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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상4:1-22절) 법궤를 빼앗긴 이스라엘 자신의 몸에 이상을 느낀 어느 사람이 병원(病院)에 찾아가 진찰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진찰(診察)결과 *상당히 좋지 않은 중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삶의 중대한 기로(岐路)에 섰다는 것을 인식하고, 큰 위기를 느꼈습니다. 그는 병을 인정하지 않고, 그냥 그대로 살다가 죽느냐?
아니면 다른 일들을 포기하고, 투병(鬪病)을 하느냐? 에 선택을 해야 합니다. 물론 누군가 마술(魔術)을 부려서 한 순간에 병을 낫게 해 주면 좋겠지만, 이 세상에 그런 마술(魔術)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앙 자체를 마술(魔術)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즉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한 순간에 모든 안개가 걷히듯 어려움이 다 해결되고, 하나님의 축복(祝福)이 쏟아지는 줄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마술(魔術)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祝福)을 받지만, 먼저는 우리의 모든 병든 부분들을 다 수술로 치료부터 받아야 합니다. 사무엘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중병(重病)에 걸려 있었습니다. 제사장부터 썩어 있으니까 나라 전체가 얼마나 깊이 병들었는지, 짐작할 수 없었습니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무엘의 설교를 듣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신 분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법궤(法櫃)를 앞세우고 전진할 때, 그들 앞에서 요단강이 갈라지고, 여리고 성(城)이 무너졌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가르고 여리고 성(城)을 무너뜨릴 때는 영적(靈的)으로 건강할 때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영적(靈的)으로 깊이 병들어 있는 상태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치료받을 생각은 하지 않고, 과거를 흉내 내면서 법궤(法櫃)를 앞세우고, 블레셋과 싸우려고 했던 것입니다. 결국 이 전쟁에서 엄청난 패배를 당하고, 법궤를 빼앗기게 됩니다. 또 엘리 집안의 삼부자(三父子)는 하루 만에 다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즉 범죄(犯罪)한 제사장 홉니와 비느하스가 전쟁터에서 죽고, 그 소식을 들은 부친(父親) 엘리 제사장은 의자에서 넘어지면서 목이 부러져 죽고, 또 비느하스의 부인(婦人)은 해산(解産)을 하면서 아들을 낳고 죽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정결(淨潔)하지 않을 때, 하나님이 원수(怨讐)의 손을 빌어 죄인들을 심판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능력을 발휘할 줄 알았던 하나님의 법궤는 아무런 효력이 없었고, 그 마저도 적(敵)들인 블레셋 사람들에게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Ⅰ.사무엘의 설교의 영향 4:1절)사무엘의 말이 온 이스라엘에 전파 되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분의 말씀을 듣지 못하면, 전혀 힘을 쓸 수 없게 되고, 죄를 지으면서도 그것이 죄인 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거의 없던 그때,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 사무엘의 설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큰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 말씀의 능력을 믿는 자들이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전까지는 사사(士師)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려움이 생길 때마다 직접 몸으로 적(敵)과 싸워서 해결했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은 말씀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일깨워서 스스로 일어서게 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삼손 같은 사사(士師)는 설교자가 아니었습니다. 삼손은 자기 힘을 가지고, 블레셋 사람들을 죽이고, 두들겨 부수는 행동파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너무나 깊이 병들어 있을 때,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임시 처방전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너무나 병들었을 때는 붙들고 말씀을 가르치는 것보다는 병원에 데리고 가는 것이 훨씬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능력은 말씀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天地)를 창조하셨고, 말씀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힘을 주셨습니다. 신8:3절)...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만 전하고, 듣는, 것만으로는 무언가 부족하다고 느끼고, 무언가 피부에 와 닿는 일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들이 힘을 잃고, 쓰러지는 것은 말씀을 듣지 못해서 그런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암8:11-13절)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요.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돌아다녀도 얻지 못하리니.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쓰러지리라”
하나님의 말씀만 제대로 증거 되면, 성도들이 그 말씀을 듣고, 지혜와 믿음을 얻어서 어떤 어려움도 다 해결하게 됩니다. 사무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시작했을 때, 그 말씀이 온 이스라엘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역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무리 타락(墮落)했어도 영적(靈的)으로 들을 귀는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백성들의 귀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면, 일단 그들은 소생(甦生)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성급하게 서두른 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면, 당장 블레셋 사람들이 물러가고, 하나님의 축복(祝福)이 임하는 줄 생각하고, 블레셋 사람들과 전쟁하기로 합니다.
