아니니, 가상하기 그지없다.
또 그윽이 생각건대, 우리나라는 예의(禮義)가 본디 밝아 당시에 용기(勇氣)를 드러낸 사람이 매우 많았다. 강도(江都)로 말하면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 김 상국(金相國) 이하 10여 인과 기타 자기가 처한 곳에서 목숨을 바쳐 드러나게 된 이가 그 수를 이루 헤아릴 수 없고, 또 몸을 더럽히지 않고 조촐하게 하여 의지를 지킨 자로 말하면 윤공 선거(尹公宣擧) 등 제현(諸賢)이 있는데, 일은 비록 서로 다르지만 대의는 일치하니, 모두 빠뜨릴 수가 없다. 이들은 꼭 별도로 전기(傳記)를 만들 것은 없고 다만 그들의 행장(行狀)과 비지(碑誌)를 수합하여 이 편(編)의 맨 뒤에 붙인다면 그 의의가 갖추어질 것이다. 나는 늙고 병들어 이런 일을 할 겨를이 없으니, 뜻 있는 선비가 있어 뒤에 완성하기 바란다.
숭정(崇禎) 신해년(1671, 현종12) 7월 일에 은진 송시열은 쓰다.
전(傳) 안에 맨 처음에는 양파(陽坡)의 한 항목(項目)이 있었다. 그후 《정원일기(政院日記)》와 이기남(李箕男 이항복(李恒福)의 아들임)의 서찰(書札)에 의거하여 그 실상(實狀)에 어긋난 점이 있음을 알았는데, 또 이제 병조 판서 남구만(南九萬), 이조 판서 이민서(李敏敍)도 그 실상과 어긋난 점을 강력히 말하였다. 대체로 이 전(傳)은 맨 처음 삼가(三家 삼학사의 집안)의 행장(行狀)에 의거하여 작성하였는데, 이 한 항목은 실로 남공(南公)의 선인(先人 구만의 아버지인 남일성(南一星))이 찬(撰)해 놓은 오 학사(吳學士)의 행장에서 나온 것인데도 지금 남공의 말이 이러하다. 대체로 당시의 일을 삼가(三家)의 자제(子弟)로서 직접 목도(目覩)한 자는 없었고, 아마도 전해 들은 데서 나온 것이고 보면, 《정원일기》와 이기남이 직접 목격하고 쓴 서찰과 남(南)ㆍ이(李) 두 분의 말이 제일 믿을 만하기 때문에 양파의 한 항목을 빼 버렸다. 그러나 옛날에는 있었지만 지금은 없어졌다는 실상을 아주 없애서 후인(後人)에게 의문점을 남길 수는 없기 때문에 대략 이와 같이 기록하였다.
숭정 계해년(1683, 숙종9) 4월 13일에 시열은 추서(追書)하다.
[주-D001] 답청(踏靑) : 중국의 풍속에 음력(陰曆) 3월 삼짇날을 답청일(踏靑日)이라 하는데, 이날은 모든 남녀(男女)가 산과 들에 나가서 푸른 새싹을 밟는 풍속이 있었다.[주-D002] 주호(朱胡) : 주호는 주희(朱熹)와 호씨(胡氏)를 가리키는데 호씨는 누구인지 자세하지 않다. 최명길(崔鳴吉)의 차자(箚子)에 “경연광(景延廣 오대(五代) 시대 진(晉) 나라 사람으로, 거란(契丹)과 화친하자는 조의(朝議)를 혼자서 반대했다가, 거란에게 나라가 망하고 자신도 잡혀 죽었음)의 말은 바른 것 같았으나, 불화(不和)를 일으켜 나라를 망쳤으므로 주자(朱子)가 그를 폄척(貶斥)하였고, 호씨(胡氏)는 ‘경연광이 진(晉)을 아비처럼 섬기자 거란(契丹)이 분개하게 여겨 그를 숙청하려 하였으되, 자신이 불화를 일으켜 군부(君父)에게까지 화가 미치게 되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였다.’ 하였으니, 호씨 같은 바른 학술(學術)로도 이렇게 말한 것은 어째서이겠습니까. 대체로 신하들이 원려(遠慮)를 간직하지 못하여 나라를 망치게 되면, 그 일은 바르다 할지라도 죄는 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고 하였다.[주-D003] 성하(城下)의 맹세 : 적(敵)이 우리의 성(城) 밑까지 침공(侵攻)해 들어와서 강화(講和)의 굴욕적인 맹약(盟約)을 갖게 되는 일을 말한다.[주-D004] 북원(北轅)의 치욕(恥辱) : 왕(王)의 대가(大駕)가 북쪽으로 끌려가는 치욕. 