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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2월, 일제 총독부가 조선인의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라 했다. 이른바 창씨개명이다. 겉으로는 권장한다고 했지만 실상은 강요였고 협박이었다. 우리 민족에게 성은 목숨처럼 귀한 것이었다. 조상이 물려주었으니 하늘이 내린 것이었다. 따라서 성을 바꾸라는 것은 피를 속이는, 하늘이 무너지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식민지 백성들은 성과 이름을 고쳐야 했다. 창씨개명을 하지 않는 사람은 입학과 취직도 할 수 없고, 관청에도 출입할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이광수는 자신의 성을 갈고, 다시 창씨개명을 독려하는 글을 썼다. 하지만 이에 항거하여 목숨을 끊는 민초들도 있었다. 또 ‘견자웅손(犬子熊孫)’으로 개명하겠다는 사람도 나타났다. 핏줄도 모르니 ‘개자식이 된 단군의 자손’이라는 뜻이었다.
당시 승려들은 어땠을까. 친일승이 포진한 종단의 지도자들은 총독부의 방침에 순응했다. 상담소를 설치하여 승려들의 창씨개명을 도왔다. 31본사 주지들도 앞장서서 동참했다. 주지대표이며 월정사 주지인 이종욱은 히로다 쇼이쿠(廣田鍾郁), 해인사 주지 변설호는 완전 왜색풍인 호시시다 에이지(星下榮次)로 바꾸었다. 불교학계 인사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권상로는 안토 소로우(安東相老), 김동화는 가네가와 도까(金河東華), 조명기는 이와 아키모토(以和明基)로 살았다. 물론 창씨개명을 했다고 해서 모두 친일파일 수는 없다. 살아남기 위한 방편이었으니 어찌 나라도 갖지 못한 백성을 꾸짖을 수 있겠는가. 본의는 아니었겠지만 오대산을 지킨 선승 방한암도 창씨개명을 했으니, 야마가와 쥬겐(山川重遠)이었다. 그래도 만해, 운허, 효봉 같은 산중의 어른들과 불교학자 백성욱, 김법린 등은 창씨개명을 거부했다.
창씨개명이란 광풍이 조선을 휩쓸고 있을 때 항일의 선봉이요 선승의 귀감이었던 거목이 떠나갔다. 바로 손상좌 성철을 그토록 미더워했던 용성이었다. 용성은 계정혜 삼학을 저버린 불교계를 질타하며 불교계 혁신을, 나태한 승려들을 꾸짖으며 선농일치를 주창했다. 경남 함양과 간도에 대규모 농장을 조성하여 불교가 삶과 유리된 게 아님을 증명해보였다. ‘상구보리 하화중생’을 통해 기복에 젖어있는 불교를 개혁하고자 했다. ‘화엄경’ ‘능엄경’ ‘범망경’ 등을 우리말로 번역, 역경불사로 불교 대중화를 도모했다.
독립이 조선 선풍을 일으키는 첩경이라 믿었기에 독립운동에도 뛰어들었다. 밀려드는 외세에 맞서 싸운 고단한 삶이었다. 그토록 독립을 원했지만 해방의 그날을 보지 못하고 1940년 4월1일 아침 열반에 들었다. 세수 77세, 법랍 61세였다. 스님의 장례식은 “널리 알리지 말고 조용히 하라”는 유언대로 간소하게 치렀다. 용성은 ‘세간 5계’를 남겼는데 첫째가 목숨을 바쳐 나라에 충성하고, 다섯째는 목숨을 바쳐 전쟁에는 지혜롭게 이기라는 것이었다. 나라 잃은 아픔과 설움이 얼마나 사무쳤으면 선승이 이런 유훈을 남겼겠는가.
성철은 금강산 마하연 선방에 있었다. 용성의 다비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아마 열반 소식도 후에 전해 들었을 것이다. 용성이 떠난 그 즈음 성철에게는 예사롭지 않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홀로 익힌 참선 수행이 익어가고 있었다. 성철은 철저하게 경전이 시키는 대로 수행했다. 참선을 할 때는 아랫니와 윗니를 마주 닿게 하여 입을 지그시 다물었다. 혀는 입천장을 자연스럽게 누르고서 결가부좌했다. 그것은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방법이었다. 또 밤의 초분(初分)에는 경행(經行)과 좌선을 하고, 밤의 중분에는 우측 옆구리를 땅에 대어 사자와 같이 눕고, 밤의 후분에는 다시 경행과 좌선으로 마음을 청정케하라는 ‘중부경전’의 가르침을 따랐다. 가만히 앉아있으면 마음이 가라앉거나 어지러워졌다. 그러면 일어나 돌아다니며 화두를 붙들었다.
성철은 마하연을 나와 다시 은해사 운부암에 들었다. 성철의 목숨을 건 수행이 계속되고 있었다.
‘철석같이 단단한 마음으로 세세생생 무루선 닦아
크고 큰 지혜와 덕, 커다란 용맹심으로
만 겹 장애 만 겹 미혹 모두 녹아지이다.
여자의 몸은 그림자도 닿지 않으며
중생의 고기는 그 어디에 입을 대리오
깨끗한 시주물이라도 화살인 듯 피하고
부귀와 영화는 원수 보듯 하여서
굳게 닫힌 쇠관문을 단번에 뚫고 비로정상에 훌쩍 뛰어올라
보리의 대도량 청정하게 장엄하고 미래겁이 다하도록
언제나 자재하여지이다.’
(성철의 ‘발원문’ 중에서)
‘사해(四海)의 부귀는 풀잎 끝의 이슬방울이요, 만승의 천자는 진흙 위의 똥덩이라는 이런 생각, 이런 안목을 가진 사람이라야 꿈결 같은 세상 영화를 벗어나 영원불멸한 행복의 길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떨어진 헌 누더기로 거품 같은 이 몸을 가리고 심산 토굴에서 감자나 심어 먹고사는, 최저의 생활로 최대의 노력을 해야 한다. 오직 대도를 성취하기 위해서 자나 깨나 죽을힘을 다해서 공부해야 한다.’ (성철의 ‘한물건(一物)’ 중에서)
결심한 대로 죽을힘을 다해 공부했다. 성철은 훗날 ‘3단(段) 수행’을 권면했다. 그것은 고불고조가 낸 길을 성철이 다시 걸으면서 체득한 것이었다. 처음 동정일여(動靜一如)에 들고 다음엔 오매일여(寤寐一如)인 몽중일여(夢中一如), 숙면일여(熟眠一如)의 경지에 이른 후 거기서 더 정진하여 참다운 깨달음을 얻으라 일렀다. 성철은 깨달음에 이르는 가장 확실하고 빠른 길은 참선이며 화두를 붙든 선승에게 동정, 몽중, 숙면일여는 반드시 거쳐가야 할 관문임을 설파했다.
