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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없이 본 영화와 글 중에 불현듯 생각나는 작품들이 있습니다.
<말죽거리 잔혹사>와 영화의 원형이 되는 <이소룡 세대에 바친다> 입니다.
보통 권상우의 발성이 지적되고, 한가인의 연기력 또한 자주 논란이 되지만
앳된 고교생으로 나온 여기서 둘은 더 좋을 수 없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개인적인 체험과 얽혀있는 영화의 스토리를 되돌려 보면
뭔지모를 울컥거림도 있고요..
[ 이소룡 세대에 바친다 ] ' 유 하 '
이소룡 세대에 바친다.
흘러간 것은 물이 아니라 흘러간 물이다
흘러간 물을 통해 흘러갈 물을 만진다.
-박용하의 시, [단편들]중에서
무술은 우리에게 뒤돌아 볼 것을 가르치지 않는다. 길이
정하여졌으면 나아 갈 뿐이다. 삶과 죽음에 무관심할 뿐이다.
-이소룡, [절권도의 길]중에서*
꽉찬 서른 셋의 나이. 무엇이 달라졌는가. 아주 미세하게 늙어간다
는 것? 물론. 하지만, 늙음이란 단어는 아직 내게 그다지 구체적인 의
미로 다가오진 않는다. 마음의 잔치는 여전히 끝나지 않았고, 또한 그
렇게 믿고 싶기에. 그렇다면 무엇이...? 명백하게 달라진 것은 있다.
예전에 비해 추억하는 일이 많아졌다는 점이다. 요즘 이런 생각을 한
다. 뒤돌아보는 행위 그 자체만큼, 나이 먹는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실
감시켜 주는 것도 없다. 그래, 뒤돌아보는 횟수가 점차 늘고 있다라는
자각을 통해 비로소 나는 서른 셋의 세월을 실감한다. 시간은 망설임
없이 앞으로만 달려가는데, 난 자꾸 멈칫 멈칫 뒤돌아본다. 몸과 마음
은 생의 난바다 쪽으로 조금씩 조금씩 떠밀려 가고, 내가 걸어온 길
의 형체는 정정 희미해져 간다. 그 지워져 가는 것들에 대한 안타까
움. 영원히 내 삶의 길들은 추억의 육체를 빌어 자신의 존재를 복원
한다. 추억만이 유일하게 되돌아감을 허용한다. 추억 속에는 아직 굳
은 살이 박히지 않은 설레임들과 첫 햇살의 환희 같은 것들이 그 모
습 그대로 남아 있다. 나는 마음의 손을 뻗어 그것들을 완강하게 붙
잡음으로써, 잠시 생의 난바다로 떠밀려가는 속도를 늦춘다. 하여, 그
늦춰진 속도만큼 내가 머물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의 넓이는 확장된다.
말하자면 추억한다는 것은 덧없이 사라질 이 순간의 생명력을 연장시
키는 일이다. 난 확장된 이 순간의 넓이 속에서, 살아있음의 현재를
더 오래 음미한다.
봄날 오후, 버스를 타고 가다 우연히 이십여년 전 유행했던 장현
의 노래를 들은 적이 있다. 지금은 제목을 잊어버렸지만, '시냇물 흘
러서 가면 넓은 바닷물이 되듯이~' 로 시작하는 너무도 귀에 익은
노래. 그 흘러간 유행가의 멜로디에 무심코 몸을 맡기는 순간, 문득
어떤 서글픔 같은 것이 가슴을 꿰뚫고 지나갔다. 뭐랄까, 가슴 떨리는
생의 시원으로부터 걷잡을 수 없이 멀어져가고 있다는 느낌. 그 노래
속엔 변함없이 70년대의 장현이 살고 있었고, 그의 허스키하면서도
부드러운 저음을 따라 유년의 내가 어디론가 달려가고 있었다. (버스
에 우산을 두고 내리듯, 가수들은 자신의 노래 속에 영혼마저 두고
내리는 게 아닐까). 노래가 흐르고 있는 동안은 70년대는 흘러가버린
과거가 아니라 또 하나의 현실이었다. 난 그 '노래' 라는 한정된 공
간 속에서 아주 일시적으로 몸을 얻는 것들을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또뽑기 냄새로 가득찬 그 옛날의 답십리 골목, 뉴 소리사 스피커에서
오후의 나른함처럼 흘러나오던 김추자의 비음 섞인 노래 소리, 친구
네 [못잊어] 떡집, 장안평의 뿌연 햇살, 저년 노을 나를 두고 가려마
어서 가려마, 흥얼거리며 축구공을 따라가던 국민학교 5학년의 내 얼
굴, 유난히 나를 따르던 까무잡잡한 피부의 한 여자아이... 내 눈을 빠
르게 스치던 유년의 영상들은 거기에서 멈추었다. 너무도 짧게 지나
가버린 시절의 유행가는 끝이 났고. 차창 밖의 봄볕만이 잡음처럼 남
아 있었다. 난 그 기나긴 세월의 거리를 단숨에 좁혀버리는 유행가의
마력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불현듯 그 흘러간 유행가들을 다시 불
러보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혔다. 그것을 쓸쓸한 욕망이지만 한편으론
그 멜로디 속에 살고 있는 내 삶의 아침 풍경들을 다시 만날 수 있다
는 점에서, 내 희망의 여린 속살들을 다시 만져볼 수 있다는 점에서
가슴을 새로운 설레임으로 가득 채우는 욕망이기도 했다.
