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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송재 김공 행장〔後松齋金公行狀〕
퇴도(退陶) 노선생(老先生)의 문하에서 당시의 여러 현인들이 모두 경서를 잡고 공부하면서 받들어 스승으로 섬겼다. 오직 후송재(後松齋) 김공(金公)만 총각머리를 한 아이였기 때문에 급문(及門) 제자가 되어 배우고자 하는 정성을 이루지 못하였다. 뒤에 도산사(陶山祠)를 배알하고 시를 지었는데, 다음과 같다.
선생의 덕망과 학업이 해와 별처럼 빛나니 / 先生德業日星明
후학인 내가 지금 와서 모범이 됨을 생각하네 / 後學今來想典刑
직접 배우지 못한 한을 모두 가지고 / 都將未及摳衣恨
배알하며 갱장의 공경하고 사모하는 뜻 부치네 / 拜寓羹墻敬慕誠
대개 평소 퇴계 선생의 풍도를 듣고 흠모하고 상상하던 끝에 감동하여 우러르고 분발함이 스스로 남들과 구별될 뿐만이 아니었다. 공의 학문 본령(本領)이 어찌 여기에서 확립되지 않았겠는가.
공의 휘는 사정(士貞), 자는 정숙(正叔)이다. 김씨(金氏)의 선조 가운데 안동(安東) 상락(上洛)을 관향으로 하는 이는 고려 충렬공(忠烈公) 방경(方慶)이 그 비조이다. 도평의(都評議) 구정(九鼎)을 지나 우리 조선의 감목관(監牧官) 자첨(子瞻)에 이르러 의성현(義城縣) 사촌리(沙村里)로 이주하였다. 이분의 아들 효온(孝溫)은 사직(司直)을 지냈는데, 이분이 북평사(北評事) 극해(克諧)를 낳았다. 이분(극해)이 진사 호 송은(松隱) 휘 광수(光粹)를 낳았는데, 연산군의 정사가 어지러움을 보고 은거하며 세상에 나오지 않고 생을 마쳤으며, 서원에 제향되었다. 이분이 참봉 휘 당(溏)을 낳았다. 이분이 인의(引儀) 휘 세우(世佑)를 낳았는데, 의성 김씨(義城金氏) 군수 한철(漢哲)의 손녀, 만겸(萬謙)의 따님에게 장가갔다. 가정(嘉靖) 임자년(1552, 명종7)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성인(成人)의 의범과 국량이 있어 여러 아이들의 다툼을 멈추게 하였다. 어버이를 효성으로 섬겼는데, 어머니가 병이 나 매우 위독한 적이 있었다. 공이 북두칠성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자신이 대신하기를 빌었는데, 마침내 병이 나았다. 장성함에 이르러 경서와 역사서를 두루 섭렵하였으나, 성리학(性理學)에 더욱 뜻을 두었다. 이창석(李蒼石), 신오봉(申梧峯), 이석담(李石潭) 등 여러 현인들과 도의(道義)의 사귐을 맺었다. 서애(西厓) 유 문충공(柳文忠公)이 일찍이 공을 아끼며 말하기를, “훗날 수립할 바가 반드시 보잘것없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형제간에 우애가 돈독하여 백씨(伯氏) 만취공(晩翠公), 중씨(仲氏) 직장공(直長公)과 함께 하루 종일 한집에서 학문에 매진하며 서로 즐거워하였다. 경진년(1580, 선조13)에 아버지 인의공(引儀公)의 상을 당하였고 임오년(1582, 선조15)에 모친이 세상을 떠났다. 전후 부모의 상에 모두 무덤가에 여막을 짓고 삼년상을 마쳤다. 바야흐로 장사 지낼 때 산 아래에 거주하는 백성이 몇 백 집이었는데, 처음에는 서로 오랫동안 의견 충돌이 있었으나, 얼마 후 공의 지극한 정성에 감동하여 모두 귀의하여 순종하였다. 또 백성들이 스스로 ‘촌집의 연기가 무덤 곁에 너무 가까이 가서 효자의 마음을 슬프게 할 수 없다.’라고 생각하고 드디어 조금 먼 곳으로 집을 옮겨 갔다.
