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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변〔風水辨〕
어떤 이가 내게 묻기를 “풍수(風水)의 이론이 어느 시대에 시작되었는데, 세상에 성행(盛行)하여 아래로 학사 대부(學士大夫)에 이르기까지 그것에 현혹되지 않음이 없는가. 잠시 작은 일을 가지고 말해 보면 장례를 치를 날이 임박하여 계절을 지나고 해를 보내도록 비바람에 드러내고 매장하지 않으면서 남이 사는 산기슭을 다투고 남이 짓는 밭두렁을 엄습하며, 길지(吉地)를 얻고자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 그대는 한 고을에서 학식이 두루하여 막힘이 없다고 일컬어지니, 또한 고거(考據)한 것이 있는가? 어찌 그대의 집안은 쓸쓸하고 고요하여 저런 무리가 왕래(往來)하는 자취가 없는 것인가?”라고 한다. 답하기를 “나는 금세(今世)의 사람이다. 공경(公卿)이 존신(尊信)하는 것을 내가 또한 어떻게 어길 수 있겠는가. 생각건대 그 술수의 원류가 경사(經史)에서 참고할 것은 없으니, 역시 반신반의하고 있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묻기를 “〈계사(繫辭)〉에서 ‘위로 천문(天文)을 관찰하고, 아래로 지리(地理)를 살핀다’라고 한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것이 풍수설의 근원이 아닌가?”라고 하기에 답하기를 “아니다. 이(理)는 문(文)이고, 문은 이가 드러난 것이다. 일월성신(日月星辰)의 상(象)이 위에서 밝게 빛나는 것은 하늘의 문이다. 산천초목(山川草木)의 형(形)이 아래에서 많이 쌓이고 모인 것은 땅의 이(理)이다. 저 성인(聖人)이 위아래로 관찰(觀察)하는 사이에 얻은 것을 통하여 괘(卦)를 그어 사람에게 보였을 뿐이다. 팔괘(八卦)를 살펴보면 땅은 서북(西北)이 높기에 산이 많이 있고, 동남(東南)은 가득 차지 않았기에 물이 흘러가니, 간(艮)ㆍ태(兌) 두 괘가 그 방위에 근거를 얻는다. 어찌 일찍이 어느 길짐승과 어느 날짐승이 각각 주관하는 바가 있어서 세상에서 말하는 것처럼 사람에게 요수(夭壽)ㆍ화복(禍福)ㆍ귀천(貴賤)을 일으키겠는가. 이른바 오수(五獸)의 이론은 더욱 뜻이 없는 말이다. 이십팔수의 진(辰)에서 일어나 사(巳)에서 마치는 것을 가지고, 동방(東方) 칠수(七宿)는 그 모양이 용(龍)을 닮고, 서방(西方) 칠수는 그 모양이 범을 닮았기에 그 모양을 빌려 짐승의 이름을 말하는 것이다. 풍수를 하는 사람이 억지로 끌어다 맞추며, 그 모양이 어떠한가는 묻지 않고 곧장 왼쪽에 있는 것은 청룡(靑龍)이라 하고, 오른쪽에 있는 것은 백호(白虎)라 하며, 또 용을 산이라 하고 호랑이를 수(水)라 하니, 의리에 합당한 것이겠는가. 하물며 성인은 참으로 그 밝고 질서 정연한 문(文)을 자세히 살펴서 그 밝고 질서 정연한 이(理)를 알았다. 세상에 이른바 감여가(堪輿家)라는 사람은 의리를 알지 못하고, 오직 이로움이 따르는 것만 거침없이 말하는데, 간혹 눈이 있어도 문자(文字)를 알지 못하는 사람도 있으니, 그렇게 말하는 까닭은 단지 오수(五獸)의 이론을 파악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 산은 길(吉)하고 어느 수(水)는 흉(凶)하며, 어떤 위치는 복을 받고 어떤 방향은 화가 이른다고 말하니, 내가 또한 무엇을 따라서 그 이론을 믿게 되겠는가.”라고 하였다.