성철은 유발한 채 지리산 대원사에서 정진하여 동정일여에 든 바 있다. ‘움직이거나 조용히 있을 때나 한결같다’는 동정일여는 깨어있는 모든 일상생활에서 화두공부가 이어지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걷거나 앉아있을 때에도, 말을 하거나 하지 않을 때에도, 세수하거나 밥을 먹을 때에도 변함없이 공부가 되어야 한다.
깨어있는 일상의 동정일여에서 더 깊이 들어가면 자나 깨나 일여한 오매일여의 경지에 이른다. 오매일여는 꿈꿀 때에도 한결같은 몽중일여와 잠이 깊이 들어도 화두가 떠나지 않는 숙면일여가 있다. 몽중일여는 꿈속에서도 낮과 똑같이 화두가 들리는 경지이며 세속의 업장인 꿈은 없어지고 꿈이 생시나 다름이 없다. 더 나아가 잠이 깊이 들었어도 공부가 한결같으면 숙면일여에 이른 것이다.
성철은 계속 무자 화두를 들었다. 어느 때는 3세 모든 부처가 숲속에서 공부했으니 ‘장부경전’이 이른 대로 조용한 곳을 찾아가 화두를 들었다. 그랬더니 오히려 마음이 흩어지고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성철은 이를 고적병(孤寂病)이라 했다. 깊은 산중에서 혼자 토굴을 파고 앉아있어도 마음이 쉬지 못하면 시끄러운 장터에 다름 아니었다.
선승에게 가장 무서운 상기병에 걸리기도 했다. 공부에 조바심을 내면 열이 머리로 올라왔다. 갑자기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가 터질 듯이 아파왔다. 입술이 트고 갈라지며 전신에 힘이 빠져 일어설 수도 없었다. 그 고통은 당해보지 않으면 아무도 몰랐다. 성철은 이내 숨을 발바닥(足心)으로 끌어내리는 요령을 터득했다. 나중에는 화두를 완전히 놓지 않고도 생각을 모아 폭포에서 물이 떨어지는 것처럼 온 몸의 기운을 아래로 내렸다. 그렇게 상기병을 다스렸다. 성철은 후학들에게 상기가 나면 ‘기해단전 요각족심(氣海丹田 腰脚足心)’으로 치료하라 일렀다. 그러면서 화두 참구의 올바른 방법을 구체적으로 얘기하고 있다. 모두 자신이 경험한 것이었다.
“화두를 참구하다 보면, 화두를 아주 조급하게 밀면 좀 되는 것 같고 허술하게 밀면 안 되는 것 같고 하는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성질 급한 사람은 마음이 조급해지고, 이러다 보면 나중에는 공부가 문제가 아니라 머리가 아픈 병도 생겨서 아무 것도 안 되고 맙니다. 거문고 줄을 너무 조이면 팽팽해서 제 소리가 안 나는 법이고, 또 너무 풀면 느슨해서 소리가 안 나는 법입니다. 그러니 너무 급하게도 하지 말고 너무 느리게도 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조주가 어째서 없다[無]고 했는가?’ 하고 생각을 해야 합니다.
화두 참구는 생각하고 의심하는 것이지 외우는 게 아닙니다. 너무 급하게도 생각하지 말고 너무 느리게도 생각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의심해야 합니다. 자연스럽게 하는 것이 좀 어렵긴 하지만 자꾸 해 보면 요령이 생깁니다. 화두는 외우는 것이 아니고 어째서 없다[無]고 했는지 그 이유를 알아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성철은 말이 줄어들었다. 눈빛은 형형했고, 특히 좌복 위에서 새벽을 맞았다. 다른 선승들은 홀로 깨어있는 성철이 무섭게 느껴졌다. 그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김택근 법보신문 고문(언론인·시인)
출처: 법보신문 1291호 / 2015년 4월 22일자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17. 오도
『"성철은 마침내 견성을 이뤘다. 이름대로 자성을 깨쳐 확철대오했다. 억겁의 어둠을 사르는 촛불을 밝혔다. 자기 마음 이외에 불법이 없고, 자기 마음 이외에 부처가 없다는 부사의해탈경계(不思議解脫境界)를 성취했다. 1940년 29세의 겨울, 출가하여 무자 화두를 들고 수행한 지 4년 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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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은 팔공산 동화사 금당선원에 들었다. 동화사는 493년(신라 소지왕 15)에 창건하여 유가사(瑜伽寺)라 했고 832년(흥덕왕 7) 심지대사가 중창했다. 중창불사 당시 현장에 오동나무 꽃이 피어 있어 동화사(桐華寺)라 고쳐 불렀다고 한다. 신라 말에는 영조선사, 고려 때는 지눌 보조국사, 홍진국사가 중창했다고 전한다. 금당선원은 동화사의 동쪽 별당이다. 개원 이래 운수납자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고, 걸출한 선승들을 배출한 참선궁행의 명소였다.
성철은 금당선원에서 겨울을 맞았다. 사람 몸 얻기란 사막에서 풀잎 얻는 것처럼 어렵고, 설사 사람의 몸을 얻었다 하더라도 죄업이 지중해서 불법 만나기란 더욱 어려웠다. 깨치기 전에 죽으면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 불법 만난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 것인가. 성철은 이를 알기에 공부를 게을리 할 수 없었다.
성철은 금강산 마하연에서부터 예사롭지 않은 경계에 이르렀음이 분명해 보인다. 그토록 차갑게 대하던 어머니를 만나 함께 금강산 구경을 했던 것은 아무리 대중공사의 결과에 따랐다지만 성철의 성정으로 보아 납득하기 어렵다. 그것은 성철에게 일대 변화가 온 것을 의미한다. 어머니를 만났어도 인연에 끄달림을 받지 않는, ‘청상과부가 외동아들이 벼락을 맞아 죽어도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는’ 경지에 이름이었다.
성철은 참선 수행의 깊이는 수좌의 잠을 뒤져보면 알 수 있다고 했다. 잠 속의 화두가 성성하면 견성에 가까워졌다는 것이다. 성철은 자신이 성취했던 오매일여의 경지를 밝히고 올바른 화두 참선법을 이렇게 일러줬다.
“우리가 아무리 부처님이나 달마대사 이상으로 큰 법을 성취한 것 같은 생각이 들더라도 깊은 잠에 들어서 여전히 캄캄하면, 이는 망식(忘識)의 움직임이지 실제로 깨달은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공부를 하는 도중에 자기가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한 것 같지만 잠이 꽉 들어서 공부가 안 될 때는 공부가 아닌 줄 알고 공부 됐다는 생각을 아예 버려야 하는데 이것이 어렵습니다. 보통 공부해 가다 이상한 경계가 좀 나면, 이것은 견성이 아닌가, 성불이 아닌가, 또는 내 공부가 좀 깊이 들어간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많이 일으키게 됩니다. 그렇지만 그 공부의 기준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잠이 꽉 들어서도 공부가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잠이 들어서도 공부가 되지 않으면 아직 공부가 안 된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도적놈을 잘못 알아 자식으로 삼는 것과 같아서 손해만 있을 뿐 이익은 없습니다.”
