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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7년 11월 14일 - 경북 선산군 구미면 상모리 117번지 출생
☆ 1932년 3월 25일 - 구미공립보통학교 졸업
☆ 1937년 3월 25일 - 대구사범학교 심상과 졸업, 졸업할 때의 사진첩에 일본의 연호인 '기원'을 쓰지 않고 단기연호인 4270년을 썼다 하여 한때 말썽이 되었다.
☆ 1937 ~ 1939년 11월 - 문경공립보통학교 교사
☆ 1942년 3월 25일 - 만주군관학교를 1등으로 졸업. 졸업식에서 만주국황제 부의로부터 최우수상 금시계를 직접 받고 일본육군사관학교(본과)에 입교할 수 있는 특전을 얻었다. 450명 졸업생을 대표하여 졸업기념강연을 했다.
☆ 1944년 3월 - 일본육군사관학교 57기 졸업. 만주군 육군소위 임관
☆ 1945년 7월 10일 - 만주군 중위 승진
☆ 1945년 8월 29일 - 조국이 광복을 맞자 중국 베이징 도착. 최용덕 장군 휘하 광복군 제3지대(김학규 지대장)에 소속.
제1대대 2중대장에 임명되었다. 이 무렵 광복군 박정희 중대장은 아래의 노래를 지어 불렀다.
"조팝 깡다리에 소금국만 먹어도 광복군 정신만은 씩씩하게 살아있다."
☆ 1946년 9월 24일 - 조선경비사관학교(육사 전신) 2기생 입교.
☆ 1946년 12월 14일 - 조선경비사관학교 3개월 단기교육을 마치고, 조선국방경비대 육군소위 임관
☆ 1948년 8월 1일 - 소령 진급
☆ 1950년 6월 30일 - 육군본부 정보국 제1과장
☆ 1950년 12월 12일 - 육영수와 대구시 계산동 천주교성당에서 당시 대구시장 허억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 1953년 11월 25일 - 준장으로 진급. 5월 31일자에 임시준장으로 진급되었다가 정식으로 준장의 계급을 달게 되어 어릴 때부터 장군이 되겠다던 그의 꿈이 실현되었다.
☆ 1954년 1월 17일 - 미육군포병학교(오클라호마 주) 유학
☆ 1955년 7월 1일 - 제5사단장
☆ 1957년 3월 - 육군대학 졸업, 6군단 부군단장, 9월 제7사단장
☆ 1958년 3월 1일 - 육군 소장 진급
☆ 1959년 7월 1일 - 제6관구사령관
☆ 1960년 1월 21일 - 부산 군수기지사령관
☆ 1960년 11월 6일 - 서울 신당동 집에서 '혁명'을 위한 모임을 가짐.
김종필, 김형욱, 정문순, 오치성, 김동환, 길재호, 옥창호, 신윤창, 우형룡 등 육사 8기생들 중심이었다.
☆ 1960년 12월 15일 - 제2군 부사령관
☆ 1961년 5월 16일 - 박정희 소장은 새벽 3시를 기해 한국의 군사혁명을 단행했다. 당시 군통수권자 중 한 사람인 장면 총리는 수도원으로 잠적해 3일 동안 나타나지 않았다. 장 총리는 미대사관에 세 차례 연락해 쿠데타에 대한 미국의 대응조치를 물었다. 또 다른 통수권자인 윤보선 대통령은 '어떤 불상사와 희생이 발생해서는 안 된다'는 쿠데타에 대응하는 듯한 친서를 일선 군 지휘관에 보냈다. 이런 한국 정치인들의 유약하고도 근시안적인 태도가 미국의 묵인을 가져왔다.
☆ 1961년 7월 3일 - 국가재건최고희의 의장 취임. 취임사를 통해 "민주복지국가를 건설하기 위하여 지도자나 국민 각자가 있는 힘을 모아 총력을 기울여나가야 하며, 오직 피나는 전진만이 있을 뿐"이라고 강조했다.
☆ 1961년 7월 22일 - 경제기획원 신설
☆ 1961년 8월 10일 - 재건국민운동촉진대회에 격려사에서 "우리는 지난날 지나치게 의타적이었으며 사치와 낭비를 다반사로 하고 자유와 방종을 혼동했다"고 강조했다. 중장 승진.