유행가. '한때' 라는 유한성 속에서 그 유한성의 절실한만큼 빛
을 발하는 것. '한때' 가 시간의 저편으로 사라진 후에도. 그 '한때'
를 둘러쌌던 유한성의 절실함만은 유행가 속에 그대로 보존된다. 아
니, 유행가를 빛나게 하던 '한때' 는 사라져도, 유행가는 '한때' 가
남기고 간 유한성의 절실함 그 자체를 에너지로 삼아 더듬더듬 삶을
연명해 나간다. 물론 내가 말하는 유행가란 비단 노래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한 시절이 남긴 유한성의 절실함을 온몸으로 껴안고 있
는 것들, 이를테면 삶에 리듬을 달아주던 비일상적인 움직임들, 마음
에 멜로디를 깃들이게 하던 온갖 이미지의 음표들, 한때의 인상적인
영상들이 적재된 모든 기호의 화석들 따위가 모두 유행가인 것이다.
기억의 창고를 열고 먼지 낀 유행가들을 하나 둘 꺼내 본다. 그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고, 나의 내부 한편에서 물음을 던져보지
만, 그러나 그 무의미성마저도 완벽하게 삼켜버리는 그리움이 있다.
난 그 유행가의 몸을 타고 내 살아온 날의 한때를 만나러 간다. 그리
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그 아침의 풍경들에 대하여, 지금 이야기하
려 한다.
심한 잡음과 모래 알갱이 같은 굵은 입자가 가득 붐비는 화면, 그
작은 네모난 틀 속에서 희미하게 어른대고 있는 사람들... 내 유년의
기억은 늘 그 흑백 티브이 영상으로부터 출발한다. 일곱살 되던 해였
던가. 고향 하나대 마을에 처음 텔레비죤이라는 것이 들어오던 날의
경이로움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지방 방송국이 없었던 까닭에 수신
상태가 엉망이었지만, 단지 그 작은 상자속에서 뭔가가 움직이고 있
다라는 사실이 내겐 그저 신기할 뿐이었다. 그때 내가 최초로 본 것
은 아마 [2인조] (?) 라는 드라마가 아니었나 싶다. 하지만 글쎄, 그것
을 내가 본 드라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워낙 상태가 안좋은 화면이
라 의미 파악 자체가 힘들 정도였으니 말이다. 말 그래도 뭔가가 움
직이는 티브이를 그냥 쳐다보았던 것이다. 전주에서 온 친구가 우쭐
대며 그 드라마에 대해 말해주지 않았더라면, 제목은 제쳐두고라도
그것이 드라마라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으리라. 마을사람들은 길게 연
결한 대나무에 안테나를 달고 하늘 높이 세워보았지만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마을 뒷잔등에 하늘을 찌를 듯 서있던 대나무 안테
나. 바람에 기다란 대나무가 휘청거릴 때마다, 어린 내겐 그 모습이
마치 뚜렷한 영상을 갈구하는 몸짓처럼 느껴지곤 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1970년에 우리집은 서울로 이사를 하게 되
었다. 그때 기차 안에서 난생 처음 마셔보았던 콜라와 사이다. 그리고
서울에 올라와서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전라도 말 버리기였다. 그
랬당가, 저랬당가라는 말 쓰지 마. 쪼빡이 뭐냐, 바가지라고 해. 생활
대사에 관한한, 늘 주위사람들에게 그런 식으로 지적을 당했다. 경부
고속도로 개통이라는가 국민 소득 몇천불... 그 눈부신 경상도 출신
대통령의 활약상을 매일 달달 외워야 했던 그 시절, 전라도 방언은
서울에 올라온 전라도 사람들에겐 하나의 콤풀렉스이자 강박관념이었
다. 누구나의 머리 속엔 전라도 말과 촌스러움은 같은 의미로 자리하
고 있었다. 난 내심 용팔이 박노식의 입에서 구수하게 흘러나오던 전
라도 말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촌뜨기라는 말은 듣고 싶
지 않았으므로 그냥 주위의 대세를 따르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하나
대 시편에 전라도 방언을 가득 쏟아부었던것도 그 시절의 기억에 대
한 일종의 보상 심리가 아니었을까).
