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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치하의 부흥운동
1. 각 교단의 부흥운동
대 부흥운동이 있은 후 1910년 8월29일에 우리나라는 일본에게 합병을 당하였다. 이때 교회는 전국적으로 조직을 가진 유일한 단체였다. 그리고 일제 탄압의 시련기에 교회는 민족의 안식처요 민족정신(民族精神)을 불어 넣어 주는 요람으로써의 애국적 사명(使命)과 구령사업을 그치지 않았으며, 이 구령사업은 부흥운동을 통하여 표출되었다.
가. 감리교회의 부흥운동
1909년에 9월에 개최된 남 감리교 주한 선교부의 연차 대회에서 “20만 명의 심령들을 그리스도에게로”라는 표어가 채택되게 되었다. 그 대회가 폐회된 직후에 복음주의 선교부 통합 공의회(The General Council of the Evangelical Missions)가 서울에서 소집되어 “백만명 심령을 그리스도에게로”라는 슬로건을 채택하였다. 이 백만명 신자화의 운동은 한국교회의 전도열을 진작시켜 주었고, 한국 미래교회의 전통으로 넘겨주었다.
남 감리교회는 1925년을 부흥년으로 설정하여 교직자들의 성령 충만 운동을 일으켰다.
1930년에는 미 감리회와 남 감리회가 합하여 조선 감리회가 성립되었다.
감리교회의 부흥운동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이 용도 목사였다.
*이 용도 목사
①1901-1933. 감리교 목사. 독립운동가. 부흥사. 1901년 4월6일에 황해도 김천군 서천면 시변리에서 출생. 시변리 교회 전도부인으로 있던 모친의 영향을 받아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하였다.(강 병도. 기독 지혜사. 교회대사전. 3권 1994. p894.)
②1924년 한영서원 재학 중에 3. 1운동에 가담 2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는등 4차례에 걸쳐 3년여의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이런 당시 송도 고등 보통학교 교장 왓슨선교사는 그를 협성신학교에 추천하여 입학하였고, 1928년1월 28일에 신학교를 졸업하였으며, 졸업 그 이튿날에 강원도 통천 지방교회의 담임으로 부임하였다.(송길섭. 한국 신학 사상사. 대한 기독교 출판사. 1987.4 p301)
③1928년에 통천읍 근방 산(백정봉)에서 박 재봉이란 청년과 10일간 금식 기도를 한 후에 영적인 능력을 얻어 교회를 50명에서 160명으로 부흥시키고, 부흥사로 활동을 하였으며, 1930년9월28일에 연합연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는 1931년 순회부흥사로 활동하였다.(이 만신. 청파. 교회성장과 부흥회.1993. p.91)
그는 청빈하였으며,(苦(쓸,고)는 나의 선생. 貧(가난할, 빈)은 나의 애처. 卑(낮을,비)는 나의 궁전이라함) 그의 부흥회는 회개, 기도, 사랑이었다. 그는 종교는 설교가 아니라 삶이라고 외쳤다. 무조건의 사랑을 강조하였으며, 목회자와 선교사와 신학과 교리의 기독교를 공격하므로 신비주의에 오류에 빠지고 말았다. 유일회적인 계시를 무시하므로 1933년 휴직 처분을 받았고, 얼마 후, 해주에서 여러 교인들의 돌에 맞고 원산에 와서 치료를 받다가 지병(폐병)으로 33세가 되던 1933년 10월 2일 원산에서 숨을 거두었다.(이 만신. 청파. 교회성장과 부흥회.1993. p.91)
*이용도 목사가 조선 교회에 미친 영향
첫째로, 참 나라 사랑. 민중사랑의 본을 보였다.
둘째로, 새로운 스타일의 부흥회를 시작하였다.(선교사들과 다르게 토착적 신비적 타입의 집회 형식이었다)
셋째로, 자기 만족에 빠진 교회 지도자들을 깨우치게 하는 개혁을 일으켰다.
넷째로, 전국적으로 기도 부흥을 일으켰다.(예:1931년 9월 아현동 성결 신학교 신학생 부흥회-기도에 불이 붙음.)
