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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 박공朴公 행장行狀
공의 휘는 순淳, 자는 화숙和叔, 성은 박씨朴氏이고 자호自號는 사암思菴이며, 그 선대先代는 충주인忠州人이다. 처음에 진사공進士公이 정禎, 상祥, 우祐 3남을 낳았는데, 정은 문장文章이 있었으나 일찍 작고하였고, 상은 통정通政으로 졸관卒官하였고 문집이 세상에 행해지고 있으니, 세상에서 이른바 눌재 선생訥齋先生이란 분이며, 우는 진사시進士試와 명경과明經科에 각각 장원하였고 가문家文이 세상에 행해지고 있으니, 눌재 선생과 서로 난형난제의 사이였는데, 이분이 당악김씨棠岳金氏의 딸에게 장가들어 가정嘉靖 계미년 10월에 공을 낳았다.
공은 막 나서부터 낯빛이 온화하고 기氣가 청명하였으며, 6세 때에 김 부인金夫人이 작고하여 서모庶母에게서 길러졌는데, 뭇 아이들과 장난을 할 적에도 읍양揖讓하고 주선周旋하는 모습을 지었다. 학문學問할 줄을 앎에 미쳐서는 마치 칼날로 실을 끊듯 도리를 분변하여 번거로이 가르쳐 줌을 받지 않고도 학문이 일취월장하였다. 그리하여 나이 겨우 8세 때에 이미 입을 열고 사물을 읊어 말을 뱉어 내기만 하면 남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러자 어린애들을 가르치던 이웃 선생이 문득 공을 가르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내가 감히 너의 스승이 될 수 있겠느냐.” 고 하였다.
기묘년의 화禍가 일어남에 미쳐서는 좌윤공左尹公이 화를 면치 못할까 두려워하여 오직 날로 술이나 마시면서 스스로 종적을 감추었는데, 하루는 거나하게 취하여 공에게 음주시飮酒詩를 지으라고 명하자, 공이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시를 지어 내니, 좌윤공이 놀라서 혀를 빼고 말하기를, “이 늙은이가 무릎을 꿇어야겠다.” 고 하였다. 18세 때에는 상상上庠(성균관 생원)에 올라갔다.
정미년에는 좌윤공이 작고하자, 공이 3일 동안은 수장水漿도 입에 넣지 않았고, 초기初朞가 지나서까지도 죽만 마시었으며, 삼년상三年喪을 다 마칠 때까지 책은 덮어 두고 감히 읽지 않았다. 그리고 여묘살이를 하면서 지나치게 슬퍼한 나머지 몸이 매우 파리해져서 생명을 잃을까 두려운 지경에 이르러 지팡이를 짚고서야 일어나곤 하니, 조문하는 이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복을 마치고는 산에 들어가서 글을 읽다가 1년이 지나서 돌아왔다.
계축년 8월에는 정시庭試에서 으뜸으로 선발되었다. 명묘明廟가 친히 한 경經을 시험보였는데, 공은 신색神色이 명랑하고 행동거지가 온화한데다 오묘한 뜻을 변석하여 응대應對를 정민精敏하게 하였으므로, 뭇 신하들이 눈여겨보는 가운데 즉시 장원급제를 내리었다. 이어 성균관 전적에 제수되고 화려한 명성이 널리 퍼지자, 선배들이 모두 배항輩行을 굽혀서 공과 사귀었다. 이로부터 공조ㆍ병조ㆍ이조의 좌랑, 홍문관의 수찬ㆍ교리, 이조 정랑, 의정부의 검상ㆍ사인을 역임하고 인하여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공이 옥당玉堂에 있을 적에 임백령林百齡의 시호를 의정하였다. 당시 영의정 윤원형尹元衡은 임백령의 동맹 구훈同盟舊勳으로 정권을 잡고 있었으므로,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킨 잔당들이 윤원형을 의지하여 성사城社로 삼아서 그 형세가 한창 직언直言하는 선비를 원수처럼 보는 때였다. 이때 공이 홍문관에 들어가 동료들을 살펴본 결과 모두가 겁을 먹고 눈치만 살피는 기색이 있었으니, 그것은 대체로 포양褒揚하는 것은 물론 부끄러운 일이거니와 폄론貶論을 했다가는 대번에 화를 빚게 되므로, 모두 이럴까 저럴까 망설이면서 짐짓 그 일을 지연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공이 분기하여 의논해서 올리기를 공소恭昭라 하였다. 시법諡法을 상고하건대, 과실을 지었다가 능히 고친 것旣過能改을 공恭이라 하고, 용의가 공순하고 아름다운 것容儀恭美을 소昭라고 하였으니, 사실은 폄론한 것이다. 그러자 윤원형이 이것을 보고는 몹시 우울하고 답답하게 여기어 조정에 창언倡言하기를,