임진년(1592, 선조25) 왜구가 크게 침입하여 노략질을 하니, 주상은 서쪽 의주(義州)로 몽진하였다. 공이 소매를 걷어붙이고 의병을 일으키니 원근에서 따르는 자가 몇 백 명이었다. 드디어 중씨(仲氏 김사형(金士亨))와 함께 망우(忘憂) 곽공(郭公)을 따라 화왕산성(火旺山城)으로 들어갔다. 쌓아 놓은 땔나무를 불사르고 맹세하여 말하기를, “죽을 힘을 다해 싸워 적을 섬멸하지 못한다면 이 땔나무처럼 사라지리라.”라고 하고, 곧바로 또 “땔나무를 불살라도 뜻은 재가 되지 않으리.[焚薪志不灰]”라는 구절을 읊조리니, 곽공이 훌륭하게 여겼다. 공이 척후(斥候) 활동을 잘하여 왜적이 이르기도 전에 항상 먼저 알았다. 그 때문에 군대를 부리고 병사를 씀에 패하지 않을 수 있었다. 영남 좌도의 고을들이 힘입어 보존된 것은 공의 힘과 도움이 많았기 때문이다.
곽공이 비슬산(琵瑟山)에 들어가자 공이 찾아가 만났다. 곽공이 손을 잡으며 화왕산에서 생사를 함께한 의리를 말하였다. 무릎을 두드리며 공의 시를 외웠으며, 공을 지불회의사(志不灰義士)라고 불렀다. 공도 또한 비분강개함을 이기지 못하여, 꿈에 왜적과 싸우면서 스스로 부대 하나를 대적하여 승리하기에 이르렀다. 이미 꿈에서 깨자 시 한 수를 지었는데, “왜구를 눈앞에서 세 번 이긴 날[虜在目中三捷日]”이라는 구절이 있다.
만년에는 은거하여 자연에 생활하면서 오직 자제를 가르치는 것으로 일을 삼았다. 일찍이 《대학》에 나아가 그림 하나를 완성하여 아들 형(浻)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이 책은 성인의 학문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대학》 한 편의 요령이 이 그림에서 벗어나지 않으니 모름지기 십분 힘을 쓰는 것이 옳다.”라고 하였다. 명리(名利)에 담박하였기에 맏아들 회(淮)가 과거 급제하여 하객들이 집에 가득하였으나 전혀 기뻐하는 얼굴빛이 없이 도리어 학문이 성취되지 않았는데 높은 성적으로 합격한 것을 근심하였다.
일찍이 부부(夫婦) 사이에 삼감, 부자(父子) 사이에 친애함, 형제(兄弟) 사이에 화목함, 장유(長幼) 사이에 차례가 있음, 제사(祭祀)를 받듦, 친족과 이웃에 화목함, 동복(僮僕)을 부림, 벗과 사귐 등으로 〈가계(家誡)〉 여덟 조목을 지어 자리 오른쪽에 써서 보고 반성하는 바탕으로 삼았다. 또 퇴계(退溪)의 예설을 분류하고 편찬하여 후인들이 고증하는 데 편리하게 하였다.
날마다 새벽에 일어나 가묘를 배알하고 초하루와 보름마다 반드시 선영에 성묘하였는데, 늙었다고 해서 스스로 게을리하지 않았다. 생일날 아침을 맞아 자제들이 마련한 헌수연(獻壽宴)을 물리치며 말하기를, “어버이께서 고생스럽게 나를 낳아 주신 날이라 비통함이 절로 평소의 배가 되니, 차마 생일잔치를 받을 수 있겠느냐.”라고 하였다. 집 주변에 몇 칸의 집을 짓고 편액하기를, ‘후송(後松)’이라고 하였다. 소나무[松]는 바로 송은공(松隱公 김광수(金光粹))이 심은 것을 가리키는데, 그것으로 세한(歲寒)의 뜻을 붙인 것이다.