다섯째로, 많은 젊은이들을 주의 사역자로 만들었다.(조 경우, 조 신일. 이 호운, 명 조관, 김 광호, 변 종호, 김 용련 목사등)
이 용도 목사의 단점을 굿이 꼬집어본다면 신학적 훈련이 부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신비주의라는 비난을 받았고, 그의 강한 기성교회와 목회자에 대한 비판은 장로교단과 그가 속한 감리교단의 제재를 받았던 것이다.(김 우영. 교회와 부흥회. 반석 문화사. 1995. p50)
나. 장로교의 부흥운동
1919년의 3.1민족 운동을 계기로 전환된 일제의 문화 회유 정책하에서 한국 교회는 교육, 계몽, 문맹퇴치운동과 교회의 진흥 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이러한 1920년대의 시대적 사황 속에서 길선주 목사에 이어 김 익두 목사가 전국을 순회하며 신유 이적을 나타내 보이면서 한국 교회의 영적 성장을 이루었다.
(1) 길 선주 목사의 부흥운동
1869년 3월15일 평안남도 안주에서 길 봉순과 노 복순 사이에 차남으로 출생한 길 선주는 1897년에 기독교에 입교하기 전까지 한학, 수학, 선도(9년간 심취)수양, 의학연구 하였고, 1907년의 대 부흥운동 때, 크게 활약하여 전국으로 사경회와 부흥회를 인도하였다. 장로교회 목사며, 독립운동가 33인중1인, 12세에 한시를 지어 장원 급제하여 부사(府使) 대도호부사와 도호부사의 총칭)의 통리가 되기도 하였다. 1903년 평양 신학교에 입학 1907년 6월 10일 졸업. 최초의 목사 7인중에 1인이다.
길 선주 목사는 요한 계시록 1만 2백회를 독파하여 거의 암기하였고, 신약 성경은 1백회, 구약성경은 30회 이상을 읽었으며, 요한 1서는 5백회를 독파하였다. 그의 설교는 넘치는 열력과 함께 전부가 성서귀절을 구슬처럼 꿰메어 맺는 해석으로 일관 할 수 있었던 까닭은 여기에 있었다. 더구나 그의 부흥의 행각은 35년간 남북 만주, 그리고 이 강산 3천리를 망라하여 연 6천리를 다녔으며, 그의 행적은 약 20만리에 이르렀다고 한다.
1935년 11월18일부터 있었던 평서노회 사경회 마지막날 새벽기도회를 설교하다가 쓰러질 때까지 복음선포에 헌신하였다. 3.1운동 민족대표 33인중 1인이기도 하며 한국교회 신앙에 보수주의적 신앙형태를 형성하는데 큰 영향력을 미친 인물이다. 저서로는 1916년에 종교소설인 만사성취, 1921년 그의 설교집 강대보감, 1930년 신학서인 말세론(1970년에 출간됨)등이 있다.
*길선주 목사의 신학 사상을 살펴보면?
첫째, 성서무오설과 축자적 영감설을 중심으로 한 청교도적 보수신앙으로써 성서의 압도적 권위에 대한 부동의 신앙을 심었다. 성서 통독 및 성경공부를 강조하였고, 유형기의 어빙돈단권 성경 주석문제에 관해 언급하는 등 자유주의적 성서해석을 절대 용인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둘째, 기도의 열심을 가르쳤다. 박 치록 장로와 같이 시작한 새벽기도회를 비롯하여 가정기도회, 금식기도, 철야기도, 직원들끼리의 특별기도의 습관을 가르쳤다. 특히 새벽기도회는 교인들의 신앙과 열심을 불러 일으켰으며, 한국교회의 중요한 신앙유산이다.
세째, 활발한 전도열로 1907년의 대부흥운동 때부터 채택했던 일일연보 또는 날연보제도를 강조하여 평신도들의 전도에 대한 열심을 자극시켰다. 유일한 신학작품인 말세론(길 선주 목사는 예수님의 재림 연대를 1974년으로 잡았었다. 또 다른 곳에서는 2002년으로 잡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그는 이 연대가 맞지도 않을 수 있다고 단서를 붙였다.(송길섭. 한국 신학 사상사. 대한 기독교 출판사. 1987.4 p277)) 예수의 재림의 징조와 그 내용을 증거하였다.
한국 교회가 그리스도의 재림을 뜨겁게 갈망하기 까지의 이유로 길 선주 목사는 말하기를 \\\\\\\"세상이 병들었으므로 의사되시는 예수를 갈망하는 것이요, 시대가 컴컴하고 어두워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어 광명한 세계를 만들어야 한다\\\\\\\"고 하여 시대적 암흑기를 예를 들어 주의 재림을 고대하였다.