“저 백령百齡은 국가의 원훈元勳인데도 그의 시호에 충忠 자를 넣지 않은 것은 그 뜻이 불측한 데에 있다.”하고,
마침내 계청啓請하여 공의 죄를 국문하게 하였다. 그러자 군흉群凶들이 윤원형에게 붙어서 바야흐로 성난 눈으로 공을 보았으니, 사실은 진작부터 호시탐탐 노려 왔던 것이다. 그래서 중외中外가 흉흉하여 모두 조석 사이에 큰일이 발생하리라고 여겼었는데, 안현安玹의 극력 구호를 힘입어 관직만 해면당하고 돌아가게 되었다. 처음에 공이 화가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는 장차 수감收監에 대비하기 위해 방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편안하게 나가므로, 가인家人은 무슨 일이 있는 줄도 몰랐었다. 그랬다가 관직만 파면되어 집에 돌아왔는데, 어린 딸이 나와서 맞이하자 공이 딸아이의 손을 잡고 웃으면서 말하기를, “하마터면 너를 다시 보지 못할 뻔하였구나.” 하였다. 그리고 그 이튿날에 나주(羅州)로 돌아갔다.
임술년에는 한산 군수韓山郡守에 제수되었는데, 매양 공무公務를 파하고 나서는 송정松亭에 거처하면서 일과日課로 글을 읽으니, 방군傍郡의 학도들이 소문을 듣고 모여드는 자가 서로 연달아서, 그곳에 부임한 지 1년 동안에 온 경내가 공을 부모처럼 여기었다. 그 명년에는 성균관 사성으로 부름을 받았는데, 미처 이르기도 전에 시강원 보덕侍講院輔德으로 바꾸어 임명되었고 이어 사헌부 집의에 전임되었다. 갑자년에는 홍문관 직제학을 거쳐 동부승지에 승진되었다. 을축년에는 이조 참의로 대사간에 전임되어 개연慨然히 말하기를, “기冀를 탄핵하고 헌憲) 베어 죽여서 세도世道를 만회시키는 것이 나의 책임이니, 나는 내 직무에 죽을 뿐이다.”하고, 인하여 대사헌 이탁李鐸을 찾아가 말하기를,
“내가 윤원형의 죄를 바로잡으려 하는데, 공의 찬성이 필요하다.” 하니, 이탁이 목을 움츠리면서 말하기를, “공이 이 늙은이를 멸족시키려고 드는가.” 하므로, 공이 서서히 사리로써 설득시키니 이탁이 그 일을 승낙하였다.
그러자 공이 매우 기뻐하며 급히 돌아와서는 옷을 벗을 겨를도 없이 곧장 촛불을 켜고 탄사彈辭를 초하였다. 그리하여 다음날 양사兩司가 함께 윤원형 일당을 탄핵하니, 명묘明廟가 모후母后에게 차마 못 하는 마음이 있어 한 달포를 머뭇거리고 있으므로, 공이 더욱 강력히 쟁론하여 마침내 윤허를 얻었다. 그리하여 윤원형은 이미 방축했으나, 좌의정 심통원沈通源은 아직도 정부政府에 남아 있어 선비들의 마음이 자못 답답해하므로 그 또한 이어서 축출하고 나니, 백성들은 길에서 노래하고 춤을 추며, 향려鄕閭에서 책을 끼고 유업儒業을 하는 이들이 점차로 더욱 퍼져 나와서 비로소 부자父子와 군신君臣의 도리를 공공연히 말하여, 모두가 여기에 순종하면 군자君子가 되고 이것을 거스르면 대번에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하는 위욕危辱을 당한다는 것을 알게 됨으로써, 성대히 도道를 향하는 뜻을 가지고 간절히 소망하여 공손히 기다리는 이들이 떼지어 흥기하였다.
그래서 이에 효孝ㆍ우友ㆍ목睦ㆍ인婣ㆍ임任ㆍ휼恤 육행六行을 닦은 선비들을 선발하고, 억울하게 죽은 이들의 관작을 복구시켜서, 나라를 좀먹고 백성을 해치던 모든 구정舊政을 일체 다 씻어 버렸다. 그러자 퇴계退溪와 남명南冥은 영외嶺外에서 사문斯文을 창도倡導하고, 고봉高峯과 대곡大谷은 호중(湖中)에서 흥기하였으며, 우계牛溪와 율곡栗谷 등 제현諸賢이 차례로 이어 일어나서 후배가 되었는데, 그 근본을 미리 설정한 것은 모두 공의 힘이었다.