☆ 1961년 8월 19일 - 섬진강수력발전소 건설 착수
☆ 1961년 11월 1일 - 대장 승진
☆ 1961년 11월 11일 - 미국 방문 케네디 대통령과 두 차례 정상회담
☆ 1961년 11월 12일 - 일본 방문, 이케다 수상과 2차 회담을 통해 재산청구권, 평화선 문제 등 토의
☆ 1962년 1월 13일 - 제1차 경제개발5개년 계획 성안(成案)
☆ 1962년 1월 18일 - 재건국민운동본부 방문하여 '굶주림 해방운동'을 강력히 전개할 것을 촉구했다.
☆ 1962년 2월 2일 - 울산공업지구 건설 기공식 참석, 기간산업의 집중적 건설 의지 표명
☆ 1962년 3월 24일 - 대통령 권한대행
☆ 1962년 4월 2일 - 농촌진흥청 발족
☆ 1962년 4월 30일 - 해양경비대 창설
☆ 1962년 6월 1일 - 무역진흥공사 발족
☆ 1962년 6월 18일 - 건설부 신설, 내각수반직 겸임
☆ 1962년 7월 13일 - 국민의무교육 실시
☆ 1962년 9월 14일 - "한일회담은 지금이 결단의 시기이며 일부 국민들의 반대와 비난은 각오해야 한다." 고 말했다.
☆ 1962년 11월 6일 - 동해북부선(옥계~경포대 간) 개통식에참석
☆ 1962년 12월 17일 - 헌법 개정안 국민투표 실시, 총 유권자 수 1241만 2798, 총 투표자 수 1158만 5998(85.28%), 찬성표 833만 9333(78.78%)
☆ 1962년 12월 28일 - 호남비료 나주공장 준공식 치사에서 "비료의 자급자족 없이 식량증산은 어렵다." 고 말했다.
☆ 1963년 1월 15일 - 캐나다와 국교수립 합의
☆ 1963년 2월 1일 - 장충체육관 개관식 참석
☆ 1963년 2월 26일 - 민주공화당 창당(조국근대화, 민족중흥 이념 표방)
☆ 1963년 5월 - 장충체육관 516민족예술제에서 <잘살아 보세>를 베이스 이인영, 황영금이 발표하였다. 이 노래는 박정희가 한운사에게 작사를 의뢰, 김희조가 곡을 붙였다.
잘살아 보세 잘살아 보세 우리도 한 번 잘살아 보세 / 금수나강산 어여쁜 나라 한마음으로 가꿔가며 / 알뜰한 살림 재미도 절로 부귀영화 우리 것이다 / 잘살아 보세 잘살아 보세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세 / 잘살아 보세
☆ 1963년 8월 30일 - 강원도 철원군 갈말면 지포리 제5군단 비행장에서 전역식.
전역식 연설을 통해 "혁명의 악순환이 없도록 하기 위해 민정참여를 굳게 결심했다. 다시는 본인과 같은 불운한 군인이 없도록 하자." 고 호소했다.
민주공화당에 입당. 70만 6611번째의 당원이 되었다.
☆ 1963년 9월 4일 - 재건국민운동단합대회에서 '자주. 자립. 자조' 강조
☆ 1963년 9월 15일 - 대통령 입후보자로 박정희, 윤보선, 허정, 변영태, 송요찬, 오재영, 장이석이 등록
☆ 1963년 9월 28일 - 대통령 후보로서 서울중.고교 교정에서 행한 선거연설을 통해 "외국에서 들어온 정치사상을 우리 실정에 알맞은 민조적 민주주의"를 주장했다.
☆ 1963년 10월 16일 - 제5대 대통령 당선
☆ 1963년 12월 12일 - 제3공화국 초대내각 구성(국무총리 최두선,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 김유택)
☆ 1963년 12월 16일 - 국가재건최고회의 945일만에 해체
☆ 1963년 12월 17일 - 제3공화국 수립과 함께 제5대 대통령에 취임. 취임사에서 "3.1정신과 4.19의거, 5.16혁명이념을 계승하기 위한 일대 혁신운동을 전개, 생각하는 국민, 일하는 국민, 협조하는 국민으로 일어서자." 고 역설했다.
