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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애가(07)
마지막 기도를 하는 예레미야
예레미야애가 5장 11-22절
법정에서 재판을 받아보면, 재판을 많이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의사를 조리 있게 전달하는 사람이 적습니다. 이유는 검사와 판사에 비해 법률적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법률적 지식이 풍부한 법관과 검사는 국가 기관으로 법정에서 피고인 심문 시 나오는 강압감은 순식간에 피고인을 법률상 상대적으로 약자로 만들어 버립니다. 하지만 피해자이든 피의자이든지 간에 자신의 상황을 정확하게 표현해야 불이익이 적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변호사를 고용합니다. 법정에서 변호사가 판사에게 사리를 밝혀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을 일컬어 ‘변론(辯論)’이라고 합니다. 피고인이 어쩔 수 없이 죄를 질 수 밖에 없는 사실을 설명해서, 판사로 하여금 형량을 될 수만 있으면 안 받거나 낮게 받으려고 변론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애가 선지자는 최후의 변론을 하듯 다시 한 번 간곡한 회개를 통해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예레미야애가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선지자는 시온이 겪는 고난의 탄식을 이어갑니다. 이스라엘이 죄를 지었으므로, 바벨론에 의해서 유다의 여인들과 처녀들이 짓밟히고, 지도자들과 장로들은 죽거나 천대를 받습니다. 젊은이와 아이들은 노예가 되어 일을 합니다. 즐거움이 사라지고 노래와 춤은 슬픔과 통곡으로 바뀝니다. 시온 성은 사람들이 살지 않아 거칠어져 여우들만 득실거립니다. 선지자는 변호인처럼 하나님께 진노를 풀어달라고 기도합니다.
비참한 상황에 대한 탄식(11-16)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왕이십니다. 비록 지상에 있는 나라들은 망할지라도 하나님 나라는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영원히 다스리시는 하나님께 돌아갈 때 우리에게 소망이 있습니다. 영원히 다스리시며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11대적들이 시온에서 부녀들을, 유다 각 성읍에서 처녀들을 욕보였나이다 12지도자들은 그들의 손에 매달리고 장로들의 얼굴도 존경을 받지 못하나이다 13청년들이 맷돌을 지며 아이들이 나무를 지다가 엎드러지오며 14노인들은 다시 성문에 앉지 못하며 청년들은 다시 노래하지 못하나이다 15우리의 마음에는 기쁨이 그쳤고 우리의 춤은 변하여 슬픔이 되었사오며 16우리의 머리에서는 면류관이 떨어졌사오니 오호라 우리의 범죄 때문이니이다(11-16)
예레미야애가의 처음이 예루살렘 성의 곡소리와 탄식으로 시작했던 것처럼 마지막 단락도 예루살렘과 성내 백성들이 지금 당하고 있는 고난에 대한 탄식으로 말씀을 맺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을 배반하고 영적 순결성을 지키기를 거절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인에게 치욕을 당한 것을 소개합니다. 11-14절에서 모두 주어가 맨 앞에 나오는 동일한 형식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각양각색의 모든 사람들이 전쟁의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⑴ 피해를 당하는 여성들(11)
선지자는 전쟁으로 인해 고통당하는 여성들을 보면서 탄식합니다. 시온 성안에 여자들과 처녀들이 겁탈을 당하였다고 말합니다. ‘욕보이다’는 ‘강제로 성폭행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성안을 강조하는 것은 원래 성안에는 사람들이 많아 성폭행의 위험이 있을 때는 소리를 지르면 도움을 받기 좋은 장소입니다(신명기 22:23-24). 하지만 여기서 성안에서 성폭행이 벌어졌다는 것은 이 여성들이 소리치며 도움을 구해도 도와줄 사람이 없었다는 의미입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전쟁에서 승리하면 여성들을 성폭행하고 전리품으로 취하여 성노예로 삼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여성들이 이런 끔찍한 폭력의 상황에 놓였다고 선지자는 한탄합니다.
⑵ 존경을 잃은 지도자들(12)
지도자들이 겪는 고통을 말합니다. 지도자들이 손이 갈고리와 함께 묶여 달려서 탈진하여 죽는 고문에 시달립니다. ‘매달렸다’는 것은 시온의 관리들이 바벨론의 점령자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 후 시체를 나무에 매달아 두었다는 의미입니다. 구약에서 나무에 달린 시체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으로 간주됩니다. 따라서 이들은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주어 감히 반항하지 못하게 하려고 이런 잔혹한 짓을 한 것입니다.
장로들은 사람들로부터 전혀 존경을 받지 못하고 장로들은 업신여김을 당했습니다. 이들도 정복자들에 의해 함부로 다루어지고 모욕당했기 때문입니다.
