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 김공 묘갈명 병서〔川沙金公墓碣銘 並序〕
자사자(子思子)가 “만일 지극한 덕이 아니면 지극한 도가 모이지 않는다.[苟不至德, 至道不凝焉.]”라고 말하였다. 대저 지극한 덕은 진실로 숭상할 만하니, 학자가 만일 진실된 마음으로 각고의 공부를 하여 한갓 입으로만 말하는 데 그치지 않고 반드시 몸에 체득하려고 하여 함양(涵養)과 실천의 공부로 하여금 적덕(積德)의 기초가 되게 할 수 있다면 지극한 도가 모이는 데 또한 거의 가깝게 될 것이다. 근래 작고한 천사(川沙) 선생 김공(金公) 같은 이가 어찌 그런 사람이 아니겠는가.
삼가 살펴보건대, 공의 휘는 종덕(宗德)이고 자는 도언(道彥)이다. 김씨(金氏)는 본래 신라 경순왕(敬順王)에서 나왔으나, 고려 시대 휘 방경(方慶)에 이르러 중흥의 공로로 상락군(上洛君)에 봉해졌는데, 인하여 본관으로 삼았다. 조선조에 들어와 북평사(北評事)를 지낸 휘 극해(克楷)는 청백리로 이름이 났다. 송은 처사(松隱處士) 휘 광수(光粹)는 서원에 제향되었다. 만취당(晩翠堂) 휘 사원(士元)은 퇴도(退陶) 문하에 유학하였는데, 이분이 휘 준(濬)을 낳으니 예빈시 직장(禮賓寺直長)을 지냈다. 이분이 휘 상린(尙璘)을 낳았는데,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추증되었으니 공에게 고조부가 된다. 증조부는 휘가 현좌(賢佐)이고 조부는 휘가 이모(履謨)이다. 아버지는 휘가 남응(南應)이며, 돈독한 효성으로 일컬어졌다. 어머니는 순천 김씨(順天金氏)로 여사(女士)의 행실이 있었는데, 응교(應敎)를 지낸 김광엽(金光燁)의 5대손인 처사 김주억(金胄嶷)의 따님이다.
공은 경종 갑진년(1724, 경종4) 7월 모일에 태어났다. 영조 계유년(1753, 영조29)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기묘년(1759, 영조35)에 대산(大山) 이 선생(李先生)의 문하에 유학하였다. 정조 기유년(1789, 정조13)에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에 임명되었으나 바야흐로 부모상을 당하여 상제를 지키고 있었기에 실제로 직첩이 내려오지는 않았다. 갑인년(1794, 정조18)에 우로은(優老恩)으로 첨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 정사년(1797, 정조21) 8월 모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74세였다. 그해 11월에 후현(後峴) 오좌(午坐) 언덕에 장례를 지내니, 장지에 모인 선비가 수백 명이었다.
공은 어려서 총명함이 남달랐고 자품이 도(道)에 가까웠다. 이미 소호리(蘇湖里)의 대산에게 책 상자를 지고 가서 제자가 되어서는 전일한 마음으로 복종하며 섬겼다. 진덕수업(進德修業)하는 단계적 공부를 한결같이 스승의 가르침을 따랐다. 학문을 강구(講究)하고 체험(體驗)하여 공부가 중간에 끊어지는 때가 없었다. 대개 공은 입지(立志)가 원대하고 공부가 엄밀(嚴密)하여, 박문(博文)하였으나 범범한 데 힘쓰지 않았고 약례(約禮)하였으나 비루한 데 잃을까 염려하였다. 실오라기와 털끝같이 분석한 것이 자신에게 절실한 이치가 아님이 없었다. 자신에게 돌이켜 살피고 스스로 경계하는 것이 모두 성의(誠意)와 정심(正心)의 공부였고, 시종 경(敬)을 주로 하여 날로 새롭게 하고 또 새롭게 하였다. 그러므로 이 선생께서 공의 독실한 공부는 숭상할 만하다고 자주 칭찬하였다.
