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덤불 속>과 구로자와 아키라의 영화 <라쇼몽>에서 사실(fact)은 '무사가 죽었다.'와 '무사의 아내가 도둑에게 겁탈당했다.' 두 가지다. 영화와 소설은 이 두가지 자실을 놓고서, 관아(법정)에서 현장을 목격한 나무꾼, 사건이 일어나기 전 무사와 그의 아내와 마주친 스님, 도둑을 체포한 방면(放免), 무사(다케히로), 그의 아내(마사고), 그리고 도둑(다조마루)의 증언으로 이루어져 있다. (류노스케의 <덤불 속>에서는 마사고의 어머니의 증언이 들어가 있으나 중요하지 않다.) 영화와 소설은 무사와 그의 아내, 그리고 도둑의 증언을 중심으로 사실과 진실, 참과 거짓의 문제를 드런내다. 우리는 소설과 영화를 통해 무엇이 참이고 거짓이며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다. 다만 각자의 이야기와 해석만이 드러날 뿐이다.
1. 덤불 속과 관아 - 덤불속은 어둠의 자리, 사건의 자리, 그림자, 사실과 진실, 거짓과 참이 경쟁하는 자리이다. 사건은 그러므로 덤불 속에서 발생한다. 사건이 발생하는 곳이라면 그곳이 어디이든 덤불속이라 할 수 있다. 진리는 백색의 빛, 구석구석을 샅샅이 훓어가는 서치라이트 빛 속에 존재할 수 없다. 진리는 수줍어 하는 여성과 닮았다. 여성의 얼굴은 너무나 눈부신 빛 속에서 결코 볼 수 없다. 여성은 화장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관아-심판, 판정, 권력의 자리-는 덤불을 심판자의 자리로 소환하여 사건-진실을 해체하고 사실을 구성하고자 한다. 누가 죽였는가?(사건의 주체), 왜 죽였는가?(사건의 동기), 어떻게 죽였는가?, 언제 죽였는가? ...등등의 육하원칙하에 사건을 구성하려고 한다. 관아는 행위자의 의지, 충동, 욕망을 묻지 않는다. 관아는 진실을 묻지 않고 사실을 묻는다. 그러므로 뮈르소(카뮈의 이방인의 주인공)의 살인이라는 사건에 대해 관아(법정)은 이해할 수 없다. 관아는 주체의 확실성, 사실의 불변성을 묻는 자리이다. 그는 아주 존엄하고 지고지순한- 일점의 사심도 없이, 오로지 객관적인 심판을 내리겠다는 얼굴로 앉아 심판하고자 한다. 그러나 <라쇼몽>에는 이 심판자의 자리가 부재한다.
구로자와 아키라의 <라쇼몽>에서 우리는 카메라의 시점에 주목해야 한다. 관아의 장면에서 카메라는 앉아서 증언하는 자의 시선에 고정되어 있다. 그것은 우리에게 마치 객관적이고 공정한 심판을 내리는 자의 시점에 설 것을 요구하는 듯하다. 반면 관아에 소환되어 나온 인물들의 이야기들을 되돌리는 덤불 속을 비추는 카메라의 시점은 끊임없이 흔들린다. 우리는 이 두가지 카메라 시점에서 어떤 정서의 변화를 야기한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불안하고 흔들리는 시점에서 벗어나 고정되고 안정적인 시점으로 이동하고자 하는 충동을 느끼게 된다. 왜 그런가? 우리는 주체의 확실성, 충동, 욕망을 이성적으로 제압하고 통제하고자 하는 욕구를 느낀다. 우리는 이미 어떤 주체-이성의 확실성이라는 우상에 침윤된 존재이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 자리(그 부재의 자리)에 소환되는 것은 무엇인가? <라쇼몽>은 우리를 그 자리로 소환하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런데 그 자리에 소환된 우리는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를 판정해야 하는 절대자, 심판자, 신을 대신할 수 있을까?