이로부터 초천超遷하여 대사헌 겸 대제학이 되었는데, 공은 또 당시의 문체가 부박浮薄함을 숭상하는 것을 싫어하여 그 비루한 습관을 힘써 변개시켜서 깨끗이 씻어 버리려고 하였다. 그래서 문장文章을 논할 적에는 으뜸으로 반고班固, 사마천司馬遷, 한유韓愈, 유종원柳宗元, 이백李白, 두보杜甫를 근본으로 삼았고, 도학道學을 논할 적에는 또《소학小學》,《심경心經》,《근사록近思錄》을 계제階梯로 삼았다. 그런데 그 후 얼마 안 되어 퇴계는 산山으로 돌아가고 고봉은 뒤이어 작고하자, 선배와 후배의 사이에 사론士論이 또한 따라서 파가 나누어졌다.
정묘년에는 명묘明廟가 승하하였는데, 졸곡卒哭 이전까지는 공이 밖에서 거처하였고 감히 안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 후 연해서 의성懿聖, 공의恭懿 두 대비大妃의 상喪을 당함에 미쳐서도 이 예禮를 변함없이 굳게 지키었다.
그 명년에는 중조中朝의 학사學士 구희직歐希稷이 조서詔書를 받들고 오므로, 공이 예조 판서로 원접사遠接使가 되었는데, 공의 자용姿容이 청아하고 예를 준행하여 어긋남이 없었으므로, 조사詔使가 이미 속으로 공경심을 일으켰고, 이어 공의 시詩를 봄에 미쳐서는 놀라면서 말하기를,
“송대宋代의 인물이요 당대唐代의 시조詩調이다. 우리 무리는 후안무치할 뿐이다.”고 하였다.
경오년에는 이조 판서에 전임되었는데, 당시 사재四宰 송순宋純이 호남湖南에 은퇴해 있으면서 그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말하기를, “박모朴某가 인재의 전형銓衡을 맡았으니, 청탁이 근절되겠다.” 고 하였다. 이윽고 천사天使 성헌 成憲이 왔을 적에도 공이 재차 원접사가 되었는데, 그에게 존중받은 것 역시 구공歐公 때와 같았다.
임신년에는 우의정이 되었는데, 그해에 새 천자天子가 즉위하였으므로 공이 진하進賀하러 경사京師에 조회 가니, 중국 사람들이 본래부터 공의 우아한 재능을 들어 왔던 터라, 연도沿道에서 제題를 요구하는 자가 매우 많았다. 입조入朝함에 미쳐서는, 중조中朝의 고사故事에 진주進奏하러 온 외국인들에게는 모두 협문挾門을 통해서 들어가도록 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자 공이 쟁론하여 말하기를,
“배신陪臣의 출입에 대해서는 이미 명령을 들었거니와, 표문表文의 경우는 주어奏御의 존엄함이 있는데 어찌 협문을 통해서 들어가야 한단 말인가.” 하니, 예부禮部에서 힐난할 수 없어 정문正門으로 들어가도록 허락하고 마침내 이를 정식定式으로 삼았다. 관館에 머물 적에는 예부 주사禮部主事가 개시開市에 관하여 묻자, 공이 말하기를, “과군寡君은 무화貿貨할 것이 없는데, 무엇하러 개시를 하겠는가.” 하니, 중국 사람들이 공을 칭찬하였다.
영정왕비榮靖王妃의 상喪 때에는 유사有司가 의논하여 숙질叔姪간의 복服을 입도록 하자, 공이 건의하여 말하기를, “상께서 자전慈殿에 대해서는 계체繼體의 의리가 있으니, 의당 삼년복을 입어야 합니다.” 하니, 선종宣宗이 그 의논을 가상하게 여기어 따랐다.
경진년에는 본직本職으로 내의원內醫院을 겸관兼管하였는바, 하루는 선종이 갑자기 병이 나서 공이 급히 대궐로 달려가 보니, 병이 이미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다. 이때 공이 좌상左相 노수신盧守愼과 함께 들어가 뵈니, 상이 공의 손을 잡고 이르기를, “불행하여 병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후사後嗣를 정하지 못할 듯하다. 자식들이 모두 어리니 공들이 애써 조호調護해야 한다.” 하였다. 그러자 노수신이 그지없이 슬피 울므로, 공이 그를 돌아보고 그리 못 하게 하면서 말하기를, “삼가서 그러지 말라.” 하고, 이에 나아가서 천천히 위로하였다. 그런데 이때 경황이 없어 여러 의원들이 둘러 앉아서 보기만 하고 감히 약을 쓰지 못하므로, 공이 급히 약을 가져오게 하여 올리니, 마침내 서서히 소생 되었다.