⑶ 노역에 시달린 젊은 남자를(13)
이제 젊은 남자들이 겪는 고통을 묘사합니다. 정복자들에 의해 함부로 다루어지고 모욕을 당하고 있습니다. 젊은 남자들은 끌려가서 여자들의 일이였던 맷돌을 돌리고, 그보다 작은 소년들은 나무를 하느라 고통을 당합니다. 맷돌을 돌리고 나무를 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전쟁에 패한 자들에게 시켰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민족을 진멸하지 않고 그들을 나무하거나 물 긷는 노예로 삼은 경우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한 모습으로 당하고 있습니다. 11절의 상황과 연결되어 모든 전쟁 포로가 된 젊은 남녀의 비참한 상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⑷ 존경이 사라진 장로들(14)
선지자는 예루살렘 성안에 있는 노인과 청년들을 묘사하며 대조됩니다. 성문은 공공장소로 장로들이 재판을 열거나 어려운 문제를 상의하며 해결해 주는 곳이었습니다. 따라서 성문에 노인이 앉아 있다는 것은 장로들이 조언하고 판단하는 권위와 명예를 가졌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더 이상 장로들이 그런 명예와 권위를 가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원수들에 의해 성문이 폐쇄되었기 때문입니다. 유다 백성들은 공의로운 하나님의 재판도 받지 못하고 바벨론에서 파견된 관리들에 의해 재판을 받아야 했습니다. 제멋대로 결정되는 판단에 아무 말 없이 굴복해야만 했습니다.
더 나가서 하나님께 찬양하고 즐거워하던 예루살렘에서 청년들은 축제나 여러 행사에서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하고 춤췄는데, 축제도 행사도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⑸ 패망한 예루살렘의 심정(15-16)
하나님의 법도에 따라 살아갔던 삶의 질서는 파괴되었습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에게서 웃음이 끊어져버린 서글픈 일상만 반복됩니다. 선지자는 이러한 상황에 처한 예루살렘 사람들의 생각과 슬픔을 잘 표현합니다.
선지자는 우리의 마음에 기쁨이 그쳤고 춤이 변하여 슬픔이 되었다고 합니다. ‘슬픔’으로 번역된 에벨(לבא)은 ‘애곡’, ‘통곡’이라는 뜻으로 기쁨의 춤이 죽음을 애도하는 두 곡으로 바뀌었다는 의미입니다.
‘면류관이 떨어졌다’고 소개합니다. 면류관은 왕과 같은 고귀함을 나타냅니다. 머리에서 면류관이 떨어졌다는 것은 유다 백성의 고귀함이 사라졌다는 뜻입니다. 유다 백성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부심으로 가득했었습니다. 하지만 예루살렘 함락으로 그 명성과 자부심이 모두 사라졌습니다. 선지자는 16절 하반절에서 장탄식을 하며 모든 일의 원인이 자신들의 죄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
선지자는 현실을 직시하였으며, 그 원인이 된 자신들의 죄에 대해서도 회피하지 않고 인정합니다. 죄에 대한 인정이 비록 가슴 아프고 수치스럽지만, 결코 회피하려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현실과 죄를 직시할 수 있는 힘이 있었기에, 19절 이하에서 하나님께 돌이켜 달라고 간곡히 요청할 수 있었습니다.
완전히 황폐한 시온의 상황(17-18)
‘견물생심(見物生心)’은 ‘어떤 물건을 실제로 보면 가지고 싶은 욕심이 생김’이란 뜻입니다. 죄악도 잘못된 것들을 봄으로 시작합니다. 죄악은 눈을 어둡게 할 뿐 아니라 마음을 병들게 합니다. 그래서 결국 기쁨을 빼앗고 삶을 황폐하게 만듭니다. 좋은 영적 시력을 갖기 위해서 보지 말아야 할 것과 보아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17이러므로 우리의 마음이 피곤하고 이러므로 우리 눈들이 어두우며 18시온 산이 황폐하여 여우가 그 안에서 노나이다(17-18)
비참한 상황 때문에 선지자 예레미야는 마음이 무기력하다고 말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전혀 없습니다. 언제 이런 상황이 끝날지, 얼마나 더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야 할지, 하나님이 이 심판을 언제 어떻게 멈추실 것인지, 우리를 괴롭히던 악인들을 심판하실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선지자와 공동체는 철저하게 무기력했다.
예루살렘은 정의와 기쁨이 사라진 성이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이 그렇게 된 이유는 바로 유다 백성들의 죄 때문입니다. 폐허로 변한 시온 산에 여우들만 어슬렁거리는 모습은 그들의 현실을 잘 보여줍니다.
‘우리들의 눈이 어두워졌다’고 한 것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첫째, 너무 울어서(예레미야애가 1:16; 2:11,18; 3:48,49) 눈이 상했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재난으로 인해 몸과 마음이 모두 약해졌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둘째, 아무런 희망을 찾을 수 없는 상황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경우 마음이 무기력하다는 말과 연결되어 아무런 희망을 찾을 수 없는 무력하고 절망적인 마음 상태를 표현하는 것이라 해석할 수 있습니다. 어떤 해석을 취하든지 현재 매우 힘들고 절망적인 상황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성읍 이스라엘도 황폐하게 되어 더는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라 여우와 같은 들짐승들이 왕래하는 곳이 되었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며 번성하던 아름다운 성읍이 이제는 황폐해져 들짐승을 왕래하는 곳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바라보는 심정은 매우 비참했을 것입니다.
