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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기(雜記)
정희량(鄭希良)은 박학하고 문장에 능하였으며 《주역(周易)》을 잘 알고 수리(數理)에 밝았다. 성품이 드높고 깨끗하여 뜻이 맞는 사람이 적었는데, 과거에 급제하여 한림(翰林)을 지냈다.
37세에 어버이의 상을 당하자, 풍덕현(豐德縣)에 여막(廬幕)을 짓고 거처하였다. 수리를 미루어 점을 잘 쳐서 위로 천문(天文)을 관찰하고 아래로 인사(人事)를 살펴 세상이 장차 혼란해질 것을 알고는 몸을 숨겨 멀리 떠나고자 하였는데, 왕래하는 산사(山寺)의 승려가 있어서 서로 계책을 정하였다. 그러고는 때때로 홀로 산에 올라가 뒷짐을 지고 배회하다가 돌아와 눈물을 흘리곤 하니, 집의 종들은 어버이를 그리워하여 그러는 것이라고 여겼다.
5월 5일 승려가 오자 정희량은 노복에게 멀리 나가서 나무를 해 오게 하고는 곧 승려와 함께 도망갔다. 저녁이 되어 사람들이 돌아와 정희량을 찾아 조강(祖江)의 백사장으로 가 보니, 다만 상주(喪主)가 쓰는 두건과 신, 지팡이만 있을 뿐이므로 그가 물에 빠져 죽은 것이라고 여겼다.
수십 년이 지난 후에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 선생이 경기 관찰사가 되어 역루(驛樓)에 머물고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벽에 시를 써 붙여 놓기를 “전날 몰아치는 비바람에 놀라 문명(文明)한 이 시대를 저버렸다네. 외로운 지팡이로 우주 사이를 놀러 다니니, 시끄러움을 혐의하여 함께 시도 짓지 않는다오.[風雨驚前日 文明負此時 孤笻遊宇宙 嫌鬧並休詩]” 하였는바, 먹물이 채 마르지 않았다. 선생이 크게 놀라 역리(驛吏)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조금 전에 운납 노승(雲衲老僧)이 사미승(沙彌僧) 둘을 데리고 이 역루에 올라 시를 읊고 구경하였습니다. 관인(館人)이 손을 저어 물러가게 하였으나 가려고 하지 않더니, 사또를 모시는 마부와 깃발을 바라보고는 서서히 역루에서 내려왔습니다.” 하였다. 모재 선생은 이 사람이 정희량이라는 것을 알고는 급히 기사(騎士)들을 풀어 사방으로 찾았으나 찾지 못하였다.
모재 선생이 뒤에 한 절에 갔다가 벽 사이에 써 붙인 시를 보니, “새는 무너진 집 구멍에서 엿보고 승려는 석양에 샘물을 길어 온다.[鳥窺頹院穴 僧汲夕陽泉]”는 시구가 있었는바, 또한 정희량이 아니면 지을 수 없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의 얼굴과 거처하는 곳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것이 없었으니, 당(唐)나라 때의 낙빈왕(駱賓王)과 같았다.
정희량은 아내를 얻었으나 멀리하여 얼굴조차 보지 않았는데, 그 아내는 늙자 단옷날을 기일로 삼고 남기고 간 갖옷을 묻어 무덤으로 삼아 지금까지 제사하고 있다고 한다. -선생이 젊었을 때에 지은 것이다.
신미년(1571, 선조4) 9월 안습지(安習之)와 천마산(天磨山)에 놀러 갔다가 영통사(靈通寺)에서 유숙하였다. 아침에 일어나 시냇물을 따라 내려오니, 산이 감싸고 골짜기가 굽이돌았으며 수석이 깨끗하고 그윽하였다. 화담(花潭)에 이르니, 초가 몇 칸이 있었는데 황폐한 동산과 작은 길을 거의 분간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걸어서 뒷산에 올라가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선생의 묘소에 절하였는데, 봉분이 겨우 몇 자였고 흙계단에 섬돌도 없었으며 묘 앞에 세운 작은 비석에는 ‘생원서모지묘(生員徐某之墓)’라고 새겨져 있었다. 두 번 절하고 일어나 배회하고 바라보며 선생의 높은 풍모(風貌)를 우러러 생각하고 서글프게 한없이 사모하였다.
가랑비를 만나 초막에 들어가니, 이 집은 선생이 옛날 거처하던 곳이 아니고 무너져서 뒤의 채전(菜田)으로 옮겨 세운 것이었다. 벽 너머에 계집종 하나가 거처하며 지키고 있었으므로 내가 “선생은 아들을 몇 명이나 두셨는가?” 하고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정실부인에게서는 아들 하나만 보았고 첩의 아들이 또 두 명 있습니다.” 하였다. 그녀가 또 말하기를, “선생이 별세한 것은 병오년(1546) 7월이었는데, 병이 위독해지자 모시는 자들로 하여금 떠메게 하여 못가로 나오시어 깨끗이 목욕하시고 집으로 돌아왔다가 한 식경(食頃)이 지나 별세하셨습니다.” 하였다. 내가 “어찌하여 목욕을 하셨는가?” 하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현자가 별세할 때에는 반드시 이와 같이 하여야 하니, 이것은 임종을 바르게 하는 뜻입니다.” 하였다. 나와 안습지는 서로 돌아보고 감탄하며 “하찮은 계집종도 오히려 이러한 의리를 들어 알고 있으니, 유풍(流風)과 여운(餘韻)을 참으로 지금까지도 증거할 수 있다.” 하였다.
비가 개었으므로 못가로 나가니, 모두 낚시할 수 있는 돌들이 못가에 높이 있었으며, 혹은 못의 중심에 있기도 하였다. 물과 돌이 깨끗하고 작은 산이 감싸고 있었는데, 가을 낙엽이 쓸쓸하였다. 낚싯돌 위에는 두 군데 구멍이 뚫려 있었는데, 사람들이 말하기를, “선생이 일산(日傘)을 펼칠 때 쓰시던 곳으로 일 만들기 좋아하는 자가 선생을 위하여 뚫은 것이다.” 하였다. 돌 위에는 이끼가 두껍게 끼었으며 산은 휑하니 비어 있고 물만 흐르는데 선생을 그리워하나 다시 만날 수가 없으니, 덕을 상고하고 세대를 논하는 감회를 이에 그칠 수가 없었다.
선생은 세상에 드높은 재주로 성현의 경전(經傳)에서 도(道)를 구하여 음미하고 즐거워하며 스스로 지키고 밖에서 구함이 없었다. 추위와 굶주림이 극심하여 며칠 동안 밥을 먹지 못하고 한 벌의 무명옷으로 몸을 가릴 지경에 이르니, 다른 사람들은 그 근심을 감당하지 못하였으나 선생은 바야흐로 태연하게 거처하며 도의(道義)의 진리를 함영(涵泳)하여 덕스러운 모습이 얼굴과 몸에 나타나고 집 안에 충만하여 남들의 고량진미를 원치 않았다. 그러하니 조예가 깊어 스스로 터득한 공부가 가슴속에 쌓여서 외면에 나타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어찌 한 절조를 지닌 선비와 이름을 듣고 사모하는 무리들이 헤아리고 흉내 내어 얻을 수 있는 바이겠는가. 도(道)에 대한 조예의 순수와 하자, 깨달음의 깊고 얕음에 대한 것은 옛날을 회상하는 이날에 우선 제쳐 놓고 따지지 말아야 할 것이다.