이에 앞서 공이 일찍이 경연經筵에서 북도北道의 기흉飢凶에 관하여 의당 사전에 대비해야 한다는 것을 역설하면서 두어 가지 계책을 내놓자, 사람들이 오활한 말이라고 여겼었는데, 계미년의 변란에 미쳐 군량이 핍절되어 징수할 수 없게 되자, 비로소 공의 원대한 견식에 복종하였다. 그리고 공이 율곡栗谷 이이李珥와 함께 묘당廟堂에서 국사를 꾀하여 남긴 계책이 없이 다 들어 시행하니, 선종이 이를 가상하게 여기어 특명으로 판병조사判兵曹事를 겸하게 하였다. 공이 일찍이 태복시제조太僕寺提調 및 겸병조兼兵曹가 되어서는 두 기관에서 들어오는 추치騶直를 모두 사제私第로 들여오지 못하게 하였는데, 청렴에 관한 한 가지 행실쯤이야 공에게 경중輕重이 되기에는 부족하지만 바로 공의 천성이 그러했던 것이다.
율곡栗谷이 탄핵을 받고 돌아감에 미쳐서는 우계牛溪 성혼成渾이 상소하여 율곡을 구해救解하자, 상上이 성혼의 상소의 시비是非 및 이이의 죄의 유무有無에 대하여 대신에게 물으니, 공이 으뜸으로 말하기를, “시인時人들이 이이와 사이가 좋지 않아서 그를 탄핵하여 제거하려고까지 한 것이니, 이것은 공론이 아닙니다.” 하였다. 그러자 상이 명하여 언자言者를 유배시키니, 시론時論이 크게 격동하여 심지어는 양사兩司가 서로 상소해서 당黨을 비호한다는 것으로 공을 탄핵하여 10가지 죄목을 나열하였으나, 상이 이르기를, “박모朴某는 송균松筠 같은 절조와 수월水月 같은 정신을 지녔다.” 하고, 굳게 고집하여 윤허하지 않았다.
공은 이로 인하여 조정에 있기를 불안하게 여기고 강사江舍로 물러가 있었다. 그러자 상이 의원을 연달아 보내서 문병하고 식물食物을 계속하여 내렸으며, 유사에게 명하여 공이 받지 않은 녹봉을 보내고 출사하도록 돈유敦諭하니, 공이 가엾은 마음으로 도성都城으로 들어갔으나, 대간의 탄핵이 재차 발발하므로 다시 강상江上으로 돌아갔다.
병술년에는 휴가를 청하여 한천寒泉에 목욕을 하러 가자, 상이 중사中使를 보내어 동도문東都門 밖으로 술을 사송賜送하고 호초胡椒와 호피虎皮를 특별히 하사하였다. 공은 인하여 영평현永平縣의 백운계白雲溪 가에 집을 짓고 살면서 시사時事에 대해서는 전혀 말하지 않고 조용히 세속을 초월한 생각이 있어, 날마다 낚시질하고 약초나 캐는 것을 일삼으면서 간혹 풍월風月도 읊곤 하였다. 그리고 촌맹 야로村氓野老들이 술병을 가지고 찾아오면 흔연히 마주 앉아 마시어서 마치 전혀 서로 허물이 없는 듯하였고, 학도들이 와서 글을 강론할 적에는 매양 춥고 더운 것도 잊었다.
공이 사는 곳에는 배견와拜鵑窩, 이양정二養亭, 백운계白雲溪, 청랭담淸冷潭, 토운상吐雲床, 창옥병蒼玉屛 및 산금대散襟臺, 청학대靑鶴臺, 백학대白鶴臺 등의 명호가 있었다. 그런데 흥치가 나면 혹 일마 일동一馬一僮을 데리고 산수山水 사이를 거침없이 돌아다니어 금강산金剛山, 백운산白雲山 등 여러 산들을 마음대로 유람하면서 오만한 자태로 돌아가기를 잊기도 하였다. 그러자 상이 공에게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뜻이 있음을 알고 의원을 보내서 문병을 하고 세 차례나 하교하여 돌아오기를 재촉하였으나, 완강히 들어앉아서 나가지 않았다.