그러나 무엇보다도 내가 서울에 왔다라는 사실을 실감케 해준 것
은, 만화가게에 놓여 있던 티브이의 선명한 화면이었다. 지독한 근시
가 비로소 제 눈에 맞은 안경을 꼈을 때의 느낌이라고나 할까. 어쨌
든 선명한 해상도의 티브이 화면은 시골에서 막 올라온 내겐 가장 큰
문화적 충격이었다. 난 눈만 뜨면 티브이 사요 안 사요, 노래를 불러
댔다. 돌아오는 건 언제나 구사리였지만 그 티브이 타령을 멈출 수가
없었다.
수업이 끝난 후엔 언제나 만화가게로 직행했다. 십원에 마음대로!
그땐 십원만 내면 하루종일 죽칠 수 있는 뷔페식 만화가게라는 게 있
었다. 정확히 따진다면 하루종일은 아니었고, 티브이 프로가 시작되는
저녁 6시 이후부터는 관람료 십원을 더 내야 했다. 철인 28호와 우주
의 왕자 빠삐, 그리고 요괴인간, 타이거 마스크, 황금박쥐가 나오기를
설레는 가슴으로 기다리면서 열심히 만화 책장을 넘기던 날들. (문득
그리워 지는 그 쾨쾨한 종이 냄새!) 돌이켜보면, 그 시간들은 내 지금
까지의 생에 있어 가장 행복한 한때였다. 그 무렵엔 주로 김찬 백호
의 무협 만화와 임창 경인의 코믹 명랑 만화를 탐독했다. 거기에 조
치원의 공포 만화도 빠질 수 없는 메뉴였다. 조치원의 그로테스크한
터치는 언제보아도 묘한 매력이 있었다. 좋아하는 만화가의 작품들을
다 훑고난 위엔, 그 다음 신간이 나올 때까지 엄희자나 박수산의 순
정 만화를 뒤적이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한동안 부지런히 만화가게를 출입하며 티브이를 시청했지
만, 매일 십원이라는 거금을 마련해야 한다라는 부담 때문에 오래지
않아 그일도 한계에 봉착하게 되었다. 그 뒤엔 노선을 바꾸어 친구와
친척 집을 번갈아 드나들며 티브이를 보기 시작했다. 하필 만화 영화
는 저녁 식사시간 무렵에 방영되었던 까닭에, 허기는 눈치밥으로 채
울 수 밖에 없었다. 어쩌다 만화 영화에 연이어 김일 프로 레슬링이
나 청룡 팀 축구 시합이라도 보는 날이면, 그땐 정말 가시방석에 앉
은 기분이 들 정도였다. 한번은 화장실을 나오다 우연히 친척의 수군
거림을 듣게 되었다. "재 좀 그만 오라 그래." 아, 그때의 충격이란!
난 가능한 한 모든 슬픈 표정을 동원하며, 그말을 어머니에게 전했고,
어머닌 나보다 더 상처를 받았는지 그날부로 당장 티브이를 들여 놓
으셨다. 다리 네개 달린 동남 샤프 텔레비죤이 우리집 안방에 놓이던
날의 환희. 다시는 티브이 땜에 수모를 당하는 일은 없을 거라는 생
각에 그날은 왼종일 가슴이 뿌듯했다.
