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요일(雨曜日)
최원현
nulsaem@hanmail.net
어려서는 빨리 자라서 어른이 되고 싶었다. 그런데 막상 어른이 되고 점점 나이를 먹게 되자 오히려 어린아이로 돌아가고 싶어진다. 아이들이 들으면 웃을 일이지만 요즘 가만히 내 마음을 되짚어 보면 분명 그런 것 같다.
오늘도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봄 밤길인데 차를 타려다 멈칫 서지더니 눈은 이내 내리는 비를 바라본다. 헌데 마음은 이미 결정이 되어 버린 것 같다. 스며들 곳을 찾지 못해 낮은 곳으로 몰려가는 빗물들이 아스팔트길을 넘쳐 신발 키를 넘보는 정도까지 이르렀는데도 작은 우산 하나로 머리만을 간신히 가린 나는 벌써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집까지는 네 정거장 거리다.
평상시 운동 삼아 걸어 다니는 빠른 걸음으로도 20여분이 걸린다. 그런데도 내리는 비를 바라보는 눈길이 심상치 않더니 마음과 한 통속이 되어 걸어가자고 짝짜꿍을 해버린 것이다. 가로등 불빛조차 내리는 빗줄기로 인해 제 기능을 다 발휘 못하는 어스름의 거리, 바지가 젖고 구두에 물이 좀 들어 간다기로서니 그게 뭐 그리 대수이던가. 마음을 정하니 기분도 한껏 밝아진다. 패인 곳에 고인 물도 겁내지 않고 성큼 성큼 내딛는 발걸음은 내리는 비보다도 더 신이 나 있다.
나는 이렇게 비가 쏟아지는 날엔 차를 몰고 빗속을 달리길 좋아한다. 그냥 벗은 몸으로 빗속을 달리고라도 싶은 마음이 쏟아지는 빗속으로 차를 몰고 가면서 대리 만족을 느끼는 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때로 일탈(逸脫)을 꿈꾼다. 다시 원래대로 돌아와 줄 수만 있다면 한 번쯤 완전히 망가져 보고 싶다는 생각도 한다. 틀에 박힌 듯 되풀이되는 일상 속에서 좀 비겁한 생각이긴 하지만 어떤 불가항력적인 힘이 나를 그 틀에서 잠시라도 벗어나게 해 주되 명예도 위신도 체면도 손상되지 않는 명분 있는 그런 일탈을 바란다.
어느 새 구두 속에까지 물이 들어왔다. 바지는 이미 젖어버렸고, 윗도리도 다 젖었다. 갑자기 우산도 던져버리고 싶은 충동이 인다. 그러나 아직도 체면의 틀을 완전히 깨지는 못한 것 같다. 옆으로 차들이 지나간다. 차안의 사람들은 이런 나를 보고 어떤 생각들을 할까? 고양이 한 마리가 어디서 나타났는지 쏜살같이 내 앞을 지나쳐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간다. 녀석은 비를 피하는 것인가, 비를 즐기는 것인가. 흠뻑 젖어보고 싶다는 생각, 내 힘으로는 현재라는 틀을 깨트릴 수 없기에 어떤 저항할 수 없는 큰 힘이 나로 하여금 그 틀에서 벗어나게 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바람, 나는 지금 나를 타락시키는 음모를 꾸미고 있는 셈이다.
중학교 1학년 때였던가. 뒷산 솔밭에 인접해 있는 우리 집에 또래들이 모였다. 억세게 비가 쏟아지는 한여름 밤. 우린 내리는 비를 바라보고 있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훌훌 옷들을 벗어 던지고 맨발로 마당으로 뛰어내렸다.
발에 느껴지는 젖은 땅의 감촉, 그리고 쏟아지는 비속에 온 몸을 내맡긴 채 비와 하나가 되는 느낌, 우린 이내 집 뒤 곁 소나무 숲으로 내달렸다. 빗물 냄새에 섞인 솔향이 코 속으로 스며들고 나무와 나무 사이를 산 짐승이라도 된 양 누비는 우리들은 이미 산과 나무와 비와 하나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렇게 짙은 어둠 속이건만 나무들의 형체를 어렴풋이 나마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보여서가 아니었다. 그러나 아무도 나무에 부딪혀 상처를 입거나 걸려 넘어지지 않았다.
하나가 되었다는 것은 서로 걸리적 대는 것이 없어졌다는 말이다. 우린 그렇게 빗속을 즐기다가 문득 출출하단 생각을 했다. 누군가의 입에서 "야! 고구마 서리하자!" 하는 말이 튀어나왔고, 우린 벌써 방향을 정해 저만큼 달려가고 있었다. 대답도, 목적지를 의논할 일도 없었다. 우린 아주 자연스럽게 늘 오가며 보았던 J네 밭으로 달려갔다.