그러다가 하루는 아침에 일어나서 하염없이 시(詩)를 읊다가 베개에 기대 신음을 하며 마치 몸이 편치 않은 데가 있는 듯하였는데, 고 부인高夫人에게 말하기를, “나는 이제 갈 것이다.” 하더니, 이윽고 갑자기 작고하였다.
이해가 기축년 7월 20일이니, 향년이 67세였다. 속광屬纊을 함에 미쳐서는 천둥이 치며 비가 내리었고, 그날 밤에는 백기白氣가 하늘에 가득 차서 그 광망光芒이 땅에 비추어 밝기가 마치 밝은 달빛과 같았으므로, 산민山民들이 그것을 바라보고 놀라며 의아하게 여겼는데, 아침에 그 까닭을 추적해 보니 공이 과연 작고했었다. 이해 9월에 치명治命을 따라서 종현산鍾賢山 동쪽 지맥支脈 경좌 갑향庚坐甲向의 언덕에 예장禮葬하였다.
공은 고씨高氏의 딸에게 장가들어 1녀를 낳아서 군수郡守 이희간李希幹에게 시집보냈고, 측실側室에서 낳은 아들은 응서應犀이다. 희간은 2남 1녀를 낳았는데, 큰아들은 강茳이고 다음은 협莢이며, 딸은 사인士人 윤기파尹起坡에게 시집갔다. 강은 별좌別坐 목수흠睦守欽의 딸에게 장가들어 1녀를 낳았고, 협은 홍책洪策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을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고 부인은 공보다 16년 뒤에 작고하였는데, 유순하고 얌전하고 청렴하고 신중하여 공의 덕과 잘 배합되었다.
공은 일찍부터 학문하는 방도를 알아 화담 선생花潭先生에게서 수학하여 성리性理의 설說을 들었고,《주역周易》에는 더욱 조예가 깊어서 총명이 이른 곳에 고색考索하는 것이 정밀하고 심오하여 그 스스로 깨달아 터득한 힘이 더욱 많았다. 자람에 미쳐서는 마침내 군서群書에 크게 힘을 쏟아서《노자老子》,《장자莊子》, 도가道家, 불가佛家의 서적과 한漢, 진晉 이하 백가서百家書에 이르기까지 모두 꿰뚫어서 두루 알지 못한 것이 없었다. 그리고 시詩에 더욱 뛰어나 선천적인 격조가 맑고 고우며 생각이 높이 뛰어나서 유독 원화元和 연간의 원진元稹, 백거이白居易의 정파正派를 체득했는데,《사암집思菴集》이 세상에 행해져서 나무꾼이나 하인들까지도 모두 능히 외워 읊곤 한다.
중년에는 퇴계 선생을 섬기어 계발啓發된 바가 많았는데, 퇴계가 만년에는 도산陶山에 있으면서 항상 공을 칭찬하여 말하기를, “박모朴某와 서로 마주해 있노라면 시원하고 깨끗하기가 마치 한 조각 청빙淸氷과 같아서 정신이 갑자기 상쾌해짐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남쪽으로 내려온 이후로도 그지없이 생각이 난다.”하였고, 기고봉奇高峯 또한 말하기를, “의리義理를 분석하여 밝게 분변해서 아주 적절하게 하는 것은 내가 미치지 못하는 바이다.” 고 하였다.
만년에는 우계牛溪, 율곡栗谷 두 선생과 막역한 친구가 되었는데, 일찍이 우계가 명을 받고 도성에 들어왔다는 말을 듣고는 기뻐하여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우리 임금도 또한 호걸지주豪傑之主가 아니겠는가. 그물을 촘촘하게 얽어서 끝내는 우옹牛翁을 그물에 담아 왔도다.” 하였으므로, 당시에 이 말을 서로 전하여 미담美談으로 삼았다.
계미년의 화禍가 일어남에 미쳐서는 논하는 자가 공이 우계, 율곡과 서로 좋게 지낸다 하여 심지어는, “박순朴淳은 곧 이이李珥이고 이이는 곧 성혼成渾이니, 끝내 이 세 사람은 외모만 서로 다를 뿐, 마음은 한가지이다.” 고까지 하였다. 그러자 상이 이르기를, “선류善類끼리 서로 종유하는 것이야 도道에 무슨 손상될 것이 있겠는가. 옛날에 송 효종宋孝宗이 ‘나는 바로 주희朱熹의 당黨이다.’ 라고 하였으니, 지금은 나를 이이, 성혼의 당이라고 하면 좋겠다.”고 하였으니, 그 존중을 받은 것이 이러하였다.
