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이 주인이 된다는 것
우리가 아파트에 살면서 가장 많이 만나는 사람은 누구일까?
아마도 관리사무소 직원들일 것이다.
전기가 나가도 관리사무소를 찾고, 수도에 문제가 생겨도 관리사무소에 연락한다.
주차 문제도, 청소 문제도, 시설물 고장도 관리사무소와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는 관리사무소를 너무 가까이하면서도,
정작 “관리사무소와 우리는 어떤 관계여야 하는가?”라는 생각은 별로 하지 않는다.
그저 문제가 생기면 찾아가고, 해결되지 않으면 불평하고, 해결되면 다시 관심을 끊는다.
어쩌면 그것이 지난 13년 동안 우리가 해온 모습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제는 조금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관리사무소가 주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관리사무소 직원들이 나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관리사무소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전문적인 일들이 많다.
시설을 관리하고, 사람을 관리하고, 회계와 행정을 처리하고, 법과 규정에 맞게 업무를 해야 한다.
1,772세대가 살아가는 큰 단지를 몇 명의 주민이 직접 관리할 수는 없다.
그러니 전문적인 일을 관리사무소에 맡기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맡긴 것과 넘겨준 것은 다르다는 것이다.
주민이 일을 맡겼다고 해서 주민의 권리까지 넘겨준 것은 아니다.
자동차를 정비소에 맡겼다고 해서 자동차의 주인이 정비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집을 청소해 주는 사람에게 집을 맡겼다고 해서 그 집의 주인이 바뀌는 것도 아니다.
관리사무소도 마찬가지다.
관리사무소는 아파트를 관리하는 사람들이지, 아파트의 주인은 아니다.
이 아주 단순한 사실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주민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여기에서 주민자치가 필요해진다.
주민자치라는 말을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쉽게 말하면 이것이다.
“우리 아파트의 중요한 일은 우리가 관심을 갖고 결정하자.”
관리사무소 직원들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결과만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왜 이렇게 했습니까?”
“다른 방법은 없습니까?”
“우리에게 더 좋은 방법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어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관리사무소가 설명하면 주민도 그 설명을 들을 줄 알아야 한다.
주민이 무조건 옳은 것도 아니고, 관리사무소가 무조건 옳은 것도 아니다.
서로의 역할이 다를 뿐이다.
주민은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결정하는 사람들이고,
관리사무소는 그 결정된 일을 전문적으로 실행하는 사람들이다.
바로 이 관계가 제대로 자리 잡아야 한다.
대립이 아니라 대화였다면
돌이켜 보면 지난 세월에는 아쉬운 순간도 있었다.
주민이 무엇인가를 요구하면 관리사무소는 그것을 간섭으로 받아들이고,
관리사무소가 설명하면 주민은 그것을 핑계라고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었다.
서로 한 발씩 물러나서 이야기를 했더라면 쉽게 풀릴 일도,
어느 순간에는 자존심 싸움처럼 커지기도 했다.
그때 나는 생각한다.
“처음부터 대립이 아니라 대화였다면 어땠을까?”
주민이 관리사무소를 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관리사무소도 주민을 귀찮은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훨씬 많은 일을 편하게 해결할 수 있지 않았을까?
주민에게는 권리가 있고,
관리사무소에는 전문성이 있다.
권리와 전문성은 서로 싸워야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서로 존중할 때 가장 큰 힘이 된다.
이제는 주민도 공부해야 한다
주민자치를 한다고 해서 주민이 관리사무소보다 더 많이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는 알아야 한다.
관리비가 어떻게 쓰이는지,
장기수선계획은 무엇인지,
공용시설은 누가 관리하는지,
우리 아파트의 중요한 계약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대표회의는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관리사무소는 어떤 일을 맡고 있는지.
이런 것들을 조금씩 알아야 한다.
모든 주민이 전문가가 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관심을 가진 주민이 많아지는 것, 그것이 주민자치의 시작이다.
그리고 그 관심을 대표들이 연결해 주어야 한다.
그래서 동대표가 중요하고, 대표회의가 중요한 것이다.
대표는 주민 위에 올라가는 사람이 아니다.
주민의 의견을 듣고,
필요한 것은 공부하고,
관리사무소와 대화하고,
결정된 일을 주민에게 다시 설명해 주는 사람이다.
아파트의 주인은 누군가 한 사람이 아니라 그곳에 살아가는 주민 모두라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나는 우리가 지금부터라도 그렇게 만들어 갔으면 좋겠다.
관리사무소와 주민이 서로 감시하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의 역할을 인정하면서도 필요한 것은 묻고 설명하는 관계.
대표가 주민을 대신해서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주민과 함께 생각하고 결정하는 관계.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주민자치다.
주민자치는 관리사무소와 싸우기 위해 만드는 것이 아니다.
관리사무소를 제대로 이용하고, 제대로 일하게 하고,
그 전문성을 주민을 위해 쓰게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우리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아파트의 주인은 주민입니다.”
말로만 주인이 아니라,
관심을 갖고,
공부하고,
묻고,
참여하고,
책임지는 주인.
그런 주민들이 하나둘 늘어난다면,
우리 아파트의 다음 13년은 지금까지의 13년과는 분명히 달라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