학문이 더욱 밝아지고 덕이 더욱 높아져서는 얼굴에 윤기가 돌고 등에는 밝은 기운이 넘쳤으며, 말은 엄정하고 논지는 정확하였다. 그리하여 몸가짐과 행동거지에 있어서 법도가 삼엄하였으며, 일에 대응하고 사물을 접할 즈음에 덕성(德性)이 성대하게 나타나 보는 자들이 유도군자(有道君子)로 생각하지 않음이 없었다. 효우(孝友)의 행실은 천성에서 나왔다. 6, 7세 때 어떤 사람이 까마귀가 울면 악한 기운이 들어온다는 말을 하니 공이 그 소리를 듣고 부모님의 마음을 방해할까 염려하여 매양 아연실색하며 두려워하였다. 성장하여서는 부모님의 심지와 몸을 봉양하는 것을 모두 극진히 하였다. 문에 창호지를 바르고 구들을 따뜻하게 해 드리는 것을 늙을 때까지 몸소 친히 하였다.
공이 어머니 상을 당하였을 때는 연세가 60이 넘었으나 집상(執喪)의 예에 변함이 없었으며 자신의 몸이 쇠해진 것으로 혹 게을리하지 않았다. 동생들을 사랑하기를 매우 독실히 하여 모두 인솔하여 소호리에 함께 가서 공부하였다. 평소에 책상을 연이어 함께 거처하고 공부에 매진함을 서로 좋아하였다. 일찍이 형제들이 동시에 전염병에 걸렸는데 공이 먼저 일어나 동생들 구제에 나섰다. 수십 일 밤 동안 추위를 무릅쓰고 죽을 끓여 먹여서 동생들을 소생할 수 있게 만들었으나, 공은 도리어 기력이 손상되어 거의 죽을 뻔하다가 오랜 뒤에야 나을 수 있었다. 집안의 살림을 일체 동생들에게 맡기고 재물의 출납에 대하여 묻지 않았다. 종족과 친구들에게는 주휼하고 베푸는 것을 오직 빨리 시행하지 못할까 염려하였다. 산림에서 도(道)를 지켰고 명리(名利)에 대한 생각을 끊었다. 항상 과거 시험의 학문이 사람들의 심지를 무너뜨린다고 탄식하였다. 두 동생이 나란히 향시(鄕試)에 급제한 명단이 갑자기 도착하였을 때 공은 바야흐로 편지를 쓰고 있으면서 듣지 못한 듯이 하고 쓴 편지를 봉하는 것을 마친 뒤에야 비로소 합격자 통지서를 보았다.
자기 몸을 다스리기를 엄숙하고 장엄하게 하여 비록 심한 질병이 들어도 옷과 침구를 반드시 정리정돈하였고 남이 보도록 열어젖히는 때가 없었다. 막냇동생이 임종할 때 지극히 정제(整齊)하며 정신이 혼란하거나 마음이 비통하여 암울함이 없었는데, 공이 울면서 영결하고 밖으로 나왔다가 옷깃을 여미고 다시 들어가 “네가 하는 행위는 고인에게 찾아보아도 드문 일이다. 그런데 나는 말하는 것이 가슴을 억누르듯 울적해하면서 앉았다 섰다 경거망동하니 네가 반드시 마음에 만족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에 공경하고 삼가는 용모로 다시 너를 대하고자 한다.”라고 말하였으니, 공이 잠깐 사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인(仁)에 뜻을 두었음을 여기서 더욱 볼 수 있다. 이 선생께서 공에게 공경히 예로 대함이 매우 지극하여 그의 손자 병운(秉運)을 공에게 보내 집지하여 배우게 하는 데 이르렀다. 이 선생이 병이 위독할 때 숨이 끊어질 것 같아 일어나 앉아 빈객을 맞이할 수 없었지만, 공이 들어가면 반드시 부축을 받아 일어나 앉았으며, 학자들을 불러서 이야기할 때 또한 공이 오기를 기다려서 하였으니, 공과 같은 이는 어찌 이 선생의 진결(眞訣)을 얻은 자가 아니겠는가. 원근의 학자들이 또한 종유하는 자가 많아 경서를 가지고 묻고 따지는 것이 서로 줄을 이었지만, 공은 가르침에 게으른 기색이 없었다. 저술한 것으로는 《성학정로(聖學正路)》, 《성학입문(聖學入門)》, 《공문일통(孔門一統)》, 《석학정장(釋學正臟)》, 《정본예서(政本禮書)》와 약간 권의 유고가 있다.