만화 영화의 주인공에서부터 실존하는 인물들에 이르기까지 내
어린 날의 수많은 우상들. 황금박쥐, 베트맨, 왕거미, 밀림의 왕자 타
잔, 김일, 이회택, 아르무감, 어니언스.... 그 시절의 내겐 황금박쥐 종
이 가면을 쓰고 나일론 보자기 망토를 걸친 채 골목을 쏘다니거나,
김일의 무쇠 이마를 꿈꾸며 한 다리를 들고 담장에 머릴 쿵쿵 부딪히
는 일이 가장 큰 즐거움중의 하나였다. 물론 드라마 속에도 좋아하는
스타들은 많이 있었다. 당시 가장 인기 있던 일일 연속극은 [여로]였
는데, 특히 주인공 영구 역의 장욱제는 연민을 자아내게 하는 바보
연기로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드라마가 한탕 방영되던 시기에는 아
예 영구 걸음걸이로 등교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박통 시절엔 유난히
바보 연기로 스타덤에 오르는 연예인들이 많았던 것 같다.) 한가지 고
백하자면, 그때의 티브이 스타들 중엔 내가 난생 처음으로 연심을 느
낀 여배우가 있었는데, 그녀가 바로 선우용녀였다. [외아들]이란 드라
마를 통해 그녀를 처음 알게 되었고, 그녀를 본 그 순간부터 열렬한
팬이 되어버렸다. (전형적인 고부 간의 갈등을 다룬 그 드라마에서 그
녀는 '하숙' 이란 이름의 며느리로 출연했다). 그녀의 얼굴엔 뭔가 퇴
폐스런 아름다움 같은 것이 깃들어 있었다. 그것이 극중 참한 며느리
이미지와 뒤섞이면서 묘한 분위기를 이끌어냈다. 심지어 나는 그녀의
얼굴사진이 발린 싸구려 부채를 끌어안고 잘 정도였다. 그녀를 생각
하면 가슴이 후끈 달아올랐고, 곧 뒤따라 이상한 죄책감이 밀려왔다.
내 첫 마음의 열병. 그게 국민학교 4학년 때의 일이었으니까, 나도 꽤
나 조숙한 아이가 아니었나 싶다.
지금도 그렇겠지만, 그 시절 교실 안의 아이들이 주로 화제로 삼
았던 것은 연예 오락 스포츠에 얽힌 갖가지 뒷얘기들이었다. 남진과
나훈아, 엘비스 프레슬리, 캐시어스 클레이, 펠레, 박스컵 축구, 역전
의 명수 군산상고 그리고 스마일 피처 송상복.... 그렇게 연예에서 스
포츠까지 화제가 한바퀴 돌고 나면 어느덧 종례시간이 다가왔다. 물
론 그 모든 것이 티브이가 없었다면 오고 갈 수 없는 이야기들이었
다. 티브이가 풀어놓은 대중문화의 바다, 우린 그 속에서 연신 가십거
리의 입을 뻐금거리는 벙벙한 어안의 물고기들이었다. 그것에 비하면
티브이가 없었던 날들의 시간은 얼마나 느리고 한가한 움직임을 보여
주었던가. 그땐 한번 읽은 동화 책을 몇번씩 되풀이 읽어도 하루 해
가 다 가지 않았었다. 그러니까, 나는 그 동화책의 내러티브를 마지막
으로 느린 시간의 움직임과 결별하고, 티브이라는 숨 가쁜 스펙타클
에 몸을 실은 셈이다. (그것은 60년대 초반에 태어난 세대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경험이 아닌가 보여진다). 난 급격한 티브이 보급의
확산과 함께 대중문화가 빠른 속도로 삶 속에 융해되던 바로 그 지점
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다시 말해, 삶과 대중문화의 경계가 무너지
고 대중문화 그 자체가 생활이 되기 시작하던 그 시기를, 가장 예민
한 감수성의 나이로 통과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70년대 초반에
유년을 보낸 이들을 대중문화 1세대라 불러도 큰 무리는 없을 듯 싶
다.