당시 박정희는 미국의 강권을 받아들여 재정안전정책을 추진하는 한편 개발의 중점은 중농주의에서 공업으로, 기간산업 위주의 내포적 공업화에서 비교우위에 입각한 경공업 중심의 수출산업으로 옮아가는 수정안을 만들었고, 1946년부터 적용된 이 수정안이 이후 '한강의 기적'을 이끌었다.
☆ 1963년 서독에 광부, 간호사(1966년 1월 30일까지) 파견
☆ 1964년 3월 16일 - 언론사 서면 질의에 "우리 주장이 관철되지 않으면 한일회담 결렬도 불사" 라고 답변했다.
☆ 1964년 3월 26일 - 한일회담 특별담화를 통해 "학생들의 우국충정은 이해하나 더 이상의 시위는 외교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고 언명했다.
☆ 1964년 5월 7일 - 울산정유공장 준공식 치사에서 "이 공장의 건설은 한국 현대화의 하나의 상징" 임을 역설했다.
☆ 1964년 5월 10일 - 내각 개편(국무총리 정일권, 부총리 겸 경제기획위원장관 장기영)
☆ 1964년 6월 3일 - 한일회담 반대 학생데모에 대하여 서울 일원에 비상계엄령 선포, 담화를 통해 "무책임한 행동은 앞날의 헌정을 위해 단호히 근절시켜야 하며, 안정이 회복되면 계엄령을 해제해야겠다" 고 언명했다.
☆ 1964년 12월 5일 - 제1회 '수출의 날' 제정, 1억 달러 수출 달성
(1970년 10억 달러, 1980년 100억 달러, 1983년 200억 달러, 1985년 300억 달러, 1988년 500억 달러 달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
☆ 1964년 12월 6일 - 서독 방문. 8일 뤼브케 대통령과 정상회담, 9일 에르하르트 수상과 회담, 10일 함브론 탄광회사를 방문하여 우리나라 광부와 간호사를 위로 격려.
☆ 1965년 1월 8일 - 베트남에 국군 2000명 파병 결정
당시 내자 동원에 실패한 한국에 외자도입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대일 종속이 심화되고 무고한 젊은이들이 다치고 죽는 등 정치적 부작용과 부담이 컸지만, 한일 국교정상화와 베트남 파병으로 거둬들이는 외자는 이후 발전국가의 물질적 기초를 형성했다.
☆ 1965년 2월 10일 - 춘천다목적댐 준공
☆ 1965년 2월 15일 - 농어촌 전신, 전화사업 추진
☆ 1965년 2월 20일 - 섬진강댐 건설
☆ 1965년 6월 22일 - 한일협정 정식 조인. 23일 한일협정 조인에 즈음하여 " 조국을 위해 도움이 된다면 과거의 감정을 씻어 버리는 것이 진실로 조국을 위한 길" 이라 언명했다.
☆ 1965년 12월 2일 - 식량증산 5개년계획 확정
☆ 1966년 1월 1일 - 신년메시지 '올해도 일하는 해'. 해외개발공사 설립
☆ 1966년 1월 18일 - 연두교서를 통해 10년 내에 근대화 성취, 월남지원 계속, 조세의 현실화, 실리외교의 추진 등 발표
☆ 1966년 6월 16일 - 한산대첩 기념제에 참석키 위해 충무로 가는 기동차에서 기자들에게 "이충무공께서는 왜적을 무찌르고 국가에 끼친 공로도 훌륭하지만 그가 가는 곳마다 백성들이 따라다닐 만큼 나라를 사랑한 그는 희생과 봉사로서 국가에 헌신했다는 데서 나는 그분을 제일 존경한다" 고 말했다.
☆ 1966년 10월 21일 - 월남. 필리핀 방문을 위해 출국
☆ 1966년 11월 1일 - 방한 중인 미국의 존슨 대통령과 정상회담. 아시아. 태평양지역의 정세분석, 한국의 안전보장문제, 한국의 제2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추진문제, 한반도의 통일을 위한 미국의 지원문제, 월남 문제 등을 논의
☆ 1966년 12월 17일 - 제3공화국 수립 3주년을 맞아 기자회견을 갖고 공명선거 실시를 다짐하며 "내 가슴 속에 하나의 소원은 우리도 어떻게 하든지 헐벗고 굶주리지 않고 남과 같이 한 번 잘 살아 보아야 하겠다는 일념뿐" 이라고 말했다.
