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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선대부(嘉善大夫) 행 함경도관찰사 겸 순찰사 병마절도사 함흥부윤(行咸鏡道觀察使兼巡察使兵馬節度使咸興府尹) 망우당(忘憂堂) 곽공(郭公) 시장
공의 휘는 재우(再祐)이고 자는 계유(季綏)이며, 일찍이 망우당이라고 자호(自號)하였고, 본관은 현풍(玄風)이다. 그 선대에 휘 자의(子儀)라는 분이 있는데 고려에서 벼슬하여 금오위 교위(金吾衛校尉)를 지냈다. 이때부터 대대로 위인이 났다. 증조의 휘는 위(瑋)로 예안 현감(禮安縣監)을 지냈다. 조의 휘는 지번(之藩)으로 성균관 사성을 지냈으며, 승정원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고의 휘는 월(越)로 해서 관찰사(海西觀察使)를 지냈으며, 예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진주 강씨(晉州姜氏)에게 장가들어 가정(嘉靖) 임자년(1552, 명종7) 8월 무인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뜻이 크고 굽히지 않는 기개가 있었으며, 자라서는 효우가 지극하고 지조가 확고하였다. 항상 느긋하여 겸양하는 군자의 기풍이 있었으나, 이해(利害)에 처하거나 사변(事變)을 보게 되어서는 확고하여 뺏을 수 없는 바가 있었다. 일찍이 판서공(判書公)이 상국(上國)에 사신으로 갈 때 따라갔었는데, 관상을 보는 자가 그 용모를 기이하게 여겨 이르기를, “이 사람은 나중에 반드시 귀하게 되어 이름이 천하에 가득하게 될 것이다.” 하였다고 한다. 유생(儒生)일 때는 독서하기를 즐겼는데, 무예도 겸하여 통하였다. 여러 번 초시(初試)에 합격하였으나 정대(廷對)하는 말 중에 시휘(時諱)에 저촉되는 말이 있어 합격이 취소되었다.
만력(萬曆) 병술년(1586, 선조19)에 판서공의 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여묘하면서 상을 마칠 때까지 사실(私室)에 들어가지 않았다. 상을 마치고 마침내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기강(岐江) 가에 정자를 짓고 낚시로 자오(自娛)하면서 평생을 마칠 생각을 하였다. 그러나 임진년(1592) 여름에 일본의 군대가 쳐들어오자 공은 개연히 소매를 걷고 일어나 가산(家産)을 기울여 장사(壯士)를 모집하였다. 신번창(新反倉)의 곡식을 확보하고 초계(草溪)의 병기를 취하여 도망간 장수와 흩어진 병졸들을 불러 모아 함께 쓰면서 호령하고 지휘하니, 충의(忠義)가 사람들을 감동시켜 원근에서 듣고 호응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당시에 적장(賊將) 안국사(安國司)가 장차 호남으로 향할 것이라고 소문을 퍼뜨리고는 곧바로 정진(鼎津)으로 내달렸는데, 공은 요해처(要害處)에 성책(城柵)을 설치한 뒤, 의병(疑兵)을 세우고 강노(强弩)를 숨겨 두고 그들을 기다렸다. 적이 그 위성(威聲)을 두려워하여 감히 건너지 못하고 마침내 육로(陸路)를 따라 낙동강(洛東江) 동쪽의 여러 고을을 노략질하였다. 공이 이에 스스로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고 부르고 날마다 강가의 적을 공격하여 많은 승리를 거두었다.