어린 날의 마음 속엔 그렇게 수많은 스타들이 반짝이고 있었지
만, 그 중에서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별을 꼽으라 한다면, 그는 단연
코 이소룡이었다. 그는 내가 5학년이 되던 1973년에 혜성처럼 나타나
마음의 하늘에 총총히 빛나던 잔별들을 한입에 먹어치우고 단숨에 인
기의 통합타이틀 왕좌를 차지해 버렸다. 그러나 실제 이소룡이 홍콩
본바닥에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시기는 71년이었고, 우리나라에 비
로소 이소룡 신화가 시작되던 73년은 바로 그가 사망한 해였다. 아이
러니컬한 일이지만 그가 생명을 마감한 그 시간에, 그는 우리의 대중
들의 가슴 속에서 새로운 우상으로 탄생되었던 것이다. 그는 71년 미
국에서 건너와 로 웨이 감독의 [당산 대형] (골든 하배스트 제작)이라
는 쿵푸 영화에 출연하게 되었는데, 그 작품이 빅히트를 기록하면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그는 동양 무술에 서양식 연기 스타일을 적절
히 가미하여 새로운 액션배우의 이미지를 창출해 냈고, 그러한 이미
지는 동양 뿐 아니라 할리우드에까지 크게 어필하였다). 그리고 73년
여름, 그의 다섯번째 출연작이었던 [사망 유희] 촬영 도중 급사하였
다. 그는 터져오르는 거대한 폭죽처럼 짧고 요란하게 삶을 산, 그리고
가장 눈부신 순간에 사라져버린 사람이었다. 그의 출연이후, 우리들의
대중문화에 관한 온갖 잡담들은 이소룡이라는 쿵푸 스타에게 집약되
었다. 그리고 [당산대형], [정무문], [용쟁호투], [맹룡과강] 을 거치는
동안 우리들 가슴 속에 그는 어느덧 신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당연히
그가 창안한 절권도 역시 우리에겐 지상 최고의 무술이었다.
사실 나는 다른 아이들에 비해 비교적 그를 늦게 알게 된 편에 속
했다. 일류 극장은 꿈도 꾸지 못하는 때였으므로, 그의 전설이 흐르고
흘러 동네 답십리 극장에 도착하기만을 손꼽아 기다릴 수 밖에 없었
던 것이다. (그의 영화를 보기 위해 며칠동안 버스비를 아껴 80원이라
는 거금을 마련한 적도 있었다). 내가 처음 본 그의 영화는 [정무문]
이었는데, 영화를 보는 동안 어떤 격렬한 감정에 사로잡혀 무려 열번
씩이나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환성을 질렀다. 그 주변의 썰렁한 눈초
리! 내성적인 나를 순식간에 실없는 푼수로 만들어버릴 정도로 [정무
문] 은 매혹으로 가득찬 영화였다. 상대방을 쓰러뜨린 후 그가 지어보
이는 다소 과장스럽지만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비장한 표정, 고
양이의 울음인 듯 까마귀의 울음인 듯 질러대는 기묘한 기합소리, 그
의 절권도 철학을 빌려서 얘기하자면 모든 복잡을 뚫고 순식간에 문
제의 핵심에 도달하는 박력있는 액션의 동선, 신기에 가까운 쌍절곤
묘기, 그리고 일본인 형사를 향하여 이단 옆차기로 뛰어오르는 감동
적인 라스트 신...
그러나 사실을 말하면, 그것의 라스트신을 끝까지 보지는 못했다.
이소룡이 뛰어오르는 순간, 그 몇초를 참지 못하고 삼류 극장의 낡은
필름은 끊겨버리고 만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 극장에서 영화를 본
아이들이 말하는 마지막 장면은 각기 달랐다. 다들 자신의 상상 속에
서 마지막 장면을 재구성해 낸 것이다. 아니, 끊겨버린 필름의 뒷부분
은 아이들의 상상 속에서 원래의 러닝타임과는 상관없이 제멋대로 연
장되었다. 나는 이소룡이 이단 옆차기로 뛰어올라 일본놈들을 모조리
무찌르는 해피엔딩을 택했다. 그것은 나의 강렬한 희망이기도 했다.
희망? 그래, 그 시절의 희망이라는 열차엔 진정으로 희망적인 것 외
에 또 무엇이 탑승할 수 있었을까. 앞으로만 달려가는 천진한 희망에,
그 어떤 절망이나 니힐함이 브레이크가 될 수 있었을까. 공부 열심히
하면 당연히 훌륭한 사람이 되리라 믿었고, 신념의 현재가 있다며 반
드시 성취의 미래가 있으리라 확신했다. 내 어린 마음 속에서 희망과
신념은 조국 근대화의 상징 경부고속도로처럼 탄탄대로였다. 어쨌든
생물학적인 나이의 문제도 있었겠지만, 나는 정무문이 갖고 있는 쇼
비니즘적인 요소를 나의 애국심과 결부시켜 생각해 보았을 뿐, 그 속
에 들어있는 생에 대한 근원적인 허무감이나 비극성 같은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내 영혼과 육체가 전적으로 희망의 프레임 속에 살
고 있었던 것이다.
