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의 말|
서정의 고요한 햇볕
정홍순(시인)
진영훈의 말결은 고요하면서 깊다. 젖은 날개 털고 날아오르는 산새처럼 비상하는 몸짓을 가졌다. 땅으로만 내려앉지 않고, 속절없이 날지도 않는 부드러운 털끝으로 바람을 모으는 법을 가지고 있다. 그의 사유로 펼치는 날갯짓은 사람들 근처에 머물러 있다. 범접하지 못할 기세를 남용하지 않기에 글을 읽는 이들과 쉽게 가까워질 수 있는 친화력을 가지고 있다.
진영훈은 제 몸의 기운으로 눈을 녹이고 푸르게 일어서는 마늘 싹 같은 애린(愛隣)의 힘이 들어있다. 무정한 사회, 차가운 평행선을 넘어서고자 하는 따뜻한 시선을 촉구하는 그의 마음속에 오래전부터 소록도 수탄장(愁嘆場)의 울음이 배어있다. 삶을 지탱해 주는 단 하나의 의미 가운데 편견의 평행선을 거둬내고자 하는 애린의 기운으로 독자들을 만나고자 한다.
저자가 꾸미는 시간의 목록은 이렇다. 지나간 것은 낡은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 묻어둔 씨앗 같은 것이고, 사람과 사람 사이, 그 좁은 틈새로 스며드는 온기야말로 우리가 서로를 기억하는 가장 다정한 방식이며, 한바탕 휘몰아친 비바람 끝에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는, 바람이 눕는 방향으로 몸을 맡기는 자신의 자리를 통해 다양한 시간을 펼쳐보이고자 애쓴다.
진영훈은 이 ‘볕뉘’의 순간들을 오랫동안 아껴[愛]온 사람이다. 사진기를 들고 이웃들의 얼굴을 찍으며 기록으로 남길 뿐만 아니라 읽어왔다.
“사진이 갖는 힘은 실로 대단하다. 수많은 활자를 채워 넣지 않아도 단 한 장의 사진이 한 생애의 질감을 온전히 설명해 줄 때가 있다. 렌즈를 통과한 빛은 단지 대상을 복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를 바라보는 이의 다정한 시선을 인화해 낸다. 어떤 렌즈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세상사 희로애락의 명암도 달라진다. 영정사진도 마찬가지다. 고인이 평생을 살며 지었던 가장 환한 미소로 멈춰 서 있다면, 슬픔으로 가득 찬 빈소일지라도 남겨진 이들은 그 미소로부터 가만히 위로를 건네받을 것이다.”
영정사진을 ‘장수사진’이라 하지 않고 ‘인생 최고의 사진’으로 부르고자 하는 그의 속내에서 알 수 있듯이 “세상을 인식하게 하는 가장 숭고한 감각”은 “삶에 빛과 색채를 부여하”는 것이라 말하고 있다. 보는 각도에 따라서 다르게 보이는 사물이나 피사체가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인식의 제한이 만드는 ‘편견’이라는 렌즈가 문제인 것임을 지적하고 있다. 찰나의 순간이지만 영원히 바래지 않을 인생의 명작으로 다루고 싶은 그의 손에는 이렇듯 사랑과 고백이 늘 작동하고 있다.
진영훈의 시선은 사진으로 인화되고, 글로 기록되는 사랑의 온기다. 「사람을 읽다」에서 사진을 통해 꿈꾸는 세계를 밝힌 것처럼 “풍경 사진 안에는 결국 삶의 터전을 일군 사람의 자취가 스며 있고, 인적 없는 풍경이라도 그곳에 사람의 시선이 머무는 순간, 사진의 중심은 다시 ‘사람’이 된다.”는 휴머니티[仁愛]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렌즈의 초점은 결국 사람을 향해 있었다.”는 그의 인생 연주법은 ‘잠깐 비치는 햇볕’이라 할지라도 울림으로 깊이 스며드는 ‘신명’을 이치로 하고 있다. 하여 진영훈의 온기는 ‘정’으로 나누고 사는 인간관계에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최근 전 세계를 사로잡은 K-드라마의 인기 비결 역시 화려한 영상미가 아니라 그 바탕에 흐르는 ‘정(情)’이라는 보편적인 온기 때문이라고 한다.”는 말을 빌려서 정으로 엮어가는 그의 인생은 위트와 눈물이 있고, 배려와 오래 기억하고 싶은 인연이 자리하고 있다.
천성이 따뜻하고 조금은 여린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진영훈에게서 참된 원(願)을 품고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볼 수 있다. 원(願)은 바라다, 마음에 품다, 희망하다, 빌다, 기원하다, 청하다, 부탁하다 등으로 쓰인다. 진영훈은 원을 품고부터 사랑과 정(情)의 동인(動因)이 되도록 발원한 것이 다름 아닌 문학, 글쓰기다.