고비(皐比)의 자리를 거둔 지 아직 한 세대도 못 되었는데, 옛집에는 사람이 살지 않고 지나간 묵은 자취는 모두 묻혀서 차가운 산과 들판의 해만 남아 거의 물을 곳이 없게 되었다. 지나는 선비들이 황량한 산기슭에서 선생의 유풍을 되새기면 여전히 완악한 자가 청렴해지고 나약한 자가 입지(立志)하려는 마음을 일으키게 하기에 충분하니, 깨끗한 풍도(風度)와 드높은 법(法)으로 후세 사람들을 감동시켜 인심을 선하게 함이 참으로 깊다. 아, 원대하도다.
창녕 성혼은 삼가 쓰다.
내 고조의 재종형제(再從兄弟)이신 -자주(自註)에 “누가 형이고 아우인지는 알지 못한다.” 하였다.- 교리(校理) 성희(成熺)가 성삼문(成三問)의 일에 연루되어 일생을 금고(禁錮)로 마치셨다. 그 아드님이신 진사 담수(聃壽)는 지극한 성품과 높은 식견이 있어서 부친의 묘소 아래에 은거하였는데, 삼베옷과 거친 밥으로 태연히 거처하였다. 일찍이 한 번도 서울에 이른 적이 없으며 또한 이름난 세족(世族)의 후손임을 스스로 나타내지 않았으므로 마을 사람들이 그를 농부처럼 여겼다.
그의 조카인 성몽정(成夢井)이 경기 관찰사가 되어 순행차 본주(本州 파주(坡州))에 이른 다음 영(令)을 내려 찾아뵈려 하였으나 고을 사람 중에 그의 소재(所在)를 아는 자가 없어 한동안 물색한 뒤에야 찾아내었다. 그의 집에 이르니, 초가집이 쓸쓸하여 바람과 햇볕을 가리지 못하고 흙으로 만든 방바닥에 겨우 무릎이 들어갈 만한 공간이어서 손님이 앉을 자리가 없었다. 몽정은 탄식하고 떠나갔는데, 집에 돌아가 방석 열 개를 보내 주었다. 그러자 담수는 손을 저으며 받지 않고 말하기를 “이 물건은 빈천한 사람의 집 안에 합당하지 않다.” 하였다.
이 당시 죄인(罪人)의 자제들에게 으레 참봉을 제수하여 거취를 관찰하였는데, 모두들 머리를 숙이고 봉직하였으나 담수는 끝내 사은숙배하지 않았다. 매씨(妹氏)가 있었는데 살 집이 없자 자기 집을 팔아 집을 사서 주었으니, 이 내용이 《청파집(靑坡集)》에 기록되어 있다.
성품이 시 읊기를 좋아하여 붓을 잡으면 즉시 완성하곤 하였으며 강가에서 고기를 낚고 구름 속의 달을 좇아 유유자적하니, 사람들은 그 속내의 깊음을 알지 못하였다. 일찍이 시를 짓기를 “낚싯대 잡고 하루 종일 강가에 나아가 창랑에 발 담그고 곤하게 한 번 졸았네. 꿈속에 백구와 함께 바다 멀리 날았건만 꿈을 깨니 몸은 석양 하늘에 있구나.[把竿終日趁江邊 垂足滄浪困一眠 夢與白鷗飛海外 覺來身在夕陽天]” 하였다.
파산(坡山)의 남곡(南谷) 장포(長浦)의 위 두문리(斗文里) 서쪽 기슭에서 살았는데, 늙기도 전에 일찍 별세하였다. 세 딸을 두어 김사기(金士奇), 조봉손(趙鳳孫), 이계종(李繼宗)에게 출가하였는데, 조봉손은 바로 상사(上舍) 신광필(申光弼)의 외증조(外曾祖)이다. 정축년 5월에 성문덕 이현(成聞德而顯)이 우계(牛溪)로 찾아와서 나에게 이와 같이 말하였으니, 성군(成君)의 증조인 교리 담년(聃年)은 바로 담수의 아우이시다.
10월 26일에 신자방(申子方)이 와서 바깥채에서 우거(寓居)하였다. 그는 올 때에 벽제(碧蹄)에 있는 최효원(崔孝元 최영경(崔永慶))을 방문하였는데, 최효원은 남명(南冥)의 병통을 말한 나의 잘못을 강력히 말하고 또 이르기를, “일찍이 남명 선생의 학문을 알지도 못하고 또한 선생의 얼굴을 뵙지도 않고서 가볍게 함부로 비방하니, 이 어찌 마땅히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퇴계(退溪)를 너무 지나치게 추존함은 인심(人心)과 세도(世道)에 우선 큰 해가 없겠지만 남명을 지나치게 얕잡아 봄은 어찌 인심과 세도의 큰 해가 되지 않겠는가.” 하면서 모두 수백 마디의 말을 하였는데, 울분을 터뜨리고 한탄해 마지않았다고 하였다.
내가 생각해 보니, 지난여름 양홍주(梁弘澍)가 우계서당(牛溪書堂)에 와서 책을 읽으면서 함께 이야기하던 차에 남명 선생의 학문을 말하면서 퇴도(退陶) 선생보다 훨씬 더 추존하였다. 이에 내가 그에게 이르기를, “퇴도는 학문이 매우 심오하니, 남명의 학문은 이만 못한 듯하다. 퇴도의 학문은 오로지 주자(朱子)를 종주(宗主)로 하여 법문(法門)이 매우 올바르니, 후학들이 퇴도를 배우면 의거할 곳이 있다. 남명의 높은 절개는 사람들이 따를 수 없으나 그의 언론(言論)과 풍지(風旨)를 보면 적절하지 않은 부분이 있으니, 배워서는 안 될 듯하다.” 하고는 인하여 내가 들은 남명 언론에 있어서 종용(從容)함이 부족한 몇 가지 점에 대해서 말하고, 또 이르기를, “일을 열거하여 책하는 것은 다만 이러한 의심이 있어서일 뿐이니, 장문중(臧文仲)에게 지혜롭지 못한 점 세 가지가 있다는 것이 이것이다.” 하였다. 양홍주는 나의 말을 듣고 몹시 심기가 불편하였던지라 최효원에게 말을 전하기를 이와 같이 한 것이며, 또한 말을 전하는 과정에서 지나친 부분이 있었던 듯하다. 그러므로 최효원이 나를 이와 같이 꾸짖은 것이다.
나는 즉시 최효원에게 편지를 써서 사죄하기를, “나의 소견이 이와 같으므로 그때 말한 것이 이와 같았습니다. 다만 선배들을 가볍게 논함은 어찌 큰 죄가 아니겠습니까. 말세의 풍속이 올바른 사람을 함부로 비판하여 제멋대로 비난하고 꾸짖는 자가 많은데, 나 또한 남명 선생을 함부로 논하여 바르지 못한 풍조를 도왔으니, 진실로 큰 죄입니다.” 하였다.
내가 또 들으니, 용강현(龍岡縣)의 읍재(邑宰)인 민장(閔丈)이 부임할 때에 남시보(南時甫)가 털옷을 보내며 말하기를, “추운 겨울 북쪽 길을 가시기에 삼가 드리는 것입니다.” 하였다. 그러나 민장은 사양하고 받지 않으며 말하기를, “내 일찍이 털옷을 입지 않았으니, 이것이 없더라도 춥지 않을 것이다.” 하였으니, 이는 남시보의 행실을 부족하게 여겨 받지 않은 것이었다. 이로 인하여 생각해 보니, 나는 물건을 사양하고 받는 데 있어 마음에 부끄러운 점이 많았다. 이에 민장의 높은 풍도(風度)를 상상해 보면 사람의 마음을 상쾌하게 하는 점이 있다.