길 선주 목사는 당시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었다. 당시 교인은 그의 설교를 들어 보지 못한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는 30여년간 2만여회나 설교하였고, 그의 집회로 설립된 교회가 백 여개나 되었고, 그를 길 대사, 영계의 지도자, 교회의 아버지, 민족의 지도자라고 불리웠다.(이 만신. 청파. 교회성장과 부흥회.1993. p.93)
(2) 김 익두 목사의 부흥운동
1874년 1월3일 황해도 안익군 대원면 평촌리 농부 김 응선씨와 정 익선씨의 독자로 출생하여 한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16세때에 과거에 응시하여 낙방한후, 17세부터 상업에 종사하였다가 실패하므로 20세부터 방탕하여 악명 높은 불량배가 되었다.
그는 1900년 27세때에 안악교회 소 안련(스왈른; Wilbeer. L. Swallon) 목사가 인도하는 집회에 몰래 참석을 하였다가 영생에 대한 설교를 듣고 마음이 입교를 결심하게 되었고, 박 태환의 인도로 입교하게 되었다.
그 다음에 (1901년 1월 마지막 주일-?) 또는(같은해 7월-(강 병도. 기독 지혜사.교회사 대사전(3). p300. 1994.) )소 안련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는 세례를 받기 전에 언행을 삼가면서 성경을 수십번 읽었다. 1901년 28세때에 재령읍교회의 조사(예전에 장로교에서, 목사를 도와서 전도하던 교직(교직), 또는, 그 사람)가 되었다.
1902년 2월에 순 한문으로된 신약성경을 100독을 하는 열심적인 사람이었다. 그해 10월 신천으로 가서 교회를 개척. 1906년 신천교회의 조사로 1906년 평양 신학교에 입학 1910년 3회로 졸업을 하였다. 1913년 신천교회를 건축하고 그 교회 위임 목사가 되었다. 그가 실제적인 신유은사가 나타나기는 1919년 12월 경북 달성의 현풍교회의 사경회에서 였다. 많은 이적을 나타내므로 임 택권 목사는 김 익두의 이적 증명서를 발행하기 까지 하였다. 1920년에는 총회장으로 당선되었다. 생전에 776회의 집회와 28000회의 설교를 하였고, 150개 교회를 신축하였으며, 1만여건의 신유 이적을 행하였다.
일경의 강요로 신사 참배를 한적도 있으며, 기독교 연맹의 총회장이 되어 북한 노동당에 협력하기도 하였다. 1950년 10월14일 후퇴하는 공산군에 의하여 예배당 안에서 사살되었다.(강 병도. 기독 지혜사.교회사 대사전(3). p300. 1994.)
그의 설교의 중심은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 천국, 회개 등의 순수 복음적인 설교를 하였다. 그의 부흥회의 특징은 자신이 금식과 기도로 무장하며 설교하고, 신유의 은사가 나타났으며, 신유체험과 은혜 체험자의 현장 간증으로 신앙 고백케 하는 형식을 취하였다.(김 우영. 교회와 부흥회. 반석 문화사. 1995. p49)
*임 택권목사는 김 익두 목사에 대하여
①고난 당한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위로와 권고
②반 기독교적 비판, 물질 만능의 사고에 대한 신의 경륜으로 역사의 개입을 증거
③시대의 징조에 대한 회개의 촉구라고 밝혔다.(임 택권(편) 죠션 예수교회 이적 증명 서울:조선 야소교회서. 1921. p5)
김익두 목사의 부흥운동은 내세지향적으로 현실 세계에 어려운 상황에서 내세에 대한 소망을 가지게 하여 일제폭정하에서 미래에 꿈을 갖게 하였다.
김 익두 목사의 설교(마 7:13-14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교회안에는 권리가 없습니다. 세상의 부가 없습니다. 세상의 영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들어오는 길은 너무 좁습니다. 교회에 들어오면 담배와 술을 먹을 수 없고, 따라서 첩도 두지 못하니 그 길이 좁습니다. 교회밖에는 길이 넓은 것입니다. 문물이 발달된 오늘에 돈만 있으면, 교통의 편리한 혜택으로 멀리 여행도 할 수 있습니다. 하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다. 그 범위가 대단히 넓어 죄짓게 하는 길도 많습니다.......영원히 사는 길은 교회의 좁은 문을 통과하여야 되는 것입니다.”
다. 성결교회의 부흥운동
1.성결교회 초기의 부흥운동
성결교회는 1907년 5월30일 동경 성서학원에서 3년 동안 수학한 김 상준, 정 빈, 이 장하 3인이 한국에 와서 전도 활동을 하므로 시작되어 오늘날 성결교회 의 시초가 되었다.