말하기를 “그대의 말과 같다면, 세상에는 반드시 포희씨(包羲氏)가 있은 뒤에야 비로소 위로 관찰하고 아래로 살필 수 있을 것이니, 포희씨 같은 분이 다시 태어나지 않았어도 역상(歷象)이 지금까지 폐지되지 않았듯이 지리(地理)에 대한 이론도 역시 그와 같을 것이다.”라고 하기에 답하기를 “민생(民生)에 절실한 술수는 선성(先聖)에게서 근원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후세의 사람들이 조술(祖述)하고 준수(遵守)하게 되었다. 풍수설을 그대는 어느 성인에게서 발원한 것이라 생각하는가. 포희로부터 요순(堯舜)까지, 하(夏)나라로부터 주(周)나라까지 몇천 년이 지나고 몇 성인을 거쳤는가. 포희는 성인 가운데 으뜸이고, 《역》은 문자(文字)의 시초이다. 거기서 말하기를 ‘옛날 장례를 지내는 사람들은 섶나무로 두텁게 싸서 들 복판에 묻어 놓고 흙으로 봉하지도 않고 나무를 심지도 않았다.’라고 하였다. 맹자는 말하기를 ‘옛날에 일찍이 그 어버이를 장사 지내지 않은 사람이 있었는데, 부모가 죽자 골짜기에 내버려 두었다. 후일에 그곳을 지나다 보고 이마에 식은땀이 흘러, 돌아가 삼태기와 들것에 흙을 담아 와서 시신을 덮었다.’라고 하였다. 이 당시에는 관곽(棺槨)도 갖추어지지 않았는데 하물며 풍수가 있었겠는가. 포희씨가 천하를 다스릴 때에 이르러서 위로 하늘에서 상(象)을 살피고 아래로 땅에서 법(法)을 살피며, 조수(鳥獸)의 무늬와 천지(天地)의 형편을 관찰하였으니, 가깝게는 몸에서 취하고 멀리는 사물에서 취하였다. 그리하여 비로소 팔괘(八卦)를 지어 신명(神明)의 덕(德)에 통하고, 만물의 정상(情狀)을 유별(類別)하였다. 하늘을 우러르고 땅을 굽어보며, 가까이는 몸에서 멀리는 사물에서 취함에 남기는 것이 있지 않았는데, 풍수의 이론은 유독 취하는 것이 없었다. 13괘(卦)를 구하였는데, 전성(前聖)이 구하지 않은 것은 후성(後聖)이 태어나 구하였다. 따라서 망고(網罟 그물)를 구한 성인은 궁실(宮室)을 구할 겨를이 없었고, 주거(舟車)를 구한 성인은 관곽을 구할 겨를이 없었다. 그러나 의식(衣食)의 근원과 기구 사용의 이로움, 법도(法度)의 드러남, 예악(禮樂)의 법칙은 모두 백성의 일상생활에 쓰이는 도구이니, 상(象)을 높여 기구를 제작한 것이 여러 성인의 손에서 모두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다. 한유씨(韓愈氏)는 말하기를 ‘옛날에 성인이 없었다면 인류는 멸망한 지 오래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성인이 이 백성을 살아가게 함이 이처럼 수고롭고 또한 지극하였으나 풍수의 이론은 역시 생략되었다. 성인 가운데 효성이 크고 통달한 이는 순(舜) 임금과 주공(周公)이다. 순 임금은 50이 되도록 부모를 사모하였으되 고수(瞽瞍)를 어떻게 장례하였는지 듣지 못하였다. 살아 계실 때는 천하로써 봉양하였으니, 죽었을 적에는 반드시 천하로써 장례했을 것이다. 주공은 훌륭히 계승하고 훌륭히 이어 가는 효로써 태왕(太王)과 왕계(王季)를 왕으로 추존하고, 위로 선공(先公)을 천자(天子)의 예로서 제사하였으나, 상례(喪禮)의 절문(節文)은 이 시기에 갖추어지지 않았고, 또한 문왕(文王)을 어떻게 장례하였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당우(唐虞) 이상으로는 문헌이 부족하여 확실히 그 이론을 증명할 방법이 없다.
