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복현 - 함라이야기.hwp
Ⅰ. 함라면의 역사문화
조선시대에 함라면에는 함열현 이라는 관아가 있었던 곳이다. 함열현에는 함라(함열)를 중심으로 황등‧성당‧웅포‧함열 지역의 정치‧경제‧문화를 관장 하고 있었다.
역사적으로 지명 변천을 보면 백제시대에는 함라를 감물아현 이라 했고 ‘고려사’를 보면 함라 라고 하는 기록도 있다. 신라 경덕왕 때는 함라를 임피군 영현이라 했으며, 고려 초에는 전주에 속하기도 했다. 조선 태종 1409에는 용안과 병합하여 안열현 이라고 했으며, 1416년 다시 함열현이라 했다.
함열현에는 현내면, 동일면, 동이면, 동삼면, 동서면, 남일면, 남이면, 서일면, 서이면, 북일면, 북이면, 북삼면, 등 12개면이 있었다. 1895년에는 함열 군으로 1914년에는 함라면이라고 했다. 함라면 함열리에는 7개 부락(수동 천남 천북 행동 교동 안정 갈마)이 있다.
1. 함열현 관아터
함열리 수동 마을에는 함열현의 관아가 자리 잡고 있었으며, 세 부자가 터를 자리 잡은 곳이기도 하다. 일제시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은 기존의 전통적인 지역사회의 틀을 철저히 말살하고 일본의 식민 지배에 유리하게 배치하게 된다.
함열이라 하면 대부분 사람들은 현재 함열읍 와리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으로 오해하고 있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은 함라면 함열리의 함열이다. 과거 함라면 함열리에 함열 관아터가 있었다는 사실만 보아도 함라면 함열리의 함열이라는 것이 입증되고 있다.
1910년 일제 강점기 되기 전까지 익산에는 4개의 군현이 있었다. 익산군 (현 금마, 왕궁), 함열현 (현 함라, 함열, 성당, 웅포, 황등), 용안현 (용안, 용동, 삼기) 여산현 (여산, 낭산)이다.
함열현은 호남지역 금강의 서쪽에 위치하여 충청도와 전라도를 잇는 거점으로 특히 육로보다 해로를 이용한 경제권의 중심지로 중요시 된 곳이다. 특히 성당창 관할을 통한 호남내륙의 조세확보와 조운선을 통한 막대한 경제적 이권이 있는 지역으로 함열 현감 자리는 노른자위임에 틀림없는 곳으로 정치적 입지가 막강한 현감이 함열현감 자리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곳을 거쳐 간 현감은 정치적 배경이 있는 인물이 많았다. 190명의 현감, 군수가 거쳐 간 함열 현감 자리다. 특히 83대 함열 현감 홍우현(1712-1714)은 홍명원(남양 홍씨의 대표적인 인물)의 증손이며 135대 수령 홍재과(1833년)는 홍기섭(남양홍씨 중시조)의 9촌 조카이기도 하다
2.허균의 유배지
함열 현은 1611년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소설 홍길동전의 작가인 허균의 유배지이기도 하다. 허균은 함열 현에 도착하여 훌륭한 문학작품을 남겼으며 “성소부 부고” 64권을 엮어내는 역할을 하게 된다. 성소는 허균의 호이다. 이 중에 ‘성수시화’와 ‘도문대작’이 들어있다. 성수시화는 시의 평가에 대한 일화가 들어있으며 도문대작은 음식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있다.
허균이 함열 현으로 유배 오게 된 동기는 당시 함열 현감인 한회일 현감과 절친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인연으로 함열 현에 유배를 오게 된다. 한회일은 인조비의 오빠이기도 하다.
Ⅱ. 함라에 세 부자 집 탄생
함라에 세 부자가 자리 잡기까지에는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무엇보다도 함라 지역은 산세가 우수하고 자연재해로부터 안전했고, 산 넘어 금강이라는 뱃길을 이용할 수 있었던 장점이 있었으며 주변에서 생산되는 곡물이 풍족하였기에 가능했다.
그리고 세 부잣집이 탄생하기까지는 각기 남다른 노력으로 부를 쌓아왔기에 가능했다. 당시에 부를 쌓는 길은 먼저 인심을 얻어야 했으며, 다음으로는 주변의 자연환경을 이용하는 남다른 노력이 있어야 했고, 세상 밖을 내다보는 식견이 있어야 했다. 또한 시대에 맞는 경제 경영인이 되어야 하며 최고의 기업이라 할 수 있는 대규모 농장을 경영하면서 만석군이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다. 특히 이배원 집안은 서예와 예술계통에 조예가 있었으며 김안균 집안은 신교육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여 외치에 주력했고 조해영 집안은 예술분야에 남다른 관심을 기울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00년대 초 양반사회였기에 천대받았고 무시당했던 소리꾼들도 다른 지역에서는 대접을 받지 못했지만 함열에만 오면 밥 대접받고 노자 돈 받으면서 대우를 받으니 이 입소문이 방방곡곡에 알려져 역시나 ‘인심 좋은 함열’ 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1. 만석군 이배원 가옥은
익산시 향토유적 제10호이며 본관은 경주 이씨.