만력 경신년(1620, 광해군12) 모월 모일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69세였다. 의성현의 북쪽 화곡리(禾谷里) 갑좌(甲坐 남서 75도 방향) 언덕에 장사 지냈다. 부인은 한양 조씨(漢陽趙氏) 진사 희로(希老)의 따님으로, 양경공(良敬公) 연(涓)의 후손이다. 온화하고 유순하며 용의가 바르고 엄숙하여 부인(婦人)의 도를 잘 지켰으니, 공이 윤리에 맞는 행실에 돈독한 것은 또한 내조의 힘이 컸기 때문이다. 아들 셋, 딸 셋을 두었으니, 아들 중 장남 회(淮)는 문과 급제하여 정랑(正郞)이 되었고, 그다음 한(瀚)과 형(浻)은 모두 통덕랑(通德郞)이다. 딸은 생원 안처선(安處善), 서경(徐璟), 이윤미(李允美)에게 시집갔다. 회는 아들이 하나이니 장사랑 상유(尙瑜)이며, 딸이 넷이니 박원(朴垣), 신점(申坫), 권선(權璿), 박륜(朴綸)에게 시집갔다. 한은 아들이 둘이니 상위(尙瑋), 상찬(尙璨)이며, 딸이 둘이니 현감 남해우(南海宇), 권대경(權大經)에게 시집갔다. 형은 아들이 하나이니 상관(尙瓘)이며, 딸이 하나이니 권문진(權文振)에게 시집갔다. 나머지는 기록하지 않는다. 과거 급제한 사람으로는 무과 급제하여 도총(都摠)을 지낸 이중(履中), 문과 급제하여 통례(通禮)를 지낸 성(聲), 문과 급제하여 병조 정랑을 지낸 오응(五應)이 있다.
공은 타고난 자질이 이미 뭇사람들과 크게 달랐고 또 종유한 사우(師友)들이 모두 일대(一代)의 명현(名賢)들이었기 때문에 윤리에 돈독한 행실과 왜적에 대해 적개심을 가진 충성, 그리고 일상생활에 드러난 것들이 학문한 가운데서 유래하지 않은 것이 없으며, 저술한 바 〈대학도(大學圖)〉 하나, 〈가계(家誡)〉 여덟 조목, 예설(禮說) 두 편의 경우는 더욱 징험할 만한 것이 있다. 예설(禮說) 같은 경우는 또 다만 고증에 편리할 뿐만 아니니, 그 당시 깊이 체인(體認)하여 분류하고 상세히 기록한 것이 곧바로 퇴계에게 직접 배운 것과 다름이 없다.
외물에 대한 사모함이 전혀 없어 산수자연에서 거닐고 생활하며 다만 ‘날씨가 추워진 뒤에 늦게 시듦[歲寒後凋]’으로 기약하였다. 본래 성품이 온화하고 담박하여 마음속에 스스로 즐기는 바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세상에서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 인물을 논하는 자들은 대부분 명성과 지위의 현달함과 은미함으로 우열을 결정하지만 공의 숨겨진 덕과 그윽한 빛 같은 경우는 실로 100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을 점이 있으니, 오히려 초택(草澤)에 매몰된 것 때문에 하찮게 여길 수 있겠는가.
하루는 공의 8세손 양정(養楨)이 그 집안 부형의 편지를 받들고 와서 해좌(海左) 정범조(丁範祖)가 지은 묘갈명을 나에게 보여 주며 행장을 지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드디어 위와 같이 차례하고 아울러 비루한 나의 견해를 뒤에 붙였다.
