牟山里
모산리는 대지면의 중앙부로 대지면사무소와 우체국, 지서, 농협 등이 있는 소재지 마을이다. 마을의 서쪽으로 좀 떨어져서(석리구역) 대지국민학교도 있다. 마을의 뒷산이 부리산(浮鯉山)이라 불리는데 이것은 산의 형상이 잉어형국이라 하는 데서 나왔다. 산위에 붕어바우(浮魚山)가 있어 부리뫼라 하였다고도 한다. 그러나 이 산의 바위보다 보리바우라 불리는 바위가 마을의 서편 대지국민학교 쪽에 있는데 바위들의 생김새가 작으마하면서도 수 십개가 밀집되어 있어 꼭 보리알과 같이 통실통실하여 사람들이 보리방우라 부른다 한다.
이 보리바우, 부리산, 또는 보리방우(麥岩)가 있는 마을이라 하여 맥산(麥山)이라 한자로 기사된 것이라 한다. 이 보리방우 일대에는 소(沼)가 있었다 하여 예전에 토평천의 물길이 이 근처로 흘렀음을 알 수 있게 한다.
당초에 [麥山]이라 썼던 것을 일제시에 [牟山]으로 개칭했다 하나 [호구총수]에 [牟山村]으로 기록되어 있음을 보아 모산으로 쓰인 것이 오래된 일임을 알 수 있다. [麥]이나 [牟]는 그 훈이 보리이니 그 뜻은 변함이 없다.
행정리로는 모산과 원동 2개리가 있다.
** 모산(牟山)
대지면의 면사무소 소재지로 보리미의 행정 리명이다. 창녕 성씨의 세거지이다.
** 보리미(모산)
보리뫼, 부리뫼라고도 불리는데 한자로는 모산외에 맥산(麥山)으로 쓰기도 한다. 따라서 보리(麥)알 같이 생긴 바위, 산에서 마을이름이 왔다고 하겠다.
마을 뒤에 부리산 또는 맥산이라 불리는 산이 있는데 여기에 창녕 성씨의 시조묘가 있고 맥산재(麥山齋 ; 성씨대종재)가 있다.
** 큰 서재
맥산재가 큰 재실이므로 마을에서는 큰서재라 부르니 이 근방의 지명이 되었다.
** 빗집걸
모산 마을 입구의 거리로 구마고속도로 서편에 비각집이 있는 거리이다.
이곳 비는 창녕 성씨의 시조 성인보(成仁輔)의 신도비(神道碑)로 비문은 현감 이파(李坡)가 썼다. 이 비문의 내용에는 그의 아들 성송국의 효성과 부시천리(負屍千里)가 적혀 있다.
고려말 성씨의 시조가 된 성인보가 증윤호장으로 송경(松京 : 개성)에 갔다가 거기서 득병하여 사망하였다. 그때 문하시중이었던 그의 아들 성송국이 효성이 지극하여,
"내가 아버지 시체를 지고 고향까지 모시어 안장함이 자식의 도리를 하하는 것이라."하고 나무로 질 것을 만들어 등에 지고서 개성에서 창녕으로 왔다 한다.
천리 길을 나선지 여러 날만에 지금의 대지면 초입인 시추말리(西靑)에 있었던 청산원에 당도하니 해가 저물었다. 처마밑에 시체를 안치하고 하룻밤을 자게 되었는데 밤새 눈이 내렸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이게 웬일인가? 시체가 없어졌는데 호랑이가 물러 간 모양으로로 발자국이 있었다. 눈위에 발자국을 따라가 보니 지금의 맥산으로 시체가 있는 자리가 과연 명당이라 호랑이(산신령)가 아들의 효성에 감복하여 명지를 지목하여 주었던 것이다. 성송국은 하늘이 주신 아버지의 유택(幽宅)이라 믿고 묘를 썼다 전한다.
** 원동(院洞)
모산리의 북쪽으로 원동, 원골, 옥산 등 여러 마을의 행정리 명칭이다. 가구수는 26호로 창녕 성씨가 많이 살고 있다,
원동은 모산의 동북쪽 마을로 물계서원의 동편이라 한마을과 다름없으므로 원동이라 불리었다. 마을 뒤 북쪽에 원동지(院洞池0가 있으며 마을 앞으로 구마고속도로가 지나간다.