공이 일찍이 조그마한 서재를 지어 쌍취雙翠라 편액扁額을 써서 걸고, 새벽부터 그곳에 나가 거처하면서 종일토록 책상을 대하여 앉았으되, 관대冠帶를 반드시 바르게 하고 의용儀容을 반드시 가다듬어서 엄연히 신명神明을 대하는 것처럼 하여, 심오한 뜻을 조용히 연구해서 얻은 것이 있게 되면 문득 기뻐하여 안색이 활짝 펴졌다.
공을 처음에 바라보면 다만 말끔하여 얼음이나 거울처럼 느껴질 뿐이지만, 가까이 나아가 보면 화기和氣가 사람을 엄습하여 평탄하고 즐겁고 편안함을 느끼게 되고, 종일토록 모난 행위가 있음을 볼 수가 없었다. 공이 일찍이 말하기를, “성인聖人의 학문을 다른 데서 찾을 것이 아니요, 일상 생활 속에서 도저하게 이치를 따르는 것이 바로 이 도道인 것이다. 그러나 만일 먼저 그 이치를 밝히지 않으면 또 어떻게 처사處事의 바름을 얻을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격물格物, 치지致知의 순서가 수신修身의 앞에 있게 된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 남에게 선善이 있는 것을 보면 나이도 잊고 흉금을 다 토로하여 사귀어서 자신의 나이나 지위를 따지지 않았다.
공은 15년 동안 상부相府를 출입하면서 오직 대대로 내려온 전답만을 착실하게 지켜 왔을 뿐, 일찍이 1묘畝의 토지도 더 보탠 적이 없었다. 그리고 주군州郡에서 문안하고 선물을 보내 오는 경우에는 그가 친구가 아니면 감히 받지 않았고, 아는 이들이 방문했을 때는 기거起居를 묻는데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러나 대의大議를 임하거나 대계大計를 정하는 데에 이르러서는 논의가 바람이 일듯 힘차게 나오는데다 유아儒雅한 품이 곁들여져서 누구도 그 의지를 대항하여 빼앗을 수 없었다. 옛말에 이르기를, “인仁한 사람은 반드시 용맹이 있다.”고 하였으니, 바로 공을 두고 이른 말인가 보다.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朴公行狀
公諱淳。字和叔。姓朴氏。自號思庵。其先忠州人也。初進士公生三男。禎,祥,祐。禎。有文章早世。祥。卒官通政。有集行于世。世所謂訥齋先生者也。祐。進士壯元及明經第一。家文行世。難爲兄弟矣。娶棠岳金氏女。以嘉靖癸未十月生公。公生而穎異。色夷氣淸。六歲。金夫人亡。養於庶母。與群兒戱。爲揖讓周旋之容。及知學問。刃迎縷解。不煩提諭。月開日益。年甫八歲。開口咏物。吐辭驚人。隣有訓蒙者。却不敎曰。吾敢爲爾師哉。及己卯禍起。左尹公惧不免。惟日飮以自晦。一日乘醉。命公爲飮酒詩。公應唯成章。左尹吐舌曰。老膝當屈。十八。陞上庠。丁未。左尹捐館。公水漿不入口者三日。過初朞猶啜粥。盡三年廢書不敢讀。廬墓之下。毁瘠疑死。杖而後起。吊者大悅。服闋。入山讀書。踰年而返。癸丑八月。首選庭試。明廟親試一經。公神姿爽朗。擧止雍容。辨釋奧義。應對精敏。群臣目屬。卽賜第第一。授成均館典籍。華聞彌彰。先輩皆折輩行爲交。自是歷工,兵,吏三曹佐郞,弘文館修撰,校理,吏曹正郞,議政府檢詳,舍人。仍賜暇讀書堂。其在玉堂。議林百齡諡。時領議政尹元衡。以同盟舊勳。當路柄用。乙巳餘孽。恃之爲城社。勢方仇視直言士。公入館察同僚。