내가 깊이 자책하기를, “앞으로는 허다한 의논을 하지 않고 수많은 이해를 염두에 두지 않은 채 오직 한결같이 병을 요양하고 자신의 몸과 마음을 위하여 깨끗이 닦고 스스로 쾌족하게 되는 것만을 힘써서 죽을 때까지 독실히 믿고 굳게 지키며 방정(方正)하게 행동하고 검약함을 지켜야 할 것이다. 선배들의 잘잘못을 안다 하여도 자세히 알지 못하고, 또 내가 이분들의 경지에 미치지 못하니, 어떻게 함부로 가볍게 의논할 수 있겠는가. 사양하고 받는 것을 한결같이 정도(正道)로써 하고, 이해를 따져 세속을 따르려는 생각을 이 사이에 섞이지 않게 해서 내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게 하여야 할 것이다.” 하였다.
28일에 묵존암 병사(默存菴病士)는 쓰다. -정축년(1577, 선조10)-
내 자신이 말을 간략하게 하지 못하고 과묵하지 못하니, 이 때문에 비방을 불러들이는 것이다. 비록 그들의 말이 심히 거짓된 것이 있으나 나는 이로 인하여 스스로 살펴 스스로 닦는 공부를 더욱 지극히 해야 할 것이다. 무인년 봄에 도성에 들어가서 또 외인의 비방을 불러들였으므로 이로 인하여 잘못을 생각하고 이것을 써서 스스로 경계하는 바이다.
4월 그믐날 쓰다. -무인년(1578, 선조11)-
김구문 기주(金耈文起周)가 개성(開城)의 유기장(鍮器匠)인 한순계(韓順繼)의 훌륭함을 말하였다. 그는 어머니를 효성으로 섬기고 유기를 부지런히 만들어서 집안을 다소 윤택하게 하였으며, 문자를 알아 간간이 책을 읽고 시를 지었는데 글이 매우 기이하고 훌륭하였다. 한 유수(留守)가 그에게 향교(鄕校)의 유생(儒生)이 될 것을 권하였으나 그는 “내가 유기를 만들지 않으면 늙으신 어머니가 굶주리시게 된다.” 하고 사양하였다.
그는 근검하고 나태하지 않았으며, 그가 만든 그릇은 모두 흠 잡을 데 없이 훌륭하였고 값을 높였다 낮췄다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기물을 사려는 자들이 그에게 다투어 왔으나 번번이 사양하고 다른 유기장들에게 나누어 주며 말하기를, “내 어찌 이익을 독점하겠는가.” 하였다.
그의 집안사람이 가난하여 살 수가 없자, 그는 자기 재산을 나누어 주고 갚을 것을 독촉하지 않았다. 그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부자가 되었으나 끝내 그 돈을 받지 않고 말하기를, “너의 가업이 이루어졌으니, 내 매우 기쁘다.” 하였다. 이러한 것을 보면 그가 어질고 효성스러운 군자임을 믿을 수 있다. 이에 이것을 기록해서 지방관들이 찾아다니며 살피고 조사하는 자료로 삼게 하는 바이다. -경진년(1580, 선조13) 3월-
8월 5일에 장성(長城)에 사는 참봉(參奉) 정운룡 경우(鄭雲龍慶遇)와 박사(博士) 변이중 언시(邊以中彦時)가 나란히 말을 타고 찾아와서 하루 저녁 유숙하고 갔다.
정군은 장성과 정읍(井邑) 두 고을의 사이에 있는 노산(蘆山)의 산중에서 경치 좋은 곳을 찾는데, 시냇물을 따라 산속으로 10리쯤 들어가면 온통 푸른 절벽이 깎아지른 듯이 서 있으며 물과 돌이 깨끗하고 그윽하였다. 채 3리를 못 가서 말에서 내려 걸어서 이곳에 이르면 북쪽과 동쪽, 남쪽은 모두 푸른 절벽이 천 길 높이로 서 있고 서쪽에는 석문(石門)이 있으며 동쪽 절벽 위에는 큰 시냇물이 흘러내려 20길 높이의 폭포가 쏟아진다. 북쪽 절벽에는 돌길이 나 있어 동쪽 절벽 위에 이를 수 있으며, 동쪽과 북쪽의 절벽은 모두 바위 하나로 되어 있는데 그 위에 돌 하나가 펑퍼짐하여 수백 명이 앉을 만하였다. 물이 이 사이로 흐르는데 옥처럼 깨끗하고 빛나서 손으로 공중에 솟구쳐 나는 물을 희롱할 수 있다.
작은 암자가 북쪽 절벽 아래에 있는데 양지바른 곳에 있어 습하지 않고 밝으며 동쪽으로 7, 8십 보 지점에 폭포가 보인다. 앞에는 시냇물이 흐르는데 그윽하고 조용하며 깨끗하고 경치가 빼어난 것을 말로 다 기술할 수가 없다. 붉은 언덕과 푸른 절벽이 마치 그림 속에 있는 듯하며 소나무와 회나무가 하늘을 찌를 듯하고 인적이 드물지만 사방의 산이 그리 높지 않아 추운 겨울이라도 암자 앞에는 눈이 먼저 녹는다. 암자의 이름은 하곡서실(霞谷書室)이고 시내의 이름은 몽계(蒙溪)인데, 이는 모두 정군이 이름 지은 것으로 정군이 거주하는 장성의 개계촌(介溪村)과는 20여 리 떨어져 있다고 한다. -신사년(1581, 선조14)-
내가 밤에 꿈을 꾸었는데, 깊은 산중에 들어가니 여러 골짝이 매우 기이하고 산봉우리들이 빙 둘러 있으며 시냇물이 맑게 멀리 흘러가고 울퉁불퉁한 흰 돌이 빙 둘러 있었다. 소나무 숲이 해를 가릴 정도인데 인적이 이르지 않고 곳곳마다 물이 흘러 물소리가 빈 산에 울려 퍼지며, 지는 해는 서산 마루에 있고, 솔바람이 솔솔 불어왔다. 내가 이것을 돌아보고 즐거워하였으나 어떤 세계인지를 알지 못하였다.
물소리와 솔바람 소리가 비록 골짝에서 들려왔으나 지극히 고요하고 적막한 본체(本體)와 아늑하고 깊은 정취(情趣)가 하도 아득하여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아득히 세상을 버리고 홀로 서 있는 생각이 들게 하여 이 몸이 말세의 더럽고 혼탁한 세상에 있는지를 알지 못하게 하였다.
나는 잠을 깨고 나서 이것을 써서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하는 바이다. 아, 옛사람 중에 세속의 망녕된 일을 견디지 못하고는 장생불사(長生不死)하여 세상을 살아가려는 소원을 가진 자가 있었으니, 나의 이 꿈 또한 무엇에 감동이 되어 화평함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있게 된 것인가 보다.
만력(萬曆) 갑신년(1584, 선조17) 겨울 모월에 병든 늙은이는 쓰다.
나는 깊은 산중에서 병을 앓아 세상과 멀리 떨어져 있었으므로 애당초 사람들과 거슬리고 어기는 일이 없었는데, 계미년(1583, 선조16) 소명(召命)에 달려가 글을 올려 삼사(三司)의 잘못을 말해서 내 스스로 풍파의 깊은 못에 달려든 뒤로는 당색으로 몰아넣어 원망하고 비방하는 말이 온 세상에 넘쳐 발디딜 곳이 없게 되었다. 더구나 젊은 날에 망녕되이 풍속을 깨끗이 맑히겠다는 희망을 가진 탓에 남의 잘못을 말하지 말라는 성인(聖人)의 가르침을 생각하지 않았으니, 말년에 경계할 줄을 알았으나 또한 미칠 수가 없다. 다만 머무는 곳마다 미움을 받아 더욱 세상에 살기가 어려움을 깨달을 뿐이다.
을유년(1585, 선조18) 초가을에 홀로 우계(牛溪)의 집에 누워 있으면서 감회를 쓰다.