☆ 1967 ~ 1971년 - 제2차 경제개발5개년계획 실시
☆ 1967년 1월 24일 - 청평. 의암. 화천 수력발전소 건설
☆ 1967년 2월 9일 - 한미행정협정 체결
☆ 1967년 3월 30일 - 원자력청을 승격 발족시키고 과학기술처 신설
☆ 1967년 4월 1일 - 서울 구로동 수출공업단지 준공식에서 "목표가 뚜렷한 강력한 의지와 추진력이 있어야 한다" 고 치사
☆ 1967년 7월 1일 -제6대 대통령 취임. 취임사에서 "통일을 향한 전진 대열에는 너와 내가 따로 있을 수 없고 다만 우리가 있을 뿐" 이라고 강조했다.
☆ 1967년 9월 18일 - 구미전자공업단지 건설 시작
☆ 1967년 10월 3일 - 포항제철공업단지 건설 시작
☆ 1967년 11월 16일 - '공문서의 한극전용화를 단계적으로 실시하라' 고 지시
☆ 1968년 1월 12일 - 문교부에 <난중일기>는 물론 <팔만대장경> 등 중요 국보급 사적들을 마이크로필름에 담아 분산 보존함으로써 원자탄이 떨어지도라도 피해를 막을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라고 지시
☆ 1968년 1월 21일 - 북한의 무장공비가 서울에 침투하여 청와대 대통령 관저 후방까지 잠입(김신조 생포)
☆ 1968년 4월 1일 - 향토예비군 창설식 유시를 통해 "공산주의 침략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오직 그들보다 월등한 힘을 유지하는 길 뿐" 이라고 언명했다.
☆ 1968년 7월 23일 - 동해안공업도시개발 착수(묵호. 북평. 삼척)
☆ 1968년 9월 15일 - 대통령 내외, 큰딸 박근혜와 함께 호주. 뉴질랜드 방문
☆ 1968년 12월 5일- <국민교육헌장>을 선포. "민족중흥의 저력은 국민정신의 개혁운동에서 우러나는 것" 이라고 강조했다.
☆ 1969년 2월 22일 - 농업기계화8개년계획 확정
☆ 1969년 3월 1일 - 국토통일원 신설
☆ 1969년 3월 5일 - 가정의례준칙 제정 공포
☆ 1969년 4월 26일 - 호남정유공장 건설
☆ 1969 ~ 1971년 - 현충사성역화사업 추진
☆ 1969년 5월 15일 - 금산통신위성지구국 건설 착수
☆ 1969년 8월 20일 - 닉슨 미국 대통령 초청으로 미국 방문길에 오름. 21일 제1차 한미정상회담, 22일 제2차 한미정상회담
☆ 1969년 10월 7일 - 남한강다목적댐 건설
☆ 1969년 10월 17일 - 3선개헌안과 대통령에 대한 신임을 묻는 국민투표 실시(가결).
투표율 77.1%, 찬성 65.1%, 반대 31,4%
☆ 1969년 12월 29일 - 경부고속도로 대구~부산 간 개통식에 참석, 치사를 통해 "경부고속도로야말로 우리 민족의 대역사적 사업이며 통일의 의지가 담긴 대동맥" 이라고 강조했다.
☆ 1970년 3월 16일 - 서울대학교 총장에게 친서 발송. "관악산 기슭에 새로운 캠퍼스를 건설함에 세계적 대학으로 발돋움하고, 유능한 인재양성의 보금자리가 되기를 바란다" 고 당부
☆ 1970년 4월 1일 - 포항종합제철공사 기공식 참석
☆ 1970년 4월 22일 - 중앙청에서 열린 전국 지방장관회 한해대책회의에서 지하수개발에 박차, 새마을가꾸기 운동, 알뜰한 마을만들기 운동을 적극 추진을 강조
☆ 1970년 7월 7일 - 경부고속도로 개통식에 참석
☆ 1970년 11월 19일 - 세종대왕기념관 준공
☆ 1970년 12월 8일 - 안동 도산서원 보수공사 준공식 참석
☆ 1970년 12월 23일 - 정부종합청사 준공에 참석
☆ 1971년 1월 25일 - 수출진흥 확대회의에서 " 1970년 수출목표 10억 달러 달성은 우리나라 경제학자 경제전문가들조차도 모두 불가능하다고 말했으나 수출목표를 무난히 달성했다. 일을 해 보지도 않고 안 된다고만 말하는 사람이 있는 한 언제든지 반대세력은 있게 마련" 이라고 말했다.