당시에 군사들이 아직 군사(軍事)에 익숙하지 않아 전투에 나가는 것을 두려워하였는데, 공이 매번 내달려 앞장을 섰다. 적의 포환(砲丸)이 일제히 발사되었으나 끝내 해를 입힐 수 없었다. 연일 접전을 벌여 적을 죽인 것이 이루 셀 수 없을 정도였으나 또한 수급(首級)을 잘라 공을 자랑하지는 않았다. 사졸(士卒)들을 집안 식구처럼 보살폈으나, 사형(死刑)에 해당하는 군율(軍律)을 범한 경우에는 법을 적용함에 조금도 용서하지 않았다. 상벌(賞罰)이 엄격하고 분명하였으며 성신(誠信)이 평소에 드러났으므로 사력(死力)을 다하는 사람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처음에 순찰사(巡察使) 김수(金睟)가 적의 세력이 성한 것을 보고 감히 성(城)을 지키고 적을 토벌할 생각을 내지 못하고 근왕(勤王)한다는 핑계를 대었는데, 행렬이 용인(龍仁)에 이르렀을 때 적을 만나 크게 패하고 돌아왔다. 공이 군중(軍衆)들에게 고하기를, “김수가 한 도(道)의 방백(方伯)이면서 죽음으로써 영토를 지키지 못하고 경계를 벗어나 삶을 도모하려고 하다가 군대를 잃고 도망쳐 돌아왔다. 그 죄는 참수(斬首)해야만 할 것이다.” 하였다. 이어서 소(疏)를 올려 행재소(行在所)에 아뢰고 격문으로 그 죄를 따지니, 김수가 크게 노하여 반역죄(反逆罪)로 논계(論啓)하고 그 막하(幕下)의 김경눌(金景訥) 등이 여러 고을에 글을 보내어 공을 적으로 지목하였다. 공이 바야흐로 내달려 진주(晉州)를 구원하고 있다가 그 즉시 답하기를, “의병(義兵)과 적병(賊兵)의 구분은 천지가 알 것이며 시비의 판결은 공론이 있다.” 하였다. 당시에 김 문충공 성일(金文忠公誠一)이 초유사(招諭使)로서 명을 받고 거창(居昌)에 도착하였는데, 처음에는 격문을 보고 놀라고 의심하여 전(前) 학유(學諭) 박사제(朴思齊)에게 묻기를, “곽재우는 어떤 사람인가? 순찰사는 임금의 사람인데 어찌 감히 이와 같이 하는가?” 하니, 사제가 답하기를, “재우는 고(故) 감사 곽월(郭越)의 아들입니다. 사람됨이 강개(慷慨)하여 대절(大節)이 있으니, 매번 역사서를 읽다가 충신(忠臣), 의사(義士)가 절의(節義)를 다한 부분에 이르면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늘 말하기를, ‘우리 집안은 대대로 나라의 은혜를 입었으니, 만약 사변을 당하게 되면 몸을 바쳐 보답하여야 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 평소의 뜻이 이와 같습니다. 지금 비록 이 일의 사정을 잘 알지는 못하겠습니다만, 순찰사가 적을 만나 경계를 벗어났다가 패배하여 허겁지겁 도망쳐 돌아온 것은 군정(軍情)으로 볼 때 체모(體貌)를 잃는 것이라 더 이상 일을 도모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런 일이 있었던 것이니, 어찌 다른 의도가 있었겠습니까.” 하였다. 문충공이 크게 깨달아 즉시 공에게 글을 보내어 반복해서 밝게 타일렀다. 그리고 행재소로 치계(馳啓)하여 그 우직(愚直)한 정상(情狀)이 충의(忠義)에 격분되어 일어난 것임을 밝히는 등, 힘을 다해 신구(伸救)하니, 상이 특별히 따뜻한 유시(諭示)를 내려 적을 토벌할 것을 권면하였다.
처음에는 공에게 유곡도 찰방(幽谷道察訪)을 제수하였는데, 곧 형조 좌랑으로 옮겨 임명하였다. 공이 이에 감읍(感泣)하여 절하고 받으면서 죽음으로써 보답할 것을 맹세하였다. 장졸(將卒)들을 격려하여 여러 차례의 전투에서 모두 승리를 거두어 낙동강 우변(右邊) 지역을 지킴으로써 영남을 회복하는 기반을 만들었다. 당시에 낙동강 동쪽을 점거하고 있던 적들이 사방으로 다니면서 노략질을 하고 멋대로 살육(殺戮)을 행하였므로, 백성들이 목숨을 의지할 데가 없어 도망치고 숨어 버리니 장차 사람의 씨가 남아나지 못할 듯하였다. 공이 의령(宜寧)으로부터 군대를 이끌고 와서 현풍(玄風)의 경계에 머무르면서 돌기(突騎)로 하여금 곧바로 읍내(邑內)까지 들어가 유인을 하니, 적들이 두렵고 위축되어 감히 나오지 못하였다. 공은 의병(疑兵)을 더 만들고 밤에는 사람마다 두 개의 횃불을 지니게 하였는데, 횃불마다 모두 세 개씩 불을 붙일 수 있었다. 수십 리에 걸쳐 길게 늘어서서 고각(鼓角)을 일제히 울리면서 일시에 횃불을 들어 마치 장차 엄습할 듯이 하였다가, 갑자기 또 불을 끄고 고각을 그쳐 적막하게 사람이 없는 듯이 하였다. 조금 있다가 또다시 전처럼 하니, 적이 크게 놀라고 의심하여 주둔지에서 철수하여 밤에 도망을 하였으며 다른 고을에 주둔해 있던 적들도 그 모습만 보아도 또한 궤멸되어 버렸다.