2.이 성봉 목사의 부흥운동(1900-1965)
1900년 7월 4일에 평남 강동군 강동면 간리에서 감리교 권사 이 인실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6살 때는 온 가족이 예수를 믿는 가정에서 자랐으며, 1920년(20세)부터 3년간 병으로 고생을 하다가 중생을 체험하고, 1925년에 선교사업에 헌신하기로 다짐을 하였다.
1928년에 동양 선교회 경성 성서학교에 입학을 하여 공부를 하였으며, 그해에 수원교회를 개척하였다.
1930년에 목포교회로 부임 1931년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36년에 신의주 교회로 전임하였고, 1938년에 전국 부흥사로 활동하였다가 1941년 만주 지방 선교사로 파송(사리원 감리교회 부흥회) 예수 재림에 대한 설교를 하였다가 사리원 경찰서에 투옥되었다가 출옥하여 다시 만주 선교에 힘썼다.
해방이후 이북에 돌아와서 이북 성결교회의 재건 운동에 힘썼으며, 1946년에 월남하여 남한 성결교회의 재건을 목표로 순회 집회에 힘썼으며, 1954년-1956년까지 임마누엘 특공대라는 이름으로 약소교회를 위한 순회 집회를 하였다.
1955년 신촌 성결교회를 개척하였으며, 1962년에 별세하였다.(강 병도. 기독 지혜사. 교회사 대사전(2). p883. 1994.)
주님의 이적과 기적을 많이 일으키는 권능의 종으로 교파를 가리지 않고 부흥집회를 인도하였다. 그의 집회는 저녁 집회에는 천로역정을 많이 인용하여 감동을 주었으며, 낮 시간에는 요나서를 강해하였으며, 새벽에는 회개 운동을 강하게 일어났다.
(예; 이 천석 목사의 간증)
이 성봉 목사는 30여년간을 쉬임없이 활동한 수명이 긴 부흥사였으며, 후세인에게 깊은 존경에 대상이 되는 부흥사였다.
2. 시련기에 처한 교회
가. 3.1 운동으로 야기된 교회의 시련.
3.1운동에 교회는 강력한 민족적 정기와 울분을 호소할 효과적인 통로를 제공했다. 교회의 전국적인 유기적 맥망을 통하지 않고는 비밀 연락과 그 보장, 그리고 거사의 동시성(同時性)을 보장하기가 어려웠다.
3.1운동의 거족적인 거사의 준비가 통일된 주도와 그 경로를 그 기초로 해서 갖추어지고, 마침내 최 남선이 작성한 독립 선언서에 기독교 인사 16명이 서명 날인 함으로써 독립만세 운동의 대열은 감동과 열의로 그 대오(大悟-크게 깨달음)가 세워졌다.
국내외에 대한독립선언서와 각종 문서의 전달에 있어서도 교회는 큰 역할을 하였다. 평양 기독교 서원의 총무이던 안 세환은 동경에 가서 내각 총리대신과 저명한 정객들에게 독립에 관하여 진정하기로 하고 3월 3일 경시 총감을 만나 한국 독립에 관해서 진술하였는데, 경시 총감은 총리대신에게 상신 한다고 하였다가 5일에 갑자기 체포하였다.
다음으로 미국 대통령과 파리 평화회담에 보내는 탄원서는 감리교 목사 현 순과 전도사 김 지순이 맡아 안동의 김 병농 목사를 통하여 전달하기로 하였으며, 국내와 각국 영사관에 독립선언서를 전달하는 일은 정동 교회 목사 이 필주와 배재 학생 김 진호가 담당하였다.
3.1 독립만세 운동에 많은 교회가 참여하였다. 평양에서는 이 날(3월1일) 낮 1시에 감리교회의 남산재교회와 장로교의 장대재교회에서 고종의 봉도회(奉導會) 이후 계속해서 선언식을 거행했고, 시가행진으로 돌입하였으며, 진남포에서는 감리교 학생 120여 명이 교회당에 모여 시위하여, 다음날 시위의 주도 노릇을 하였고, 안주에서는 그곳 집사 김 화식이 평양에서 선언서를 가져와, 천도교와 합동하여 운동을 전개시켰으며, 신천에서는 신성학교에서 교원과 학생 수백 명이 “조선 독립단”이라고 쓴 깃발을 앞세우고 시위에 들어갔는데, 이들이 경찰서에 다다랐을 때에는 그 수가 3천여 명을 넘게 되었다,
대구에서는 이 민집 목사가 주도하여 3월 8일 한 곳에서 군중을 동원함으로써 경북 운동의 선구가 되었으며, 3월 11일에는 기독교인들과 일신여학교 학생들이 주동이 되어 시위운동이 부신진에서 전개되었다.