皆刦刦有內顧色。盖褒固可羞。貶輒挑禍。擧依違兩端。故延其事。公奮然議上曰。恭昭。按諡法。旣過能改曰恭。容儀恭美曰昭。貶之也。元衡見卽喑噫。倡言於朝曰。彼百齡。國之元勳。諡無忠字。意在叵測。遂啓請鞫致公罪。於是群兇附麗。方怒目視公。固已耽耽矣。中外洶洶。謂駭機朝夕當發。賴安玹力救。只得免官歸。初公聞禍發。將待金吾。入室更衣。坦坦而去。家人不知有事。及免官敀家。幼女出迎。公執手笑曰。幾不得復見汝矣。翌日。歸羅州。壬辰。除韓山郡守。每衙罷。輒處松亭。課日讀書。傍郡學子。聞風坌集者踵相接。期年而一境父母之。明年。徵爲成均館司成。未至。逆拜侍講院輔德。遷司憲府執義。甲子。由弘文館直提學。陞同副承旨。乙丑。以吏曹參議。移長諫院。慨然曰。劾冀斬憲。挽回世道。吾責也。死職耳。因訪大司憲李鐸曰。吾欲正元衡罪。須公贊成。鐸縮頸曰。公欲赤老夫族耶。公徐譬之。鐸許之。公喜甚馳還。不暇解衣。取燭草彈辭。翌日。兩司並劾。明廟不忍於母后。遅徊者月餘。公爭之愈力。竟得惟允。元衡旣逐。左議政沈通源。猶居政府。士心頗欝。亦相繼而黜。百姓歌舞於道。鄕閭之挾書爲儒者。稍益發舒。始乃公言父子君臣之道。咸知順此則爲君子。逆輒危辱不齒。沛然有嚮道之志。引領而拱竢者群興焉。於是選六行之士。復枉死之官。凡舊政之蠧國病民者。一皆洗滌。而退溪,南溟。倡於嶺外。孤峯,大谷。興於湖中。牛,栗諸賢。次第繼起。爲之後焉。而張本之者。皆公之力也。自是超遷。爲大司憲兼大提學。公又嫉當時文體尙浮薄。欲力變陋習而澡雪之。論文章則首以班,馬,韓,柳,李,杜爲本。論道學則又以小學,心經,近思錄爲階梯。無何。退溪還山。高峯繼逝。先輩後進之間。士論亦隨以携貳。丁卯。明廟禮陟。卒哭之前。公處外不敢居內。及後連遭懿聖,恭懿兩大妃喪。持是禮不變。明年。中朝學士歐希稷奉詔而來。公以禮曹判書。爲遠接使。姿容淸雅。率禮無愆。詔使已心內起敬。及見公詩。驚曰。宋人物唐詩調也。吾輩斯强顔耳。庚午。移判吏曹。時宋四宰純。退老湖南。聞而喜之曰。朴某秉銓。關節絶矣。已而。成天使憲之來。公再爲遠接使。見重如歐公時。壬申。拜右議政。其年新天子卽位。公朝京進賀。華人素聞雅才。沿道索題者甚衆。及入朝故事。外國進奏者。率令由挾門入。公爭曰。陪臣出入。旣聞命矣。若表文則奏御之尊。豈宜由挾門。禮部不能難。許入正門。遂爲定式。留館日。禮部主事問開市。公曰。寡君無所貿貨。開市何爲。華人稱之。榮靖王妃喪。有司議行叔姪之服。公建議以爲上於慈殿。有繼體之義。當服三年。宣宗嘉其議。從之。庚辰。以本職兼管內醫院。一日。宣宗暴疾。公馳詣闕。則疾已惟幾。公與左相盧守愼入見。上執手曰。不幸病至此。恐不獲誓言嗣。諸子皆幼。煩公等調護。守愼悲泣不自勝。公顧止之曰。愼勿爾也。乃進而徐譬之。時倉卒。諸醫環視不敢下藥。公遽呼藥以進。遂得徐蘇。先是。公於經筵。力言北道飢凶。當先事綢繆發數策。人以爲迂。及癸未之變。軍興乏粮。始服公遠見。公與李栗谷珥。籌猷廟堂。擧無遺策。宣宗嘉之。特命兼判兵曹事。公甞爲太僕提調及兼兵曹。兩司騶直。皆不許入私第。氷檗一節。未足爲公之重輕。而卽其素性然也。及栗谷被彈歸。成牛溪渾上章救解。上問大臣以渾䟽是非及珥罪有無。公首言時人與珥不相能。至欲劾去。非公論也。上命竄言者。時論大激。至於兩司交章。劾公以護黨。數其十罪。上曰朴某松筠節操。水月精神。執不允。公因是不安於朝。退處江舍。上醫問交道。饋遺絡繹。命有司官致其所不受祿。敦諭出仕。公愍然入城。臺彈再發。復歸江上。丙戌。乞暇就浴于寒泉。上遣中使。宣醞于東都門外。特賜胡椒虎皮。公因卜築于永平縣白雲溪上。絶口不道時事。蕭然有出塵之想。日事釣採。間以吟嘯。村氓野老。