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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장(行狀) [송시열(宋時烈)]
본관은 전라도 광주(光州) 평장동(平章洞)이다. 고조(高祖) 휘(諱) 극뉵(克忸)은 사간원 대사간을 지내고 예조 참판에 추증되고 광원군(光原君)에 봉해졌다. 고조비(高祖妣) 함양 박씨(咸陽朴氏)는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되었고, 의령 남씨(宜寧南氏)는 정부인에 추증되었다. 증조(曾祖) 휘 종윤(宗胤)은 진산 군수(珍山郡守)를 지내고 병조 참의에 추증되었다. 증조비(曾祖妣) 영산 신씨(靈山辛氏)는 숙부인(淑夫人)에 추증되었다. 조(祖) 휘 호(鎬)는 지례 현감(知禮縣監)을 지내고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조비(祖妣) 전의 이씨(全義李氏)는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추증되었다. 고(考) 휘 계휘(繼輝)는 사헌부 대사헌을 지내고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비(妣) 평산 신씨(平山申氏)는 정부인에 추증되었다.
선생의 휘는 장생(長生)이요, 자는 희원(希元)이니, 그 선대(先代)는 대개 신라(新羅)에서 나왔다. 신라 때 왕자(王子) 가운데 흥광(興光)이란 분이 나라가 장차 어지러워질 것을 알고는 광주(光州)로 은둔하여 서민(庶民)이 되어 숨어 살았으므로 자손들이 이를 인하여 이곳을 본관(本貫)으로 삼았다. 고려(高麗)에 이르러 더욱 창성하여 8대를 잇달아 평장사(平章事)가 되었으니, 동의 이름을 평장동(平章洞)이라 한 것은 김씨(金氏)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대대로 현달한 분을 배출하였다. 좌의정 휘 국광(國光)은 두 번이나 훈맹(勳盟)에 참록(參錄)되어 부원군(府院君)에 봉해졌는데, 이분이 바로 광원공(光原公)의 고(考)이시다. 대헌공(大憲公)의 자는 중회(重晦)이고 호는 황강(黃岡)으로, 성품이 총명하고 빼어나 경사(經史)에 두루 통달해 우뚝이 큰 인물이 되었다. 이에 당대의 명현(名賢)인 사암(思菴) 박순(朴淳)과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이 모두 공을 추중하였고, 율곡(栗谷) 이이(李珥)는 항상 재상이 될 만한 인물이라고 칭송하였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단명(短命)하여 미처 품은 재주를 다 펼치지 못하였으므로 조야(朝野) 사람들이 안타깝게 여겼다. 정부인(貞夫人)은 참찬(參贊)을 지낸 이간공(夷簡公) 신영(申瑛)의 딸이며, 고려조에서 태사(太師)를 지낸 장절공(壯節公) 신숭겸(申崇謙)의 후예이다.
선생은 가정(嘉靖) 무신년(1548, 명종3) 7월 8일 신시(申時)에 한양(漢陽)의 정릉동(貞陵洞)에 있는 집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품행이 장중(莊重)하여 웃고 떠드는 것을 함부로 하거나 놀이를 좋아하지 않으니, 식자(識者)들이 이미 공의 덕량과 기국의 됨됨이를 알아보았다. 11세 때에 모친인 신 부인(申夫人)이 돌아가시고 부친인 대헌공이 지방으로 쫓겨남에 따라 조부인 찬성공이 맡아 길렀다. 찬성공은 선생이 나이 어리고 약한 것을 안쓰럽게 여겨 항상 슬하에만 두고 스승을 찾아가 수학(受學)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조금 자란 뒤에는 능히 스스로 분발하여 성현(聖賢)의 학문에 뜻을 두고 세속의 영리(營利)에는 조금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처음에 구봉(龜峯) 송익필(宋翼弼)에게서 사서(四書)와 《근사록》 등의 책을 배웠는데, 온 힘을 다 기울여 탐구하면서 조금도 게으름을 부리지 않고 부지런히 하니, 이때부터 학문이 날로 진보하였다. 이에 대헌공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우리 아이가 이미 이러하니 나는 걱정할 것이 없다.” 하였다. 장성해서는 율곡 선생을 사사(師事)하여, 성학(聖學)의 심오함을 두루 듣고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힘써 실행하면서 자임(自任)하기를 매우 중하게 하니, 율곡 선생의 기대와 허여가 매우 깊었다.
을해년(1575)에 대헌공이 평안 감사로 나갔는데, 평안도는 본래 번화한 곳으로서 놀이하는 사람들이 날마다 성색(聲色)을 즐겼으나, 선생은 매번 부친을 찾아뵙는 여가에도 정신을 가다듬어 스스로를 지키면서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에는 조금도 뜻을 두지 않았다. 그러자 모두들 다른 사람으로서는 따라가지 못할 점이라고 하면서 칭송하였다.
만력 무인년(1578)에 조정에서 학행(學行)이 있는 유일(遺逸)을 널리 찾아 등용할 때 ‘성인의 경전에 조예가 깊고 옛날의 교훈을 돈독히 믿는다.[沈潛聖經 篤信古訓]’는 것으로써 천거되어 창릉 참봉(昌陵參奉)에 제수되었다.
신사년(1581)에는 대헌공이 사신으로 경사(京師)에 가게 되어 선생이 수행하게 되었는데, 이조에서 ‘재랑(齋郞)의 자리를 오래 비워 둘 수 없다.’고 아뢰어 돈녕부 참봉(敦寧府參奉)과 자리를 서로 바꾸어 제수되었다. 이 행차에서 만여 리가 넘는 먼 길을 왕복하였는데, 오가는 동안에 부지런히 봉양하면서 성효(誠孝)를 극진하게 하였다. 이때 심지어는 숟가락을 뜨는 숫자까지도 옆에서 헤아리면서 편안한지의 여부를 살폈다.
임오년(1582)에는 다시 재주와 행실이 탁월하다 하여 승서(陞敍)하는 명이 있었다. 이해에 대헌공이 서거하였는데, 여묘살이를 하면서 3년의 상제(喪制)를 다 마쳤다. 상복을 벗고서 순릉 참봉(順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사임하여 체차되었으며, 곧바로 다시 전의 명령으로 평시서 봉사(平市署奉事)에 승진되었다가 얼마 후에 물러났다. 이어서 활인서 별제(活人署別提), 사포서 별제(司圃署別提), 사옹원 봉사(司甕院奉事)에 여러 차례 임명되었으나, 모두 신병을 이유로 사퇴하였다.
무자년(1588)에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제수되고, 경인년(1590)에 규례에 따라 통례원 인의(通禮院引儀)로 승진하였다. 신묘년(1591)에 정산 현감(定山縣監)으로 나가서는 잔폐된 백성들을 소생시키고 폐단을 시정하였는데, 한결같이 충서(忠恕)로써 정사를 하였다.
임진년(1592)에 왜노(倭奴)가 침입하였는데, 군대에 관한 일이 아주 번잡하고 백성들이 몹시 지치고 쇠약해졌다. 그런 처지에서도 선생은 책응(策應)하고 위무(慰撫)함에 있어서 모두 마땅하게 조처하였으며, 피난하여 온 사대부(士大夫)들도 정성을 다하여 돌보아 주었으므로, 아전과 백성들은 편안하고 떠도는 자들도 객지를 떠도는 괴로움을 잊었다. 그러자 방백(方伯)이 ‘모든 일에 성심을 다하였으며, 정사를 함에 있어서 번거로움이 없다.’고 포계(褒啓)하였다.
병신년(1596)에 임기가 만료되어 연산(連山)에 있는 집으로 돌아왔는데, 얼마 안 되어 다시 호조 정랑에 제수되었다. 이때 명나라 군사가 남하(南下)하자, 선생은 호남(湖南)으로 가 군량(軍糧)을 조달하는 일을 맡았다. 이 일을 마치고 복명(復命)하였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무슨 일로 인해 면직되었다. 이에 해서(海西)의 황주(黃州)와 봉산(鳳山) 사이에 우거(寓居)하였다. 이때는 막 난리를 치르고 난 뒤끝이라서 선비들이 학문 공부를 폐하고 있는 상태였는데, 선생은 문인(門人) 및 자제(子弟)들과 밤낮으로 강송(講誦)하며 강마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얼마 후에 다시 단양 군수(丹陽郡守)에 제수되었다.
무술년(1598) 여름에 군자감 첨정(軍資監僉正)과 호조 정랑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가을에 남양 부사(南陽府使)에 제수되었는데, 언관(言官)이 너무 갑작스럽게 승진하였다고 논하여 체직되었다.
기해년(1599) 봄에 양근 군수(楊根郡守)와 익위사 익위(翊衛司翊衛)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임하여 체차되었다. 얼마 후에 다시 군자감 첨정에 제수되었는데, 은명(恩命)을 여러 차례 사양하는 것은 온편치 못하다 여겨 나가 사은숙배하였다. 가을에 안성 군수(安城郡守)에 제수되었다. 이때 경기도 일원이 난리를 겪은 지 오래되지 않은 탓에 백성들이 조락하여 초췌하였으므로 선생이 마음을 다해 무마하였는데, 몇 해가 지나지 않아서 거의 회복되었다.
신축년(1601)에 조정에서 국(局)을 설치하고 《주역(周易)》의 구결(口訣)을 교정(校正)하였는데, 이때 선생은 특별히 부름을 받고 나아가 종친부 전부(宗親府典簿)로서 국의 일을 겸임하게 되었으나, 신병으로 인해 공직(供職)하지 못하였다.
임인년(1602) 봄에 적신(賊臣) 정인홍(鄭仁弘)이 용사(用事)하면서 크게 함정을 설치해 놓고는 사류(士類)들을 금고(禁錮)시키자, 선생은 서울에 머물러 있고 싶지 않아서 마침내 향리로 돌아오고 말았다. 계묘년(1603) 여름에 익산 군수(益山郡守)에 제수되었다가 을사년(1605) 겨울에 파직되어 그만두고 돌아왔다.
광해군 기유년(1609, 광해군1)에 익위사 익위에 제수되었으나 출사하지 않았으며, 곧이어 회양 부사(淮陽府使)에 제수되었다가 곧바로 철원 부사(鐵原府使)로 바뀌어 제수되었다.
계축년(1613)에 이이첨(李爾瞻)이 광해군의 뜻에 영합하기 위하여 영창대군(永昌大君) 의(㼁)를 모살(謀殺)하고, 모후(母后)까지 해치려고 하였다. 그때 마침 무뢰배인 박응서(朴應犀) 등이 행상(行商)을 살해하고 약탈한 일이 발각되어 체포되자, 이이첨이 박응서 등을 꾀고 협박하여 영창대군을 끌어들여 큰 옥사(獄事)를 일으켰다. 이때 선생의 서제(庶弟)인 김경손(金慶孫)과 김평손(金平孫) 등이 모두 연루되어 고문을 받다 죽었는데, 얼마 뒤에 육시(戮屍)를 하고 역률(逆律)로 논하였다. 이는 이이첨의 무리가 선생까지 해치려고 해서 그런 것이었다. 그러자 선생의 온 집안이 연좌(緣坐)될 것이라고들 하면서 친구 중에는 벌벌 떨면서 화를 늦출 방도를 찾아보려고 도모하는 자도 있었으나, 선생은 태연한 자세로 조금도 마음을 쓰지 않았다. 그러면서 다만, “죽고 사는 것은 천명에 달린 것이니, 어찌 사람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그때 마침 유사(有司)가 법제상 연좌시킬 수 없다고 하였고, 또 대신(大臣)의 건의가 있었으므로 일이 거기에서 그치게 되었다.