2. 이야기, 이야기, 이야기들 – 그 자리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어쩌면 그 자리에서 우리는 육하원칙에 기초하여 잘 조직되고 질서정연하게 드러나는 사실과 진실을 보게 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환영들을 보게 되는 것은 아닐까? 주체도 없고, 본질도 없고, 다만 자신이 진실이라고 주장하는 이야기들, 그 이야기들이 자아내는 아를르갱(Arlequin-알록달록하게 기워진 옷을 입은 익살광대 )을 보는 것은 아닐까? <라쇼몽>은 사건의 해결-사건의 진상과 범인의 색출)-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다. 다만 이야기만 살아서 움직인다. 사실 누구의 이야기인가 조차 중요하지 않다. 이야기 자체가 발산하는 힘, 강도, 어떤 충동과 의지만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 같다. <라쇼몽>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는 다조마루, 다케히로, 마사고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들은 이야기를 해석-실어나르는- 할 뿐이다. <라쇼몽>에서 이야기는 자신의 신체(몸)을 가지고 꿈틀거리며, 의지를 발산한다. 그것은 참/거짓, 진실/사실의 구획을 벗어나 자신의 생명력을 발휘하며 살아 꿈틀거린다. 이야기가 이야기를 낳고, 그런데 하나의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를 배신한다. <라쇼몽>에서 이야기는 배신의 이야기다. 도둑의 이야기는 무사 아내의 이야기를 배신하고, 무사의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를 배신하는데, 무사의 아내의 이야기는 두 번 배신한다. <라쇼몽>에서 이야기는 각자의 충동에 의해 서로를 배신하며 진실과 거짓의 경계를 지워나가거나 확장해 나간다. 경계를 지우거나 확장하면서 이야기는 자신의 생명력을 생성해 나가고 있다.
3. 얼굴 – 들뢰즈(Gilles deleuze)는 ‘얼굴이 곧 정치다’고 했다. 정말 그렇다. 구로자와 아키라의 <라쇼몽>은 얼굴이 곧 정치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자신 앞에서 겁탈당한 아내를 바라보는 무사의 얼굴이야말로 권력의 얼굴이 아니고 무엇인가? 제도, 체제, 권력의 얼굴을 무한 방사하는 무사의 얼굴에서 자신에 대한 경멸을 느끼며 공포에 질리는 그의 아내의 얼굴이야말로 정치가 아니라면 무엇일까? 얼굴은 머리가 아니다. 동물에게는 얼굴이 없다. 원시인에게는 얼굴이 없다.- 로빈슨 크루소가 프라이데이에게 가하는 문명화는 결국 얼굴 없는 미개인-야만인에게 서양인의 얼굴을 기입하는 작업이다. 광인에게는 얼굴이 없다. 시험지를 바라보는 수험생의 얼굴, 교사에게 야단을 맞는 학생의 얼굴, 수유하는 여인의 얼굴, 서로를 마주보는 연인의 얼굴... 이 얼굴이란 결국 하나의 이데아, 형상의 복사물이 아닌가? <라쇼몽>에서 마사고(무사의 아내)가 그의 남편에게서 본 얼굴이란 부정한(부정탄) 아내에 대한 가부장제의 얼굴인 것이다. 그리고 이 얼굴은 자신의 적(도둑)과도 공모할 수 있는 얼굴이다. 왜냐하면 무사와 도둑의 얼굴은 근엄한 가부장제의 얼굴이기 때문이다. 결국 자기 남편의 얼굴에서 자신에게 죽음을 선고하는 가부장제의 얼굴을 눈치(!) 챈 마사고의 공포에 질린 얼굴은 그것이 필연적으로 전쟁임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그리하여 우리는 <라쇼몽>에서 무사가 왜 죽어서도 관아에 나와 증언하는지 이해하게 된다. 그것은 죽음 이후에도 지속되는, 유지되어야 하는 가부장제의 끈질긴 얼굴이며, 죽음의 장에서마저 선포(선고)되는 권력의 얼굴인 것이다. 아니 오히려 타자의 죽음(남편인 무사의 죽음)이야말로 가부장적 얼굴의 강력함을 보증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우리는 구로자와 아키라의 <라쇼몽>에서 마사고에 의한 두 번의 배신을 통해 어떤 얼굴 지우기(해체하기)의 가능성을 본다. 한번은 남편을 죽임으로써, 또 한번은 “여인은 칼로 쟁취할 수 있다.”는 선언을 통해. 남편의 경멸에 찬 눈길을 외면하는 것과 도둑과 남편이 공유하는 가부장제의 얼굴의 모방을 해체함으로써.. 나무꾼의 증언에서 도둑과 남편은 마사고의 선언으로 그야말로 개싸움을 벌인다. 거기에는 가부장제가 가장한 근엄한 얼굴도, 도둑이 자신의 행위에 부여했던 명예로운 싸움도 없다. 