挈榼相就。欣然對飮。若將爭席。學子來講。輒忘寒暑。所居有拜鵑窩,二養亭,白雲溪,淸冷潭,吐雲床,蒼玉屛及散襟,靑鶴,白鶴臺等名號。興至。或一馬一僮。放迹山水。漫遊金剛,白雲等諸山。傲然忘歸。上知公有長往之志。遣醫問疾。下敎促還者三。而固卧不起。一日朝起。咏詩不輟。忽倚枕呻吟。如有不安節。謂高夫人曰。我其逝矣。俄倐爾而乘化。是歲己丑七月二十日。享年六十七。及屬纊。天雨雷鳴。其夜白氣漫天。光芒燭地。晃若明月。山民望之驚訝。朝而蹤迹。則公果卒矣。以九月。用治命。禮葬於鍾賢山東支庚坐甲向之原。公娶高氏女。生一女。適郡守李希幹。廁室子曰應犀。希幹生二男一女。長曰茳。次曰莢。女適士人尹起坡。茳娶別坐睦守欽女。生一女。莢娶洪策女。生四男皆幼。高夫人。後公十六年而卒。柔閑淸愼。克媲公德。公早知爲學之方。受學於花潭先生。得聞性理之說。尤邃於易。明睿之至。考索精深。而其悟透自得之力爲尤多。及長。遂大肆力於群書。以至老,莊,道,佛之語。漢,晉以下百家之書。靡不貫穿而周知。尤長於詩。天格淸婉。意悟冲邁。獨得元和正派。有思庵集行于世。樵廝皆能諷之。中年事退溪先生。多所啓發。退溪晩年在陶山。常稱與朴某相對。泂如一條淸氷。覺神魂頓爽。故南來以後。念之不置。奇高峯亦言剖析義理。明辨剴切。吾所不及。晩與牛,栗兩先生。定爲莫逆友。甞聞牛溪承命入城。喜語人曰。吾王不亦爲豪傑之主乎。密密結網。畢竟能網得牛翁來矣。時傳以爲美談。及癸未禍起。論者謂公與牛,栗相善。至稱淳卽珥。珥卽渾。終始三人。貌異而心一。上曰。善類相從。何傷於道。昔宋孝宗言我是朱熹之黨。今以予爲珥,渾之黨可也。其見重類此。甞構小齋。扁曰雙翠。辨色而處外。終日對案。冠帶必正。儀容必飾。儼然對越。游泳有得。則便欣然色敷如也。始焉望之。只瑩然氷鑑矣。卽之覺和氣襲人。平坦樂易。終日不見有崖異之行。甞言聖人之學。不可他求。日用行事。到底順理。卽此是道。然若不先明其理。又何以得事之正也。此格致之序。所以居修身之先也。見人有善。輒忘年倒廪。爲交屛所挾。爲出入相府十五年。唯謹守世業田。未甞增一畒。州郡問遺。非親舊。不敢受。所識問訊。不過起居而已。至臨大議定大計。論議風發。飾以儒雅。莫能抗奪。古云仁者必有勇。其謂公乎。
[주1] 성사(城社) : 사람이 함부로 손댈 수 없는 성 안에 사는 여우와 사당에 사는 쥐 [城狐社鼠] 라는 말에서 온 것으로, 호서(狐鼠)는 임금 곁에서 알랑거리는 소인(小人)을 비유한 말이고, 성사(城社)는 바로 임금을 비유한 말인데, 전하여 여기서는 곧 정권을 잡은 윤원형에게 소인들이 서로 아첨하여 의지한 것을 이른 말이다.
[주2] 기(冀)를 …… 베어 죽여서 : 기(冀)는 후한(後漢) 때 두 누이가 순제(順帝)와 환제(桓帝)의 후비(后妃)가 됨으로 인하여 대장군(大將軍)이 되어 발호(跋扈)를 극도로 부리다가, 심지어는 질제(質帝)를 시해하기까지 했던 양기(梁冀)를 가리키고, 헌(憲)은 역시 후한 때 누이가 장제(章帝)의 후비가 됨으로 인하여 역시 대장군이 되어 권세를 독차지하여 교만 방자한 행위를 그지없이 자행했던 두헌(竇憲)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바로 조선 명종(明宗)의 외삼촌인 윤원형(尹元衡) 일당의 발호를 양기와 두헌에 비유하여 한 말이다.
출전 : 한국고전번역원 임정기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