後松齋金公行狀
退陶老先生之門。一時羣賢。皆執經而宗師之。獨後松齋金公。以童丱未得及門。以遂願學之誠。後謁陶山祠而有詩曰。先生德業日星明。後學今來想典刑。都將未及摳衣恨。拜寓羹墻敬慕誠。蓋平日聞風欽想之餘。其激仰感奮。不啻其自別。公之學問本領。豈不於是而立也耶。公諱士貞字正叔。金氏之先。出於安東上洛。高麗忠烈公方慶。其鼻祖也。歷都評議九鼎至我朝監牧官子瞻。移居義城縣沙村里。子孝溫司直。是生北評事克諧。是生進士號松隱諱光粹。見燕山政亂。隱居不出以終。享俎豆。是生參奉諱溏。是生引儀諱世佑。娶義城金氏郡守漢哲孫萬謙女。以嘉靖壬子生公。自幼有成人儀度。止羣兒爭闘。孝事父母。母嘗有疾甚革。公稽顙北辰。乞以身代。竟瘳。及長博涉經史。尤留意於性理學。與李蒼石申梧峯李石潭諸賢爲道義交。西厓柳文忠公嘗愛之曰異日樹立。必不草草矣。篤友兄弟。與伯氏晩翠公仲氏直長公。竟日同堂。征邁相樂。庚辰丁引儀公憂。壬午母夫人卒。前後皆廬墓終三年。方其葬。山下民居幾百戶。始相持久。旣而感公至誠。皆歸順。又自謂不可使村家烟火逼近塚傍。以慽孝子心。遂遷於稍遠處。壬辰島夷大擧入冦。上西狩。公奮袂倡義。遠近從之者數百人。遂與仲氏從忘憂郭公入火旺城。焚積薪誓曰所不與戮力殲賊。有如此薪。卽又吟焚薪志不灰之句。郭公奇之。公善斥堠。賊未至常先知之。故行師用兵得無敗。嶺左邑賴而保者。公之力與有多焉。及郭公入琵瑟山。公往見之。郭公握手敍火旺同死生義。擊節誦公詩。號公以志不灰義士。公亦不勝悲憤。至夢與賊自當一隊而快捷之。旣覺賦一詩。有虜在目中三捷日之句。晩年屛居林壑。惟以訓誨子弟爲事。嘗就大學而描成一圖。與子浻曰此乃聖學門戶。一篇要領。不外於是。須十分勉力可也。泊於名利。長子淮登第。賀客盈門。略無喜色。反以學未成而擢高第爲憂。嘗以謹夫婦親父子和兄弟序長幼奉祭祀睦族鄰御僮僕交朋友。作家誡八條。書座右以資觀省。又類編溪門禮說。以便後人之考證。日晨起拜家廟。每朔望必省掃先壠。不以年老自懈。遇生朝却子弟獻壽宴曰。父母劬勞之日。悲痛自倍。可忍受乎。宅邊結數椽。扁曰後松。松卽指松隱公所植。而用寓歲寒之意者也。萬曆庚申某月日卒。享年六十九。葬于縣北禾谷里甲坐原。配漢陽趙氏。進士希老女。良敬公涓之後。和順齊莊。能執婦道。公之篤於倫行。亦多內相之力也。三男三女。男長淮文正郞,次瀚,浻並通德郞。女安處善生員,徐璟,李允美。淮一男尙瑜將仕郞。四女朴垣,申坫,權璿,朴綸。瀚二男尙瑋,尙璨。二女南海宇縣監,權大經。浻一男尙瓘。一女權文振。餘不錄。登科第者武都摠履中。文通禮聲文。兵正五應也。公天姿旣逈異於衆。又其所從遊師友。皆一代名賢。故篤倫之行。敵愾之忠。與夫見於日用者。靡不自學問中來。而於其所著大學一圖家誡八條禮說二篇。尤有可徵者存。至如禮說。又不但便於考證。其當日深體認而分類詳記。直與親炙無異。絶無外慕。逍遙偃仰於雲林水石之間。而直以歲寒後凋爲期。是非素性恬澹。有所自樂於中。則其焉能若是。世之尙論者類多以名位顯微爲軒輊。而若公之潛德幽光。實有閱百載而不泯者。尙可以埋沒草澤少之耶。日公之八世孫養楨。奉其門父兄書。以丁海左範祖所撰碣銘示余而求爲狀。遂序次如右。兼附陋見於後云。
[주1] 도산사(陶山祠)를 …… 지었는데 : 《후송재집》 권1 〈알도산묘(謁陶山廟)〉로 수록되어 있다.