주(周)나라의 예의는 찬란하게 아름다우나, 장례에 대해서는 한마디 말도 전기(傳記)에 없다. 다만 중니(仲尼)의 장례 때에 공서적(公西赤)이 집례(執禮)하여 삼대(三代)의 도구가 아울러 취해져 예문(禮文)이 갖추어졌으나, 역시 풍수에 대해서는 듣지는 못하였다. 군자가 살아 계실 때 봉양하는 것은 큰일에 해당한다고 할 수 없고, 오직 돌아가셨을 때 장례를 모시는 것이 큰일에 해당될 수 있다. 그러므로 시신(屍身)과 함께 입관(入棺)하는 물품들은 반드시 정성스럽게 하고 반드시 신실하게 하며, 세제(歲制)와 월제(月制), 일제(日制)로부터 흙이 살갗에 닿지 않게 하여 흡족함에 이르기까지, 자식이 부모에 대하여 힘이 닿는 곳까지 하지 않음이 없는 것인데, 유독 매장(埋葬)하는 일에만 복서(卜筮)가 있을 따름이니, 지금의 군자가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옛날의 성인보다 나은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더욱 괴이한 일은 연월일시(年月日時)의 선택에 있어서 옛사람은 날〔日〕을 점쳤을 뿐이지 월(月)을 점치지 않았다. 그러므로 ‘천자가 죽은 지 일곱 달이 되어 장례를 행하게 됨에 동궤(同軌)가 모두 이르렀고, 제후(諸侯)가 죽은 지 다섯 달이 되어 장례를 행하게 됨에 동맹(同盟)이 모두 이르렀다. 대부(大夫)는 석 달 뒤에 하고, 사(士)는 한 달 뒤에 한다.’라고 하여 예법으로 제정(制定)하지 않음이 없었다. 월(月)에 길흉(吉凶)이 있다면 당연히 성인이 먼저 가려서 피하게끔 하였지, 어찌 법제(法制)를 먼저 정하여 백성을 흉화(凶禍)의 지경에 몰아갔겠는가. 옛날에 풍수의 이론이 없었으되 풍속은 순박하여 사람들은 모두 수고(壽考)하였다. 이 이론이 있게 된 뒤부터 세상은 나날이 경박해지고 요절(夭折)이 서로 이어지니 어째서인가. 세상에서 풍수를 말하는 사람은 반드시 경순(景純)을 으뜸으로 치는데, 그의 몸은 형륙(刑戮)을 피하지 못하였으니, 그가 조상을 장례한 땅은 길한 곳인가 흉한 곳인가. 알지 못할 일이다. 나는 그러므로 ‘술사(術士)를 믿느니 차라리 성인을 믿겠다’라고 말한다. 가령 그 술수가 과연 모두 믿을 만한 것이면 형ㆍ양(荊揚 형주와 양주)의 남쪽에는 산도 있고 물도 있어 가려서 정할 만하되 기주(冀州) 남쪽과 한수(漢水)의 북쪽에는 높은 언덕이 한 곳 없고 천리가 한 들판이어서 공부(工部)가 이른바 ‘평야는 청주와 서주에 뻗어 들었네’라고 하였으니, 어느 곳에서 용호설(龍虎說)을 드러내겠는가. 한(漢)나라의 선비들은 유후(留侯 장량)보다 지혜로운 자가 없었는데, 그는 장안(長安)에 도읍할 것을 말하면서 다만 ‘동쪽으로는 효산(崤山)과 함곡관(函谷關)이 있고, 서쪽으로는 농산(隴山)과 촉산(蜀山)이 있으며, 비옥한 들이 천리에 뻗어있으니, 천부(天府)의 나라일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어찌 일찍이 오수 방위(五獸方位)의 이론이 있었기에 한(漢)나라의 왕조가 거의 4백 년일 것을 그가 알았겠는가.”라고 하였다.