7월에 상이 영남의 사민(士民)들에게 유시하는 글에서 이르기를, “곽재우가 계략을 세운 것이 범상하지 않아 적을 죽인 것이 특히 많았는데도 스스로 공을 내세우지 않는다고 하니, 내가 더욱이 기특하게 여기노라. 내가 그 이름을 늦게 들은 것이 한스럽도다.” 하였다. 겨울에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승품(陞品)하여 조방장(助防將)이 되었다. 공은 날래고 건장한 자 수십 기를 뽑아 자신을 따르게 하였는데, 공은 붉은 옷에 흰 말을 탔고 따르는 자들도 이와 같이 하였다. 매번 적과 맞닥뜨리게 되면 좌우에서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면서 도발하여 유인하였다. 적은 간혹 진지를 비워 두고 쫓아와 산골짜기에 이르면 공의 소재를 잃어버리게 되는데, 적들은 그제야 놀라고 당혹해하다가 홀연히 앞쪽 절벽에서 붉은 옷에 흰 말을 탄 자가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된다. 적은 크게 놀라 추격하지만 또 놓쳐 버리고, 그저 고각 소리만이 온 산에 가득하고 깃발들이 언덕에 줄지어 늘어서 있게 되므로 적은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마침내 공이 군사들에게 명하여 수목이 우거진 곳에서 쇠뇌를 놀려 번갈아 쏘게 하니, 살상한 바가 매우 많았다. 이에 적이 곧 패주해 버렸다. 그 기략을 내어 승리를 이루어 내고, 소수로써 다수를 물리친 것이 대체로 이러하였다.
당시에 완평(完平) 이 상공 원익(李相公元翼)이 체찰사(體察使)로서 성주(星州)에 부(府)를 차렸는데, 공으로 하여금 삼가(三嘉), 현풍(玄風) 두 고을의 산성(山城)을 쌓게 하면서 장차 양 총병(楊摠兵)을 영남으로 이주(移駐)하게 하려고 하였다. 공이 체부(體府)에 고하기를, “오늘날의 계책으로는 마땅히 산성을 쌓아 병기를 수리하고 군량을 비축해 두어야 합니다. 먼저 이길 수 없을 듯한 형세를 보이면서 때를 기다렸다가 움직여야 할 것이니, 이것이 바로 허허실실(虛虛實實)이라는 것입니다. 호랑이가 산에 있을 때는 그 위세가 자중하고 용이 연못에 있을 때는 그 신묘함이 예측할 수 없으나 만약 호랑이가 들판에 나오거나 용이 육지에 나오면 아이들도 쫓을 수 있고 수달조차도 모욕을 가할 수 있습니다. 명나라 군사가 호남에 있을 때는 호랑이가 산에 있고 용이 연못에 있는 것 같은 형세였습니다. 그러나 만약 영남으로 오게 된다면 이는 호랑이가 들판에 있고 용이 육지로 나온 격이니, 불가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체상이 사례하기를, “지금 답장을 보니, 나도 모르게 무릎이 굽혀진다.” 하였다.
