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로 인한 또 하나의 성장- 3412한재영
가을 끝 무렵 이제는 제법 많이 쌀쌀해진 2학년 2학기 때의 마지막 영어 수행평가. 나는 그날을 잊지 못한다. 책상 위에 펼쳐진 종이 속 수많은 영어 문장들을 손으로 되새기며, 한 문장 한 문장 내 입에 익히던 밤들. 나는 내 목소리가 내 귀에 익숙해질 때까지, 그 영어 문장들을 말하지 않을때도 머릿속에 생각날때까지나는, 하물며 꿈 속에서도 그 영어 문장들이 떠오를 때까지, 나는 쉼 없이 외웠다. 이제 완벽하다고, 내 마음은 믿고 있었다. 하지만 허망한 꿈이었다.
드디어 발표의 날. 교실은 내 심장소리가 들릴만큼 조용했고, 친구들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손에 땀이 배어들었고, 심장은 아까와는 다르게 쿵쾅쿵쾅 더 빠른 속도로 뛰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일어나, 칠판 앞에 섰다. 나는 숨을 깊이 들이쉬고, 첫 문장을 내뱉었다. 오랫동안 외었던 덕분에 다행히 저는 부분 없이 술술 입 밖으로 문장들이 나왔다. 하지만 중간 쯤 넘어가던 그 순간, 내 머릿속은 눈 내린 들판처럼 새하얘졌다. 아니 어쩌면 칡흑 같은 암흑으로 컴컴해졌을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그렇게 애써 외웠던 영어 문장들, 밤새도록 반복했던 영단어들이 모두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그렇게 모두 어디론가 떠나버렸다. 나는 멍하니 서 있었다. 시간이 멈춘 듯, 내 입과, 몸은 마치 매두사를 본 듯 돌처럼 굳어 움직여지질 않았다. 친구들의 시선은 무겁게 내려앉았다. 마침내 내 입술은 떨렸고, 목소리는 잘 나오지 않았다. 겨우 마지막의 한두 마디를 더듬거리며, 발표가 끝났고 나는 자리로 돌아왔다. 좌절감이 밀려왔다.
말하기 수행평가에서 머릿속이 새하얘졌던 그날 이후, 나는 오랫동안 내 자신을 원망했다. 왜 나는 남들처럼 자연스럽게 말하지 못할까?, 왜 내 목소리는 늘 떨릴까?, 왜 나는… 내 안의 두려움은 점점 커져만 갔다. 이런 저런 생각들로 고민하다 보니 나의 성향 문제라고 결론 지어져 청소년 상담 센터에 직접 찾아가게 되었다. 아무리 직접 찾아갔다 해도 처음 보는 건물과, 처음 맡는 낯선 향기들에 나는 또 떨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런 나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막상 상담사분을 만나니 파도에 씻겨나가듯 모든 걱정들이 사라졌다. 학교에서 발표를 할 때마다 걱정이 많다고 털어놓자 상담사분은 처음으로 내게 칭찬을 해주셨다. 왜 칭찬을 해주시는지 내가 의아해하자 상담사분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청소년 상담 센터에 찾아와 자신의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 것 부터 이미 다 해결한 거라고, 많이 성장한 거라고 정말 대단하다고 하셨다. 그리고 이런 질문을 하셨다. 발표할 때 어떤 기분이 드나요?”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곤 손이 차가워지고, 심장이 빨리 뛰고, 내가 틀릴까 봐, 모두가 나를 쳐다볼까 봐 두려웠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상담사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건 아주 자연스러운 감정이라고. 누구나 떨릴 수 있고, 그 떨림도 긴장도 너의 소중한 일부라고. 그 떨림과 긴장을 너무 싫어하거나 꼭 없애야 한다는 마음을 버리라고. 나는 이 말을 듣고 그동안의 내 삶을 돌아보게 되었다. 항상 떨리거나 긴장될 때 나는 그 모습의 나를 정말 싫어했다. 남들은 안이러는데 왜 나는 이렇지? 어떻게 해결해야 하지? 하면서 나를 미워했다.
상담을 통해 나는 내 안의 떨림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것은 나약함이 아니라, 내가 무언가를 잘하고 싶어서, 남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서 생기는 감정이었다. 나는 내 마음속 불안과 두려움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이제 나는 발표를 앞두고 떨릴 때마다 내 마음속에 조용히 말한다. "괜찮아, 너는 떨릴 수 있어. 그 떨림 덕분에 너는 더 성장할 수 있으니까." 상담을 통해 나는 나를 조금 더 사랑하게 되었다, 조금 더 믿게 되었다. 완벽하지 않아도, 떨려도, 긴장돼도, 나는 나다. 그리고 그 떨림마저도 나를 발표에서 설 수 있게 하는 용기의 또 다른 이름임을 이제 나는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