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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행(學行)으로 천거하는 상소
조효동趙孝仝
신이 외람되이 노쇠하고 비천한 자질로 지나친 은총을 받아 발탁되어, 사예(司藝), 사간(司諫)을 거쳐 한 시(寺)의 장관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성상의 은혜에 감격하였으나 보답할 길이 없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전하께서는 지난번 궐내에 벼락이 떨어지는 변고가 있자 두려운 마음으로 반성하시며 교서(敎書)를 내려 구언(求言)하시어 정치의 실책을 듣고자 하셨습니다.
신이 삼가 생각건대, 현인(賢人)을 초야에 있게 하는 것은 시정(時政)의 궐실이 이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전(傳)에 이르기를 “충신(忠臣)을 찾는 것은 반드시 효자(孝子)의 가문에서 한다.” 하였습니다. 신의 고향인 함양(咸陽)에 정여창(鄭汝昌)이라고 하는 진사(進士)가 한 사람 있는데, 고(故) 함길도 병마우후(咸吉道兵馬虞候) 정육을(鄭六乙)의 아들입니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지극하였고 뜻을 독실히 하여 배움에 힘썼습니다. 열여덟 살에 아비 정육을이 역적 이시애(李施愛)에게 해를 당하자 정여창은 울부짖으며 애통해하여 거의 목숨이 위태롭기까지 하였습니다. 반란이 평정되자 쌓인 시체 더미 속에서 아비의 유체(遺體)를 수습하여 고향에 돌아와 장사 지냈는데, 집상(執喪)하는 동안 더욱 슬퍼하였습니다.
삼년상을 마친 뒤, 조정에서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친 사람의 아들’이라 하여 관례에 따라 군직(軍職)을 주었는데, 정여창은 더욱 마음을 가누지 못하고 말하기를 “아비가 패하여 목숨을 잃었는데 아들이 그 영광을 받는 것은, 나라의 은혜가 비록 중대하기는 하나 마음에 실로 차마 못 할 일이다.” 하고 끝내 사양하였으며, 종신토록 슬퍼하고 사모하였고 벼슬길에 나가기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어미 최씨(崔氏)를 봉양함에 있어서는 몸소 맛있는 음식을 마련해 올리기를 조금도 게을리한 적이 없었습니다. 계묘년(1483, 성종14)에 그 어미를 위해서 진사 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하였고, 어미가 또 대과(大科)에 급제하는 영화를 보고자 하므로 드디어 태학(太學)에 들어갔는데, 동료들이 모두 존경하였습니다.
병오년(1486, 성종17) 여름에 어미를 문안하려고 남쪽으로 돌아왔는데, 집에 이르고 보니 집안에 여역(癘疫)이 바야흐로 치성하여 이웃끼리도 서로 왕래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다들 정여창에게 밖에 머물 것을 권하였으나, 정여창은 듣지 아니하고 곧바로 들어가 어미를 뵈었습니다. 얼마 안 되어 어미의 병이 매우 심해져 음식을 먹지 못하자, 정여창도 음식을 먹지 않고 곁에서 보살피며 밤낮으로 띠를 풀지 않고 지냈습니다. 그렇게 지낸 지 10여 일 만에 어미가 세상을 떠나자, 통곡을 하다 피를 토하였고 거의 목숨을 잃을 지경에까지 이르면서도 한 숟갈의 미음도 입에 넣지 않았습니다. 영인군(寧仁君)에게 시집간 누이가 부음(訃音)을 듣고 이르러 조문하고 곡을 한 다음에 위로하면서 죽을 먹기를 권하니, 겨우 한두 숟갈을 삼켰는데 또한 목으로 넘기지 못했습니다.
대개 인가(人家)에 여역이 돌면 모든 일을 정지하고 지나칠 정도로 조심하는데, 조금이라도 소홀히 하면 온 집안이 재앙을 당합니다. 그런데도 정여창은 뜻에 따라 곧바로 행하여 속기(俗忌)를 다시 돌아보지 아니하고 아침저녁으로 곡위(哭位)에 나아갔고, 염습(斂襲)과 빈전(殯奠)을 한결같이 예문(禮文)대로 하였습니다. 그러자 고을 사람들이 모두들, 초상을 치르면서 지나치게 슬퍼하였으니 여역이 빌미가 되어 그도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염려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정여창은 조금도 마음을 바꾸지 않고 달을 넘긴 뒤에 장사를 지냈으며, 집안도 평온하게 회복되었습니다. 비록 초상을 치르느라 매우 수척해지기는 했으나 몸에는 아무 일이 없자, 고을 사람들이 비로소 여역이 효자를 해칠 수 없었음을 기뻐하였습니다.