이소룡의 등장을 계기로 나의 관심은 안방의 티브이에서 다시 극
장의 스크린으로 자연스레 옮겨갔다. (시네마 천국 시절의 내 영화에
대한 관심은 티브이 출연으로 한동안 주춤했었다). 이소룡 영화가 들
어올 때면, 답십리와 신답 극장 또는 오스카 극장을 오가며 그것들을
몇번씩 되풀이 해서 보았다. 그리고 그의 영화들이 지나간 이후엔, 그
를 모방한 무수한 아류의 작품들까지 모조리 섭렵했다. 오리지날 홍
콩 무협영화에서 국적불명 무협영화에 이르기까지, 이소룡 붐에 편승
해서 만들어진 작품들의 주인공 이름엔 어김없이 '룡' 자가 붙어 있었
다. 양소룡, 여소룡, 거룡, 당룡 등등. (한지일이란 배우도 한땐 한소룡
이란 이름으로 활약했었다.) 이소룡의 유사품들은 이소룡 영화의 몇가
지 등록상표들, 이를 테면 쌍절곤 묘기, 괴조음(怪鳥音), 독특한 입놀
림, 흉부를 칼에 긁힌 후 피맛 보기 같은 것들을 어설프게 흉내내곤
했는데, 거의 필사적으로 그 이소룡 이미지를 재현하려 애쓸 때의 모
습이란 우스꽝스러움을 넘어서 애처롭기까지 했다. 몰락한 외팔이 드
래곤 왕우도 이소룡 식의 권법영화인 [사대천왕], [냉혈호] 등을 마지
막 몸부림처럼 들고 나왔다. 이두용 감독의 [용호대련], [돌아온 외다
리], [죽음의 다섯 손가락] 같은 순수 국산 엑션물 역시 이소룡 붐을
타고 흥행에 성공한 영화였으며, 그 와중에 찰리 셀(한국명 한용철)과
바비 김이라는 반짝 스타도 탄생되었다.
한마디로 이소룡이 남기고 간 모든 이미지들이 상품화 되었다.
하다 못해 이소룡 덕에 각광을 받기 시작한 만화가도 생겼다. 바로
김철호와 지철이 그 경우인데, 김철호의 [이소룡의 생과 사]는 박부성
의 [김일성의 침실] 과 함께 당시 폭발적으로 쏟아져 나오던 성인 만
화의 대표적인 베스트셀러였다. 김철호와 지철은 이소룡을 캐리커쳐
해논 듯한 주인공(주인공 이름은 각기 성일과 기정수)을 내세워 한순
간 유명 만화가의 반열에 올라섰다. 난 공부 시간마다 그들의 만화를
베껴 그렸고, 그 그림들을 아이들에게 나눠주는 것을 큰 즐거움으로
여겼다. 우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이소룡 신봉자들이었으므로
서로 설명할 필요가 없는 공통된 코드를 갖고 있었다. 가령 한 아이
가 괴조음을 지르며 코를 문지르면, 다른 아이는 곧바로 일본인 무사
의 포즈를 취해주었다. 심지어 쌍절곤을 허리 춤에 차고 등교를 하는
녀석도 있었다. 그 서투른 쌍절곤 돌리기로 붕붕거리던 추억의 한때.
그 쌍절곤 덕분에, 하루도 뒤통수가 성할 날이 없었다.
중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도 이소룡에 대한 열애의 불꽃은 꺼지지
않았다. 그리고 이소룡을 좋아한다라는 이유만으로 반 아이들과 난
쉽게 친구가 되었다. 그의 영상들은 세월이 갈수록 희미해지기는 커
녕 더욱 뚜렷해져갔다. 갑자기 끊겨버린 필름처럼 그의 인생도 그렇
게 마감되었지만, 느닷없이 잘라져 나가버린 그 삶의 뒷부분들은 우
리들의 뇌리 속에서 화려하고 풍성한 영상으로 재구성 되었다. 이소
룡의 생과 사는 그 자체가 하나의 신비였고, 미스테리였다. 그의 죽음
에 대한 의문이 상품으로 포장될 정도였다. (허쭝도 주연의 [이소룡의
생과 사])
그의 사인에 대해서도 수많은 말들이 오고 갔다. 여배우 틴페이
의 배 위에서 복상사 했다느니, 혹은 홍콩 갱단의 소행이라느니, 사실
은 죽지 않고 어디엔가 은거해 있다느니 하는 등의 갖가지 루머들이
우리들의 입을 잠시도 쉬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틴페이의 [소녀] 는
당시엔 파격적인 에로물로서 대단한 히트를 기록했다. 물론 거기엔
그녀가 이소룡의 여인이라는 사실도 커다란 흥행 요소로 작용했겠지
만, 틴페이는 이소룡의 죽음과 결부돼 있다는 점에서, 내 기억 속에
늘 음지의 여인의 이미지로 남아있다). 그를 둘러싼 스캔들과 무용담
들은 지겹게 되풀이 되는 학교 생활을 잠시 잊게 만드는 일종의 청량
제였다. 말하자면 이소룡이란 존재는, 학교의 일상을 벗어나 기상천외
한 은밀한 통로 같은 것이었다. 우리들은 그 통로를 통하여 수시로
일상과 모험의 공간을 오고 갔다. 이소룡에 관한 모든 것을 찾아서
헤매던 날들. 난 이소룡에 관한 에피소드를 하나라도 더 알기 위해
[주간 국제], [주간 부산] 같은 가판대에 널려 있는 싸구려 잡지들을
뒤적였고, 이소룡, 로라 미야오, 마리아 리 등의 판넬 용 사진이 실려
있는 일본 잡지들을 사기 위해 세운상가와 중국대사관 앞을 헤매였
다. (끼끼, 그 정성으로 공부를 했다면 하버드는 갔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 내 관심은 온갖 키치적 풍경들에 쏠릴 수 밖에 없었다.