김경손이 체포되어 심문받을 적에 광해군이 박응서에게 묻기를, “김장생도 이 일에 관여하여 알고 있는가?” 하니, 박응서가 “김장생은 어진 사람입니다. 저희들이 처음 모의를 할 적에 그가 알까 두려워하였습니다.” 하였으며, 정협(鄭浹)이 무복(誣服)함에 미쳐서도 심문할 적에 역시 이와 같이 대답하였다. 이 이후로는 시골로 물러나 살면서 문을 닫아건 채 외부 사람들을 만나지 않았으며, 오직 좌우에 경서(經書)를 놓아두고는 깊이 빠져 들어서 유유자적하며 세월을 보냈다.
천계(天啓) 계해년(1623, 인조1)에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성사되자, 상이 곧바로 하교하기를, “김장생은 내가 잠저(潛邸)에 있을 때부터 그 명성을 익히 들어왔다.”고 하고는 드디어 사헌부 장령을 제수한 다음, 소명(召命)을 내려 불렀는데, 선생은 상소를 올려 늙고 병들었음을 이유로 사양하였다. 그러고는 인하여 훈재(勳宰)들에게 서신을 보내어 규계하고 권면하였는데, 그 편지에 대략 이르기를,
“저는 일찍이 경천욕일(擎天浴日)의 큰 공로가 갑작스럽게 그대들의 손에 의해 세워질 줄은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땅에 떨어진 인간 윤리를 바로 세우고 거의 망해 가는 국가를 다시 붙잡아 세운 것인바, 이는 참으로 이 세상에 다시 없을 크나큰 의거입니다. 다만 염려되는 것은, 모든 일이 시작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유종의 미를 거두기가 어렵다는 점입니다. 만약에 선후책(善後策)을 제대로 하지 못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만족시키지 못한다면, 말하는 자들이 틀림없이 ‘당초에 의거를 일으킨 것이 종묘사직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부귀공명을 위해서 한 짓일 뿐이다.’라고 할 것이니, 어찌 크게 두려워할 만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서경(書經)》에도 이르기를, ‘끝없이 좋은 일이기도 하지만 끝없이 걱정되는 일이기도 하다.’ 하였습니다. 저는 여러분을 위하여 몹시 걱정하고 있습니다.
임금이 처음 즉위했을 때는 그 임금을 어떻게 보도(輔導)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새로 즉위한 우리 임금께서는 춘추가 젊어서 한창때이고 자질도 어려서부터 빛났으니, 지금이야말로 바로 흥성할지 쇠할지, 길해질지 흉해질지가 결정되는 중대한 고비입니다. 따라서 극진한 말과 지극한 의론을 가지고 날마다 앞에서 진달하여 잘 함양하고 훈도하여 성덕(聖德)을 성취시켜 기어이 삼대(三代) 시대 이전의 정치를 구현하도록 하여야만 마땅할 것입니다. 그런 뒤에야 당대에 해야 할 일을 다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오늘날의 백성들은 마치 거꾸로 매달려 있다가 풀려난 것과 같아서 기갈이 심한 나머지 먹고 마시게 하기 쉬운 경우와 같습니다. 그런즉 맹자(孟子)가 이른바 ‘일을 여느 때의 반만 해도 공은 배나 된다.’고 한 것이 바로 지금과 같은 때를 두고 한 말입니다. 만약 예전대로 그럭저럭 시간이나 때우면서 그대로 두고 서둘러 구제하지 않는다면, 무슨 수로 저들의 기대하는 마음을 위로할 수 있겠습니까. 난리 뒤의 백성들을 병들게 하는 행정과 과외로 거두어들이는 세금을 모두 탕감하거나 줄여 주고, 공안(貢案)을 다시금 개정하여 수입을 계산하여 지출하고, 방납(防納)하는 길을 막아 침탈하는 폐단을 영원히 근절시켜야만 할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마땅히 불속이나 물속에 빠진 사람을 구해 주듯이 서둘러서 해야 할 것이요, 조금도 늦춰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적신(賊臣)이 국사(國事)를 맡아 다스리면서 그의 무리들이 크게 불어나서 모후(母后)를 유폐(幽閉)하고 천륜을 끊었으니, 그 죄가 더할 수 없이 크기는 합니다. 그러나 옥사(獄事)를 다스리는 체모에 있어서는 차등이 없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형(五刑)과 오류(五流)는 경중이 크게 다르니, 저울질을 하듯이 힘써 중정(中正)을 취하여 해야지, 혹시라도 기분에 따라서 하여 도에 넘치는 잘못이 있게 해서는 안 됩니다. 혹자는 오왕(五王)이 화(禍)의 불씨를 남긴 일을 가지고 경계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 하는 자도 있으나, 그것은 군자의 말이 아닙니다. 왕자(王者)가 법을 씀에 있어서는 오직 그 실정(實情)과 죄상(罪狀)이 어떠한가만을 살펴볼 뿐이지, 어찌 그 사이에 사사로운 뜻을 용납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오늘날을 위한 계책으로는 편파적인 것을 없애고 공도(公道)를 활짝 여는 것만 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쪽 편이냐 저쪽 편이냐를 따질 것 없이 어진 인재면 등용해야 하고, 길고 짧음을 재어 보아서 적합한 인물이면 써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백료(百僚)들이 서로 조심하고 협력해서 태평성대의 다스림을 이룩한다면, 그 역시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지난날 탐욕스러운 마음으로 이익을 독차지한 일들 가운데 말할 만한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중에서도 전선(銓選)과 과거(科擧)와 형옥(刑獄)에 관련된 일들은 모두 돈을 얼마나 바쳤느냐에 따라서 처리하였습니다. 조정이 어지러워지고 민생이 고달픔을 겪었던 것은 실로 여기에서 말미암았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바르게 시작하는 초기를 당해서는 의당 교화(敎化)의 근원을 맑게 하고 고질적인 폐단을 개혁하는 말로 날마다 성상께 진달하여 성총(聖聰)을 열어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께서도 의당 청백(淸白)과 근신(謹愼)을 지키면서 조정의 모든 사람들을 격려해야 할 것이요, 정국 공신(靖國功臣)의 세 대장(大將)이 하던 짓을 답습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만 한다면 공사(公私) 간에 다 좋을 것입니다.”
하였다. 제공(諸公)이 이 서신을 받고는 탄복하면서 드디어 주상에게 올렸다. 그러자 상은 몹시 칭찬하면서 지론(至論)이라고 하였다. 그러고는 상소에 대한 비답(批答)을 내렸는데, 거기에 이르기를,
“그대는 속히 서울로 올라와서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나의 바람에 부응하라.”
하였다. 선생은 서울로 들어와 다시 또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상이 장차 사묘(私廟)에 친제(親祭)하려고 하자 조정의 신하들이 그에 대한 축사(祝辭)를 의논하였는데, 예조 판서 이정귀(李廷龜)와 부제학 정경세(鄭經世)가 여러 대신들에게 의논하자, 모두 말하기를,
“주상께서는 친손(親孫)으로서 선묘(宣廟)의 대통(大統)을 이어받았으니, 방지(旁支)인 자가 들어와서 후사(後嗣)를 이은 것과는 다르고, 이미 선묘를 고(考)로 칭하지 않았으니만큼 사친(私親)을 고라고 칭하더라도 고가 둘이 되는 혐의는 없다. 그러니 마땅히 고로 칭하고 자(子)로 자칭해야 한다.”
하였다. 그러자 선생은 이를 옳지 않다고 여겨 상소하기를,
“제왕(帝王)의 법통(法統)은 비록 형이 아우의 뒤를 잇고 숙부가 조카의 뒤를 이었다 하더라도, 모두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춘추》의 경문(經文)에 이르기를, ‘희공(僖公)을 태묘(太廟)에 올렸다.’고 한 것을 보면, 공자(孔子)의 깊은 뜻을 잘 알 수 있습니다. 4전(傳)의 뜻도 모두 희공을 민공(閔公)의 아버지로 보았습니다. 이는 동생인 민공이 형인 희공의 뒤를 이었지만 부자 사이가 된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한(漢)나라의 선제(宣帝)가 소제(昭帝)의 뒤를 잇고서 자기를 낳아 준 아버지를 높여 황고(皇考)라고 했는데, 이에 대해서 범씨(范氏)는, ‘선제는 소제에게 손자가 되므로 선제가 자기 아버지를 황고라 칭한 것은 옳은 일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의논하는 자들은 끝내 이에 대해서 옳다고 하지 않았으니, 그 이유는 소종(小宗)을 대종(大宗)의 종통(宗統)에 합쳤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정자(程子)는 또 이에 대해서 ‘윤리를 어지럽히고 예의에 벗어난 것이 너무 심하다. 선제가 손자의 항렬로서 소제의 뒤를 이어 대통을 이어받았으니, 자기의 사친을 올려 위로 할아버지의 뒤를 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 분명하다.’ 하였습니다.
지금 성상께서는 선조의 대통을 이으셨습니다. 그런데 또 성상의 사친을 끼워 넣어 위로 조묘(祖廟)를 잇게 한다면, 이것이 바로 이른바 소종을 대종에다 합친다고 하는 것으로, 윤리를 어지럽히고 예를 어그러뜨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사친을 칭하여 고(考)라고 한다면 상복(喪服)도 반드시 삼년복(三年服)을 입어야 하는 법입니다. 그러나 어찌 들어와서 대통을 이어받고서도 자기의 사친을 위하여 삼년복을 입는 이치가 있겠습니까.
의논하는 자들이 이르기를, ‘선제가 사황손(史皇孫)을 고라고 칭하고 또다시 그 위에 황(皇) 자를 보태어 명위(名位)가 너무나도 높았으므로 정자(程子)가 윤리를 어지럽히고 예의를 어그러뜨렸다고 한 것이지, 고라고 칭한 것을 가지고 그르다고 한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황 자는 바로 대(大) 자나 현(顯) 자와 같은 뜻의 글자로서, 허자(虛字)인 것입니다. 정자의 뜻은 단지 사친에게 고 자를 써서는 안 되기 때문에 이와 같이 말한 것입니다.
의논하는 자들은 또 그렇게 하면 고위(考位)가 없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제왕의 집안에서는 단지 대통을 계승하는 것을 위주로 하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숙부가 조카의 뒤를 잇고 형이 아우의 뒤를 잇더라도 역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성립되는 법입니다. 그러니 어찌 고위가 없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의논하는 자들이 이에 대해서 정밀하게 살펴보지 못하고서 가면 갈수록 자꾸만 틀린 말만 하고 있으니, 신으로서는 몹시 의혹스럽습니다. 이제 마땅히 정자의 설에 따라서 숙부라 칭하고 조카라고 칭하는 것이 명분상으로나 의리상으로나 분명한 전거가 있어서 의심할 것이 없을 듯합니다.”
하였다. 그 뒤에 입시하자, 상이 이르기를,
“일찍이 내가 잠저(潛邸)에 있을 적에 그대의 학문이 대단히 높고 숙덕(宿德)이 많다는 말을 듣고는 늘상 한번 만나 보기를 원하였다. 그런데 그대가 올라온 뒤에 마침 나라에 제사가 있어서 곧바로 만나 보지 못하였는바, 당초에 지성으로 기다리던 뜻과 크게 어그러지고 말았다. 지금이라도 이렇게 만나 보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하면서 몹시 간절하게 위로하였다. 이에 선생이 감사의 뜻을 표하고, 이어 아뢰기를,
“사묘(私廟)의 칭호에 대해서는 소신이 감히 함부로 논의할 일이 아니기는 합니다. 그러나 헌부(憲府)의 직을 맡고 있는 몸이기에 감히 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지금 다행히도 이렇게 성안을 우러러뵙게는 되었으나, 정신이 혼모하고 말이 어눌하여 아뢰는 과정에서 혹시라도 품고 있는 뜻을 제대로 다 전달하지 못할까 염려되기에 감히 짤막한 차자를 미리 지었다가 올립니다.”