이배원(1881-1949)은 부친 석순(1839-1926)때 일궈온 재력을 바탕으로 일제 강점기 호남지방의 최고 자산가가 된다. 특히 1901-2년에는 빈곤한 자들을 도와주어 이에 도움을 받은 사람들이 적선비를 세웠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배원 가옥은 1917년에 건축된 가옥으로 안채와 사랑채 문간채 곳간채 등 여러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1926년에는 삼성농장을 함열읍 와리에서 운영하면서 만석의 부를 쌓았다. 1959년부터 사랑채는 원불교 함라 교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배원 씨는 참봉벼슬을 지내기도 했다.
이배원씨는 아들 8분을 두게 되는데 큰 아들 이집천은 교육 사업가이며 서예가로 이름을 떨치기도 했다. “오당수화”는 이배원의 부친이신 석순의 회갑연을 맞아 여러 인사들이 보낸 서화를 모아 놓은 것으로 당시 경성주재 중국총영사 윤용구, 박기양, 안종원, 민병승의 작품이 실려 있다.
이집천씨는 당시 조선 서화협회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이집천씨는 당대 조선에서 으뜸가는 별장 “서벽정”을 지어 인근 학교에서 소풍을 가고 관광지로 명성을 떨쳤으나 아쉽게 지금은 이집천씨가 쓴 서벽정이란 비석만 남아있다. 또한 숭림사의 숭림사 현판도 이집천씨의 작품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일곱째인 이집길은 1940년대 영화 배우로 활동하기도 한다. 1949년 한형모 감독의 ‘성벽을 뚫고’ 라는 영화는 여수 순천 사건을 배경으로 한 민족 분단의 비극을 그린 반공영화에 주연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2. 만석군 김안균 가옥은
지방 민속자료 제23호이며 본관은 김해 김씨.
현재 전북에서 가장 큰 규모의 보존상태가 양호한 가옥이다. 1920년대 지어진 우리나라의 상류 가옥으로 조선 말기의 양반 가옥형식과 일본식 구법이 가미되어 있다. 99칸의 가옥이다. 안채, 사랑채, 행랑채, 창고, 광으로 구분되어 있으며 궁궐 형식의 가옥으로 지어진 집이다.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는 담장이 있어 구분되어 있다. 거실과 침실이 구분되어 있어 외국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김안균의 부친인 김병순(1894-1936)이 만석을 일구었다.
김병순은 함화농장 사무실을 함열읍 와리에서 운영하였다. 김병순의 조부이신 김기형은 운봉현감을 역임하였으며 김병순도 진사를 지냈다. 그래서 함라에서 ‘김진사 댁’하면 김안균의 집을 지칭하게 되었던 것이다. 김병순의 큰아들 김해균은 일제시기에 보성전문학교 영어교사를 역임했으며, 1936년 김병순이 사망하자 근거지를 서울 혜화정으로 옮기게 된다. 1936년 8월 11일자 동아일보에 부친의 유지대로 거금을 기여한 김해균이라는 기사가 실릴 정도로 빈민을 돕는 일에 앞장을 서기도 했다.
이처럼 김병순. 이배원. 조용규의 자선 독지. 내용이 있었기에 “인심 좋은 함열 골”이라는 말이 셍겨나게 된다. 인심 좋은 함열 골이라는 말이 괜히 생긴 말이 아님을 입증하고 있다.
3. 만석군 조해영 가옥은
지방문화재 자료 제 121호이며 본관은. 임천 조씨
조해영 가옥도 안채, 사랑채, 부속채, 별채, 문간채, 창고로 구성되어 있다.
별채는 완전히 일본식으로 1937년 지었으며 손님 접대용으로 활용되었다. 조해영 가옥도 1918년 전후에 지어진 가옥으로 대문이 열두 대문으로 알려져 있다. 열두 대문 안에는 조용규 농장 사무실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소작인들의 소작료를 탕감해주어 소작인들이 조용규 송덕비를 건립하기도 했다. 조해영 부친 조용규는 참봉을 지냈고 조해영의 조부께서는 사천 정읍 군수를 역임했다. 그래서 조용규 댁을 정읍 댁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한다.
특히 정읍군수 재직시 기근에 허덕이는 정읍 주민을 위하여 사재를 털어 군민을 도와주었다고 하여 정읍 태인 주민들이 태인 피양정에 조용규 송덕비를 세우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에 익산 땅에는 농장이 19개나 있었다. 그중 한국인 농장은 4개뿐이다. 바로 김병순의 함화농장, 이배원의 삼성농장, 조용규의 농장, 백인기의 화성(이리)농장이다. 선친들이 일구어온 재산을 시대의 흐름에 따라 적절하게 운영하여 일제강점기 동안에도 만석을 유지해 오는 지혜를 발휘한 만석군이 함라에 세분이 있었다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다.
2017. 12. 15
김 복 현 (전 익산문화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