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종 대왕의 어서 〈명사강목 부록 뒤에 제하다〉라는 문초 한 폭에 대한 발문
〔正宗大王御書題明史綱目附錄後文草一幅跋〕
생각건대, 우리 성고(聖考 정조)의 성대한 덕과 위대한 사업은 역사서에 이루 다 기록할 수 없거니와 또한 《춘추(春秋)》의 대의를 밝힌 것보다 더 성대한 것은 없다. 봉실(奉室)의 의식을 갖추고 궐자패(闕字牌)를 따로 만든 것, 용만(龍灣 의주(義州))의 제단을 설치하고 한려(漢旅)의 명칭을 하사한 것과 《존주록(尊周錄)》을 편찬한 것으로 말하면 이미 선대의 왕을 빛내고 후손을 계도한 것이다. 더군다나 또 재위 25년 동안 황단(皇壇 대보단)의 늦봄의 제향과 세 황제〔三皇〕의 기신(忌辰)의 예를 몸소 받들어 친히 행하지 않은 적이 없어 재계하고 깨끗이 하며 삼가고 두려워하기를 미치지 못할 듯이 하였으니, 이는 신(臣)이 16년 동안 성고를 받들어 모시면서 항상 우러러보며 감탄한 것이다.
동지돈녕부사 홍낙륜(洪樂倫)의 집에 성고께서 어린 시절에 직접 쓴 〈명사강목 부록 뒤에 제하다〉라는 문초 한 폭이 있다. 그 대의(大意)는, 이현석(李玄錫)이 편찬한 《명사강목》에서 홍광(弘光)을 부록에 실은 것이 자양(紫陽 주희(朱熹))의 필법과 서로 배치된다는 것 을 엄정히 변별하고 통렬히 물리친 것이다. 그 글의 문사(文辭)가 화려하여 비록 덕(德)을 완성한 이후의 의리가 정심(精深)하고 뜻이 준정(峻正)한 글만은 못하지만, 해와 별처럼 빛나고 추상(秋霜)처럼 엄정하니 자양이 다시 살아난다고 하더라도 바꿀 수 없을 것이다. 신(臣)은 이제야 재위 25년 동안 《춘추》의 대의를 밝힌 것이 바로 이 글에서 시작되었음을 알았다. 아! 성대하다.
올해의 태세(太歲 간지(干支))는 바로 숭정제(崇禎帝 명나라 의종)가 사직과 함께 순절한 해와 같은 달이요 홍광(弘光 남명 복왕(福王))이 계승하여 등극한 해이니, 풍천(風泉)의 감회가 이미 길고, 궁검(弓劍)의 애통함이 더욱 새롭다. 이에 참람함을 잊고 삼가 이렇게 발문을 짓는다.
갑신년(1824, 순조24) 3월에 서청(西淸)의 옛 신하인 김조순이 삼가 쓰다.
[주1] 정종 …… 발문 : 1824년 3월에, 정조가 어린 시절에 《명사강목(明史綱目)》을 읽고 남명(南明)의 역사를 본문이 아닌 부록(附錄)에 기록한 것을 비판한 글에 붙인 발문이다. 《명사강목》은 이현석(李玄錫)이 1703년에 편찬한 중국 명(明)나라의 역사서로, 명 태조(明太祖)에서 영명왕(永明王)까지의 사실을 수록하였다. 총 24권 30책으로 제30책은 보유(補遺)와 부록(附錄)인데, 남명의 황제들을 이 부록에 따로 실어놓았다. 이 때문에 이현석이 남명을 정통으로 취급하지 않았다는 후대 인물들의 비판이 많이 제기되었다. 이현석의 본관은 전주이고, 자는 하서(夏瑞)이며, 호는 유재(游齋)이다. 이수광(李睟光)의 증손이다. 1675년(숙종1)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형조 판서에 이르렀다. 1694년에 청풍 현감으로 나가서 《명사강목》을 저술하였다. 저서로 《역의규반(易義窺斑)》과 《유재집(游齋集)》이 있다.
[주2] 봉실(奉室)의 의식을 갖추고 : 봉실은 대보단(大報壇) 내의 명나라 태조(太祖)ㆍ신종(神宗)ㆍ의종(毅宗) 세 황제의 신탑(神榻)을 모신 곳이다. 처음 설치되었을 때에는 신실(神室)로 부르다가 영조 때 봉실로 명칭을 변경하고 건물도 새로 지었다. 영조는 또 1758년(영조34) 12월에 예조에 명하여 《황단봉실의(皇壇奉室儀)》를 짓게 하였다. 한편, 정조가 대보단을 참배하며 여러 가지 의식의 수정을 명한 내용이 〈정조대왕행장(正祖大王行狀)〉에 보인다.