하였다. 그러고는 이어 품 안에서 그것을 꺼내어 올렸는데, 거기에 대략 이르기를,
“제왕들이 나라를 다스리는 요체는 학문보다 우선하는 것이 없습니다. 학문의 도는 다른 것이 아니라, 성현의 말씀을 토론하여 그 의리를 정밀하게 추구해서 반드시 이를 몸에서 체득하고 일에서 증험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일이 없을 때에는 이 마음이 혼연(渾然)하여 밝고 밝아서 어둡지 않고 담담하기가 고요한 물과 같다가, 한 생각이 일어남에 미쳐서는 공사(公私)와 의리(義利)의 구분을 살펴 사욕(私慾)을 극복하는 것이 맹렬하지 못할까 두려워하고 선(善)을 확충하는 것이 폭넓지 못할까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 일상생활의 모든 행동거지에 있어서 저절로 천리(天理)의 바름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요순(堯舜)이 말한 ‘정밀하게 선택하고 한결같이 지킨다.[惟精惟一]’는 것이며, 공자(孔子)가 말한 ‘자기의 사욕을 극복하여 천리의 예를 회복한다.[克己復禮]’는 것이며, 자사(子思)가 말한 ‘보고 듣지 못하는 데에서도 두려워하고 혼자만이 아는 마음을 삼간다.[戒懼謹獨]’는 것이며, 맹자(孟子)가 말한 ‘흐트러진 마음을 거두고 사단을 확충한다.[收放心擴四端]’는 것입니다. 옛날의 성현들이 서로 간에 전수(傳受)한 지결(旨訣)은 이와 같은 데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더구나 임금의 한 생각에는 국가의 치란과 흥망이 달려 있는 법이니, 두려워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하였는데, 상이 가상히 여기면서 받아들였다. 그러고는 인하여 이르기를,
“전번의 상소 내용은 매우 좋기는 했으나 일이 이미 정해진 뒤여서 그대로 따르지 못하였는바, 몹시 미안하다.”
하였다. 얼마 뒤에 선생을 체차하고는 사재감 첨정(司宰監僉正)으로 삼았다.
6월에 연신(筵臣)의 건의에 의하여 특별히 성균관 사업(成均館司業)의 직을 설치하고 선생을 여기에 임명하여 선비들을 가르치게 하는 한편 원자(元子)를 보양하도록 명하였는데, 선생이 간절히 사양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당시에 사부(師傅)의 직을 맡은 사람들은 모두 당대에 엄선된 인물이었다. 선생이 노성(老成)한 숙망(宿望)으로서 매번 서연(書筵)에서 글을 강론하는 이외에도 일에 따라 규계하고 권면하니, 원자가 몹시 공경하면서 중히 여겼다. 얼마 뒤에 경연에 입시하였을 때 노병(老病)으로 인하여 종사할 수 없다는 뜻을 힘써 진달하고 또 아뢰기를,
“비상한 임무는 반드시 비상한 사람이라야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니, 신은 결코 적임자가 아닙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사유(師儒)의 직책은 반드시 덕망이 있는 자가 맡아야만 선비들이 보고 감동하여 흥기되는 법이다. 근자에 와서 선비들의 습속이 전과 달라지고 있으므로 그대를 이 직에 임명하여 수고롭게 하는 것이다.”
하였다. 8월에 다시 경연에서 아뢰기를,
“신은 나이가 많고 귀까지 어두우면서도 선뜻 물러날 것을 결단치 못하는 것을 늘 부끄럽게 여겼습니다. 이제 물러나 고향에서 죽을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하니, 상이 위로하면서 그대로 머물러 있으라고 하였다. 얼마 뒤에 선영(先塋)에 가서 성묘하게 해 줄 것을 청하자, 상이 이르기를,
“오래도록 머물러 있지 말고 잘 다녀오라.”
하였다. 그러고는 특별히 궐내에서 술을 내리며 위로한 뒤 본도에 명하여 제수(祭需)를 마련하여 보내도록 하였다. 그리고 원자도 직접 면대해서 오래도록 머물러 있지 말라고 간곡하게 말하였다.
선생은 향리로 돌아와 성묘하고 곧바로 상소하여 사직하면서 겸하여 연로(沿路)에서 본 흉년이 든 상황과 민간의 고통을 조목조목 열거하여 올리니, 상이 또한 너그럽게 받아들이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속히 서울로 올라와서 나의 기대에 부응하라.”
하였다. 선생은 성상의 은혜가 비록 감격스러웠으나, 늙은 나이로 길을 떠날 수 없다고 여기고는 드디어 상소하여 사직하고, 이어 잠규(箴規)를 붙였는데, 거기에 이르기를,
“신이 듣건대 장자(張子)는 ‘자기의 마음을 엄한 스승으로 삼는다.’ 하였고, 사마온공(司馬溫公)은 ‘나는 평생 남에게 말하지 못할 일을 한 적이 없다.’ 하였습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성상께서는 이런 말에 마음을 쓰시어 하나의 정사와 하나의 호령이라도 모두 마음에 되물어서 옳고 그름을 자세히 살펴서 행하시고, 깊은 밤이나 홀로 계실 때에도 큰 제사를 받들 듯이 하여 신명에 부끄러움이 없게 하소서. 그러신다면 성학(聖學)의 성취를 어찌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매우 가상하게 여기면서 탄복하였다.
갑자년(1624, 인조2) 2월에 이괄(李适)이 난을 일으켜 대가(大駕)가 남쪽으로 파천(播遷)하자, 선생은 공주(公州)로 나가 대가를 맞이하였다. 역적들이 평정되고 상이 환도(還都)할 때, 상이 하교하기를,
“이 길로 나를 따라 서울로 올라가 원자(元子)를 가르치는 임무를 맡는 것이 좋겠다.”
하자, 선생은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상경하여 상의원 정(尙衣院正)과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에 임명되었다. 세 번 사양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였으며, 인하여 말미를 청하여 귀향하였다.
6월에 만언소(萬言疏)를 올려 소회를 다 진술하였는데, 거기에 대략 이르기를,
“신은 너무나 깊은 은총을 받았는데도 털끝만큼의 보탬도 되어 드리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몸은 전야에 있지만 무엇인가 보답해야겠다는 마음만은 절실합니다. 이에 삼가 다음의 13개 사항을 조목별로 진달함으로써 앞에서 직접 아뢰는 일에 대신할까 합니다. 그것은 대본(大本)을 세우는 것, 구업(舊業)을 회복하는 것, 홍범(洪範)을 높이 받드는 것, 소학(小學)을 강하는 것, 성효(聖孝)를 다하는 것, 사전(祀典)을 공경히 하는 것, 구족(九族)을 가까이하는 것, 군신(群臣)들의 뜻을 체득(體得)하는 것, 정무(政務)를 친히 처리하는 것, 민폐(民弊)를 제거하는 것, 대동법(大同法)을 혁파하는 것, 군정(軍政)을 잘 닦는 것, 금위(禁衛)를 엄하게 단속하는 것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답하기를,
“조목별로 진달한 것을 보니, 참으로 자신을 수양하고 폐단을 바로잡는 대책들이다. 그러니 내가 감히 이것들을 가슴속에 새겨 힘써 실행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9월에 특별히 공조 참의에 제수되었다. 당시에 사헌부가 말썽을 부린 내수사(內需司)의 노비(奴婢)를 잡아 가두고서 죄를 다스리는 중이었는데, 일이 자전(慈殿)의 일과 관련되었으므로 상이 엄한 전지(傳旨)를 내려 헌부의 관원을 준엄하게 꾸짖었다. 그러자 정원이 다시 그 전지를 봉환(封還)하였으므로 상은 더욱 노하여 정원의 관원을 꾸짖었다. 이에 선생은 사직하는 상소를 올리고는 이어 그에 대한 일을 언급하였는데, 거기에 이르기를,
“폐조(廢朝) 때 인심을 잃은 일이 이루 다 셀 수 없이 많았으나, 그중 내수사의 노비로 인한 폐단이 절반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 법관(法官)이 나서서 그들을 단속하고 다스린 일이 있었다고 들어보셨습니까? 오늘에 와서는 위에 밝고 거룩하신 전하가 계시기 때문에 아래에서 법을 제대로 집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도리어 엄하게 질책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것이 참으로 자전의 전교를 받들기 위해 하신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일로 인해 정원이나 헌부를 추고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만약에 정원이 주상의 뜻을 받들어 따르기만 하면서 복역(覆逆)하는 바가 없다고 한다면, 사알(司謁) 하나만 두면 충분하지, 승지를 둘 필요가 뭐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대간도 오직 입 다물고 있기만 한 채 아무런 규정(糾正)하는 일이 없다면, 이는 단지 일개 의장마(儀仗馬)에 불과할 뿐입니다. 장차 그런 대간을 어디에 쓰겠습니까.
이 일이 비록 작은 잘못인 듯하지만, 그 병의 뿌리를 캐 보면 모두가 사의(私意)에서 나온 것입니다. 만약 이것을 작은 문제라고 하여 소홀히 하게 되면, 끝에 가서는 틀림없이 자신의 마음속에서 나온 것이 결국 정사(政事)로 나타나고, 그 정사가 일을 해치게 되는 결과를 낳고 말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그 병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가를 정밀하게 살피소서. 그리하여 거기에 털끝만큼이라도 사사로움을 이겨 내지 못한 단서가 있으면 반드시 단호하게 징계하여 끊어 없앰으로써 다시는 그런 마음이 자라나지 못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너그러운 내용으로 비답을 내렸으며, 간절한 마음으로 불러들이기를 마지않았다. 10월에 또 사은(謝恩)하기 위하여 직임에 나아갔는데, 경연 신하가 아뢰기를,
“김장생은 아주 늙은 사람으로서 소명을 받고 이미 올라왔으니, 의당 그로 하여금 경악(經幄)에 출입하게 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로 하여금 원자(元子)를 보도(輔導)하게 한다면, 도움 되는 바가 반드시 많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 이미 직질(職秩)이 승진되었으니, 별도로 칭호를 정하여 원자를 가르치게 하라. 그리고 나 역시 수시로 접견하고 싶다.”
하였다. 그러고는 드디어 호칭을 고쳐 강학관(講學官)으로 삼았다.
을축년(1625) 1월에 원자를 책봉(冊封)하여 세자(世子)로 삼고는 선생을 특별히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시켰는데, 이는 그동안에 왕세자를 부지런히 교도(敎導)한 공로에 대해 표창한 것이었다. 얼마 있다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제수되었으며, 말미를 받아 시골로 돌아갔다. 떠나면서 상소를 올렸는데 거기에 대략 이르기를,
“신이 지금 한번 서울을 떠나고 나면 영원히 전하를 다시 뵈올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성학(聖學)에 더욱 힘쓰시고 성덕(聖德)을 더욱 높이소서. 그리하여 마음을 정대하게 가져서 한쪽으로 치우치는 사사로움이 없게 하시고, 일 처리를 함에 있어서 확고한 단안을 내려서 우유부단하게 하는 잘못이 없도록 하소서. 또한 인재를 등용함에 있어서는 실제가 어떠한지만을 보시고 거짓된 것에 현혹되지 마시며, 아랫사람을 접함에 있어서는 성심을 다하기를 힘쓰고 겉치레로 꾸미기를 일삼지 마소서. 또 귀에 거슬리는 말을 싫어하지 마시고, 도를 지키는 선비를 홀대하지 마시며, 받아들이는 일은 되도록 넓게 하시고, 채택하는 일은 되도록 정밀하게 하소서. 그리고 선입견을 고집하여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막지 마시고, 일반적인 규례에 얽매여 사기(事機)를 놓치지도 마소서. 그리하여 큰 뜻을 분발하시어 지극한 치세를 이루신다면, 신은 비록 초야에서 여생을 마치더라도 다시는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가상하게 여기면서 이어 이르기를,
“내 마음이 몹시 서운하다. 영원토록 떠나 있을 생각을 하지 말고 돌아가서 선영에 성묘한 다음 즉시 올라오도록 하라.”