부인은 한산 이씨(韓山李氏)로 사인(士人) 이시화(李時和)의 따님이다. 단아하고 고졸하며 맑고 조용하여 종신토록 시집오는 날과 같이 하였다.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 경진(慶進)은 공보다 먼저 죽어서 양관(養觀)을 양자로 삼았으며 딸은 유동춘(柳同春)에게 시집갔다. 공의 동생으로 장령(掌令)을 지낸 종발 씨(宗發氏)가 그의 조카 원진(原進)으로 하여금 공의 유사를 받들고 나에게 가서 글을 보여 주고 묘갈명을 지어 달라고 청하게 하였다. 스스로 생각건대 보잘것없는 내가 어찌 이 일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평소에 공을 우러러 사모한 지 오래되었다. 근래에 공의 집에서 공에게 두 번 문안인사를 드린 적이 있었는데, 덕망을 보고 마음으로 취하였다. 그러므로 드디어 사양하지 않고 삼가 위와 같이 서술한다. 명은 다음과 같다.
공자 문하생 삼천 명 중에 孔門三千
학문을 좋아하는 이가 몇 명 없었네 好學無幾
옛날에도 오히려 그러했는데 在古猶然
하물며 지금에 어찌 쉽겠는가 矧今豈易
우뚝하도다, 천사 어른이여 卓哉川翁
독실하게 위기지학을 하였네 篤實爲己
호상의 대산에게 진결을 받아 受訣湖上
죽을 때까지 복응하였네 服膺沒齒
사비를 반드시 제거하였고 四非必克
삼성을 일삼았네 三省是事
힘써 부지런히 노력하여 俛焉孜孜
진전함은 있고 그침은 없었네 有進無止
덕이 이루어지고 행실이 높아짐에 德成行尊
빛나는 군자가 되었네 君子有斐
우뚝 멈추어 선 산악 같고 如嶽之停
순수한 옥과 같네 如玉之粹
임천에서 고상하게 노닐며 高蹈林泉
고위관직을 뜬구름처럼 보았네 軒冕雲視
공에게 와서 배우는 자에게 有來摳衣
현묘한 이치를 열어 보여 주었네 玄鍵開示
사도가 망하지 않았다면 斯道不亡
큰 명성이 펼쳐졌으리라 大名其施
내가 묘갈명을 지어 我銘于墓
후세에 밝게 보여 없어지지 않게 하네 昭揭無墜
川沙金公墓碣銘 並序
子思子曰苟不至德。至道不凝焉。夫至德固尙矣。學者苟能以眞實心做刻苦工。不徒言之口。而必要體之身。使涵養踐履之功。爲積德之基。則其於至道之凝。亦庶幾矣。若近故川沙先生金公。豈非其人也哉。謹按公諱宗德字道彥。金氏本出新羅敬順王。至高麗有諱方慶。以中興功封上洛君。因貫焉。入我朝北評事諱克楷。以淸白名。松隱處士諱光粹。受俎豆享。晩翠堂諱士元。遊退陶門。是生諱濬禮賓直長。是生諱尙璘贈司僕正。於公爲高祖。曾祖諱賢佐。祖諱履謨。考諱南應。以篤孝稱。妣順天金氏。有女士行。應敎光燁五代孫。處士胄嶷女。公以景廟甲辰七月日生。英廟癸酉中生員。己卯遊大山李先生門。今上己酉。薦學行除義禁府都事。以方守制職帖不果下。甲寅以優老恩授僉樞。丁巳八月日卒。壽七十四。十一月葬于後峴午坐原。縫掖會者數百人。公自幼聰穎過人。資稟近道。旣負笈湖上。專心服事。進修階級。一遵師敎。講究體驗。無時間斷。盖其立志遠大。着工嚴密。博而不務於泛。約而恐失於陋。縷析毫分。無非切實之理。反省自警。皆是誠正之工。而終始主敬。日新又新。故李先生亟稱其篤實可尙。及其學益明而德益崇。則面睟背盎。言厲旨確。動容周旋之間。矩度森然。應事接物之際。德性藹然。見之者莫不以爲有道君子也。孝友之行。出於天性。六七歲人言烏啼引惡氣。公聞其聲。恐妨父母。每爲之失色以懼。及長養志體備至。糊牕溫堗。至老躳親。其遭內艱。年逾六十。執禮無變。不以已衰而或懈。愛諸弟甚篤。倡率同學於湖上。居常聯榻共處。征邁相好。嘗同時染癘。公先起以救。冒寒煑粥數十夜。致羣弟得甦。而公反澌敗幾殊。久乃痊。家貲一委之羣弟。不問其出入。於宗族親故。周恤施與。惟恐其不速行。守道山樊。絶意名利。常歎科擧之學。壞人心志。及兩弟幷中省解榜猝至。公方裁書如不聞。待封緘訖。始取見之。律己齊莊。雖甚疾病。衣衾必整飭。無撥開時。季氏臨終。極整齊無錯亂悽黯。公泣訣而出。斂衽更入曰汝之爲。古人所罕。吾乃言語掩抑。坐立輕遽。