어떤 이가 묻기를 “말세의 대유(大儒)로는 회암(晦菴)보다 존숭받는 이가 없는데, 회암은 그 이론을 높이고 또 믿었다. 그대가 어떤 사람이기에 감히 함부로 풍수를 헐뜯는 것인가? 소흥(紹興)의 〈산릉의(山陵議)〉와 같은 글도 또한 믿을 만하지 않다는 것인가?”라고 하기에 답하기를 “이 말은 또한 바보 앞에서 꿈 이야기를 하는 격일뿐이다. 당시의 임금과 신하들은 모두 대사(臺史)의 요설(妖說)에 현혹되어 장차 모래흙의 보잘것없는 땅에 장사 지내려 하였으니, 이치를 밝게 밝힌 것이다. 회암처럼 이치를 투철하게 밝고 임금을 간절히 사랑하는 사람이 어찌 무관심하게 모른 채하고 납약자유(納約自牖)의 건의를 드리지 않았겠는가. 〈산릉의〉에서 말한 천하의 술사를 구하여 길지(吉地)를 가려 정한다는 것은 그 뜻이 ‘요망한 대사를 믿느니 차라리 천하의 술사들을 구하라’라는 것이고, ‘모래흙의 구덩이에 장사 지내느니 차라리 땅이 두텁고 물이 깊은 땅을 얻어서 군부(君父)의 체백(體魄)을 편안히 모셔야 한다’라는 것이다. 후세의 사람들이 그리 말한 까닭을 알지 못하고 회암 역시 풍수를 믿었다고 하니, 이것이 과연 회옹(晦翁)을 아는 것이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문인(門人)의 산릉(山陵)에 대한 질문에 대답하면서 어째서 ‘그가 말하기를 산의 형세는 어떠해야만 하고, 물은 어느 방위로부터 돌아서 흘러야만 한다고 하며, 어느 방위를 지나고 어느 방위로부터 둘러싸야 비로소 쓸 만 하다고 하는데, 천지(天地)가 어떻게 해서 이 같은 산을 적합하게 만들었는지는 알지 못하니, 너는 이 같은 말에 동의하겠는가?’라고 말하였겠는가. 주자의 뜻을 볼 수가 있다. 명(明)의 유자(儒者)인 주언수(朱彦修)의 말이 훌륭하니 말하기를 ‘사람들이 살아서는 종족(宗族)이 모여서 머무르고 궁실(宮室)을 지어서 거처로 삼는데, 곡직(曲直)과 방면(方面)과 형세(形勢)를 자세히 살펴서 얻으면 길하고 얻지 못하면 흉하니 그 이치가 분명하다. 죽음에 이르러서는 그 신(神)은 곧 위로 하늘에 돌아가고, 매장하는 것은 고골(枯骨)일 뿐이니, 여러 해가 지난 뒤에는 모두 이미 썩었을 것인데, 어찌 사람에게 요수(夭壽)와 화복(禍福)을 주겠는가. 그러므로 매장은 땅을 가리지 않으나, 머무는 곳은 반드시 집터를 헤아려야 한다.’고 하였다. 이른바 토의(土宜)와 토규(土圭)두 가지 법을 사용하여 백성이 살 집을 살펴보고 땅의 중심을 구하였으니, 모두 도읍(都邑)과 궁실을 설립하기 위한 것이다. 이 이론이 성왕(聖王)의 법도에 매우 부합한다.”라고 하였다.
어떤 이가 묻기를 “ 《주례(周禮)》에 총인(冢人)과 묘대부(墓大夫)는 어찌하여 설치하였는가?”라고 하기에 답하기를 “공묘(公墓 군왕의 묘)는 소목(昭穆)으로 하고, 방묘(邦墓 백성의 묘)는 족장(族葬)으로 하여 송사(訟事)를 판결하였으니, 풍수를 위해 설치한 것이 아니다. 그 당시 사람들이 비록 좋은 땅을 가려 정하고자 하였지만 묘역(墓域)은 정해진 곳이 있었고 법령은 정해진 법도가 있었으니, 누가 그것을 범할 수 있었겠는가.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지리(地理 풍수)는 술수 가운데에 가장 의리(義理)가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어찌 의롭지 못한 것을 정자는 말했겠는가. 반드시 이유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이가 묻기를 “그렇다면 산등성이인지 산기슭인지를 불문하고 모두 장지(葬地)로 할 수 있는가?”라고 하기에, 답하기를 “효자(孝子)는 부모에 대하여 시신(屍身)과 함께 입관(入棺)하는 물품들을 반드시 정성스럽게 하고 반드시 신실하게 하는 것이 어찌 다만 시신과 관(棺)뿐이겠는가. 어두운 곳으로 가니 또한 정성과 신실한 도리를 다해야만 한다. 장사(葬師 지관)의 말을 믿는 것에 관해 말하자면 자질구레한 것까지 반드시 《청오경(靑烏經)》과 《금낭경(錦囊經)》의 말에 부합고자 하는 사람은 현혹된 것이 아니라면 미친 것이다. 이와 같다면 그 폐해는 맹저(孟豬)의 들판에 강물이 터지 듯할 것이니, 그대는 작고 또 낮은 힘이면서 설사 한 줌 흙으로 막을 수 있다고 힘껏 믿는다 할지라도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하였다.