하였다. 선생은 이미 향리로 내려온 뒤에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려 체직시켜 주기를 청하였다.
병인년(1626) 봄에 상이 계운궁(啓運宮)의 상(喪)을 당하였다. 이에 선생은 대궐에 나아가 진위(進慰)하고 10일을 머물러 있다가, 향리로 돌아가겠다는 뜻을 고하고는 지레 돌아왔다. 그러자 정원이 아뢰기를,
“김장생이 장차 내려갈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날의 덕이 높은 사람으로는 이 사람보다 나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니 그가 산림(山林)에 있다고 하더라도 참으로 불러와야 마땅합니다. 지금 이미 올라왔는데 갑작스럽게 돌아간다고 합니다. 성상의 현인을 탐내고 덕 있는 이를 좋아하는 도에 있어서는 그가 임의대로 떠나가게 두어 없어진 것조차 몰라서는 안 될 듯합니다.”
하니, 상이 못 가게 붙잡도록 명하였으나, 이미 길을 떠난 뒤였다. 선생은 곧바로 상소를 올려 사례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슬픈 생각을 되도록 억제하시고 예법에 맞게 하실 것이며, 신료들을 자주 접견하여 변례(變禮)에 대해 강구하소서. 신 역시 말씀드리고 싶은 점이 없지는 않으나, 처음에 올린 상소에서 대강 소견을 개진하였으므로 슬픔 속에 계시는 전하께 지금 감히 다시금 번거롭게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그 당시에 사친(私親)에 대한 전하의 복제(服制)에 대해 혹자는 ‘당연히 삼년복을 입어야 한다.’ 하고, 혹자는 ‘당연히 자최장기(齊衰杖期)를 입어야 한다.’ 하고, 혹자는 ‘당연히 부장기(不杖期)를 입어야 한다.’ 하여, 의논이 분분하였는데, 결국 자최장기를 입는 것으로 정하였다. 선생은 그에 대해 옳지 않다고 여겼으므로 상소의 끝에 살짝 언급한 것이다.
이보다 앞서 영월 군수(寧越郡守) 박지계(朴知誡)가 상소를 올려 ‘사친인 정원대원군(定遠大院君)을 예묘(禰廟)로 삼고 그에 따라서 계운궁에 대해 삼년복을 입으며, 백관들은 종복(從服)을 입게 하라.’는 내용으로 청하였으며, 그를 추종하는 무리인 이의길(李義吉)도 서로 잇달아 상소를 올려 정원대원군을 추숭(追崇)하라는 의논을 극력 주장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이것은 고금(古今)의 변례(變禮)로, 한번 잘못되면 후회해도 소용없을 것이다.’라고 여겼다. 이에 드디어 경전(經傳)의 내용을 참고하고 고금의 전례를 상고해 본 다음 글을 지어서 조정에 있는 친구들에게 보냈다. 그 글에 대략 이르기를,
“박지계의 상소에서는 《의례》를 인용하면서 오늘날의 일에 대한 증거로 삼았습니다. 《의례》와 《의례도식(儀禮圖式)》의 뜻을 살펴보면, ‘정통(正統)으로 대를 이을 아들이 일찍 죽거나 몹쓸 병으로 인하여 뒤를 이어 즉위하지 못하여 그 아들이 할아버지의 뒤를 잇거나 증조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을 경우, 자기 아버지나 할아버지를 위해서는 참최복(斬衰服)을 입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현(鄭玄)의 주(注)에는 ‘사위(嗣位)한 사람에 해당한다.’고 하였고, 가공언(賈公彦)의 소(疏)에도 이르기를, ‘자기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당연히 즉위해야 하는데도 폐질로 인하여 즉위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자기가 즉위하게 된 경우라면, 이는 자기 증조에게서 나라의 대통을 전해 받은 것이 된다.’ 하였습니다.
무릇 방계(傍系)에서 들어와 정통을 이은 사람과 당연히 정통을 이을 사람이 이은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지금 대원군(大院君)의 경우는 당연히 후계자가 되어 즉위해야 할 신분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주상 역시도 자신이 당연한 후계자 신분으로서 증조에게서 대통을 물려받은 사람과는 같지 않습니다. 지금 이 조항을 인용하여 증거로 삼았는데, 이는 예경의 근본 뜻을 크게 잃은 것입니다.
박지계의 상소에 이르기를, ‘자식으로서는 아버지의 귀천(貴賤)을 가지고 취사선택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무릇 방계에서 들어와 대통을 이은 사람은 사체(事體)가 지극히 엄하여 스스로 사친을 생각할 수 없는 것이지, 취사선택하는 것을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박지계는 상소에서 또 《근사록》에 나오는 ‘천자는 나라를 세우고 제후는 종통(宗統)을 빼앗는다.’고 하는 설을 인용하였습니다. 무릇 ‘제후는 종통을 빼앗는다.’라고 한 말은, 한(漢)나라의 소하(蕭何)나 조참(曹參)과 같이 제후가 되었을 경우에 비록 지자(支子)이기는 하지만 적자(嫡子)의 종통을 빼앗아 자기에게로 옮겨가 자신이 봉해진 나라에 사당을 세우는 것과 같은 경우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한(漢)나라 사람이 ‘제후는 종통을 빼앗는다는 말은, 아버지가 사서인(士庶人)인데 아들이 제후가 되었을 경우, 장자의 종적(宗嫡)을 빼앗아 자기가 그 제사를 맡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어찌 임금이 사친을 위하여 사당을 세운다는 뜻이겠습니까. 가령 선묘(宣廟)께서 이 세상에 살아 계실 때 지금의 주상을 책봉하여 세손(世孫)으로 삼으셨다면, 주상께서는 선묘의 후계자가 되신 것입니까, 아니면 대원군의 후계자가 되신 것입니까?
박지계의 상소에서는 또 위(衛)나라의 첩(輒)이 자기 할아버지를 아버지로 삼은 데 대해 말한 공자(孔子)의 설을 인용하였습니다. 무릇 공자가 위나라의 첩을 죄준 것은, 실로 위나라의 첩이 자기 아버지를 아버지로 여기지 않은 점을 지적하여 죄준 것이지, 할아버지를 아버지로 삼은 것을 그르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상(商)나라 탕(湯) 임금의 손자인 태갑(太甲)과 주(周)나라 평왕(平王)의 손자인 환왕(桓王)이 모두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지만, 자기 아버지를 추숭(追崇)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또 한(漢)나라 소제(昭帝)의 종손(從孫)인 선제(宣帝)도 자기 아버지인 사황손(史皇孫)을 묘(廟)에 들이지 않고서 단지 황고(皇考)라고만 칭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정자(程子)와 범진(范鎭)과 호인(胡寅)은 오히려 예를 어그러뜨리고 윤리를 어지럽힌 일이라고 배척하였고, 주자(朱子)는 그 사실을 《자치통감강목》에 쓰기까지 하였습니다. 만약 박지계의 상소대로라면 한나라 선제가 소제를 아버지로 삼은 일 역시 위나라의 임금인 첩이 했던 짓과 같은 것이 되며, 정자와 주자의 말 역시 틀린 것이란 말입니까.
진(晉)나라 간문제(簡文帝)는 종조(從祖)로서 종손(從孫)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고, 제(齊)나라 울림왕(鬱林王)과 위(魏)나라 문성제(文成帝)는 손자의 신분으로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는데, 비록 자기 아버지를 높여 황제로 삼기는 하였지만, 역시 묘에 들이지는 않았습니다. 당(唐)나라 선종(宣宗)은 숙부(叔父)로서 조카의 뒤를 이었으며, 명(明)나라 건문제(建文帝)는 적손(嫡孫)으로서 태조(太祖)의 뒤를 잇고서는 자기의 아버지인 의문태자(懿文太子)를 추숭하여 묘에 들였는데, 그것은 《의례》의 ‘적손은 자기 할아버지나 아버지를 위해서 참최복을 입는다.’고 한 설에 비추어 보면 오히려 근거로 삼을 만한 것이 있습니다.
상(商)나라와 주(周)나라 이후로 손자로서 할아버지의 뒤를 이은 이들이 많았으며, 심지어는 할아버지로서 손자의 뒤를 잇거나 숙부로서 조카의 뒤를 이은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럴 경우 소목(昭穆)이 도치되는데도 단지 대통을 이은 것으로 순서를 삼은 것은, 제왕(帝王)의 경우는 사서(士庶)와는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와 자식 간의 천륜(天倫)이 비록 중하기는 하지만, 입계(入繼)의 뜻도 지극히 엄한 것입니다. 나가서 다른 사람의 후사가 된 경우와 들어와서 대통을 이은 경우는 그 일이 비록 다르지만, 사친(私親)을 돌아보아서는 안 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저의 뜻으로는 예가(禮家)들이 말한 ‘나가서 다른 사람의 후사가 되거나 들어와서 뒤를 이은 자는 본생부모를 위하여 기년복을 입는다.’고 한 설을 근거로 삼아서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됩니다.”
하였다. 이에 대해 완성군(完城君) 최명길(崔鳴吉)이 선생에게 수만 자에 달하는 장문의 편지를 보내왔는데, 그 주된 뜻은 ‘주상은 다른 사람의 후사(後嗣)가 된 경우와는 다르니, 자기 본생의 어버이를 위해서는 삼년복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선생이 답하기를,
“정경세(鄭經世)와 이정귀(李廷龜) 두 사람이 단지 고(考)라고 칭해야 한다는 의논을 주장하면서도 삼년복을 입어야 한다는 설을 배척한 것은 그래도 처음에는 실수를 하였지만 뒤에는 잘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공께서는 그들의 주장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반드시 삼년복을 입게 하고자 하시니, 혹 자신을 너무 과신한 나머지 고금의 공론을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까.
영공(令公)의 차자(箚子) 안에, ‘정경세가 고라고 칭해야 옳다는 설을 강력하게 주장하는데, 다른 사람의 후사가 되고서도 자기 생부에 대해서 고라고 칭한 경우가 어느 경전에 나와 있으며, 고라고 칭하면서 삼년복을 강복(降服)하는 경우 역시 어느 경전에 나와 있는가. 지난날에 고라고 칭해야 한다고 한 말이 옳다면, 지금 와서 강복해야 한다고 한 말은 틀린 것이고, 오늘날에 강복해야 한다는 말이 옳다면 지난날에 고라고 칭해야 한다고 한 말은 틀린 것이니, 둘 중의 하나는 반드시 잘못된 것이다.’ 하셨는데, 그 말은 참으로 옳은 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를 가지고 이정귀와 정경세 두 사람을 힐책하신다면 옳겠지만, 그것을 가지고 도리어 저를 힐책하려 드는 것은 어찌 너무나도 깊이 생각하지 않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제왕들 가운데에는 숙부나 할아버지로서 조카나 손자를 계승한 경우가 매우 많은데, 만일 영공의 뜻과 같이 한다면, 계승하게 된 임금에 대해서는 의당 ‘황종손(皇從孫)’이나 ‘황질(皇姪)’이라고 칭해야 할 것이며,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의당 ‘효조부(孝祖父)’나 ‘효숙부(孝叔父)’라고 칭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만 저의 생각에는 의당 《통전》에 의거해서 자기 자신의 칭호는 ‘사황모(嗣皇某)’라고 칭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선황제(先皇帝)에 대해서도 역시 별다른 칭호가 있어야 할 것 같은데, 그에 대한 선유(先儒)들의 정론이 없어서 감히 억설(臆說)을 만들어 내지는 못하겠습니다. 예관이 이른바 ‘부자(父子)의 의리가 있으면서도 부자의 명분은 없다.’고 한 말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입니다. 조상우(趙相禹)의 상소에서 한 말에 이르러서는, 그것이 비록 호씨(胡氏)의 주장에 근본을 둔 것이기는 하지만, 역시 온당치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항렬이 높은 조부나 숙부가 손자나 조카의 항렬에 대해 아들이라고 칭한다는 것은, 아마도 그런 이치가 없을 듯하기 때문입니다.
