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용정의 역사 유적
▣ 용정중학교
▲ 용정중학교에 있는 윤동주시비
용정중학교는 용정에 있는 은진, 대성, 동흥, 광명, 광명여자 중학교, 명신여자 중학교 등 6개교가 연합하여 이루어진 학교이다. 용정중학교의 교문 오른편에 연합기념비가 서있고 그 옆에는 윤동주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 운동장 안에는 과거 대성중학교 본관 건물의 일부가 현존하고 있으며, 그곳은 현재 ‘룡정중학교력사전람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1921년 건립된 이 건물은 오랜 세월의 풍상을 겪어 무너질 위기에 직면한 것을 용정시 정부, 한국사단법인 해외한민족연구소의 주선과 금성출판사 김낙준 회장의 지원으로 옛 모습대로 1994년에 복원했다. 2층 전시실에는 옛 간도에서의 우리민족의 개척사, 문화교육의 발자취, 반일민족독립의 역사와 용정중학으로 통합된 6개 중학의 역사와 각 학교에서 배출한 위인들의 사적이 기록되어 있다. 윤동주를 비롯하여 김약연 목사와 문익환 목사 등 우리에게 익숙한 인물도 소개되어 있다.
▣ 이상설(李相卨)
이상설(1870~1917) 선생은 1870년 충청북도 진천군 덕산면 산척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총명했던 그는 고종 31년(1894) 25세 때 조선의 마지막 과거에 급제하였다.
모든 신학문에 관심이 있었던 이상설은 육영공원 교사로 초빙된 헐버트(H. B. Hulbert)와 막역한 사이가 되었다.
일제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 반대운동에 참여했던 이상설은 의정부 참찬에 발탁되었다. 1905년 11월 17일 일제는 고종황제와 대신들을 위협하여 이른바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였다. 조약 체결 당시 의정부 참찬의 지위에 있던 선생은 일차적으로 조약 체결 저지에 온 힘을 쏟았다. 고종황제가 사직을 위해 죽을 결심으로 5적을 처단하고, 5조약을 파기해야 한다는 상소문을 올렸다. 또한 민영환의 자결 소식을 듣고 종로에 운집한 시민에게 울면서 민족항쟁을 촉구하는 연설을 한 뒤 자결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1906년 봄 이동녕·정순만 등과 용정으로 망명하여 서전서숙을 세우고 신학문과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1907년 6, 7월경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준·이위종과 함께 고종의 특사로 참석하였다. 여기서 대한제국의 실정과 국권회복 문제를 제기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국력의 뒷받침이 없었고, 제국주의 열강의 이권 협상의 성격을 띤 회의였기 때문에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대한제국의 주장을 밝힌 「공고사(控告詞)」를 평화회의와 각국 위원에게 보냈다. 또, 헐버트와 이위종 등을 대동하고 영국·프랑스·독일·미국·러시아 등지를 순방하면서 일제의 침략상을 폭로하고 한국의 독립이 동양 평화의 관건임을 주장하였다. 나아가 한국의 영세 중립을 역설하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재판에 회부되어 궐석 판결로 사형이 선고되기도 하였다.
1908년부터 미국에 1년여 동안 머무르면서 대한제국의 독립지원 호소를 계속하였다. 또한 각지의 교포를 설득해 독립운동의 새로운 계기를 만드는 데 힘썼다. 1909년 4월 연해주로 온 이상설은 정순만 등과 항카호(흥개호) 부근의 땅을 매입해 100여 가구의 한국 교포를 이주시키고, 최초의 독립운동기지라 할 수 있는 한흥동을 건설하였다.
국내외의 의병을 통합해 보다 효과적인 항일전을 수행하고자 1910년에는 연해주의 의병을 규합해 13도의군을 편성하였다. 유인석과 상의해 고종에게 13도의군 편성, 군자금의 하사와 고종의 망명을 권하는 소를 올려 망명정부의 수립을 기도하였다.
국권이 상실되자, 연해주와 간도 등지의 한족을 규합,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성명회를 조직하였다. 1911년에는 정재관·최재형 등과 권업회를 조직해 회장으로 선출되었으며, 『권업신문』의 주간을 맡기도 하였다. 1914년에는 이동휘·이동녕·정재관 등과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워 정통령에 선임되었다. 권업회의 해산으로 중국 상하이로 이동한 이상설은 상하이의 신규식, 박은식, 베이징의 유동열, 성낙형, 그 외에 이춘일, 유홍열 등과 합세하여 신한혁명당을 결성하였다. 독립운동에 열중한 나머지 건강을 돌보지 못한 이상설은 1916년 초부터 하바로프스크에서 병석에 눕게 되어 투병생활에 들어갔다. 차도가 없자 기후가 온화한 니콜리스크(우수리스크)로 옮겨 요양을 하였으나, 결국 1917년 3월 2일 48세를 일기로 순국하고 말았다. 선생은 임종을 지킨 동지들에게 “동지들은 합세하여 조국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조국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은 모두 불태우고 그 재도 바다에 날린 후 제사도 지내지 말라”는 서릿발 같은 유언을 남겼다. 임종을 지킨 이동녕과 백순, 조완구, 이민복 등은 선생의 유언을 따라 수이푼 강가에 장작을 쌓아놓고 화장하여 그 재를 바다에 날렸다. 이때 선생의 유품도 거두어 불살랐다.
현재 충청북도 진천에는 부인과의 합장묘가 있다. 부인의 무덤을 이장할 때 수이푼 강의 모래 한줌을 가져와 함께 묻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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