전주에서는 기독교인들과 천도교인 및 신흥학교 학생들이 3월 13일에 목판 인쇄한 태극기를 들고 구보행진하며 시가를 누벼다. 그리고 함경북도 성진에서도 3월 10일 기독교계 보신학교 학생을 중심으로 태극기를 흔들면서 나팔을 불고 여기 합세한 군중 2백과 함께 일본인 거주지로 행진하다가 일경과 충돌하기도 하였다.
독립운동에 이렇게 교회가 앞장서고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였고, 또한 이에 비례하여 교회의 피해도 그만큼 막대한 것이었다.
독립운동의 대한 교회의 가혹한 핍박으로 전개되었다. 일본은 경찰과 헌병의 병력으로 교회를 때려 부수고, 종탑과 성경책을 산산조각 냈으며, 검거선풍 역시 기독교인들을 특별히 목표로 하는 등 교세가 우수한 지방의 기독교인을 상대로 가혹한 보복이 있었다.
가장 비인도적인 참화(慘火)는 수원 부근의 제암리 교회당의 소실사건이다. 만세시위가 막바지에 이른 그해 4월 15일 낮 2시경 아리다라는 일본군 중위가 제암골 교인들을 그곳 감리교회당에 다 모이게 한 뒤 군인들이 총을 겨누어 쏘고, 칼을 휘두르면서 교회당에 불을 질러, 교인들이 다 타서 죽고 교회당은 잿더미다 되었다. 이러한 학살과 만행은 부근 기독교인들이 사는 많은 동네에 감행되었다.
독립운동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받은 피해는 막심했다. 총독부가 1919년 5월에 발표한 피해 통계를 보면, 전부 파괴된 예배당 수가 17동, 일부 파괴된 예배당 수가 24동, 그외 다소 피해본 예배당 수가 41동 등, 교회의 피해액이 약 3만 달러, 오산중학교 피해액이 5천 달러이며, 그리고 1919년 6월 30일(현재) 투옥된 사람도 기독교인 2,190명으로 유교와 불교, 천도교를 합한 1,556명보다 훨씬 많은 수며, 교역자가 수가 151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1919년 10월 장로교 총회의 보고는 장로교회와 교인들의 피해만도 체포된 교인 수가 3,804명, 목사와 장로의 수가134명, 기독교 관계 지도자의 수 202명이 수감되었으며, 사살된 자가 41명이나 되었다. 그날 현재 수감 중인 수가 1,642명, 매 맞고 죽은 수가 6명, 훼손된 교회수가 12개소였다. 함북노회만도 26명의 참살자가 기록되었다.
이처럼 독립운동에 기독교의 참여와 이에 따른 교회의 핍박이 가혹했으므로 많은 신학교가 속강을 중단했고, 많은 교회의 지도자들이 감옥에 갇혀 총회 임직을 선교사들에게 대량 위임하는 사태에 직면하게 되는 등 많은 시련을 있었다.
나, 공산주의의 시련
1925년에 들어서면서부터 공산주의자들은 기독교에 대한 정면 도전에 나섰다. 이들은 1925년 10월 23일 조선주일학교 대회가 서울에서 열렸을 때, 그 바로 앞 광장에서 노골적인 반기독교대회와 반기독교 강연회를 개최하고 있었다. 이 일로 인하여 교회는 공신주의의 실상을 직시하였고, 공산주의를 경계할 수 있었다.
국내에서는 교회와 공산주의와 충돌은 별로 없었으나, 한국과 만주 국경지대에서는 유혈 대결이 있었고, 이로 인하여 교회의 피해가 컸다.
공산당에 의한 한국교회 최초의 피해는 1925년 동아교회(침례교)에서 생겼다. 그 해 길림성 지역으로 파송되었던 윤 학영, 김 이주, 박 문기, 이 창희는 9월 하순에 공산당들에게 붙잡혀서 일본의 밀정이라는 누명으로 악형을 받아 순교의 피를 흘렸다. 이국에서 벌어진 동포간의 비운, 그것은 장차 교회와 공산당과의 대결의 비극적 상징이 되었다.
동아교회의 두 번째 희생은 김 영국, 김 영진 두 형제 목사의 순교이다. 1932년 10월 14일, 간도에 있는 종성동교회에 공산당원 30여명이 난입하여 부락만은 교회에 회집시킨 후 불신자와 신자를 갈라 앉히고 신자들에게는 생명으로 신앙의 값을 협박하였다. 두 형제 목사의 엄숙한 신앙고백이 청청히 울릴 때, 비류들은 잔인무도한 악형으로 이들을 탈피하여 죽이는 참혹을 감행했다. 같은 날 정 춘후 집사 역시 총살의 순교로 영광된 하늘 길에 올랐다.