실제로 성철은 견성 인가를 받으러 오는 승려들을 점검할 때는 그들의 ‘잠 속’을 검사했다. ‘한 소식’했다는 스님들은 거의가 화두를 공부하다 정(定)에 빠져 있었다. 정에 빠지면 고요하고 편안한 상태만 탐닉하여 그로부터 헤어 나오지 못했다. 마음의 작용까지 멈춰버리는 일종의 병이었다. 곧잘 정에 빠진 승려들이 성철에게 자신의 경계를 얘기하며 견성 여부를 물어왔다. 아만이 하늘을 찌르는 스님에게 성철이 정색을 하고 되물었다.
“그렇다면 꿈에도 그 경계가 있는가, 없는가?”
그러면 거의 대답을 못하고 눈만 껌벅거리거나 고개를 떨궜다.
“에라 도둑놈의 자식아! 꿈에도 없는 것이 무슨 공부라고 내 앞에 나타났느냐.”
그때마다 성철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수좌들의 ‘한 소식’ 점검은 이렇듯 ‘잠 속의 화두’ 검사였다. 그것은 잠이 꽉 든 상태에서도 화두가 살아있는[숙면일여] 경계를 성철이 성취했음이었다. 화두를 잠 속으로 끌어들이는 요령을 터득한 것이 아니라, 화두 참구가 무르익어 잠속으로 흘러들어간 것이었다. 성철은 ‘허공이 깨어진다 해도 나의 원은 꿈쩍도 않는다’는 발원 맹세를 실천했음이었다.
이 무렵 홀로 무자 화두를 든 성철에게 자꾸 이상한 경계가 나타났다. 혹시 견성이 아닌가 생각하면 이내 마음이 산란해졌다. 어느 날 성철은 꿈속에서도 화두가 성성했다. 그러나 자신이 없었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경계를 얘기할 스승도 없었으니, 한편으로는 환희심이 나고 또 한편으로는 공포심이 밀려들었을 것이다. 그럴수록 오로지 경(經)에 의지하여 묻고 또 물었다. 하루하루가 벽이며 또 낭떠러지였다. 불처럼 뜨거웠고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러자 다른 수좌들에게 성철은 괴각(乖角)쟁이로 비쳤다. 도무지 성철의 행동거지를 이해 할 수 없었다. 이와 관련 일타 스님이 증언한 당시의 의미 있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해 초겨울 어느 날 동화사 요사채에 불이 났다. 대중들이 고함을 지르며 이리 저리 뛰어다녔다. 불길이 다 잡혀갈 무렵에 대중들은 상식 밖의 장면을 목격했다. 그 난리 통에도 선방에서 꿈쩍하지 않던 성철이 부삽과 부집게를 들고 나타난 것이다. 화마에 허물어진 요사채가 아직도 연기를 뿜고 있었다. 성철은 잔불더미를 뒤적거렸다. 불씨가 남아있는 숯덩이를 골라 담아 풍로에 부어놓고 약탕기를 올렸다. 그리고 태연하게 약을 달였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절집 사람들은 기가 막혀 할 말을 잃었다.
“아무리 선승이래도 그렇지, 어떻게 저런 짓을….”
그러나 이를 다르게 보는 대중도 있었다.
“얼마나 참선에 몰두했으면 저럴 것인가.”
“성철수좌가 분명 일을 낼 것이다.”
성철은 마침내 견성을 이뤘다. 이름대로 자성을 깨쳐 확철대오했다. 억겁의 어둠을 사르는 촛불을 밝혔다. 자기 마음 이외에 불법이 없고, 자기 마음 이외에 부처가 없다는 부사의해탈경계(不思議解脫境界)를 성취했다. 1940년 29세의 겨울, 출가하여 무자 화두를 들고 수행한 지 4년 만이었다. 성철은 오도송을 읊었다.
황하는 서쪽으로 흘러 곤륜산 정상에 솟았으니
해와 달은 빛을 잃고 땅은 꺼져 내리도다.
문득 한번 웃고 머리를 돌려 서니
청산은 예대로 흰 구름 속에 섰네.
황하서류곤륜정 黃河西流崑崙頂
일월무광대지침 日月無光大地沈
거연일소회수립 遽然一笑回首立
청산의구백운중 靑山依舊白雲中
훗날 이 오도송이 하도 좋아서 도반 향곡은 춤을 덩실덩실 췄다고 한다. 성철은 깨달음의 경지에 관해 법문을 했다. 깨달음의 전과 후를 이렇게 설명했다.
“깨어나기 전에는 꿈을 바로 깬 사람이 아니고 동시에 자유로운 사람이 아닙니다. 중생의 자유라고 하는 것은 꿈속에서의 자유이고, 깨친 사람의 자유라고 하는 것은 꿈을 깬 뒤의 자유입니다. 그러니 꿈속에서의 자유와 꿈을 깬 뒤의 자유가 어떻게 같을 수가 있겠습니까? ‘마음을 깨친다’는 것은 무심을 증득하는 것입니다. 무심을 증득하면 거기에서 대지혜광명이 생기고 대자유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꿈을 깬 사람, 마음의 눈을 뜬 사람이 되어 대자유의 자재로운 활동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성철의 행장을 추적하다 보면 1940년 동안거를 했던 사찰이 은해사 운부암인지 아니면 동화사 금당선원인지 분명치 않다. 성철 스님의 친필 이력에는 ‘운부암에서 안거’로 쓰였지만 오도한 곳은 ‘29세 금당에서’로 되어 있다. 그래서 제자들과 후생들은 금강선원에서 동안거 중에 오도한 것으로 믿고 있다. 하지만 금당선원에서 행동이 가지런하지 않다고 성철의 방부가 거절됐다는 얘기가 있다. 해탈을 앞둔 고비에서 마지막 벽을 붙들고 있던 오도 직전의 일거수일투족이 다른 승려들에게는 거슬렸기 때문에 있을 법한 일이다.
이와 관련 운부암 선원장 불산 스님은 이런 얘기를 전한다. 하루는 운부암에 곱게 늙어 보이는 노인이 찾아왔단다. 노인은 법당에서 절하거나 스님에게 합장 인사하는 자세가 단정했다. 한눈에도 절밥을 먹은 사람이었다. 알고 보니 그 옛날 운부암 선방에서 성철과 함께 정진했던 선승이었다. 그가 왜 환속을 했는지는 몰라도, 그때를 회상하며 당시를 몹시 그리워했단다. 아마도 젊은 날 구도의 열정이 열매를 맺지 못하고 세파에 시달리다 막상 세상을 뜬다고 생각하니 회한 같은 것이 밀려왔을 것이다. 그런데 노인은 뜻밖의 얘기를 꺼냈다.
