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협총설 陶峽叢說 2~ 11
도곡 이의현
2. 《맹자》의 ‘문문왕작흥(聞文王作興)’을 언해(諺解)에서는 ‘작흥(作興)’에서 구를 떼었으나, 이는 옳지 않은 듯하다. 《집주》를 상고해보면 “‘작(作)’과 ‘흥(興)’은 모두 ‘기(起)’이다.”라고 하였으니, 만약 ‘작흥(作興)’을 한 구로 삼았다면 의당 “‘작흥’은 ‘기(起)’이다.”라고만 해야 하고 ‘개(皆)’ 자를 놓아서는 안 되는데 지금 ‘개기(皆起)’라고 말하였으니, 이는 ‘작(作)’에 구를 떼어서 이를 ‘문왕(文王)’에 붙이고 ‘흥(興)’을 구로 삼아서 백이(伯夷)에 속하게 한 것이 매우 분명하다. 언해를 정할 때에 어찌하여 이와 같이 만들었는지 알지 못하겠다.
중국본 《맹자》는 모두 ‘작(作)’ 자 아래에 작은 권점을 찍었으니, 마땅히 ‘작(作)’에서 구를 떼어야 함을 더욱 알 수 있다.
《시경》 〈생민(生民)〉의 ‘이제무민흠유개유지(履帝武敏歆攸介攸止)’를 언해에서는 ‘민(敏)’에서 구를 떼고 ‘흠(歆)’을 아래의 구에 붙였으나, 중국본에는 ‘흠(歆)’ 자 아래에 권점을 붙였으니, 이것 또한 마땅히 중국본을 따라야 할 듯하다.
3. 요(堯)ㆍ순(舜), 우(禹)ㆍ탕(湯)과 문(文)ㆍ무(武)ㆍ주공(周公)은 지위를 얻으셨고 공자와 맹자는 지위를 얻지 못하셨으니, 당(唐 요(堯))ㆍ우(虞 순(舜))와 삼대(三代 하(夏)ㆍ은(殷)ㆍ주(周) 시대)의 정사는 《서경》의 여러 편에서 상고할 수 있고, 공자와 맹자의 큰 경륜(經綸)은 〈애공문정장(哀公問政章)〉, 〈경계장(經界章)〉과 〈반록장(班祿章)〉 등에서 모두 상상해 볼 수 있다.
4. 주자께서 《대학》의 〈보망(補亡)〉 장을 지었는데, 이 장의 문장은 순전히 송(宋)나라 당시의 문체여서 상고 시대의 문장과는 똑같지 않으니, 이는 문장이 후대로 내려옴에 비록 주자 같은 아성(亞聖)도 억지로 노력하여 이루기에 어려움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억지로 고문(古文)을 모방하여 쓰고자 한다면 이 또한 진실한 도리가 아니다. 그러므로 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여기에 근거해보면, 후인(後人)들이 억지로 곁가지의 말을 긁어모아서 고문을 모방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병이 없으면서 얼굴을 찌푸리고 신음하는 결과가 되니, 식자(識者)들이 취할 바가 아님을 알 수 있는 것이다.
5. 《시경》 삼백 편은 모두 사람의 성정(性情)을 모사한 것이다. 이 가운데 정(正)은 온화하고 느슨하며 변(變)은 격렬하고 강개하여 마음이 북받치는 감발(感發)의 단서가 있지 않음이 없는데, 변 중에도 〈절남산(節南山)〉ㆍ〈정월(正月)〉ㆍ〈시월지교(十月之交)〉 등의 편에 이르러는 나라를 걱정하고 세상에 분개하는 마음이 반복되고 가슴에 이리저리 맺혀 있어 글 뜻의 비통함이 다른 편에 비할 바가 아니다.
내가 이 시들을 읽을 적마다 일찍이 한 번도 눈물을 흘리지 않은 적이 없으니, 《시경》이 사람을 감동시킴이 이와 같다.