계사년(1593, 선조26) 여름에 성주 목사(星州牧使)에 제수되었으나 갑오년(1594) 가을에 버리고 돌아왔다. 을미년(1595) 봄에 진주 목사(晉州牧使)에 임명되었으나 가을에 또 버리고 돌아왔다. 이르는 곳마다 정치가 물처럼 깨끗하니 신군(神君)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정유년(1597) 가을에 적이 다시 대거 쳐들어와 노략질을 하니, 공이 방어사(防禦使)로서 창녕(昌寧)의 화왕산성(火旺山城)으로 옮겨 지키니, 여정(輿情)이 서로 기뻐하였다. 공이 막 성에 들어갔을 때 적장 청정유기(淸正游騎)가 이미 성 아래까지 도달하였다. 공이 제군(諸軍)을 지휘하여 호령하기를 분명하고 엄숙하게 하니, 군대의 위세가 더욱 성해지고 병사들의 사기가 더욱 올라갔다. 이에 관사(館舍)에 섶을 쌓아 반드시 죽어 살 뜻이 없음을 보이니, 일군(一軍)이 모두 감격하여 죽음을 바칠 것을 생각하였다. 적이 이미 성에 가까이 왔는데도 공은 조용히 담소를 하였다. 다만 각자 지키는 바를 굳게 하도록 하면서 이르기를, “적이 스스로 병법(兵法)을 안다면 어찌 가벼이 침범하려 하겠느냐.” 하였다. 하루 밤낮이 지나자 적이 과연 군대를 거두어 싸우지 않고 강을 건너 서쪽으로 갔다. 황석(黃石)을 도륙하고 남원(南原)을 함락시키는 등 적의 예봉(銳鋒)이 가는 곳이면 열진(列鎭)이 모두 궤멸되었다. 체상(體相)이 공에게 철군(撤軍)할 것을 명하니, 공이 체부에 글을 보내 이르기를, “제(齊)나라의 성 70개 중에 즉묵(卽墨)만은 홀로 온전하였으며, 고립된 안시성(安市城)이 능히 당(唐)나라 군대에 대항하였습니다. 열진이 비록 궤멸되었다고는 하나 아직 함락되지 않은 나머지 성을 유독 지키지 못할 리가 있겠습니까.” 하면서 거절하여 따르지 않았다. 그러나 체상이 성이 위태롭고 군사가 적다는 이유로 어렵게 여기고, 공 또한 상을 당해 - 당시에 공은 계모의 상을 당하였다. - 가 버리니, 군민(軍民)들이 모두 안타까워하고 실망하였다.
공은 마침내 관동(關東)의 울진현(蔚珍縣)으로 피난하여 최질(衰絰)을 하고 여묘살이하였는데, 거상에 정성을 다하였으며 난리로 떠도는 중이라고 하여 소홀히 하지 않았다. 여러 번 기복(起復)의 명이 있었으나 끝내 응하지 않았다. 무술년(1598)에 일본 군대가 철수하여 돌아갔다. 기해년(1599, 선조32) 겨울에 영남 동도 병마사(嶺南東道兵馬使)가 되었다. 경자년(1600)에 도산(島山)의 성을 수리할 것을 두 번이나 계청(啓請)하였으나 조정에서 허락하지 않았다. 공은 벼슬자리에 있는 자가 그 직분을 다하지 못하면 떠나야 한다고 하면서 소(疏)를 올려 벼슬을 버리고 돌아왔는데, 마침내 대간(臺諫)의 탄핵을 입어 영암(靈巖)으로 유배되었다. 임인년(1602)에 은혜를 입어 돌아와 마침내 비슬산(琵瑟山)에 들어가 솔잎을 먹으면서 벽곡(辟穀)하였다. 또 영산(靈山)의 창암(滄巖)에다 강정(江亭)을 짓고 망우(忘憂)라고 편액(扁額)을 하면서 영원히 익힌 음식을 끊으니, 고요하여 마치 한 사람의 도인(道人) 같았다.
갑진년(1604) 봄에 남로 찰리사(南路察理使)에 임명되어 도내의 산성 중에 반드시 수축해야 하는 것을 순심(巡審)하였다. 여름에 선산 부사(善山府使)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가을에 안동 부사(安東府使)에 임명되었으나 또한 부임하지 않았다. 겨울에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품(陞品)되었다. 을사년(1605) 봄에 또 찰리사로 부름을 받았고 동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가 곧 한성부 우윤으로 옮겨졌다. 가을에 인동 현감(仁同縣監)에 제수되었으니, 이는 일찍이 천생산성(天生山城)을 수축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으나 또 부임하지 않았다. 무신년(1608)에 선묘께서 승하하시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또 본도(本道)의 병마사(兵馬使)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기유년(1609, 광해군1) 봄에 부름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삼도 통제사(三道統制使)에 제수되었으나 또 나아가지 않았다. 경술년(1610) 봄에는 부름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고, 중흥삼책소(中興三策疏)를 올렸다. 여름에 부름을 받아 입경(入京)하여 부총관(副摠管)에 임명되었다가 곧 한성부 좌윤으로 옮겨졌는데 소를 올려 당시의 폐단에 대해 극언하니, 듣는 자들이 모두 두려워하고 탄복하였다. 함경도 관찰사에 임명되었을 때는 소를 올려 역관(譯官)과 원접사(遠接使)가 임금을 무시한 죄를 논하였으나 비답을 얻지 못하였다. 공은 말이 쓰이지 못하였다고 하여 호연(浩然)히 남쪽으로 돌아왔다. 광해군이 즉시 선전관(宣傳官)을 보내어 충주(忠州)까지 쫓아가 유지(有旨)를 전하고 돈독히 유시(諭示)하게 하였다. 공은 충주에 수일간 머무르면서 소를 올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광해군이 또 주서(注書)를 보냈는데 유지가 더욱 간절하였다. 공은 병으로 나아갈 수 없다고 사양하고 합천(陜川)의 해인사(海印寺)에 머물렀다. 친구에게 답하는 편지에서 이르기를, “푸른 소나무 서 있는 바위 턱에서 굶주리면 그 잎을 따 먹고, 흰 구름 쌓인 속에서 목마르면 샘물을 마신다네.” 하니, 당시의 사람들이 모두 전해 가며 외웠다. 공이 경사(京師)에 있을 때 완평(完平), 한음(漢陰) 등 제공(諸公)들과 날마다 함께 노닐었는데, 어진 사대부들이 다투어 달려와 알현하니, 자리에 다 수용하지 못할 정도였다.