난 세운상가를 거닐며 포르노와 해적판 레코드를, 일본판 [스크
린]과 [로드쇼]를 보며 그 많은 외국 영화배우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또한 [화신 극장]과 [파고다 극장]을 드나들며 영화보기에 탐닉하기
시작했다. 그토록 열광했던 테렌스 힐의 [튜니티] 시리즈, 그리고 크
리스 밋참과 올리비아 핫세의 [섬머타임 킬러], [그레이트 후라이데
이]. 특히 그 시절 크리스 밋참과 올리비아 핫세의 인기는 대단한 것
이었다. [그레이트 후라이데이]는 날림 공사 같은 작품이었음에도 불
구하고 그들이 인기빨에 힘입어 20만 이상을 동원했다. 의미가 다소
모호했지만, 위대한 금요일은 너와 나의 D데이! 라는 선전 카피는 청
소년들 사이에서 유행어가 될 정도였다. 또한 그 당시 아이들은 손바
닥만한 크기의 영화 팜플렛을 모으는데 대단히 열을 올렸는데, 나도
예외는 아니어서 하나라도 더 팜플렛을 얻으려는 목적으로 부지런히
영화관과 코스모스 백화점 5층을 들락거렸다.(캔디스 버겐의 [솔저부
루] 같은 팜플렛은 너무도 희귀했기에, 찰스 브론슨의 [추방객] 팜플
렛 20장으로도 바꿀 수 없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수많은 영화 팜플
렛들과 영화에 관한 책자, 배우 사진들이 진열된 코스모스 백화점 5
층은 내겐 가슴 설레는 꿈의 공간이었다. 시커먼 교복의 우울과 시험
이라는 마음의 지옥을 잊기 위해 나는 무작정 버스를 탔고, 그 버스
가 말죽거리를 출발하여 그 꿈의 공간인 코스모스 백화점을 돌아 다
시 말죽거리에 도착할때까지 멍하니 차창 밖을 바라보곤 했다. 시험
을 죽 쑤는 그 순간에도 코스모스 백화점 5층의 불빛은 창 밖에서 희
망의 코스모스처럼 하늘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내 마음 속에 둥그렇
게 휘돌던 키치의 소용돌이, 그 한가운데에 언제나 이소룡이란 존재
가 버티고 있었다. 그러니까, 김현 선생이 말한 내 키치 중독의 시원
은 다름 아닌 이소룡이었던 것이다.
이소룡처럼 살고 싶다는 욕망, 아니 이소룡이 되고 싶다는 욕망.
과장되게 말하자면, 그 욕망이 내 교복의 나날을 견디게 해주었다. 난
그 국화빵의 시절을 이소룡 스타일에 대한 집념으로 통과해냈다. 교
복 상의에 차이나 의상처럼 콘티를 팠고, 체육복에도 이소룡의 노란
츄리닝처럼 양옆으로 줄무늬를 넣었으며, 어깨가 파진 런닝셔츠만을
입고 당당하게 신당동 떡볶이 골목을 활보했다. 그러다 교련 선생이
나 선배들에게 걸리면 대걸레 자루나 알루미늄 야구배트로 엉덩이에
시퍼런 멍이 들도록 흠씬 두들겨 맞곤 했다. (난 유난히 키가 컸던 까
닭에, 선배들에게 자주 시비의 대상이 되었다). 그럴 때마다 우우, 마
음 속으로 괴조음을 질러댔다.그 마음의 괴조음이 고통을 치유해 주
었다. 이소룡의 괴조음이 상대방의 의도 이전으로 파고 들어가 상대
방을 제압하듯, 내 마음의 괴조음 역시 상처 이전으로 날아가 상처를
무화시켜 주었다. 요컨대 이소룡의 괴조음은 당시의 나에겐 그 암울
한 날들을 이겨내기 위한 신비한 주문과도 같았다.