6. 상고 시대에는 형벌과 옥사를 가장 신중하게 처리하였으니, 예컨대 《서경》 〈순전(舜典)〉의 ‘형벌을 신중히 하셨다.〔惟刑之恤〕’라는 것과 〈강고(康誥)〉의 ‘능히 덕(德)을 밝히고 형벌을 삼가셨다.〔克明德愼罰〕’라는 것과 ‘너의 형벌을 공경히 밝혀라.〔敬明乃罰〕’라는 것과 〈주고(酒誥)〉의 ‘죽이지 말고 너는 우선 가르쳐라.〔勿用殺, 姑惟敎之.〕’라는 것과 〈소고(召誥)〉의 ‘법이 아닌 것을 지나치게 쓴다고 하여, 또한 진륙(殄戮)을 과감하게 결단해서 다스리지 마소서.〔勿以淫用非彝, 亦敢殄戮用乂.〕’라는 것과 〈다방(多方)〉의 ‘죄가 없는 자를 열어 석방함도 또한 능히 권면하는 것이다.〔開釋無辜, 亦克用勸.〕’라는 것과 〈입정(立政)〉의 ‘여러 옥사와 여러 신중히 할 형벌을 그르치지 마십시오.〔勿誤于庶獄庶愼〕’라는 것과 〈군진(君陳)〉의 ‘형벌하여 형벌을 그칠 수 있어야 이에 형벌하라.〔辟以止辟, 乃辟.〕’라는 것과, 그리고 〈여형(呂刑)〉 한 편은 모두 간곡하게 형벌을 조심하고 법을 삼가는 것을 가지고 훈계를 남긴 것이다.
형정(刑政)은 나라를 소유한 자가 최우선으로 해야 하는 것이니, 한번 이것을 잘못하면 혼란과 멸망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후세에는 그렇지 않아서 대부분 군주가 한때의 기뻐하고 노여워하는 감정으로 형정을 사용하여 사람의 목숨을 마치 풀과 골풀을 베듯 가볍게 여기니, 옛날의 ‘떳떳한 형벌로 보여준다.〔象以典刑〕’라는 뜻에 비하면 어떠한가. 참으로 서글프다.
7. 《주역(周易)》이란 책은 오로지 양(陽)을 추켜세우고 음(陰)을 억누르는 것을 강령(綱領)으로 삼았다. 용(龍)은 지극한 양의 정기가 되니, 건괘(乾卦)에 맨 먼저 용을 말한 것은 이 때문이다. 그 뒤의 여러 괘는 비록 모두 용을 말하지는 않았으나 큰 뜻은 똑같으니, 어느 괘도 건괘 범위의 밖을 벗어나지 않는다.
8. 《예기(禮記)》의 문장은 매우 빈틈이 없고 명백하지만 간혹 알기 어려운 구법(句法)이 있는데, 진호(陳澔)의 주(註)가 소략한 흠이 많으니, 탄식할 만하다. 내가 젊었을 적에 이 책을 읽지 못했었는데 계묘년(1723, 경종3)과 갑진년(1724) 사이에 적소에 있으면서 처음 읽어보고 몹시 기뻐하였으며 일찍 공부하지 않은 것을 깊이 한하였다.
9. 《춘추(春秋)》는 성인(聖人)이 혼란을 다스려서 바름으로 돌아오게 한 책이다. 은공(隱公)에서 시작하였으니, 은공 원년은 바로 주(周)나라 평왕(平王) 49년(B.C.722)이다. 평왕이 동쪽으로 천도하여 정권을 잃은 뒤에 혼란이 여기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이것을 가지고 시작을 삼았으니, 성인의 뜻이 깊다.
그 뒤에 주자가 《통감강목(通鑑綱目)》을 편수할 때에도 주(周)나라 위열왕(威烈王) 23년(B.C.403)에서 시작하였으니, 이는 삼진(三晉)이 강성해져서 이 일이 곧 왕실(王室)이 점점 미약해지는 단서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평왕(平王)이 중자(仲子)에게 봉(賵)을 보낸 것과, 위열왕이 조씨(趙氏)ㆍ위씨(魏氏)ㆍ한씨(韓氏)를 명하여 제후로 삼은 것은, 그 정사를 잘못한 것이 흡사하다. 그러므로 모두 이것을 가지고 시작하였으니, 성인의 필법(筆法)이 전후가 똑같은 것이다.
10. 공자께서 《춘추》를 다 지으시자, 공양고(公羊高)와 곡량숙(穀梁俶)이 그 의미를 해석하고 좌구명(左丘明)이 그 일을 기재하였다. 《공양전》과 《곡량전》은 한(漢)나라 무제(武帝) 때에 가장 앞서서 나와 제일 먼저 《춘추》를 드러내었는데 반해, 《좌씨전》은 뒤에 나와서 학관(學官)에 나열되지 못하다가, 위(魏)나라와 진(晉)나라 이후로 사람들이 경쟁적으로 《좌씨전》을 숭상하는 바람에 《공양전》과 《곡량전》은 미약해지고 드러나지 못하더니 지금은 더욱 《공양전》과 《곡량전》을 전공하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공양전》과 《곡량전》이 비록 혹 성인의 본래 뜻에 위배되는 것이 있기는 하나 대체로 문자가 간략하고 심오하며 의리가 순정(純正)하여 《좌씨전》의 허탄하고 과장됨에 결코 견줄 바가 아닌데도, 온 세상이 《좌씨전》을 높이고 《공양전》과 《곡양전》을 버리니, 이 또한 후세의 화려함을 숭상하고 실제를 힘쓰지 않는 병통일 것이다.