병술년(1586, 선조19) 1월 14일에 목청전 참봉(穆淸殿參奉) 최운우 시중(崔雲遇時中)이 찾아와서 하루 저녁을 유숙하고 작별하였다. 최군은 임진생(壬辰生)으로 강릉(江陵)의 신리(新里)에 살고 있었는데, 바로 양양(襄陽)과 접경이었다.
집 곁의 몇 리 밖에서 한 구역의 경치 좋은 곳을 찾았는데, 이름을 향포(香浦)라 하였다. 두 산이 에워싸고 앞에 호수가 있으며 백사장과 낙락장송이 우거져 별유천지(別有天地)이니, 참으로 선경(仙景)이라 할 만하였다. 깨끗하고 아늑한 정취가 자못 경포호(鏡浦湖)보다 나으니, 이 호수는 둘레가 10리이고 경포호는 둘레가 30리라 하였다.
며칠 전에 안진백(安進伯)과 김순중(金醇仲)이 찾아와서 이틀 저녁을 유숙하며 담소하였는데, 김군이 말하기를, “지난해 4월에 금강산에 놀러 갔다가 그 김에 영동(嶺東)으로 들어가서 강릉에 이르러 경포대(鏡浦臺)에 오르니, 빼어난 경치를 말로 형용할 수가 없었다.” 하면서, 그저 감탄만 할 뿐이었다.
또 말하기를, “경포대의 바로 맞은편 바닷가에는 낙락장송이 푸르게 자라고 백사장이 눈처럼 깨끗하며 해당화(海棠花)가 붉게 피어 있는데 바라보면 그림 같은 누각 하나가 아득히 송림(松林) 사이에 은은하게 비치니, 마치 천상(天上)의 선궁(仙宮)과 같고 삼신산(三神山)의 경도(瓊島)와 같아 아득하여 오를 수가 없었다. 마침내 말을 채찍질하여 쫓아가서 호숫가를 따라 10리쯤 걸어가 그곳에 당도하니, 깨끗하고 그윽하며 쇄락(灑落)함을 형용할 수가 없었다. 이 집의 주인은 김덕장(金德璋)인데 종 한 명이 그 집을 지키고 있다가 창문을 열고 온돌에 불을 지펴 구들을 데우고 맞이해서 함께 간 자들과 그 집에서 하루 저녁 유숙하였는데, 정신이 뼛속까지 맑고 상쾌하여 신선 놀음에 도끼 자루 썩는 줄 모를 정도로 황홀하였다. 출발하려 할 적에 머뭇거리고 돌아보아 차마 떠나오지 못하고 연연해하여 열 걸음에 아홉 번은 돌아보았다.” 하였다.
내가 최군에게 김군의 이 말을 전하였더니, 그가 답하기를, “김덕장은 바로 저의 처제(妻弟)이니, 김군의 외증조(外曾祖)는 김기동(金麒仝)입니다.” 하였다. 내가 깜짝 놀라 답하기를, “김기동은 바로 나의 외조모(外祖母)의 오라비이시니, 그렇다면 김군 덕장의 아버지는 바로 나의 6촌 매부(妹夫)이시다. 경포대 가에 그림 같은 누각이 있다는 말을 처음 듣고는 신선이 거주하는 곳인가 의심하였는데, 어찌 내 외가(外家)의 친족인 줄을 알았겠는가.” 하고는 서로 웃었다.
나는 최군의 이름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는데, 이제야 비로소 만나 흉금을 털어놓고 다정하게 이야기하고서 작별하였다. 최군이 김덕장의 족파(族派)를 말해 주었으므로 아래에 기록하는 바이다. -족파는 지금 삭제하고 쓰지 않았다.
내가 들으니, 강릉(江陵)의 지형은 산을 등지고 바다를 향하여 옷깃처럼 감싸고 사람이 공손히 읍하는 듯하며, 평야가 안을 두르고 큰 바다가 밖을 감아 돌아 바람과 기후가 매우 따뜻하며, 토지가 비옥하고 강산이 매우 아름다우며 해산물이 또한 풍부하다.
강릉부(江陵府) 안에는 인가가 즐비하고 풍속이 매우 후하여 서울 사람이 오면 선비들이 술을 가지고 방문하는데 온 경내 사람들이 모두 이르곤 하였다. 마을에 70세 이상 100세에 이르는 노인이 수백 명이고, 효자(孝子)와 절부(節婦)의 정려문(旌閭門)이 여염에 서로 바라다볼 정도로 많았으며, 책을 읽어 학자가 된 자가 500여 명이나 된다고 한다.
사방 경내에 유명한 산과 아름다운 물이 빚어 놓은 매우 특이한 경치가 곳곳마다 있어서 비단 한송정(寒松亭)과 경포호(鏡浦湖)만이 세상에 이름을 날릴 뿐만이 아니라 하니, 참으로 우리나라의 낙토(樂土)이며 사대부가 후손을 머물게 할 만한 곳이다.
정해년(1587, 선조20) 3월 초순이 지나서 박인수(朴仁壽) -서인(庶人)으로 학문을 사모하는 자이다.- 의 아우 예수(禮壽)가 방문하여 흉금을 터놓고 말할 적에 내가 실수한 말이 많았는데, 박예수 또한 나의 잘못을 지적하여 타일러 주었다. 이로 인하여 스스로 점검해 보니, 첫째는 큰 근본[大本]이 서지 못해서이고, 둘째는 언어(言語)를 지루하고 경망하게 하기 때문이었다. 이에 깊이 스스로 반성하여 깨닫고는 뼈저리게 한탄하고 자책하였다. 백발이 된 오늘날에도 후회와 부끄러움이 이와 같으니, 어찌 옛 습관을 다소라도 고쳐 한 치 한 푼의 진전인들 바랄 수 있겠는가. 이것을 여기에 써서 후일에 보고 살피는 자료로 삼는 바이다.
16일에 쓰다.
계사년(1593, 선조26) 5월 4일에 명을 받고 정릉(靖陵)을 봉심(奉審)하기 위하여 마전(麻田)의 경계에 이르니, 논은 태반이 묵어 황무지가 되어 있었다. 적성현(積城縣)에 이르니, 관청이 모두 불타고 고을에는 거주하는 사람이 없었으며, 잔약한 아전 한두 명이 나와 영접하였다. 사시(巳時)에 집에 이르러 보니 죽우당(竹雨堂)이 모두 불타 옛집은 하나도 남아 있는 것이 없었고 오직 가운데 서실(書室)만이 남아 있었다. 죽우당 뜰 안으로 들어가서 한동안 슬피 통곡하고 땅속에 묻어 두었던 신주(神主)를 꺼내어 서실에 봉안하였다.
28일 파산(坡山)으로부터 양주(楊州)에 이르니, 양주 경내에는 한 곳도 모내기한 논이 없었다. 관청은 모두 불타 없어졌고 고을의 아전들은 사람만 보면 곧 도망하여 숨었으므로 나는 향교(鄕校)의 동재(東齋) 한쪽 귀퉁이의 벽이 없는 방에서 유숙하였다. 29일 송산(松山)의 봉심소(奉審所)에 이르렀는데, 지나오면서 본 촌락들은 집이 모두 불탔고 살아남은 백성들도 겨우 10분의 1에 불과하였으며,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수척하여 얼굴이 꺼메져서 장차 오래지 않아 죽을 듯하였다.