☆ 1971년 2월 8일 - 한국안보에 관한 한. 미간 협의의 종결에 즈음한 특별담화를 통해 "한. 미군 재배치 계획에 따라 한국군이 전 휴전선의 방위임무를 맡게 되었으며 미국의 장기원조로 한국군의 현대화를 촉진하여 자주국방의 새 터전을 마련해야 한다" 고 말했다.
☆ 1971년 3월 1일 - 고리원자력발전소 건설
☆ 1971년 3월 24일 - 영동고속도로 기공식에 참석하여 "1976년까지 전 국토의 70%가 포장될 것이며 영동고속도로는 지하자원. 수산자원 개발에 획기적 기회" 임을 치사
☆ 1971년 3월 30일 - 제7대 대통령 후보자 등록. 박정희(공화당), 김대중(신민당), 박기춘(국민당), 성보경(민중당), 이종윤(자유당), 진복기(통일사회당), 김철(무소속) 7명
☆ 1971년 4월 10일 - 당인리화력발전소 건설
☆ 1971년 4월 28일 - 제7대 대통령 취임. 취임사에서 "통일. 안보. 경제발전에 온 힘을 기울일 것이며 국민들은 이 시대의 방관자가 되지 말고 참여자가 되자" 고 강조했다.
☆ 1972 ~1976년 - 제3차 경제개발5개년계획 실시
☆ 1972년 3월 23일 - 현대건설 울산조선소 기공식 참석
☆ 1972년 5월 5일 -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을 평양에 다녀오게 함(5월 2일 ~ 5일 김일성을 면담하고 한반도의 평화정착, 통
일문제를 협의하라고 밀사를 보낸 것임).
☆ 1972년 7월 4일 - <7.4 남북공동성명> 발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을 평양에 보내 김일성과 회담케 하고 북한의 부주석 박성철을 서울에서 만나 남북문제를 협의했다.)
☆ 1972년 10월 17일 - <10월 17일 대통령 특별선언> 발표, 즉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평화통일 지향의 개헌안을 10월 27일까지 공고한다고 선언했다.(10월유신의 단행)
<10월 17일 대통령 특별선언>
① 1972년 10월 17일 하오 7시를 기해 국회를 해산하고 정당 및 정치활동을 중지시킨다.
② 일부 효력이 정지된 헌법조항의 기능은 비상국무회의에 의해 수행되며 비상국무회의의 기능은 현행 헌법상의 국무회의가 이를 수행한다.
③ 비상 국무회의는 1972년 10월 27일까지 조국의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헌법개정안을 공고하며 이를 공고한 날로부터 1개월 이내에 국민투표에 부쳐 확정시킨다.
④ 헌법개정이 확정되면 개정 헌법절차에 따라 늦어도 1972년 말 이전에 헌정질서를 정상화시킨다.
☆ 1972년 10월 31일 - 울산석유화학 8개 공장 건설. 석유화학공장 준공식 참석
☆ 1972년 11월 13일 - 시외전화의 자동화사업을 실시
☆ 1972년 11월 21일 - 유신헌법안에 대한 국민투표 실시. 투표율 91.9%, 찬성 91.5%
☆ 1972년 12월 27일 -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제8대 대통령 취임식과 유신헌법 공포식 거행. 취임사에서 "국정 전반에 개혁을 단행하고, 현실에 맞는 정치제도의 정착, 사회보장제도의 확충, 문예중흥시책의 마련" 등을 약속했다.
☆ 1973년 1월 12일 - 공업진흥청과 공단관리청 신설
☆ 1973년 2월 16일 - 제주도종합개발 착수
☆ 1973년 4월 25일 - 수출진흥 확대회의에서 "1980년 초까지 100억 달러 수출목표 달성" 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 1973년 5월 5일 - 어린디대공원 개원식에 참석
☆ 1973년 5월 11일 - 해운항만청을 신설하고 농림부를 농수산부로 개칭
☆ 1973년 6월 26일 - 대덕연구단지 건설(10개 연구소)
☆ 1973년 7월 3일 - 포항종합제철 준공식에 참석하여 치사를 통해 '1980년대에는 우리도 선진국 대열에 들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 고 말했다.