“성철 스님은 당시 운부암에서 깨달았지요.”
성철은 분명 ‘금당에서’ 깨쳤다는데 같이 정진했던 선객은 운부암이라고 했다. 이런저런 정황을 이리저리 맞춰보면 성철은 금당선원에서 오도를 했지만 이내 쫓겨나와 운부암에 머물렀을 가능성도 있다. 이미 깨친 성철이었기에 모든 것이 달라보였을 것이고, 이를 선객들은 운부암에서 깨친 것으로 착각했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김택근 법보신문 고문(언론인·시인)
출처: 법보신문 121292호 / 2015년 4월 29일자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18. 삼일암에서 훗날의 사자후를 챙기다
『‘대저 육조의 종지는 육조가 항상 주창한, 오직 돈법만을 전한다[唯傳頓法]고 하는 것으로 점문(漸門)은 일체 용납치 않는 것이다. 그러나 중간에 교가(敎家)의 점수사상이 혼입되어 선문이 교가화됨으로써, 순수선은 없는 실정이다.’ 이렇듯 성철은 지눌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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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은 누구에게도 오도의 순간을 얘기하지 않았다. 경허는 사미승의 “소가 되어도 고삐 뚫은 구멍이 없다”는 소리를 듣고, 용성은 ‘경덕전등록’의 ‘달은 만궁(彎弓)과 같은데 비는 적고 바람은 많다’는 구절을 읽고 대오했다. 만공은 통도사 백운암에서 새벽 종소리를 듣고, 한암은 스승 경허로부터 ‘금강경’의 사구게(四句偈)를 듣고, 경봉은 촛불이 출렁이는 것을 보고 견성했다. 그러나 성철의 견성에 대한 인연은 알려진 것이 없다. 다만 법문과 강설, 또 회고담을 통해 동정, 몽중, 숙면일여의 단계를 거치며 미세망상만이 남아있는 마지막 마계(魔界)인 제8아뢰야식마저 멸진시켰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오매일여의 경지에 이른 후에도 다시 사중득활(死中得活)의 경계에 이르러 비로소 견성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생각이나 분별로 과거나 미래를 인식하지만,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 무심경지에 들어가면 과거·현재·미래가 다 끊어져 버린다. 이를 ‘과거와 미래가 끊어졌다[前後際斷]’고 한다. 그리 되면 밖으로는 모든 인연을 쉬고 안으로는 마음이 허덕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무심경지가 도(道)에 든 것이 아니었으니 여기서 다시 깨쳐야 한다. 이 경계를 선종에서는 ‘죽은 자리에서 다시 살아난다[死中得活]’고 한다. 성철은 이 경계를 이렇게 설명했다.
“일념불생 전후제단이 되어 대무심지에 이르렀다고 해도 거기서 살아나지 못하면 이 사람은 크게 죽은 사람[大死底人]입니다. 크게 죽은 사람은 구경각을 성취하지 못했으며 도(道)를 이루지 못했으며 견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이만한 경계에 도달하려고 해도 참으로 많은 노력이 필요하고 또 어려운 것은 사실이나, 죽어서 살아나지 못한다면 이것은 도가 아니고 견성이 아니라고 고불고조(古佛古祖)가 한결같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매일여 경지를 증득했어도 한 차례 더 공부해서 크게 죽은 뒤 다시 소생하라는 가르침이다. 성철은 훗날 도반인 향곡에게 사중득활의 경계에 이르렀는지를 물은 바 있다. 아마 향곡이 오매일여의 경지에 들어 대무심지에 이르렀지만 죽은 자리에서 다시 살아났는지 알고 싶었을 것이다. 향곡은 34세인 1944년에 깨달음을 얻어 운봉으로부터 전법게를 받아 이미 경허 스님의 적손이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1947년 문경 봉암사에서 정진하던 중에 성철이 향곡에게 물었다.
“‘죽은 사람을 죽여라 하면 바야흐로 산 사람을 볼 것이요[殺盡死人 方見活人], 또 죽은 사람을 살려라 하면 바야흐로 죽은 사람을 볼 것이다[活盡死人 方見死人]’고 한 말이 있는데 그 뜻이 무엇이겠는가?”
향곡이 이 말을 듣고 몰록 무심삼매에 들었다. 삼칠일(21일) 동안 침식을 잊고 정진하다가 활연대오하여 오도송을 읊었다. 그렇게 도반까지 분심을 일으켜 대오에 이르도록 한 성철이건만 정작 자신의 견성에 대해서는 어떤 말도 남기지 않았다.
“당신 이야기는 하지 않으셨다. 사담조차 없으셨다.” (불필 스님)
“성철 스님을 모시던 당시엔 무섭고 어려워 감히 말을 꺼내지 못했다. (원택 스님)
그런데 그런 이유를 맏상좌 천제 스님은 나름 이렇게 설명했다.
“‘금강경’에도 기록되어 있다. 깨친 것을 인식하면 사상(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갇혀 있는 것이다. 우리의 고정관념 속에서 깨달음이란 것은 신비로움을 연상하는데, 그것조차 초탈한 것이 깨달음의 경지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묻는 것 자체가 의미 없는 것 아닌가.”
‘금강경’은 시종 상(相)을 여의라고 이른다. 성철은 아상을 주관, 인상을 객관, 중생상을 공간, 수자상을 시간 개념으로 파악했다. 주관은 ‘나’라는 모습에서, 객관은 나를 떠난 상대방에게서, 공간은 나와 남의 어울림에서, 시간은 내 목숨이 영원할 것이라는 집착에서 생겨났다고 보았다. 이처럼 독창적으로 사상(四相)을 해석하고, 상을 버려서 견성한 선승이 어찌 깨침의 인연 따위를 붙들고 있겠느냐는 말이다. 제자 천제의 설명은 엄숙하다. 추호도 그런 인연 따위를 들어 성철의 견성을 의심하지 말라는 얘기이다. 물론 성철의 견성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그저 천제가 지적한 신비를 좇는 속인의 입장에서 아쉬울 따름이다. 분명한 것은 아무도 묻지 못했(않았)고, 성철은 말하지 않았다.
성철은 깨친 후 순천 송광사를 찾아갔다. 선방인 삼일암에서 하안거를 나기 위해서였다. 그곳에는 당대 선지식 효봉 스님(1888~1966)이 주석하고 있었다. 성철은 큰스님을 찾아가 자신의 깨달음을 점검하고 싶었을 것이다. 인가받고 싶었을 것이다. 송광사는 16명의 국사(國師)를 배출한 명찰이었다. 일찍이 고려시대 지눌 보조국사(1158~1210)가 정혜결사운동을 펼쳐 불법을 다시 일으킨 승보사찰이었다. 그래서 선승이 정진하는 선방이 법당보다 위에 있다. 삼일암은 송광사 16국사 중 제9대 조사인 담당국사가 이곳의 물을 마시고 3일 만에 깨쳐서 그리 부른다고 알려져 있다.