[주2] 직접 배우지 : 원문은 ‘구의(摳衣)’인데, 옷의 앞자락을 들어 올려 경의를 나타낸다는 뜻으로, 스승으로 섬김을 이르는 말이다. 《예기(禮記)》 〈곡례 상(曲禮上)〉에 “어른이 계신 방 안으로 들어갈 때에는 옷자락을 공손히 치켜들고 실내 구석을 따라 빠른 걸음으로 가서 자리에 앉은 다음에 반드시 조심성 있게 응대해야 한다.[摳衣趨隅, 必愼唯諾.]”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주3] 갱장(羹墻) : 옛날 요(堯) 임금이 죽은 뒤 순(舜) 임금이 3년 동안 지극히 앙모(仰慕)한 나머지 국그릇에서도 요 임금을 보고 담장에서도 요 임금을 보았다는 고사에서 연유한 단어로, 사후에 간절히 흠모하는 마음을 뜻한다. 《後漢書 李固列傳》
[주4] 상락(上洛) : 상락은 안동의 옛 이름인데, 구 안동 김씨 중에 대대로 상락군(上洛君)에 봉해진 명인(名人)이 많았기 때문에 붙여졌다. 구 안동 김씨는 신라 경순왕의 넷째 아들인 대안군(大安君) 김은열(金殷說)의 둘째 아들인 김숙승(金叔承)을 시조로 삼고, 충렬공 김방경(金方慶)을 중시조로 삼는다.
[주5] 서원에 제향되었다 : 김광수(金光粹)는 의성(義城)의 장대서원(藏待書院)에 제향되어 있다.
[주6] 여러 …… 하였다 : 《후송재집》 권1 〈유사〉에 “여러 아이들의 다툼을 보면 곧 멈추게 하면서 말하기를, ‘어찌 어버이에게 받은 신체를 감히 훼상할 수 있겠느냐.’라고 하였다. 부로들이 듣고 훌륭하게 여겼다.[見群兒爭鬪, 輒止之曰: 豈以身體之受父母者, 敢毁傷乎? 父老聞而奇之.]”라고 하였다.
[주7] 이창석(李蒼石) : 이준(李埈, 1560~1635)으로, 본관은 흥양(興陽), 자는 숙평(叔平), 호는 창석ㆍ유계(酉溪),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유성룡(柳成龍)의 문인이다. 1591년(선조24) 별시 문과에 합격하여 예조 정랑, 단양 군수를 지내다 1603년 경상 좌도 재상경차관(災傷敬差官)이 되었고, 이듬해에 세자 책봉 주청사(世子冊封奏請使) 이정귀(李廷龜)의 서장관이 되어 중국에 갔다. 상주(尙州) 옥성서원(玉成書院)에 봉안되었으며, 문집인 《창석집》이 전한다.
[주8] 신오봉(申梧峯) : 신지제(申之悌, 1562~1624)로, 본관은 아주(鵝州), 자는 순보(順甫), 호는 오봉ㆍ오정(梧亭)이다. 의성(義城)에 거주하였고, 김성일(金誠一)의 문인이다. 임진왜란 시 예안 현감(禮安縣監)으로, 군대를 모집하여 항쟁하였다. 장대서원에 제향되었다.