합곡재(合谷齋 : 성대극 강학 봉선소)가 있다.
* 원골(院谷)
모산의 북쪽 골짜기안에 있는 마을로 전에 물계서원이 있었던 마을이라 전하며 그래서 원골이라 부른다. 이 골짜기 마을은 원동의 왼쪽인데 이 원골에 조선 중엽에 8문장 9부자가 살았으며, 현재의 원동에는 그 하인들이 살았다고 전하다.
물계서원(勿溪書院)이 있었는데 이 서원을 숙종 때 세워진 서원으로 고종때 철폐되고 그 유지(遺地)에 물계정(勿溪亭)만이 남아 있었는데 국가 지원을 받아 성씨 문중의 주체로 복원 사업이 한창 진행중에 있다.
** 물계서원
물계서원은 성씨 팔현(八賢)이라 일컫는 성씨문중의 대표적 인물들을 배향한 곳으로 숙종 38년(1712년)에 세워졌다.
배향인물(配享人物)은 고려시중(高麗侍中) 성송국(成松國), 문춘공(文忠公) 성삼문(成三問), 문정공(文貞公) 성담수(成聃壽), 정숙공(靖肅公) 성추침(成守琛), 문정공 성 운(成運), 증좌승지(贈左承旨) 성제원(成悌元), , 문정공(文靖公) 성윤해(成允諧), 문간공(文簡公) 성 혼(成渾) 등 팔현(八賢)이었으며, 그후 추배(追配 ; 正祖 ; 1797년)하여 직제학(直提學) 성사재(成思齋), 도총관 (都總管) 성 승(成勝), 처사(處士) 성수종, 순조때 추배향하여 문정공 성여완, 증도승지 성희, 증병판 성수경, 증공판 성람, 증이판 성준, 처사 성여신, 증이판 성안의, 직제학 성준득등이었다.
물계서원은 고종때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거 문을 닫다 물계정으로 개편하여 오다가 최근 복원 공사를 진행중이다.
[창녕현읍지]의 물계서원에 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勿溪書院 在縣西十里 成氏八賢 高麗侍中成松國 贈吏曺判書諡文忠公成三門
贈右議政諡文貞公成聃壽 贈右議政諡靖肅成守琛 諡文貞公成運 贈左承旨成梯元
贈左議政成允諧諡文靖公 成運諡文簡 異忠孝道學節介 肅宗壬辰合享八賢
成思齊官至寶文閣直提學 成勝官至道總管成守琮學識高明孝友天至 以忠孝道
學節介 正宗丁巳追配 成汝完官至僉書密直政堂文學贈昌寧府院君諡文靖 成熺
贈道承至 成守慶贈兵曹判書 成람贈工曺判書 成濬贈吏曹判書 成汝信孝行文
章著世 成安義贈吏曹判書 以忠孝道學節介 當저甲戌追配 未 賜額
물계서원 재현서십리 성씨팔현 고려시중성송국 증이조판서시문충공성삼문
증우의정시정공성담수 증우의정시정숙성수침 시문정공성운 증좌승지성제원
증좌의정성윤해시문정공 성운시문간 이충효도학절개 숙종임진합향팔현
성사제관지보문각직제학 성승관지도총관성수종학식고명효우천지 이충효도
학절개 정종정사추배 성여완관지첨서밀직정당문학증창녕부원군시문정 성희
증도승지 성수경증병조판서 성람증공조판서 성준증이조판서 성여신효행문
장저세 성안의이조판서 이효도학절개 당저갑술추배 미 사액
** 효자문걸
원동 남쪽에 성씨 효자문이 있는 거리이다. 이 효자문은 성송옥효자문이다.
** 열녀문걸
원동 남쪽으로 열녀 정문이 있는 거리이므로 열녀문 걸이다 한다. 이곳은 손씨 열녀문으로 성효열의 처 월성 손씨가 남편이 일찌기 전사하였음에도 시부모를 매우 지성으로 섬겼는데 외아들이 죽자 자결하였다 한다. 나라에서 알고 정문을 내렸다.