날을 정해 장사를 지내려 할 즈음에 비가 열흘을 잇따라 내려 냇물이 불어 넘쳐서 사람들이 장사를 제대로 못 지내게 될까 봐 걱정하였는데, 하늘이 문득 개니 고을 사람들이 더욱 기이하게 여겼습니다.
당시에 감사(監司)가 그 행실을 듣고 군(郡)에서 널을 마련해 주도록 하니, 여창이 사양하며 받지 아니하고, “백성들을 고생시켜서 널을 마련하면 원망이 필시 어머니께로 돌아갈 것입니다.”라고 하고는, 집안의 재물을 내어 널을 사서 사용하였습니다. 당시 군수 조위(曺偉)가 그 효성에 감동하여 몸소 와서 조문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무덤 만드는 일을 도와주려 하였으나 그 도움도 받지 아니하고 아우 정여유(鄭汝裕), 정여관(鄭汝寬)과 함께 집안의 노복들을 데리고 일을 마쳤으며, 아비의 묘를 옮겨 함께 모시고, 3년 동안 상복을 입고 지내면서 묘역을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온종일 반듯이 앉아 질대(絰帶)를 띤 채 지냈으며, 줄곧 궤연(几筵)에 엎드려 있으면서 부축을 받아 일을 처리했습니다. 그렇게 지내면서 아침저녁으로 곡(哭)을 하고 전(奠)을 올리니, 보는 이들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매양 삭망(朔望)이 되면 부인이 먼저 전을 올리고 형제가 뒤에 전을 올려, 3년 동안 부인의 얼굴을 보지 않았습니다.
어미의 집안이 모은 재산이 넉넉하여 함양의 사방 이웃 백성이 모두들 꾸어다 썼는데, 정여창이 그 아우에게 말하기를 “모친께서 꾸어 주고 받아들이고 할 때에 필시 백성들에게 원망 들을 일이 있었을 것이다.” 하고는, 빚을 주고받은 문기(文記)를 불 속에다 던져 버리니, 고을 사람들이 참 하기 어려운 일을 했다고 하였습니다.
대상(大祥)을 마치고는 그대로 묘소 앞 어느 절에 들어가 상막(喪幕)을 새로 지을 생각을 하다가, 한 달 남짓 지나서 아우와 함께 두류산(頭流山)으로 들어갔는데, 안절부절못하며 마치 그 어미를 찾고자 해도 찾을 수가 없는 것처럼 하여, 가슴을 치고 곡읍(哭泣)하며 매우 애통해하는 것이 처음 돌아가셨을 때와 똑같았습니다. 고을의 노인들이 측은하게 여겨 모두 가서 주육(酒肉)을 권하였으나 단지 눈물만 흘릴 뿐이었습니다. 조위가 직접 가서 선왕(先王)이 만든 중도(中道)의 제도는 감히 지나쳐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권면한 뒤에야 사양하지 못하였습니다.
어미가 살아 있을 때에, 산업(産業)을 다스리지 아니하는 정여창을 늘 딱하게 여겨, 별도로 창고 하나에 면포(綿布)와 곡식을 저축하여 자신이 죽은 뒤에 정여창이 쓸 수 있도록 준비해 두었는데, 어미가 죽은 뒤에 집안사람들이 그것을 가리키며 정여창에게 고하고 두 아우도 형에게 사양하니, 정여창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에 어찌 내 몫의 사사로운 재화가 있을 수 있겠는가. 내 죄를 더 무겁게 하지 말라.” 하고, 드디어 상례(喪禮) 비용으로 남김없이 나누어 쓰게 하였습니다.
평소에 담소를 하거나 문장을 논할 때에 육아시(蓼莪詩)에 말이 미치면 줄줄 눈물을 흘리며 슬픔을 그치지 못하였습니다. 정씨네는 본래 노비가 많아서 한 집안 안에 100명이나 되었는데도 서로 잘 지내기를 마치 한 사람처럼 하여 조금도 말이 없었고, 이웃의 젊은이들로서 감화되어 선량해진 자도 많습니다.