선지자는 자신과 철저한 무기력과 황폐함을 고백하면서 여호와께로 나아갑니다. 여호와만이 오직 이런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상황이 발행하였기 때문에 이제 희망도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예레미야애가가 우리 한국교회에서도 필요한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랬다고 하지 말고 자신의 욕심 때문에 행한 일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값싼 위로는 버리고 하나님께 나가서 회개가 일어나야 합니다. 그래야만 소망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나가는 최후 간구(19-22)
아무리 어려운 중에도 먹구름 너머에 계신 하나님께 미래를 맡기고 자비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을 생각하면 아직은 소망이 있습니다. 주님만 돌아오시면 그 백성도 돌아올 수 있고 옛적같이 주와 교제하는 새날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19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오며 주의 보좌는 대대에 이르나이다 20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잊으시오며 우리를 이같이 오래 버리시나이까 21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 22주께서 우리를 아주 버리셨사오며 우리에게 진노하심이 참으로 크시니이다(19-22)
선지자 예레미야는 이제 다시 여호와께 기도하면서 예레미야애가를 마무리 짓습니다. 여호와가 영원히 계시다는 것과 그의 보좌에 계속해서 여호와가 앉아 계신다는 것을 송축합니다. 이것이 선지자가 믿고 의지하는 희망의 보루이며 신앙입니다. ‘잊다’와 ‘버리다’는 하나님 앞에 유다가 완전히 잊히거나 버림 당하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지금은 시온의 멸망으로 여호와가 안 계신 것처럼 보이고 여호와의 보좌가 무너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시온은 멸망해도 여호와는 살아계시고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영원히 있으며, 여전히 왕으로서 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이 믿음은 결국 이 세상의 역사가 여호와의 손 안에 있기 때문에 여호와의 백성에게 닥친 재앙도 언젠가 사라질 것이라는 희망을 갖게 합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영원하심과 불변하심을 철저히 신뢰하고 의지합니다. 그래서 여호와가 자신들을 어떻게 영원히 잊으시며 오랫동안 버리시겠느냐고 반문합니다(20).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잊지 않을시고 버리지도 않으실 것이라는 신앙을 표현합니다. 19절과 20절에서 ‘영원히’라는 단어를 반복하여 영원히 계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영원히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선지자는 여호와께 돌아와 달라고 간곡하게 요청합니다. 자신들에게로 돌아와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자비심에 의지하여 자신들도 하나님께 돌아갈 것이며, 그렇게 되면 이전처럼 완전히 회복될 수 있을 것이라고 희망합니다.
이 표현은 철저히 하나님의 자비를 먼저 구하는 행동입니다(21).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가 있어야 그 은혜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갈 수 있고 회복될 수 있습니다. 시인은 전적으로 용서를 하나님의 주권에 맡기고 있습니다.
다시 현실로 돌아와 부정적인 상황으로 끝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21절에 대한 부연 설명으로 봅니다. ‘완전히 버리신 것이 아니라면’, ‘진노하심이 매우 크시지 않다면’으로 해석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의지하여 끝까지 하나님을 붙잡고 희망을 품으려 합니다.
이 모습을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도 본받아야 합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고난을 통과하는 인내와 희망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여정 속에서도 필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애가를 부른 선지자의 처절한 고통의 울부짖음이 오늘 우리에게 위로와 희망이 됩니다.
바벨론에 의한 극악한 이스라엘의 고통은 자신의 죄악으로 인해 결론입니다. 죄를 지어 주님이 진노가 있을 때, 기쁨은 슬픔으로 바뀌고, 면류관은 땅에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이 돌아오기를 바라시는 고통과 좌절로 깨닫게 하심을 느낍니다. 어려운 일이 겹치고, 고난이 있을 때 주님께로 돌아오기를 바라시는 주님의 사랑임을 깨닫게 하신 말씀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화평과 기쁨만으로만 오지 않음을 묵상케 하는 좋은 말씀입니다. 오늘도 우리들이 겪는 어려움을 통해 주님의 사랑을 깊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 본 자료는 박상규 목사(010-4620-9191)가 두란노서원 [생명의삶 플러스]와 성서유니온 [묵상과 설교]를 기초로 작성했고, 또한 다수 서적들을 참고해서 정리한 내용입니다. 개인적인 목회 자료로만 활용하시길 바랍니다. 절대 상업용으로 설교문 판매, 무단 복제 배포, 제본 판매 행위를 금합니다. 무단 배포하시면 저작권법 제136조로 처벌 받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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