계축년(1613, 광해군5) 여름에 호남 병마사(湖南兵馬使)에 임명되었는데, 유지가 내려 억지로라도 부임할 것을 권하였으나 끝내 부임하지 않았다. 당시에 조정의 신하가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이기를 청하였는데, 공이 홀로 소를 올려 이르기를, “8살 난 아이가 어찌 역모(逆謀)를 알겠습니까. 또 대군이 죽음을 당하게 되면 자전(慈殿)께서 필시 견디지 못하실 것입니다. 혹여 자전께 뜻밖의 변고라도 있게 된다면 장차 전하께서는 천하 후세에 무슨 말씀을 하시겠습니까.” 하였으나, 비답을 받지 못하였다. 이때부터 더 이상 당세(當世)에 뜻을 두지 않고 늘 강정(江亭)에 있으면서 두문불출한 채 양생(養生)하면서 세상을 버리고 홀로 서려는 뜻이 있었다.
정사년(1617, 광해군9) 봄에 질병이 위독하였는데, 침이나 약을 쓰지 못하게 하면서 이르기를, “살고 죽는 것은 운명인데, 어찌 침이나 약을 쓰겠는가.” 하였다. 4월 10일에 세상을 떠나니, 춘추 66세였다. 이날 뇌우(雷雨)가 갑자기 몰아치고 붉은 기운이 하늘에 뻗치니, 깊은 산골짜기에서조차 놀라 탄식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광해군도 깊이 애통해하면서 즉시 부의(賻儀)를 전하고 치제(致祭)하게 했다. 8월 모일에 현풍현(玄風縣) 남쪽 구지산(仇知山) 신당(神堂)의 언덕에 장사 지내니, 선영(先塋)을 따른 것이다. 금상(今上) 갑인년(1674, 숙종 즉위년)에 사림(士林)이 그를 위해 사당을 세워 존재(存齋) 곽공(郭公)과 아울러 배향(配享)하였고, 3년 뒤 정사년(1677)에는 대제학(大提學) 민점(閔點)의 건의로 특별히 사액(賜額)되었다.
공의 부인은 상산 김씨(商山金氏)로 만호(萬戶) 휘 행(行)의 따님이자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외손녀이다. 2남을 낳았는데, 형(瀅), 활(活)이며, 외가(外家)가 없는 서자(庶子)가 또 3인이니, 탄(灘), 명(溟), 목(沐)이다. 형은 2남을 두었는데, 여로(汝櫓), 여집(汝楫)이고 나머지 아들이 또 2인이니, 여제(汝梯), 여절(汝梲)이다. 활은 4남을 두었는데, 여환(汝桓), 여재(汝榟), 여추(汝樞), 여송(汝松)이다. 탄은 1남을 두었는데, 여도(汝棹)이다. 명은 1남을 두었는데, 여단(汝檀)이다. 목은 3남을 두었는데, 여상(汝相), 여릉(汝棱), 여주(汝柱)이다. 증손자는 적자와 서자 모두 합해서 16인이고, 현손자는 모두 6인이다.