들으니, “경성에는 종묘(宗廟), 사직(社稷), 궁궐과 나머지 관청들이 또한 하나도 남아 있는 것이 없으며, 사대부의 집과 민가들도 종루(鐘樓) 이북은 모두 불탔고 이남만 다소 남은 것이 있으며, 백골이 수북이 쌓여서 비록 치우기는 하지만 다 덮을 수가 없다. 경성의 백성들은 도륙을 당한 끝에 겨우 목숨만 붙어 있는데, 굶어 죽은 시체가 길에 가득하여 진제장(賑濟場)에 나아가 얻어먹는 자가 수천 명이고 매일 죽는 자가 6, 7십 명 이상이다. 동대문과 남대문 밖에는 집들이 모두 부서지고 불타서 큰길에 잡초가 자라고 깨진 기왓장만 널려 있으니, 눈에 보이는 참혹함이 옛날 역사에 일찍이 없었던 것이다.” 하였다.
왜적이 침략한 일을 가만히 보건대, 예로부터 이와 같이 혹독한 적은 일찍이 없었다. 우리 백성들을 원수처럼 보아서 되도록 잔인하게 없애려 하여 보이는 족족 노소를 불문하고 모조리 베어 도륙하니, 그 뜻은 우리나라로 하여금 한 사람도 살아남은 자가 없게 만들려는 것이었다. 집을 보면 반드시 불태우고 백성들의 옷과 밥이 될 수 있는 물건이면 비록 가지고 가지 않더라도 모두 찢고 부수며, 음식에는 오물을 뿌리고 오곡(五穀)은 풀과 쑥대 속에 흩어 버려 조금이라도 기한(飢寒)을 구제하지 못하게 하려고 하였다.
아, 하늘은 만물을 살리는 것으로 마음을 삼는데 이 왜적들은 사람을 죽이고 물건을 해치는 것으로 일을 삼아 하늘을 거역하고 이치를 어기니, 그 죄가 위로 하늘에까지 통한다. 지금 비록 우리나라가 쇠약하여 왜적들이 일시적으로 뜻을 얻고 있으나 하늘이 반드시 그들을 죽여서 남은 종자가 없이 멸망시켜 천하의 못된 왜적들로 하여금 불원간 죄망(罪網)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할 것이다.
후경(侯景)의 난리에 대성(臺城)이 포위되어 죽은 사람의 시체가 서로 깔렸으며 사람의 피가 도랑에 가득히 흘러서 썩는 냄새가 시오리에 진동하여 사람들이 다니질 못하였다. 그리고 적미(赤眉)가 분탕질하고 노략질하여 지나는 곳마다 사람들을 잔인하게 죽였고, 몽고군(蒙古軍)은 서역(西域)으로 들어가서 성을 도륙하여 인민들을 모조리 죽였으니, 과거 역사에 기록된 것이 이와 같다. 그러나 오늘날의 화가 더욱 참혹하니, 천하에 어찌 이와 같이 흉악무도한 못된 적이 있겠는가. 범과 이리, 뱀과 전갈도 그들의 포악한 성질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나는 좋지 못한 때에 태어나서 이런 큰 난리를 만났으니, 천명이로다. 저 푸른 하늘이여, 말한들 무엇하겠는가.
5월 30일에 양주(楊州)의 송산(松山)에 있는 민가에서 쓰다.
2일에 송산(松山)에서 경성으로 들어가 종암(鍾巖)에 이르러 보니, 백골이 길가에 수북하여 눈을 뜨고 차마 볼 수가 없었다. 보제원(普濟院) 앞에 이르러 보니, 길 한가운데에 시체가 널브러져 있고 동대문을 들어서서 종루(鐘樓)에 이르기까지 모두 네댓 곳에 시신이 있었으며 송산에서 동대문 밖까지는 시신을 떠메고 가는 자들이 매우 많았다.
성안의 백만 가호가 모두 부서지고 불타 다만 무너진 담장과 깨진 기왓장만 있을 뿐이었으며, 죽지 않고 살아남은 백성들은 얼마 되지 않는데, 모두 기왓장을 쌓아 담장과 벽을 만들고 불에 탄 나무를 가져다가 얽어서 겨우 둥지와 굴을 만들어 살고 있었다.
종루 앞에 시장이 있는데, 모인 자가 수백 명에 불과하였다. 궁궐 문에 이르니 남아 있는 궁전이 없고 다만 경회루(慶會樓)의 돌기둥만 보일 뿐이었으며, 잡초만이 큰길에 자라고 있었다. 왕래하는 행인은 겨우 몇 명뿐이었으며 통곡하는 소리가 빈번하게 들렸다. 만나는 사람마다 얼굴에 생기가 없이 참담하여 살려는 뜻이 없었으며 사람들의 걸음걸이가 느릿느릿하였으니, 이는 오래 굶주렸기 때문이었다. 아, 애통하다. -계사년(1593, 선조26)-
5월 3일에 정군 상무(鄭君象武)가 영유(永柔)의 서쪽 곡산(谷山)의 집으로 나를 찾아와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저의 집 노비가 곡산의 서면(西面) 이령방(頤寧坊) 조음동(鳥音洞)에 있는데, 산이 깊고 경치가 아름다워 세상을 피할 만한 곳이라는 얘기를 일찍이 들었습니다. 난리 초기에 경성에서 자친(慈親)을 모시고 형제, 처자식과 함께 이곳으로 달려갔는데, 도착하자 종이 맞이하여 절하고 정당(正堂)을 깨끗이 청소하여 거처하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모두 3개월 동안 이곳에 머물렀는데, 공양함에 게을리 하는 기색이 없었습니다.
이 지역을 살펴보니, 깊은 산 긴 골짝에다 매우 먼 곳에 있어서 종의 집만 서너 네댓 채가 있을 뿐인데 지붕은 판자로 되어 있었습니다. 사방의 산이 높아 무성한 숲이 해를 가리며, 돌 위로 흐르는 샘물이 달고 시원하며, 채소가 매우 풍부하였습니다. 그리고 산에 불을 질러 곡식을 가꾸는데 콩이 풍족하였습니다. 한 달이 지나고 한 철이 지나도록 외부의 사람이 오지 않아 세상의 소식이 완전히 단절되었으니, 참으로 이른바 인간 세상에 안위(安危)를 물을 길이 없다는 곳이었습니다.
왜적이 이르는 곳과는 사면이 모두 수백 리나 떨어져 있으니, 비록 온 나라가 솥에 물이 끓듯하여 병란이 하늘을 찌른다 하더라도 문을 닫고 편안히 잠자서 무슨 일이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지대가 높아서 춥고 골짝이 궁벽하고 깊어서 군자가 살 경우 새와 짐승과 함께 무리 지어 사는 데에 가까우니, 바로 오늘날과 같은 때에 피난하는 곳으로 상령(商嶺)과 왕관(王官)처럼 깊은 곳도 싫어하지 않는 법입니다.
곡산군의 서쪽 30리 지점에 명미촌(明媚村)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산천이 깨끗하고 골짝이 확 트여 넓으며 큰 시내가 그 가운데를 가로질러 흐르며, 토지가 비옥하고 거주하는 사람들이 적어서 예닐곱 가호가 있을 뿐입니다. 마땅히 이곳에 자리를 잡고 살다가 병란이 있을 때에 조음동(鳥音洞)으로 들어가 난을 피한다면 이 세상에서 몸을 온전히 보전하고 피해를 당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의 말을 듣고 나도 모르게 서글픈 마음이 들어서 여기에 써 두고 때때로 보면서 깊은 생각을 붙이는 바이다.
5월 13일에 수안(遂安)의 민가에서 쓰다.
노승(老僧)이 병을 앓으며 깊은 산중에 거주하니, 사람들이 드물게 찾아오고 소금과 쌀이 매우 귀하였다. 그리고 바람이 불고 날씨가 추워지면 감기에 걸려 한번 앓아 누우면 한 철을 넘기곤 하였는데, 수발드는 사람이라곤 사미승(沙彌僧) 한 사람이 있을 뿐이었다. 사미승이 산을 내려가 양식을 구해 오는데, 약속한 기한이 지나도 오지 않으면 같은 집에 사는 승려가 죽과 밥을 가져다 주나 이마저도 떨어지면 하루에 한 번 죽을 공양할 뿐이었다.