정여창은 자(子)와 사(史)에 널리 통하고 예경(禮經)에 정밀하며 성리(性理)의 학문에 더욱 조예가 깊습니다. 독서를 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행하기를 힘쓰고 실제를 실천하는 것을 위주로 하였고, 과거 시험을 위한 공부에 힘쓰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나이가 거의 마흔이 되도록 홀로 성세(聖世)의 일민(逸民)으로 있었습니다.
그의 제행(制行)의 고상함과 입심(立心)의 원대함은 비록 장공예(張公藝)와 진긍(陳兢)의 효우(孝友)에 견줄지라도 크게 손색이 없습니다. 세상에는 필부로서 혹 그 어버이를 수화(水火)나 호랑(虎狼)의 재난에서 구해 내거나 손가락을 잘라서 어버이의 병환을 낫게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일시 창졸간에 나온 일인데도 줄줄이 국가의 포상을 받습니다. 정여창과 같은 사람은 세상에 흔치 않으니 단지 한 고을의 선사(善士)일 뿐만이 아닙니다. 정여창의 행실을 신이 훤히 잘 알기 때문에 중언부언 말씀드렸습니다. 쓸 만한지 시험이라도 한번 해 보소서.
상이 말미에 쓰기를 “정여창의 행실을 보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과연 이 말과 같다면 비록 고인(古人)에 견줄지라도 무슨 손색이 있겠는가. 속히 발탁해 등용하여, 국가가 착한 사람을 정표하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 이어 전교하기를 “경상 감사가 이전에 서장(書狀)으로 회계(回啓)할 때에 단지 효녀(孝女) 금지(今之) 등 네 사람만 적어 아뢰었고, 정여창은 효행이 매우 높은데도 빠뜨리고 아뢰지 아니했다. 헌부(憲府)로 하여금 감사를 추고(推考)하여 아뢰게 하라.” 하였다.
[주1] 학행(學行)으로 천거하는 상소 : 1490년(성종21) 7월 1일 미시(未時)에 진선문(進善門) 밖에서 사람이 벼락을 맞은 일이 일어나자, 성종은 궐내(闕內)에서 사람이 벼락을 맞은 것은 하늘이 임금을 견책하는 것이라고 하여, 중외(中外)의 대소 관원과 한산 인원(閑散人員)들에게 시폐(時弊)를 진술하라는 구언 전지(求言傳旨)를 내렸다. 이에 따라 7월 26일에 당시 사섬시 정(司贍寺正)이었던 조효동(趙孝仝)이 상언(上言)한 것이다. 《成宗實錄》
[주2] 전(傳) : 《후한서(後漢書)》 권26 〈위표열전(韋彪列傳)〉을 이른다.
[주3] 육아시(蓼莪詩) : 《시경(詩經)》 〈소아(小雅)〉에 있는 시로, 낳아 길러 주신 부모님의 은혜를 읊은 내용이다.
[주4] 장공예(張公藝) : 중국 당(唐)나라 때 사람이다. 그의 집안은 9세대가 함께 살았고 화목한 가문의 으뜸으로 일컬어졌다. 당 고종(唐高宗)이 태산(泰山)에 제사 지내러 가는 길에 그의 집에 들러 집안을 화목하게 하는 방도를 물으니, 장공예는 종이에 참을 인(忍) 자 100여 자를 써서 올렸다고 한다. 《小學 善行》 《舊唐書 卷188 孝友列傳 張公藝》
[주5] 진긍(陳兢) : 중국 송(宋)나라 때 13세대 동거로 일컬어졌던 진방(陳昉)의 조카이다. 진방의 집안은 남녀노소 700여 명이 화목하게 함께 살면서 매 끼니 때마다 큰 마루에 모여 앉아서 음식을 먹었고, 집에서 기르던 개 100여 마리도 모두 한 우리에서 먹이를 먹었다. 사람들의 화목함에 영향을 받아서 개들도 한 마리라도 오지 않으면 다 올 때까지 먹이를 먹지 않았다고 한다. 《宋史 卷456 孝義列傳 陳兢》