효봉은 1925년 38세에 금강산 신계사 보운암에서 석두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신계사 미륵암 선원에서 석 달 동안 앉아만 있어 절구통수좌라는 별명과 함께 ‘정진 제일’이라는 별호를 얻었다. 1930년 법기암 뒤에 토굴을 짓고 ‘깨닫기 전에는 나오지 않겠다’ 맹세했고, 1년6개월이 지난 어느 여름날 홀연 깨쳐서 토굴을 박차고 나왔다. 훗날 총무원장과 통합종단의 초대 종정을 지냈다. 학눌(學訥)이라는 법명은 보조국사 지눌의 덕화를 본받겠다는 뜻으로 지었다고 한다.
성철은 ‘한국불교의 법맥’에서 깨달음에 대한 스승의 인가, 사자상승(師資相承)에 대한 중요성을 설파했다.
‘승가에는 두 종류의 스승이 있다. 하나는 삭발을 허락하고 계를 주는 스승[得度師]이고, 또 하나는 마음을 깨우쳐 법을 이어받게 해주는 스승[嗣法師]이다. 만약 수계한 스승에게서 마음을 깨우쳐 법을 전해 받게 되면 법을 전해 받은 스승을 겸하게 되지만, 다른 스승으로부터 마음을 깨우쳐 법을 받게 되면 법을 전해 받은 스승을 따로 전하게 된다. 법을 이은 스승의 계통을 일러 법계·법맥, 혹은 종통·종맥이라고 한다.
(……) 이를 일컬어 혈맥을 서로 이어받음[血脈相承]이라고 한다. 이는 마치 아버지의 피가 아들에게 전하여짐과 같이 스승과 제자[師資]가 주고받아서 부처님의 법을 서로 이어서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 법맥을 전하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혈맥을 서로 이어받은 법맥 즉 종통은 제삼자가 변경시켜 바꾸지 못한다.’
성철은 깨쳤으니 법맥을 이어받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송광사에서 효봉과 어떤 인연을 맺었는지는 알 수 없다. 대신 보조국사 지눌에 대해서는 많은 것을 습득했다고 알려져 있다. 사실 송광사는 보조국사 지눌의 사찰이었다. 정혜결사를 통해 고려불교를 일으킨 지혜와 법음이 스며있었다. 당시에는 보조국사가 걸쳤던 장삼과 가사까지 보관하고 있었다. 700년이 지났지만 지눌의 자취가 선명했고, 보조국사의 법향이 그윽했다. 성철은 지눌이 남긴 글들을 독파했다. 그러던 어느 날 ‘수심결’을 읽다가 한 구절에 눈길이 멈췄다.
‘예로부터 모든 성인이 먼저 깨치고 뒤에 닦지 않음이 없으니 닦음을 인연으로 깨친다.’
제성불성 막불선오후수 인수내증 (從上諸聖 莫不先悟後修 因修乃證)
하지만 혜능 스님은 ‘육조단경’에서 이렇게 일렀다.
‘자기 성품을 스스로 깨쳐서 단박에 깨치고 단박에 닦으니 또한 점차가 없느니라.’
자성자오 돈오돈수 역무점차 (自性自悟 頓悟頓修 亦無漸次)
지눌과 성철은 경을 통해 홀로 공부했다. 둘은 육조혜능을 최고의 스승으로 모셨다. 그런데 지눌은 ‘먼저 깨치고 뒤에 닦음[先悟後修]’을 주창했다. 성철은 자신과 지눌의 깨침을 살펴보았다. 지눌은 창평 청원사에 머물 때 ‘육조단경’을 읽고 처음으로, 또 예천 보문사에서 ‘화엄경’과 ‘화엄신론’을 읽고 두 번째로, 다시 지리산에서 ‘대혜어록’을 읽고 세 번째로 깨달음을 얻었다고 했다. 이는 자신의 깨침과는 달랐다. 똑같이 ‘육조단경’ ‘화엄경’ ‘대혜어록’을 보았지만 고려시대의 지눌은 돈오돈수(頓悟頓修)가 아닌 돈오점수(頓悟漸修)를 주창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지눌이 조계종 종조의 지위를 얻기 전이었기에 성철은 ‘깨달음에 대한 이견’만을 품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훗날 조계종이 지눌을 종조로 모심으로써 종지(宗旨)마저 흔들렸다. 이를 보고는 참을 수 없었다. 성철은 ‘돈황본 육조단경’을 펴내며 책머리에 이렇게 적었다.
‘조계육조(曺溪六祖) 이후 선은 천하를 풍미하여 당·송·원·명 시대에 불교가 꽃을 피우게 한 핵심적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흐름에 따라 종지가 많이 변하여 육조의 정통사상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대저 육조의 종지는 육조가 항상 주창한 “오직 돈법만을 전한다[唯傳頓法]”고 하는 것으로, 점문(漸門)은 일체 용납치 않는 것이다. 그러나 중간에 교가(敎家)의 점수사상이 혼입되어 선문이 교가화됨으로써, 순수선은 없는 실정이다.’
이렇듯 성철은 지눌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이로써 한국불교에 돈점논쟁이 불붙었으니, 송광사 삼일암의 정진은 훗날의 사자후를 챙김이었다.
김택근 법보신문 고문(언론인·시인)
출처: 법보신문 1293호 / 2015년 5월 6일자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19. 경에서 보지 못한 것을 덕숭산 정혜사에서 보았다
『"만공은 처음 온양 봉곡사에서 깨달음을 얻었고, 두 번째는 양산 영축산 통도사 백운암에서, 다시 자신이 중창한 덕숭산 정혜사에서 견성했다고 한다. 성철은 몇 번에 걸친 깨달음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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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은 송광사에서 하안거를 마치고 예산 덕숭산의 정혜사로 옮겨갔다. 그곳에는 능인선원이 있었고, 당대 선지식인 만공 스님(1871~1946)이 주석하고 있었다. 성철은 효봉에 이어 만공을 찾아 나선 것이다.
덕숭산은 고찰 수덕사가 있어 수덕산이라고도 불린다. 가야산, 오대산, 용봉산과 마주보고 있다. 덕숭산, 가야산, 용봉산 일대에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절터가 남아 있다. 언제 어떻게 쇠락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절을 짓고 부처를 모신 백제인에게는 불국토였을 것이다. 정혜사는 559년(백제 법왕1) 수덕사와 함께 지명 스님이 창건했다. 중창 및 중수의 사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만공이 1930년 중수한 이후 비로소 참선 도량으로 사격이 높아졌다. 만공 문하에는 항상 100여 명의 스님이 있었다고 하니, 그 중 상당수가 이곳에서 참선수행을 했을 것이다.