현일(玄逸)이 삼가 생각건대, 이 나라가 태평세월을 누리는 100년 동안 신하를 후하게 예우하니, 사대부로서 임금의 녹을 먹고 임금이 내린 옷을 입는 등, 나라의 총영(寵榮)을 입은 자가 적잖이 많았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변고가 발생하여 뜻하지 않게 왜구가 나라 안에 가득 설쳐 대어 군부(君父)로 하여금 몽진(蒙塵)하여 저 들판에서 괴로이 지내시도록 만들었는데도, 당시의 방백(方伯)이나 연수(連帥)들은 도망치거나 숨어들어 구차히 목숨을 연명한 자가 끊이지 않았다. 공은 초야의 서생(書生)으로서 평소에 한 번의 벼슬도 지낸 적이 없는데도, 홀로 분연히 사지(死地)로 뛰어들어 자신의 목숨을 돌보지 않고 향병(鄕兵)을 규합하여 충의(忠義)로써 격려하였다. 수천 명의 오합지졸을 거느리고 한창 기세가 오른 왜구에 대항하여 기이한 계략으로 변고를 제압하여 적절한 시기에 승첩(勝捷)을 이루어 내었다. 적을 패퇴시킨 그 공이 이미 충분히 당세에 드러나고 후세에 전해질 만하였는데도, 끝내 군대를 유격(遊擊)하여 번갈아 출정하면서 차단하고 저지하여 적으로 하여금 마음대로 기세를 부리지 못하게 하였다. 각 고을을 차례로 수복한 계책은 국가가 중흥하는 근본이었으니, 그 충렬(忠烈)은 너무나 우뚝하였다. 만년에는 다시 초연히 속세를 벗어나 벽곡(辟穀)하고 연기(鍊氣)하면서 장차 옛날의 신선이 된 자들과 같이 우주 밖에서 노닐기를 기약하니, 마치 당세에는 뜻이 없는 듯하였다. 그러나 조정의 의론이 어긋나거나 임금의 덕이 잘못됨을 알게 되면 문득 다시 글을 올려 극언을 하는 등, 단지 나라가 있음을 알 뿐이고 그 자신이 있음을 알지 못하였다. 그 지성(至誠)으로 간절하게 충군(忠君), 애국(愛國)하는 것이 또 이렇듯 독실하였다. 공 같은 이는 아마도 이른바 ‘세상에 드문 훌륭한 기상으로, 영명하고 과단하고 충성스럽고 씩씩하고 열렬한 장부(丈夫)’가 아니겠는가. 현일은 먼 시골에서 뒤늦게 나서 비록 공의 세대에 직접 의형(儀形)을 뵙고 친히 음지(音旨)를 받들지 못하였으나 그 기풍을 듣고 그 글을 읽으면서 우러르고 사모한 지는 오래되었다. 계유년(1693, 숙종19)에 벼슬살이 때문에 경사(京師)에 있을 때였다. 하루는 공의 증손 흔(昕)이 시호의 은전(恩典)을 청하려 하면서 현일을 찾아와 이르기를, “그대가 시장을 써 주기를 바란다.” 하였다. 현일은 사양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가첩(家牒) 중에서 약간 추려 내어 차례로 위와 같이 기록하여 태사(太史)의 채택과 봉상시의 의시(議諡)에 대비하고자 한다. 삼가 시장을 쓴다.
출전 : 한국고전번역원
嘉善大夫行咸鏡道觀察使兼巡察使兵馬節度使,咸興府尹忘憂堂郭公諡狀