즉 금(金) 나라 군대가 남하(南下)하여 송(宋) 나라 수도 변경(汴京)을 함락시키고 송의 휘종(徽宗)과 흠종(欽宗)을 체포하여 북으로 돌아간 일을 말한다.[주-D005] 질관(質館) : 항복한 사람의 질자(質子)를 데려다가 수용(收容)하는 관소(館所)이다.[주-D006] 머리를 부수어 : 임금을 극력 간(諫)하는 것을 말한다. 춘추(春秋) 시대 진(秦) 나라 대부(大夫) 금식(禽息)이 백리해(百里奚)를 천거하였으나, 목공(穆公)이 들어주지 않자 문밖에 나가 머리를 땅에 부딪쳐 머리가 깨져서 죽으므로, 목공이 그를 가슴 아프게 여겨 백리해를 등용시켰다고 한다.[주-D007] 옷깃 끊고 : 진(晉) 나라 때 온교(溫嶠)가 국사(國事)를 위하여 집을 떠나려 하는데 그의 어머니 최씨(崔氏)가 옷자락을 붙잡고 말리자, 온교가 옷자락을 끊고 가 버렸던 고사이다. 《晉書 卷67》[주-D008] 읍선(泣線)하며 …… 슬퍼합니다 : 읍선은 당(唐) 나라 맹교(孟郊)의 “자모의 수중에 실밥은 유자의 신상에 옷이로다.[慈母手中線 遊子身上衣]”라 한 시(詩)에서 온 말로, 즉 옷을 보고 어머니를 생각하여 운다는 뜻이고, 촌초정(寸草情)은 역시 맹교(孟郊)의 “한 치나 되는 풀의 정을 가지고 삼춘의 은혜를 누가 갚으리.[誰將寸草心 報得三春暉]”라 한 시에서 온 말로, 촌초(寸草)는 아들에 비한 것이고 삼춘은 어머니에 비한 것이다.[주-D009] 동구에서 …… 어머니 정 : 춘추전국 시대 제(齊) 나라 왕손가(王孫賈)가 왕(王)을 따라 전쟁에 나갔다가 패하여 왕의 간 곳을 모르고 집에 돌아오자, 그의 어머니가 꾸짖기를 “네가 아침에 나가서 늦게 오면 내가 문에서 기다리고, 네가 저물녘에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으면 내가 동구에서 기다렸는데, 네가 지금 왕을 따라 나갔다가 왕의 간 곳도 모르고 무엇하러 돌아왔느냐.”고 나무란 데서 온 말이다.[주-D010] 초수(楚囚) : 춘추 시대 초(楚) 나라 종의(鍾儀)가 진(晉) 나라에 포로가 되어 갇혀 있었으므로 그를 초수라고 일컬은 데서 온 말로 타국(他國)에 잡혀간 것을 비유한 말이다.[주-D011] 염하(簾下)의 박살(撲殺) : 당시 측천무후(則天武后)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였기 때문에 바로 측천무후에게 죽임을 당했으리라는 뜻이다.[주-D012] 내가 …… 하리라 : 《논어(論語)》 술이(述而)에 “공자(孔子)가 ‘부(富)를 구할 수만 있다면 아무리 천직(賤職)일지라도 내가 또한 하겠지만, 구하지 못할 바에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좇아서 하리라.’ 했다.” 하였다.[주-D013] 양파(陽坡)의 한 항목(項目) : 오달제(吳達濟)ㆍ윤집(尹集) 두 신하를 노중(虜中)으로 보낼 적에 최명길(崔鳴吉)이 오달제ㆍ윤집과 함께 양파(陽坡)까지 가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그대들이 만일 나의 말대로만 한다면 살아올 수가 있소.” 하자, 오달제ㆍ윤집이 무슨 뜻이냐고 물으니, 최명길이 말하기를 “그대들이 지난번에 있었던 우리나라의 척화신(斥和臣)들을 많이 끌어대어 고발하면 저 오랑캐들이 그 척화신들을 모조리 다 죽일 수는 없기 때문에 그대들도 살아올 수가 있소.” 하므로, 오달제ㆍ윤집이 “그것은 옳지 않소, 어찌 우리 두 사람이 살아남기 위해 다른 사람들까지 이 불측(不測)한 지경에 빠뜨릴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宋子大全附錄 卷19 記述雜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