지금까지 그들은 전혀 블레셋과 싸우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만 해도 엄청난 발전이었습니다. 사무엘의 설교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엄청난 참패(慘敗)였습니다. 2절)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에 대하여 전열을 벌이니라 그 둘이 싸우다가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패하여 그들에게 전쟁에서 죽임을 당한 군사가 사천 명 가량이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곧바로 이기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이런 어려움을 통하여 그들 안에 있는 죄(罪)를 철저히 바로잡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려 4천명이나 되는 전사자(戰死者)를 내는 패배(敗北)를 경험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려움을 주실 때, 너무나 쉽게 그것을 없애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어려움만 없애주면, 금방 또 원래 상태로 되돌아가 다시 죄를 짓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어려움을 통하여 우리를 철저히 회개시키고, 바로잡아 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너무나 서두르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마치 수술을 받을 때, 의사(醫師)에게 자신을 맡기듯, 하나님을 신뢰(信賴)하고, 그분께 모든 것을 맡겨야 합니다. 그러면 좀 시간이 걸리더라도 완전히 치료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장로(長老)들은 분명히 믿음으로 이 전쟁을 시작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패배(敗北)의 원인에 대해 고민하게 됩니다. 그들은 사무엘의 설교를 듣고, 은혜를 얻었고, 그 힘으로 블레셋과 싸웠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전쟁에 이길 수 없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3절)백성이 진영으로 돌아오매 이스라엘 장로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에게 오늘 블레셋 사람들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하니”
이럴 때, 우리는 크게 낙심하게 됩니다. 나름대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여 결단하고, 일을 시작했는데, 그 결과가 실패로 나타나게 될 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뿌리 채 흔들리게 됩니다.
우리는 이런 일을 생각보다 많이 경험하게 됩니다. 즉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여 자신만만하게 시험(試驗)을 쳤는데, 불합격(不合格)했다든지, 혹은 청혼(請婚)을 했는데, 거절을 당한다든지, 이보다 더 비참한 일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도대체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잘못 안 것일까? 아니면 하나님이 왜 가만히 계시는 것일까? 낙심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장로(長老)들은 한번 실패했다고 포기하지 않고, 실로에 있는 법궤(法櫃)를 가져 오면,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하시는 것이 되니까 능히 블레셋 사람들을 이길 수 있을 것이라는 기발(奇拔)한 발상(發想)을 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믿음으로 시작했는데, 결과가 좋지 않았다면, 거기에는 분명히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이유가 있으므로 반드시 그것을 하나님께 이렇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주여!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호수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믿음으로 아이 성(城)을 공격했는데, 패배(敗北)했습니다. 그때 그들은 하나님께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들 안에 숨은 죄(罪)가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억지로 법궤(法櫃)를 가져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줄 알았습니다. 우리가 가진 신앙은 *도깨비 방망이*가 아닙니다. 즉 *돈 나오라*고 하면 돈이 나오고, *집(아파트)나오라*고 하면 집(아파트)이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께 물어보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했지만, 좋지 않은 결과가 나왔는데, *이제 어떻게 하면 좋겠냐?* 고, 구(求)했더라면, 하나님은 분명히 해결 방법을 가르쳐 주셨을 것입니다. 성경은 법궤(法櫃)를 설명할 때, 삼상4:4절)...그룹 사이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의 언약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언약궤 위에 날개를 펴고 있는 그룹 천사의 상(像)이 있기 때문입니다. 천사들 중에서 그룹 천사가 하는 일은 죄인들의 접근을 막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죄인들은 함부로 하나님께 나아올 생각을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5- Ⅱ.이스라엘 백성들의 패배 이스라엘 백성들은 과거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법궤를 앞세우고 여리고 성(城)을 돌았을 때, 여리고 성(城)이 무너진 것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궤(軌)가 이스라엘 진중(陣中)에 왔을 때, 승리를 확신했습니다.
얼마나 큰 소리로 부르짖었든지, 블레셋 진(陣)에서도 그 소리가 들릴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스라엘 진(陣)에 하나님의 궤(軌)가 왔다는 소문을 듣고, 두려워하던 블레셋 사람들이 금방 정신을 차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들은 *노예가 되느니 죽도록 싸우자*면서 서로 독려(督勵)하며 용기를 냈고, 그 바람에 오히려 전쟁에서 이기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법궤(法櫃)를 전쟁터에 가지고 갔을 때, 세 가지 효과를 만들어 냈습니다.