公諱再祐。字季綏。嘗自號忘憂堂。玄風人。其上世有諱子儀仕高麗。爲金吾衛校尉。自是代有偉人。曾祖諱瑋。禮安縣監。祖諱之藩。成均館司成。贈承政院左承旨。考諱越。海西觀察使。贈禮曹判書。娶晉州姜氏。以嘉靖壬子八月戊寅生公。自幼倜儻有奇氣。及長。孝友篤至。操守堅確。居常處閒。恂恂有退讓君子之風。及至臨利害遇事變。確乎有不可拔者。嘗從判書公聘上國。有相者奇其狀貌。謂曰。此人後必貴。當名滿天下云。後生時好讀書。兼通武藝。累捷鄕解。及廷對語。觸時諱報罷。萬曆丙戌。丁判書公憂。廬墓三年。終喪不入私室。服闋。遂廢擧子業。作亭岐江上。漁釣自娛。爲終老計。壬辰夏。日本兵作。公慨然投袂而起。傾家資募壯士。據新反倉粟。取草溪軍器。逋將散卒。招收並用。號令風揮。忠義動人。遠邇聞之。莫不響應。時賊將安國司聲言將向湖南。直抵鼎津。公樹栅要害處。設疑兵伏強弩以待之。賊憚其威聲。不敢濟。遂從陸路掠洛水東諸郡。公乃自號天降紅衣將軍。日擊江上賊多捷。時士未習兵。怯於進戰。公輒挺身先之。賊砲丸齊發而竟不能害。連日交兵。殺賊無算。亦不斬馘以獻功。撫視士卒如家人。至犯軍律當死。用法不少貸。賞罰嚴明。誠信素著。故能得人死力。初巡察使金睟見賊勢盛。不敢爲城守討賊計。託以勤王。行到龍仁。遇賊大敗而還。公告于衆曰。睟爲一路方伯。不死守封疆。欲出境偸生。喪師奔還。其罪可斬也。因疏陳行在。檄數其罪。睟大怒。以反逆論啓。幕下金景訥等移書列邑。目之以賊。公方馳援晉州。倚馬而答曰。義賊之分。天地知之。是非之判。公論在焉。時金文忠公誠一受招諭之命。行到居昌。初見檄文。錯愕驚疑。問於前學諭朴思齊曰。再祐何如人也。巡察是王人。安敢乃爾。思齊答曰。再祐故監司郭越之子也。爲人慷慨有大節。每讀史至忠臣義士盡節處。未嘗不感憤流涕。常曰。吾家世受國恩。若遇事變。當捐軀以報之。其素意如此。今日之事。雖未知其由。然巡察遇賊出境。顚沛奔還。軍情解體。事
不可爲。故有此擧也。豈有他意哉。文忠大悟。卽致書于公。反復曉告。又馳啓行在。暴其忠義奮激狂疏戇直之狀。伸救甚力。上特下溫諭。勉以討賊。始授公幽谷道察訪。俄遷刑曹佐郞。公於是感泣拜受。誓以死報。激厲將士。屢戰皆捷。保障江右。爲恢復嶺南之基。時洛水以東屯據之賊。四出摽掠。恣行殺戮。民無所歸命。奔逬竄匿。將無孑遺。公自宜寧引兵來。住玄風之境。使突騎直至邑底以誘之。賊畏縮不敢出。公益爲疑兵。夜令人人持兩炬。炬皆三頭可爇火。迤邐數十里。鼓角齊鳴。一時擧火。若將掩襲之狀。忽又火滅鼓止。寂若無人。俄頃復如前。賊大驚疑。撤屯宵遁。他邑留屯之賊。望風亦潰。七月。上諭嶺南士民書曰。郭再祐布置異常。殺賊尤多。而不以功自達云。予尤奇之。恨予聞名之晩也。冬。陞折衝爲助防將。公擇驍勇壯健者數十騎以自隨。公衣紅衣騎白馬。從者亦如之。凡遇賊。鼓譟左右。躡以誘之。賊或空壘以逐之。追至山谷間。失公所在。賊方驚惑。忽見前崖有紅衣白馬者鼓譟而出。賊大驚追之。又失所往。但聞鼓角殷山。旗幟萆阿。賊不敢逼。公乃令軍士從樹木叢密中游弩迭射。殺傷甚多。賊輒敗走。其出奇制勝。以少擊衆。類如此。時完平李相公元翼以體察使開府于星州。使公築三嘉,玄風兩邑山城。將欲使楊總兵移駐嶺南。公言于體府曰。爲今日之計。當修山城。繕器械蓄資糧。先爲不可勝之勢。待時而動。此虛虛實實之論也。夫虎在於山。其威自重。龍在於淵。其神不測。若虎出於野。龍出於陸。童豎逐之。獱獺侮之。天兵之在湖南。虎在山龍在淵之勢也。若來嶺南。是虎在野而龍出陸。亡乃不可乎。體相謝曰。今見復書。不覺屈膝。癸巳夏。拜星州牧使。甲午秋。棄歸。乙未春。拜晉州牧使。秋又棄歸。所至政淸如水。治稱神君。丁酉秋。賊復大擧入寇。公以防禦使。移守昌寧之火旺山城。群情胥悅。公纔入城。賊將淸正游騎已到城下。公指揮諸軍。號令明肅。兵威益張。士氣益勵。於是積薪所館。以示必死無生意。一軍皆感憤思致死。賊旣薄城。公從容談笑。但令各堅所守曰。賊自知兵。豈肯輕犯。經一晝夜。賊果斂兵不戰。渡江而西。屠黃石陷南原。