노승은 분수를 지켜 편안하고 차분하였으며 일체의 외물을 사모하지 아니하여, 한 번이라도 배불리 먹고 따뜻이 입을 것을 생각하여 시름과 걱정을 일으키지 않았다. 그리하여 말라 죽는 것을 달갑게 여길 만큼 마음이 깨끗해서 조화(造化)와 일체가 되었으니, 이는 높은 식견과 원대한 뜻이 있어서 사물의 밖에 초연한 것이 아니다. 다만 거처하는 곳이 한적하고 익히는 바가 전일하여 눈앞에 화려한 물건이 이르지 않고 일체의 세상 재미를 끊어 버려 물욕에 유혹되는 바가 없이 담박한 본성을 보전하였기 때문이다.
아, 지금의 사대부 중에는 한번 역경을 만나면 곧 무한한 우수(憂愁)와 번뇌를 품어서 슬퍼하고 한탄하여 근심과 울분으로 병을 이루는 데 이르는 자가 있으니, 이런 사람은 이 노승의 죄인이 아니겠는가.
계사년 9월에 병들어 재령군(載寧郡)에 있으면서 감회를 쓰다.
홍정 선사(泓靖禪師)가 말하기를, “평안도 영원군(寧遠郡)에서 서북쪽으로 3일 정도 길을 가서 흑담(黑潭)의 장비탈(長飛脫)을 지나 아흔아홉 번 물을 건너면 옛 영원에 이른다. 이곳에 본향산(本香山)이 있는데 일명 괘산(掛山)이라고도 하는바, 이 산이 바로 향산의 조종산(祖宗山)이므로 이름을 본향산이라 한 것이며, 석룡굴(石龍窟)이라는 사찰이 있다. 산 곁에 촌락이 있으며 산골짝에는 곳곳마다 산중의 백성들이 살고 있는데, 기장과 조, 메밀과 콩을 심고 또한 오곡(五穀)이 생산되기도 하며, 밭갈이하는 소는 크기가 보통 소보다 갑절이나 된다. 외부 사람이 이곳에 들어오면 이 지역 주민들이 모두 환영하여 밥을 짓고 채소를 마련해서 대접하여 인심의 순후(醇厚)함이 태곳적과 같다. 고을의 서리(胥吏)들은 하도 멀어서 오지 못하니, 주민들은 자유롭게 밭을 갈고 나무를 하여 스스로 먹고 살 뿐이다. 벼와 곡식이 매우 흔하여 한 필의 목면(木綿)이면 곡식 몇 섬을 살 수 있으며, 인간 세상의 일을 알지 못하여 꽃이 피고 잎이 지는 것으로 봄과 가을을 알 뿐, 땅이 갈라지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과 같은 큰 재난은 걱정할 바가 아니다.” 하였다.
촌락이 매우 많은데 혹은 한두 가호가 있기도 하고 혹은 서너 가호가 있기도 하며 산전(山田)에 곡식을 쌓아 놓고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도록 수확하지 않았다. 외부의 사람이 오지 않으므로 산길이 뚫리지 아니하여 풀과 나무가 우거져 있는데 촌락의 앞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작은 길이 나 있어 서로 왕래하는 곳은 오직 석룡굴의 길뿐이었다. 옛사람이 두 개의 큰 돌을 골짝 가운데에 서로 마주 보도록 세워서 표시하였는바, 수십 보(步)마다 이러한 돌이 있는데 이 돌을 이름하여 동자석(童子石)이라 하였다. 홍정 선사가 괘산의 절정에 올라가 향산이 겨드랑이 아래에 있는 것을 보고 개미둑처럼 작다고 하였다. -자주에 “남쪽으로는 삼각산(三角山)이 바라보이고, 장백산(長白山)이 곁에 있으며, 동북쪽으로는 백두산(白頭山)이 바라보인다.” 하였다. ○ 갑오년(1594, 선조27)
무릇 사람이 죽음에 임박했을 때에는 반드시 거듭된 곤액을 만난 뒤에 죽음이 따르게 마련이니, 세속에 이른바 쇠운(衰運)이란 것이요 운이 다했다는 것이다. 나는 올해 61세이니 세속에서 꺼리는 이른바 환갑(還甲)이며, 또 장차 중한 죄를 받게 되었으니 비록 스스로 국가의 법을 범했다고 하나 시운이 좋지 못함을 알 수 있다.
평생 동안 명예를 도둑질하여 하늘을 속이고 사람을 속여서 높은 지위를 차지하였다가 지금에서야 죄를 받으니, 본원으로 되돌아감은 당연한 이치이다. 나는 이것을 즐겁게 생각하고 여한이 없어 남을 원망하고 허물하는 마음이 없으니, 오직 마음을 씻고 개과천선(改過遷善)하여 남은 날을 편안히 여길 뿐이다.
을미년(1595, 선조28) 2월 2일에 각산(角山)의 해곡(海曲)에 있는 민가에서 쓰다.
출전 : 한국고전번역원
雜記
鄭希良博學能文章。治易善數。性卓潔寡合。登第仕翰林。年三十七。丁憂。結倚廬于豐德縣。占推步。俯察仰觀。知時事將亂。思欲脫身邁跡。有山僧往來。相與定謀。時時獨登山隴。負手徘徊。入則垂泣。齋僕以爲思其親也。五月五日。山僧至。希良仍遣僕隸涉遠樵採。便與逃去。及暮人還求訪。追到祖江沙壖。則但有喪冠屨杖而已。時以爲赴水也。後數十載。慕齋先生爲按察。止驛樓。壁上題詩云。風雨驚前日。文明負此時。孤筇遊宇宙。嫌鬧竝休詩。墨跡尙淋漓。先生大驚。詢于驛吏。對曰。俄有雲衲老僧携二沙彌登樓吟眺。館人揮之使退。不肯去。望見騶幢。徐下樓。先生知其爲希良也。急散騎士旁搜。不獲。先生後遊一寺。見壁間詩有鳥窺頹院穴。僧汲夕陽泉之句。亦以爲非希良莫能也。然頭顱居止。了無聲聞。 猶駱賓王之於唐世也。希良娶妻。疏棄不見面。其妻老居。祭端午以爲忌。埋委裘以爲墳。祀之至今云。先生少作 辛未九月。與安習之遊天磨山。宿靈通寺。朝起循溪而下。山廻谷轉。水石淸幽。到花潭。有草屋數間。荒園細逕。幾不可辨。步上後麓。拜花潭先生墓。封纔數尺。土階無砌。墓前立小石碑。刻曰生員徐某之墓。再拜而作。徘徊瞻眺。懷仰高風。悽然遐慕。値小雨入草廬。廬非先生舊居也。圯而移葺于後圃者也。隔壁有一婢居守。渾問曰。先生有子幾人。