그들의 그런 싸움이야말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얼굴이 얼마나 가벼운 것인지를 입증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4. 삶의 조건으로서의 거짓 – 얼마나 많은 철학이, 사상이 자신이 진리임을 주장하고 있는가? 그러나 모든 인식은 거짓이며 오류다. 우리는 이 세계를 그 자체로 인식할 수 없다. 우리는 세계를 인식하기 위해 세계 그 자체의 흐름, 그 무한한 생성을 절단해야 하고 단순화해야 하며 추상하여 표상해야 한다. 말 그대로 끊임없이 생성하고 유동하고 있는 세계를 대충 흐릿하게 인식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미쳐버릴 것이다. 세계가 발산하는 그 무한한 힘들을 견딜 수 없다. 우리는 ‘자신의 생명을 촉진하고 보존하며, 육성하기 위해, 즉 삶을 확장하기 위해’ 오류마저도 삶의 조건으로 인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로자와 아키라의 <라쇼몽>이 플래쉬백(flashback)이라는 기법을 사용하는 이유를 이해하게 된다. 플래쉬백은 통상적으로 현재에서 과거를 회상하기 위해 사용하는 영화적 기법이다. 현재에서 과거를 소환하기 위해 우리는 기억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 기억은 항상 표상-재현의 체계 위에서 작동한다. 우리는 기억하고 싶은 것만을 기억하고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은 망각하거나 억압한다. 그리고 기억마저도 왜곡된다. 이것은 인간의 한계가 아니라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인식의 필연성이다. 인식은 필연적으로 오류이고 거짓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라쇼몽>의 플래쉬백 장면에서 카메라가 불안하게 흔들릴 수 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것은 어떤 고정점, 절대적 척도, 일자를 소환할 수 없는 것이다.
단일한 진리는 없다. 다만 복수의 경쟁하는 진리만이 존재할 뿐이다. 우리는 자신의 삶을 더 고양하고 더 확장하기 위해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존재이다. 이것을 니체는 관점주의(perspectivism)라고 했다. 세계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있고, 이 해석들이 경쟁하고 부딪히고 전투를 벌인다. 세계에 대한 더 나은 해석과 그 해석들의 경쟁이 있다.- 아테네인들은 단 하나의 진리를 주장하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힘을, 생을 확장하려는 독재자의 출현을 막기 위해 진리의 경쟁장인 아곤(Agon)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와 구로자와 아키라의 <라쇼몽>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거짓과 참, 진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아니라, 당신의 삶을 이끌어가고 있는 충동은 어떤 이야기들을 생산할 수 있는지를 묻고 있는 것이 아닐까?
- 구로자와 아키라 <라쇼몽> 볼레로 듣기
https://youtu.be/2yXttfmXqus?si=l4BZ_18-g42ZLqjK
첫댓글 니체의 관점주의를 진리는 없으며 어떤 관점도 허용될 수 있다는 다원주의 혹은 절대적 상대주의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관점이란 세상을 해석하는 역량과 관련이 있으며 그 역량은 매번 달라질 수 밖에 없다. 개구리의 관점과 독수리의 관점은 그 역량의 차이로 인해 세상을 다르게 해석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 역량은 개체와 개체, 사물과 사물 사이의 차이에서 발생할 뿐 아니라 자기에게도 발생하는 것이다. 어제의 나의 역량과 오늘의 나의 역랑은 다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즉 더 나은 관점이란 세상을 해석하는 더 나은 역량을 가지게 되었다는 말과 같다. 니체의 관점주의는 더 많은 체험과 더 많은 실험과 실행을 통해 세계는 더욱 다채롭고 풍부하게 다가올 것이라는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