나는 또한 상도(常道)를 회복함이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어째서인가. 옛날의 선비들은 자신을 수양함에 힘썼고, 바깥에서 구함이 없었다. 윗자리에 있는 사람도 빈흥(賓興)하고 높이 등용하였으니, 반드시 그 덕을 헤아릴 뿐이었다. 그러므로 선비들은 구차하게 얻으려는 마음이 없었고, 술수도 이에 따라 어긋나지 않았다. 후세의 사람들은 자신에게 갖추어져 있고 할 수 있는 일을 멀고 높아 실행하기 어려운 것으로 생각하여 마음에 새겨 두지 못하기에 이미 윗사람의 요구에 합당하지 못하고, 따로 이 흐릿하여 분명치 않은 술수를 구하여 만에 하나 요행을 바란다. 그러므로 사설(邪說)이 유행하고 저지하지 못한다. 그래서 상도(常道)를 회복함이 있을 뿐이라고 말한 것이다. 맹자(孟子)는 ‘상도가 바로잡히면 백성들이 감동되어 떨쳐 일어나고, 그때에는 사악한 자가 없어질 것이다.’라고 하였다.
[주1] 위로 …… 살핀다 : 《주역》 〈계사전 상(繫辭傳上)〉에 보인다.
[주2] 옛날 …… 않았다 : 《주역》 〈계사 하(繫辭下)〉에 보인다.
[주3] 옛날에 …… 덮었다 : 《맹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보인다.
[주4] 13괘(卦) : 《주역》 〈계사 하(繫辭下)〉에서 말한 것으로, 이괘(離卦)ㆍ익괘(益卦)를 이어 서합괘(噬嗑卦)ㆍ건괘(乾卦)ㆍ곤괘(坤卦)ㆍ환괘(渙卦)ㆍ수괘(隨卦)ㆍ예괘(豫卦)ㆍ소과괘(小過卦)ㆍ규괘(睽卦)ㆍ대장괘(大壯卦)ㆍ대과괘(大過卦)ㆍ쾌괘(夬卦)에 이르기까지 모두 13괘를 말하는 것이다.
[주5] 옛날에 …… 것이다 : 《동아당창려집주(東雅堂昌黎集註)》 권11에 보인다.
[주6] 50이 …… 사모 : 《맹자》 〈만장 상(萬章上)〉에 “진정한 효자는 종신토록 부모를 사모하는 법이다. 나이 50이 되어서도 사모했던 경우를 나는 위대한 순 임금에게서 확인할 수 있다.〔大孝終身慕父母 五十而慕者 予於大舜見之矣〕”라고 하였다.
[주7] 훌륭히 …… 효 : 《중용장구》 제19장에 “효는 부모의 뜻을 훌륭히 계승하고, 부모의 일을 훌륭히 이어가는 것이다.〔夫孝者 善繼人之志 善述人之事者也〕”라는 구절에서 온 말이다.
[주8] 군자가 …… 있다 : 《맹자》 〈이루 하(離婁下)〉에 보인다.
[주9] 세제(歲制)와 …… 일제(日制) : 세제는 관(棺)을 말하는데, 쉽게 만들 수 없으므로 세제라고 한다. 의물(衣物) 가운데 만들기 어려운 것은 3개월이 되어야만 마련할 수가 있으므로 ‘시제(時制)’라고 하며, 의물 가운데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은 한 달이면 마련할 수가 있다. 이것을 ‘월제’라고 한다. 90세가 되면 관이나 의물을 모두 갖추어서 다시 제작하는 일이 없으며, 단지 매일처럼 손질한다. 《禮記 王制》
[주10] 흙이 …… 흡족함 : 부모가 돌아가시어 장례를 치루는 날을 말한다. 《맹자》 〈공손추 하(公孫丑下)〉에 “흙이 몸에 닿지 않게 하면 사람의 자식 된 마음에 특히 흡족하지 않겠는가.〔無使土親膚 於人心 獨無恔乎〕”라고 하였다.
[주11] 천자가 …… 한다 : 《춘추좌씨전》 은공(隱公) 원년에 나오는 말이다. 동궤(同軌)는 왕자(王者)가 일어나 천하를 통일함에 온 세계가 수레바퀴를 같이하고 글 쓰는 문자를 같이하게 되었다는 《중용장구》의 말에서 나온 것으로, 제후들을 가리킨다.