1932년 감리교연회에서 파송받아 시베리아 산안촌에서 전도하던 김 영학 목사는 반동분자라는 죄명으로 소련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10년을 언도받아 중노동 하던 중 얼음이 갈라져나간 강에 빠져 순교자의 행렬에 동참했다.
3. 신사참배 문제가 교회에 끼친 영향
한국 교회가 일본의 잔인한 박해를 받아온 역사는 일본의 신사참배 강요에서 그 절정에 달했다. 한국 교회의 정신적 핵심이 되어왔던 민족조의의 골격을 와해하고자 일본은 신사참배라는 거침돌을 하나 만들어놓았다.
일본의 신사참배는 옛날의 천황이나 무사들의 영을 섬기는 사사에 전 국민을 참배하게 함으로써 그 충성을 시험했고, 그와 같은 국민의례를 통해서 군국주의의 정신적 단결을 도모하려 하였다. 이 신사는 우리나라 도시나 읍, 면에까지 모두 세워졌다.
가. 신사참배 문제의 대두
신사참배 형식의 강요가 교회에 시련을 주기 시작한 것은 한일합병 직후 일본 천황의 사진에 축제 때마다 최경례하라는 데서 시작되었다.
이에 1921년 전국의 선교사들은 진정서를 내고, 이런 신적 지고성을 부인하는 “천황에 대한 예배”가 기독교인에 있어서는 전혀 불가능한 것이라 주장하였던 것이다.
1920년도만 해도 신사와 종교는 관념상 다른 것이고 신사에 참배시키는 것은 종교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므로, 국민의 신교의 자유가 침범되는 것은 물론 아니라는 입장에 서 있었다. 그러나 1925년 10월 15일 남산 중턱에 소위 사격관폐대사 조선신궁이 준공되고, 천조대신과 명치 천황이 제신으로 소위 진좌되고 나서는, 사태가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경신의도와 조상숭배를 가지고 국민정신의 근간”으로 하는 일제 정치에 충성이 강제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본격적인 참배강요의 마수가 뻗친 것은 1935년 평양의 기독교 학교에 대해서 정기적인 참배를 강요할 때부터이다.
평양은 당시 “한국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리어질 만큼 교회의 세력이 컸다.
1935년 11월 평양 숭실 전문학교장 매쿤(G.S. Mccune)박사와 숭의여고 교장 스누크(V.L. Snook)여사는 우선 학교의 대표자로서 신사에 참배할 것을 요청 받았다. 그러나 이들은 신앙의 양심을 내걸고 이를 단호히 거절하였다. 이에 평안남도지사는 60일간 여유를 주면서 만일 신사참배를 거절하면 학교의 폐쇄와 강제로 추방을 하겠다고 협박했다.
매쿤박사는 평양 시내 27개의 교회 목사들과 노심 협의했다. 이에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전부가 다 참배에 반대했다. 한 목사는 “신사에서 신을 참배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에 반대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 소식을 들은 평양도지사는 스누크여사와 매쿤박사를 면직시키고 미국으로 출국시킨 후 대대적인 신사참배 강요에 나섰다. 선교사들간에는 의견의 분열이 있었다. 그것은 사실 하나의 국민적 의례로서 정치적 의미만 가지고 있는지, 아니면 한국 교회가 인정하듯이 종교적 성질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는지의 여부가 현안의 초점이었다.
1939년 4월은 일제의 의회에 제출된 1938년말의 “종교단체법”이 통과된 때였다. 이것은 박해의 구실에 보탬이 될 사건이었다. 이 법안의 특징은 신사를 종교 범위밖에 놓음으로써 종교단체에 대한 정부의 취체에서 제외시켰을 뿐아니라, “유신의 도는 절대의 도로서 오히려 종교를 초월하는 일본 고유의 교와 일치하는 것” 이란 입장을 굳혔다.
나. 장로교에 끼친 영향
장로교에서는 1931년 9월 경남노회에서 신사참배 반대 결의안이 통과되었고, 그것이 부산일보에 보도되어 큰 화제가 된 일이 있었다.
조선총독이 1936년 8월에 국제 명칭을 꾀한다 해서 신사 규칙을 전면 개정을 단행하자 난경은 그 절정에 이르렀다. 선교사들의 철수는 선교사들의 학교 교육에 결정적인 파탄을 초래하게 되었으며 선교사업의 종언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1936년 초, 장로교 선교사들은 사태의 불안을 인식하고 선교실행위원회를 소집하여 기독교 학교의 폐쇄를 원칙으로 삼았고, 그해 10월 실행위원회에서는 1938년까지 평양내외의 학교 폐쇄단행을 결정하고야 말았다.