對曰。正室只有一子。妾子又二人。又曰。先生之歿。在丙午七月。當病革時。令侍者舁出潭上。澡浴而還。食頃乃卒。渾問何爲是澡浴乎。答曰。賢者之歿。 必須如此。乃正終之義也。渾與習之相顧咨嗟。以爲小婢猶聞此義。流風餘韻。信乎其猶可徵也。雨霽。出潭上。潭皆石磯。高揷潭邊。或據溪心。水石淸激。小山環抱。秋葉蕭瑟。磯上有石竅二所。人言先生張傘之處。好事者爲先生鑿之云。磯上苔深。山空水流。懷先生而不可作。則考德論世之感。於是而不能已焉。先生以高世之才。求道於遺經。玩而樂之。有以自守而無求於外。寒餓之極。至於數日無食。一褐蔽體。人有不堪其憂。而方且頹然處順。涵泳乎道義之腴。睟於面背。充於門閭。而不願人之膏粱之味。則其深造自得之功。有以積於中而形於外者。可知也。是豈一節之士聞慕之徒有所指擬采獲。而可得於此哉。若夫造道之醇疵。契悟之淺深。猶當姑置於感古之日可也。皐比撤座。猶未一世。而舊廬無人。陳跡蕪沒。寒山野日。殆不可問。遊人過士俛仰於荒山之濱。猶足以起頑廉懶立之志。淸風卓範。感後世而淑人心也深矣。嗚呼遠哉。昌寧成渾。謹書。我高祖再從兄弟 自註。未知爲伯叔。 成校理熺。坐成三問事。廢錮終身。其子進士耼壽。有至性高識。屛居父墓下。布衣麤食。處之晏如。未嘗一至京師。亦不以世族名胄自著。故村人視之如田夫也。其姪成夢井觀察京幾。巡至本州。下令歷拜。州人無有識其所在。物色然後得之。及至其門。草屋蕭然。不蔽風日。土床容膝。坐客無席。夢井嘆 息而去。還家送方席十箇。耼壽揮而去之曰。此物不合貧賤之家也。其時罪人子弟。例除參奉以觀去就。無不俛首服役。而耼壽竟不拜。有妹無居室。賣其家而市以與之。靑坡集。記其事。性喜吟詩。援筆卽成。釣魚江上。追逐雲月。悠然自適。人莫知其淺深也。嘗有詩曰。把竿終日趁江邊。垂足滄浪困一眠。夢與白鷗飛海外。覺來身在夕陽天。所居在坡山南谷長浦之上斗文里西麓。未老而卒。有三女。適金士奇,趙鳳孫,李繼宗。趙乃申上舍光弼外曾祖也。丁丑五月。成聞德而顯來訪溪上。於渾如此。成君曾祖校理耼年。卽耼壽之弟也。十月二十六日。申子方來寓外舍。來時歷見崔孝元于碧蹄。孝元力言余說南冥病痛之非。且曰。未嘗知先生之學。亦未見先生之面而輕肆詆毁。是豈所當爲者乎。推尊退溪過實。則於人心世道。姑無大害。輕視南冥過當。豈不爲人心世道之所大害耶。凡數百言。憤嘆不已。余思去夏梁弘澍來讀溪堂。語次道南冥先生之學。推尊過於退陶先生。余謂之曰。退陶深於學。恐南冥之學不如此。退陶之學。專宗朱子。法門正當。後學學之有据依。南冥高節。人不可及。而觀其言論風旨。有不帖帖地。恐不可學云。因言所聞言論少從容數事。且謂之曰。數其事而責之者。只有此疑而已。如臧文仲不知者三是也。梁聞我言。殊不平。是以傳說於孝元如此。亦恐有傳 語過當。故孝元見責如此矣。卽作書謝之。以爲所見如此。故其時所言如此矣。第輕論先輩。豈非大罪。而末俗醜正。多肆譏訕。我又輕論以助邪氣。誠大罪也云云。又聞龍岡宰閔丈赴縣時南時甫寄以毛衣曰。冬寒北征。謹以爲餉。閔丈辭不受曰。吾未嘗著毛衣。雖無之身不寒云。蓋少南之制行而不受也。因思余辭受多有可愧於心。想望閔丈之風。令人灑然也。余深自思曰。自此當息却許多議論。除却多少利害。一以養疾爲己淸脩自溓爲務。篤信固守。履方居約以俟死可也。前輩之得失。知之亦不能詳悉。且吾未及此地位。何得輕肆議論耶。辭受一以正。莫以利害流徇之念雜乎其間。俾無愧於吾心可也。二十八日。默存菴病士識。丁丑 在我不能簡默。所以致謗。雖其言甚誣。而因玆內省。當益致自脩之功也。戊寅春。入城。又致外謗。因思闕失。書此自警。四月晦日書。戊寅 金耉文起周言開城鍮匠韓順繼之賢云。事母孝。勤作鍮器。以致稍潤。解文字。間以讀書作詩。出語奇偉。一留守勸令爲校生。辭曰。吾不作鍮匠則老母餓矣。勤儉不怠。器皆完善而不貳價。是故。售者爭就之。輒辭以分與他工曰。吾何得專利爲哉。其族人貧不自聊。與以己貲。不責其償。族人由此而致富。終不受其貲曰。汝家業成。 吾所喜也。觀此。信其爲賢孝君子。錄之以爲廉問之資也。庚辰三月 八月五日。長城鄭參奉雲龍慶遇邊博士以中彦時幷轡來訪。一宿而去。鄭君得勝地於長城,井邑兩縣之間蘆山山中。沿溪入山十里許。皆蒼壁削立。水石淸幽。未至三里許。舍馬而步。到其處則北東南皆蒼崖壁立千仞。西有石門。東壁之上。大溪流下。懸瀑二十丈。北壁有石磴。可以至東壁之上。東北壁俱是一巖。其上一石平鋪。可坐數百人。水流其間。玉潔光瑩。手弄飛泉。小菴居北壁之下。面陽燥爽。東視瀑布七八十步。前臨溪水。幽夐寥廓。灑落奇絶。不可殫述。丹崖翠壁。怳然如畫圖中。松檜參天。人跡罕到。然四面山不甚高峻。雖冬寒。菴前雪先消。菴名霞谷書室。溪名蒙溪。皆是鄭君所名。距鄭君所居長城介溪村二十餘里云。辛巳余夜夢。入深山之中。衆壑瓌奇。羣峯環繞。溪水淸遠。白石灣崎。松林蔽日。人跡不到。處處流泉。響合于空山。落日在嶺。松風蕭瑟。顧而樂之。不知其爲何境也。水聲松聲雖在。於洞壑靜極全寂之體。幽深沖遠之趣杳不可言。令人有飄飄然遺世獨立之感。而不知身在末俗汚濁之中也。旣寤而書。書以觀之。嗚呼。古人有不堪世俗。妄作而發長生度世之願者。余之此夢。其亦有所感而不得其平者歟。萬曆甲申冬月。病翁。志。愚抱病深山。與世相遠。初無嬰拂之端。自癸未赴召上章言三司之失。以身自赴風波之深淵。鉤黨相挻。怨誹溢世。無容足之地矣。加以少日妄希激揚之風。不思聖人勿言人過之訓。晩而知戒。亦無及焉。但見隨處睢盱。益覺居世之難矣。乙酉初秋。獨臥溪廬。有感而書。丙戌正月十四日。穆淸殿參奉崔雲遇時中來訪。一宿而別。崔君壬辰生也。居江陵新里。乃襄陽地境也。家旁數里外。得一區名勝之地。曰香浦。兩山環抱。前臨湖水。白沙長松。別有天地。眞仙境也。瀟灑窈窕之趣。殆勝鏡浦。湖水周十里。鏡湖則周廻三十里云。前數日。安進伯,金醇仲來訪。信宿談話。金君言去歲四月遊金剛山。仍入嶺東。到江陵登鏡浦臺。絶勝之景。不可以言語形容。金君但咨嗟詠歎而已。又言臺之正相對處海畔。長松擁翠。白沙如雪。海棠鋪紅。望見有一畫閣。縹緲隱映於松林間。如上界仙宮。三山瓊島。