①전쟁과 상관이 없던 엘리의 두 아들(홉니와 비느하스)이 어쩔 수 없이 법궤를 따라 전쟁터로 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법궤가 전쟁터에 오면서 자연스럽게 그들도 전쟁터에 있게 되었고, 결국 같은 날 죽임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즉 법궤가 엘리의 두 아들(홉니와 비느하스)을 전쟁터로 끌어내는 역할을 한 셈입니다. ②이스라엘 백성들은 대단히 용기 있게 만들었습니다. 5절)여호와의 언약궤가 진영에 들어올 때에 온 이스라엘이 큰 소리로 외치매 땅이 울린지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전쟁터에 오셨기 때문에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일시적 최면(催眠) 효과에 불과했습니다.
기도가 최면(催眠)효과를 가져 올 때가 있습니다. 같은 말로 자꾸만 반복해서 기도 하다보면, 어느새 자기 최면(催眠)에 걸려 기도가 응답이 된 것 같은 확신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 확신이지, 실제는 아닌 것입니다. 자기 최면(催眠)이 효과를 갖는 경우는 아슬아슬한 차이가 날 경우뿐입니다. 실력 차이가 많이 나는 경우는 최면(催眠)으로는 통하지 않습니다. 즉 제대로 임자를 만난 경우, 이런 것은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③블레셋 사람들의 진의(眞義)를 불태우게 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함치는 소리를 듣고, 놀랐고, 여호와의 궤(軌)로 인해 두려워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직까지 출애굽 당시 하나님의 능력과 기적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7-8절)블레셋 사람이 두려워하여 이르되 신이 진영에 이르렀도다. 하고 또 이르되 우리에게 화로다 전날에는 이런 일이 없었도다. 우리에게 화로다 누가 우리를 이 능한 신들의 손에서 건지리요. 그들은 광야에서 여러 가지 재앙으로 애굽인을 친 신들이니라”
블레셋 사람들은 과거에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는지를 희미하게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너무나도 두려워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약(藥)효과가 떨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을 보고,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가 되었지만, 곧 그들은 정신을 차리게 됩니다. 오히려 더 단결해서 끝까지 싸울 마음을 갖게 됩니다. 9절)너희 블레셋 사람들아 강하게 되며 대장부가 되라. 너희가 히브리 사람의 종이 되기를 그들이 너희의 종이 되었던 것 같이 되지 말고. 대장부같이 되어 싸우라 하고”
결국 진정한 하나님의 능력도 없이 법궤(法櫃)만 가져왔을 때, 그 효과는 일시적인 최면(催眠)효과 밖에 되지 못했습니다. 10-11절)블레셋 사람들이 쳤더니 이스라엘이 패하여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였고 살육이 심히 커서 이스라엘 보병의 엎드러진 자가 삼만 명이었으며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 홈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하였더라.” 우리는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을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켜 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罪)를 지었을 때,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이 먹칠을 당하는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심판(審判)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법궤(法櫃)를 믿었기에 더 큰 패배(敗北)를 경험했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 가지 비참한 전과(戰果)를 올렸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①보병 3만 명이 죽임당한 것과 ②법궤를 빼앗긴 것과 ③두 제사장 홉니와 비느하스가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이것을 볼 때, 하나님은 절대로 사람에게 이용당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 생각과 열심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끌어 낼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를 끌어낼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회개(悔改)와 겸손(謙遜)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중요하게 보시는 것은 종교적 열심히 아닌, 죄(罪)를 회개(悔改)하고, 하나님께 복종(服從)하는 겸순(兼旬)입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차이를 분별하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衆心)을 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죄를 회개하지 않고, 법궤(法櫃)를 가져왔을 때, 그것은 우상(偶像)밖에 되지 못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는 법궤(法櫃)가 아니라, 하나님께 회개(悔改)한 깨끗한 양심입니다. 나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철저한 순종(順從)도 없이. 마치 성전(聖殿)자체를 우상(偶像)시하다가 결국 예루살렘 성전파괴와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는 비극의 결과를 얻게 됩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順從)과 믿음입니다. 순종 없는 믿음은 허황된 미신(迷信)밖에 되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 기도(祈禱)를 미신적(迷信的)으로 할 수 있고, 봉사(奉事)도 미신적(迷信的)으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미신(迷信)으로는 가장 중요한 순간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죄를 자백(自白)하는 겸손(謙遜)이 승리하게 됩니다. 그것만이 하나님의 능력을 가져 오게 될 것입니다.