연희전문과 세브란스 의전 및 정신학교를 폐쇄한다는 것은 1938년 선교 대회 때 결정되었다.
미국 본국 장로교의 선교회에서도 매카이 박사가 참석한 한 위원회에서 한국에서의 학교 폐쇄 조치를 승인했고, 위원회는 어떠한 형태로든지 신사참배에는 반대한다는 점을 확인하였다.
1938년 전국적으로 노회가 모이기 시작하자 일본은 조직적으로 파괴공작에 나섰다. 우선 강경파인 주 기철, 채 정민, 이 기선을 예비 검속(檢束)하고, 친일파 목사 이 승길과 김 일선을 통해서 표독한 분리공세를 펴며, 총대 한 사람 한 사람을 불러 협박으로 신사참배 가결을 촉구했다.
1938년 9월 9일 제 27회 총회가 평양 서문 밖 교회에서 개최하였을 때 ,일본은 문제를 한꺼번에 결단 내릴 획책을 꾸몄다. 총대 193명의 사이사이에, 97명의 경관들이 끼어 앉아 회의 진행을 감시했다.
첫날엔 임원선거가 있었다. 총회장에 홍 택기, 부회장에 김 길창, 서기에 곽 진근, 회계에 고 한규였다.
둘째 날 오전 10시는 평양이 떠들썩했다. 평양, 평서, 안주노회의 소위 삼노회를 대표해서, 박 응률 목사가 신사참배는 국민의 당연한 의무라고 하면서, 참배결의와 성명서 발표제안은 했다.
불레어의 반대 발언은 즉각 거친 경관의 폭력적인 제재를 받아 힘에 밀려 퇴장했고, 한국과 함께 살아온 장로교가 홍 택기의 의식적인 가결 획책으로 신사참배가 기독교신앙에 배치되지 않는다고 결의하고 말았다.
신사참배에 대한 주 기철 목사의 항거는 참으로 위대한 신앙의 꿈이었다. 그는 1938년 2월 평양 산정현교회 헌당식 날 경찰에 구속되었다가 잠시 석방된 일이 있었는데, 그해 이 유택, 김 화식 두 목사와 함께 묘향산과 대성산에서 금식기도를 하는 등 순례의 길을 걷다가 6월 30일에 돌아왔을 때에는 공교롭게도 일본 기독교의장 도미아 목사가, 120여명의 산정현교회 교인들과 평양 유지 교인들 앞에서 신사참배가 성서적으로 죄가 되지 않는다고 역설하고 있었을 때였다.
주 기철과 손 양원 목사는 그들의 간장이 뒤집히는 듯했다. 소리 높여 그 부당함을 외쳐 맹렬히 그의 괴변을 반박하였던 것이다. 그들의 생명은 이제 신앙의 값을 치를 때가 온 것이었다. 농우회사건(1939년8월) 이후 평양노회가 그의 파면을 감행한 사실을 들었다. 그는 1940년 10월 네 번째로 마지막으로 구속되었고, 경찰은 교회 문에 못을 박아 폐문 시키고 말았다. 그는 마침내 견딜 수 없는 고문을 4년 계속해 받다가 그 지구력이 순교의 영광을 나약과 불인으로 해서 빼앗길세라 염려해 순교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다가, 1944년 4월 22일 영광된 순교의 숨을 거두었다.
순교자들은 초인들이 아니었다. 다만 주님이 우리 위해 돌아가셨다는, 그 사랑에 대한 감사와 감격에서 한 발자국도 빗나가지 못하는, 어쩌면 섬약한 인간들이었다. 주 기철 목사가 순교한 후 신문에는 아무 글도 나오지 않았다. 세상은 그의 고난을, 그의 승리를 모르는 것 같았다. 책 하나 남긴 것 없이 그는 이렇게 갔다.
다. 감리교에 끼친 영향
1937년 7월 북경 근처에서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키면서 일황 신격화 사상이 국부의 강력한 군사력 증강과 함께 독재 체제로 돌변하여 그 사상은 일본 본토에서보다 한국 안에서 더욱 노골화하였다.
군국주의자들이 일본의 황제를 천황이라 부르고, 그를 살아 있는 현인신이라고 하며, 함부로 부르지를 못하게 하고 부를 때에는 차렷 자세로 천황 밑에 폐하란 말을 꼭 붙여 말하고 쓰게 하는 신격화 사상은 막을 길이 없었다.