[주6] 경상 감사가 …… 아뢰었고 : 효자와 열부를 널리 찾아서 치계하라는 왕명을 받고 1490년(성종21) 6월 20일경에 경상 감사가 금지(今之), 박기(朴琦), 하영징(河永澄), 김윤손(金允孫) 등 네 사람의 효행을 아뢰었다. 구체적인 사실은 실록에 나온다. 《成宗實錄》
薦學行疏
[趙孝仝]
臣猥以衰朽殘質。過蒙拔擢。歷司藝司諫。以至長于一寺。感激聖恩。圖報末由。伏念殿下。頃緣闕內震人之變。警懼修省。下敎求言。欲聞厥失。臣竊謂遺賢在野。則時政之闕。無踰於此。傳曰。求忠臣必於孝子之門。臣之同鄕咸陽。 有一進士。曰鄭汝昌。故咸吉道兵馬虞侯六乙之子也。幼有至性。篤志力學。年十八時。父六乙遇害於逆賊李施愛。汝昌號慟幾絶。亂平。求遺體於積屍之中。還葬於鄕。執喪愈戚。旣闋。朝廷以爲國亡身之子。例署軍職。汝昌尤不能爲懷。乃曰。父受其敗。而子受其榮。國家之恩雖重。而心實不忍。遂辭之。哀慕終身。不樂仕進。養其母崔氏。躬供甘旨。未嘗少懈。癸卯。爲其母擧進士。有成。母又欲見登科之榮。遂遊太學。儕輩咸尊敬之。丙午夏。南歸省母。旣到家則家內疫癘方 熾。隣里不通。人皆勸汝昌次於外。汝昌不聽。徑入見其母。未幾。母得疾甚劇不食。亦不食。扶持左右。晝夜不解帶。居十餘日而母沒。哭泣嘔血。幾至滅性。勺飮不入口。其姊適寧仁君。聞訃而至。相弔擗踊之餘。常爲慰解。勸進𩜾粥。只呑一二匙。亦不得下咽焉。凡人家有瘟疫時氣。百事停廢。以爲過愼。少不然則闔門得禍。汝昌徑情而行。不復顧忌。朝夕爲位。斂襲殯奠。一依禮文。鄕閭皆懼其執喪太戚。而癘疫爲祟。疑其身之不免。曾不少撓。踰月乃葬。家亦平復。雖苫塊枯 悴之甚。而身且無事。鄕閭始喜癘疫之不能害孝子也。卜日將葬。積雨連旬。溪壑漲溢。人懼不克。天忽開霽。鄕人尤異之。時監司聞其行。令郡辦給棺板。辭而不受曰。煩民取辦。怨必歸於先母。乃出家貨。貿易而用之。時郡守曺偉感其孝。親臨弔祭。人欲營壙。亦不受其助。與其弟汝裕,汝寬。率家隷而襄事。移父墳於同兆。三年苴杖。不出塋域。終日危坐。不脫絰帶。長伏几筵。扶而執事。朝夕哭奠。見者出涕。每遇朔望。婦人先奠。兄弟後奠。三年不見婦人之面。母家畜積有餘。 咸陽四隣之民。皆出債焉。汝昌謂其弟曰。母氏斂散之際。怨必及民。於是斂散文記。投諸烈火之中。鄕人以爲難也。旣大祥。仍投墓前一寺。有更築室之志。月餘。與弟入頭流山。皇皇乎如求見其母不得。擗踊哭泣。哀痛迫切。一如初終。鄕老哀之。咸就勸酒肉。但涕泣耳。曺偉親往。勉之以先王中制。不敢過之意。然後不辭焉。母在時。常悶汝昌不治生產。別儲綿布粟祖於一庫。以爲身後汝昌之資。母沒。家人指以告汝昌。二弟亦讓於兄。汝昌歎曰。母在時。予豈有私財耶。無 重吾罪。遂分供喪費無餘焉。平日。言笑或談文。有及蓼莪則汪然出涕。以悲悒不能息。鄭氏素多奴婢。一門內凡百口。相好如一人。略無辭。隣里子弟之化而善良者亦多。汝昌博通子史。精於禮經。而尤深於性理之學。讀書。必以力行踐實爲主。而不規規爲擧業。年幾四十。獨爲聖世之逸民。其制行之高。立心之遠。雖公藝,陳兢之孝友。亦不多讓矣。世有匹夫或能救其親於水火虎狼之患。以至斷指瘳疾。出於一時之倉卒。而比比蒙國家之旌賞者焉。如汝昌輩。世不多 得。非特一鄕之善士而已。汝昌之行。臣灼知。故言之重辭之複。試可乃已。御書其尾曰。觀汝昌之行。不覺出涕。果如此言。雖古人何讓。須速擢用。以示國家旌善之意。仍傳曰。慶尙監司前日書狀回啓時。但錄孝女今之等四人。而汝昌則孝行甚高。而遺漏不聞。令憲府推考以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