[주12] 경순(景純) : 진(晉)나라 곽박(郭璞, 276~324)으로, 경순은 그의 자(字)이다. 문학(文學)과 훈고학(訓詁學)에 조예가 깊었고, 오행(五行)과 천문(天文), 특히 점술로써 이름을 떨쳤다. 322년 대장군 왕돈(王敦)이 반란을 일으키기 전, 곽박에게 점을 치게 하자 흉(凶)한 점괘로 극언하다가 왕돈에 의해 살해당하였다.
[주13] 공부(工部)가 …… 들었네 : 공부는 당나라의 시성(詩聖) 두보(杜甫)로, 인용 시구는 그가 29세에 지은 〈등연주성루(登兗州城樓)〉의 한 구절이다.
[주14] 동쪽으로는 …… 따름이다 : 한 고조(漢高祖)는 산동(山東) 출신의 대신들이 낙양에 도읍할 것을 권하였지만 결정을 주저하였다. 그러나 장량(張良)의 이 말을 듣고는 그날로 수레를 타고 서쪽으로 발진하여 관중(關中) 지역의 장안에 도읍하였다. 《史記 卷55 留侯世家》
[주15] 소흥(紹興)의 산릉의(山陵議) : 소흥은 남송(南宋) 고종(高宗)의 연호이다. 산릉의는 〈산릉의장(山陵議狀)〉을 말하는 것으로, 주희(朱熹)가 송 효종(宋孝宗)의 산릉(山陵)을 모시는 일에 관해 광종(光宗)에게 올린 주의(奏議)이다. 주희는 이 글에서 풍수의 대강을 밝히고 있다.
[주16] 납약자유(納約自牖) : 《주역》감(坎)괘 육사(六四)의 효사(爻辭)이다. 창문을 통해 굳은 맹세를 올린다는 말인데, 비유하여 신하가 임금에게 간언을 올릴 때에 분명한 것으로부터 차근차근 깨우쳐 나간다는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주17] 그가 …… 동의하겠는가 : 《주자어류(朱子語類)》 권107 〈영종조(寧宗朝)〉하손(賀孫)의 기록에 보인다.
[주18] 사람들이 …… 한다 : 명(明)의 호한(胡翰)이 찬한 《호중자집(胡仲子集)》 권4 〈풍수문답서(風水問答序)〉에 보인다.
[주19] 토의(土宜)와 토규(土圭) : 토의는 땅의 성질이 사람이 살거나 식물을 가꾸기에 알맞은 것을 말하고, 토규는 주(周)나라 때에 땅의 깊이와 해의 그림자를 재던 그릇으로서 일종의 측량 기구였다.
[주20] 총인(冢人)과 묘대부(墓大夫) : 총인은 왕가(王家)의 능묘(陵墓)를 맡아보았고, 묘대부는 백성들의 묘지를 관장하였다. 《周禮 春官宗伯》
[주21] 소목(昭穆) : 종법(宗法) 제도에서 종묘(宗廟)나 종묘 안 신주(神主)의 배열 순서를 말한다. 시조를 중앙에 두고, 자손을 왼쪽과 오른쪽으로 차례대로 배치하는 것으로 왼쪽을 소(昭), 오른쪽을 목(穆)이라 한다.
[주22] 족장(族葬) : 같은 조상의 자손을 일정한 지역에 장사 지내어 형성된 묘소를 말한다.
[주23] 송사(訟事)를 판결하였으니 : 묘대부가 방묘(邦墓)를 관장하며 묘지에 관한 분쟁이 있으면 판결하였던 것을 말한다.
[주24] 지리(地理)는 …… 것이다 : 《이정유서(二程遺書)》 권22 상에 “세간에 술수가 많은데, 오직 지리에 관한 서적이 가장 의리가 없다.〔世間術數多 惟地理之書 最無義理〕”라고 하였다.
[주25] 청오경(靑烏經)과 금낭경(錦囊經) : 《청오경》은 한(漢)나라 청오자(靑烏子)가 풍수에 관한 이론을 적은 서적이고, 《금낭경》은 신선술(神仙術)을 적은 책인 듯한데, 저자는 나오지 않는다.