만공은 경허 스님과 천장암에서 법연을 맺고 14세에 출가했다. 화두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를 붙들었지만 앞이 깜깜하고 공부에 진척이 없자 천장암을 나와 제방에서 수행정진했다. 오도 후에는 경허로부터 전법게를 받았고 수월, 혜월과 함께 ‘경허의 세 달[月]’이라 불렸다. 숱한 중창불사를 통해 덕숭산을 불교 성지로 다시 일으켜 세웠다. 스승 경허처럼 여러 무애행이 전해오지만 일제와 친일승을 향해 천둥처럼 내려친 사자후는 지금도 불교사에 그 자국이 선명하다.
1937년 3월 조선총독부 회의실에서 조선불교31본산주지회의가 열렸다. 8도 도지사도 참석했고 미나미 총독이 직접 주재했다. 회의는 조선불교진흥책 마련을 내세웠지만 실은 주지들의 협조를 얻어 조선과 일본불교의 병합을 획책하려 했다. 미나미 총독이 초대 총독 데라우치의 사찰령 선포를 찬양하며 주지들의 호응을 유도했다.
사찰령이란 1910년 일제가 조선 불교계를 장악하려는 의도로 입안되었다. 사찰을 병합·이전·폐지하려면 총독부의 허가를 받도록 했고, 또한 시행규칙을 두어 전국의 사찰을 30본사체제(후에 화엄사가 추가되어 31본사)로 개편했다. 본사 주지는 총독의 허가를, 말사 주지는 지방장관의 인가를 받아야 했다. 이로써 불교계의 재산권과 인사권을 총독부가 장악했다. 사찰령은 불교계를 얽어매는 올무였고, 사찰령 하의 불교계는 말라가고 있었다. 그럼으로 사찰령 폐지는 비구승들의 염원이었고, 청년불교단체를 중심으로 폐지운동이 끊임없이 전개되었다.
미나미 총독이 속 보이는 은근한 인사말로 분위기를 띄웠다. 그러자 주지 몇이서 조선불교의 현실에서는 사찰령 선포가 마땅했다며 맞장구를 쳤다. 참석자들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때 마곡사 주지 만공이 벌떡 일어나 총독과 주지들을 노려보며 외쳤다.
“청정이 본연하거늘 어찌하여 산하대지가 나왔는가.”
모두가 놀라 만공을 바라봤다.
“이 자리에 데라우치 초대총독이 한 짓을 칭찬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다들 제정신 차리고 내 말을 잘 들어야 할 것이오. 부처님이 이르시기를 청정 비구 하나를 파계시켜도 무간지옥에 떨어진다고 하셨거늘, 조선승려 7000명을 파계시킨 데라우치 전임 총독이 과연 지금 어디 있는지 아시오? 무간아비지옥에서 한량없는 고통을 받고 있소이다. 어찌 그걸 모르시는가?”
미나미 총독를 비롯한 참석자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누구는 그만하라고 고함을 질렀다. 만공의 호통은 멈추지 않았다.
“조선 청정비구교단을 어찌 취처육식을 일삼는 일본불교와 병합하려 하는가. 진정 조선불교를 진흥시키려면 조선총독부가 간섭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일제의 야욕과 그 앞에 허무하게 무너진 조선불교를 향해 내려친 장군죽비였다. 또한 총독에게 주지직 허가를 받은 자신의 비루함을 깨무는 ‘할’이었다. 가슴을 돌아 나온 비명 같은 것이었다. 만공의 대성일갈은 멀리 퍼져나갔다. 도반 한용운이 숙소로 찾아와 “천하의 만공”이라며 손을 잡았지만 어찌 보면 그것은 불교사의 슬픈 삽화였다. 불교계 현실을 개탄하고 있던 비구들에게는 한줄기 소나기였지만, 한 번의 소나기로 변할 것은 없었다.
주지회의에서 ‘데라우치를 지옥으로 보낸’ 얼마 후 만공은 마곡사 주지 자리를 내놓고 정혜사에 머물고 있었다. 그리고 1941년 가을, 특별한 선승을 맞았다. 바로 30세 성철이다. 71세 노승 만공은 청담, 용운과 선원에 앉아 있었다. 그때 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용운이 문구멍으로 내다봤다.
“괴각쟁이다, 괴각쟁이가 온다.”
청담은 그가 누군지 궁금했다. 이윽고 성철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 청담은 문득 성철이 커 보였다. 그가 왜 괴각쟁이인지 알고 싶었다. 만공에게 인사를 드리는 성철의 몸가짐이 듬직했다. 그렇게 처음 만났다. 그날 밤 많은 얘기를 나눴다, 주로 청담이 묻고 성철이 답했다. 아침이 되자 서로에게 도반이 되어 있었다. 두 선승의 인연은 이후 엄청난 파장을 불러왔다. 시퍼런 결기로 한국불교에 아침을 불러왔다.
청담은 성철보다 10살이나 많았다. 그러나 불문에 무슨 나이가 필요할 것인가. 괴팍하고 별난 괴각쟁이끼리 뜻이 맞았다. 첫 만남에서 서로의 의기를 섞었다. 치열하게 정진했기에 서로의 경지를 알 수 있었다. 훗날 서로 말을 트는 사이가 불만인 청담의 제자들이 볼멘소리를 했다. 그러면 청담이 제자들을 책했다.
“성철 스님은 한국불교의 보물이다. 이를 내가 아니면 누가 알아보겠느냐. 내가 나이는 열 살이 많지만 불교에 대해서는 성철 스님이 나보다 열 배나 더 잘 안다.”
간혹 청담이 성철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우리는 전생에 부부였던 모양이다.”
성철도 화답했다.
“우리 사이는 물을 부어도 새지 않는다.”
성철은 정혜사 능인선원에서 동안거를 했다. 그 해 겨울 성철은 거침없이, 또 끊임없이 물었다.
“큰스님께서는 견성성불했습니까?”
“견성했지. 여기 정혜사에서 확실히 했지.”
만공은 처음 온양 봉곡사에서 깨달음을 얻었고, 두 번째는 양산 영축산 통도사 백운암에서, 다시 자신이 중창한 덕숭산 정혜사에서 견성했다고 한다. 성철은 몇 번에 걸친 깨달음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도대체 견성의 기준이 무엇이란 말인가? 어떤 경계를 깨달음으로 여기는 것인가?’
성철은 그러나 그 경계를 묻지 않았다. 고불고조에 묻고 치열한 수행으로 스스로 답을 찾아온 성철은 만공의 벼락같은 법거량을 내심 기다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내 그런 기대를 내려놓았다. 성불했으면 다름이 같음이었으니, 다시 홀로 가야했다.