** 비각걸
원동 입구 구마고속도로 바로 아래에 있는 비각으로 고려 말 두문동에 은거한 성사재의 신도비가 있는 거리이다.바로 동쪽에 왕미 마을이 있다.
** 옥산(玉山)
모산의 북쪽으로 뒷산이 옥산이라 불리는 그 아래의 마을이므로 역시 옥산이라 한다.
부리재(浮鯉齋 ; 성씨 강학소, 現無) 가 있었으며, 옥산재(玉山齋: 창녕성씨 봉선소)가 있다.
** 시추말리(西靑萬里)
청산원이 이곳의 동쪽에 있었는데 지금의 고암면 원촌리 어은동 북쪽 등성이라가 그 자리라 한다. 이 청산원은 고려 때 성송국이 그 아버지의 시체를 매고 개성에서 천리를 와서 머물렀다는 곳이다. 당초에는 청산원의 서쪽 마을이란 뜻으로 서청(西靑) 마을로 불리었을 것이나 이것이 시청말 - 서청말리 - 시추말리로 변한 것이다. 풍수지리설에 의탁하여 소가 침을 흘린 곳이라하여 [쇠(牛) 춤(침의 이곳 지방말) 마을]이라 한 것이 시춤말리가 되었다고도 한다.
시추말리는 대지면, 고암면, 대합면 등 3개면이 만나는 곳으로 동편에 마구선이 지나간다.
구전되는 것과는 달리 이곳에 있었던 원은 경산원으로 [창녕현 읍지] 에 [京山院 在縣北九里今無]라 기록되어 있다.
** 맥산(麥山)
모산 마을의 북쪽 뒷산으로 창녕 성씨의 시조 산소가 있는 산으로 붕어방우(浮魚岩)가 있어 부리 - 보리로 변하여 보리방우산 - 맥산으로기사된 것이다.
이 산을 잉어 생김새와 같다하여 부리산(浮鯉山)이라 부르기도 하며 동쪽 산쪽을 잉어머리라 하여 어두산이라고도 한다.
**어두산 (魚頭山)
맥산의 동쪽 산머리를 어머리, 어두산이라 부른다. 이것은 토평천 물이 이 벼랑에 부딪치는데 산이 잉어 형국이라 잉어 머리 부분에 물이 있으니 성씨들이 잘 살게 된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이 산이 8대 명산에 들어 가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한다.
잉어가 여기서 물을 얻었으므로 머리가 되며, 여기에서 잉어가 구비치며 힘을 썼다고 하는 명지이다.
이 산으 동쪽 일대의 들을 어머리들이라 부른다.
** 옥산
모산리의 북쪽에 있는 산으로 구슬과 같이 둥글게 생겼으므로 옥산이라 부른다.
** 합곡재(合谷峴)
원동북쪽에 있는 산을 합곡재라 부른다.
** 보리방우(麥岩)
모산 마을 서편 대지국민학교 옆 석리 구역에 마치 보리알 처럼 둥글납작한 바위들이 산비탈에 수 십개가 있는데 이를 보리방우라 한다. 이 외에 맥산에도 부리바우가 있는데 부리가 보리로 변하였으니 보리방우는 맥산과 관계가 깊다 하기도 한다.
** 어무고개
원동에서 모산으로 넘어오는 고개를 말한다.
** 원고개
모산에서 창녕으로 가는 고개로 창녕의 북쪽 입구이다.
** 들과 보(洑)
*배미보 - 배비보라 하기도 하는데, 보리미 남쪽에 있는 논에 물을 대는 보를 배미보라 부른다.
*중보(中洑) - 배미보의 서쪽에 있는 보를 중보라 부른다.
새보 - 보리미 북쪽에 있는 보인데 왕산, 옥산, 김천 앞의 들에 물을 댄다.
*맥산보 - 보리미 어두산 동쪽에서 시발하여 부락 중앙을 관통해서 석동 앞들 16만평의 논에 물을 대는 보이다.