[주3] 궐자패(闕字牌)를 …… 것 : 궐자패는 ‘궐(闕)’ 자가 새겨진 패를 말하는 것으로, 궐패(闕牌)라고도 하였다. 왕을 상징하는 것으로, 각 고을의 객사에 두고 수령이 그 앞에서 망궐례(望闕禮)를 행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궐자패는 중국의 황제를 상징하는 것으로, 중국의 칙사(勅使)나 칙서(勅書)를 맞이할 때와 중국의 황제 등이 서거하였을 때 전각 안에 이를 설치하고서 사배례(四拜禮)를 행하였다. 정조는 청나라의 칙서를 맞이할 때 쓰는 궐자패를 대보단에서 망배례를 행할 때 같이 쓰는 것은 문제가 있다 하여, 대보단에 망배례를 행할 때 사용하는 궐자패를 따로 만들게 하였다. 《正祖實錄 6年 6月 5日》
[주4] 용만(龍灣)의 제단을 설치하고 : 정조가 1798년(정조22) 7월 23일에 임인관(林寅觀) 등 명나라 유민을 의주(義州)의 현충사(顯忠祠)에 제향하게 한 것을 말한다. 임인관은 명나라 상인으로 1667년(현종8)에 표류하여 제주(濟州)에 상륙하였는데, 명나라로 돌려보내 주기를 원했으나 당시 조정에서 이들을 청나라 북경으로 압송하여 피살되게 한 사건이 있었다. 정조는 임인관 등을 제향하게 하고 그 감회를 시로 읊기도 하였다. 《正祖實錄 22年 7月 23日》 《弘齋全書 卷7 命築壇龍灣 歲侑皇朝遺民林寅觀等九十五人……》
[주5] 한려(漢旅)의 …… 것 : 한려는 명나라 사람의 자손 중에 무관(武官)을 지낸 사람을 돌려가며 대보단에 번 들게 하던 군대를 말한다. 원래 효종이 심양(瀋陽)에서 환국할 때 8성(姓)의 한인(漢人)이 호종하여 우리나라에 왔는데, 그 후손을 훈련도감에 소속시켜 ‘한인아병(漢人牙兵)’이라 하였다가 1790년(정조14)에 ‘한려’로 명칭을 고쳤다. 《正祖實錄 14年 3月 19日》 《萬機要覽 軍政篇2 訓鍊都監 軍摠》
[주6] 존주록(尊周錄)을 편찬한 것 : 《존주록》의 정식 명칭은 《존주휘편(尊周彙編)》으로, 1595년(선조28) 신충일(申忠一)을 건주위(建州衛)에 사자(使者)로 보낸 이후부터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거쳐 정조가 죽을 때까지 대후금(對後金)ㆍ대청(對淸)의 전란과 교섭사 및 이와 관련된 여러 신하의 사적을 모은 책이다. 20권 7책으로 1800년(정조24)에 정조의 명에 따라 간행하였다.
[주7] 세 황제〔三皇〕 : 대보단(大報壇)에 제향한 명나라 태조(太祖)ㆍ신종(神宗)ㆍ의종(毅宗)을 말한다.
[주8] 홍낙륜(洪樂倫) : 본관은 풍산(豊山), 혜경궁(惠慶宮) 홍씨(洪氏)의 친동생이다. 돈녕부 도정과 동지돈녕부사 등을 지냈다.
[주9] 홍광(弘光)을 …… 것 : 이현석(李玄錫)이 《명사강목》에서 남명(南明)의 역사를 부록에 기록한 것이 주희(朱熹)가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에서 정통을 분명히 하고 찬탈을 배척했던 필법과 서로 배치된다는 말이다. 홍광은 남명 복왕(福王)의 연호로 1644년부터 1645년까지 사용되었다.
[주10] 올해의 …… 해이니 : 갑신년이라는 말이다. 숭정황제가 순절하고 복왕이 왕위를 이은 것은 갑신년인 1644년 3월이다.
[주11] 풍천(風泉)의 …… 새롭다 : 풍천의 감회는 멸망한 명나라에 대한 애통한 심정을 말한다. 풍천은 《시경》 〈비풍(匪風)〉과 〈하천(下泉)〉을 이르는데, 모두 제후의 대부가 주나라 왕실이 쇠미해진 것을 탄식해 읊은 시로 망한 왕조를 그리는 뜻으로 쓰인다. 궁검(弓劍)의 애통함은 돌아가신 정조에 대한 애통함을 말한다. 궁검은 임금의 죽음을 뜻한다. 황제(黃帝)가 승하할 때 하늘에서 용이 수염을 드리우고 내려와 황제를 모시고 올라갔는데, 이때 황제를 따라간 신하와 후궁이 70여 명이었다. 이에 나머지 사람들이 용의 수염을 잡으니 수염이 뽑히면서 황제의 활과 검이 함께 땅에 떨어졌는데 남은 백성들은 곧 그 활과 검을 끌어안고 하늘을 우러러보았다는 고사에서 전한다. 《史記 卷28 封禪書》
[주12] 서청(西淸) : 대궐의 조용한 곳으로, 여기서는 규장각(奎章閣)을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 풍고는 정조 재위 시절에 규장각 대교(待敎)와 직각(直閣) 등을 지낸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