Ⅲ.이스라엘에 전해진 나쁜 소식 전쟁터에 하나님의 법궤(法櫃)를 보낸 엘리 제사장은 불안했습니다. 그 이유는 이미 하나님의 평안이 그의 마음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면, 어떤 절망적 상황에서도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불안(不安)을 이길 수 있는 힘을 계속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평안(平安)을 빼앗아 가시면, 그때는 나뭇잎이 떨어지는 소리에도 놀라게 됩니다.
계속 불안에 떨던 엘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전쟁(戰爭)에 지고 언약궤를 적군(敵軍)에게 빼앗겼다는 말을 들을 때, 갑자기 쓰러지면서 목이 부러져 죽었습니다. 12-13절)당일에 어떤 베냐민 사람이 진영에서 달려 나와 자기의 옷을 찢고. 자기의 머리에 티끌을 덮어쓰고. 실로에 이르니라. 그가 이를 때는 엘리가 길 옆 자기의 의자에 앉아 기다리며 그의 마음이 하나님의 궤로 말미암아 떨릴 즈음이라. 그 사람이 성읍에 들어오며 알리매 온 성읍이 부르짖는지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승리의 소식을 듣고 싶어 했습니다. 특히 이번 전쟁(戰爭)에는 여호와의 법궤(法櫃)는 출동(出動)했기 때문에 그들은 분명히 승리할 줄 믿었습니다. 그러나 소식을 전하는 사람은 이스라엘의 대패(大敗)를 알렸습니다.
그러니까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부르짖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진작 울었어야 합니다. 그들이 성전(聖殿)이 두 악(惡)한 제사장에 의해 더럽혀지고, 그들의 신앙이 추락(墜落)하기 시작했을 때, 회개(悔改)하며, 울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울어야 할 때, 울지 않으니까 나중에 진짜 비통(悲痛)한 눈물을 흘리게 된 것입니다.
어떤 분은 자신의 신앙이 바닥을 헤맬 때, 울어야 하는데, 울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수입(收入)은 줄어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더 큰 소리를 치고 다닙니다. 그러다가 구입한 주식(株式)가격이 폭락(暴落)하여 완전히 알거지가 되었을 때, 비통한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나 미리 눈물을 흘리고, 미리 하나님 앞에 겸손해져야 합니다. 그러면 어떤 일이 닥쳐도 놀라지 않습니다. 죄에 민감(敏感)한 사람은 세상의 좋지 않은 소문이 들려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만 두려워하면, 다른 것들은 두렵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다른 것들이 그를 두렵게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치실 때, 무식(無識)하고, 모르니까 치십니다.
그래서 어려운 환난이 닥칠 때, 여러 가지가 한꺼번에 동시에 밀어닥칠 때가 있습니다. 즉 회사에 불이 났는데, 시아버지까지 중풍(中風)으로 쓰러지고, 자녀까지 학교 시험에서 떨어져 버립니다. 이럴 때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습니다.
엘리는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소리를 듣고, 그것이 무슨 뜻인지 몰랐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나이가 98세여서 눈이 어두워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진(陣)에서 도망쳐 나온 사람이 모든 사실을 그대로 보고했습니다.
그의 소식은 이스라엘의 패배(敗北)와, 홉니와 비느하스의 죽음과, 여호와의 궤(軌)를 빼앗겼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대단히 정확한 보고였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어날 수 있는 최악(最惡)의 경우가 모두 다 일어난 것입니다.
이스라엘 비극(悲劇)과, 가정의 비극(悲劇)과, 신앙적 비극(悲劇)이었습니다. 이런 것을 두고 *망(亡)해도 철저하게 망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비극(悲劇)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엘리가 그 자리에서 넘어져 목이 부러져 죽은 것입니다. 그리고 비느하스의 부인(婦人)이 마침 그 시간에 산통(産痛)을 하다가 난산(難産)해서 죽었습니다.