賊鋒所指。列鎭皆潰。體相命公解兵。公致書體府曰。齊城七十。卽墨獨全。安市孤城。能抗唐兵。列鎭雖潰。餘城未拔者。獨不可爲守乎。拒之不從。體相以城危兵少難之。公亦以喪去。時公有繼母喪也。 軍民莫不悼歎失望。公遂避地關東之蔚珍縣。衰絰居廬。持喪惟謹。不以顚沛流離。有所忽略。累命起復。終不應。戊戌。日兵撤歸。己亥冬。爲嶺南東道兵馬使。庚子。以島山城繕完事。再度啓請而朝廷不許。公以爲有官守者不得其職則去。上疏棄官歸。遂被臺劾。責靈巖。壬寅。賜環而歸。遂入琵瑟山。餐松辟穀。又就靈山滄巖築江亭。扁以忘憂。永謝煙火。蕭然若一道人也。甲辰春。拜南路察理使。巡審道內山城之必可修築者。夏。除善山府使。不赴。秋。拜安東府使。亦不赴。冬。陞嘉善。乙巳春。又以察理使被召。拜同知中樞府事。俄遷漢城右尹。秋。除仁同縣監。蓋以曾修天生山城故也。又不赴。戊申。宣廟上仙。光海卽位。又拜本道兵馬使。不赴。己酉春。被召不就。拜三道統制使。又不赴。庚戌春。被召不至。上中興三策疏。夏。承召入京。拜副摠管。尋遷漢城左尹。上疏極言時弊。聞者莫不悚歎。拜咸鏡道觀察使。上疏論譯官遠接使無君之罪。不報。公以言不見用。浩然南歸。光海卽遣宣傳官追到忠州。宣旨敦諭。公留忠州數日。上疏歸家。光海又遣注書諭旨益懇。公謝病不起。留陜川之海印寺。答友人書曰。靑松巖畔。飢則餐葉。白雲堆裏。渴則飮泉。一時人皆傳誦。公之在京也。完平,漢陰諸公日與之遊。賢士大夫莫不爭趨交謁。座不能容。癸丑夏。拜湖南兵馬使。有旨勉起。終不赴。時廷臣請殺永昌大君。公獨上疏言。八歲之兒。焉知逆謀。且大君見誅。慈殿必不能忍。如或有意外之變。則殿下將何以有辭於天下後世乎。不報。自是不復有意當世。常在江亭。杜門服食。有遺世獨立之意。丁巳春。疾病危篤。不許鍼藥曰。死生命矣。何用鍼藥爲。以四月十日啓手足。是日雷雨驟至。紫氣沖霄。春秋六十有六。深山窮谷。莫不驚歎。光海深加痛悼。亟命致賻賜祭。八月某日。葬于玄風縣南仇知山神堂之原。從先兆也。今上甲寅。士林爲之立祠。與存齋郭公並享。越三年丁巳。因大提學閔點建請。特爲宣額。公夫人商山金氏。萬戶諱行之女。南冥曹植之外孫女也。生二子。曰瀅,曰活。無外家者又三人。曰灘,曰溟,曰沐。瀅有二子。曰汝櫓,汝楫。餘子又二人。曰汝梯,汝梲。活有四子。曰汝桓,汝榟,汝樞,汝松。灘有一子曰汝棹。溟有一子曰汝檀。沐有三子。汝相,汝棱,汝柱。曾孫男嫡庶凡十六人。玄孫男凡六人。玄逸竊惟國家昇平百年。優禮臣下。士大夫食君衣君。荷國寵榮者。不爲不厚。一朝變生。不虞寇盜充斥。使君父蒙塵。越在草莽。不免震蕩暴露之苦。而一時方伯連帥之臣。奔北竄伏。偸生苟免者。前後相續也。公以草野書生。平生未嘗沾一命之官。顧獨奮然出萬死。不顧一生之計。糾合鄕兵。激以忠義。提數千烏合之卒。抗方張不測之寇。出奇制變。捷應機會。其所摧敗。旣足以暴當世而垂後來。卒能遊兵迭出。蔽遮沮遏。使賊不得逞。其分道荐食之策。爲國家中興根本。其忠其烈。斯已奇矣。晩復超然遠引。辟穀鍊氣。將與古之形解尸化者。相期紘垓之外。似若無意於當世者。而一聞朝論之愆違君德之爽失。則輒復封章極言。只知有國而不知有其身。其惓惓忠愛之篤。又如此。若公者豈所謂間世奇氣英毅忠壯烈丈夫者非耶。玄逸晩生遐陬。雖未能及公之世。得接儀刑。親承音旨。聞其風而讀其書。景仰忻慕之日久矣。癸酉歲。從宦在京師。一日公之曾孫昕將請易名之典。詣玄逸而言曰。願子之爲之狀也。玄逸辭不獲。遂就家牒中稍加檃括。第錄如右。以備太史之採擇。太常之議諡焉。謹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