《의례》에 ‘적손(嫡孫)이 할아버지나 증조할아버지를 계승하였을 경우,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위해서는 참최복을 입는다.’고 한 것은,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의당 왕위를 이어받을 것을 자신이 계승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중손(衆孫)으로서 대통을 계승한 사람은 사친(私親)을 위하여 참최복을 입을 수 없는 것임이 분명합니다. 의논하는 자들이 중손으로서는 참최복을 입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에 ‘주상은 순서에 따라 뒤를 이어 즉위한 임금과 다를 것이 없으니 이 역시 적손(嫡孫)이다.’ 하였는데, 이 말이 어찌 이상하지 않습니까.
영공의 뜻은, 반드시 상께서 삼년복을 입고 또 상주(喪主)가 되어 조석(朝夕)의 궤전(饋奠)을 주관하도록 하려면서, 위(衛)나라 임금이 계씨(季氏)를 조문할 때 노(魯)나라 임금이 상주가 되었던 것을 증거로 삼았습니다. 옛날에 노나라에서 계환자(季桓子)의 상을 당했을 때, 위나라 임금이 조문할 것을 청하자, 애공이 차마 사양하지 못하고 애공이 직접 상주가 되었습니다. 이는 계환자는 위나라 임금과 대등하게 빈주(賓主)가 될 수 없기 때문에 애공이 상주가 된 것으로, 이는 계환자의 상에 상주가 된 것이 아니라 바로 위나라 임금을 위하여 상주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이 일을 가지고 오늘날의 일에 끌어다 댈 수 있겠습니까.
영공의 차자에 이른바 친제(親祭)를 할 경우에는 축문(祝文)의 호칭을 쓰기가 어렵다고 한 말은, 저의 생각 역시 그러합니다. 대체로 주상의 동생인 능원군(綾原君)이 이미 ‘효자(孝子)’라고 칭하고 있는데, 전하께서도 ‘자(子)’라고 칭한다면, 명분이 문란해질 것입니다. 또 이른바 ‘고(考)라고 칭하지 않을 경우에는 일마다 모두 순조롭게 될 것이고, 고라고 칭할 경우에는 하나하나가 다 껄끄럽게 될 것이다.’라고 하신 것은, 참으로 옳은 말입니다.
박지계의 상소에 이르기를, ‘임해군(臨海君)은 아들이 없고, 광해군(光海君)은 폐서인(廢庶人)이 되었고, 대원군(大院君)이 세 번째 아들이니, 주상께서 적통이 되는 것이 당연하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애석하게도 해서는 안 될 말을 한 것입니다. 여러 왕자 중에서 의안군(義安君)이 맏이이고, 신성군(信城君)이 그다음이고, 대원군은 서열상으로 다섯째인데, 의안군은 능원군을 후사로 삼았습니다. 그러니 이른바 주상께서 적통이 된다는 말이 과연 맞는 말이겠습니까. 주상께서는 지손(支孫)으로서 모후(母后)의 명을 받아 들어와서 선묘(宣廟)의 대통(大統)을 이었으니, 명분과 의리가 아주 바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처럼 구차한 논리를 끌어다 붙여 천하 후세를 속인단 말입니까.
박지계는 또 말하기를, ‘대원군이 만약 생존해 계셨더라면 주상께서는 틀림없이 왕위를 양보하였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 와서 유명(幽明)이 다르다고 하여 차이를 두어서는 안 된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공자 같은 이가 지위(地位)를 얻지 못하였던 것은 하늘의 뜻입니다. 후세에 와서 아무리 공자를 존경한다 하더라도 감히 요순(堯舜)의 자리에 앉힐 수 없는 것은, 바로 명분이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주공(周公)은 대성인(大聖人)으로서 섭정(攝政)하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공자께서 노(魯)나라에서 천자(天子)의 예악(禮樂)을 쓰는 것에 대해 참람하다고 한 것은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명분과 자리는 거짓으로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의길의 상소에서는 말하기를, ‘대원군께서 만약 세상에 살아 계셨더라면 틀림없이 성상께서 임금의 자리를 사양하였을 것이다. 살아 계실 때에는 봉양하고 죽으면 제사 지내는 것은 차이가 있게 해서는 안 되는 법이다. 그러니 종묘(宗廟)에 모시는 것에 대해 무슨 의심할 것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드러내 놓고 추숭하여 종묘에 들이자고 주장한 것입니다. 무릇 자기의 사친(私親)을 추숭한 일은 후세에서 한 일입니다. 그러니 그 일의 공(公)과 사(私), 득(得)과 실(失)에 대해 어찌 많은 말로 따지고 말고 할 것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병인년(1626) 가을에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李貴)가 선생을 찾아왔기에 이를 계기로 사친의 전례(典禮)에 대해 논변(論辨)한 것이 아주 많았다. 그런데 이귀가 조정에 돌아가 차자를 올리면서는 ‘김장생도 지난날의 견해를 바꾸었다.’고 잘못 말하면서, 선생이 가정해서 한 말을 인용하면서 그 설을 증명하였다. 이에 선생은 글을 올려 따졌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신과 이귀는 예론에 관한 소견이 본디 서로 맞지 않습니다. 지난번에 이귀가 신을 찾아왔기에 신이 대충 논한 바가 있었는데, 이귀는 자세히 듣지 않으려고 하였습니다. 지금 그가 올린 차자의 내용을 보니, 그때 신이 하였던 말 중에서 위아래는 다 떼어 버리고 자신의 견해와 비슷한 중간의 한 구절만을 뽑아 끌어다 대었으니, 참으로 가소롭습니다. 신이 이 일에 관하여 갑자기 예전 견해를 바꾸지 못하는 것은 감히 늙어서 정신이 흐리다는 이유로 전후로 말을 달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정묘년(1627) 봄에 서쪽의 오랑캐들이 쳐들어와 대가(大駕)가 강도(江都)로 행행(幸行)하고 세자가 분조(分朝)하여 남하하였는데, 상이 유지(有旨)를 내려 선생을 양호 호소사(兩湖號召使)로 삼았다. 선생은 명을 받고서는 곧바로 인근 경내로 나가 병력과 군량을 모집한 다음 행재소(行在所)로 실어 보냈으며, 몸소 분조로 나아가 면대하였다. 이는 인심을 모아서 삼남(三南)을 진정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오랑캐들이 이미 임진강(臨津江)을 건넜다는 유언비어가 떠돌자, 분조에 있던 여러 재신(宰臣)들이 몹시 당황하여 세자를 받들고 영남(嶺南)의 외진 구석으로 이주하려고 하였으므로, 인심이 매우 소란해져 와해될 형세가 뚜렷했다. 이에 선생은 영남으로 이주하는 것이 올바른 계책이 아님을 역설하고, 또 알현하기를 청하여 그에 관한 이해(利害)를 모두 진술하니, 세자가 ‘나의 뜻도 그러하다.’라고 하면서 수긍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유언비어가 저절로 진정되었다.
3월에 문인들과 함께 강도에 갔다. 이때는 화약(和約)이 이미 이루어져서 적이 곧 물러가게 되었다. 상은 즉시 선생을 인견하고 위로하며 유시하기를,
“경은 노병에도 불구하고 나랏일에 온 정성을 다하였기에 내가 매우 가상히 여기는 바이다.”
하였다. 선생은 인하여 적병들의 기세가 조금 완화되었으니, 직명(職名)을 거두어서 고향에 돌아갈 수 있도록 해 주기를 청하자, 상이 이르기를,
“적병들이 아직도 경계 지역에 있으니 그대로 직명을 띠고 있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다가 또다시 위급한 사태가 발생하면 반드시 끝까지 마음을 다해 주어야 한다.”
하니, 선생이 아뢰기를,
“오늘날에 강화한 것은 진실로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척화(斥和)를 주장한 사람들에 대해서도 반드시 너그럽게 대해 주어야 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참으로 옳다. 그러나 혹자들은 당치도 않은 말을 떠들어 대고 있는데, 이는 매우 잘못된 것이다.”
하니, 선생이 아뢰기를,
“말한 것이 비록 지나쳤다 할지라도 그를 꺾어 버려서는 안 됩니다. 요즘 진언했다가 견책을 받은 자가 서로 잇따르고 있으니, 뒷날에 누가 감히 할 말을 다 하겠습니까.”
하였다. 선생은 고향에 돌아와서는 곧바로 군사와 군량에 대해 조처를 취하고는 직책에서 벗어나 한가히 지냈다.
숭정 무진년(1628) 가을에 형조 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재차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기사년(1629) 여름에 상이 연신(筵臣)에게 이르기를,
“김장생은 덕행이 높은 노유(老儒)로서 서울에 올라오려고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더라도 즉시 돌아가곤 하는데, 이는 나의 성의가 부족하고 예우가 소홀한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그가 서울에 와서 오래도록 머물게 할 수 있겠는가?”
하니, 우상 이정귀가 아뢰기를,
“김장생은 서울에서 생장하였는바, 세상을 피해 숨어 사는 선비가 아닙니다. 나이가 비록 많지만 상께서 정성과 예우를 극진히 하여 일반적인 규례에서 벗어나 특별히 대우한다면 오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그러자 상이 즉시 따스한 내용의 교지를 내리고 또 가교(駕轎)를 타고 올라오라고 명하였으나, 선생은 상소를 올려 굳게 사양하였다. 그러자 상이 손수 비답하기를,
“경은 국가의 대로(大老)로서 덕행(德行)이 남들보다 월등히 뛰어나다. 지금 만약 올라와서 서울에 머물러 있는다면, 사대부들에게 본보기가 될 뿐만 아니라 틀림없이 나를 일깨워 주는 도움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지금 곁자리를 비워 두고 기다리고 있다.”
하고는, 소명을 계속해서 내렸으며, 그 내용 또한 더욱 간절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나이도 죽을 때가 다 되었고 정력도 이미 쇠약해진 터에 성상의 총애에만 연연해하면서 거취를 결정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고 여겼다. 이에 잇달아 상소를 올려 끝내 사면(辭免)되었다. 경오년(1630)에 노인을 우대하는 은전(恩典)이 있어서 품계가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올라갔다.
신미년(1631, 인조9) 5월에 갑작스럽게 몸이 조금 편찮았으므로 집사람이 손님을 거절하고 조용히 요양할 것을 권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그 말을 듣지 않고 날마다 문인들과 강론(講論)하기를 끊이지 않았으며, 기거(起居)와 흥침(興寢)을 평소와 다름없게 하였다. 8월에 이르러 병이 갑자기 위독해져서 3일 갑진일 유시(酉時)에 정침(正寢)에서 작고하셨다. 아, 애통하다.
당시에 둘째 아들인 판서공(判書公)이 곁에서 모시고 있었는데, 상을 당하자 문인들과 함께 일체 선생께서 평소에 정해 놓은 상례(喪禮)를 써서 장사 지냈는데, 대개 《가례(家禮)》를 주로 하면서 《의례》를 참작하여 쓴 것이었다. 막내아들 참판공(參判公)은 조정에서 관무(官務)에 매여 있다가 병세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왔으나, 미처 뵙지 못하고 빈소(殯所)를 차린 뒤에야 도착하였다.