시부의 죽음과 남편의 죽음과 하나님의 궤(軌)를 빼앗겼다는 소식을 듣고, 죽으면서 그는 아이의 이름을 이가봇이라고 지었습니다. 그 뜻은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을 떠났다*는 뜻입니다. 즉 이제 소망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영광을 짓밟은 엘리의 집을 철저하게 복수(復讐)하셨습니다. 단 하루 만에 네 명이나 죽었습니다. 그들 때문에 이스라엘도 망(亡)하고, 하나님의 궤(軌)도 빼앗겼습니다. 나중에는 성막(聖幕)도 불타게 됩니다.
이것을 보면, 제사장이 자기의 직분(職分)을 지키지 않고, 타락(墮落)한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가를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시기 때문에 죄인(罪人)들은 하나님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거룩한 백성들을 세우셔서 하나님의 진노(震怒)를 감당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이들이 하나님이 주신 직분(職分)을 우습게 알고, 정욕(情慾)으로 타락(墮落)시켰을 때, 온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심판(審判)이 임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제사장 두 명의 타락(墮落)이 이스라엘 백성들 4천명과 그 후에 3만 명을 죽게 한 것입니다. 엘리는 하나님보다 자기 두 아들들을 더 아끼다가 결국 목이 부러져 죽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한꺼번에 몰아서 주시기 때문에 이때, 살 길은 단 하나 밖에 없습니다. 평소에 들었던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나면, 사는 것이고, 자기가 잘못한 것이 생각나 후회하면, 죽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빛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운명(運命)을 가르게 되는데, 이미 엘리의 집에는 빛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이의 이름을 *끝장났다*고 지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는 빛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무엘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기 때문입니다. 끝난 것은 하나님의 경고의 메시지)message)를 듣고도 울지 않던 자들뿐입니다.
Ⅳ.하나님의 궤가 빼앗긴 것이 의미 22절)또 이르기를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으므로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였더라.” 하나님의 궤(軌)를 빼앗긴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것은 하나님의 패배(敗北)가 아니라, 하나님의 성전(聖殿)청결입니다. 이스라엘의 제사장과 백성들이 하나님의 성전(聖殿)을 더럽히자, 하나님이 악(惡)의 세력(勢力)을 불러 들여서 제사장을 숙청(肅淸)하시고 성전(聖殿)을 불태우게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궤(軌)를 이방인의 손에 들어가게 한 것은 하나님의 궤(軌)의 수난입니다. 이제 그들은 하나님의 궤(軌)가 없기 때문에 공식적 예배를 드릴 수 없게 됩니다. 이것을 *교회의 바벨론 유수(流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교회가 악(惡)의 지배 이래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배를 더럽히자, 하나님은 이방인의 손을 빌어서 성전과 제사장을 치셨습니다. 무엇 때문에 이스라엘 군인(軍人)들이 수없이 죽고, 무엇 때문에 하나님의 궤(軌)를 빼앗겨야 합니까? 엘리와 홉니와 비느하스 같은 제사장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죽이기 위해 법궤(法櫃)를 전쟁터에 갖고 오게 했고, 전쟁에서 지게 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즉 제사장이 스스로 회개하지 않으면, 이스라엘은 엄청난 희생(犠牲)을 치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때, 하나님은 교회를 로마 제국이라는 용광로(鎔鑛爐)에 넣어 연단(練鍛)하셨습니다. 즉 공식적으로 열 번의 대 핍박이 있었고, 성도들을 불에 태워 죽이기도 했고, 짐승의 밥이 되게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시련(試鍊)을 거쳤기에 교회는 그 후 2천년을 견디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패배(敗北)하지 않으십니다. 단지 말씀을 버린 교회를 버리실 뿐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교회를 떠나지 않으시도록 정결해야 합니다. 또 깨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것은 모두 다 양보해도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언제나 여호와의 빛이 우리와 함께하실 것이요, 이가봇이라는 말이 우리 입에서 완전히 없어질 것입니다.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이가봇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쟁(戰爭)에서 졌을 때가 아니라,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제사를 짓밟을 때, 이미 떠났습니다.
전쟁에서 패배하고, 법궤를 빼앗긴 것은 그들의 영적 중병(重病)을 확인시켜 주는 과정에 불과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讀者)여러분,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을 이용(利用)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그 대신 철저하게 죄(罪)를 자복(自服)하고 깨끗한 믿음의 양심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찬송가 279장 *인애하신 구세주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