[주26] 맹저(孟豬)의 …… 듯 : 맹저는 하남성(河南省) 상구현(商丘縣)의 북동쪽, 우성현(虞城縣)의 북서쪽에 있던 옛 호수를 말한다. 《서경》 〈우공(禹貢)〉에 “하택을 인도하여 맹저에 이르게 하였다.〔導荷澤 被孟豬〕”라고 하였다.
[주27] 한 줌 …… 있다 : 봉토는 자신의 힘을 모르거나 반대로 잘 알고 있는 것을 이르는 말로서 후한(後漢)의 주부(朱浮)가 어양태수(魚陽太守)의 반란을 한 줌 흙으로 맹진(孟津)의 강물을 막으려는 것과 같다고 한 데에서 온 말이다. 《後漢書 卷63 朱浮列傳》
[주28] 빈흥(賓興) : 주대(周代)에 인재를 선발하던 방법의 하나이다. 향대부(鄕大夫)가 그 지방의 소학(小學)에서 유능한 인재를 천거하여 빈례(賓禮)로 맞이한 뒤에 국학(國學)에 입학시켰다. 《周禮 大司徒》
[주29] 상도가 …… 것이다 : 《맹자》 〈진심 하(盡心下)〉에 나오는 말이다.
風水辨
或問於余曰。風水之說。昉於何代。而盛行於世。下至學士大夫。無不惑之。姑就其輕者言之。卽遠有期。而經時歷年。暴露不臧。爭人之麓。掩人之壟。以期得吉地者有之。子於一鄕。號爲博洽。亦有所考據歟。何子 之門寥寂。無彼輩往來之跡歟。曰。余乃今世之人。公卿之所尊信者。余亦安得違之。顧其術之源派。未有考於經史。亦在疑信之間耳。或曰。易繫曰。仰以觀於天文。俯以察於地理者。何謂耶。玆非風水之原歟。曰。非也。理者。文也。文者。理之著者也。日月星辰之象。昭昭乎上者。天之文也。山川草木之形。秩秩乎下者。地之理也。彼聖人者。得以觀察於俯仰之間。因之畫卦以示人耳。考諸八卦。地高西北。故山居多。不滿東南。故水所歸。艮兌二卦得以據其方。何嘗有某獸某禽各有所主。作壽夭禍福貴賤於人。如世所云云耶。其
所謂五獸之說。尤無義謂。夫以二十八宿起於辰而終於巳。東方七宿。其狀似龍。西方七宿。其狀似虎。故假其狀而謂之獸也。爲風水者附會之。不問其狀之如何。直以在左者爲靑龍。在右者爲白虎。又有以龍爲山。以虎爲水。於義何所當耶。而況聖人必細見其昭然秩然之文。而知其昭然秩然之理也。世所謂堪輿家者流。不識義理。惟利之就者滔滔。而間有目不知文字者。其所以只把五獸之說。而謂某山吉某水凶。某坐福某向禍者。余亦何從而得以信其說耶。或曰。若子之說。世必有包羲氏。然後方能仰觀俯察。若包羲氏者不可復作。而曆象不廢至今。地理之說亦若是矣。曰。凡術之切於民生者。莫不原於先聖。後之人得以祖述而遵守之。風水說。子以爲發於何等聖人耶。自包羲至堯舜。自夏至周。凡歷幾千年。凡經幾聖人耶。包羲。聖人之首。易是文字之祖。其說曰。古之葬者。厚衣之以薪。葬之中野。不封不樹。孟子曰。上世嘗有不葬其親者。親死而委之於壑。他日過之。其顙有泚。歸反蘽梩而掩之。當是時也。棺槨尙不備。況風水耶。逮包羲氏之王天下也。仰以觀象於天。俯以觀法於地。觀鳥獸之文與天地之宜。近取諸身。遠取諸 物。於是始作八卦。以通神明之德。以類萬物之情。夫仰天俯地。近身遠物。莫有所遺。而風水之說。獨無所取。求之十三卦。前聖之所不爲者。後聖起而爲之。是以。爲網罟者。未暇爲宮室。爲舟車者。未暇爲棺槨。然衣食之原。器用之利。法度之章。禮樂之則。凡民生日用之具。尙象制器者。莫不畢備於數聖人之手。韓愈氏曰。如古之無聖人。人之類滅久矣。聖人之生斯民。若是其勞且至。