부음(訃音)을 아뢰자 상이 몹시 슬퍼하였으며, 예관(禮官)을 보내어 사제(賜祭)하고 상주(喪主)에게 조문하고 부의(賻儀)도 성대하게 하였다. 세자는 강(講)을 중지하고 소식(素食)을 하였으며, 궁료(宮僚)에게 이르기를,
“내가 옛날 어려서 공부할 적에 어긋난 것이 매우 많았는데, 실로 김공 덕분에 계발되었다. 그러니 그 은혜를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하고는, 역시 궁관(宮官)을 보내어 치제(致祭)하였다. 이때에 선비들은 서로 들판에서 조문하고, 벼슬아치들은 서로 조정에서 조문하였다. 문인들은 면재(勉齋) 황간(黃榦)이 회암(晦菴) 주 부자(朱夫子)에 대해서 입었던 복식(服飾)에 의거하여 백포건(白布巾)에 수질(首絰)과 소대(素帶) 차림을 하고 상(喪)을 치렀다. 얼마 뒤에 연신이 아뢰기를,
“김장생은 덕행이 높은 선비로서 사문(斯文)에 공이 있으니, 의당 추증(追贈)하는 전례(典禮)가 있어야 할 것이며, 또 장사 치르는 것도 도와주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본도에 명하여 호상(護喪)을 하고 봉분을 만드는 것을 도와주도록 하였다. 이해 10월 19일에 진잠현(鎭岑縣)의 성북리(城北里)에 장사 지냈다.
그 뒤 병자년(1636)에 의논하는 자의 말로 인하여 특별히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이조 판서를 추증하였다. 얼마 뒤에 묏자리가 좋지 않아서 신사년(1641) 1월 9일에 연산현(連山縣) 고정산(高井山) 우수리(牛首里)에 있는 선조비(先祖妣) 허씨(許氏)의 산소 뒤편 곤좌(坤坐)의 등성이에 이장하였는데, 서북쪽으로 아버지인 대헌공(大憲公) 산소와의 거리는 겨우 1리 되는 곳이다. 비지(碑誌)와 묘표(墓表)가 갖추어져 있다.
선생은 타고난 성품이 인정이 많고 후하며 기풍과 모습이 온화하고 순수하여 겸손하고 화평한 자질과 방정하고 확실한 지조는 저절로 도에 가까웠다. 선생은 일찌감치 가정에서의 훈계를 이어받아 이미 학문의 뜻을 알게 되었다. 사우(師友)들 사이에서 종사함에 미쳐서는 개연히 도를 구하는 데 뜻을 두더니 마침내 성리학(性理學)을 탐구하는 데 뜻을 오로지하였다.
선생은 학문을 하는 자는 반드시 글을 읽고 이치를 연구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고, 본연의 마음을 되찾아 힘써 실천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글을 읽을 때에는 반드시 의관을 단정히 갖춘 다음 공수(拱手)를 하고 무릎 꿇고 앉아서 온 마음을 다해 뜻을 쏟으면서 종일토록 푹 빠져 들었으며, 글자에서는 그 글자의 뜻을 찾고 글귀에서는 그 글귀의 뜻을 탐구하였다. 그러면서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곳이 있으면 머리를 들어 깊이 생각하고 머리를 숙여 충분히 읽어서 반드시 그 뜻을 환히 꿰뚫어 알고 난 다음에야 그만두었다. 그리고 낮과 밤을 지새면서 잠도 잊고 먹는 것도 잊은 채 반드시 묵묵히 알고 마음으로 이해하며 정밀히 생각하고 확실히 터득하는 것을 당무로 삼았는데, 이와 같이 하기를 시종여일 하루같이 하였다.
선생은 《소학(小學)》을 학자의 기본으로 삼아 깊이 믿고 힘써 실천하여 종신토록 준칙(準則)으로 삼았다. 또한 매일 밤마다 《중용(中庸)》, 《대학(大學)》,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 등의 책을 외우되, 돌려 가면서 충분하게 읽어 마치 자기의 말을 외우듯이 하였다. 그러므로 선생은 처음에는 스스로 재질이 노둔하여 성취하기 어렵다고 생각하였으나, 이와 같이 힘쓰기를 꾸준히 함에 미쳐서는 모든 이치가 환하게 풀렸으니, 글을 보고 이치를 분석함에 있어 날카로운 칼날로 고기를 해체하는 듯하여 막히거나 걸리는 곳이 없었다.
선생은 몸소 행하는 데 있어서는 반드시 거경(居敬)을 위주로 하였으므로 항상 말하기를, “성인의 마음은 명경지수(明鏡止水)와 같아서 늘 맑고 고요하므로 외물(外物)이 침범하여 어지럽힐 수 없지만, 중인(衆人)들의 경우에는 거의 대부분이 흔들리는 탓에 마음이 움직일 때가 많고 고요할 때가 적다. 그러므로 반드시 마음을 경(敬)으로써 곧게 한 다음에 학문을 하여야만 비로소 자리 잡을 곳이 있게 된다.” 하였다. 그러므로 비록 시끄럽고 소란스러운 때에 처하거나 아무도 없어 자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한적한 곳에 있을지라도 반드시 엄숙하여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았고 환하여 어두워지지 않았다. 이와 같이 하였기 때문에 조존(操存)함이 날로 굳어지고 함양(涵養)함이 날로 익어져서 큰 근본이 이미 세워짐에 따라 만사(萬事)와 만물(萬物)이 각각 조리가 있어 문란하지 않았다.
일상생활에서 드러난 것을 보면, 걸음걸이가 편안하여 척도(尺度)를 잃지 않았고, 앉아 있을 때에는 공손히 하고 삼가서 조금도 방심해 지나치는 일이 없었다. 그리하여 장중하면서도 여유가 있고 위엄이 있으면서도 너그럽고 깊었는바, 다른 사람이 엄연한 그 기품을 바라보고는 무섭게 여겼으나, 가까이에서 얼굴빛을 보고 말소리를 들어보면 저절로 온화한 기운이 훈훈하게 스며드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이에 귀천(貴賤)과 노소(老少)를 따질 것 없이 모두 사모하고 기뻐하였으며, 감화되어 복종하였다.
선생은 집에 있을 때에는 매일 일찍 일어나서 세수하고 머리 빗고 예복을 갖추어 입은 다음 가묘(家廟)에 참배하고는 물러 나와서 서실에 들어앉아 조용히 책상을 대해 앉았으며, 절대로 사물(事物)에 마음을 쓰지 않았다. 그리고 집안에는 엄연히 차서(次序)가 있어서 어버이가 살아 계실 때에는 정성을 다하여 봉양하되 반드시 온 힘을 다하였고, 비속(卑屬)들과 어린이들을 잘 보살피되 반드시 두루 흡족하게 사랑하였다.
선생은 장사 지내는 예법에 있어서 인정(人情)과 예문(禮文)을 지극히 갖추었고, 제사 지내는 예법에 있어서 정성과 공경 두 가지를 다 극진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기사년(1569)에 찬성공(贊成公) 부인의 상을 당했을 때에는 선생이 마침 해서(海西) 지방에 있다가 갑자기 슬픈 마음이 들어 눈물을 금치 못했는데,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지 않아 부음(訃音)이 들려왔다. 그리고 임진년(1592)에는 큰아들 은(檃)이 다른 곳에 있다가 왜적을 만나 해를 입었는데, 선생은 문득 온종일 슬픈 마음이 드는 것을 느꼈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성의(誠意)가 순수하고 독실하여서 그런 것이었다.
선생은 제부(諸父)를 섬기기를 아버지 섬기듯이 하였으며, 아우와 누이들에 대한 우애는 늙을수록 더욱더 도타웠다. 이에 재물을 나눔에 있어서는 좋지 못한 것은 자신이 갖고 좋은 것은 모두 동생들에게 주었다. 그리고 김경손(金慶孫) 등이 비명(非命)에 죽자 추념(追念)하기를 하루같이 하여 애통해하는 뜻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터져 나와 곁에 있던 사람들조차 그 때문에 감동하였다. 그러니 은의(恩義)를 독실히 하고 윤리(倫理)를 올바로 하는 데 있어서 진선진미(盡善盡美)했다고 할 만하다.
벼슬한 행적에 드러난 것을 보면, 관직의 책임을 다함에 있어서는 관직의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고 마음을 다해 봉행하였다. 중년(中年)에는 대부분 주현(州縣)을 맡는 직에 머물러 있었는데, 사람을 사랑하고 물건을 이롭게 하는 마음이 지성에서 나왔다. 계해년(1623, 인조1) 이후로는 조정에 있은 날이 또한 많지 않았으므로 가슴속에 품고 있는 뜻을 끝내 다 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아는 것은 말하지 않은 것이 없고, 말을 하면 반드시 이치에 들어맞았으며, 일에 따라 바로잡고 구제하여 도움이 됨이 아주 많았다. 그러니 선생이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정성은 벼슬을 버리고 물러가 있다 하여 조금도 끊어진 때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치도(治道)를 논함에 이르러서는 반드시 천리(天理)를 밝혀서 왕도(王道)를 행하고, 인심을 바루어 나쁜 풍속을 바로잡으며, 기강을 진작시켜서 폐단을 개혁하는 것으로써 급선무를 삼았는데, 본말(本末)이 구비되어 있어서 모두 시행할 수 있는 것들이었으며, 빈말을 하는 데 그칠 뿐만이 아니었다.
선생은 스승과 벗들 사이에도 은혜와 의리를 모두 지극히 하였다. 송구봉(宋龜峯)의 온 집안이 화를 만나 곤궁하여 의탁할 곳이 없게 되자, 선생은 마음을 다해 주선해서 집안에 모시고서 봉양하여 여생을 마치도록 하였다. 그리고 인조(仁祖)가 즉위한 뒤에는 선생이 여러 동문들을 거느리고 상소하여 송구봉의 원통한 사실을 드러내어 말하였으며, 그 유족들을 친동기간과 다름없이 대우하였다. 그리고 송강(松江) 정철(鄭澈)이 유감을 품은 자의 무함(誣陷)에 걸려들었는데, 그들은 정철을 간인(奸人)의 괴수로 지목하고는 인하여 사람들을 죄에 빠뜨리는 큰 함정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러자 평소에 송강과 알고 지내던 사람까지도 혹 때를 틈타 돌을 던지면서 시론(時論)에 붙는가 하면, 조정에서 정철의 성명을 말하기조차 꺼린 지가 30여 년이나 되었다. 그런데도 선생은 송강의 충직한 행실을 사모하여 항상 그의 마음 자취를 밝혔는데, 비록 헐뜯는 말이 사방에서 일어나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 뒤 계해년에 인조반정이 일어났을 때에는 등대(登對)하여서 송강이 무함에 걸려든 진상을 모조리 진달하고 관작(官爵)을 복원해 주기를 청하였다.
선생은 또 율곡 선생을 섬기되 어버이를 섬기는 것과 똑같이 하였다. 갑신년(1584, 선조17)에 율곡이 세상을 떠났을 때 선생은 바야흐로 상중에 있었는데, 스승을 위해 입는 상복(喪服)을 지어 입고 먼 거리에서 달려가 장례에 임하였고,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는 그 복을 입고 곡하였으며, 기일(忌日)에는 재계(齋戒)하고 소식(素食)하기를 평생토록 폐하지 않았다. 또한 구봉에 대해서도 그렇게 하였다. 이로부터 사우(師友)의 의리가 세상에 다시 밝혀지게 되었다.
선생은 후진(後進)을 대하고 이끌어 줌에 있어서 아무리 어리고 천한 자일지라도 반드시 마음을 열어 성의를 보이면서 반복하여 이끌어 주되, 자세하게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또한 글을 읽힘에 있어서는 반드시 구두를 분명하게 떼고 의리를 깊이 탐색하게 해서 배우는 자가 스스로 그 뜻을 터득하여 마음으로 체득하고 일로 징험하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그 대요(大要)로 말하면 반드시 입지(立志)를 우선으로 하고 궁행(躬行)을 실제로 삼아서 각자의 재품(材品)에 따라 다방면으로 개도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배우는 자들이 위기지학(爲己之學)을 하면서 실천하기를 힘쓰는 것을 보면 마음으로 기뻐하고 안색에 나타내어 마치 당신 자신이 그렇게 하는 것처럼 여겼으며, 혹 하는 것이 마음에 절실하지 않은 것을 보면 조용하고 자상하게 경계하여 주었다.