그해 겨울 만공은 성철이 큰 그릇임을 알아보고 많은 얘기를 들려줬다. 성철이 물으면 만공은 무엇이든 친절하게 답했다. 성철은 만공에게 들었던 얘기를 ‘큰 그릇’에 담아두고 자주 법어에 인용했다. 그중에서도 성불하려면 가난해야 한다며 이런 얘기를 들려줬다.
“만공 스님이 처음 정혜사에 와서 살 때는 집도 없고, 먹을 것도 없었지. 움막도 얄궂게 해놓고 형편없었다 하더구먼. 신심 있는 대중들이 모여서 탁발해서 살았대. 봄이 되면 보리 동냥을 해서, 그 보리를 절구에 넣고 쿵쿵 찧어서 밥을 해먹었어. 그것도 모자라 시꺼먼 보리누룽지를 서로 먹으려고 했대. 그래도 그렇게 배고프게 살 때는 한 철 지나고 나면 ‘나도 깨달았다, 내 말 한마디 들어보라’며 깨달음을 토로하는 사람이 나왔단 말이야. 그런데 그 뒤에 신도가 생기고 절도 좋게 짓고, 양식도 꽁보리밥 신세를 면하고 좀 넉넉해지니까 공부 제대로 했다는 사람이 하나도 안 나오더라 이 말이야.”
만공은 ‘절 짓는 스님’이라고 할 정도로 불사에 매달렸다. 그러나 정작 그 좋은 집에 사는 승려들은 오히려 수행을 게을리 했다. 번들거리는 윤기와 배부름이 마군인 셈이었다. 훗날 성철은 무엇보다 ‘가난’을 먼저 배우라고 설파했으니 이는 만공이 먼저 체득한 것이었다.
성철은 또 정혜사에서 상서로운 광경을 목격했다. 이듬해 정월, 스님이 대웅전에서 촛불을 밝히고 24시간 철야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조를 짜서 꼬박 사흘 동안 이어서 정진하는 모습은 감동적이었다. 성철은 훗날 제자와 신도들에게 ‘칠일칠야 정진’ ‘삼칠일(21일) 기도 정진’을 시켰는데 이는 정혜사에서 보고 새긴 것이었다. 성철은 정혜사에서 한 철을 나며 불경에서는 보지 못한 많은 것을 보았다.
만공의 스승 섬김은 성철도 부러웠던 모양이다. 어쩌면 우문(愚問)이었는데도 성철은 제자들에게 그때의 문답을 자주 애기했다고 한다.
“스님께서는 경허 스님을 얼마나 존경하셨습니까?”
“먼 길 가다가 식량이 떨어져 먹을 것이 없으면 내가 우리 스님에게 잡혀먹혀야 하지 않겠나?”
김택근 법보신문 고문(언론인·시인)
출처: 법보신문 1294호 / 2015년 5월 13일자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20. 회갑잔치 날 아버지가 울었다
『"1941년 동짓달 초하루는 이상언의 회갑 날이었다. 해 질 무렵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가족들이 모였다. 그때까지 꼿꼿이 술잔을 들었던 아버지 이상언은 끝내 눈물을 보였다. 그러자 식구들이 울고, 하객들도 눈물을 찍어냈다. 끝내 잔치마당이 울음바다가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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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통합종단인 조선불교조계종이 탄생했다. 사찰령에 의거한 31본사체제에 불만이 컸던 조선 불교계는 중앙의 총본사 설립을 갈망하고 있었다. 하지만 조계종의 탄생은 불교계의 기도에 응답이 아니었다. 총본사의 출현은 불교계의 여망과는 달리 총독부의 치밀한 계산에서 나온 술책의 산물이었다.
일제 총독부는 그동안 불교계를 31개 본사로 나누어 관리했다. 뭉쳐있으면 힘이 생기고, 힘이 생기면 통제하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중일전쟁이 터지자 중앙집권적 통일기관 설립을 적극 모색했다. 군수물자와 인적 자원을 동원하기 위해서는 통일된 전쟁지원체제와 신속한 명령전달체계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31본사주지회의를 통해 총본사 설립을 적극 추진했다. 여기에는 총본사가 생기더라도 총독부가 조선 불교계를 장악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깔려 있음이 분명하다. 그동안 불교계를 31개 본사로 쪼개서 충성경쟁을 시켜보니 참으로 가관이었다. 무슨 일이든 앞장서서 식민통치에 앞장섰다. 바탕이 허약하니 그들이 합쳐본들 별일이 있을 것인가. 총본사 수뇌부를 친일승으로 채우면 그만이라는 계산을 했을 것이다.
31개 본사들이 건설비를 분담하여 총본사 건물을 짓기로 하고 명칭을 태고사라 하기로 했다. 정읍에 있는 보천교 십일전(十一殿)을 해체하여 옮겨왔다. 바로 지금 종로구 견지동에 있는 조계사 대웅전이다. 보천교는 차천자(車天子)라 불린 차경석이 이끈 신흥종교였고 한때 신도가 600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십일전은 보천교의 본당이었고, 경복궁을 모방하여 지었으나 오히려 근정전보다 컸다고 전해진다. 몰락한 다른 종교의 본당을 조선불교의 법당으로 삼았으니 새삼 성주괴공이라 할만하다. 건물이 완성되자 삼각산에 있던 태고사를 이전했다. 이는 조선불교의 법통을 고려 말 선승 태고 보우국사에서 찾음이었다.
불교계는 다시 총본사설립위원회를 조직하고 1940년 11월 31본사 주지들이 모여 조선불교선교양종으로 사용하던 종명을 조선불교조계종으로 바꾸었다. 1941년 6월 태고사에서 열린 31본사 주지회의에서는 조선불교조계종 종정 겸 총본사 태고사 주지를 뽑았으니 바로 방한암이었다. 태고사 종무총장에는 월정사 주지 이종욱이 선출되었다. 히로다 쇼이쿠라는 이름으로 뼛속까지 변신한 친일거두 이종욱 종무총장은 지금의 총무원장처럼 실질적으로 종권을 장악했다. 종정은 그저 상징적인 존재였다. 이로써 총본사가 전국의 본사와 말사를 통괄 감독하도록 했다. 어용단체이자 친일종단의 출범으로 총독부는 종래의 31본사체제보다 더 효율적으로 불교계를 장악할 수 있게 됐다.
총본사인 태고사가 출범한 직후 총독부는 중일전쟁 발발일(7월7일)에 조선 모든 사찰과 포교소에서 기념법회를 봉행하라고 독려했다. 조계종은 종정의 이름으로 교시를 발표하여 전쟁에 동참하라 독려했다. ‘조선의 모든 승려와 교도들은 황군을 신뢰하고 일본에 결사보국의 정신으로 충성을 다하라’는 내용이었다.