而風水之說。亦在所略。聖人之孝。大與達者。舜與周公也。舜之五十而慕也。未聞葬瞽瞍之如何。其生也以天下養。其死也必以天下葬矣。周公以善繼善述之孝。追王太王王季。上祀先公以天子之禮。而喪之節文。莫備於斯時。亦未聞葬文王之如何。唐虞以上。文獻不足。固無以徵其說也。成周之文。郁郁彬彬。而無一說見於傳記。獨仲尼之葬也。公西赤執禮。三代之器。兼取備文。而亦未聞於風水也。君子之養生。不足以當大事。惟送死可以當大事。是以。親身附棺之物。必誠必信。自歲制月制日制。至毋使土親膚之恔。人子之於親。力之所及。無不得爲。而獨於葬埋也。只有卜筮而已。未知今之君子之孝於其親。勝於古之聖人歟。尤可怪者。年月日時之擇也。古者卜日而已。月不卜也。是以。天子七月而葬。同軌畢至。諸侯五月而葬。同盟畢至。大夫三月士踰月。莫不定制焉。月苟有吉凶。聖人當先擇之。使之趨避。安可先定法制。驅民於凶禍之域歟。古無此說。而風俗淳厖。人皆壽考。自此說之有。而世甚澆漓。夭札相尋。何耶。世之稱風水者必首景純。而身不免刑戮。其葬先之地。吉耶凶耶。未可知也。愚故曰。與其信術士。寧信聖人。假如其術果皆可信。荊揚以南。有山有水。可以擇卜。冀之南漢之陰。無一隴斷。千里一野。工部所謂平野入靑徐。何處著龍虎說耶。漢之士莫智於留 侯。其論都長安也。但曰。左崤函。右隴蜀。沃野千里。天府之國而已。何嘗有五獸方位之說。而漢曆幾四百年。他可知也。或曰。叔世大儒。莫尙於晦菴。晦菴尙且信之。子是何人。而敢肆詆訾於風水耶。如紹興山陵議。亦不足信耶。曰。此亦癡人前說夢爾。當時君臣。擧惑於臺史之妖說。將葬於沙土淺薄之地。燭理之明。愛君之切如晦翁者。其可恝然而不納約自牖耶。其曰。求天下之術士而改卜吉地者。其意以爲與其信妖妄之臺史。寧求天下之術士。與其葬沙土之穴。寧得土厚水深之地。而安君父之體魄也。後之人不知 其所以然曰。晦翁亦信之。是果知晦翁也耶。不然。其答門人山陵之問也。何以曰。他說須要山是如何。水須從某方位盤纏。經過某方位。從某方位環抱。方可用。不知天地如何恰生這般山。依得伱這般樣子耶。可見朱子之意矣。善乎明儒朱彦修之言曰。人之生也。合宗族以居。爲宮室以處。審曲面勢。得則吉。不得則凶。其理較然。及其死也。其神則上參乎天。擧以藏者枯骨耳。積歲之久。幷已朽矣。安能壽夭禍福於人。故葬不擇地。而居必度室。其所謂土宜土圭兩法。用以相民宅而求地中。皆爲都邑宮室設也。此說深合聖王之制矣。或曰。周禮冢人墓大夫。何爲以設也。曰。公墓以昭穆。邦墓以族葬。而聽其訟。非爲風水設也。當時之人。雖欲卜善地。兆域有定所。法令有定制。孰得以犯之。程子曰。地理。術中之最無義理者。夫豈不義而程子言之。是必有道矣。或曰。然則毋問岡麓。皆可葬歟。曰。孝子於親。親身附棺之物。必誠必信。何獨身與棺耶。之幽之所。亦當致誠信之道也。至如信葬師之談。而區區必欲合於靑烏錦囊之云者。非惑則狂也。然則斯弊也。若河決於孟豬之壄。子微且賤。雖切捧土之忱。奈何。曰。亦在反經而已。何者。古之士。務 修於己。無求於外。上之人。賓興而尊用之。必稱其德而已。是以。士無苟得之心。而術從以不岐矣。後之人。於其在己而可爲者。以爲高遠而難行。莫之留意。故旣無以副上之需。別求此杳茫怳惚之術。以僥倖於萬一。故邪說流行。不可救止也。故曰。亦在反經而已。孟子曰。經正則庶民興。斯無邪慝矣。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