선생이 글을 가르치던 차서(次序)는 처음에는 《소학》과 《가례》를, 다음에는 《심경》과 《근사록》을 다루어 배우는 자들의 학문의 근본을 배양하고 학문의 길을 열어 준 다음에 사서(四書)와 오경(五經)을 가르쳤는바, 질서 정연하게 차서가 있어서 단계가 아주 엄격하였다. 그리고 과거 공부와 문장을 짓는 말단적 학문에 대해서는 일찍이 말과 의논에 언급한 적이 없었다.
선생은 일찍이 학자들에게 이르기를,
“이(理)와 기(氣)는 둥글둥글 뭉쳐 있어서 본디 서로 떨어져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양촌(陽村) 권근(權近)은 두 군데서 나온다고 하였으며,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은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은 호발(互發)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것들은 모두 투철한 견해라고 볼 수가 없는바, 이와 기를 두 갈래로 갈라놓은 잘못을 범한 것이다. 율곡 선생이 ‘발한 것은 기이고, 발하게 하는 것은 이이다. 이라는 것은 태극(太極)이고 기라는 것은 음양(陰陽)이다. 이제 태극과 음양이 서로 간에 동한다고 한다면, 그건 말이 안 되는 것이다. 태극과 음양은 서로 간에 동하게 할 수 없는 것인즉, 이와 기가 서로 간에 발한다고 한 것이 어찌 틀린 말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비록 성인이 다시금 나온다고 하더라도 바꿀 수 없는 말이다.”
하였다. 또 일찍이 《대학》에 나오는 물격(物格)과 지지(知至)에 대해 논하면서는 말하기를,
“주자(朱子)가 이른바 ‘물리(物理)의 극처(極處)에 이르지 아니함이 없다.’고 한 것은, 사물에 들어 있는 이치에 대해 이미 그 극처에까지 나아갔으므로 다시 더 나아갈 데가 없다는 것을 이른 것이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모두들 나의 앎이 극처에 도달한 것이라고 한다. 만약 그 말이 옳다면, 그것은 지지이지 물격이 아니다. 사물의 이치로 말하였을 때는 그것을 물격이라고 하고, 내 마음으로 말하였을 때는 그것을 지지라고 하는 것이다. 비록 이것이 한 가지 일이기는 하지만, 말에는 각각 그 마땅함이 있는 것이니, 이를 분명하게 따져 보지 않아서는 안 된다.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는 이에 대해서 또 이르기를, ‘사물 이치의 극처에 이르지 아니함이 없다고 한 것은, 물리가 내 마음에 이르러 왔다는 것이다. 이는 비유하자면, 「손님을 초청하니까 손님이 왔다[請客而客來]」는 것과 같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말은 주자가 말한 본래의 뜻을 크게 잃은 것이다. 대개 사람이 사물에 들어 있는 이치에 대해 다 알아서 사물 안에 들어 있는 이치에 대해 이미 그 극처에 도달하였을 경우, 나에게 있는 앎 역시 내가 나아간 바에 따라서 다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이는 정자(程子)가 이른바 ‘저것을 알자마자 바로 이것도 알게 된다.’고 한 말이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사물의 이치가 본디 내 마음속에 갖추어져 있는 것이니, 어찌 그것이 내 마음속으로 다시 올 리가 있겠는가.”
하였다. 그리고 또 일찍이 《중용》에 나오는 계구(戒懼)와 근독(謹獨)에 관해 논하면서는 말하기를,
“계구는 동(動)과 정(靜)을 겸해서 한 말이고, 근독은 단지 동 한쪽 면만을 두고 한 말이다. 대개 집주(集註)에서 계구에 대해서 ‘항상 경외하는 마음을 지녀야 한다.[常存敬畏]’고 한 말은, 동과 정에 관계없이 일찍이 계구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는 뜻이며, ‘비록 보고 듣지 아니할 때라도 역시 감히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雖不見聞 亦不敢忽]’고 한 말은, 비록 남이 보고 듣지 아니할 때라도 역시 계구하는 마음을 감히 잊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근독에 대해서 ‘이미 항상 계구한다.[旣常戒懼]’고 한 말은 위의 글에서 이른바 ‘계구는 동과 정을 겸해서 한 말이다.’라고 한 것을 다시금 되풀이해서 말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대해 더더욱 삼가야 한다.[於此尤加謹]’고 한 말은 비로소 동의 초기에 나아가서 더더욱 삼가게 한 것이다. 호계수(胡季隨)가 물은 바에 대해 주자가 답하면서 계구(戒懼)를 정(靜)에 소속시키고 근독(謹獨)을 동(動)에 소속시켜 놓은 것은, 이는 주자의 초년의 소견이다.”
하였다. 또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을 논함에 있어서는 나흠순(羅欽順)의 성정설(性情說)을 배척했고, 심성(心性)과 정의(情意)를 논함에 있어서는 호굉(胡宏)이 두 갈래로 나눈 잘못을 분변하였는데, 한결같이 주자의 가르침을 바른 것으로 삼았는바, 이것들은 모두 백대(百代) 뒤에 성인이 나오기를 기다리더라도 의혹되지 않는 것들이다.
선생은 또 일찍이 말하기를,
“사마온공(司馬溫公)이 이른바 ‘평생 동안 한 일에 대해 남에게 말하지 못할 것이 없다.’고 하였는데, 나도 일찍이 이 경계를 잘 지켜서 감히 어기지 않았다.”
하였다. 선생은 또 우리 동방(東方)의 도학(道學) 연원(淵源)에 대해 논하면서는 말하기를,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가 고려 말기에 끊어진 도학의 연원을 일으켰고, 한훤(寒暄) 김굉필(金宏弼)이 우리 조선조에 들어와서 끊어진 계통을 이었으나, 은미한 뜻은 밝혀내지 못하였고 지극한 도는 창달시키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 선생이 성명(誠明)의 학(學)을 가지고 임금과 백성을 요순 시대의 임금과 백성으로 만들려는 책임을 떠맡아서 조정에서 실시함에 따라 울연히 볼 만한 것이 있었는바, 그 유풍(遺風)과 여운(餘韻)은 족히 백대를 고무시킬 수가 있었다. 그로부터 그 뒤에는 간간이 한두 분의 뛰어난 유현(儒賢)이 나와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으나, 우뚝하게 도를 전한 분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퇴계 선생이 뭇 현인들이 죽임을 당한 뒤끝을 이어받아 사문(斯文)을 일으키는 것을 자기의 책임으로 삼고는, 경전을 깊이 연구하고 의리를 강구하여 밝혔으며, 자신 한 몸의 겸손한 덕을 지키고 후학들의 길을 열어 놓으셨는바, 그 공이 크다고 할 만하다. 그러나 명백하여 순수하고 맑아서 찌꺼기 하나 없으며, 참으로 알고 참으로 실천하여 성인의 종지(宗旨)를 얻음으로써, 말과 행동에 있어서 고찰해 보아도 하자가 없고 베풀어 놓은 사업을 보아도 모두 시의에 맞을 뿐만 아니라, 출처(出處)가 다 올바르고 진퇴(進退)가 다 의리에 맞았으며, 몸소 계왕개래(繼往開來)의 크나큰 책임을 떠맡고 도맥(道脈)이 영원해지도록 해 놓은 이는 오직 우리 율곡 선생 한 분뿐이시다.”
하였다. 선생이 도학의 연원을 논하고 선철(先哲)들의 본말(本末)을 따져서 취사(取捨)를 신중하게 하신 것이 이상과 같았다.
선생은 평소에 저술을 일삼지는 않았으나 매번 글을 읽으면서 의심스러운 것을 기록해 둔 바로는 《경서변의》 8권, 《근사록석의》 1권, 《의례문해》 8권 및 서(書), 소(疏), 잡록(雜錄) 몇 권이 집에 보관되어 있다. 또 이 밖에 신의경(申義慶)이 편찬한 것을 산정(刪定)한 《가례집람》 3권과 《상례비요》 1권이 있는데, 《상례비요》는 간행한 지가 이미 오래되어 비록 아주 먼 외방의 시골이라고 하더라도 모두들 이를 준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책들은 산정을 함에 있어서 완전하게 하지 못한 채 지레 유포된 탓에 선생은 대개 완전한 책으로 여기지는 않았다. 이에 뒤를 이어 다시금 수정하였으며, 선생이 돌아가신 뒤에 또다시 추가로 간행하였으므로 앞서 간행한 본(本)과 나중에 간행한 본이 각각 따로따로 있게 되었다. 대개 선생은 평소에 예학(禮學)에 대해서 가장 많이 힘을 쏟았다.
선생은 창녕 조씨(昌寧曺氏)를 부인으로 맞아들였는데, 이분은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되었다. 이분은 판돈녕부사를 지내고 창양군(昌陽君)에 봉해진 조광원(曺光遠)의 손녀이고, 첨지중추부사를 지낸 조대건(曺大乾)의 따님이다. 이분은 정숙하고 유순하여 아주 뛰어난 부덕(婦德)이 있었는데, 36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셨다. 처음에는 연산현(連山縣) 거정리(居正里)에 장사 지냈다가 임신년(1632)에 진잠(鎭岑)에다가 개장(改葬)하였으며, 신사년(1641)에 또다시 우수리(牛首里)에 있는 선생의 묘로 옮겨 부장(祔葬)하였다.
선생은 아들 셋을 두었다. 맏아들은 은(檃)으로, 바로 임진왜란 때 죽임을 당한 분이다. 다음은 집(集)으로 이조 판서인데, 가업(家業)을 잘 이어받아서 한 시대의 유종(儒宗)이 되었다. 그다음은 반(槃)으로 이조 참판이다. 또 딸 셋을 두었는데, 맏사위는 감찰 서경휼(徐景霱)이고, 셋째 사위는 목사 한덕급(韓德及)이며, 둘째 딸은 일찍 죽었다. 측실에서는 아들 여섯을 두었는데, 맏이는 영(榮)으로 생원(生員)이고, 다음은 경(檠), 고(杲), 구(榘), 규(槼), 비(棐)인데, 비는 진사이다. 또 딸 둘을 두었는데, 맏사위는 이유(李梄)이고, 둘째 사위는 이명진(李名鎭)이다.
판서 집은 측실에서 난 아들 둘을 두었는데, 맏이는 익형(益炯)이고 둘째는 익련(益煉)으로 생원이다. 또 딸 둘을 두었는데, 맏사위는 생원 김태립(金泰立)이고 둘째 사위는 정광원(鄭廣源)이다. 참판 반은 아들 여섯을 두었는데, 맏이인 익렬(益烈)은 군수이고, 둘째인 익희(益煕)는 부제학이고, 셋째인 익겸(益兼)은 어린 나이에 사마시(司馬試)에 장원하였으나, 오랑캐의 변란 때 사절(死節)하여 지평에 추증되었으며, 넷째인 익훈(益勳)은 주부(主簿)이고, 다섯째인 익후(益煦)는 정자(正字)인데 일찍 죽었고, 여섯째인 익경(益炅)은 진사이다. 또 딸 다섯을 두었는데, 맏사위는 부사 이정(李淀)이고, 둘째 사위는 판서 이후원(李厚源)이고, 셋째 사위는 수찬 장차주(張次周)이고, 넷째 사위는 생원 이해관(李海寬)이고, 다섯째 사위는 심약제(沈若濟)이다.
서경휼은 딸 둘을 두었는데, 맏사위는 현감 신경(愼暻)이고, 둘째 사위는 성숙(成璹)이다. 한덕급은 아들 셋을 두었는데, 맏이는 군수 한수원(韓壽遠)이고, 그다음은 선전관(宣傳官) 한지원(韓智遠)이고, 그다음은 한지원(韓志遠)이다. 또 딸 셋을 두었는데, 맏사위는 이여홍(李汝洪)이고, 둘째 사위는 김민성(金敏成)이고, 셋째 사위는 이시정(李時挺)이다.