11. 영봉인(穎封人)이 고기를 먹지 않고 대답한 것은 짧은 말에 불과하지만 완곡하면서도 재미가 있어서 충분히 군주를 감동시켜 깨닫게 하였고, 후대의 위징(魏徵)의 헌릉(獻陵)의 대답은 이것을 모방하였으나 말이 자못 모가 드러나 있으니, 시대에 따른 인품을 분명히 볼 수 있다.
孟子聞文王作興。諺解以作興爲句。此恐不然。考集註曰。作興皆起也。若以作興爲句。則當但曰作興起也。不當着皆字。而今曰皆起。則以作爲句。屬之文王。興爲句。屬之伯夷者明甚。不知定諺解時。何以如此也。唐本孟子。皆於作字下着小圈。尤可知其當以作爲句。詩生民履帝武敏。歆攸介攸止。諺解以敏爲句。歆屬下句。而唐本則於歆下着圈。此亦似當從唐本矣。
堯舜禹湯文武周公得位。孔孟不得位。唐虞三代之政。書經諸篇。可攷也。孔孟經綸之大。於哀公問政,經界班祿等章。俱可以想像矣。
朱子作大學補亡章。其文純是宋人文體。不類上古文。盖文以世降。雖以朱子之亞聖。有難力致。而若欲强效古文。則亦非眞實底道理。故不爲之耳。據此則後人之强作杈枒鉤棘語。欲以效古者。適足爲無病嚬呻之歸。而非識者之所取。可知矣。
詩三百篇。皆所以模寫性情。正者和緩。變者激慨。無非有感發之端。而至於節南山,正月,十月之交等篇。憂國憤世。反復纏綿。辭意之悲痛。有非他篇之比。余每讀之。未嘗不流涕。詩之感人。有如是夫。
上古最重刑獄。有若舜典之惟刑之恤。康誥之克明德愼罰。敬明乃罰。酒誥之勿用殺。姑惟敎之。召誥之勿以淫用非彝。亦敢殄戮用乂。多方之開釋無辜。亦克用勸。立政之勿誤于庶獄庶愼。君陳之辟以止辟乃辟及呂刑一篇。無非眷眷以恤刑愼法。垂之訓戒。盖刑政。有國之所先。一誤于此。亂亡隨之故耳。後世則不然。率多以人君一時喜怒。輕視人命。若刈草菅。其視古者象以典刑之意。何如哉。悲夫。
易之爲書。專以扶陽抑陰爲綱領。龍爲至陽之精。故乾卦首以龍爲言者此也。其後諸卦。雖不皆言龍。而大旨則同。盖不出乾卦範圍之外也。
禮記之文。極周匝明白。而間有句法之艱晦者。陳澔 之註。多欠疎漏。可歎。余少時。不讀此書。癸卯甲辰年間。在謫所始讀之。甚喜。深恨其不早着工也。
春秋。聖人撥亂反正之書也。託始於隱公。卽周平王四十九年。東遷失政之後。亂始於此。故以此爲始。聖人之意深矣。其後朱子修綱目。亦始於周威烈王二十三年。以其爲三晉强盛。王室寢微之端也。平王歸仲子之賵。威烈命趙魏韓爲諸侯。其失政恰同。故俱以此始之。聖人筆法。前後一揆矣。
孔子旣作春秋。公羊高,穀梁俶析其義。左丘明載其事。公,穀最先出漢武帝時。首表章之。左氏後出。不得列於學官。自魏晉以後。人爭尙左氏。公,穀微而不著。今則尤無治公,穀者。公,穀雖或有違戾於聖人本旨者。大較文字簡奧。義理純正。大非左氏浮誇之比。而擧世主彼而棄此。亦後世尙華不務實之病也歟。
封人舍肉之對。不過片言。而婉而有味。足以動悟人主。後來魏徵獻陵之對。倣此而語稍有角。時代人品。居然可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