邈不可攀。乃策馬追之。竝湖而行十里許。乃到其處則淸幽灑落。不可名狀。其家之主曰金德璋。有奴守其家。開窓煖突而迎之。與同伴宿其舍。神淸骨冷。怳然有爛柯之想。將發。遲回眷戀。十步而九顧云。渾以此語崔君則答曰。金德璋乃吾妻弟也。金君之外曾祖曰金麒仝云。渾瞿然答曰。金麒仝乃我外祖母兄也。然則金君德璋之父。乃我六寸妹夫也。初聞鏡浦臺畔有畫閣。疑是袖仙所住。何知爲我之 母黨乎。相與一笑。余宿聞崔君名。今始見之。開懷款晤而別。崔君因言金德璋族派。乃錄于左。族派今不書聞江陵之地負嶺面海。襟抱拱揖。平野經其內。大瀛環其外。風氣甚暄。土地沃饒。江山絶美。海錯又富。府內人居櫛比。風俗極厚。若有京師人至則士子携酒來訪。盡境而至。村中老人七十以上至百歲者幾數百人。孝子節婦旌門相望於閭閻。讀書爲儒者五百餘人。四境之內。名山勝水絶異之景比比有之。非但寒松鏡浦流名於世而已。眞我國之樂土。士大夫之留種處也。丁亥三月旬後。朴仁壽 庶人慕學者也 之弟禮壽過訪。開懷與語。多有失語。朴也亦擧我過失以規。因此而反躬自省。則一則大本不立。二則言語支離輕妄。深自省悟。嘆責深矣。白首今日。悔吝如此。其能少改舊習。以異分寸之進乎。書于此。以爲後日觀省焉。旣望書。癸巳五月四日。受命奉審靖陵。行至麻田境。水田太半陳荒。至積城則官廨盡焚。邑中無人。殘吏一二人出接。巳時到家。竹雨堂盡燬。舊廬無一存者。只有中書室獨存矣。入竹雨堂庭中哭盡哀。出神主于埋土中。奉安于書室。二十八日。自坡山至楊州。州境內無一耕種水田處。官廨盡焚。邑吏見人輒走匿。就鄕校東齋一隅無壁之房宿。廿九日。到松山奉審所。所經村落。室廬皆焚。遺民僅存什一。男女老弱皆羸黑。似將不久而死矣。聞京城中宗廟社稷宮闕無一存者。其餘官廨亦無一在。士大夫家民舍。鍾樓以北盡焚。以南稍有存者。白骨堆積。雖糞除之。亦不能盡掩之。京民屠戮之餘。僅有餘息。餓莩滿路。就食賑濟塲者數千人。死者日不下六七十。東南門外。家舍皆殘燬。草生大道。瓦礫極目。所見之慘。前史未之有也。竊見倭賊寇亂之事。自古以來未有如此之酷。視我民如仇讐。務爲殘滅。逢人輒殺。不分老弱。斬艾屠戮。其意欲令我國無一人生者。見屋宇必焚之。凡民衣食之資。雖不齎去。皆裂破之撞碎之。飮食則加以穢物。五穀則散棄草菜。不欲其少救飢寒也。嗚呼。天以生物爲心。而此賊以殺人害物爲事。逆天悖理。其罪上通于天。雖因我國之衰微。得志於一時。天必殪殄。滅之無遺育。使天下之劇賊。不容漏網於今日也。侯景之亂。臺城被圍。人死相枕籍。人汁流滿溝渠。臭穢十五里。人不能行。赤眉焚掠。所過殘滅。蒙古兵入西域屠城。盡殺人民。前史所載如此。然今日之禍。尤爲慘酷。天下安有如此凶惡毒虐之賊乎。虎狼蛇蝎。不足以此其性也。我生不辰。遭此大亂。嗚呼命也。彼蒼者天。謂之何哉。五月三十日。書于楊州松山民舍。二日。自松山入京。到鍾巖。見白骨在道傍甚多。目不忍視。至普濟院前。見僵屍在道中。入東大門至鍾樓。凡有四五處。松山至門外。舁屍而行者甚多。城中百萬家皆 殘燬。只有堆垣敗瓦。遺民之未死者無幾。皆疊瓦爲墻壁。取火餘之木。架爲巢穴。鍾樓前有市。相聚者數百人。至闕門則宮殿無有存者。但見慶會樓石柱而已。草生大道。行人僅有往來者。頻聞哭聲。遇人。面無人色。慘然無生意。人之行步皆徐行。蓋以長飢故也。嗚呼痛哉。癸巳五月三日。鄭君象武訪我永柔西谷山家。言我家臧獲在谷山西面頤寧坊鳥音洞。夙聞深山絶境。可以避世。亂生之初。自京城奉慈親與兄弟妻孥往赴之。至則奴迎拜。掃正堂以居之。凡留三箇月。供奉無倦色。觀其地在深山。長谷絶遠之域。但有奴家三五舍。覆以板子。四山高峻。穹林蔽日。石泉甘洌。蔬菜甚饒。焚山種粟。豆菽富足。閱月經時。外人不至。世間音信。聲響斷絶。眞所謂人間無路訪安危者也。倭賊所至。四面皆在數百里外。雖擧國鼎沸。兵燹滔天。閉戶安眠。不知有何事也。然地高而寒。洞澼而深。君子居之。亦近於同羣鳥獸。正宜今日避亂之所。而商嶺王官。不厭其深者也。谷山郡西三十里。有村曰明媚。山川灑落。洞府寬閑。大溪橫流其中。土沃而人稀。有民六七家。當卜居其地。有兵火則入鳥音避之。可以全身遠害於斯世也。余聞其言。不覺慨然。書于此而時閱之。以寓遐思焉。五月十三日。書于遂安之民舍。山中老宿。抱病居深山之中。人跡罕至。米鹽極貴。每風寒感疾。一臥經時。隨身只有沙彌一人與之共處而已。沙彌下山求糧。過期不至。則司舍僧具粥飯。或有時而絶。則一日日中。供一粥而已。老僧隨分安靜。心絶外慕。一念不生以想溫飽。以起愁憂。甘心枯死。方寸淸冷。與化爲徒。此非有高識遠志超然事物之表也。只是所處之閑寂。所習之專一。目前紛華不到。一切世味屛絶。無所誘於物慾。有以全乎淡泊故也。嗚呼。今之士大夫。一遇逆境。便生無限憂惱。戚戚嗟嗟。至於愁恚成疾者有之。豈不爲老僧之罪人也哉。癸巳九月。病臥載寧郡中。有感而書。泓靖禪師言平安道寧遠郡西北行三日程。過黑潭長飛脫。九十九渡水至古寧遠。有本香山。又名掛山。乃香山之祖宗山。故名曰本香山。有寺曰石龍窟。山之旁有村落。處處山谷。山民居之。種黍粟蕎麥菽。亦有五穀。牛之耕者大倍常牛。外人入此地。其民皆歡迎。做飯具蔬菜。淳庬如太古。郡之胥吏絶遠不可到。耕田採薪。自事而已。禾穀甚賤。一匹木綿。可得數石。不知人間事。花開葉落知春秋。地拆天崩非所恤云云。村落甚多。或有一二舍。或有三四舍。積穀於山田。經冬至春而不收。外人不至。山逕不開。草樹蓁合。至村落之前。方有小路。相往來者唯石龍窟之路。古人以兩石相對立于谷中以誌之。數十步必有一對。名其石曰童子石。泓靖禪師登掛山絶頂。香山在腋下如螘垤云。自註。南望三角山。長白山在旁。東北望白頭山。○甲午凡人臨死時必荐遭困阨而後隨之以死。俗所謂衰運運盡者也。今年六十一歲。俗忌所謂還甲。而又將蒙被重罪。雖曰自犯憲章。而氣運之不佳可知已。平生盜名。欺天欺人以竊高位。今而獲罪。反本還源。理之常也。懽然無恨。無有怨尤。唯當洗心遷改。以安餘日而已。乙未二月二日。書于角山海曲民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