[주9] 이석담(李石潭) : 이윤우(李潤雨, 1569~1634)로,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무백(茂伯), 호는 석담이다. 칠곡(漆谷)에 거주하였고, 정구(鄭逑)의 문인이다. 사관으로서 정인홍(鄭仁弘)을 직필(直筆)했다가 탄핵을 받아 사직하였다. 이조 참판에 증직되었다.
[주10] 서애(西厓) …… 하였다 : 서애 유성룡의 어머니가 김사정의 할아버지인 김당(金溏)의 누이이니, 유성룡과 김사정의 아버지는 고외종 간이 된다. 《후송재집》 권1 〈유사〉에 유 문충공이 말하기를, “외가에 아무개 형제가 있으니, 훗날 수립할 바가 반드시 엉성하지 않을 것이다.[外氏之門有某兄弟, 異日樹立必不草草矣.]”라고 하였다.
[주11] 만취공(晩翠公) : 김사원(金士元, 1539~1602)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경인(景仁), 호는 만취당(晩翠堂)이다. 의성(義城) 사촌(沙村)에 거주하였고,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후산사(后山祠)에 제향되었다.
[주12] 직장공(直長公) : 김사형(金士亨, 1541~?)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도겸(道謙), 호는 독수헌(獨秀軒)이다. 의성(義城) 사촌(沙村)에 거주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싸웠다.
[주13] 바야흐로 …… 갔다 : 《후송재집》 권1 〈유사〉에 “처음에 바야흐로 장사 지낼 때, 마을 백성으로 산 아래에 널리 거주하여 묘지에 가까운 사람이 몇 백 집이었는데, 처음에는 서로 오랫동안 의견 충돌이 있었다. 공은 당시 현의 관아에 한마디 할 길이 있었으나 또한 힘과 권세로 압박하고자 하지 않고 다만 정성스러운 뜻과 간절한 슬픔을 보이니 백성들이 모두 감복하여 절로 소송이 없게 되었다. 심지어 ‘이 사람은 인자이고 효자이니, 차마 촌집의 연기가 여막 곁의 무덤에 너무 가까이 가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고 드디어 조금 먼 곳으로 집을 옮겨 갔다. 사람을 감동시킴이 대부분 이와 같았다.[當初方葬也, 村民之盤居於山下近地者幾百戶, 相持久. 公時有縣衙一言之路, 而亦不欲以力勢壓之, 只示誠意懇惻, 民皆歎服, 自底無訟. 甚至於嘖嘖相謂曰: 此仁人孝子也, 忍使村戶烟火逼近於其廬側之墓乎? 遂遷於稍遠之地. 其感動人多類此.]”라고 하였다.
[주14] 땔나무를 …… 않으리[焚薪志不灰] : 《후송재집》 권1 〈임진년에 화왕산성으로 망우당 곽공 재우를 따라가 땔나무를 쌓아 놓고 무리들에게 맹세한 뒤 인하여 절구 한 수를 읊다.[壬辰從忘憂堂郭公再祐, 于火旺城, 積薪誓衆因吟一絶.]〉라는 시인데, 두 구는 산실되고 “피를 머금어 맹세하니 마음은 칼날과 같고, 땔나무를 불살라도 뜻은 재가 되지 않으리.[歃血心如釰, 焚薪志不灰.]”라는 두 구절만 남아 있다.
[주15] 왜구를 …… 날[虜在目中三捷日] : 이 구절은 《후송재집》 권1 〈화왕산에서 돌아오는 길에 달성 관사에서 숙박하였는데, 꿈에 곽공과 함께 적진을 격파하였다. 이미 꿈에서 깨자 인하여 시를 지어 기록하다.[火旺歸路宿達城館, 夢與郭公破賊陣. 旣覺因作詩以記之.]〉의 경련(頸聯)으로 “왜구를 눈앞에서 세 번 이긴 날, 명성은 하늘 위 오운의 아침에 걸렸네.[虜在目中三捷日, 名懸天上五雲朝.]”라고 하였다.