아직 실한 고구마가 달릴 때가 아니다. 줄기는 그대로 놔둔 채 작은 둔덕을 손으로 파헤쳐 땅속의 실체를 확인하고 고것만 따내오는 것이다. 녀석들 고추만 하게 열린 고구마, 누군가 키들키들 웃기 시작했다. "야! 꼭 네 것만 하다!" 어둠 속의 목소리를 신호로 우리는 누구랄 것도 없이 또 한바탕 쿠쿠쿠쿠 웃어댔다. 별도로 손을 씻을 필요도 없는 우리는 그냥 내리는 비속에서 고구마와 손을 함께 씻어 한 입씩 베물었다. 아직 여린 고구마의 속살이 입 속에서 으깨어져 맛을 내고 있었다. 헌데 빗물 때문일까 고구마 맛이 왠지 짭질한 것 같다.
우리는 그렇게 빗속을 다시 뚫고 달려 도둑고양이처럼 살그머니 안 방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전혀 눈치 채지 못하시게 조심스레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옷을 입을 생각도 않고 비에 젖은 맨 몸으로 배를 깔고 모두 엎드려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았다. 방에서 새나간 불빛 속에서 빗줄기가 은어처럼 파닥대다가 힘에 부친 듯 떨어지고 있었다. 마당가 뽕나무와 감나무에 떨어지는 빗소리는 투두두두 투두두둑 대었고, 장독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는 뚜두두둑 둔탁한 소리를 내었다. 가져온 고구마를 입에 넣고 씹어대며 우리는 다시 빗속으로 뛰어나가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참고 있는 중이었다.
내리는 비를 맞으며 우산을 던져버리고 싶은 마음이 되는 것도 어쩌면 그 옛날로 돌아가고 싶다는 바람일 것 같다. 사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겹겹의 옷을 입고 있는가. 삶을 오래 살았다는 것은 그만큼 옷을 더 겹겹이 껴입었다는 것이 아닐까. 나를 감추기 위해서,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 나를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 필요 이상으로 옷을 입고, 그래도 불안하여 또 껴입고 했던 것이 아닐까. 그러나 비가 오면, 비를 맞으면 그 모든 것은 젖기 마련이다. 비에 젖는 것은 겉옷이고 속옷이고 상관없다. 시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젖는 것은 안이고 겉이고 다 젖기 마련이다. 겉만 젖었을 뿐, 속은 젖지 않았다고 한들 이미 젖어버린 것을 어떡하랴.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마저도 겉만 조금 젖었을 뿐이라고, 속은 젖지 않았다고 변명한다.
초등학교나 중학교 때의 친구를 만나면 마음이 편해지는 것도 이런 연유일 게다. 구태여 숨기고 감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어린 날은 태생의 근본인데 그 근본을 서로 다 아는 마당에서 맨살을 부딪히며 멱을 감고, 참외 서리, 고구마 서리를 하던 사이에 새삼스레 무엇을 감추고 숨길 일이 있겠는가. 그러니 거기서 무슨 체면을 찾으랴. 그래 죽마고우는 영원한 친구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리라. 그러나 어른이 되면서 젖는 것을 두려워했다. 아이들은 옷이 젖어도 상관없어 하나 어른들은 옷이 젖는 걸 몹시 두려워한다.
아이들은 속옷이 젖을까봐 걱정하나 어른들은 젖은 속옷을 입더라도 겉옷이 젖은 것은 숨기려 한다. 오늘은 우요일(雨曜日), 내리는 비를 맞으며 옷만 아니라 온 몸이 다 젖고, 마음까지도 젖고 싶다. 그렇게 일단 흠뻑 젖고 나면 조금만 비가 내려도 이내 속까지 스며들지 않겠는가. 느낌도 감정도 메말라 버린 내게 일주일 7일 중 한 날은 우요일로 하여 마음도 몸도 젖어보는 때를 누리고 싶다.
젖는다는 것은 나를 내놓는다는 것이리라. 자연과 하나가 된다는 말이리라. 가식과 위선을 벗고 순수로 돌아간다는 말이리라. 내 몸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교만과 아집의 때, 나를 두르고 있는 거짓스런 치장들을 훌훌 벗어버리고 저 어린 날처럼 빗속을 마구 달리고 싶다. 비를 맞는 것, 비에 젖는 것만으로도 마냥 즐거웠던 어린 날처럼 말이다. <에세이문학> 2002.여름호
2002년을 대표하는 문제수필<한국비평문학회>(한국문화사.2003)에 수필 <우요일> 선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