중앙에서는 이렇듯 수상한 소용돌이가 임제선맥을 삼키고 있었지만, 또 저 멀리 산중에서는 선승들의 정진이 열매를 맺어 땅에 떨어질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영원한 변방이란 없는 것, 깨달음이 어찌 산하와 사람을 가려 깃들 것인가. 그해 덕숭산 정혜사에 불교의 미래가 깃들어 있었다. 거대한 변혁은 소리 없이, 그리고 아주 하찮은 것처럼 찾아오는 법이다.
성철은 동화사 금당선원에서 깨친 후부터 장좌불와(長坐不臥)를 하고 있었다. 정혜사에서도 눕지 않고 허리를 바닥에 붙이지 않았다. 장좌불와 수행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망념이 없는 성성적적한 선정(禪靜)삼매 경지에 들어야 가능했다. 의도적으로 밀려드는 잠을 쫓으려 해서는 며칠도 버티기 힘들며, 더 무리했다가는 병에 걸리기 십상이다. 선정 삼매에 들면 앉아있음의 의식도 사라지고 시공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눈만 뜨면 만 가지 생각에 끄달리는, 번뇌망상에 쌓여있는 사람들은 감히 흉내도 낼 수 없다. 그래서 수많은 수좌들이 원을 세웠다가 얼마 버티지 못하고 ‘절망의 자리’에 눕곤 했다. 어느 경계에 이르러야만 비로소 실행할 수 있었다.
성철의 장좌불와를 인증하는 일화가 있다. 성철이 여러 선방을 돌며 정진 할 때 도봉산 망월사에서도 하룻밤을 묵었다. 그때 망월사에는 만해 스님의 상좌 춘성 스님(1891~1977)이 주석하고 있었고, 마침 춘성도 성철이 장좌불와를 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문득 호기심이 일어 성철의 경계를 알고 싶었다. 물론 당시 춘성의 내공도 만만찮았다.
춘성은 만해의 제자였다. 만해는 불교계뿐만 아니라 겨레의 존경을 받고 있지만, 정작 절집 상좌는 3명(용담, 동파, 춘성)에 불과하다. 그중 행적을 알 수 있는 제자는 춘성뿐이었다. 춘성은 무애도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가 남긴 일화는 지금도 살아서 회자되고 있다. 호탕한 법문으로 세상을 흔들었고, 한편으로는 열심히 정진하여 화엄법사로도 이름을 떨쳤다.
만해의 옥바라지를 위해 머물던 망월사에서 혹독한 참선 수행을 했으니 스승의 옥중 고초와 다름이 없었다. 춘성이 있어서 망월사 선방은 선승들의 유명한 수행처가 되었다. 춘성은 구름처럼 모여든 수좌들을 치열하게 가르쳤다. 수좌들은 ‘도봉산 호랑이’로 불리는 춘성의 욕지거리를 들으며 안거를 했다.
그런 망월사 선방에 성철이 찾아든 것이다. 춘성은 성철보다 나이가 21세나 많았다. 춘성은 성철이 장좌불와를 제대로 하고 있는지 지켜보기로 했다. 이윽고 도봉산이 산 그림자를 거두고 별빛이 섞인 어둠이 내렸다. 춘성은 발소리를 죽여 성철이 머무는 방에 슬며시 다가갔다. 그리고 방문에 침을 발라 구멍을 내고 안을 들여다봤다. 성철은 초저녁부터 가부좌를 하고 있었다.
밤이 깊어갔다. 몇 번을 들여다봐도 성철은 그대로 앉아있었다. 지켜보는 춘성이 오히려 지쳐갔다. 한기와 수마가 함께 몰려와 춘성을 괴롭혔다. 성철은 새벽이 오고 예불시간이 되어서야 비로소 가부좌를 풀었다. 이를 지켜보던 춘성도 꼬박 날을 세웠다. 그날 성철의 장좌불와 모습은 도봉산 바위처럼 단단했다. 춘성은 그 광경을 대선 스님에게 이렇게 얘기했다.
“철수좌는 대단하네. 밤새 꼼짝 않고 앉아있더구만. 그러고도 잠을 자는지는 모르겠네만 하룻밤을 꼿꼿이 앉아 있었네. 철수좌의 장좌불와는 사실이었네.”
이에 자극을 받아 춘성도 장좌불와 수행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 후로 얼마나 지속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장좌불와 정진을 시작한 지 며칠 되지 않아 모든 이빨이 흔들거렸다는 얘기는 전해진다.
성철이 깨달음을 얻고 다른 경계에서 세상을 새로 보고 있었지만 묵곡리 생가는 달라진 게 없었다. 짚 옆 대숲은 한가롭게 울고 밤나무 밭에서는 밤이 열렸다. 하지만 일본이 일으킨 전쟁이 오래 지속되자 묵곡리까지 수탈의 손길이 뻗쳐왔다. 그러나 꼿꼿했던 유학자 이상언은 그들의 요구를 일축했다.
“워낙 강인한 성품이셨던 할아버지는 일제 때 관리들이 전쟁에 필요하다며 놋그릇 등을 모조리 거두어 갈 때에도 우리 집은 숟가락 하나 건들지 못하게 했다. 할아버지가 떡하니 버티고 서 계시면 그 기세에 눌려 어쩌지 못했다고 한다.”
불필 스님의 할아버지 이상언에 대한 회고이다. 이상언은 창씨개명도 거부했다고 한다. 부와 명성이 있었기에 일제 관리들의 압력을 대담하게 뿌리쳤을 것이다. 그렇게 당당한 이상언도 아들 성철만 떠올리면 기가 죽었다. 중이 된 부잣집 아들 얘기는 마을에서 사라지기는커녕 새롭게 가지를 쳤다. 논밭에 나가면 마을 사람들이, 향교에 나가면 유학자들이 이상언을 피했다. 1941년 동짓달 초하루는 이상언의 회갑 날이었다. 성철은 정혜사 선방에서 동안거를 하고 있었다. 부잣집 회갑잔치에 묵곡리 일대가 떠들썩했다. 이웃과 친지, 벗들이 모여 하루 종일 먹고 마셨다. 장남이 없는 잔치였기에 더 많이 차리고, 더 크게 웃으려 했다. 풍악 소리가 경호강까지 울려 퍼졌다.
해 질 무렵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가족들이 모였다. 그때까지 꼿꼿이 술잔을 들었던 아버지 이상언은 끝내 눈물을 보였다. 그러자 식구들이 울고, 하객들도 눈물을 찍어냈다. 끝내 잔치마당이 울음바다가 되어버렸다. 결국 가족사진은 찍을 수 없었다. 잔칫상을 앞에 두고 이상언 부부가 굳은 표정으로 찍은 사진 한 장이 남아, 그날을 증언하고 있을 뿐이다. 그날 아버지는 누구의 절도 받지 않았다.
이날 이상언의 회갑잔치를 지리산 천왕봉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김택근 법보신문 고문(언론인·시인)
출처: 법보신문 1295호 / 2015년 5월 2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