영은 아들 셋을 두었는데, 맏이는 익황(益熀)이고, 둘째는 익정(益炡)이고, 셋째는 익견(益熞)이다. 경은 아들 둘을 두었는데, 맏이는 익수(益燧)이고, 둘째는 익훤(益烜)이다. 고는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익문(益炆)이고, 딸 둘을 두었는데 맏사위는 송유진(宋有鎭)이고, 둘째 사위는 이숙(李俶)이다. 구(榘)는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익돈(益燉)이고, 딸 셋을 두었다. 규는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익륜(益㷍)이고, 딸 하나를 두었는데 사위는 유재(柳宰)이다. 비는 딸 다섯을 두었는데, 어리다. 내외(內外)의 증손(曾孫)과 현손(玄孫)은 모두 합해 200여 명이다.
아, 선생의 도덕과 학술의 아름다움은 후생의 말학(末學)으로서 엿보아 헤아릴 바가 아니며, 더구나 나는 가장 늦게서야 제자가 된 처지이니 만큼 더욱더 감히 무어라고 말할 바가 못 된다. 그러나 일찍이 그 시(始)와 종(終)을 나름대로 구해 볼 생각을 하였으며, 평소에 말하고 행동한 것의 요점을 미루어서 기록해 두었다.
대개 선생의 아버지인 대헌공(大憲公)이 큰 재주와 깊은 학문으로 명성을 크게 떨쳤는데, 선생은 어려서부터 그 서업(緖業)을 이어받아 문헌(文獻)의 전통을 이미 얻었다. 율곡 선생은 뛰어난 자품으로 문운(文運)의 상서에 응하여 스승의 가르침을 거치지 않고 도학(道學)의 오묘함을 묵묵히 터득하여 사문(斯文)의 중책을 떠맡고서 성인(聖人)의 학문을 이 세상에 일으켰으니, 진실로 우리 동방에서 회옹(晦翁)의 적통(嫡統)을 이어받은 이라고 할 수 있다.
선생은 이미 그 학문을 이어받아 크나큰 도학(道學)의 요결(要訣)을 얻었다. 그러고는 드디어 한 뜻으로 중책을 담당하여 차츰차츰 학문을 쌓아 나갔는데, 어려서부터 노경에 이르기까지 혹한(酷寒)이나 혹서(酷暑) 등 어떠한 경우에 처해서도 일찍이 한순간이라도 중단함이 없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도학이 밝아지고 진지하며 순수하고 전일해져 접하는 곳마다 통달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밝은 마음으로 은미한 곳을 살펴봄에 있어서는 태극(太極)과 음양(陰陽) 및 만사(萬事)와 만물(萬物)의 이치를 하나로 꿰뚫어 남김이 없었으며, 강인한 의지로 그 중책을 맡음에 있어서는 고금(古今) 성현(聖賢)들의 지극한 덕이며 뛰어난 행실의 아름다움을 자신의 한 몸에 구비하여 빠뜨리지 않았다. 용력(用力)의 확고함은 사물의 이치가 얽히고설켜 있어도 앗아 가지 못하였으며, 자수(自守)의 독실함은 삶과 죽음이 오가는 순간에도 능히 바뀌지 않았다. 위의(威儀)와 용지(容止)의 법도는 쇠약한 노경에 이르러서도 오히려 삼갔고, 계구(戒懼)하고 성찰(省察)하는 공부는 으슥한 곳과 남모르는 데에서도 더욱 엄격하여, 공부가 날로 새로워져서 상달(上達)하여 마지않았다.
만년에 이르러서는 도(道)와 덕(德)이 높고 성대해지자 그 경지가 원만하고 완벽하며 높고 깊고 넓어서 그 끝을 헤아려 알 수가 없었다. 이에 온화한 기운이 온몸에 흐르고 화락한 뜻이 말과 웃음에 넘치며, 정신은 차분하였지만 모습은 엄숙하였고 얼굴빛은 온화하지만 말은 엄격하였다. 움직이거나 가만히 있을 때와 말할 때나 침묵할 때에는 어느 때고 여유가 있고 태평하며 자상하고 완만하여 자연스러운 가운데 분명하게 법도를 이루었다. 그리고 한가로이 지냄에 있어서도 매우 평온하였으며 성품이 화락하고 간이하여 그대로 보아 넘기는 일이 많았다. 그러나 일을 처리할 때 의리로써 결단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단호히 처리하여 감히 범할 수 없게 하였다. 이상은 고루하고 우매한 내가 알 수 있고 볼 수 있는 것들이다.
아, 선생은 학문이 이미 고명한 경지에 이르고서도 미처 보지 못한 듯이 노력하였고, 덕이 이미 순수하고 성대한 경지에 이르고서도 터득한 것이 없는 듯 겸손하였는바, 나이가 80이 넘은 이후에도 곰곰이 사색하는 노력을 날로 더하여 유연히 자신의 몸이 늙어가는 줄조차도 알지 못하였다. 외형적으로 드러난 것을 본다면 그 정도면 완전하게 성취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고, 그 내면을 헤아려 본다면 아마도 다른 사람은 미처 모르고 있는데 자신만이 진취하였음을 깨닫는 것이 존재했을 것이다. 그러니 학문이 이루어지고 행실이 높아지며 도가 순수해지고 덕이 구비되어 성대히 한 시대의 유종(儒宗)이 된 것은 아주 당연한 것이다.
《중용》에 이르기를, “배우지 않을지언정 그것을 배우면 능해지지 않고는 그대로 두지 않으며, 묻지 않을지언정 그것을 물으면 알지 않고는 그대로 두지 않으며, 생각하지 않을지언정 그것을 생각하면 터득하지 않고는 그대로 두지 않으며, 분별하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분별할 바에는 그것을 분명하게 분별하지 않고서는 그만두지 아니하며, 행하지 아니할지언정 행할 바에는 그것을 독실하게 하지 않고서는 그만두지 아니한다. 남이 한 번 하여 능해지거든 자신은 백 번 하여 능해지며, 남이 열 번 하여 능해지거든 자신은 천 번 하여 능해지도록 한다. 과연 능히 이를 제대로만 한다면 비록 어리석은 자라도 반드시 밝아질 것이며, 비록 유약한 자라도 반드시 강해질 것이다.” 하였는데, 고금(古今)을 두고 낱낱이 가려볼 때 능히 이와 같이 힘을 쏟아서 완성하는 데에 이르기를 우리 선생과 같이 했던 사람은 대체로 얼마 없다. 이것은 필시 하늘이 우리 사문(斯文)을 도우시어 우리 선생을 탄생시켜 학문을 하는 표준으로 만들어서, 자질이 영민한 자는 감히 차서를 뛰어넘고 소홀히 하여 부질없고 요원한 곳으로 달려가지 못하게 하고, 자질이 노둔한 자는 선뜻 스스로 중단하지 않고 용기를 내어 분발하고 부끄러운 줄을 알아 힘껏 실행하여 반드시 성취함이 있도록 한 것이다. 그러니 우리 선생의 공이 어찌 적다고 하겠는가.
공자(孔子)께서 말씀하기를, “도(道)를 준수하여 행하다가 힘이 부족하여 중도에서 그치더라도 부지런히 힘쓰면서 날마다 노력하다가 죽은 다음에나 그만둘 일이요, 햇수가 부족함을 의식하지 말라.” 하였다. 그리고 정자는 말하기를, “젊어서 학문을 좋아하는 일이 진정 사랑스럽기는 하나, 늙어서 학문 좋아하는 일이 더욱 사랑스럽다.” 하였다. 그러니 후세의 나이와 힘이 쇠퇴해서 학문을 이루기가 어려운 것을 두려워하여 힘쓰기를 게을리하는 자로 하여금 선생의 풍도(風度)를 듣게 한다면, 또한 필시 감동하여 분발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대체로 하늘이 율곡을 앞 시대에 탄생시켜 고명하고 절륜한 자질로서 빗장을 뽑고 자물쇠를 풂으로써 도학의 근원을 활짝 열어 천지간에 환하게 빛나게 하였고, 또다시 우리 선생을 훗날에 탄생시켜 독실하게 실천하는 학문을 가지고 참된 마음을 오래도록 쌓아 끝내 성현들이 이루어 놓은 법을 모두 궁구함으로써 후세 사람들의 모범이 되게 하였다. 그러니 하늘이 우리 두 선생을 탄생시켜 우리 동방 도학의 연원을 열어 놓은 것이 어찌 우연한 것이겠는가.
《주역》에 이르기를, “슬기는 높고 예의는 낮으니, 높은 것은 하늘을 본받고 낮은 것은 땅을 본받는다.[智崇禮卑 崇效天 卑法地]” 하였는데, 아마도 우리 두 선생의 기상이며 조예가 각기 서로 비슷한 점이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주자가 두 정씨(程氏) 부자(夫子)에 대해 논하기를, “마치 문왕(文王)은 기(岐)를 다스리고 주공(周公)은 예법(禮法)을 제작한 것처럼 같지 않은 점이 있다.”고 한 경우와 또한 가깝다고 하겠다. 후세에 덕(德)을 알아보는 사람이 혹시 상고해 보는 일이 있다면 또한 나의 이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 것이다.
숭정(崇禎) 기원후(紀元後) 경인년(1650, 효종1) 4월 모일에 문인 통훈대부(通訓大夫) 행 사헌부 집의(行司憲府執義) 송시열(宋時烈)은 삼가 행장(行狀)을 짓는다.
[주1] 경천욕일(擎天浴日)의 큰 공로 : 위태로운 시국을 만회하여 나라를 지탱시키는 크나큰 공로를 세운 것을 말한다. 경천은 하늘을 떠받치는 것을 말하며, 욕일은 희화(羲和)가 해를 나오게 해 감천(甘泉)에 목욕시킨 것을 말한다.
[주2] 오형(五刑)과 오류(五流) : 오형은 묵(墨), 의(劓), 비(剕), 궁(宮), 대벽(大辟)의 형벌을 말하고, 오류는 사형죄에 해당되는 다섯 가지 형벌을 범한 자에 대해서 너그럽게 용서하여 유배하는 형벌을 시행하는 것을 말한다. 《서경(書經)》 순전(舜典)에, “오형에 복죄하게 하되, 오형에 복죄한 자들을 세 곳으로 나누어 행형(行刑)하며, 다섯 가지 유형(流刑)에 머무는 곳이 있게 하되, 다섯 가지 유형에 해당하는 자들을 세 곳으로 나누어 거처하게 할 것이다.[五刑有服 五服三就 五流有宅 五宅三居]” 하였다.
[주3] 오왕(五王)이 …… 일 : 오왕은 당(唐)나라 무후(武后) 때 평양군왕(平陽郡王)에 봉해진 경휘(敬暉), 부양군왕(扶陽郡王)에 봉해진 환언범(桓彦範), 한양군왕(漢陽郡王)에 봉해진 장간지(張柬之), 남양군왕(南陽郡王)에 봉해진 원서기(袁恕己), 박릉군왕(博陵郡王)에 봉해진 최원위(崔元暐)를 가리킨다. 이들은 측천무후가 몸이 아프자 몰래 반역을 도모하고자 하였던 장이지(張易之)와 창종(昌宗) 등의 역모를 미리 알아채고 진압하였으나, 무삼사(武三思) 등을 처형하지 않아 끝내 이들에게 모함을 받아 귀양 갔다가 처형되었다. 《舊唐書 卷91 桓彦範傳》
[주4] 정국 공신(靖國功臣)의 세 대장(大將) : 중종반정 때의 세 대장인 박원종(朴元宗), 성희안(成希顔), 유순정(柳順汀)을 가리킨다. 이 세 사람은 모두 중흥의 원훈(元勳)으로서 임금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었으면서도 세상에 남을 만한 공적은 하나도 세우지 못한 채 자만심에 빠져 사치스럽고 호화로운 생활을 영위하면서 자신들의 욕심만 채우다 일생을 마쳤다. 《燃藜室記述 卷9 中宗朝相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