저녁 6시까지 계속되던 수업, 또 다시 과외공부 그리고 지도부가
서슬 퍼렇게 늘어서 있던 교문을 향해 헐레벌떡 달려가던 시간들. 난
자주 대학생 과외 선생의 옷에서 최루탄 냄새를 맡았다. 한 개인이
불행한 운명 쪽으로 어쩔 수 없이 미끌어져 들어가는 이소룡 영화의
느와르 noir적 분위기. 시대는 바야흐로 그 느와르 영화의 분위기를
닮아 있었다. 마침내 박통은 죽었고, 내 수학여행은 레퀴엠의 멜로디
로 가득 채워졌다. 느닷 없이 본고사는 폐지되었고, 그 덕분에 나는
극적으로(?)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그리고 붕붕거리던 한때의 유행가는 멈추었다. 나는 다시, 머뭇머
뭇 현실로 복귀한다. 창 밖으로 수많은 빌딩들이 낯선 풍경처럼 서있
고, 그 밑으로 사람들이 느리게 지나간다. 무심한 세상의 저편으로 표
정을 버리고 떠밀려가는 것들. 한바탕 추억의 소란함이 지나간 후의
마음은 한없이 적요하다. 문득, 지난날 그 유행가들을 함께 불렀던 친
구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들은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갑자
기 웃음이 삐져 나온다. 그들에게 아직도 이소룡처럼 런닝셔츠를 입
고 거릴 활보할 수 있는 용기가 남아있을까. 삼류 극장 필름처럼 끊
겨버린 한강 다리의 세월 앞에서, 그 희망의 탄탄대로는 아직도 안녕
한가.
...현실 속의 내 모습을 바라본다. 나는 또 무엇에 대해 그렇게 열
광할 수 있을까? 열광? 허나 살아있음의 환희를 그토록 절실하게 찾
아헤매던 아침의 얼굴은, 이미 오래전에 빛 바랜 흑백사진으로 정지
되어 있다. 그렇다. 그 옛날의 꿈과 희망엔 어느덧 굳은 살이 박혔고,
예민함보단 둔감함을 찬양해야 할 시간이 나를 향해 흘러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내 눈은 벌써 미래를 추억하고 있다. 70년대를 구성하
고 있는 그 무수한 유행가의 기표들. 이소룡을 한 시절 삶의 기호로
택했던, 그리하여 그 한때라는 유한성의 절실함 속에 푸른 영혼을 두
고 온 사람들. 이제 모두를 사춘기의 열병과 음울한 시대의 절망을
견디게 하던 마음의 괴조음을 뒤로 한 채, 생이 저물어 가는 쪽으로
천천히, 천천히 흘러 갈 것이다. 다만 아침의 태양에 대한 기억으로
오후 태양 빛의 밝기를 가늠하며.
흘러간 것은 생이 아니라 흘러간 생이다. 나는 흘러간 생을 통해
흘러갈 생을 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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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말죽거리잔혹사 중 권상우 명대사
특유의 발성으로
"대한민국 족구하라그래~~~~~~~~~~~"
그래서 내가 MT때마다 족구만 주구장창하나봐
영구스터디랑 스터디 대항 '족구' 한 번 차야되는데
내용이 넘 길어요. 띄어쓰기와 줄바꾸기좀 해쥬세여
PC에서 보면 정상적으로 보이는데, 폰으로보면 이상하게 나와. 원래 파일이 있기땜에 수정할려면 한줄마다 편집해야만됨. 시간날때 편안하게 PC로 감상바람....책 사서 보면 더 좋고.
PC로 보는데 "내용이 넘 길어요. 띄어쓰기와 줄바꾸기좀 해쥬세여 " 2
죄송...텍스트 파일과, 한글파일 첨부합니다...한글이나 오피스로 보심 좀 편할듯.
아래한글 파일 열어봤는데 정렬이 깨져있습니다.
띄어쓰기와 줄바꾸기좀 해쥬세여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