☆ 1973년 7월 10일 - 기능공양성정책 추진, 정수직업훈련원 설립, 전국 91개 공업고교 신설 및 그 확충계획 발표
☆ 1973년 8월 15일 - 제28주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남북한 유엔동시가입을 북한에 촉구
☆ 1973년 10월 11일 - 경남 거제군 옥포조선소 기공식 참석
☆ 1973년 10월 15일 소양강다목적댐 건설
☆ 1973년 10월 17일 - 서울 장충동에서 국립극장 개관
☆ 1973년 11월 7일 - 국민복지연금법 제정
☆ 1974년 1월 8일 - 개헌논의 등을 일체 금지하는 긴급조치 1. 2호 선포
☆ 1974년 3월 28일 - 동해고속도로 기공
☆ 1974년 5월 24일 - 팔당다목적댐 준공식에 참석
☆ 1974년 6월 28일 - 울산현대조선소 1. 2호선 명명식에 참석
☆ 1974년 8월 15일 - 육영수 여사 서거. 국립극장에서 제29주년 광복절 경축식 도중 조총련계 제일교포 문세광이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했다. 육 여사가 유탄에 맞아 운명했다.
서울 지하철 건설 개통
☆ 1975년 1월 22일 - 박대통령은 유신헌법 논쟁이 가열되자 특별담화를 통해 유신헌법에 대한 찬반국민투표 실시를 발표. 박대통령은 특히 "이번 국민투표는 비단 헌법에 대한 찬반 투표 뿐만 아니라 대통령에 대한 신임 투표로 간주하겠다." 고 밝혔다.
☆ 1975년 2월 13일 - 2월 12일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투표율 79.8%, 찬성률 73.1%를 기록, 유신헌법의 찬성을 얻었다. 박대통령은 특별담화를 통해 국민투표 결과를 바탕으로 한 거국적 정치체제 구상을 밝혔으며 긴급조치 1, 4호 위반으로 구금되었던 148명을 가석방했다.
☆ 1975년 7월 10일 - 각종 군함 생산 시작
☆ 1975년 9월 1일 - 국회의사당 준공
☆ 1976년 2월 6일 - 동구권과의 관계개선 시작
☆ 1976년 5월 7일 - 강원도 강릉 오죽헌 정화사업 준공식에 참석
☆ 1976년 6월 6일 - 제21회 현충일 추념사를 통해 "가난을 이기기 위해 피와 땀을 흘린 겨레만이 위기에 처했을 때 조국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 이라고 말했다.
☆ 1976년 7월 15일 - 서울 잠수교 개통식에 참석
☆ 1976년 10월 2일 - 반월공업도시 건설 착수
☆ 1976년 10월 28일 - 안동다목적댐 준공식 참석
☆ 1977 ~1981년 - 제4차 경제개발5개년계획 실시
☆ 1977년 6월 15일 - 월성원자력발전소 준공
☆ 1977년 6월 21일 - 1977년도 추가경정예산안 제출에 즈음한 시정연설에서 다가올 "미군철수를 전제로 하여 만반의 대비책을 갖추어 나가야 한다." 고 강조했다.
☆ 1977년 12월 17일 - 구마고속도로 개통식 참석
☆ 1977년 12월 22일 - 100억 달러 '수출의 날' 기념식에 참석. 수출에 공이 많은 기업가와 산업체에 '수출의 탑'을 시상했다.
☆ 1978년 1월 1일 - 동력자원부 신설
☆ 1978년 1월 9일 - 충주다목적댐 완공
☆ 1978년 1월 13일 - 서울에 민속중앙박물관 건립
☆ 1978년 4월 14일 - 세종문화회관 개관식에 참석
☆ 1978 ~ 1980년 - 부마고속도로 건설
☆ 1978년 6월 30일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개원식 치사에서 "이 연구원의 설립 목적은 주체적 민족사관을 정립하고 새로운 문화창조로 민족중흥에 적극 기여하는 데 있다." 고 강조했다.
☆ 1978년 7월 21일 - 충남 논산지구 농업개발사업 완료
☆ 1978년 9월 26일 - 충남 서산군 안흥기지에서 한국형 장거리 유도탄과 로켓 시험발사를 참관.