汝必不滿於心矣。玆欲以敬謹之容。更見汝矣。其造次必於是。於是而益可見矣。李先生敬禮公甚至。至遣其孫秉運執贄受學。疾革時奄奄不能起坐見賓客。公入必扶起而坐。其招語學者。亦待公爲之。若公豈非得李先生眞訣者哉。遠近學者。亦多從之遊。執經問難相屬。公敎誨無倦色。所纂述有聖學正路,聖學入門,孔門一統,釋學正臟,政本禮書及遺稿若干卷。配韓山李氏。士人時和之女。端拙淸靜。終身如入門日。生一男一女。男慶進。先公夭。系子養觀。女適柳同春。公之弟掌令宗發氏。使姪原進奉公遺事來。示余乞銘其墓。自惟無似。何敢當是役。顧平日景仰公夙矣。間嘗再候公於其第。覿德而心醉焉。故遂不辭而謹敍如右。銘曰。孔門三千。好學無幾。在古猶然。矧今豈易。卓哉川翁。篤實爲己。受訣湖上。服膺沒齒。四非必克。三省是事。俛焉孜孜。有進無止。德成行尊。君子有斐。如嶽之停。如玉之粹。高蹈林泉。軒冕雲視。有來摳衣。玄鍵開示。斯道不亡。大名其施。我銘于墓。昭揭無墜。
[주1] 만일 …… 않는다[苟不至德, 至道不凝焉.] : 《중용장구》 제27장에 나온다.
[주2] 송은 처사(松隱處士) …… 제향되었다 : 김광수(金光粹, 1468~1568)는 유성룡(柳成龍)의 외조부로, 1501년(연산군7)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출사를 단념하고 향리에서 시가를 읊으며 여생을 보냈는데, 사후 장대서원(藏待書院)에 제향되었다.
[주3] 얼굴에 …… 넘쳤으며 : 수면앙배(睟面盎背)의 뜻이다.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군자의 본성은 인의예지가 마음속에 뿌리하여, 그 얼굴빛에 나타남이 수연히 얼굴에 드러나며, 등에 가득하며 사체에 베풀어져서 사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저절로 깨달아 행하여진다.[君子所性, 仁義禮智根於心, 其生色也睟然, 見於面, 盎於背, 施於四體, 四體不言而喩.]”라고 하였으니, 수양을 통하여 화평하고 밝은 기운이 겉으로 드러남을 형용하는 말이다.
[주4] 막냇동생 : 김종섭(金宗燮, 1743~1791)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홍보(弘輔), 호는 제암(濟庵)이다. 1768년(영조44)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출사를 단념하고 학문에 매진하였다. 저서로 《대산서절요(大山書節要)》와 《제암집(濟庵集)》이 있다.
[주5] 사비(四非) : 공자(孔子)의 제자인 안연(顔淵)이 인(仁)의 조목을 물었을 때 공자가 “예가 아니면 보지 말며, 예가 아니면 듣지 말며,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며,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라.[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라고 답한 네 가지 조항을 말한다. 《論語 顔淵》
[주6] 삼성(三省) : 공자(孔子)의 제자 증자(曾子)가 날마다 세 가지를 가지고 자신의 몸을 반성한 것이니, “남을 위하여 일을 도모해 줌에 충성스럽지 않았는가. 벗과 더불어 사귐에 성실하지 않았는가. 선생에게 전수받은 것을 복습하지 않았는가.[曾子曰, 吾日三省吾身, 爲人謀而不忠乎? 與朋友交而不信乎? 傳不習乎?]”이다. 《論語 學而》
출전 : 한국고전번역원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김영옥 송희준 공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