“글을 쓰며 마음의 중심을 단단히 붙잡으니, 비로소 온 세상이 새롭게 눈에 들어온다. 매일 무심히 바라보던 하늘과 나무, 꽃, 그리고 길가의 풀 한 포기와 굴러다니는 돌멩이마저도 온통 새롭고 다정하게 다가온다. 종교에서 말하는 거듭남의 성스러운 체험과 결코 다르지 않다. 과연 문학에는 나를 구원하고 치유하는 힘이 있음을 온 마음으로 인정하게 된다. 비로소 참된 원을 품고 거듭남을 체험하니, 매일 맞이하는 소박한 일상이 잔잔한 기대와 설렘으로 가득 채워진다.”
진영훈은 글을 통하여 친구들을 소환하고, 고향의 옛일들을 함께 나누며, 잊히는 입말들을 복원하고, 삶의 흔적들을 통해 감성의 문을 열어 만나게 해주는 언어의 구도자가 되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만일 내가 글을 쓰고 있지 않다면 지금 무엇 하며 지내고 있을까?”라고. 이제는 종교적 체험만큼이나 소중한 “글을 쓰며 마음의 중심을 단단히 붙잡”은 원을 품게 되었다.
참된 원(願)을 품게 된 진영훈의 글에는 다양한 스펙트럼이 들어있다. 조각보같이 단편적인 이야기들이지만 따뜻한 밥상을 덮어 아랫목에 놓인 밥상보와 같다. 구도자의 삶에 대하여 “매일 내게 주어진 삶의 자리를 묵묵히 지켜내는 일, 오직 그뿐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그는 분명 글이 되는 것과 글이 되지 않는 것을 터득하였다.
“풀 한 포기와 굴러다니는 돌멩이마저도 온통 새롭고 다정하게 다가온다.”는 진영훈은 내면의 소리도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내 안에서 울리는 양심의 소리에 모든 것을 건 무모한 올인이었”던 일들이 앞으로는 더 작가의 의식을 통해 확장될 것이다. 그는 최소한 지혜롭게 사는 법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몸으로 터득한 자전거 배우기의 절대적인 비결이 하나 있다. 넘어지려는 쪽으로 핸들을 꺾는 것이다. 쓰러지려고 하면 반대편으로 몸을 틀어 어떻게든 버티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다. 하지만 자전거는 신기하게도 넘어지는 방향에 순순히 몸을 맡기고 핸들을 틀어주면, 거짓말처럼 쓰러지지 않고 다시 앞으로 굴러간다.”
멀미 날 때와 마찬가지로 진영훈이 터득한 사실은 ‘경험’을 바탕으로 했다는 것이다. 이는 몸으로 배우고 기억한 자산 ‘체득(體得)’이다. 수필의 골계미와 맞닿아 있는 얼마나 바람직한 자세인가. 그는 누구를 설득하려거나 주장하려고 글을 마련하지 않았다. 평범하지만 진솔하게 사는 이들의 이야기, 안타까운 친구의 죽음을 읽으며 눈물이 사치스럽지 않았음을 보았고, 끈끈하게 인연한 우정의 모습을 보았다.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아버지의 지문 이야기(「삶의 지문」)는 글의 절정을 이룬다. 어머니(「본동댁」) 또한 한 가족사를 넘어 “집안의 비극”에 “마침표”를 찍은 우리 모두의 위대한 어머니 이야기로 기억될 것이다. “입관식에서 마주한 아버지의 손에는 혹독한 겨울을 버텨낸 나무처럼 수많은 나이테가 둘러쳐져 있었”음을 본 저자가 왜 우리의 마음을 흔드는 바람인가를 알 수 있는 것은, “끊어진 듯 끝없이 이어져 있는 흔적과 굴곡들. 그것은 삶이라는 칼날이 정직하게 새겨놓은 지문(指紋)이었다.”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진영훈의 정신은 청량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글들을 쓸 수 있었다. 그의 마음속에 감춰져 있던 이런 이야기들을 스스로 잘 쓰다듬어 낸 아름다운 마음이기도 하다. 글을 쓰며 받은 치유와 힘은, 글을 읽으면 똑같은 효험을 이루게 될 것이다. 따뜻한 온기를 전하기 위해 마련한 진영훈의 글 마당에 찬사를 보낸다.
진영훈의 이번 모든 글 속에는 세상을 아름답게 보려는 따뜻한 시선이 들어있다. 긍정의 마음과 힘이다. 그것은 순간의 햇볕으로 뿜어내는 정신의 복원력이며, 빛의 조각으로 엮은 언어로 ‘삶의 무늬’를 만들어낸 생명의 장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