(세계 7번째 미사일 개발국)
☆ 1978년 10월 5일 - <자연보호헌장>(전문 624자) 선포. <자연보호헌장> 선포식 치사에서 "자연보호운동은 구호가 아닌 조용한 실천운동이며 헌장의 정신이 행동지표가 되고 실천강령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 1978년 12월 27일 - 제9대 대통령에 취임. 취임사에서 "1980년대는 민족중흥과 민족웅비의 연대가 될 것이며 선진 고도산업국가로 만들어 복지사회를 이룩하겠다." 고 밝혔다.
☆ 1979년 4월 10일 - 경기도 과천 제2정부종합청사 준공
☆ 1979년 4월 18일 - 잠실 서울종합운동장과 실내체육관 준공식 참석
☆ 1979년 6월 12일 - 경북 울진원자력발전소 기공
☆ 1979년 7월 1일 - 방한 중인 미국 카터 대통령과 전날에 이어 두 차례 한미정상회담을 가짐.
(미지상군의 철수는 한국과 동북아시아 정세에 영향을 끼치는 일이라고 지적하고 당분간 미군철수를 반대하는 입장을 밝혔다.
☆ 1979년 10월 2일 - 환경청 신설
☆ 1979년 10월 18일 - 부산직할시 일원 비상계엄령 선포에 즈음한 특별담화.
이 때 부마사태를 제대로 수습 못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스스로 능력에 한계를 느꼈다.
'10.26' 직전 김재규는 긴급조치 10호(언론. 종교. 학생선동자 구속)를 두 번이나 대통령에게 건의했으나 박정희 대통령은 그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크게 책망했다.
☆ 1979년 10월 26일 - 박정희 대통령 서거.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에 참석하고 서울로 돌아와 종로구 궁정동 중앙정보부 식당에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마련한 만찬에 참석했다. 그 자리에서 차지철 경호실장과 말다툼을 하던 김정보부장이 쏜 총탄을 맞고 군서울병원에 이송됐으나 운명했다.
김재규가 차지철에 대한 지나친 강박관념과 정신심약 증상을 보인 것은 1978년도 초엽이다. 그는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어 링거주사를 맞으며 업무를 보아왔다. 이때에 그가 유신의 심장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고 한말이 과연 진실이었을까.
(한국의 좌파들은 박대통령이 부정축재 했다고 거짓 선동하였으나 서거하실 때 군의관이 대통령인지 몰라봤다고 한다. 너무 소박한 모습 때문에. 넥타이핀이 매끼가 벗겨져 있고 가죽혁대는 닳아서 색이 바래 있었다고 한다.)
☆ 1979년 10월 27일 - 정부에서는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계엄사령관에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고, 최규하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했다. 비상국무회의는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을 26일자로 해임 조치하고 박정희 대통령의 장례는 국장(7일장)으로 결정했다.
☆ 1979년 10월 30일 - 네덜란드의 의사당에서는 국회의원들이 한 세기의 영웅을 추모하는 박정희 대통령의 추모묵념을 올렸다.
☆ 1979년 11월 3일 - 박정희 대통령의 국장이 엄수되었다. 연도에는 전국에서 올라온 200만 조문객이 중앙청 광장에서 국립묘지에 이르는 길을 메웠다.
☆ 2005년 - 박정희가 일으킨 한국경제 기반은 2005년에 이르러 선박 건조율 세계 1위, 반도체 생산량 세계 1위, 제철조강 생산량 세계 1위, 휴대폰 보급성장률 세계 1위, 연간수출 2천억 달러 돌파, 국민소득 1만 달러 돌파! 이를 달성하는데 일본은 100년, 미국은 180년, 영국은 200년, 대한민국은 1961년부터 1977년까지 단 36년 만에 국민소득 1만 달러를 이룩했다. 세계 역사상 최단기간, 최고속이었다. 산업화 초기 단계에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을 병행 추진한 예는 역사적으로 찾아볼 수가 없다. 박정희는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이라는 두 가지 선택 중 먼저 경제발전을 택했다. 그것은 산업화 초기에 민주화를 이룬 경험적 사례가 없었고, '빵'없는 민주주의는 지탱되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산업화가 성숙된 현시점에서나 적용 가능한 병행발전론으로 박정희 정권을 비판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출처 : <한국 국민에게 고함>, 박정희, 동서문화사, 200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