천황 중심의 국제 관념을 명시하는 말이 있고 천황은 국가를 대표하는 최고 기관으로서 이를 행사한다는 “천황기관설”을 뒤엎고, 천황에게 무조건 복종을 요구하는 관료제 정치를 합리화하는 “천황주설권”이 신성불가침으로 우상화되기에 이르렀다.
천황의 이름으로 자행된 일본의 정치 악은 언제나 우리들의 민족 감정을 상하게 하였고, 걸핏하면 기독교의 지도자나 신자를 경찰서로 연행하였다.
교회의 의사 표시는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반대의 의견은 묵살과 검색으로 탄핵되고, 다만 친일의 발언만이 교회의 양심을 대변하는 것처럼 대서 인용되었다. 여기 교회 반응의 일치는 비탄을 동반하였지만 끝내 실현을 보지 못하고 말았다.
감리교의 대부분은 신사참배가 정치적인 국민의례에 지나지 않는다는 일본의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래서 그 계통의 학교들은 폐쇄되지 않고 해방 전까지 생존할 수 있었으며, 교회 수난도 비교적 가볍게 스쳐갔다.
라. 성결교회에 끼친 영향
성결교회는 신사참배 거부 및 전도표제로 내건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의 4복음 중 재림의 교리가 일본 제국주의의 국시에 어긋난다고 하여 박해를 받게 되었다.
성결교회의 유일한 전도 방법인 구령집회 심령부흥회가 음으로 양으로 방해받고 설교자들을 감시하여 불온사상, 반전운동, 민족정신을 고취시킨다는 이유로 예비(豫備)검속(檢束), 혹은 형(刑)을 지우고 단체의 유일한 기관지 “황천” 에 무서운 검열로 삭제, 정간을 계속시키다가 마침내 폐간을 시켰다.
1943년 5월초에 성결교회 총회가 서울에서 열렸다. 이것이 일제치하의 마지막 총회였다.
이때는 이미 일본 성결교회가 수난 당한 때라 우리에게도 그들의 손이 미칠 것을 총 회원 전원이 육감으로 느끼게 되었다.
5월 23일은 주일이었다. 이날은 의례히 여러 성직자들이 교회를 비우지 아니할 것을 예측한 왜경들은 다음날인 24일 아침 5시를 기하여 일제히 검속(檢束)하였으니, 200여 남녀 교역자와 장로와 심지어 남녀 집사들까지 100여명이 구속당하게 되었다.
5. 24검거 이후 서산지방은 먼저 예배 금지를 당했고, 전국적으로 9월에 교회 문을 닫게 되었으니 12월 29일에는 강제 해산을 당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힌국 교회의 첫 재물이 된 성결교회는 도처에서 자취를 감춰 버렸고 “목자를 치매 양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리라”는 말씀과 같이 교역자들은 전부 감금 신세를 지게 되었으며, 일반 신자들은 뿔뿔이 해어져 산지(山地)사방(四方) 흩어져버렸고, 폐문된 교회당은 중산보국을 구호로 삼는 왜적이 가만 둘리가 없었다.
가마니공장, 새끼공장, 기구공장 등 각종 형태로 강점하여버렸다. 출감한 교역자들은 직장을 찾아 거리를 해매야 했으며 젊은 교역자들은 보국대에 강제 노무를 감당해야 했으며, 더 나아가서는 일본 및 남양군도로 강제 징용에 끌려가거나 이러한 영장을 받고도 도피하여 산과 들로 방황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성결교회 교역자들이 겪은 3년의 박해였다.
이러한 환란 가운데 왜경에 고문을 당하여 순교한 모사는 철원교회 박 봉진, 함흥에 김 호, 충남 은산교회 손 갑종 씨였고, 평신도 순교자로는 군산 정 태희 장로와 신안주교회 김 지봉 집사 등이었다.
뿐만 아니라 근 1년동안 옥고를 겪은 교역자들이 출감은 되었지만 갖은 고문과 굶주림과 운동 부족으로 건강을 잃어 병사자가 있는가 하면, 그 유가족들이 굶주림에 못 견디어 쓰러지는 비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성결교회 본산인 성서학원은 교단 해산과 함께 폐교되었고, 성직자를 훈육하자던 교사(校舍)는 일본 기독교단이 경영하는 신학교와 동흥실업학교와 한국 민족정신 말살 기관인 황도선양회와 교회 탄압의 기수들인 일제 특별 경찰대 등이 각각 분할 점령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