[주16] 대학에 …… 옳다 : 그림은 〈대학도(大學圖)〉이며, 《후송재집》 권1 〈기아형(寄兒浻)〉의 뒤에 첨부되어 있다.
[주17] 가계(家誡) : 《후송재집》 권1 〈가계 병서(家誡 幷序)〉에 따르면, 증조부 김광수가 〈경심십잠(警心十箴)〉을 지어 치가(治家)의 도가 완비되었으나, 세월이 흘러 가르침이 점점 무너지게 되어 선조의 유의(遺意)를 계승하고 옛사람의 가언(嘉言)과 선행(善行)을 모아서 편찬한 것으로 되어 있다.
[주18] 퇴계(退溪)의 …… 편찬하여 : 《계문예설(溪門禮說)》로, 《후송재집》 권1 〈계문예설범례 병후지(溪門禮說凡例 幷後識)〉에 따르면, 퇴계 선생이 문인(門人) 지구(知舊)들과 왕복한 예설로, 스스로 편람(便覽)을 위한 것이라 하였다.
[주19] 세한(歲寒)의 뜻 : 난세(亂世)가 되어서야 군자의 굳은 지조를 알 수 있음을 비유한 말이다. 《논어》 〈자한(子罕)〉에 “날씨가 추워진 다음에야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늦게 시든다는 것을 안다.[歲寒然後, 知松栢之後凋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20] 연(涓) : 조연(趙涓, 1374~1429)으로, 본관은 한양(漢陽), 초명은 경(卿), 자는 여정(汝靜), 시호는 양경(良敬)이다. 조선이 건국되자 천우위 대장군(千牛衛大將軍)으로 왕을 호위하였고, 1400년(정종2) 제2차 왕자의 난에 이방원(李芳遠)을 도와서 좌명 공신(佐命功臣) 4등이 되고 한평군(漢平君)에 봉해졌다.[주-D021] 이중(履中) : 김이중(金履中, 1657~1731)으로, 자는 자집(子執), 호는 북오(北塢)이다. 김사정의 현손이며, 의성에 거주하였다. 1693년 무과에 급제하였다. 선전 오위장(宣傳五衛將)에 이르렀고 이인좌(李麟佐)의 난에 의장(義將)으로 추대되어 군공을 세운 바 있다.
[주22] 성(聲) : 김성(金聲, 1682~1760)으로, 초명(初名)은 성응(聲應), 자는 오원(嗚遠), 호는 성고(省皐)이다. 김사정의 5세손이며, 의성에 거주하였다. 1723년(경종3) 문과에 급제하였다. 통례원 좌통례(通禮院左通禮)를 지냈다.
[주23] 오응(五應) : 김오응(金五應, 1699~1749)으로, 자는 송서(宋瑞), 호는 구은(龜隱)이다. 김사정의 5세손이며, 의성 사촌(沙村)에 거주하였다. 1723년(경종3) 문과에 급제하였다. 병조 정랑, 함평 현감(咸平縣監) 등을 역임하였다. 이후 낙향하여 학문 연구와 후진 교육에 전념하였다.
[주24] 날씨가 …… 시듦[歲寒後凋] : 어려움에 처해서도 절조를 변치 않는 것을 말한다. 《논어》 〈자한(子罕)〉에 이르기를 “날이 추워진 다음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든다는 것을 안다.[歲寒然後, 知松栢之後凋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25] 정범조(丁範祖)가 지은 묘갈명 : 정범조(1723~1801)의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법세(法世), 호는 해좌(海左),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정조 연간에 문장이 바르다고 인정받아 문한을 관장하였다. 저서에 《해좌집(海左集)》이 있는데, 권29에 〈후송재 김공 묘갈명(後松齋金公墓碣銘)〉이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